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모두의 ‘눈’ (9/29)

8. 모두의 ‘눈’

“어떠십니까. 공녀님께서 근무하시기에 꽤 괜찮은 환경 아닙니까.”

방금까지 테고가 이를 바득바득 가는 대상이었던 칼릭이 경쾌하게 웃었다.

제2기사단의 부단장 겸 테고의 부관을 맡고 있다며 유들유들하게 웃는 모습이 퍽 매력적인 남자였다.

“평소에도…… 이렇게 하고 업무를 본다고요?”

업무를 보는 책상과 한쪽에 마련된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커튼까지 대강 훑어본 아이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자신이 알기로 테고는 여자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담백하고 투박한 환경을 만들어두곤 했다.

단 걸 좋아하는 입맛이라든지, 작고 귀여운 걸 보면 입가가 저절로 헤, 벌어지는 일만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적어도 남들이 보는 부분은 의식적으로 단속하는 타입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괜히 제가 부단장으로 뽑힌 게 아닙니다. 다 머리 색 덕분이죠. 제가 리테루온 영지에 있었을 때 일입니다.”

“아, 네에.”

익숙하게 느껴지는 투머치토커의 향기에 아이네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칼릭.”

아무래도 이 칼릭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견학 온다는 말에 어떻게든 여성 친화적인 공간으로 꾸며보려고 노력한 듯했다.

여자라고 다 분홍색이나 치렁치렁한 레이스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쩐지 자신을 반겨주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이네는 칼릭과 시선을 맞추며 씩 웃어주었다.

‘아, ‘기억’이 약간…… 흘러들어왔어.’

주요 인물은 아니라서 그런지 여태껏 만났던 사람들처럼 길지는 않았다.

어제 폐하를 알현했을 때에는 눈을 마주쳐도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아마 어느 정도 비중이 있는 인물에게만 반응하는 모양이다.

‘하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을 볼 때마다 그러는 건 또 이상하네.’

칼릭 라파엘르.

라파엘르 백작 가문의 차남으로 리테루온 공작가의 가신 가문이었다.

원작 소설 내에서 그의 아버지인 라파엘르 백작과 공작가의 집사장을 제외하면 테고가 남장하고 있다는 걸 아는 유일한 인물.

지금은 저렇게 다소 경박한 태도로 싱글거려도 원작 여주에게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소꿉친구로도 볼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감정을 품는 일 없이 끝까지 충직한 가신이었다.

이제 익숙해져서인지 ‘기억’이 흘러들어올 때마다 발생했던 현기증이 이젠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또, 공녀의 눈이…….’

테고는 이번에도 똑똑히 목격했다.

능구렁이 같은 칼릭과 당장 제게 불리한 말싸움을 하느니 나중에 한 소리 할 생각으로 팔짱만 끼고 있던 참이었다.

눈부신 햇살이 수면 위에 부서지는 듯도 하고, 별 같기도 한 반짝임이 눈동자 위로 짧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만 그가 의아한 건,

‘칼릭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건가.’

같이 마주 보고 서서 실없이 웃고 있는 저 분홍 머리의 부단장은 공녀의 눈동자가 변한 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럼, 여태 제게만 보였다는 뜻인데.

아니, 자신과 아이네가 고대 일족의 직계이니 이건 일족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네 일족은 자신의 가문인 리테루온과 아이네의 베룸, 그리고.

‘황실인 에스피오, 지금은 대공국이 된 헤이안드로…….’

그제야 어제 평소 침착하기 그지없는 황태자가 넋을 잃고 있던 모습이 이해됐다.

저조차 처음엔 공녀의 반짝이는 눈을 보고 홀렸으니까.

지금에야 밝고 때 묻지 않은 성정 역시 귀엽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런 걸 모를 때도 내내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제길.’

왜인지 모르게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테고는 오늘 아침 유난히 신경 써서 매었던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 * *

“아! 그거 말고 조금 더 단 거 없어요? 초콜릿 쿠키라든가.”

“그런 걸 좋아하십니까? 다음부터는 준비해놓겠습니다.”

“아뇨, 저 말고.”

아이네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테고를 곁눈질했다. 그에 칼릭이 의아한 기색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장님이 단 걸 좋아하셨나?’

앉은 자리에서 몇 인분씩 해치울 수 있는 대식가란 건 알지만, 단 것이 취향이라니?

“아하, 알겠습니다.”

칼릭의 입가가 금세 흐물흐물하게 변했다.

이런 경우는 보통 두 가지 중 하나다.

공녀가 좋아하는 취향에 억지로 맞추려 단 걸 좋아하는 척하거나, 아니면 어릴 적부터 알아 온 자신도 모르는 입맛을 알 정도로…….

‘그새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단 말이지.’

라파엘르는 정보를 주로 취급하는 가문이었다. 그런 집안의 차남답게 그는 이미 황궁에 암암리에 퍼진 소문을 알고 있었다.

휴가를 떠났던 테고 리테루온 공작이 베룸 공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여태 와병을 이유로 사교계에 나타나지 않던 공녀다.

그런 그녀가 공작과 함께하기 위해 황도에 와서 데뷔탕트를 치르게 되었다고 말이다.

상당 부분 틀린 구석이 있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어제 본궁의 알현실에서 황제가 둘의 약혼 증서에 공증을 한 이후로 그 소문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소문보다 훨씬 좋은 분 같은데? 무엇보다 주군이 저렇게 좋아라 하시니.’

텅 빈 공작저에 안주인이 들어오는 건 충성스러운 가신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칼릭도 해맑고 싱그러운 베룸 공녀가 마음에 들었다.

꼭, 마력 폭주가 심해지기 전의 라니엘 아가씨 같아서.

“와, 이거 뭐예요? 뭘로 만든 주스지?”

핑크빛 테이블보 위에 놓인 분홍색 음료를 마시던 아이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복숭아 맛 같으면서 딸기 맛도 나는 듯했다.

참고로 그녀가 마지막으로 마셨던 음료는 딸기 바나나 오징어 주스였다. 라즈베리 과일주는 술이었으니.

“리테루온 영지의 특산물인 과일로 만든 주스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테고 경, 이거 좀 마셔 봐요. 엄청 달아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앞으로 아이네가 자신이 마시던 주스 잔을 밀어 주었다.

그것을 본 테고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공녀가 마시던 걸 마시라고?

그의 심기 불편한 얼굴에 아이네는 문득 깨달았다.

‘아, 같은 여자라고 너무 스스럼없이 굴었나 봐.’

빙의자인 자신과 달리 원래의 테고는 날 때부터 귀족이었으니 누군가와 잔을 공유해본 적 없었겠지.

냅킨으로 제가 마신 부분을 닦아낸 아이네가 그에게 다시 잔을 건넸다.

“저, 진짜 그쪽으로밖에 안 마셨어요.”

“…….”

테고는 여전히 그 잔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긴, 가족이라 해도 같은 잔 쓰는 게 껄끄러울 수 있는데.

“알았어요. 칼릭 경, 미안하지만 이거 한 잔만 더 줄 수…….”

“됐습니다.”

그가 잔을 들어 한 번에 쭈욱 다 마셨다.

잠시 모른 척하고 아이네의 입이 닿았던 부분으로 마실까 하는 유혹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속여도 지금 제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칼릭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을 테다.

‘그래도 칼릭에게는 계약 약혼이라는 말도 해야 하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그는 유혹을 가까스로 이겨냈다. 문득 테고는 갑자기 억울해졌다.

도무지 공녀의 속을 알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였다. 자신을 안 지 얼마나 되었다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도 대하듯 친밀하게 굴질 않나.

종종 제 마음 안쪽까지 훅 치고 들어올 때면 정신이 아찔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거기에 유혹이나 흑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을 대하는 걸 보면 남자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왜 자신한테만 이렇게 가혹하게…….

결국 테고는 아까부터 거슬리는 크라바트를 아예 풀어내 버렸다.

* * *

나딘의 초조한 발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황도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제 동생부터 찾았다.

공작가 사용인들의 어리둥절한 시선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집사장이 나서서 사용인들을 로비에서 내보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차라리 아가씨의 응접실에서 기다리시면…….”

구둣발 소리가 멈추고 그제야 나딘이 뒤를 돌아보았다. 소리를 낮춘 조용한 음성이 짓씹듯 내뱉어졌다.

“아이네는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들어오는 거랍니까.”

집사장인 알베르토가 애매한 얼굴로 커다란 괘종시계를 가리켰다.

“도련님. 이제 겨우 점심나절이 조금 지났을 뿐입니다.”

차분하기 그지없는 알베르토의 목소리에 나딘은 울컥 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그래도 애를 외간 남자랑 둘만 나가게 두면 어떡합니까. 기사 하나라도 같이 붙여서 보냈어야죠.”

“……죄송합니다.”

알베르토가 변명 없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나딘의 시야에 드문드문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정수리가 보였다. 그걸 보고서야 뒤늦게 아차, 하는 기색으로 말을 덧붙였다.

“아니, 아닙니다. 알베르토를 탓하는 게 아니라, 하.”

나딘으로서도 몇 년 만에 보는 공작성 출신의 집사였다. 비어있는 황도의 공작저를 관리하러 떠난 후로 처음 마주했다.

