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동상이몽
황제와 황태자가 앉아 있는 연단으로 테고와 아이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곁에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나딘이 서둘러 따라붙었다.
그는 오징어 캔디 압수의 여파로 테고가 제 동생에게 손을 뻗는 걸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히 손이 빠르단 말이야.’
나딘은 오늘따라 더욱더 반질반질하게 빛이 나는 테고의 얼굴을 힐끔 훑었다.
아이네는 아직 그를 모처럼 사귄 친구 정도로 취급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딘은 테고를 예의주시 대상에서 뺄 수가 없었다.
고작 일주일을 둘만 남겨두었더니 약혼을 하질 않았나.
아무리 계약이라지만 여차하면 이러다 아이네를 홀라당 보내게 생겼다.
‘정신 바짝 차려라, 여기는 황도야!’
역시 눈 감으면 코만 빼고 다 베어간다는 황도다웠다.
테고와 아이네의 뒤를 따르며 나딘은 새로운 사실을 속속들이 깨닫는 중이었다.
먼저, 짧은 기간이나마 친분을 쌓은 테고의 원래 걸음걸이는 절대 저렇게 느긋하지 않았다.
어쩐지 테고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생각에 나딘의 눈이 가늘어졌다.
게다가…….
‘데뷔탕트가 아니라 이건 건국 기념일급 연회 아니야?’
고작 영애들의 데뷔탕트 연회라기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제야 알아챈 게 이상할 정도로.
황도에 있는 귀족 중 자격이 되는 귀족은 전부 다 튀어나온 모양이다.
이상한 건 또 있었다. 분명히 황도의 정통 예법을 배웠을 아이네인데, 이를 본 귀부인들은 새로운 것이라도 보는 양 눈을 반짝였다.
“베룸에서만 살았다는데 걸음걸이를 어떻게 저리 세련되게……?”
“그동안 황도의 예법은 어린 아가씨들한테는 좀 무거웠는데, 저것도 괜찮네요.”
왜 베룸인들이 황도나 다른 영지에 가면 이질감을 느끼는지 알 것 같았다.
미묘했다.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
마치 누군가가 그들과 저희 사이를 억지로 붙여놓고 접합부위만 어설프게 문질러 둔 그런 기분.
하지만 아이네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나 보다.
아까부터 그저 주위의 시선을 마음껏 의식하며 한껏 예뻐 보이는 각도로만 고개를 틀었다.
‘그럼, 아이네는 이런 사람들 반응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가.’
남들은 모르는 걸 미리 아는 기색을 보이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일이 요즘 들어 더 잦아졌다.
도대체 뭘까. 여태까지는 각자 흐르던 가느다란 물줄기가 어느 순간 한데 모여 하나의 흐름이 되는 것 같은 이 기시감은.
‘우리한테서 뭘 노리는 거야.’
처음 와본 황도였다. 그리고 고작 며칠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이미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나딘이 모를 리는 없었다.
리테루온 공작이 베룸 영지를 잠시 거쳐 가다 우연히 아이네이스 베룸 공녀와 사랑에 빠졌다더라는 소문.
처음 그 소문을 들은 그는 코웃음을 쳤다.
직계 혈육 하나 남지 않은 젊은 공작과 이제 막 성년이 된 공녀가 ‘우연히’ 사랑에 빠지다니. 그런 걸 누가 믿는다고.
그런데 며칠 사이에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아마 조금이라도 정세를 아는 이라면 자연스럽지 않다고 눈치챘을 테다.
그랬는데, 분명히 그랬어야 했는데.
지금 테고가 아이네를 보는 시선. 아까 춤을 추며 다정해 보였던 둘의 모습.
이걸 보고 누가 계약 약혼이라고 생각할까. 차라리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겠지.
나딘이 생각해볼수록 황제의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린 약혼인 건 더 티가 났다.
과하게 화려한 연회장에, 여태껏 없었던 미혼의 고위 귀족 스캔들이라니.
“오, 베룸 공자도 왔군. 마침 중요한 이야기를 할 터이니 공자도 함께 있는 게 좋겠지.”
마치 부르는 걸 깜박했다는 듯 능글거리는 황제의 목소리에 나딘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제 와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고 해도 이미 황제와 아버지 사이에서 이야기가 끝난 사안이었다.
나딘은 마법구를 통해 어째서 이렇게 쉽게 허락하느냐 여러 번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머뭇거리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길 꺼리셨다.
‘자꾸 황도와 베룸 밖의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고만 하시고 대답을 해주질 않으시니.’
