소설리스트

7. 저마다의 한 걸음 (8/29)

7. 저마다의 한 걸음

이번만큼은 테고의 바람대로 일이 흘러갔다. 아이네가 황도에 도착한 날 저녁, 곧바로 황제의 칙서가 공작저로 도착했기 때문이다.

『아이네이스 베룸 공녀는 익일 본궁에 입궁하시오.』

황도에 위치한 공작저에 짐을 풀자마자였다.

건네받은 서신을 몇 번이고 곱씹어본 아이네가 집사장에게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익일’이라는 말에 ‘다음 날’이라는 뜻 말고 다른 게 있어요?”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뭐야, 혹시 데뷔탕트 여태 미뤘다고 벌주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

폐하와 아버지는 절친한 친우라고 했는데! 그리고 어릴 때는 진짜로 아팠는데!

그녀는 자신이 사교활동을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게 아니었다는 걸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했다. 말해봤자 믿어줄 사람 하나 없는 더러운 책 속 세상!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황궁으로 향하는 아이네의 표정이 시무룩했다.

“어쩐지 어젠 테고 경이랑 친구도 되고, 운수가 좋더라니.”

닷새나 일찍 도착했다. 그동안 마음의 고향인 황도에서 모처럼 오징어가 없는 식생활을 즐겨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도착한 다음 날 바로 입궁이라니.

물론 아이네는 그 와중에도 황궁을 구경할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다. 역시 제국의 황성은 뭐든지 크고 화려했다.

‘아, 이거였구나. 본궁의 대리석 바닥은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나도록 만들었다는 게!’

그렇게 그녀를 마중 나온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본궁에 한 발짝 내딛는 순간이었다.

딱 두 번 느껴봤어도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원작 시작 전과 시작 후가 갈리는 순간이.

이어서 아이네의 머릿속으로 희미하게만 존재하던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은 찬란하게 빛나기만 하는 황성 내부에서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

그녀가 서 있는 대리석 바닥을 분주히 달리는 군화들의 움직임. 그리고 그 위에 남겨진 검붉은 자국.

짧아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것만은 분명했다.

‘뭐야, 왜 갑자기 이런 장면이…….’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광경에 아이네는 잠시 발을 헛디뎠다. 시종장의 뒤를 따라가던 그녀의 몸이 비틀거리며 흔들렸다.

“으앗!”

그때, 하얗고 고운 손이 아이네의 어깨를 힘주어 감싸 안았다.

“아, 감사합니……. 어?”

“조심하세요, 영애. 바닥이 미끄러워요.”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타는 듯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뒤이어 아이네는 연한 다갈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굉장한 미인이라는 감상을 미처 느낄 새도 없었다.

그녀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또다시 ‘기억’들이 휙휙 지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네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이름이 기억났다.

“달리아…… 영애?”

다짜고짜 불린 이름에도 달리아는 그저 눈만 동그랗게 떴다.

“어머, 절 아시나요?”

몰랐는데요, 알았습니다.

원작 여주인 테고의 약혼자이자 악역 중 하나인 달리아 에펜베르크 후작 영애였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아이네는 그녀의 놀라운 미모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우와, 와! 어떻게 이렇게…….’

이미 조금 벌어진 턱이 더 아래로 떨어졌다.

테고도 그렇지만 어쩜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외모가 아이네의 취향인지 모를 노릇이다.

아주 큰 키가 아닌데도 곧은 자세 덕분에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겼다.

게다가 가늘고 긴 하얀 목이 고상했다.

“너, 너무 예쁘세요.”

아이네는 테고 앞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언니라는 말을 목구멍 깊숙이 삼켜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사소한 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 감사합니다. 귀여운 영애군요.”

예쁜 아몬드형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가 약간 아래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아이네의 리본이 잡혔다.

급하게 붙잡느라 그랬는지 리본이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어쩐지 바로잡아주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달리아는 잘 관리된 손으로 서슴없이 아이네의 리본을 향해 뻗었다.

“앗.”

“이건, 저 때문인 것 같으니까요.”

그렇게 옷매무새를 손수 다듬어 주고 나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떨어져 나갔다.

그러고는 여전히 멍한 표정의 아이네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강렬하고 매혹적인 미소에 아이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당신, 악역……이잖아요. 왜 이렇게 다정하고 멋있는 거죠?

맑고 청량감 넘치는 외모의 테고와 대비시키기 위해서일까.

악역 조연인 달리아 영애는 걸어 다니는 관능 그 자체였다. 한 떨기 붉은 장미를 그대로 의인화한 것 같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그녀에게선 갓 딴 듯한 장미 향까지 났다.

달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아이네의 얼굴이 저절로 붉게 변했다.

‘와, 저번에 내가 책빙의한 게 악역 영애 대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 아무도 몰라서 다행이다.’

족히 백 년은 이불킥할 흑역사가 될 뻔했지 뭐야.

‘내가 어떻게 달리아 영애를 대신하겠어.’

아이네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지난날, 악역에 빙의할 바에는 존재감이 공기인 공녀가 낫다던 발언을 바로 취소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악역이라면 빙의해도 그까짓 전개 따위 박살내버리면 되지! 테고와 약혼만 안 하면 되는걸.

혹시 원작의 영향력같은 게 있어서 약혼하게 된다고 해도 좋아하지만 않으면 그만이고.

나도 갖고 싶다, 저 얼굴. 저 분위기.

오뚝한 콧대에 살포시 찍힌 점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

“아이네이스 공녀님. 여기 계셨군요.”

혼자 안내하며 걸어가던 시종장이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그녀가 따라오지 않고 있는 걸 한참 지나서야 눈치챈 듯했다.

그리고 이름을 들은 달리아의 미소에 살짝 금이 갔다.

이 자가 침대 밖으로는 나오지도 못한다는 그 병약한 공녀라고?

“…….”

달리아의 시선이 한참 아래로 내려갔다.

거기엔 꼭 본인 같은 노란 병아리색 드레스를 입고 두 볼이 발그레해진 깜찍한 소녀가 있었다.

‘아니지, 올해 열아홉 성년이라고 들었으니 나보다 한 살 많겠구나.’

순수하고 스스럼없는 태도에 아닌 척 주위를 힐끔거리는 모습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때문에 곧 있을 데뷔탕트를 위해 상경한 지방 어딘가의 하급 귀족 영애인 줄 알았는데…….

‘역시 폐하의 그 제안엔 꿍꿍이가 있었군. 그럼 그렇지.’

늘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기대하고 실망하게 된다.

영민한 달리아의 머리는 베룸 공녀의 존재만으로 전후사정을 대강 파악해냈다.

그럼, 이렇게 이른 시간에 공녀와 마주치게 한 것도 전부 계산된 거였을까.

그러고 보니 오늘 마주친 이는 공녀뿐만이 아니었다. 제 뒤를 이어 들어간 리테루온 공작도 있었다.

스치듯 지나간 터라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진 못했지만.

애석하게도 달리아는 겨우 열여덟의 나이임에도 어설픈 우연은 믿지 않는 영애로 자라났다.

“공녀님이신 줄 모르고 결례를 저지른 점, 사죄드립니다.”

우아하게 치마 끝을 잡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까지 달리아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헤.”

결국, 아이네의 입에서 작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손사래를 쳤다.

“먼저 소개하지 않은 제 잘못이에요. 아이네이스 베룸입니다.”

아이네는 그러고도 무어라 더 말을 걸어보려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곁에 선 시종장이 재촉했다.

“폐하를 기다리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공녀님.”

“아…….”

마지막으로 서로 눈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던 와중, 아이네가 잠시 멈칫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달리아 영애의 결말은 어떻게 되더라?

영애와 마주치기 직전의 그 장면. 원작에 나왔던 반란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반란군의 입성을 도왔던 건…….

달리아 영애였다.

워낙 순식간에 받아들인 ‘기억’을 되짚어볼 새도 없이 그녀의 미모에 정신이 팔려서 깜박했다.

악역에게도 메인과 서브가 있다면 달리아 영애는 서브 악역이다.

아이네는 방금 엿본 기억과 알고 있던 정보를 찬찬히 조합해 보았다.

‘그러니까 테고랑 약혼해서 짝사랑을 하다가 나중에 여자란 걸 알고…….’

배신감에 흑화했다.

테고 본인은 물론 반강제로 약혼시킨 황제에게도 복수심을 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렇게 귀족 영애의 표본과 같은 달리아가 귀족 작위까지 몰수당한 뒤, 국외추방을 당할 운명이라는 거다.

‘이보세요, 작가님. 요즘은 이런 식으로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악녀 트렌드는 지나갔다고요.’

아, 하긴 이거 고전 로판이었지?

그리고 아이네는 자신이 달리아에 대해 떠올린 순간부터 설마, 설마 하던 가정까지 끄집어내었다.

『살았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는 결말』

그땐, 마지막까지 대립했던 최종 악역만 생각했었는데, 설마.

‘달리아 영애……. 나중에 죽었던 걸까?’

하긴 저렇게 고운 영애가 작위도 없이 국외추방까지 당한다면, 그 끝은 안 봐도 뻔했다.

멍하게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여 웃어준 달리아 영애의 얼굴이, 그리고 뒤돌아선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계속해서 아이네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 * *

“네? 여기서 기다리라고요?”

아까는 마치 그녀가 폐하를 기다리게 한다는 듯 눈치를 주더니!

겨우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할 거였으면 아까 그 달리아 영애와 이야기나 더 해보는 건데.