황도의 저택 사용인들은 대부분 베룸 영지민이 아니었다. 적은 수이지만 황도에서 새로이 고용한 자들로 채워졌다. 영지를 잘 떠나려 하지 않는 베룸인들의 특성 때문이었다.

황도와 그렇게까지 먼 거리가 아닌데도 다들 금세 영지로 돌아왔다.

그러니 알베르토의 노고를 우습게 보아선 안 됐다. 베룸인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몇 년이나 황도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오직 베룸 공작저를 위해서였으니까.

“알베르토도 알지 않습니까. 여긴 베룸 밖이기도 하고, 아이네는 황도가 처음이니까.”

알베르토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보는 도련님은 여전하셨다.

사용인에게 쩔쩔매며 변명하는 대귀족 가문의 도련님이라니. 황도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그 작던 아가씨가 벌써 어른이 다 되셨더군요.”

“어른은 무슨, 그 아이는 더 자라야 해요. 나이만 먹었지 아직 어린애인데…….”

툴툴대면서도 과보호하는 것도 마찬가지이시고.

“어서 서재로 올라가 보시지요. 주인님께서 마도구로 계속 연락을 주신다고 하셨답니다.”

“아이네가 오면 바로 알려줘요.”

알베르토는 아가씨 못지않게 훌쩍 자란 나딘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응시했다.

모름지기 저택은 집주인이 있어야 하는 법인가 보다. 아무리 금전적으로 모자람 없다고 해도, 주인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꽤 컸다. 그건 황도에 온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은 아이네의 존재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었다.

잠들어 있던 저택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이건만, 아가씨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금세 인기인이 되었다.

‘하긴,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사용인들에게 다정하고 관대하셨지.’

오죽하면 겨우 하루 만에 아가씨의 시중을 맡고 싶다고 저들끼리 작은 다툼이 생겼을까.

하지만…….

“알베르토 님! 아가씨께서 벌써 황궁에 다녀오셨다고요? 새로 맞춘 노란 드레스는 제가 꼭 입혀드리고 싶었는데.”

나딘의 뒤를 이어 도착한 마차에서 내린 사라가 깍듯하게 무릎을 굽혔다. 아이네의 전담 하녀인 사라의 등장에 실망할 얼굴이 여럿 떠올랐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사라.”

알베르토가 빙그레 웃었다.

이 반가움도 잠시일 테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다시 영지로 돌아갈 거란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앗! 잠깐. 그 상자는 아가씨 방으로 옮겨요. 절대 떨어뜨리지 않게 주의하고요.”

“그럼 이것도 아가씨 방으로 가져다 둘까요?”

“으음, 오징어 캔디는 도련님 서재가 좋겠어요.”

베룸 영지에서 따라온 일행들로 저택 안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그래, 공작성에서는 늘 이런 분위기였는데.’

처음 황도의 저택 집사장으로 발령받았을 때는 황도에 대한 기대감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도 별수 없는 베룸인이라는 것만 깨달았다.

물질적으로는 오히려 풍족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주인 없는 황도 저택을 너무 오래 지켜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라는 존재가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종종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번에 도련님과 아가씨께서 일정을 마치시면, 나도 다시 베룸으로…….’

사라와 다른 하인들에게 숙소를 마저 배정해주는 일까지 끝마쳤다. 그러고는 알베르토가 서재로 향했다.

“도련님.”

마법 통신구에 떠오른 메시지들을 종이에 옮겨 적어둔 나딘의 얼굴이 자못 심각했다.

“알베르토. 아버지께서는 무슨 생각이실까요.”

“글쎄요, 제가 어찌 주인님의 생각을 감히 짐작이라도 하겠습니까.”

알베르토는 실수로라도 종이의 내용을 보지 않도록 시선을 돌렸다.

“아까는…….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미안합니다. 저택의 상태가 훌륭한 건 알베르토 덕이겠지요.”

“아닙니다, 도련님. 이게 제 일이니까요.”

오랫동안 쓰이지 않았음에도 책상 위엔 먼지 하나 없었다. 책장도 창틀도 상한 곳이 없는 건 늘 정성스레 관리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미리 알려줘서 고마워요. 어휴, 아이네만 먼저 황도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황실에서는 아이네와 테고의 약혼 사실을 베룸 공작에게만 알렸다.

당연했다. 지금 베룸 가문의 가주는 아버지였으니까.

원래대로면 나딘은 황도 공작저에 도착하기 전에는 알 수 없었을 일이다.

그러나 아이네에게 들어 알고 있던 알베르토가 그가 타고 있는 마차로 미리 사람을 보내 알려왔다.

‘아무리 계약이라곤 해도 벌써 황도에 소문이 제법 퍼졌으니 무를 수도 없고.’

그게 계약이란 건 방금 아버지를 통해 알았다. 아버지 역시 황제에게 당했다며 침통한 메시지를 보내오셨으니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아이네에게 직접 들어야 했다.

“영지에서부터 리테루온 공작님과 동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작님께선 어제도, 오늘도 저택에 들르셨고요.”

알베르토의 말에 나딘이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를 짚었다.

‘내가 갈 때까지 아이네를 잘 부탁한다고는 했지만.’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면 약혼이 되는 거지?

게다가 노발대발하면서 당장 황도로 쫓아올 줄 알았던 아버지의 반응도 의아스러웠다.

‘어쨌든 일단은 이대로 두고 보라니…….’

계약이라고 해서 그게 정략혼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어차피 대귀족의 혼사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다반사인데.

지난날 테고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럼 공자가 자꾸 잔소리를 하는 건 남매지간이라 그렇다는 겁니까?’

‘잔소리라뇨. 다 아이네를 걱정해서 하는 소린데. 걔가 처음부터 잘하면 그러겠어요?’

‘그렇군요……. 여동생이라.’

기껏해야 자신처럼 아이네를 여동생으로 여기려나 싶어 안심하고 맡겼더니만.

‘아이네가 친구 하자고 조를 때마다 도망가는 걸 분명히 봤는데!’

그래, 황제가 공증하겠다고 나선 만큼 정치적인 의도가 있어서일 거다. 그래서 방금 아버지께서도 자신만은 어떠한 직책도 맡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신 거고.

아버지의 다른 말씀은 어찌어찌 이해한다 치자. 하지만,

[어차피 때가 될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게다.]

이 메시지만은 무슨 뜻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짐작할 수는 있다. 아마도 아버지께서 어릴 적부터 말씀하셨던 일족의 이능에 대한 이야기겠지.

게다가 저는 아버지가 말해줄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이네가 테고까지 데리고 또 그 경계의 숲에 갔을 줄이야.

그곳을 드나들 때마다 줄어든다는 오징어 어획량 이야기는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황족만 아니면 괜찮다는 건 또 무슨 말씀이시지.’

주기적으로 마물이 경계를 넘어오는 리테루온 영지보다는 황도가 훨씬 안전할 텐데.

이런 마법 통신구로 짤막하게 주고 받는 메시지가 아니라 영지로 돌아가면 아버지께 여쭙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의외다. 평소엔 자신보다도 더 아이네를 어린애처럼 여기는 분이 그냥 두고 보시다니.

그러고 보면, 아주 예전부터 아버지가 아이네를 대하는 태도에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었다.

하나뿐인 딸로서 아끼는 건 맞지만.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귀하게 여긴다고 하기엔 조금, 다른 태도였다.

‘보통은 아무리 예뻐해도 어린아이의 의견을 실제 정책에 반영까지 하진 않지.’

특히 아이네가 종종 당연하다는 듯 꺼내는 그 특이한 발언들은 더 주의해서 듣곤 하셨다.

자신이 느끼기로는 그녀의 ‘의지’인지 아닌지에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약혼이라고요, 아버지.’

제 동생이 올해 열아홉 살로 성인이 되었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체구와 귀여운 얼굴 탓에 아이네는 나딘에게 한참 어린 여동생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런 아이가 약혼이라니.

게다가 그는 아이네의 눈동자가 변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말한 적은 없다. 심지어 아버지에게도.

비록 열네 살의 어린 나이였어도 나딘 역시 베룸의 직계였다. 어렴풋하게나마 동생이 베룸 가문의 발현자 ‘루카’라는 존재가 아닐까 의심했다.

‘후, 스물다섯이 되어야 상투아리움에 가서 확인해볼 텐데.’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신화처럼 느껴지는 건국 이야기엔 숨겨진 뒷이야기가 많았다.

다들 네 일족이라고 묶어서 말하지만 베룸은 좀 달랐다. 애초에 발현자를 뜻하는 말조차 다르게 썼으니.

회색 안개로 덮여 불투명하다고 알려진 경계 너머도 베룸 영지에선 달랐다. 불가침 영역처럼 가까이 다가가면 미치거나 환영을 보지도 않았고.

“너 혼자서는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된다. 그리고 아이네에게 먼저 말해서도 안 돼. 알겠지, 나딘?”

“그럼 아이네가 먼저 말했을 때는요?”

“아이네는…… 달라. 하지만 우린 그렇지 않으니까.”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른 편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경계 너머의 이상한 숲에 대해선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금지하기만 하셨다. 그게 우리의 ‘법칙’이라는 말과 함께.

“오빠, 아버지는 어머니랑 또 제례 지내러 가셨지?”

그리고 그날, 열두 살 아이네의 눈은 유달리 반짝거렸다.

“안 돼.”

“뭔 줄 알고 맨날 안 된대.”