언급하신 ‘수상한 움직임’은 도대체 뭘까. 분명 아버지도 무언가를 알고 계신 거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네를 그렇게 싸고돌던 분이 이렇게 별 이유 없이 쉽게 물러나실 리 없으니까.
“마침 베룸 공녀가 데뷔탕트를 치른다고 하니, 내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황제가 아이네의 머리 위를 보고 싱긋 웃었다.
“주인을 제대로 찾아간 것 같군.”
그렇게 황실에서 보낸 티아라를 가장 먼저 부각시키고는.
곁에 앉아 있는 아르비드에게 슬쩍 시선을 준 황제가 말을 이어나갔다.
“리테루온 공이 베룸 영지에서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야.”
감히 누구도 그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는 사이, 황제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유쾌하게 웃었다.
“리테루온 공은 사사로이 보자면 내 대자가 아닌가. 짐이 친히 약혼 공증을 하면서도 뿌듯하더군.”
본디 약혼은 가문 간의 사적인 일에 불과했다.
물론 대귀족, 특히 후계자의 경우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고, 형식적이나마 황실의 재가가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황제가 혼인도 아닌 약혼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것도 굳이 어린 영애들이 주인공인 데뷔탕트에서.
홀 안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이 맴돌았다.
소문을 듣고 데뷔탕트에 참석한 귀족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특히 여태 황제파에도, 귀족파에도 속하지 않고 미적지근하게 중립만 지키던 이들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역시 공녀가 머리에 얹고 나타난 티아라를 봐도 그렇고, 황제가 사교계에 직접 손을 뻗으려는 모양이다.
“내가 아이네이스 공녀라고 불러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생각보다도 더 티아라가 잘 어울려. 다음에는 드레스를 보내볼까 하는데, 원하는 색이 있다면 미리 시종장에게 언질을 주도록 해. 이제 내 대자의 약혼자이니 우리가 남도 아니고.”
조금 전까지 모두 짐작만 하던 황제의 의도가 확실히 드러났다.
황제는 아이네를 통해 베룸을 중앙으로 끌어들이겠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그녀를 사교계의 가장 윗자리로 올려놓았다.
황후가 황녀를 낳고 요양을 떠난 이후 그저 손 놓고 두고 보기만 했었는데.
드디어 황제가 제게 반기를 드는 귀족들에게 이를 드러내기 시작한 거다.
이젠 정말로 입장을 정해야 할 때가 왔단 걸 알았다. 베룸 공작가 남매의 등장으로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아, 그리고 당장 이번 주부터 공녀가 제2기사단에서 업무를 보던가?”
“……예, 그렇습니다.”
“그래, 그래. 거긴 짐의 명령을 제국 곳곳에서 수행하는 곳이기도 하니. 딱 좋군.”
그 말에 여태 조용하던 연회장이 조금 술렁였다.
황제가 몇몇 영애를 불러들여 행정관 업무를 제안했다는 풍문은 있었다.
리테루온 공작과 베룸 공녀의 약혼 소식에 금세 밀려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을 뿐.
그런데 지금 그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
“영애의 신분으로 국정에 참여하다니요, 이는 전례가 없는…….”
누군가 반발하려는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웅얼거리는 통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에펜베르크 가의 영애도 바로 입궁 가능하다고 했지. 오늘 연회에도 참석했다고 들었는데, 어디에 있지?”
황제는 그 목소리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연회장 외곽의 한구석을 응시했다.
어디에 있냐고 물었으나 이미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한 시선.
황제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명백했다.
결국 다시 조용해진 좌중 가운데서 달리아가 천천히 연단을 향해 걸어 나왔다.
다소 가냘프지만 평균을 웃도는 키와 곧은 자세가 그녀를 더욱 우아해 보이게 했다. 아이네와는 또 다른 존재감이었다.
“폐하의 부름을 받아 참석하였습니다. 달리아 에펜베르크가 제국의 유일한 빛께 변치 않을 경애의 뜻을 바칩니다.”
이제는 거의 사문화된 옛 방식의 인사말과 함께 달리아가 무릎을 굽혔다.
그녀의 대응에 황제가 웃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황제의 권위가 가장 드높았던 시대의 예법이라.
“……듣던 대로 눈치 하나는 빠르단 말이지.”
역시 베룸 공녀가 아니었다면 테고의 곁에 붙여두려 했던 영애다웠다.
신분은 적당하지만 아비와 그 오라비가 쭉정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이미 황제의 앞에 서 있던 테고와 나딘, 아이네의 곁으로 달리아가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섰다.
하필 아이네의 바로 옆에 선 탓에 둘의 다른 점이 더 극명하게 보였다.
오늘 입은 드레스의 색상부터, 생김새까지.
황제가 비스듬히 앉은 채로 가만히 턱을 쓸었다.