아이네는 제가 그녀에게 홀려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도 못했던 기억은 손쉽게 흘려보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다과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실 알현실 바로 옆의 응접실에서 대기하게 하는 것도 굉장한 특혜였다.

정부의 고위 각료들이나 시급한 사안을 알리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었다. 일반 알현객이라면 조금 더 떨어진 다른 응접실에서 대기해야 했다.

하지만 잔뜩 불퉁해진 아이네의 얼굴에 반백의 시종장은 자신이 크게 잘못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더불어 황제 폐하의 지시사항이 꽤나 이상했다.

‘반드시 공녀를 에펜베르크 영애와 마주치게끔 데리고 와야 한다. 둘이 인사 외에는 대화할 시간을 주지 말고. 알았지, 로버트?’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이신 거지.

그 바람에 자신이 처음 만난 공녀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과는 괜찮아요.”

배시시 미소 짓는 얼굴과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를 마주한 시종장은 부러 헛기침을 했다. 괜한 죄책감이 드는 걸 보니 빨리 알현실 밖으로 나가야 할 듯하다.

“크흠! 그, 그럼 다음 알현 차례가 될 때,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기름칠이 잘 된 문이 소리도 없이 닫혔다. 완전히 닫힌 걸 확인한 아이네의 몸이 소파 위로 허물어졌다.

반으로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닷새나 되는 여정이었다.

여독을 제대로 풀 시간도 없이 불려온 황궁에서 벌써 두 번이나 흘러들어온 ‘기억’의 흔적.

테고와 만났을 때처럼 기절한 건 아니어도 아이네의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푹신한 소파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차례가 되면 누군가는 와서 깨워주겠……으응.’

* * *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조용한 대리석 복도에 급하게 울려 퍼졌다. 사실 황태자 아르비드는 어젯밤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부터 좀 이상했다.

“아르비드. 리테루온 공작에게 베룸 공녀가 황태자비에 적합한지 판단해오라고 했으니 그런 줄 알거라.”

“……예?”

듣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혼사만은 오롯이 자신에게 맡기겠다고 약조하셨는데.

“아니, 이렇게 말하니 오해의 소지가 있군.”

무심하게 서류에 도장을 찍던 황제가 돌연 이마를 짚었다.

“니엘의 마음에 차려면 공녀의 짝으로는 너나 테고뿐인데, 네놈은 베룸 공녀가 싫다고 하지 않았느냐.”

“…….”

정확히 말해서 베룸 공녀가 싫다기보단 누군지도 모르는 영애와 약혼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르비드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놈 성격에 베룸 공녀와 좀 만나보라고 하면 도망갈 게 뻔하니, 네 핑계를 좀 댔지.”

“적당히 말을 맞추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니엘과 공작부인의 딸이니 둘 중 누굴 닮았든 미인이겠지. 이번에도 별 기대는 안 한다만…….”

그 녀석이 어디 여자에 관심이나 있었냐며 황제가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너도 예전에 공녀를 본 적이 있었지? 그때, 대공자가 베룸 영지에 갈 적에 말이다.”

황제의 말에 아르비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동시에 그의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아닙니다. 저는 그때 어마마마께서…….”

“아, 그랬지. 참.”

그때까지만 해도 아르비드에겐 별것 아닌 사안이었다. 일단 결정해놓고 사후 통보하시는 게 하루 이틀이어야지.

그런데, 어제 황궁에 들른 테고를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바마마에게 인사를 올리는 그는 어딘지 모르게 전과 달라져 있었다.

“지시하셨던 보고서입니다.”

그는 그걸 아바마마께 건네면서도 자신을 의식하는 기색이었다. 게다가 저를 보는 눈길이 전에 없이 싸늘해서 다소 의아했다.

거기다 몇 장도 안 되는 보고서를 휙휙 넘기면서 의미심장하게 웃는 아바마마까지.

“그래, 네가 보기에 베룸 공녀는 황태자의 짝으로 어울리더냐?”

미리 언질 받은 대로 아르비드는 공녀를 제 짝으로 운운하는 말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소신이 아둔하여 거기까지는 판단하지 못하였나이다.”

어딘지 모르게 불손한 목소리. 여전히 테고는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런 그의 태도가 흥미를 자극했다. 그리고 그건 자신만 느낀 게 아닌 듯했다.

아바마마의 목소리에도 어느새 빙글거리는 웃음기가 배어들었으니까.

“으흠, 그래.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도 딱히 결격사유는 보이지 않으니 아르비드만 좋다고 하면…….”

그 말에 테고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맹세컨대, 자신은 저토록 감정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그를 처음 보았다.

“그건, 그것은……. 베룸 공작가와의 협의도 필요하고. 본디 베룸 일족은 영지 밖으로는…….”

절도 있게 말을 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모습도.

“아아, 됐네. 됐어. 거기까진 짐이 알아서 할 테니 공은 이만 퇴궁하고 내일 아침 일찍 다시 들르게.”

그렇게 아바마마는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테고를 억지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 직후, 팔걸이를 두들기며 크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예상외로군. 베룸 공녀가 그렇게 미인이었던 모양이지? 큭큭.”

리테루온 공작은 좀 무뚝뚝해도 우직한 사내였다. 거기다 아바마마가 그의 대부이니 저와 사사롭게는 형제나 마찬가지다. 비록 그다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설마하니 베룸 공녀도 눈이란 게 있다면 저 녀석에게 마음이 있을 게 분명하고. 이젠 복수도 다 끝났으니 잘됐구나, 잘됐어.”

“…….”

황태자는 8년 전, 열네 살이었던 테고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어둡게 침잠한 짙은 심해색 눈동자가 텅 비어있던 소년이었다.

그런 그에게 부모님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목적을 심은 건 황제였다.

“목석같은 저 녀석도 남자는 남자였던 모양이지.”

“테고가 베룸 공녀를 마음에 들어 했을지는 아직…….”

“네놈도 방금 보지 않았느냐. 언제 저 녀석이 내 앞에서 소리를 높인 적이 있던?”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턱을 쓰다듬으며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아팠다는 공녀를 보고 제 여동생을 떠올렸나 보군. 검 말고는 별 의욕이라곤 없는 놈이 저런 반응도 보이고.”

아무리 그래도 리테루온 공작에게는 아픈 기억일 죽은 여동생까지 이용하다니.

또 무슨 일을 꾸미시려고 그러시는 걸까.

제 아버지이지만 참으로 비정하기 짝이 없는 분이었다.

그렇게 일과를 마치고 황태자 궁으로 향하는 그의 머릿속에선 내내 테고의 새파란 눈동자가 떠나지 않았다.

검을 들 때가 아니면 무심하기 그지없던 그에게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들다니. 새삼스럽지만 공녀가 궁금해졌다.

제대로 된 형제를 가져 본 적 없는 아바마마는 아마 모르실 테다. 제가 본 테고의 눈빛은 공녀에게 여동생을 투영해서 나온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 베룸 공녀를 제게 뺏길까 싶어 불안한 것으로 보였다.

‘황태자비라니…….’

여전히 생소한 어감이 입 안에서 몇 번 굴렀다.

처음부터 테고를 위한 구실이었다는 걸 안다. 그저 그뿐인데, 자신의 눈으로 꼭 확인해보고 싶었다.

공녀가 있을 본궁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르비드는 잠시 제가 꿈을 꿨나, 라고 생각했다.

* * *

‘그냥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공녀의 마차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급하게 도착한 참이었다.

우선 응접실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괜스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겼다.

아니, 쓸어 넘기려다 멈칫했다.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이유가 있나? 자신은 황태자인데?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끝내 그의 손은 머리를 마저 매만졌다.

그래, 제 형제와 다름없는 리테루온 공작의 짝이 될지도 모르는 공녀다. 게다가 네 일족 중 가장 베일에 싸여있는 베룸이 아닌가.

그리고 일전에 케이어드가 스치듯 말한 적이 있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뒤늦게 떠올렸다.

‘글쎄, 내가 보기엔 다 죽어가는 꼬마던데? 기분 나쁜 말이나 하고 말이야. 굳이 우리한테 약점이 될 만한 일족을 중앙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어?’

그때는 다른 일로 바빠 더 이상 묻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여러모로 신경 쓰였다.

‘그래, 확인만 하는 거야. 확인만.’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정중하게 두 번 노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시종장 로버트는 분명 공녀가 안에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설마 그가 제게 공녀의 입궁을 보고하는 사이에 자리라도 비웠나.

아르비드는 별생각 없이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아무도 없다면 시종장에게 어서 말해서 어디로 갔는지 찾아야 하니까.

“…….”

그는 스물세 살이 되도록 내내 황궁에서 자랐다. 그런데 응접실 안이 이렇게 해가 잘 드는 공간이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커다란 창문에서 쏟아지는 오전의 햇살이 고스란히 한 사람에게 가 닿아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요정인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뻑뻑한 눈을 비벼보았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여전했다.

그리고 자신이 잠든 여성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의 얼굴이 뒤늦게 달아올랐다.

‘노크 소리가 너무 작았나.’

발소리를 죽여 다시 복도로 나간 아르비드가 한 번 더 노크했다.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크게 두드렸다. 게다가 잠에서 깬 그녀가 매무새를 다듬을 시간을 위해 얼마간 뜸까지 들였다.

휴우, 하마터면 첫 만남부터 실례를 할 뻔했다.

“…….”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아르비드는 조금 전과 완벽히 똑같은 장면과 조우했다.

‘잠귀가 좀 어두운 영애인가.’