아무리 아버지가 금지했다고는 해도 사춘기 남매의 호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께선 아이네가 먼저 말했을 때는 안 된다고 하지 않으셨으니까.

금지된 곳인 경계 너머는 자신들에게만 탐색이 허락된 특별한 장소였다.

그러나 정작 나딘에게 허락된 건 결계의 바로 앞부분까지만이었다.

“와, 설마 우는 거 아니지?”

“흡. 아, 아이네…….”

그 전과 달리 깊이 들어간 건 처음이어서일까.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기괴한 압박감과 찌르는 듯 무수한 시선들이 나딘의 몸을 감쌌다.

“왜 그래? 화장실 가고 싶어?”

“흣, 아니…….”

간신히 눈물을 참아낸 나딘의 손을 아이네가 맞잡았다.

“오빠!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 소름 끼치는 감각들이 아이네의 손과 닿은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생각해보면 그때라도 뒤돌아서서 나왔어야 했는데…….

뒤늦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훔쳤다. 나딘은 아이네와 조금 더 깊이 발을 내딛었다.

“뭐야, 흡, 끅! 왜 이런 곳에 오두막이 있어?”

“원래 이런 곳에 있는 게 정석 아냐? 이거 완전 해그리드 오두막이잖아.”

이번에도 아이네는 통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해그리드는 또 누구야.”

“들어가 볼 파티원 모집합니다.”

“……용병 같은 말 하지 말랬지.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네는 외부와의 접촉이 전무했다.

그런데 어디서 그렇게 옛 유물이나 도굴하러 다니는 용병 같은 말을 배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네는 나딘의 말에 홀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동생과 내부 구경에 한창일 때였다.

“오빠! 여기 봐봐. 검에 지렁이가 지나간 무늬! 이런 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

여기에도 이런 게 있네.

아이네가 신기하다는 듯 상자 내부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그가 제 동생을 돌아보았을 때.

“아이네?”

얼굴과 목소리는 자신이 알던 누이동생이 맞았다. 그러나 아이네에게서 생전 처음 보는 부분이 나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너, 눈이…….”

제 것과 꼭 닮았지만 더 커다랗고 청량하기 그지없는 하늘이 담긴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가 여러 가지 색으로 뒤섞여 번득이고 있었다.

그렇게 그날, 나딘은 제 여동생이 평범한 아이가 아니란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늘 아버지가 때가 되면 자신도 자연스레 알아보게 될 거라고 했던 말 그대로였다.

* * *

“아, 오빠랑 사라가 왔어요?”

맑은 목소리에 반가운 기색이 섞여있었다.

“응접실에서 아가씨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계십…….”

“아이네, 내가 사고 치지 말라고 했지!”

멀리서 마차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딘이 계단을 구르듯 뛰어 내려왔다.

“너, 너어!”

“나한테는 뛰지 말라고 해놓고, 자기는 맨날 뛰더라.”

지나치리만큼 태평한 얼굴에 나딘은 불쑥 부아가 치밀었다.

아버지, 어머니는커녕 저와도 한마디 상의 없이 약혼이라는 큰 사고를 쳐놓고 말이다.

숨을 몰아쉬며 잔소리를 퍼부으려 하자 아이네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오빠, 내가 지금은 말 못 하는데 이거 잘한 일이야.”

“…….”

게다가 아이네와 마차에서 함께 내린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도착했군요. 급하다는 일은 다 끝났습니까?”

“테고 경, 아니, 리테루온 공작님.”

나딘의 인사에 테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인지 크라바트도 없이 휑하게 드러난 목덜미를 그대로 내보이면서.

“오빠도 일단 들어가자. 여기서 밥 안 먹어봤지? 내 입맛에 딱이야.”

“밥? 그런 걸 먹었어?”

“아차, 밥이 아니라……. 그래, 식사!”

낑낑대며 나딘을 돌려세운 아이네가 식당으로 그의 등을 밀었다.

겨우 일주일 만이지만 반가웠나 보다. 아이네의 작은 손에 제 입이 다물어진 걸 보면.

그리고 말없이 그들을 따르는 테고의 모습에 나딘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황도에 리테루온 공작저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이네를 데려다준 게 아닌 모양이다. 당연하다는 듯 테고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녁까지 먹고 갈 기세다.

약혼은 아이네의 데뷔탕트 연회 말미에 공식 발표된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서 아직 아이네와 테고는 비공식적인 사이였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베룸 영지에 있을 때 그는 황명을 받들고 온 손님이었다. 대외적으로는 황실 기사로 알려졌으나 공작이란 걸 알기에 매번 식사를 함께한 건데.

기껏 제법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던 테고를 바라보는 나딘의 표정이 다소 사나워졌다.

‘설마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 아이네한테……. 그랬다간, 공작이고 뭐고 가만 안 둬.’

이제 굳이 공작이란 걸 숨길 필요도 없고, 숨길 수도 없는 황도였다. 그러니 이곳에서마저 굳이 붙어 다닐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는 아이네와 아침 식사까지 함께 했다고 들었다.

굳이 리테루온 공작저에서 이곳까지 새벽같이 달려와서.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이전보다 둘 사이가 묘하게 가까워 보였다.

“그럼 폐하께는 테고 경이 말씀드리는 거죠?”

“그러겠습니다. 공녀는 이제 데뷔탕트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요.”

“그쵸? 해야 하는 거겠죠?”

피할 수 없다면 더 격렬하게 피하고 싶었는데…….

아이네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때 다가온 알베르토와 사용인들이 익숙하게 아이네와 테고의 겉옷을 받아들었다. 누가 보면 이 저택의 주인이 셋인 줄 알 정도가 아닌가.

속사정이야 어땠든 황실에서 공증해준 예비 약혼자 사이. 게다가 어느새 서로를 오가는 제법 친밀한 시선.

‘이러니 공작령에서 따라온 기사들에게 물어도 이상하다는 반응이 나오지 않았군.’

기껏 놀랄 만한 일이라고 해봤자 황실 기사인 줄 알았던 그가 공작이었단 사실이겠지.

알베르토가 둘만 외출하는 걸 두고 볼 수밖에 없었던 게 이해됐다.

여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했다고 해서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다. 나딘의 곁에는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선 한 쌍의 연인이 있었으니까.

제 아버지 어머니가 그랬다. 두 분은 오죽하면 짧은 출장을 가면서도 서로 떨어지려 하질 않으시니.

‘아무리 봐도 아이네 보는 눈빛이 일주일 전이랑은 또 다른데?’

아이네를 신기한 생명체 보듯 하던 첫 만남 때의 시선과는 이제 온도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잃었다던 여동생을 대입해보는 건가 싶기도 했는데…….

‘세상천지에 여동생을 저렇게 보는 오빠가 어딨어.’

그나마 다행인 건 테고 본인조차 연애에는 영 둔해 보인다는 정도려나.

“그래도 다들 좋은 사람들 같더라고요.”

아이네가 기사단에 대한 감상을 재잘거리며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다이닝룸으로 팔랑팔랑 앞서 걸었다. 테고의 눈길이 금세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거칠긴 해도 원래 성정이 나쁜 녀석들은 없습니다.”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대꾸해주는 테고의 음성이 퍽 다정했다.

‘얼씨구?’

아마 그는 남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아, 맞다. 테고 경, 그럼 나중에 갈 때 오징어 잼 챙겨주라고 할 테니까 아까 그 주스랑 교환할래요?”

“공녀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럼 다음에 올 때 가져다주면 되겠다!”

언제부터 둘이 다음 약속을 자연스레 기약하는 사이가 되었지?

누가 봐도 계약으로 엮인 약혼 관계 같지가 않았다.

“오빠, 그거 알아? 황도에는 최근에야 오징어가 유통됐대. 바싹 마르고 오래된 것도 값이 열 배는 더 비싸더라. 문제는 성에서 먹던 거보다 더 맛이 없어.”

아이네가 호들갑을 떨며 조잘댔다. 그러자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인 나딘이 퉁명스레 말했다.

“원래 산지에서 먹는 게 제일 맛있는 거야.”

설마, 제대로 된 오징어도 없는 이 황도에 아이네가 오래 머물게 되는 건 아니겠지?

“……둘 다 싫어.”

아이네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이닝룸의 손잡이를 잡았다.

“여기 음식이 입맛에 맞는다는 게 오징어가 없어서 그런 거였어?”

“아, 마음 같아선 여기 눌러 살고 싶다.”

곁에 선 테고의 얼굴에 기대감이 차오르는 게 너무 노골적이었다.

“안 돼. 우린 베룸으로 돌아가야지.”

다만, 안심할 만한 사실이 하나 있다. 제 동생이 테고를 보는 눈빛엔 이성을 향한 호감은 전혀 없다는 것.

그런데…….

‘보통 이렇게 한쪽만 일방적으로 빠질 수가 있나?’

단기간에 그 목석같은 남자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면, 필시 무슨 사건이 있긴 있었을 텐데.

아이네의 얼굴과 태도 어디에도 그런 기색은 한 점 묻어나질 않았다.

그래서 슬쩍 그녀에게 떠보듯 충고했다. 물론 이건 테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아이네, 아무리 기한부 약혼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수도 있어.”

기한부라는 말에 테고의 표정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너, 나중에 약혼이 깨지면 어떡할래? 황도가 어디 베룸 영지랑 같은 줄 알아?”