‘슬슬 시작할 때인가.’
이번엔 천천히 하나씩 전부 손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그건 몇몇 귀족들이 우습게 보는 사교계부터 시작될 것이다.
겨우 황실의 뒷방 막내 황자였던 과거와는 다르다. 손에 주어진 자원이 너무나 한정적이어서 선택을 해야 했던 소년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나이를 먹었다.
‘내 아들에게는 깨끗한 옥좌를 물려줘야 할 테니까.’
아까 겁도 없이 큰 목소리로 반대하던 백작을 황제가 슬쩍 훑었다. 가만 보니 재무부에서 일하다 이번 행정관 파업에 동참한 자였다.
무능한 데다 이토록 눈치까지 없어서야……. 가장 먼저 버려지겠군. 쯧.
“몇몇 행정관들의 공백이 있으나 영애들 덕에 짐의 마음이 든든하구나.”
어느새 데뷔탕트가 아니라 연회장은 흡사 관료들이 모인 회의장 같았다.
오늘 데뷔탕트에 참석한 영애들은 이제 인정해야 했다. 자신의 인생에 한 번뿐인 데뷔탕트가 어그러졌다는 사실을. 어린 영애들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본래는 황제가 참여할 연회가 아닌데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황태자비감이라도 찾나 싶어 부풀었던 기대감이 납작해졌다.
“영애들도 엄밀히 말해 제국의 귀족인데, 이럴 때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분위기를 파악하던 아이네는 솔직히 놀랐다.
‘아무 말 대잔치나 하는 잘생긴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심지어 황제는 테고나 황태자인 아르비드, 달리아 영애와는 달리 ‘기억’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저 자신처럼 소설 속의 흔한 병풍 엑스트라인 줄 알았다.
적절한 시점까지 테고가 여자란 걸 들키지 않게 도와주고, 원작 남주와 이어지는 걸 지켜보면 되는 줄 알았지!
그런데 이제 보니 원작 결말로 이어지는 다른 루트로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잖아?
‘역시 인생은 실전이야.’
예상치 못한 전개였지만 아이네는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시 황도에 오고 나니 자신이 책 안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났다.
“영애들도 기껏해야 가문의 내정만 살피는 것보다 남자들의 짐을 나누어 짊어지는 게 더 보람된 일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나, 에펜베르크 영애?”
황제의 말을 듣던 달리아의 미소가 잠시 흐트러졌다.
‘역시 폐하께서 보시기엔 기껏……이겠지.’
그러나 익숙하게 표정하게 감춘 그녀가 다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폐하.”
곁에 서 있던 아이네의 시야에 그녀가 세게 쥔 주먹이 들어왔다.
그걸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달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다시 아이네와 눈이 마주친 달리아가 매혹적인 눈매를 살포시 접어 웃어주었다.
* * *
달리아는 원작에서 테고의 약혼자이기 이전에 사교계 제일의 꽃이었다.
생각도 않았을 약혼자 자리야 빼앗겨도 상관없겠지만, 사교계 주인 자리는 조금 다를 터였다. 그러니 사교계에 불쑥 난입한 자신에게 유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방금 잘못 본 게 아니야. 웃었어.’
비웃거나 속마음을 숨긴 가짜 미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사 한 번 해본 사이엔 과할 정도의 호감이 엿보였다.
그리고 아이네는 새삼스럽게 제가 미인에게 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리아의 머리카락 색 같은 붉은 기운이 제게 옮기 전에 서둘러 마음을 진정시켰다.
역시 이렇게 매력적인 영애가 질투에 미쳐서 그저 악역으로만 소비되는 건 인류의 낭비다.
‘두고 봐. 내가 전개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전부 다 해피엔딩으로 이끌어 줄게요.’
최근에 읽은 것도 아닌 고전 로판에 빙의한 데는 분명히 이런 이유가 있어서였나 보다. 작가가 뒤늦게 반성이라도 했나?
이렇게 된 이상 경계의 숲에 다시 방문하는 건 확실히 늦어지겠지만, 그래도…….
벌써 목적 대상을 찾은 데다가 살짝 틀어진 전개는 다른 루트로라도 돌이킬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
‘무엇보다 이쪽 황도의 일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되기도 하고.’
아이네는 다시금 자신에게 주어진 막중한 임무에 책임감을 느꼈다.
곁에 선 테고와 나딘, 아르비드까지 순서대로 힐끔거린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황제가 무어라 말하든 아이네에게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테고는 미간을 다시 살풋 좁혔다.
‘아까부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나 보군. 저렇게 표정이 휙휙 변하는 걸 보면.’