하긴 지난밤에 도착했다고 하니 피곤했겠지.

“흠! 흐음!”

일부러 헛기침 소리도 내봤다.

쿵쿵, 제자리에서 발 구르는 소리도 내봤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잠에서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소파에 더 깊게 파묻혀 꾸벅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알현실에서 함께 만나게 될 테니 모른 척 나가봐야 하나.

결국 아르비드가 발길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조그만 머리가 제멋대로 흔들리다 끝내 몸까지 옆으로 기울어졌다.

“엇.”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그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공녀로 추정되는 이의 몸이 쓰러지기 직전, 받쳐내는 데에 성공했다.

‘많이 아프다더니 그래서 이렇게…….’

가까이서 본 기다란 속눈썹이 짙고 빽빽했다.

몸도 너무 가벼운 듯하고.

이제 겨우 여덟 살을 앞둔 저의 여동생 티아와 별로 차이가 안 날 것 같은데.

아르비드는 의식의 흐름대로 공녀를 관찰했다.

그러다 그녀의 닫힌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는 순간,

“아…….”

그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기다란 속눈썹이 들어 올려지자 그 안에는 오묘한 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있었다.

“……으응?”

그리고 무아지경으로 졸다가 잠에서 깬 아이네는 세 번째 ‘기억’과 조우했다.

아, 이 금발의 남자가 서브 남자주인공인 아르비드 딜런 에스피오구나.

그의 페리도트빛 눈동자 너머로 짠내 나는 장면들이 펼쳐졌다.

테고를 먼저 알았던 것도 황태자고, 우연히 여자인 걸 알아채고 좋아하게 된 것도 그였는데!

하지만 결국 테고의 마음은 남주인 대공에게로 가버렸다.

술잔을 기울이며 씁쓸하게 미소 짓는 것까지 완벽한 서브남의 포지션!

‘그런데…… 그렇게 안 생겼는데 이제 보니 약간 정중하게 집착하는 타입이시네요.’

아까 악녀 역할인 달리아 영애도 그렇고, 역시 주요 인물들의 외모는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테고 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그 후 처음으로 주요 인물 중 하나를 마주치고 보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저 머릿속으로 대강 알고만 있던 것과 다르다.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이렇게 빨리 주요 인물들을 많이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며칠 전에도 불현듯 느꼈다. 그들은 한낱 몇 자의 텍스트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같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아이네는 그제야 자신의 어깨가 황태자에게 여태 잡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

“아, 이건.”

아르비드가 허둥대면서도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로 꿈이라도 꾸고 있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을 한데 섞은 듯한 반짝임은 어느새 사그라들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환상을 본 건지, 실제로 눈이 반짝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청량한 아침 하늘을 떼어놓은 것 같은 커다란 눈망울이 보였다. 그리고 그 눈이 곤란한 기색을 담아 아르비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역시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의 자세가 오해를 사기 딱 좋다는 걸.

“공녀, 여기 있다고 들었……. 뭐, 하는 겁니까.”

미처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두 사람의 뒤로 응접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이네에 앞서 먼저 폐하를 알현하고 돌아온 테고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안 그래도 방금 공녀에 대한 보고서를 폐하께 돌려받은 참이었다.

마지막으로 보고서를 대강 훑어내린 황제는 심드렁하게 다시 건넸다. 그러면서 옆 응접실에 공녀가 와있을 테니 데리고 들어오라 명하셨다.

그 덕에 테고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녀를 다시 만날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랬는데.

“아니, 이건! 이거는…….”

“테고 경?”

두 사람의 몸이 서로 가까이 붙어있는 모습을 보자 그의 새파란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테고가 순식간에 둘 앞으로 다가왔다. 잔뜩 당황한 아르비드는 본체만체 무시한 채로.

그러고는 여전히 아이네의 한쪽 어깨를 잡은 그의 손가락을 다소 거칠게 떼어냈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아이네.”

“지금요?”

“예, 가죠.”

눈앞에 테고의 손이 내밀어졌다. 엉겁결에 그 손을 잡은 아이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황망한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얼어있는 황태자를 지나쳤다.

그녀의 손을 이끌어 응접실을 나가기 직전, 테고의 시선이 아르비드를 힐끔 훑었다.

“태자께선 안 가십니까?”

“…….”

테고가 황궁에 자주 드나들 때도 둘은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래도 보아온 세월이 적지 않았다. 아르비드는 어제에 이어 이렇게까지 적개심을 드러내는 테고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 * *

“그래, 네가 니엘의 딸이구나.”

“……예, 폐하.”

황좌에 비스듬히 앉은 황제가 느른한 목소리로 아이네를 맞이했다. 그녀의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걸 보니 정말로 친우이긴 한 듯했다.

‘으아, 적응 안 돼. 정신줄 놓으면 바로 고개 들 거 같아.’

아이네는 불안한 눈빛으로 다소곳하게 모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하필 빙의한 몸이 베룸 공작가의 공녀였다. 덕분에 그녀는 여태 좀처럼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일 일이 없었다.

8년 만에 체감하는 궁중물 로맨스판타지 장르가 퍽 낯설었다.

아직 고개를 들라는 허락을 듣지 못했다. 그 탓에 아이네의 시선은 알현실 바닥 문양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몇 칸 높은 단 위에 앉은 황제의 시선은 거칠 것 없이 아이네에게 바로 가 닿았다.

후작가 영애였던 공작부인을 많이 닮은 얼굴과 제 친우가 가진 머리 색과 눈 색.

언뜻 보이는 얼굴만 보아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뭐, 제법 귀엽긴 하다만.’

그리고 이내 그녀의 곁에 서 있는 테고에게로 눈길이 옮겨갔다.

비록 친자식은 아니어도 하루 이틀 본 녀석이 아니었다.

그런 황제에겐 그가 명백하게 공녀를 신경 쓰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다.

‘보고서에는 하나 마나 한 소리만 잔뜩 늘어놓고.’

딴에는 간결한 문장으로 건조하게 쓰려고 노력한 보고서였다. 그러나 처음 써둔 내용을 나중에서야 급하게 편집했는지 뚝뚝 끊긴 맥락이 한둘이 아니었다.

황태자비에 어울릴지 판단하라고 했더니, 공녀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서만 줄줄 늘어놓지를 않나.

참으로 쓸모없는 보고서였다.

그럴 거면 무심한 척 애를 쓰지나 말든가. 감추지 못한 흔적이 노골적이어서 더 눈에 띄었다.

‘쯧쯧, 지금 보니 공녀 쪽은 아예 생각조차 없는 거 같은데.’

답답하고 한심한 놈.

황제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황위에 오른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태생적으로 눈치가 빠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환경에서 자랐다.

그랬기에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황족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 정도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아이네이스 베룸 공녀. 고개를 들어 보거라.”

황제는 부러 다정하게 아이네를 불렀다. 그러나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누그러진 음성이 나왔다는 건 황제 스스로도 몰랐다.

“사사로이는 네 아비와 막역한 친우 사이가 아니더냐.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그리 딱딱하게 굴 것 없다.”

“예! 폐하.”

그래, 폐하께서도 아버지와 친하다고 하시잖아!

아이네는 부드러운 황제의 목소리에 힘을 얻었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눈부신 미중년을 마주했다.

‘역시 잘생긴 남자가 잘생긴 아들을 낳는구나.’

진한 블론드인 아르비드와 다르게 다소 바랜 빛의 금발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옅은 색이 나른한 인상의 미모를 더 빛나게 했다.

그래서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가 오히려 더 돋보일 정도로.

아이네의 반짝이는 눈과 마주한 황제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내 친우의 딸이 사교계에 데뷔를 한다는데 얼굴이나 볼까 해서 이렇게 불렀지.”

기사가 아니라면 부지런한 자들조차 이제 막 아침을 맞이했을 시각이었다.

“이 시간에요……?”

그때까지도 아이네는 예상치 못한 황제의 미모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입이 필터링 없이 본심을 내뱉었다.

‘으앗! 나 미쳤나 봐.’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이네가 제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두 눈을 크게 떴다.

‘하, 요것 봐라?’

어린 것이 제법 맹랑했다. 황제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빛이 떠올랐다.

* * *

“그래. 피차 다 아는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볼까?”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던 황제가 테고에게로 스치듯 눈길을 주었다.

“공녀가 어린 나이에도 행정업무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칭찬이 자자하더군. 소공작, 아니지. 공자와 영지 경영을 함께 맡고 있다지?”

그 말에 테고가 어깨를 파드득 떨며 반박했다.

“아니, 칭찬까지는…….”

그러면서 아이네의 눈치를 보느라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설마 테고 경, 아니, 공작님이요?”

새삼스러웠다. 아이네는 고개를 기울여 곁에 선 테고를 올려다보았다.

어제는 친구를 해주겠다고 하질 않나, 오늘은 폐하께 제 칭찬까지 했다고?

‘정말 무슨 바람이 불었대.’

아이네는 의심스러운 마음에 가늘게 뜬 눈으로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 들었다.

그러나 정작 테고는 곤란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 그에 그녀의 눈이 의심스러움으로 더욱 좁혀들었다.

‘뭐야, 기껏 칭찬까지 해놓고 왜 눈을 피해?’

반면, 테고는 자신이 공녀의 동향을 몰래 보고서로 작성했다는 말이 황제의 입에서 나올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축소 보고하는 데에만 열중하느라 이제야 생각이 미쳤는데…….