그 말을 들은 아이네가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딘을 돌아보는 눈빛에는 일종의 작은 안타까움마저 섞여 있었다.

“으응?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나중에는 다아 이해하게 되어있어. 그리고 어차피…….”

나딘은 보았다.

곁에 서있던 테고의 목울대가 기대감으로 울렁이는 걸.

“테고 경이랑 나는 친구니까.”

다이닝룸 문을 열며 제 뒤의 두 사람에게 아이네가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안으로 먼저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

“…….”

그녀가 덧붙인 마지막 말에 테고가 돌아버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딘은 그가 처음으로 불쌍하게 느껴졌다.

‘테고 경, 의심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딘은 전적으로 아이네의 편이었다. 그녀가 먼저 호감을 갖는다면 모를까. 아직 자각조차 하지 않은 테고의 감정을 굳이 일깨워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한시적인 약혼에 불과할 거고.

‘우린 베룸으로 돌아갈 겁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는 게 가장 좋았다. 테고 같은 타입은 더더욱.

겉으로는 쉽사리 무언가에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듯 보이는 사내다.

그러나 그런 남자가 무언가에 애착을 갖고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면…….

그게 실은 더 위험하다는 걸 나딘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제 욕망을 실현할 지위와 권력까지 있다면 더더욱.

* * *

“사라!”

“아가씨.”

“이제 아픈 건 다 나은 거지?”

한차례 앓았던 터라 조금 야윈 사라의 품으로 아이네가 파고들었다. 그런 아가씨를 말리지 않으면서도 사라는 귀한 몸에 섣불리 손을 대진 않았다.

“그럼요! 죄송해요. 황도까지 아가씨는 제가 모셨어야 했는데. 저한테서 옮으실까 봐.”

아이네의 가장 가까이서 신임을 받았지만 사라는 언제나 사용인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격의 없이 대해주시는 아가씨인 만큼 선을 지키는 건 더욱더 중요하니까.

그러나 짚고 넘어갈 일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참, 아가씨.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사라에게서 몸을 떼며 그녀를 올려다보던 아이네가 몸을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이젠 테고가 황실 기사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텐데.

미리 말해주지 않아서 서운했다는 얘기인 걸까.

“으응, 뭔데?”

긴장한 낯으로 아이네가 사라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제가 모르는 드레스가 있었나 해서요.”

“아니? 사라가 챙겨준 것만 입었는걸.”

사라가 드레스를 챙기면서 순서까지 정해주었으니 다른 옷이 들어갈 리 없었다.

아이네의 눈앞에 속치마가 쑥 내밀어졌다. 황도행 첫날 테고와 마을 축제를 구경하러 갔을 때 입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

“그럼 이 속치마 위에 입은 드레스는 따로 없다는 말씀이셔요?”

“없는데……?”

그러자 사라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아니죠, 아가씨?

“제게 이 풀물이 어디서 들었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아가씨.”

사라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아가씨의 짐부터 새로 정리했다. 며칠간 제 손길이 닿지 않은 만큼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어? 속치마가 하나 모자란 거 같은데…….’

그리고 옷을 살피다가 드레스와 속치마의 짝이 맞지 않는 걸 알았다. 이상하다 싶어 빨래방에 내려갔다가 하녀들이 막 세탁하기 직전인 문제의 속치마를 발견했다.

게다가 황도로 오던 중 마을 축제에 한 번 들르셨다는 말도 들었다. 그 두 가지 사실을 조합해서 사실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하, 그거.”

아이네의 천연덕스러운 덧붙임에 사라는 왜인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감히 고귀한 분께 옷자락에 풀물이 조금 들었다 해서 캐묻겠는가.

‘겉옷은 아예 입지 않은 것처럼 풀물이 들었단 말이에요, 아가씨!’

끝단만 풀물이 든 게 아니었다. 직접 풀밭 위에 앉은 듯한 옅은 자국이 문제였다.

그걸 보고 테고 경이 실은 리테루온 공작님이었단 놀라움 따위는 진작 뒤로 밀려나 버렸다.

황실 기사든 공작님이든 어차피 사라에게는 똑같이 높으신 귀족이었다.

그보다 그녀에겐 제 아가씨가 입었던 속치마에 든 풀물이 더 중요했다.

“오다 보니까 축제를 하는 곳이 있더라고. 구경하러 갔다가 잔디 위에 앉았더니 풀물이 들었나 봐! 하하.”

아이네는 그제야 사라가 나딘만큼이나 유난스러운 걱정 인형이란 걸 떠올렸다.

“……아가씨.”

좋아, 이럴 때는 역시 말 돌리기지! 두뇌 풀가동!

“라즈베리 과일주가 특산물이라던데, 사라는 그 마을 안 들렀어?”

“설마, 아니죠?”

……실패했다.

사라의 바들거리는 손이 아이네의 어깨 근처를 맴돌았다. 아가씨의 측근 8년 차 숙련된 사용인으로서의 선 지키기에 최대 위기가 틀림없다.

“으응, 왜? 잘 안 지워져?”

사라는 가볍게 눈을 흘겼다. 뻔히 다 알면서도 제 아가씨는 속 터지는 소리만 해대고 계시니.

한 손에 다 들어오는 자그마한 어깨를 잡아 흔들고 싶은 걸 겨우 참아냈다. 다행히 사라의 이성은 최종 저지선까지 넘진 않았다.

아가씨의 반응을 볼 때 자신이 우려할 만한 상황은 없으셨던 거 같았다. 그래, 무언가 걸쳐 입었다면 웬만한 눈썰미가 아닌 이상 속치마인 줄 모를 테니까.

“휴, 차라리 제가 위에 걸칠 만한 건 따로 챙겨드릴 걸 그랬나 봐요. 그럼 코르사주라도 걸치신 거예요?”

아아, 그 딱 붙는 조끼 같은 옷 말이지?

사라는 아가씨가 그저 속치마만 입은 채로 나갔으리란 사실을 짐작도 못 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현대에서 간편한 원피스를 겪고 와서일까. 그녀는 종종 이런 쪽으로는 조금 무딘 편이었다.

제아무리 이곳에서 8년을 살며 적응했어도 원래 세계에서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떨쳐내긴 어려웠으니까.

그래서 사라의 질문에 별생각 없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치만 그 속치마는 두껍기도 하고, 밤에 보면 드레스처럼 보이기도…….”

“아가씨!”

사라가 소리를 질렀다.

“기사님, 아니, 공작님과 단둘이 나가셨다면서요!”

“으응, 테고 경은 괜찮다니까.”

그리고 결국 조끼 같은 걸 걸쳐 입고 나가긴 했는걸.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아가씨의 모습에 사라는 이마를 짚었다. 다른 영애나 영식과 교류가 없었던 과거가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늘 품 안의 아가씨일 줄 알고 오냐오냐 길렀던 게 이 사달을 낸 건 아닐까. 사라는 주인님과 주인마님께 진지하게 건의하기로 마음먹었다.

“괜찮고 말고가 어딨어요! 그분은 뭐, 남자 아니래요?”

응, 아니래. 사라.

차마 그 말까지는 해주지 못하고 아이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안 그래도 테고 경이 뭐라고 잔소리를 좀 하긴 했는데, 자기 조끼 빌려줘서 그거 위에 입고 나갔어.”

사라의 얼굴이 급기야 하얗게 질렸다. 그러고는 한 걸음 물러서서 아이네의 얼굴과 몸을 훑었다.

제 아가씨는 대체로 귀여운 느낌이 많이 남은 앳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그렇지 못한 체형이라.

“그럼, 그분이 보셨다고요?”

“…….”

아이네는 사라의 격렬한 반응에 조용히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방 안에 둘만 있었다는 말은 안 하는 게 낫겠다.’

그리고 그건 간만의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 아이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네는 제가 그렇게까지 둔한 편은 아니라고 믿었다.

거기다 이 경우엔 테고가 진짜 남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있어서이기도 했고.

“아무리 지체 높은 공작님이라도 어떤 면에선…….”

불쌍하신 분이네요. 우리 아가씨에게 제대로 된 남자 취급도 못 받으시다니.

사라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바닥을 치고 있던 테고에 대한 평가에 동정심 점수를 부여했다.

그동안은 친구 없는 아가씨에게 스스럼없이 사교 일정을 묻고, 황실 기사면서도 퉁명스럽게 구는 점이 못내 불만스러웠는데.

‘어쩐지…….’

리테루온 공작님이셔서 호위 역할이 그렇게 어색하셨구나.

하지만 불쑥 괘씸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본인도 단정하고 금욕적으로 생긴 미남이라고 하지만!

아가씨의 외모 앞에서도 태연자약한 모습이라니.

‘역시 귀족분들은 그런 사이에도 약혼해야 하는 거구나.’

조용해진 사라의 모습에 아이네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기, 나한테 화난 거 아니지?”

“예? 제가 아가씨께 어떻게 화를 내요.”

으응, 그렇다고 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이네가 마저 말을 이었다.

“황명 때문에 황실 기사인 척했던 거래. 미안, 사라한테는 말해줬어야 했는데.”

“어머, 황명을 제게 알리시면 그게 더 큰일이어요.”

사라는 진실로 그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해서 섭섭하진 않았다. 높으신 분들께는 그분들만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그, 그래?”