게다가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녀가 언제 봤을지 모를 에펜베르크 영애에게 호감을 보인단 걸.
처음 본 사람에게 살갑게 구는 건 저에게만 한정된 일 아니었나?
“짐이 눈치 없이 너무 오래 머물렀군. 다들 연회를 즐기도록 하라.”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데뷔탕트에 참석해 목적을 달성한 황제가 후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싸늘하게 식은 홀의 분위기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아,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황제는 제 목적을 모두 달성하고 나서야 아르비드를 의식했다. 그러고는 아이네에게 말을 건넸다.
“공녀는 이대로 더 춤을 출 생각인가?”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 난 후에도 모른 척하긴 어려우니.
아까부터 황태자가 그녀에게 다음 춤을 청할까 말까 고민하는 게 황제에겐 훤히 보였다.
나딘 공자와의 첫 춤이 끝날 때부터 갈팡질팡하더니 테고가 등장하자 주먹을 꽉 쥐는 걸 눈앞에서 보았다.
“앗, 아닙니다. 긴장했더니 조금 피곤해서 쉬려고요.”
하지만 등을 밀어주는 것도 여기까지.
“흐음. 그렇군. 공녀가 원하는 대로 해. 앞으로도 기회는 더 있을 테니.”
흥미로운 표정으로 테고와 아르비드를 시야에 담은 황제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아…….”
모두가 퇴장하는 황제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예를 취했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토해내는 아르비드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자리를 떴다는 데 안도해 실망한 기색을 흘리고 말았다.
“…….”
그러나 테고는 일반인들과 남다른 청각을 지닌 기사였다. 거기에 작정하고 숨기지 않는 한 타인의 기척은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저번보다 더, 황태자의 태도가 마뜩잖았다.
* * *
아이네는 쥐고 있는 펜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테고를 잠시 응시했다.
“…….”
멍하게 생각에 잠긴 그의 입으로 오징어 캔디가 쉴 새 없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딘이 베룸 영지에서 가져온 캔디를 정말로 전부 압수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건 물론이다.
하지만 아이네는 단호한 표정으로 악마의 부산물을 회수했다.
그녀가 제 오라비에게만 이렇게 엄격하게 구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오빠도 내가 졌으면 한 달 내내 오징어만 먹였을 테니까!’
집사마저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아이네는 굴하지 않았다.
남매 전쟁에서 봐주기란 있을 수 없는 일.
8년간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완벽한 남매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압수한 오징어 캔디는 고스란히 테고의 집무실로 옮겨졌다.
이내 그의 책상엔 벗겨낸 캔디 포장지로 가득해졌다. 물론 맛있냐는 물음에는 먹을 만하다고 대답할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이네가 오징어 캔디를 먹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늘 나딘의 책상에 있던 그것의 맛은…….
으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테고 경.”
“…….”
테고의 볼이 불룩 솟았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입 안에서 캔디를 굴리며 여전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심각하게 굳은 미간을 꾹꾹 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아이네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무슨 생각 해요?”
“윽.”
삽시간에 가깝게 다가온 그녀의 얼굴에 테고가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요란하게 뒤로 끌리는 소리가 났다.
마침 아이네 생각을 했던 만큼 그의 눈이 당황으로 빠르게 깜박였다.
“음? 별 건 아니고요. 우선순위 표시하는 방법이랑 양식을 이렇게 통일하는 건 어떤가 싶어서요.”
“……공녀가 정해주는 대로 하겠습니다.”
“치이.”
서류 작업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기사단 업무라고 해도 우선순위는 있는 법이었다.
그러나 아이네의 예상처럼 아직 이 세계는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하는 일이 많았다.
이제 그녀도 제가 형식적인 의미로 테고의 임시 보좌관 임무를 맡았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알았다.
그렇다고 한들 아이네는 일을 대충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대로 보아 넘기기엔 테고의 집무실이 너무 엉망이었다.
결국 베룸 영지에서 나딘과 처리하던 방식대로 급한 서류부터 정리 중이었다.
엄연히 따졌을 때 상사이자 결정권자인 테고를 존중하는 뜻에서 물었던 건데…….
‘사람이 말을 하면 눈도 마주쳐 주고 그래라, 좀!’
아무리 같은 여자라 흥미가 별로 안 생겨도 그렇지. 테고는 종종 그녀를 앞에 두고 이렇게 멍해지곤 했다.
이제부터는 친구라고 했으면서!
그의 무심한 면이 아쉽기는 하지만 뭐,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면 주변의 영애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할 테니까.
그녀는 테고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헤아린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이젠 아예 고개를 돌려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서자 테고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자, 봐요. 앞으로 제일 먼저 처리해야 하는 건 이렇게 빨간색 띠지를 붙여서…….”