누구든 자신을 말도 없이 관찰했다고 하면 당연히 불쾌하지 않을까. 아무리 황제의 명이라고 해도 말이다.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바라보던 황제가 턱을 괴었다. 테고의 속내는 두말할 것 없이 명백했다. 하지만, 공녀의 태도는 다소 의아스러웠다.

꽤 친밀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 방향이 조금……?

“흠, 공녀가 올해로 열아홉이라고?”

“예, 폐하.”

황제는 저도 모르게 옆에 선 테고와 아이네를 번갈아 보았다. 리테루온 공작이 유달리 체격이 큰 건 사실이지만.

‘세 살 차이면 꽤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앞서 만나보았던 에펜베르크 후작영애는 열여덟이라고 했던가.

차라리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그 영애가 곁에 서기에는 더 그럴듯해 보였다. 심지어 공녀가 테고에게 보이는 담백한 반응은 황제가 예상했던 바와 완전히 달랐다.

‘그렇다고 딱히 아르비드 같은 녀석이 타입은 아닌 거 같은데.’

제국 최고의 미남 두 명이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그런데도 공녀가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그 두 남자가 오히려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

‘이놈은 또 왜 이래.’

황제가 힐끗 본 아르비드의 오른손엔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었다.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댄 그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공녀가 황성에서 행정관으로 일해보는 건 어떤가 싶은데.”

“행정관이요? 하지만…….”

이쯤에서 아이네는 원작 소설의 중요 설정을 떠올렸다.

‘여자는 작위 계승도, 공직 진출도 안 되는 거 아니었어?’

그래야 여주가 남장을 할 계기가 될 테니까. 이건 테고의 성별만큼이나 중요한 핵심 설정이었다.

“그래, 그래. 제국법상 정식 관료로는 안 되겠지. 그러니 임시 보좌관 정도로 해보자는 거야.”

황성에는 국정을 담당하는 정식 관료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황후나 황녀 등 여성 황족을 보좌하기 위해선 일정 정도의 여성 사용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들을 제국법상 정식 관료가 아닌 임시직으로 고용해 관리하고 있었다. 그 경우에도 여성의 역할은 단지 내정에 국한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여태껏 대다수의 남성 결정권자들은 그러한 기형적인 제도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건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잠시지만 표정이 돌변한 황제가 비릿하게 웃었다.

역시 25년 전 반정 당시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확실하게 도려내야 했는데.

그때 살려두었던 놈들이 결국 사달을 냈다.

반란군 잔당과의 연결 고리를 밝혀내려 진압군을 보내자 전부 남쪽의 자신들 영지에 틀어박혔다. 불안정해진 황도의 사정을 핑계로 댔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번에 빼도박도 못할 증거를 찾아냈어야 했는데…….

예상치 못한 테고의 활약으로 궁지에 몰리자 반란군 수뇌부에서 먼저 꼬리를 잘랐다. 생포되어 정보가 새어나갈 게 두려워서였을까.

‘크큭, 네 놈들이 이겼다고 생각하겠지?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아지트에 도착하자 남아있는 건 반란군 수장 한 명뿐이었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탓에 생포하지 못했다.

테고 녀석은 그 후에도 귀환 명령까지 어기고 증거를 찾아 헤맨 모양이었지만.

결국 남부측과 결탁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를 눈치챈 귀족파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었다.

‘제국이 아니라 제 잇속에만 관심이 있는 쓸모없는 것들.’

최근 그들은 제 가신들을 부추겨 휘하 행정관들의 사표를 볼모로 황제에게 시위를 하기에 이르렀다.

마음 같아서는 사표를 수리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제국 곳곳에 업무 공백이 발생할 테다.

그렇다고 숙련된 행정관을 새로 길러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영애들도 내정을 관리하는 교육을 받지 않나. 약간의 연수만 받으면 충분히 행정관으로 쓸 수 있겠지.”

“으음.”

뜻밖의 제안에 아이네의 얼굴이 곤란함으로 물들었다. 잘 해낼 수 없을 것 같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거 전개에 없는 내용 같은데.’

기껏해야 황도 사교계에 갑자기 나타난 자신으로 인해 일어날 사건 정도만 예상했다. 이게 뭐야.

숲에서 만난 존재가 전개를 비틀어도 된다는 확답만 주었어도!

아이네의 침묵이 길어지자 황제는 조금 다급해졌다.

“일하고 싶은 부서는 최대한 공녀의 의사대로 배정해주지, 어때?”

애초에 영애들이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해서 고안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의 의사를 억지로 관철시키려 버티는 일부 노귀족들에게 자신에게도 대체 수단이 있다는 걸 알리는 게 목적이었다.

‘배에 기름만 가득 찬 늙은이들이야 그저 보좌관을 숫자로만 생각하겠지.’

하지만 일선에서 일하는 행정관과 보좌관들은 즉각 위기감이 느껴질 테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수프 그릇 문제에는 민감해지기 마련이니까.

자신들만 가능하다고 믿는 영역에 영애들이 대신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사이에 서서히 균열이 일어날 게 뻔했다.

황제가 노리는 건 바로 그 시점이었다.

나중에 늙은 개들을 쳐내더라도 실무를 보는 하급 관료들은 온전히 남겨야 했다.

다만 이 계획에는 반드시 베룸 공녀인 아이네가 동참해주어야 한다. 정치적 입지가 좁은 하급 귀족 영애는 그 반발을 이겨내기 어려울 테니까.

그리고 여태 은둔하던 베룸 일족의 직계가 중앙 정치로 나올 수도 있다는 위기감 조성이 필요했다.

“나라고 아무에게나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아니야. 지금으로선 공녀와 에펜베르크 영애밖에…….”

“달리아 영애도 함께 일하나요?”

직전에 마주친 달리아를 언급하자 아이네의 눈이 반짝거렸다. 황제의 한쪽 눈썹이 들려 올라갔다.

‘달리아……라고?’

이름을 허락할 만큼 친해질 시간이 없었을 텐데?

이번에도 이상하게 그녀가 제 말을 끊은 것 정도로는 불쾌감이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둘 사이에 친분이 있었는지를 되짚어 생각해보았다.

‘이상하군.’

달리아를 아이네와 마주치도록 한 건 이런 의도가 아니었다. 공녀에게 일종의 라이벌 의식을 심어놓고 싶어서였다. 현재 사교계의 정점은 그 후작가 영애이니까.

당연히 공녀가 그 자리를 노릴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 여인들은 다 그렇지 않나?

그러나 뭐가 되었든 상관은 없다. 벌써 친분을 쌓았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으니.

“물론, 공녀의 결정에 달렸지. 공녀가 하지 않겠다면 이 모든 계획은 백지화되는 거고.”

황제의 얼굴에는 다시 유들유들한 웃음이 걸렸다.

“에펜베르크 영애 혼자는 감당하기 어렵지 않겠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후작 영애는 결코 낮은 위치가 아니지만, 그녀의 아비와 오라비를 생각해보면 애매했다.

다만 달리아를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아이네가 달리아에게 호감을 품은 듯해 던져본 말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마침 아이네가 하던 고민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전개를 사수하기 위해서라면 거절해야 마땅한 제안이지만…….

『살았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는 결말.』

역시 이게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아 영애 이야기가 맞는 거 같은데.’

그녀를 만나기 직전에 떠올랐던 반란 장면도 그렇고, 국외추방이라는 원작의 결말도 무언가 찝찝했다.

최선의 방법은 달리아가 반란길을 걷지 않게 막는 거다. 그것도 가능하면 가까이에서!

아이네에게 지금 이보다 더 좋은 핑곗거리는 없어 보였다.

‘그 막장 후작가를 들락날락하기는 싫단 말이야.’

무능력한 주제에 욕심만 많은 달리아의 혈육들을 떠올리자 진저리가 쳐졌다. 술, 도박, 여자 문제,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폐기물들이었다.

거기다 아이네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조심하세요, 영애. 바닥이 미끄러워요.’

어쩐지 아까 그녀를 힘 있게 잡아주던 하얀 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럼…… 해볼래요!”

자그마한 두 주먹을 꼭 말아 쥔 그녀의 모습에 또다시 셋의 눈길이 모여들었다.

셋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황제가 여상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그럼 이번에는 베룸 공녀를 황도에 묶어둘 방법으로 넘어가 볼 차례다.

“그래, 그건 그렇고. 이번 데뷔탕트 연회에 오라비인 공자와 입장한다고 들었는데. 아직 마땅한 혼처는 없나 보군.”

“윽……. 예.”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비수를 꽂는 재주가 있었다. 아이네의 표정을 본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속마음을 읽기 쉬운 아이군.’

그러고는 꽂은 비수를 비틀었다.

“그럼 정인은 있나?”

“아, 정인……이요.”

아이네는 속으로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테고도 그렇지만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아무리 황제여도 그렇지, 이렇게 꽉 찬 돌직구를 던진다고?’

바로, 말을 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 아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그렇겠지만 말이다.

‘정인은커녕 어제까진 친구도 없었는데요.’

원래 세계였다면 실례되는 질문이었을 테다. 그것도 초면인 사이에는 더더욱.

“…….”

“…….”

그런데 정작 대화의 당사자가 아닌 테고와 아르비드의 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다만 그들의 고개만이 자성에라도 이끌리듯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물론 황제가 이토록 티가 나는 둘의 움직임을 놓칠 리는 없었다.

‘이놈들이 친하지는 않아도 같이 자랐다고 여자 취향까지 닮았나.’

제 아무리 촉망받는 인재들이라 해도 겨우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이제 중년에 접어든 황제에게 제 속을 확실히 감추기엔 아직 한참 부족했다.