사라의 말에 아이네가 조금 씁쓸한 미소를 매달았다. 8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빙의 초반에는 사라와 친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어화둥둥 아이네를 아끼고 싸고돌아도 그게 곧 우정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아이네와 사라는 신분이 달랐으니까.

그렇다고 신분제의 불합리함을 성토하기엔 이 세계엔 핏줄로 이어지는 이능이 주요 설정이었다.

결국 아이네는 친구를 만들고 싶다면 같은 귀족 중에서 골라야 했다. 바로 테고나 달리아 영애 같은!

그때 사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택에 와서 들었어요. 황실 기사님, 아니, 공작님과 정말 약혼하시는 거예요?”

“으응, 황제 폐하께서 아주 잘 파시더라고.”

약을, 이라는 말은 목구멍으로 꾸욱 넣어 삼켰다.

“헝, 아가씨는 아쉽지 않으세요? 모처럼 데뷔탕트도 치르게 되셨는데……. 분명히 황도의 모든 영식분들이 아가씨께 매달렸을 거라고요.”

사라는 그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리테루온 공작보다 높거나 비슷한 작위의 미혼 남자라곤 대공이나 황태자뿐이지만, 그래도!

제 아가씨라면 로맨스 소설의 꿈 같은 상황을 현실로 만들고도 남으셨을 텐데.

눈까지 빛내며 본인의 일처럼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걸 지켜보던 아이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사라가 약혼이 너무 갑작스럽다고 할 줄 알았어.”

“귀족분들은 다 그렇게 혼인하신다고 읽었는데요? 저는 그저 아가씨께서 시집가실 때, 데리고 가주시면 되어요!”

모시는 아가씨가 사교 활동을 하지 않으니, 사라도 자연히 그런 일을 로맨스 소설로만 배우게 된 탓이다. 도대체 무슨 책을 읽은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아이네는 손사래를 쳤다.

“아냐, 그냥 약혼만 좀 유지하는 거고, 결혼까진 안 해.”

“네? 하지만…….”

“참고로 황태자랑도 안 하니까 그런 줄 알아.”

사라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이 짧은 시간 사이에 황도에서 벌써 다른 분을 마음에 둔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약혼식 전까지만이라도 즐기셔야 해요, 네?”

베룸 영지에서 아이네에게 무심하던 테고만을 기억하는 사라의 목소리가 뾰로통해졌다. 게다가 생각할수록 약이 올랐다.

‘아무리 잘생기고 신분 높은 공작님이면 뭘 해!’

고자가 틀림없어.

우리 아가씨를 그렇게 오래 보고도 반하지 않는 남자라니. 전형적인 아이네 바라기인 사라다운 평가였다.

“아, 맞다. 데뷔탕트 날 약혼 발표하기로 했어. 약혼식은 생략하고.”

“네에?”

그렇게 중요한 일을 급하게 처리한다고요? 심지어 약혼식을 생략한다니요!

데뷔탕트까지 며칠이나 남았지?

손가락으로 날짜를 꼽아보던 사라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안 돼요!”

아무리 귀족들에겐 당연한 정략 약혼이라고 해도! 우리 아가씨를 이렇게 데려가려는 법이 어디 있냔 말이에요!

아이네가 귀를 막고 눈을 찌푸렸다. 도대체 제 주위엔 나딘스러운 사람이 몇인 건지.

* * *

테고는 연회에서 이렇게 긴장해본 적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터키석으로 된 커프스링크만 자꾸 만지작거렸다.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사교계 데뷔 순간부터 출정 전에 짧게나마 참석했던 무도회까지.

원래도 큰 감흥은 없었던 연회였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부터는 황제 폐하의 명이 아니라면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도 잠깐 얼굴을 비치는 게 고작이었다.

“네가 내 비호를 받고 있다는 걸 되도록 많은 이들이 알게 해야지. 아직도 선대 황제 시절인 줄 아는 머저리들이 있으니.”

그때의 어린 테고는 아직 검은 상복조차 벗지 않은 채였다. 그런 그의 앞에서 황제는 비릿하게 웃었다.

평소엔 친근한 모습으로 곧잘 장난을 걸다가도 종종 그렇게 이를 드러냈다. 비록 제게 드러낸 건 아니었지만.

그는 반정을 일으키기 전만 해도 제법 유순하고 사교성 있던 막내 황자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황제가 된 후, 남아있는 직계 황족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겨우 예닐곱 살 된 조카에게도 그의 칼날은 비껴가지 않았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인 아이가 뭘 알겠나. 다만 폐태자의 불온한 싹으로 태어난 게 이 아이의 죄니 리테루온 영지의 북쪽 탑에 유폐하라.”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유배 길을 떠난 그의 조카는 탑에 도착하기도 전에 산적의 습격으로 행방불명되었다.

그러고 나서 황실의 지하 무덤에 작은 석관이 하나 더 생겼다는 건 알 만한 자들은 다 알았다.

충성하는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상을 내리고, 반기를 드는 자에게는 가차 없이 철퇴를 휘둘렀다.

하지만 제 편이 아닌 제국 귀족을 전부 죽일 수는 없었다. 심지어 요즘은 관대해졌다는 말도 돌았다.

그러나 테고가 보기에 황제는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로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예외 없이 뿌리까지 파낼 절호의 시기를.

“나딘 베룸 공자와 아이네이스 베룸 공녀께서 입장하십니다.”

……드디어.

오늘 데뷔탕트에서 가장 기대되는 인물이자 여태 테고를 긴장하게 했던 주인공의 등장이었다.

이미 홀 안에 입장해 있던 데뷔탕트의 다른 주인공들도, 각자 다른 이유로 참석한 귀족들도 약속이나 한 듯 조용해졌다.

요 며칠 황도는 이 작은 공녀 덕분에 떠들썩하게 달아올랐다.

거기에 3년 만에 돌아온 테고 리테루온 공작과의 약혼 소식까지 더해졌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삽시간에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역시 주인공이라는 건가요?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군요.”

“쉿, 공녀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폐하께서 직접 진행 사항까지 보고 받으셨다는군. 괜한 기 싸움은 안 거는 게 좋아.”

그제야 테고가 홀의 입구에서 시선을 잠시 떼어냈다.

그리고 일상적인 데뷔탕트 연회라고 보기 힘들 만큼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를 힐끔 둘러보았다.

3년 만에 열렸다고는 해도 다소 과했다. 언뜻 보기에는 건국 기념일 무도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화려해도 되지 않을까.

‘여기서 나와 공녀의 약혼 발표를…….’

그렇게 생각하자 눈을 찌르기라도 할 듯이 반짝이는 샹들리에의 불빛도 조금은 기껍게 느껴졌다.

테고는 약혼 앞에 붙는 ‘계약’이란 단어는 애써 무시했다.

“와!”

“세상에.”

여기저기서 감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그의 눈길이 서둘러 홀의 입구로 가 닿았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지막한 탄성이 테고의 입술 사이로 자그맣게 흘러나왔다.

“아…….”

거기엔 어떤 조명보다도 화사하게 시야를 잠식하는 그의 작은 요정이 서 있었다.

* * *

“오빠, 우리 뭐 실수했어?”

“……몰라. 나도 황도는 처음이라.”

아이네는 밤새 거울을 보며 연습했던 가장 예뻐 보이는 미소를 유지한 채 작게 물었다.

그러고는 나딘과 함께 천천히 홀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황도에 온 이후로 요즘 그녀는 은근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이곳에서도 통한다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그나저나,

‘오늘 사라가 정말 영혼을 갈아서 꾸며준 건데.’

너무 조용한 거 아냐?

박수까지 바라지는 않았지만 환호성 한둘은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으면 어쩐지 민망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조명이 센 곳에서는 색조를 진하게 해야 한다고 들은 거 같기도 하고.

“나 오늘 별로야?”

어느새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딘이 슬쩍 그녀를 훑었다.

방금까지 반짝거리던 커다란 눈망울이 조금 울멍해진 듯했다. 비록 철없고 제멋대로인 면이 없잖아 있어도 그런 아이네에게 핀잔을 줄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난 오빠니까 괜찮아!’

그래서 나딘은 제게 끼워진 동생의 팔을 단단하게 고쳐 잡았다.

“그래도 영 못 봐줄 수준은 아니야. 자신감 가져.”

“……뭐?”

지금 여기서 싸움을 건다고? 이렇게 갑자기?

아이네의 눈이 새치름하게 접혀 들었다. 황당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까지 크게 내고 말았다.

“와, 진짜로 움직인다.”

“목소리도 예뻐.”

“걸어 다니는 요정이라더니…….”

감탄사가 뒤늦게 터져 나왔다. 바라 마지않던 반응에 아이네의 얼굴은 다시 해사한 미소로 물들었다.

‘역시 먹힐 줄 알았어.’

그에 더해 거울 앞에서 한참 연습했던 살랑살랑한 손인사까지 곁들였다. 그러자 홀 안의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나딘이 곁에서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사교계에 나와볼걸.

신분이 보잘것없을 때 뛰어난 외모는 독이라지만 지고한 신분까지 갖춘 미모는 또 다른 무기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아이네는 기꺼이 그 무기를 이용해 여태까지의 오명을 벗을 생각이었다.

‘이제 병약하고 친구 없는 외톨이 공녀는 안녕이야!’

물론 예상치 못하게 원작 여주의 약혼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후의 주요 전개를 온전히 지켜내면 되지 않을까.