그러나 아이네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그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에펜베르크 영애는 재무부에 들어갔다는데, 공녀는 여기에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아, 재무부로 갔대요?”
아이네는 며칠 전, 자신보다 한 살이 어린데도 야망 넘치는 눈을 하던 달리아를 떠올렸다.
역시 달리아는 테고의 약혼자라는 악역의 운명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걸까.
그럼 국외추방 당하고 어딘가에서 사망하는 결말만은 피한 거겠지?
제 선택으로 무언가 달라질 결과를 생각하니 뿌듯했다.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아이네의 눈이 반짝거렸다.
‘좋아, 이 뒤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없어!’
바로 가나 모로 가나, 제일 중요한 건 테고와 대공이 무사히 이어지는 해피엔딩이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씩 어렸다.
“저한테는 여기가 딱이에요!”
달리아 영애의 질투로 인한 에피소드까지 사수할 자신은 없지만……. 이렇게 테고 곁에 딱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대공을 자극하기엔 충분할 거다.
무엇보다 여기 있으면 하나도 안 놓치고 다 볼 수 있거든.
그는 결연한 목소리에 아래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또다시 아이네의 말간 웃음을 가까이서 마주하고야 말았다.
‘아…….’
이번에는 숨길 수 없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에 테고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곁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의식하게 돼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곁에서 떼어놓으면 이런 모습조차 볼 수 없겠지.
보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몸이 훌쩍 자라버린 탓에 더 이상 맞지 않게 된 꽉 끼는 가죽 갑옷을 입었을 때처럼 가슴이 갑갑해졌다.
애써 시선을 돌려 천장을 응시하며 테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점심은, 기사단 식당이 미트파이가 제법…….”
“단장님!”
겨우 한두 번 노크 소리가 나더니 바로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기사 하나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채 들어섰다. 그러다 가깝게 붙어선 테고와 아이네를 보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잠시 멈칫했다.
“뭐야.”
또다. 평소에는 제 집무실에 얼씬도 하지 않던 놈들이 오늘만 벌써 세 번째로 들이닥쳤다.
처음 아이네가 기사단을 방문했을 당시엔 두 사람의 약혼은 그저 소문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모두가 그녀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단지 테고가 처음으로 데리고 나타난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랬는데 며칠 전, 황제 폐하가 직접 약혼을 거론하기까지 했으니 이젠 기정사실이 아닌가.
다들 말은 안 해도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부분이 장장 3년을 테고와 함께 반란군 진압 작전에서 구르던 동료들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여자가 없다는 사실을 넘어 관심조차 없단 것쯤은 너무나 잘 알았다.
황도로 귀환하자마자 며칠간 휴가라며 자리를 비우더니…….
사람인지, 요정인지 모를 만큼 사랑스럽게 생긴 약혼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여기까지만 해도 놀랄 소식인데.
그 주인공이 아파서 오늘내일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바로 그 베룸 공녀이기까지!
‘그런데, 집무실 분위기가…….’
기사 더글라스는 이전에도 몇 번인가 테고의 집무실에 방문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문고리를 잡고 잠시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잘못…… 들어왔나?’
삭막했으면 삭막했지, 절대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몇 년 만에 방문한 기사단장의 집무실은 제 누이의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온통 핑크빛 일색으로 꾸며진 광경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실은 오늘이 아이네의 첫 출근 날이었다.
“다들 평소처럼 훈련에만 집중하도록.”
전날, 단장인 테고의 엄중한 경고에도 제2기사단의 모두는 훈련에 집중하지 못했다.
도대체 단장님과 공녀님이 그 짧은 기간 동안 어떻게 만나 약혼에 이르게 되었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그것도 기사단에선 여러 의미로 악명 높은 단장님이 약혼이라니.
“이야기 들었어? 난 그거 가짜 소문이라고 본다.”
“아냐, 진짜 믿을 만한 소식이라니까? 황실 시종들 중에 그 얘기 안 하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가짜라는 거야. 다들 폐하를 제일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인데, 그렇게 가볍게 입을 놀린다고?”
절반의 진실에 가까운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야야, 그 공녀님이 지금 여기로 오고 계신대.”
실제 주인공이 등장하자 곧바로 묻혀버렸다.
“어떤 분이길래 그러실까. 우리 단장님, 아무리 폐하의 명이라도 약혼은 생각도 안 하고 계셨었잖아.”
“그치? 마음에도 없는 분이랑 약혼할 단장님이 아니지.”