오히려 그 모습에 황제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황위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황제는 사람을 체스 말처럼 다루는 데에 능숙했다. 그리고 목적을 위해서는 제 자식도 어느 정도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었다.

후비 소생의 막내 황자였던 그가 반정에 성공할 만큼 세력을 모은 건 그저 운이 아니었으니.

“반응을 보니 없나 본데.”

이젠 인신공격을 하려는 건가 의심스러웠으나 아이네는 겨우 대답을 토해냈다.

“예. 없습……, 없어요.”

“마침 잘됐군.”

아니, 뭐가 잘됐다는 거야!

순간 그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러고는 반항기 어린 시선이 황제에게 그대로 가 닿았다.

아이네의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본 그가 웃어넘기며 의자에 몸을 더욱 깊이 묻었다.

“공작부인이 좋은가, 황태자비가 좋은가?”

“예……?”

순간, 아이네는 물론이고, 테고와 아르비드의 얼굴까지 당황으로 물들었다.

* * *

“아, 이건 오해의 소지가 있군. 급한 마음에…….”

말과는 달리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 느긋해 보였다. 하지만 방금 던진 질문으로 모든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했다.

‘공녀는 공작부인, 황태자비 둘 다 관심이 없군.’

게다가 당장 반발할 줄 알았던 아르비드가 잠잠했다. 황태자비 운운은 구실일 뿐이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는데도 조금쯤 기대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스물셋이나 먹고도 여태 영애들한테 눈길 한번 안 주던 녀석이…….

‘오늘 공녀를 보고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그 나이 때는 흔한 일이긴 하지.’

흔한 일인 만큼 감정이 깊을 리도 없고.

황제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확실한 우방 중에 공녀와 급이 맞을 만한 상대가 또 누가 있더라?

“그러고 보니, 또래로 치면 대공비까지 딱 셋이군. 하지만 대공의 혼사까지는 관여하기가 힘든데…….”

“폐하! 갑자기 무슨…….”

“아바마마.”

아이네는 무슨 말인지 파악하느라 두 눈만 끔뻑거렸다.

갑자기 원작 주요 인물 삼대장이 전부 언급됐다.

‘그런데, 전부…… 안 되잖아?’

빌어먹을 원작의 캐릭터 독점 같으니. 늘 그렇듯 제국의 능력 있고 미혼인 고위 귀족은 모두 주요 인물이었다.

내막을 모두 아는 아르비드는 물론, 테고 역시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테고는 그 와중에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가능성에 조금은 가슴이 술렁였다.

하지만 휘둥그레진 표정으로 입을 작게 벌린 아이네를 보고 직감했다. 뭐가 되었든 그가 바라는 대답은 나오지 않으리라는 걸.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테고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하지만 혼사는 각 가문의 고유한 권한이온데.”

“어허, 가만히 있거라. 너는 3년 전에 뭐라 했느냐? 성년만 지나면 내 뜻에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무어라 말을 보태려던 테고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이 멎질 않았다.

황제가 턱짓으로 테고를 가리켰다.

“알다시피 리테루온 공작의 혼인이 좀 급해서 말이지. 공작가에는 이제 이 녀석 하나뿐이니.”

테고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겉으로는 가까스로 평온을 위장했지만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겨우 생각을 정리한 아이네가 천천히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미처 예상 못 했던 최악의 플래그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셋 전부 다 언급될 줄이야.

“저기, 폐하? 이런 문제는 아버지랑 어머니께 여쭤봐야 하고…….”

물론 핑계였다.

여쭙고 자시고, 이 세상 모든 남자가 되어도 저 셋만은 안 된다!

여주! 남주! 서브남주니까!

예상대로인 반응에 황제가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오해라고 하지 않았어. 오히려 짐이 공녀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니, 잘 들어보아라.”

첫 번째 전략에 실패한 황제는 자신의 주특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충격적인 제안을 미리 던져서 훌륭하게 밑밥을 깔아두었으니, 이제 회유에 들어가면 된다.

“공녀가 황궁에서 보좌관을 하려면 황도에서 계속 지내야겠지? 그런데 나타니엘이 그걸 허락할까?”

베룸 일족들의 영지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황제였다. 이십 년이 넘도록 어르고 달래도 베룸 공작은 중앙 정치에 나서 달라는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그건…….”

아이네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히 데뷔탕트가 끝나자마자 언제 돌아오느냐며 닦달하실 게 뻔하니까.

애초에 이번 황도행을 쉽게 허락하신 것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여태껏 사교활동마다 불참하겠다고 하면 은근히 더 좋아하시던 분이 아버지였는데…….

‘처음엔 테고 경이랑 원작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지.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뭔가 조건이라도 내거셨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네를 바라보는 테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 친구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지금이야 친구라는 이름으로 금방 만남을 청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녀가 베룸으로 돌아가 버리면…….

적당한 시기에 다시 베룸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한데도, 서운함이 밀려왔다.

‘나답지 않게 베룸 남매에게 정이라도 들었나.’

단지 그렇게 치부하기엔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렸다. 지난번보다도 더.

테고는 애써 제 명치 부근을 슬쩍 문지르며 납득하려 애썼다.

“마침 공녀가 성년이니, 잘되었지 뭔가. 가문의 영향력을 벗어날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

황제의 말에 아이네의 숨이 가빠졌다.

“그게 뭐죠?”

이거 어쩐지 황제가 아니라 뭐 팔러 오신 분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결혼이나 약혼을 하는 거지!”

“아아…….”

결국 아까랑 같은 말이잖아.

아이네의 지갑이 다시 닫혔다. 셋 다 비매품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이 서글펐다.

하지만 황제의 다음 말에 그녀의 귀가 쫑긋 솟았다.

“거절하면, 영애는 보좌관 일도 못 하게 될텐데. 에펜베르크 영애가 많이 실망하겠는걸?”

맞다, 달리아 영애!

아이네는 원작의 달리아 영애가 테고의 약혼녀가 된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세상에, 달리아 영애도 황제한테 당한 거였구나.’

원작에서도 두 사람의 의사 따윈 전혀 반영되지 않은 일방적인 약혼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잠깐, 여기서 내가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이네보다 지위가 낮은 달리아에게 약혼 제안이 가게 될 테다. 영애가 아직은 미성년자인 만큼 그 결정권은 아버지인 후작에게 있을 거고.

후작은 섣불리 휘두르기 어려운 황실보다는 혼자인 리테루온 공작가를 택할 게 뻔했다.

‘이럴 수가! 이렇게 된 거였구나.’

모든 상황을 납득한 아이네가 테고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테고의 표정이 오늘따라 가련해 보였다.

이래서야 어쩐지 악역 역할을 대신해서 끌려온 게 아닐까 하던 처음의 추측대로 흘러가는 느낌이지만.

‘난 테고가 여주인 걸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

저만은 그에게 절대, 절대 반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뭐, 이미 몇 번 설레긴 했다. 하지만 같은 여자끼리도 설렐 순 있잖아. 달리아 영애에게도 설렜는걸.

물론 그렇다 해도 여기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저, 그런데…… 폐하. 진짜로 하는 약혼은 안 되는데요.”

나중에 남주와 알콩달콩 행복해지는 테고의 뒤에서 낙동강 오리 알처럼 남겨지는 전 약혼자 신세만은 사절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친구로 노선을 잡았는걸!

어차피 이 약혼은 달리아 영애의 흑화 엔딩 방지용이니까.

“진짜는 안 된다라……. 그럼, 가짜 약혼도 있나?”

아이네의 말에 의문을 표하던 황제가 무릎을 쳤다.

“그래! 계약 약혼으로 하면 되겠군.”

계약 결혼과 계약 약혼이라니. 만고불변의 메이저 키워드인데……. 역시 황제 폐하는 배우신 분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제의 말이 점차 빨라졌다.

“그럼 내가 친히 공증해주랴? 그게 좋겠군. 어쨌든 한다는 소리지?”

정신없이 몰아치는 황제 때문에 아이네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네? 네……. 다 살게요. 아니, 할게요.”

“좋아. 잠시만 기다려 봐, 공녀. 로버트! 밖에 로버트 있나?”

왜 미친개 같은 상사를 둔 불행한 자들의 이름은 전부 로버트일까.

* * *

어느새 황제가 앉아 있는 단 위에는 아이네가 함께였다. 두 사람은 탁상을 앞에 두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여기는 주어를 넣어서 의미를 조금 더 명확하게 해주시는 게 좋겠어요.”

“흠, 그래. 듣고 보니 중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군.”

두 사람의 진지한 대화를 듣던 테고는 괜히 긴장하고 설렜던 자신이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그의 입에서 보기 드문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건 근처에 있던 아르비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누구와 약혼을 하겠다는 건지…….

“기한이 중요한데, 기한은 얼마로 할 거지?”

“으음, 두 사람의 합의로 정하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요? 아랫줄에 단서로 달아두시면 될 거 같아요.”

아이네는 계약이 파기될 시점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달리아 영애와 약혼했어야 할 전개가 조금 틀어진 상황이다. 구체적인 기간을 섣불리 예측하기는 조심스러웠다.

“좋아……. 나이도 어린 공녀가 제법 꼼꼼하기도 하고.”

“헤헤, 감사합니다.”

생글생글 웃는 낯을 가까이서 마주한 황제는 저도 모르게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맹랑하고 깜찍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영리하기까지 하다.

“아, 참! 깜박했군. 누구와 약혼을 할 건지는 결정했나?”