그래야 지금 이 원작도 무사히 끝내고, 이 다음의…….

“어?”

“아이네, 왜 그래?”

“아니, 아니야.”

방금…… 내가 뭐라고 생각하려던 거지.

아이네의 입가가 살짝 굳었다. 미소가 다소 흐려진 걸 눈치챈 나딘이 팔꿈치로 그녀를 쿡 찔렀다.

역시 이렇게 많은 사람 앞은 처음이라 긴장했나?

그래서 나딘은 부러 작은 목소리로 시비를 걸었다.

“너 괜히 들떠서 춤추다가 밟으면 진짜 가만 안 둔다?”

“내가 오빤 줄 알아? 누가 실수하나 내기할래?”

티격태격하면서도 둘은 근사하고 여유로운 웃음을 거는 걸 잊지 않았다.

코웃음을 친 나딘이 자신의 팔에 걸쳐진 아이네의 팔을 슬쩍 바라보았다.

건강이 많이 회복됐다고는 해도 제 눈엔 여전히 가느다랗기만 했다.

“그럼, 한 달간 오징어 나와도 골라 먹지 않기. 못 하겠으면 그만두시든가.”

의기양양한 나딘의 표정에 아이네는 바짝 약이 올랐다.

아하,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그렇다면 나는 네 놈에게서 소중한 걸 빼앗아 주지.

“……콜.”

“너, 그런 도박꾼 같은 말은 또 어디서……!”

눈은 다시 생글생글 웃고 있으나 그렇게 381차 남매 전쟁은 이미 발발해 있었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마침 적절한 시기에 황제와 황태자가 등장했다.

배운 대로 서둘러 고개를 숙인 나딘과 아이네의 팔꿈치는 분주하게 서로를 찔러댔다.

* * *

누구보다 화려하게 사교계에 데뷔한 아이네의 첫 춤 상대는 당연히 나딘이 되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아직은 약혼 전이었으니까.

“하나만 물어보자. 왜 하필 테고 경이야?”

“응? 테고 경이 뭐가 어때서 그래.”

나딘이 애매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계약이든 아니든 네가 지금 약혼할 필요가 있어?”

크윽, 깜박이 좀 켜고 들어와.

역시 임시 보좌관이니 뭐니 하는 어설픈 핑계는 나딘에게 통하지 않았나 보다. 차마 달리아 영애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 없어 아이네가 말을 돌렸다.

“어젯밤에 오징어 잼을 아예 숟가락으로 퍼먹더니 이상해졌나 봐. 오징어 좀 끊어.”

남들이 보기엔 서로 꼭 닮은 미인 남매가 우아하게 홀 중앙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상 둘 사이에는 퉁명스러운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민감한 오징어 문제를 건드려서일까. 나딘이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오징어는 죄가 없어. 약혼까지 한 남자랑 친구하겠다고 하는 네가 이상한 거지.”

“뭐어? 오빠도 남녀 간에는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타입이야?”

그래도 나딘은 이런 시대 남자치고 꽤 열린 사고를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네가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에 나딘이 발끈했다.

“남녀 간에 친구가 어딨어. 그리고 친구는 너 혼자 우긴다고 되는 게 아니야.”

이게 무슨 구닥다리 훈장 할아버지 같은 소리야.

나딘이 저렇게 말하는 건 그동안 테고와 친분을 쌓으려던 아이네의 눈물겨운 노력을 몰라서일 테다. 일반론이라면 나딘의 말에 일견 맞는 구석이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테고는 남자가 아니란 말이다. 아무리 아티팩트로 겉모습을 감쪽같이 감췄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눈치를 못 채나?

답답하지만 아이네는 책빙의자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저렇게까지 둔한 건 제로에 가까운 연애 경험 때문일 테니까.

“어휴, 여태 연애 한 번 못 해본 데는 이유가 있다니까.”

“야! 너, 그 말이 지금 왜……! 앗.”

아이네의 핀잔에 순간 울컥한 나딘이 잠시 스텝을 삐끗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 작은 악마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징어 캔디 4주 압수.”

“……한 번만 봐줘.”

“응, 안 돼. 안 해줘, 돌아가.”

제 동생이지만 그녀는 잔인한 데가 있었다.

베룸의 냉철한 워커홀릭으로 유명한 귀공자 나딘의 표정이 순식간에 울적해졌다.

* * *

“아…….”

진작에 도착해 두꺼운 커튼 너머로 아이네의 등장을 바라본 황태자는 입을 작게 벌렸다.

데뷔탕트를 상징하는 새하얀 드레스가 눈부셨다. 별다른 노출 없이 자잘하게 달린 레이스만으로도 빛이 났다.

그리고 이어서 가슴 윗부분에만 하나 달린 커다란 리본형 브로치에 눈길이 갔다.

거기에 박힌 맑고 청명한 빛깔의 터키석이 꼭 그녀의 눈동자 같았다.

응접실과 알현실에서 보았을 때도 저절로 눈길을 사로잡는 공녀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쏟아지는 조명 아래의 그녀는 어쩐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쯧쯔, 네 취향이 베룸 공녀인 줄은 몰랐구나. 그때 이야기를 하지 그랬어.”

곁에서 제 아들의 멍한 얼굴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황제가 혀를 찼다.

그제야 표정이 잔뜩 풀어진 스스로를 알아챈 아르비드가 애써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리테루온 공작의 짝으로 점찍어 두신 것 아닙니까.”

“어차피 계약 약혼 아니냐. 목적만 달성하고 나면 굳이 리테루온 공작일 필요가 없지.”

느긋하고 여상한 목소리에 그가 다시 황제를 응시했다.

“그럼, 정말로 황태자비로도 생각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왜? 이제 와서 아쉽기라도 해? 내 누누이 말하지만 그저 앉아만 있으라고 네놈에게 온전한 황태자 자리를 쥐여 준 줄 아느냐.”

권력은 갖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중요한 법이라며 황제가 혀를 찼다.

아르비드는 옷 사이로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또, 늘 그렇듯이 제 의중을 떠보시는 거겠지.

항상 이렇게 모든 일을 마음대로 처리해놓고는 뒤늦게 저를 한심하게 여기셨다. 그깟 허울만 좋은 선택권.

물론 저에게만 그런 건 아니었다.

지금 베룸 공녀의 머리 위를 장식한 자그마한 티아라는 황실의 것이었다.

‘황제가 직접 하사한 티아라라니…….’

아직 한참 어린 황녀를 대신해 사교계를 이끌 꽃으로 공언한 셈이었다.

과연 그 과정에서 베룸 공녀의 의사를 묻기나 했을까. 또 나중에 물어보면 뒤늦게서야 왜 그때 거부하지 않았냐고 하시겠지.

아르비드의 눈은 여전히 배시시 웃는 공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폐하께서 티아라를 보낼 줄 알았더라면 자신도 장신구 하나라도 함께 보낼 것을.

‘오팔로 된 목걸이도 분명 잘 어울릴 텐데.’

그날 본 눈동자 색이 꼭 오팔과 닮았었다.

집무를 보는 와중에도, 답답한 마음에 정원을 거닐 때도 문득 생각이 났다.

겨우 한 번 본 사이에 사랑에 빠졌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눈동자 색도 그렇고, 테고에게 이끌려 나가던 뒷모습도 잔상처럼 남았다. 도대체 공녀는 어떤 사람일지 무척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 눈은 뭐였는지. 내내 반응 없던 제 손가락의 반지 아티팩트는 왜 갑자기 뜨거워졌는지.

그리고 리테루온 공작은 왜 그런 난생처음 보는 얼굴을 했는지…….

자꾸만 생각이 났다.

아르비드는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훤칠한 키의 진한 고동색 뒤통수를 발견하자 그의 시선은 그곳으로 향했다.

비록 뒷모습뿐이지만 리테루온 공작에게서 기이한 열기까지 느껴지는 기분이다.

“베룸 영지에는 기껏해야 보름 남짓 있었을 뿐인데 아주 푹 빠진 모양이군.”

“…….”

황제의 목소리엔 일이 재미있게 되었다는 듯 장난기가 배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말에 아르비드는 어쩐지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제 등장할 시간이구나. 나오너라, 아르비드.”

그리고 홀 안에는 첫 번째 춤곡을 알리는 첫 음이 울려 퍼졌다.

* * *

나딘은 절망했다.

‘아, 안 돼.’

다른 이들은 요정 같다고 칭송하는 제 여동생의 얼굴이 악마처럼 보였다.

격무에 시달리는 그의 유일한 낙은 책상 위 알록달록하게 포장된 오징어 캔디였다.

‘갑자기 당 떨어질 때만 아껴 먹었는데…….’

나딘은 깊은 충격에 빠진 나머지 춤곡이 어떻게 끝나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그들 남매의 곁으로 테고가 다가온 것도 뒤늦게야 알았다.

“공녀…….”

익숙한 목소리에 설렘과 기대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귓가를 나직하게 감싸 안는 듯한 음성과 존재감이 어느새 아이네의 등 뒤로 성큼 다가섰다.

그러자 그녀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불쑥 내밀어진 커다란 손을 따라 아이네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

원작 여주가 잘생기고 예쁘고 혼자 다 해먹는 소설인 거 알고는 있었는데…….

“다음 춤을 함께할 영광을 제게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밝은 조명 아래 근사한 차림으로 테고가 서 있었다.