처음엔 다들 무뚝뚝하고 사회성이 부족한 단장을 공녀님이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궁금해했다. 외모만은 제국에서 테고와 견줄 자가 없단 걸 그들이 더 잘 알았으니.
그러던 그들은 이 세상엔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아름다움과 매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귀엽다는 감정이야 말로 취향을 부순다는 것도.
“어, 억. 인정, 인정합니다.”
“나도…….”
그러나 며칠 전도 그렇고, 오늘 다시금 마차에서 내리며 인사를 건네는 아이네를 보고 모든 단원들은 바로 납득했다.
그렇다면 저 요정 같은 공녀님을 사로잡은 테고의 매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같은 남자가 봐도 출중한 외모는 확실하겠고.
하지만 기사단에서 그의 생활을 지켜보고, 진압 작전의 최전선에서 날것의 그를 겪어본 이들은 다 알았다.
애초에 고위 귀족으로 태어나서일 수도 있으나 테고는 그다지 온순한 성품이 아니었다.
거기다 과묵하고 무뚝뚝하기까지 하니 그들의 상관은 사실 불친절하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력으로 유명한 ‘그’ 리테루온 가문의 직계가 확실했다.
게다가 으레 전형적인 천재들이 그러듯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응당 다른 기사들도 할 수 있을 거라 믿는 분이셨고.
“더글라스.”
여태 아이네를 대할 때와는 딴판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잠시 유해져 있던 테고의 분위기에 더글라스는 인사도 깜박했다.
“아, 예에. 예. 그, 그러니까. 단장님을 뵙…….”
“인사는 됐으니까 용건이나 말해.”
더글라스는 4년 차 기사의 직감으로 지금 자신은 이미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는 걸 알았다.
“어, 어어. 그러니까 제가 왜 여기에 있을까요.”
“…….”
단장님의 분위기가 더 싸늘해졌다. 더글라스의 등엔 이미 식은땀이 흥건했다.
한편 아이네는 말투가 달라진 테고를 보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꾹 눌렀다.
‘역시 공과 사는 확실히 구별하는 주인공답다.’
이게 원작에서 휘하 기사들과 주고받던 톡톡 튀는 대화인가.
역시 여길 근무지로 택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 그, 목검을 교체할 시기가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해서일까. 더글라스를 보는 아이네의 눈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더글라스는 더듬더듬 말하면서도, 동그랗고 커다란 눈망울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공녀에게 시선이 힐끔 옮겨갔다.
단장도 남자는 남자였구나. 저 같아도 이렇게 귀여운 약혼자가 있다면 집무실 정도는 바꿀…….
“따라 나와. 내가 직접 대련해보고 교체할 시기인지 아닌지 봐주지.”
“아, 아니. 그러고 보니 올해 초에 교체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생각하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단장, 단장님.”
안절부절못하는 더글라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테고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네는 입을 가린 채 제게 배정된 책상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뭐야, 뭐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갑자기 분위기 대련인 거 맞지?
‘원작 여자 주인공의 무위를 보여주는 장면인가 봐.’
테고는 재킷을 다 벗고 안에 받쳐 입은 얇은 셔츠 소매를 묵묵히 걷어 올렸다.
그리고 말없이 더글라스를 스쳐 문가로 향했다.
그가 문고리에 손을 얹자 그제야 더글라스가 사색이 되어 따라붙었다.
그러다 돌연 테고가 멈칫하더니 몸을 돌렸다. 둘만 있을 때와는 달리 아이네에게 눈을 맞췄다.
“일단 정리하고 계십시오. 점심 전까지는 돌아올 겁니다.”
이거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는 뜻이지?
너무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제가 반할까 봐 그러는 걸까. 하지만 이런 장면을 놓치기엔 아까운데.
팽팽 돌아가는 머릿속과는 달리 아이네는 책상 위의 찻잔을 들어 올리며 느긋하게 응수했다.
그리고 이내 비장한 얼굴로 고개까지 끄덕였다.
“이 차가 식기 전에 돌아오세요.”
아마 원작 소설 공인 천재 검사인 만큼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다.
테고와 저 기사가 나가면 몰래 따라 나가서 구경해야지!
다른 남자 기사들과의 체력 차이를 극복하게 해준다는 아티팩트가 어떻게 작동하나 못내 궁금하기도 하고.
‘또, 또…… 저런 알 수 없는 말을.’
테고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그러면서도 밖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따뜻한 차가 식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계산하면서.
* * *
“선공을 내줄 테니, 시작해.”
늘 쓰던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목검을 쥔 테고가 더글라스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집무실에 갔다 온 소감을 기다리던 단원들이 연무장에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단장님이 갑자기 웬 대련을……?”
“저거, 저놈. 잘못 걸렸네.”