계약서의 조항 따위보다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항이었다.

“어, 당연히…….”

단 위에서 등지고 서 있던 아이네가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단 아래에서 그녀만 바라보는 두 남자는 긴장으로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

“…….”

아이네의 대답을 묵묵히 기다리던 테고가 슬그머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공녀는 누구를 택하려는 걸까.

“테고 경이죠!”

“아.”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테고는 자신이 생각보다 더 세게 주먹을 쥐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곧이어 시종장이 ‘신뢰’를 뜻하는 룬이 새겨진 마법 깃펜을 테고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가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의 가장 윗줄에 테고 리테루온의 이름을 곧장 써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에 역시나 하는 기색이 어렸다.

‘놀라울 정도로 한 마디 반항도 없군. 그리고…….’

테고의 곁에서 방글거리며 웃고 있는 아이네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두 사람의 합의로 파기라니……. 언뜻 보면 참 좋은 조건같지만.

과연 테고 저 녀석이 합의를 해 줄까?

한번 제 손안에 들어오면 좀처럼 놔주려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이윽고 테고가 손에서 깃펜을 놓았다. 그러자 계약서가 황금색으로 잠깐 빛나다가 잠잠해졌다.

“자, 이건 일단 내가 마도구로 베룸 공작에게 보내도록 하지.”

계약서를 손에 쥔 황제는 진심으로 소리를 내어 웃었다. 생각보다 큰 수확이다.

‘공녀 하나로 일이 술술 풀리겠군.’

베룸 일족의 조력도 얻게 된 데다 남부측도 충분히 자극할 수 있을 테다. 차선책이었던 에펜베르크 영애보다 훨씬 유용한 미끼가 되어주겠지.

거기에다 서신을 보고 펄쩍 뛸 친우의 모습이 벌써 그려졌다. 화만 내는 게 아니라 이참에 황도로 당장 쫓아오면 제일 좋겠는데.

사교계에 내보내지도 않고 애지중지하던 귀여운 딸이 아닌가. 그런 아이가 계약이라곤 해도 황도에 가자마자 덜컥 약혼을 했으니…….

처음부터 테고의 짝으로 점찍어 둔 게 아쉬울 정도로 탐이 나는 아이였다. 약간 허술한 면까지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아팠다더니 좀 작고 마른 걸 빼면 그렇지도 않아 보이고.’

계약 약혼이라…….

생각하기에 따라 차후를 도모하기에도 더 나은 선택이다.

귀족파를 모두 도려내고 나서도 공녀와 테고 사이에 진전이 없다면,

‘이만하면 황태자비로도 괜찮은데.’

공녀가 테고를 택하는 순간, 황제가 가장 먼저 주시한 건 아르비드였다. 내내 얌전하고 순종적이던 제 아들의 그런 얼굴은 처음 보았다.

‘갖고 싶은 게 생겨야 권력이 아쉬운 줄을 아는 법이니까.’

그들을 모두 내보낸 뒤, 알현실의 가장 화려한 옥좌 위에 기대앉은 채로 황제는 다시 느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청명하고 맑은 눈동자가 어쩐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 웃음이 나게 하는 아이인 건 확실했다.

그렇게 각자의 이해관계와 오해, 착각이 복잡하게 얽혀들어 가기 시작했다.

* * *

“공녀를 어디에 쓰시려고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아르비드, 누가 들으면 공녀가 물건인 줄 알겠구나.”

그럼, 아닙니까?

아르비드는 아까부터 가슴속 한쪽 구석이 고요하게 들끓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아바마마에게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치세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 범위에는 자식인 저와 아직은 어린 티아까지도 포함되어 있을 테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어. 어찌 되었든 테고 녀석과 약혼을 하기로 했으니 공녀도 당분간은 황도에 머물 거고.”

황제가 의자에 기대 다리를 까닥거렸다. 마치 아르비드더러 들으라는 듯했다.

“마침 데뷔탕트가 열리기 전이라 더할 나위 없지. 그럼 사교계도 베룸 공녀에게 맡기면 되겠군. 티아는 아직 너무 어려.”

“…….”

그럼 그렇지. 귀족파를 견제하기 위해 보좌관으로 들이는 문제까지면 모를까. 왜 곧 도착할 나딘 공자보다도 공녀를 황도에 묶어두려 하시는지 의아했었다.

무엇보다 계약이라고는 하나 약혼 관계는 과했다. 이 모든 게 사교계까지 손에 쥐려는 계획이셨구나.

‘이득 없이는 움직이는 분이 아니시니까.’

분명 영애들을 보좌관으로 기용하기로 한 일도 마찬가지일 게 뻔했다. 그 목적을 다하고 나면 갖은 이유를 대어 철회하고도 남을 분이다.

아르비드가 여태 배워온 제왕학 수업에 비추어 본다면 황제의 통치방식은 지극히 모범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네 녀석은 공녀가 마음에 들더냐?”

“……오늘 처음 본 사이입니다.”

“글쎄, 넌 내 아들이니 나를 닮았을지도 모르지.”

그러면서 황제는 또다시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아르비드는 제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또다, 또 저렇게 가장 소중한 건 저 멀리에 두고 왔다는 눈빛. 저 그리움의 대상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이미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여자가 아닌가.

‘어마마마께 그 반의반만이라도 정을 주셨다면…….’

지독한 권태감에 몸부림치면서도 황제는 국정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다만, 아들인 아르비드가 성인이 되자 언제라도 황좌를 그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훌쩍 떠날 수 있다는 듯이 굴었다.

아무리 죽은 친우의 아들이라 해도 테고에게 신경을 쓰는 것 역시 그랬다.

단순히 의리를 지키기 위한 이유만은 아니란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저는 당신 같은 황제는 되지 않을 겁니다.’

이내 고요한 집무실에는 펜촉이 사각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어느덧 시간이 더 흘렀다. 황태자의 황록색 눈동자에 스쳐 지나갔던 일말의 반항심은 소리 없이 사그라들었다.

그 대신 아르비드는 아까 제가 목도했던 공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아까 그건 뭐였지.’

그런 식으로 여러 색이 섞여 빛을 내는 눈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멍하니 지켜보느라 아르비드는 뒤늦게 깨달았다.

제 오른쪽 중지에 끼고 있던 반지가 손가락을 태울 듯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는 걸.

‘하…….’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던 새파란 눈동자가 자꾸만 그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 * *

“공녀. 약혼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동의한 겁니까.”

“혼인을 약속한다는 거?”

“…….”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만…….

테고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계약 약혼이라고 해도 남들에겐 진짜 약혼 관계로 보일 겁니다.”

“그렇죠…….”

여전히 아이네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테고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건 우리가 앞으로 약혼자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소립니다.”

“알고…… 있어요.”

왜, 왜 이렇게 화가 났지? 먼저 제안한 건 황제 폐하인데.

현재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대척점 위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테고는 지금의 상황을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임시 보좌관이든 뭐든 아이네가 황도에 남게 된 건 기쁜 일이다. 하지만 계약 약혼이라 해도 약혼은 약혼이었다.

테고의 입장에선 그리 쉽게 약혼을 받아들인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길래.

“그럼, 만약 그 뒤에 나와 결혼하게 되어도 괜찮다는 겁니까?”

“네에? 약혼한다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니잖아요. 혹시…….”

아이네는 추궁하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나랑 결혼까지 생각했어요?”

“…….”

테고의 뒷덜미와 귓불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지나치게 당황하는 테고를 보고 아이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지금 시점에선 자신이 여자인 게 밝혀질 줄은 꿈에도 모를 테니까.

“어, 음. 뭘 걱정하는지는 아는데, 저는 괜찮아요.”

“그게 무슨……?”

테고가 혼란스러운 낯을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빨간 경고등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뭔가가 잘못됐다. 그게 무언지는 몰라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테고 경은 적어도 결혼만큼은 좋아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언젠가처럼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던가? 아니, 애초에 결혼이든 약혼이든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테고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네가 활짝 웃으며 그의 손끝을 잡고 흔들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곧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러려고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처음에는 황제의 약팔이, 아니, 제안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거기다 분위기를 타고 얼렁뚱땅 계약서까지 쓰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네는 이제 와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테고와 남주인 대공의 행복한 결말은 정해져 있다. 여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건 최종 악역 때문이니까.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이용당했을 뿐인 영애 하나를 구원해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이네가 초반에 마음먹었던 ‘전개 틀지 않기’ 철칙은 벌써 무너져내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어쩐지 그녀는 달리아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건 자신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끌림이었다. 누군가 그러라고 등을 떠미는 것처럼.

‘그도 그럴 게…….’

지금의 달리아는 초면인 영애에게도 상냥하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모습을 봐서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멋진 소녀가 분노에 사로잡혀 반란군까지 황성으로 끌어들이는 악역으로 소비되다니.

‘도대체 작가가 누구야, 이거.’

거기다가 흑화하기 딱 좋은 가혹한 가정환경 서사까지 부여했다. 마치 무조건 악역으로 만들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리 누군가를 악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해도 너무 잔인한 설정이잖아. 나였으면 진작에 원작 부셨어.’

물론 테고가 안절부절못하면서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혹시 자신과 얽혀서 뒷말이 나올까 그러는 거겠지. 다정하기도 해라.

어차피 나중에 테고가 여자란 게 밝혀지면 깔끔하게 정리될 텐데, 뭘.

당연하겠지만 아이네는 이것만은 굳게 믿었다. 주인공의 성별은 전개와 관련 없는 기본 설정이니까.