역시 그에게는 다른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심지어 오늘은 베룸 영지에서와는 달리 편하게 흘러내린 머리칼을 깔끔하게 빗어 넘겼다. 그 덕에 잘난 얼굴이 더 눈에 띄었다.

불시에 닥친 잘생긴 얼굴에 아이네는 동그랗게 뜨인 눈을 어쩌지 못했다. 그저 입만 작게 벌릴 뿐.

“공녀?”

“아.”

방금 좀 위험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뜰 뻔했어.

저보다 한참은 큰 손을 빤히 보다 그녀가 천천히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아닌 거, 아는데. 와,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매번…….’

이제 아이네는 잘생긴 주인공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반하는 조연들을 개연성 없다며 욕하지 않기로 했다.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말을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이야.

비중에 따라 외모가 결정되는 로판 소설 속 주인공답게 테고는 무심한 듯 심지가 강해 보이는 미청년이었다.

반면, 황태자는 역시 서브남답게 약간은 처연한 느낌이 얼핏 들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감정을 감추는 데에 익숙하다 못해 좋아하는 마음까지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전형적인 서브남주 캐릭터면서 그쪽도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던데.’

화사한 불빛 아래서 달콤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모든 소설의 주요 인물들 중 누군가 하나는 어째서 꼭 금발인지 절절하게 깨달을 만큼.

아르비드는 서브남주에 황태자만 아니었어도 관심을 가져볼 법한 미남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약혼자를 맞이할 테고에게 미묘한 기분을 느낄 때가 지금 무렵일 텐데.

아이네의 시선이 황제와 황태자가 앉아있던 상석을 힐끔 훑었다.

역시 아르비드의 진녹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있었다. 약혼자가 바뀐 것 정도로는 전개가 크게 틀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공녀.”

테고가 재차 아이네를 불렀다.

“그럼, 기꺼이…….”

그녀의 자그마한 손이 제 손아귀에 들어오자마자 테고는 다소 조급하게 쥐어 이끌었다.

베룸 공작성 뒤편의 숲에서는 내내 맞잡았던 손이었다. 게다가 그녀와 처음 추는 춤도 아닌데도 못내 긴장이 되었다.

“…….”

그래서 뒤늦게 깨달았다. 방금까지 제 얼굴에 꽂혀 있던 아이네의 눈길이 자신을 지나쳐 뒤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까부터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아르비드가 있을 터.

불현듯 의식하게 된 사실에 긴장으로 굳어있던 테고의 입매가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불쾌했다. 처음 저를 보았을 때 흥미롭게 탐색하던 공녀의 관심이 황태자에게로 옮아간 듯해서.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다가서서 아이네의 시야를 차단하기에 이르렀다.

갑작스레 가까이 붙은 테고 때문에 그녀의 놀란 토끼 같은 눈망울이 다시 위로 향했다.

“테고 경?”

“……너무 오랜만이라 제가 적절한 간격을 잊었군요.”

오랜만이라니. 같이 춤춘 게 불과 며칠도 안 지났…….

“아.”

가까이서 올려다본 그와의 체격 차이에 아이네는 다시 한번 말을 잃었다.

지난번 모닥불 앞에서는 조명이 없어서 그렇게까진 실감하지 못했나 보다.

커다란 손은 그렇다 쳐도 어깨며 가슴팍이 눈앞에 가득 찰 정도로 거대했다.

‘몸 하나는 정말 남자답긴 한데, 내가 여기서 너무 크다고 말하면 상처받겠지?’

그런데 소설에서는 키만 컸지, 원작 남주인 대공보다 가냘픈 체구인 거 아니었나.

하지만 그녀의 앞에 선 테고는 빈말로라도 가냘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럼 대공은 도대체 얼마나 더 커다랗다는 거야, 곰이야?’

또래 영애들보다 작은 아이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창 성장기에 앓느라 보통의 또래들만큼 자라지 못한 자신을 탓해야지 어쩌겠나. 아이네의 눈가로 소금기가 몰려들었다.

아마 그도 이렇게 작은 영애를 상대하는 건 자신이 처음일 거다.

원작에서처럼 달리아 영애와 나란히 섰다면 그림이 좀 더 근사했을 텐데.

지난번에 마주쳤던 달리아 영애는 자신보다 한 뼘쯤 더 큰 이상적인 미인이었다.

‘으윽, 이런데도 내가 약혼자인 거 말고 원작에서의 달리아 영애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아이네는 갑작스레 자신감이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남주와 서브 남주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건 물론, 원치 않게 남자로 살아야 했을 테고를 종종 씁쓸하게 만드는 역할까지.

아직 등장하지 않은 남주인 대공을 제외하더라도 존재감 하나하나가 쟁쟁한 주인공들이다.

‘악역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원작 소설의 작가 선생님, 당신은 계획이 다 있으셨군요.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괜찮아요. 제가 바른길로 이끌어줄게요. 나만 믿어요.”

“…….”

어쩐지 오늘따라 더 새파랗게 타오르는 테고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아이네가 작게 속삭였다. 물론 이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 * *

“…….”

한편, 테고는 또다시 막막한 기분에 부딪혔다. 아주 높고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느낌.

방금까지만 해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황태자를 기웃거리던 그녀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을 보고 결의에 찬 표정을 짓는 공녀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한단 말인가.

“저, 남자 파트도 출 줄 아는데 살짝 알려드려요? 여기선 교본대로 춰야 하니까요.”

“하…….”

어두운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그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고 동그란 머리가 먼저 눈에 띄었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면 여린 새싹 같은 머리카락이 돋아난 정수리가 늘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고 나서 조금 더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희고 보들보들한 뺨이 보였다.

제가 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는 일이 처음인 듯싶었다.

무엇보다 그의 기분을 가장 이상하게 만드는 건 아이네의 눈이었다.

단순히 크고 동그란 예쁜 눈이라서가 아니라…….

맑게 반짝이는 눈빛이 제게 다정하게 와 닿는 게 좋았다.

처음에 의심했던 대로 어디가 모자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자신에게 바라는 게 있어서도 아닌 것 같은데.

‘오히려 바라는 게 너무 없는 거 아닌가.’

태어나서 여태껏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는 탓일까.

테고는 그녀의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만약 다른 이들처럼 흑심을 품고 제게 덤벼들었다면 당장에 잘라냈을 거면서.

요즘 들어 아이네의 태도는 무언가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아니, 아닙니다. 기억났습니다.”

“남자 스텝이랑 여자 스텝 방향이 전부 반대라서 그렇죠? 어휴, 방향치는 어떻게 둘 다 익히라고! 전 이해해요.”

잠시 조용했던 홀 안에 선율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네가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하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

아니, 테고는 이번에도 이해하지 못했다. 방금도 방향치란 자신을 뜻하는 듯한데, 평생 그와는 관계가 없는 단어였다.

베룸 일족의 남다른 판단력과 안목은 나딘 공자를 통해 충분히 알았다. 그건 적어도 상식의 범주 안에 들어갔으니까.

하지만 종종 공녀가 확신에 차서 내뱉는 뜻 모를 소리는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저 청명한 눈으로 자신을 직시하는 게 분명한데도 자꾸만 어긋나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베룸의 발현자는 ‘진실의 눈’으로 뭘 보길래.

궁금했지만 먼저 물어볼 수는 없었다. 자신이 알아챘다는 걸 안 순간, 베룸으로 돌아가겠다고 할까봐.

그건 나딘의 완강한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우린 베룸으로 돌아가야지.’

‘그런 이유로 베룸 공작 역시 여태 꼭꼭 숨겨두었을 테니까.’

서로 다른 생각에 빠진 두 남녀가 홀의 정 가운데에서 천천히 첫 춤을 열었다. 그런 그들에게 수많은 시선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테고는 그중에서 유난히 신경 쓰이는 아르비드의 눈길을 등으로 막아가며 차단했다.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지나친 관심에 한창 예민해진 상태였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 바람에 아이네가 자신의 품 안에 폭 안긴 듯 보였다. 마치 이전 무기점에서처럼,

저도 모르게 테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미련하게 큰 덩치도 이럴 때는 쓸모가 있군.’

그래서 테고는 소중하게 잡고 있던 그녀의 부드러운 손등을 들어 가볍게 입으로 가져다 댔다.

어느 누구에게든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다분히 충동적이기도 했다.

“음? 테고 경?”

그 바람에 술렁이는 주변 공기가 느껴졌지만 그는 아이네의 눈으로 오롯이 시선을 집중했다.

본디 주목받는 걸 그렇게 싫어했으면서도 이번만큼은 모두에게 과시하고 싶었다.

“제가 연회는 오랜만이라 인사를 잊은 듯해서 말입니다.”

“아, 아아. 그렇군요.”

처음에는 라니엘을 생각나게 하는 발현자인가 싶어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시작한 관심은 그녀를 향해 점점 더 커져 갔다.

분명히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과 호기심이 그 뿌리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알 수가 없다.

‘어쩌다가 내가 공녀의 일상과 시선까지 탐을 내게 된 거지.’

두 번째 춤곡이라서인지 첫 곡이었던 왈츠보다 다소 빠른 박자가 이어졌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주위의 커플들이 준비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오직 테고만이 여전히 의미 모를 눈으로 아이네를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테고 경, 남자 파트는 왼발을 뒤로 살짝 빼면서 시작이에요.”