울상이 된 얼굴로 목검을 들고 덤벼드는 더글라스의 일격을 테고는 가볍게 피해냈다.
가뜩이나 신체조건이 우월한 데다 핏줄에 흐르는 재능까지 타고난 그였다.
라니엘이 몇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서 그렇지, 테고도 검으로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
거기에다 지난 3년간 전장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까지 쌓았다.
이젠 실전까지 겪은 테고와 제대로 된 합이라도 맞추는 기사는 손에 꼽을 지경이다.
“단장님 화나신 거 같은데.”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실 때 들어갔나?”
들어가 보라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
더글라스는 베테랑 선배들이 적당히 부려먹기 딱 좋은 기수였다. 신입은 오히려 애지중지하기 마련이니까.
그런 자신을 꼬드겨 집무실에 밀어 넣은 게 선배들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 그들은 저를 모른 체했다.
‘제길, 지금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냐.’
주로 사용하는 오른팔이 아닌데도 단장님은 제 공격을 여유롭게 피해냈다.
원래도 천재 소년으로 불렸다고 들었지만 요 몇 년간은 정말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셨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 급속 성장을 알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한편, 더글라스가 집무실에 들어온 이후로 테고는 저도 모르게 또 속이 부글거리는 걸 느꼈다. 점점 더 빈도가 잦아지는 이 낯선 감정.
그리고 미처 이유를 찾기도 전에 테고의 시선이 아이네에게 옮겨갔다. 자신이 아니라 더글라스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다시 흥미로 반짝이는 걸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머릿속이고, 가슴속이고 시끄러워지는 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목검을 교체해야 할 것 같다고?”
“……시정하겠습니다.”
드디어 다섯 번의 선공이 끝났다. 이번에는 그저 흘리지 않고 더글라스의 검을 받아준 테고가 낮게 중얼거렸다. 더글라스에게는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들렸지만.
그렇게 아래에서 위로 맞댄 검을 들어 올린 테고가 천천히 그를 찍어 눌렀다.
둘의 체격 차이가 압도적이지도 않은 걸 감안할 때 대단한 근력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괴물이야, 괴물.’
서서히 저려오는 팔을 느끼며 더글라스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저를 부추긴 자들을 선배라고 봐주지 않을 것을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 * *
대련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하지만 결국 테고는 차가 식기 전에 아이네에게로 돌아가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두 눈에 호기심을 주렁주렁 매단 단원들이 테고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련이 아닌 한, 일대다의 밀어붙임에 그는 아직 미숙했다.
“단장님! 그러고 보니 방패였나, 수선이 필요한 게 있는 거 같더라고요.”
“……안내해.”
그렇게 연무장에 오랜만에 내려온 김에 테고는 잠시 무기류 점검에 나섰다.
“방패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지?”
더글라스와는 달리 능글능글한 선배 기사가 말을 돌렸다. 시간만 있다면 조금씩 옆구리를 찔러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의 단장님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겠지만, 약혼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요정이랑!
지금이 딱 주위에 애정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날 시기인데!
“아앗, 방패가 아니었나 봅니다. 오신 김에 한 번씩 보고 가시죠!”
“전반적으로 상태가 나쁘지 않군.”
딱히 흠을 잡으려야 잡을 곳이 없었다. 테고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부단장인 칼릭이 아주 성실하게 일을 했으니.
“그럼 목검은 앞으로 더 사용하는 걸로 하고.”
“…….”
“…….”
시간을 끌며 베룸 공녀와의 이야기를 묻고자 했던 모두가 입을 딱 다물었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테고의 기분이 더 안 좋아 보여서.
“차후에 보고할 게 있으면 일단 칼릭을 통하도록. 집무실에 올 때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믿겠다.”
“……예!”
하, 첫날 정도는 그녀의 곁에서 내내 적응을 도와주고 싶었는데.
테고는 입 안에 남은 오징어 캔디의 여운을 혀로 쓸었다. 그러고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은 더글라스를 한 번 더 훑었다. 아까 저 녀석도 공녀와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역시나 그 뒤론 한 번도 변하질 않는군.’
데뷔탕트부터 오늘까지 수많은 귀족들과 마주했다. 그런데도 아이네의 눈은 내내 맑은 하늘 같은 색만 내보였다.
그럼, 역시 일정한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 건가.
일단 저와 황태자, 칼릭을 볼 때는 확실하게 변했다.
다만 그때에도 그녀의 눈이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걸 볼 수 있는 자는 네 일족 가문의 직계인 자신과 아르비드뿐이었다.
그럼, 대공과도 비슷한 일이 발생할 확률이 높았다. 대공의 가문인 헤이안드로 역시 네 일족 중 하나이니.