절대 달라질 리도 없고, 달라져서도 안 되는.

“그리고 약혼자가 없다고 하면 귀찮게 구는 영식도 많을 거 아녜요. 그건 테고 경도 그렇죠? 정말 다들 예쁘고 잘생긴 건 알아 갖고!”

아이네가 부러 능청을 떨었다. 그 말에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테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건 좀 좋은 점 같아서.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아이네는 조금 짜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으응, 자기가 잘난 거 알긴 아는구나.’

인정합니다.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긴 하지.

“흠흠, 아무튼 태자 전하나 대공 각하보다는 테고 경이 제일 낫잖아요.”

아이네는 베룸 공작성과는 여러모로 느낌이 다른 황궁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제가 한 말이 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계약 약혼을 해야 한다면 실제로는 여자인 테고가 낫다는 뜻으로 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테고는 이번에도 제 좋을 대로 해석했다. 그러고는 슬며시 붉어지기 시작한 뺨을 커다란 제 손으로 가렸다.

“흠, 이제 어디로 갈 겁니까. 공작저로 돌아갑니까?”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그가 말을 돌렸다.

“예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어쩔까 생각 중이에요. 테고 경, 아니, 이제 공작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참.”

테고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호칭이다. 그리고 이번엔 그 호칭을 정정할 핑곗거리도 생기지 않았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거의 속삭이듯 스쳐 지나간 목소리에 아이네가 드디어 테고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네?”

“제 호위 임무는 공녀의 데뷔탕트가 종료되는 시점까지입니다. 그리고…….”

유난히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테고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이제 우린 친구가 아닙니까.”

실은 약혼 관계라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엥? 그, 그렇죠.”

그 말에 아이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생각해보니 아까 응접실에서는 그가 먼저 ‘아이네’라고 불러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잘 못 들었나.’

어쨌든 이제 명목상으로나마 약혼을 했으니 자신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약혼자만 바뀐 채로 전개는 그대로 유지되어야 하니.

달리아가 해야 했던 악녀 역할은 원작에서 반란군을 돕는 것만이 아니었다.

꽤 오래도록 테고를 남자로만 알고 있는 대공이 그를 의식하게 만드는 일도 약혼자인 악역이 할 일이었다.

이렇게 사소하게나마 친근하게 구는 일도 원작의 남주인 대공에게 자극이 될 날이 오겠지.

재밌겠다. 역시 남주가 질투하는 거 보는 게 제일이지.

아이네가 키득거리며 테고에게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그렇죠, 우린 친구니까요. 테고 경.”

“…….”

특유의 발랄한 목소리로 냉큼 그의 이름을 넣어 대답하는 걸 본 테고의 말문이 다시 막히고 말았다.

친구라는 말을 꺼내기까지 자신은 꽤 많은 용기를 짜내야 했는데…….

“아이, 아니, 공녀. 잘…… 부탁합니다.”

“네에.”

저 역시 그녀에게 애칭을 붙여 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네의 웃는 얼굴만 보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바람에 이번에도 실패했다.

“앗, 그러고 보니 테고 경의 기사단에 보좌관…… 필요하지 않아요?”

“제2기사단 말입니까?”

아, 테고의 기사단이 제2기사단이었구나.

원작이 뭔지 안다고 해도 아이네가 기억하는 건 커다란 흐름이었다. 이런 세부적인 내용까지 기억하긴 힘들다.

‘원하는 보직이 있다면 어디든 최우선으로 배치해주겠다고 하셨으니까. 거기는 안 될까?’

베룸에 있을 때, 집무실에서 테고가 나딘에게 조언을 구하는 걸 그녀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물어보니 정식 보좌관도 없이 아주 긴급한 사안을 제외하고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대로 일을 처리한다고 했었지, 아마.

얼떨결에 하겠다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 계약 약혼, 잘한 것 같은데?’

가장 가까이서 원작을 지켜보며 자신의 빙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데다가 테고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만하면 일이 너무 술술 풀려서 무서울 정도가 아닌가.

거기다 이곳엔 오징어도 없다!

‘역시 마음의 고향, 황도 최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에 아이네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 *

이튿날 그녀는 테고가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제2기사단 건물을 방문했다.

근위대와 제1기사단과는 다르게 제2기사단 건물은 외성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황성에 진입해서도 한참을 더 돌아 들어가야 했다.

“여긴 본궁하고 엄청 머네요? 한참 들어온 거 같은데.”

“마차보다 말을 타면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그럼 오늘은 왜 말을 안 탔어요?”

“…….”

테고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평소엔 늘 말을 타고 출근했던 게 맞다.

하지만 그는 함부로 아이네와 함께 말을 타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뿐더러.

실전으로 얻은 경험을 소홀히 하지 않는 참된 기사였다.

“와아!”

아이네는 이제 테고의 대답을 굳이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마차 창문으로 보이는 외성의 광경을 보며 황성의 규모에 감탄했다.

역시 공작령의 공작성보다 훨씬 크게 지어졌구나. 직진에 직진을 거듭해서 도달했던 본궁으로 갈 때는 보지 못한 장면들이다.

거기에다 이 정도로 높은 성벽을 끝도 없이 둘러서 건설할 수 있다니.

어지간한 재력이 아니면 작은 왕국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겠지?

“정말 연무장까지 볼 겁니까?”

“어, 음. 이왕 견학하는 건데 기사단 내부를 알아두면 좋잖아요.”

급조한 핑계였다. 차가운 종이로 된 서류들 말고 기사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니까.

“얼른 보고 결정해야 출근도 빨라질 거고요!”

무엇보다 달리아 영애도 황궁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한시라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테고를 마주하고 어떤 반응일지까지 직접 봐두어야 마음이 편할 듯했다.

혹시 모른다. 원작의 전개를 그대로 이어가려고 어떻게든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설도 꽤 많았거든.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은 테고의 가까이에서 머무를 작정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 소설은 클리셰를 충실하게 다 따르고 있네.’

역시 남장여주물의 주요무대는 기사단이 제격이지.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공간에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정체 발각 위기의 순간들!

아, 그런데 여기선 남장이 너무 철저해서 문제구나. 요건 제외.

“…….”

아이네는 그제야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침묵이 길었단 걸 눈치챘다.

너무 성의 없는 이유였나?

아이네가 황급히 덧붙였다.

“폐하께서도 기사단 구경을 충분히 해보고 원하면 여기서 근무해도 좋다고 하셨으니까요.”

“굳이 왜 이곳을…….”

테고가 생각하기론 아무리 잘 관리되어 있다고는 해도 기사단은 레이디가 드나들기에 썩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가 단장을 맡은 제2기사단에는 여기사도 두 명 소속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남자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닌가.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 어딘지 익숙한 불쾌감이 테고를 짓눌렀다.

그리고…….

아이네는 아직 모르는 눈치인데, 황궁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어제 노란 드레스를 입고 방문한 새로운 영애가 누구인지에 대해 아직도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는 건가.’

‘다들 예쁘고 잘생긴 건 알아 갖고!’

어제 한 그 발언을 생각해보면 그런 거 같지도 않지만 제 외모의 파급력엔 꽤 무감해 보였다.

나딘 공자를 제외하면 또래의 귀족 영식이 없는 환경이어서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곳은 황도였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영식과 영애들이 넘쳐났다.

다행히 공녀 신분인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 자들은 없겠지마는.

문제는 무례보단…….

‘아니, 이건! 이거는…….’

테고의 상념이 어느새 어제 보았던 장면으로 흘러가 닿았다.

어제 응접실에서 잠들었다던 공녀에게 아르비드가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당황한 기색으로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끝으로 자신이 아이네를 데리고 나오는 걸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흠.”

역시 그게 가장 거슬렸다.

뭐든 통제하길 좋아하는 아비를 둔 탓에 황태자는 온순한 성정이면서도 종종 무기력한 모습을 내비쳤다.

용건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사이이기도 했고.

어쩌다 마주쳐도 그의 페리도트 같은 눈동자에서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랬는데…….

어제 그는 알현실에서 제 곁에 있던 공녀에게서 끈질기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릎 위에 놓인 테고의 검지가 불안하게 까닥거렸다.

“아, 테고 경! 그러면 데뷔탕트 이후에 사냥대회라든가 그런 행사도 있겠죠?”

“보통은 늦가을에 사냥대회를 열지만 올해는 일찍 개최될 예정입니다.”

“왜요?”

“둘 다 무척 오랜만이라. 모두가 기다리고 있어 시기를 앞당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황도에 오길 잘했어!

아이네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기껏 로판 세계에 왔는데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그러고 보니 어떤 게 있더라.

언뜻 생각나는 것만 기억을 더듬어봐도 데뷔탕트나 건국기념 무도회.

방금 언급한 사냥대회에 마을 축제까지…….

베룸으로 그냥 돌아갔다면 이 이벤트들을 멀리서 풍문으로만 들어야 했겠지.

‘잘했어, 잘한 결정 같아. 아이네!’

한번 행복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한 아이네의 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원작이 끝날 때까지 그저 손 놓고 기다리기엔 그 기간이 너무 길지 않은가.

거기다가 모든 일이 마치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딱딱 어귀가 맞아떨어졌다.

8년간 빙의된 원작을 알 수 없어 한껏 몸을 웅크리고 마음만 졸이며 살아온 시간에 대한 보상처럼!

‘하,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여태 좁고 답답한 공작성 근처만 맴돌았으니.’

하지만 아이네는 조심해야 할 사항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다짐했다. 자나 깨나 원작 조심이다.