보다 못한 그녀가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가 아이네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음, 너무 안쪽으로 당겨 잡은 거 같은데?’

안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 가까이 서 있던 참이다.

당황한 테고가 급하게 끌어안는 바람에 서로의 몸이 밀착되듯 닿았다. 이미 한번 가깝게 닿았던 적이 있어서인지 제 손이 그 감각을 기억했는지 거침없다.

한 손에 잡히는 아이네의 가느다란 허리와 또다시 부드럽게 느껴지는 여체의 감각에 그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아.”

또 잊었다.

기억에 남았다고 해서 그 감각이 익숙해지는 일과는 별개인 것을.

“오른발을 사선으로 뻗으면서 살짝 돌아요.”

“…….”

급기야 그녀가 어깨로 밀어 테고에게 안기며 움직임을 리드했다. 그러자 그가 입안의 살을 더욱 세게 깨물었다.

그렇게 저절로 터져 나오려는 스스로에 대한 욕설을 간신히 참아 넘겼다.

‘제길.’

……다른 생각을 해야 했다. 방금 자신에게 느껴졌던 감촉을 절대로 되새겨서는 안 된다.

그답지 않게 멋 부리느라 몸에 꼭 맞는 연회복을 입었으니 더더욱.

테고는 간신히 아이네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처음에는 다소 긴장한 듯 뻣뻣했던 그의 동작이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휴.”

그러자 아이네는 드디어 한숨을 돌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남장여주는 항상 이런 지점을 조심해야 한다니까. 의외로 남자 흉내를 완벽히 내기는 녹록지 않은 법이거든.

그런 아이네의 생각을 증명하듯 딱딱하게 굳어 잔뜩 힘이 들어간 테고의 턱이 시야에 잡혔다.

늘 생각하지만, 모르면 착각하기 쉬운 지점이 너무 많았다. 지금처럼 뻣뻣하게 굳은 모습을 보면 다들 자신 때문에 긴장해서 그렇다고 생각할 거다.

자신 때문에 긴장하는 남자라니, 어떤 여자가 설레지 않겠어?

어라, 그러고 보니…….

‘오늘 달리아 영애도 분명히 왔을 텐데.’

마침 테고의 동작에 드디어 여유가 생겼다.

안정적인 템포를 유지하는 그의 리드 덕에 아이네는 마음 놓고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약혼자 역할을 맡게 된 이후,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달리아 영애를 찾아 시야 안에 둬야 했다.

‘아, 키가 작으니까 잘 안 보여!’

다행히 아직까진 서로를 가볍게 잡고 빙글빙글 도는 동작만 많은 춤곡이었다.

그녀의 눈이 달리아를 찾아 분주하게 연회장을 훑었다.

……찾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건 데뷔탕트 주인공의 전유물인 화이트 계열 드레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테고와 맞춘 듯 짙은 남색이 메인인 우아한 차림이었다.

기실 성인이 되어서 데뷔탕트를 치르는 아이네가 특이한 사례였다. 보통은 열대여섯이면 사교계에 데뷔를 했으니까.

달리아 영애도 수도에서 지내는 만큼 이미 데뷔탕트를 치른 거겠지.

‘와, 다시 봐도 예쁘긴 진짜 예쁘다.’

처음의 목적도 잊은 채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달리아는 아이네와 테고처럼 홀의 중앙이 아니라 연회장의 외곽으로 혼자 물러나 있었다.

‘저 정도 미모가 되면 구석에 있어도 존재감은 여전하구나.’

분명 그 부근엔 화려한 조명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워낙 채도 높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져서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더 눈에 띄었다.

그녀 주위에만 빛무리가 반짝반짝 뿌려진 것처럼.

분명 아직 성년이 채 되지 않은 영애인데도 고아한 매력이 있었다.

테고의 약혼자가 자신이 되더라도, 혹시 달리아 영애가 그에게 반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관심도 없잖아?’

하지만 역시 기우였나 보다.

다만, 지난번과 달리 우울해 보이는 낯이라는 게 좀 의아스러웠다. 그래도 그건 그거 나름대로 분위기 있어 보일 정도인걸.

이런 걸 보면 원작 여주가 남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억지로 끼워 넣느라 달리아도 희생양이 된 셈이다.

아름답고 능력 있는 그녀에게 주어진 가혹한 환경.

‘이거 봐, 사실상 악역은 작가가 만든 거라니깐.’

사정을 알고 보니 어느 인물 하나 딱하지 않은 사람이 없구나.

마침 테고와 잠시 몸을 떼어냈다가 한 바퀴 돌며 끌어당겨지는 순간이었다.

뒤를 돌아 다시 마주한 달리아와 불현듯 눈이 마주쳤다.

“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다른 곳만 바라보던 그녀였는데.

잠시이긴 해도 제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준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아이네에게도 친절했던 영애의 결말이 안타까워서 대신 약혼자가 되기로 한 걸 알아주는 것 같달까.

“사교계는 처음이라면서 여유가 있군요.”

그제야 테고의 손까지 맞잡고 춤을 추면서 그를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묘하게 심통이 난 듯한 목소리는 기분 탓이겠지?

그래도 그런 목소리와 별개로 아이네를 붙잡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내가 체력이 없어서 그렇지, 돌리에 부인의 수제자라고요.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해요.”

잔뜩 으스대는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에 테고가 옅게 웃었다.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연회장을 힐끔거리는 게 누가 봐도 처음인 티가 났다.

아마 아이네를 바라보고 있는 홀 안의 모두가 알아챘을 테다.

누가 보아도 이번 데뷔탕트의 주인공이 아이네라는 것을. 머리 위에 자그맣게 올려진 티아라가 그 증거였다.

그때, 무슨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갑자기 아이네가 입을 열었다.

“달리아 에펜베르크 영애를 보고 있었어요.”

“흠?”

그저 내부를 탐색하는 줄 알았던 그녀의 말에 테고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공녀를 바라보고 있는 달리아에게로 잠시 시선을 주었다. 아이네는 그런 테고를 관찰하다 혀를 찼다.

‘아무리 같은 여자라도 저 미모를 보고 표정 하나 변하질 않네. 지독하다, 지독해.’

이러니 처음부터 어긋날 수밖에 없는 관계였던 거다.

이제 곧 황제 폐하가 테고의 약혼 소식을 공언하면 정말로 원작과는 달라지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둘을 번갈아 보니 문득 테고의 의상이 눈에 들어왔다.

달리아와 나란히 서 있으면 맞춘 듯 보일 법한 어두운 색 계열의 정장.

흥. 저와 비슷한 점이라고는 제 가슴팍에 달린 리본의 터키석 정도뿐인데.

거기다 테고의 터키석 커프스링크는 너무 자그마했다. 이 정도라면 거의 비슷한 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의상 면적부터 달리아 영애와 차이가 나는구나.’

아이네가 저도 모르게 토라진 사이 테고는 그녀가 말한 영애를 찾고 있었다.

아이네가 보기에는 그냥 슥 훑어도 눈에 띄는 달리아를 한참 걸려 찾아낸 테고의 표정이 금세 심드렁해졌다.

‘저 영애는…….’

여러모로 구설에 오르는 에펜베르크 가문의 영애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공녀와 마찬가지로 황제가 황궁에 들인 영애 중 하나였던가. 그 사실 외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다시 공녀에게로 고개를 돌린 테고는 문득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데뷔탕트가 끝나면 공녀와 함께 일하는 건가.’

어쩐지 기사단으로의 출근이 즐거워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비록 칼릭이라는 이물질이 거슬리긴 했지만.

마침 춤곡이 마무리되고 아이네가 그에게 살짝 손짓을 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의미인 듯하여 테고가 등을 구부정하게 숙였다.

달리아를 발견하고 딱딱해진 테고의 표정을 본 아이네는 오늘도 제 좋을 대로 해석했다.

‘역시 여성스럽게 꾸민 달리아 영애가 신경은 쓰이나 봐’

개인적으로 그녀는 요염하게 생긴 달리아보다 테고처럼 청량하게 생긴 미인이 취향이었다.

“이거 진짜 비밀인데, 테고가 오늘 너무 멋있어서 말해주는 거예요.”

“……뭡니까.”

워낙 조그마한 그녀를 위해 살짝 몸을 숙였을 뿐인데. 아이네는 늘 그렇듯 그에게 너무 거침없이 다가섰다.

귓가가 간지러워질 정도로 가까워진 숨결에 테고는 또다시 심란해졌다.

“제가 볼 때는 달리아 영애보다 테고가 더……. 음, 음.”

뜸을 들이며 주저하는 아이네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숨결만큼이나 달콤한 음성을 놓치지 않으려 저도 모르게 조금 더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이 열리는 그 순간,

“……답다고 생각해요.”

“리테루온 공작과 베룸 공녀는 이리로 오라.”

무언가를 말해버리고 후련한 얼굴이 된 아이네가 씩 웃었다.

하필 황제가 그들을 부르는 바람에 테고는 재차 묻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볼 때, 공녀가 또 엉뚱한 생각을 한 것 같아 굉장히 찝찝했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원작 여주님! 대공이 나타날 때까지만 시켜줘, 당신의 자존감 명예 소방관.’

아이네는 남장이야말로 가장 여성스러운 행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고? 남장은 여자만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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