먼저, 달리아 영애가 반란에 연루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건 아이네가 테고의 약혼자가 되면서 위험도가 많이 낮아졌으니 통과!

두 번째로는, 음…….

본래 책빙의 클리셰대로라면, 역시 아이네가 조심해야 할 건 첫째도 둘째도 원작의 주인공인 테고를 사랑하지 않는 일이었겠지.

‘다른 소설처럼 테고가 남자였다면 장담하기 어려웠을 거 같긴 한데.’

그녀의 시선이 다른 생각에 빠진 테고를 몰래 훑었다.

그러고는 아티팩트를 빌려 완벽하게 남자로 보이는 모습에 오늘도 감탄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본래 성별의 영향으로 곱상한 선이 남아있다. 피부도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 매끄러운 데다, 털도 거의 안 나는 듯 보이고.

‘심지어 가까이 가도 좋은 냄새만 나는걸!’

거기에 단둘이 남아도 위협적이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까지.

한번 파악하고 나면 어떻게 몰랐나 싶게 여자주인공으로서의 면면이 숨어있었다.

하나하나 따져볼수록 원작의 달리아 영애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겠구나.

‘하지만 나는 다르지!’

그제야 저를 바라보는 아이네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테고가 그녀를 슬쩍 돌아보았다.

아주 긍정적으로 보이는 앞으로의 전망에 한껏 밝게 웃어주었다. 그러자 그가 딴청을 부리며 다시 마차 창문을 응시했다.

후, 역시 같은 여자한테는 안 통하네.

아직은 초반이니까. 앞으로 친해지면 테고도 저를 향해 마주 웃어주는 날이 오겠지.

8년도 기다렸는데 더 못 기다리겠어?

* * *

테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아이네는 깜짝 놀랐다.

기사단 건물 입구 앞에 일제히 도열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어느새 싸늘해진 테고의 목소리에도 어느 누구 하나 아이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같은 제국인이니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외모가 다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에펜베르크 후작가의 보물이라는 달리아 영애처럼 정석적인 미인으로 생겼다면 그저 놀라고 말았을 테다.

하지만 아이네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으레 한 번쯤 착각할 정도로 그녀는,

“……요정인가.”

잠시 정적이 머무르던 기사들 사이에서 몽롱한 목소리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용케 그 소리를 들은 아이네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요?”

“…….”

테고는 그녀가 제 외모의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 전혀 모른다는 가설을 확신으로 굳혔다.

* * *

아이네는 새로운 황도 생활의 시작부터 아주 마음에 들었다.

예쁘다는 말은 짜릿해! 늘 새로워! 최고야!

‘그래, 여기서도 먹히는 얼굴이었어!’

게다가 요정이라니, 요정이라니!

그녀는 앞으로 주인공의 색이 아니라며 한껏 모욕했던 풀빛 머리카락을 소중히 하기로 했다.

역시 처음 거울을 봤을 때부터 굉장한 미인이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나딘은 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네 얼굴? 못생기진 않았는데, 예쁘다기보단 신기하게 생긴 얼굴이지.’

그래서 별로 안 먹히는 외모인 줄 알았지 뭐야. 역시 혈육 필터는 믿는 게 아닌 법이다.

인간관계가 좁은 그녀로서는 제 외모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기회가 적기도 했고.

“저, 역시 여기서 보좌관 일 할래요. 듣던 대로 좋은 곳이네요.”

그럼, 그럼! 듣고 싶은 말 해주는 아주 좋은 곳!

아이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 기사단 건물 복도를 걸었다. 그런 그녀의 정수리를 테고가 내려다보았다.

듣긴 도대체 어디서 들었단 말인가. 보나 마나 요정이라는 말에 들떴을 테지.

도대체 어떻게 자라면 이렇게 순진하리만치 세상을 단순하게만 보는 걸까.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황도 사람들은 솔직해서 좋네요.”

“어떤 면이 말입니까.”

“저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흔쾌히 칭찬할 수 있다는 것도 굉장한 용기라고 생각해요.”

아이네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그렇게 갑작스레 발소리가 멎자 테고도 그녀를 따라 멈추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던 아이네는 손을 모아 꽃받침을 하며 턱을 들었다.

“그래서 말하는 건데요. 테고도 예뻐요. 저는 늘 그렇게 생각했어요.”

자, 그러니까 당신도 날 칭찬해 봐. 친구끼리는 이런 거에 더 익숙해져야지!

“…….”

아이네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머뭇거리기만 했다. 단순히 예쁘다고 말하기엔 조금…… 부족한데.

자신도 처음에는 요정 같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다들 하는 말을 또 하면 너무 식상할 게 아닌가.

표현력이 부족한 테고는 결국 입술만 달싹거리다 아이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말았다.

“됐어요, 그냥 집무실이나 구경하게 해줘요.”

“……예.”

결국 테고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다음, 다음 기회에는 꼭.

* * *

“이쪽입니다.”

아이네는 처음 와보는 곳이니만큼 그가 앞장서서 집무실 쪽으로 향했다.

테고는 어제 대강 정리해둔 집무실의 상태를 다시금 상기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급하게 정리하느라 베룸 영지의 집무실처럼 깔끔하진 않아도.

그래도 평소 기사단의 집무실치고는 비교적 깨끗하다는 평을 듣는 편이라 다행이다.

자신이 생활하는 곳을 그녀에게 보일 생각을 하자 약간 긴장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새삼스레 의식되었다. 아이네와 알게 된 이후, 제가 평소에는 어떤 공간에서 일하는지 처음으로 그녀에게 보여주는 순간인 것이다.

그녀가 부디 무난하다는 느낌이라도 받길 바라며 테고가 집무실 문을 열었다.

“…….”

그리고 그대로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이 과정에 훌륭한 기사다운 반사 신경이 십분 발휘된 건 물론이다.

바로 따라 들어갈 생각으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아이네는 그의 등에 그대로 코를 박았다.

“흐앗, 아야!”

무슨 돌벽에 갖다 박은 줄 알았다. 지난번에 더듬어보았던 터라 가슴이 딱딱한 건 진작 알았는데.

등은 더 단단했던 모양이다. 대비할 틈도 없이 부딪히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새어나왔다.

그녀는 얼얼한 코를 감싸 쥔 채 테고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갑자기 멈춰서면 어떡해!’

삽시간에 눈가와 코가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네를 보고 테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등에 닿았던 감각으로 볼 때 그렇게 세게 박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그녀는 제 생각보다 훨씬 약하니 제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됐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까.”

차마 그녀의 얼굴에도, 작게 씨근덕거리는 어깨에도 손을 올리지 못하는 테고의 손이 근처만 맴돌았다.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요. 그런데 왜 안 들어가는 거예요?”

아니, 그래도 이건…… 안을 보여줄 수 없는 상태인데.

“으음, 집무실은 나중에 구경하고 일단 연무장이나 다른 곳부터…….”

테고가 어색하게 움직여 문 앞을 가리고 섰다. 그러자 아이네의 눈이 수상하다는 듯 가늘어졌다.

“뭔가 제게 숨길 거라도 있나요? 고양이가 그랬다는 핑계는 안 먹혀요!”

“그, 그건 아니지만……. 아! 그러니까 아직 정리가 다 안 돼서.”

“어제 기사단 집무실 청소한다고 오늘로 미룬 거였잖아요.”

그랬다, 어제 폐하를 알현하고 난 후 기사단을 견학하게 해달라는 아이네에게 이미 써먹은 핑계였다.

어제는 정말로 미리 정리를 해두기 위해서였으나 지금은…….

‘칼릭, 네 이놈…….’

흐리멍덩한 핑크빛 머리 색만큼이나 경박하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물론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다.

제 측근이자 부단장인 그를 떠올리며 테고가 이를 갈았다.

어제 급하게 서류뭉치를 정리하는 그에게 칼릭이 누가 오기라도 하냐고 물었었다.

그 말에 무심코 아이네이스 공녀가 들릴 예정이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나 보다.

“좀 어질러져 있어도 괜찮아요. 이렇게 된 거 아예 서류 분류하는 방법부터 알려줄게요.”

“아뇨, 아닙니다. 내일, 정말로 내일은…….”

테고는 누가 봐도 지어낸 핑곗거리로 허둥대고 있었다.

어찌나 몸이 큰지 집무실 문이 완전히 가려졌다.

그런 테고의 팔과 몸통 사이로 아이네가 잽싸게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일은 저도 일정이 따로 있단 말이에요.”

공식적인 일정은 아니지만.

아이네는 여전히 황도에선 오징어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황도를 구경할 겸 정말 오징어가 없는 곳인가 탐색하는 보람찬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잠깐……!”

그렇게 그녀 나름대로 빈틈을 노렸으나 테고의 손이 훨씬 빨랐다.

자그마한 손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기 직전에 잡아채는 데에 성공했으니.

하지만 요즈음 그는 고르는 족족 오답이었다는 걸 깜박했다.

그것도 제 심장에 별로 좋지 않은 방향으로.

“윽!”

테고가 손을 급하게 잡아끌어 아이네의 팔이 쑥 당겨졌다. 그리고 그녀는 이번엔 테고의 가슴에 얼굴을 박았다.

‘흐아, 아파라. 절벽 수준이 아닌데, 이거.’

각자 다른 갑작스러운 충격에 둘 다 굳어있던 그 순간이었다.

“단장님, 안 들어오시고 뭐 하십……. 아, 실례합니다. 하던 거 마저 하십쇼.”

테고는 깊이 절망했다.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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