“…….”
테고는 저도 모르게 이를 뿌득 갈았다.
그 소리에 가까이 서 있던 기사들이 잔뜩 굳어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더글라스 저놈이 영 좋지 못한 타이밍에 들어간 거야.’
염치없는 선배들은 자신들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순진한 후배 기사를 꼬드겼다는 사실은 이미 까맣게 잊었다.
“하아.”
테고의 입에서 급기야 한숨까지 터져 나왔다. 모두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대공과는 만나게 하고 싶지 않은데.’
* * *
케이어드 헤이안드로.
테고보다 한 살 많은 젊은 대공은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 같은 미남자였다.
그뿐이랴, 폐하의 그늘에서 숨죽이고 있는 황태자와 달리 매사에 자신만만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말수 적은 자신과 달리 제법 유려한 언변을 갖고 있던 걸 기억한다.
같은 남자인 제가 봐도 잘난 사내이니 여자라면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테다.
방패와 더불어 방어구를 점검하던 테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공이 황도를 방문하는 게 사냥 대회인가. 그렇다면 건국 기념일까지는 계속 이곳에 머물게 될 거고.’
그는 베룸 공작과 나딘 공자가 왜 멀쩡한 아이네를 꼭꼭 감춰두고 내보이지 않으려 했는지 다시금 납득했다.
그가 짐작한 대로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볼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고 해도, 비밀은 언젠간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베룸 가문의 작위를 이을 공자와 발현자인 공녀. 황제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황태자비로 세우기에 딱 좋은 조건 아닌가.
어째서 황제를 알현할 때는 눈이 변하지 않았는지 몰라도 천만다행이다.
그럼 칼릭을 볼 때는 왜 눈이……. 네 일족도 아닌데.
다른 세 일족 역시 발현자의 명맥은 끊겨 남은 자료가 많지 않았다. 심지어 테고는 직계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사항들마저 제대로 들은 바가 없다.
8년 전만 해도 리테루온의 아티팩트는 차기 주인이 사실상 정해져 있었으니까.
베룸 영지에서 황도로 돌아온 후, 테고는 더욱 큰 혼란에 휩싸였다.
‘마치 베룸으로 떠나기 전과 지금은 나는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아이네를 만나기 전의 그는 베룸 일족이 고대 일족 중 하나라는 사실만 알았다. 그저 그뿐이었다.
왜 다른 세 일족과는 달리 아티팩트가 없는지, 발현자의 이능에 ‘진실의 눈’이라는 이름까지 붙어있는데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저 하늘에 태양이 하나 있는 걸 당연시하듯이, 그저 그렇게.
‘생각해보면 미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거기다 베룸 공작은 일족의 땅에 있는 상투아리움으로 제례를 올리러 떠난다고 했다. 다른 가문에선 진작에 없어진 의식이었다.
경계 너머가 온전히 보였던 베룸 영지의 숲 결계도 그랬다. 이미 알려져 있던 상식들이 뒤늦게 알게 된 사실과 충돌했다.
‘그렇게 깊이 들어갈 수도 있는 곳이 어떻게 천 년이 넘도록 불가침 영역이 된 건지.’
왜 자신만 이 모든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걸까.
무엇보다 가장 수상한 건 그 숲 안의 오두막이었다.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진동을 느끼고 정신을 잃었던 그 공간. 그리고 깨어나자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활성화되었던 이상한 경험.
아무리 생각해도 그곳에 무언가가 있었다.
“하, 젠장…….”
또다시 간밤에 잠을 설친 테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역시 이번에도 주위에선 괴상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히익.”
“끅!”
그리고 잔뜩 찡그려진 단장의 눈가를 보고 모두는 눈에 띄게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 * *
아이네는 창문으로 테고가 더글라스와 현관을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앗, 근데 아까 그 말. 설마 진짜로 차가 식기 전에 돌아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따라 나가서 구경하면 안 되려나?
아냐, 멀리서 잠깐만 보다가 테고보다 먼저 들어오면 될 거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그녀의 앞으로 노크 소리와 함께 칼릭이 등장했다.
“단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아, 칼릭 경. 마침 잘 왔어요. 대련 어디서 하는지 알아요?”
“갑자기 연무장엔 무슨 일로……. 억, 공녀님!”
마침 타이밍도 좋았다.
서류 몇 개를 들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칼릭의 등을 아이네가 반색하며 다시 떠밀었다.
그녀는 아직 기사단 내부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혼자 길 헤매는 것보단 관계자의 도움을 받는 게 낫지.
결국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이끌어 연무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주친 광경에 그녀는 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테고 경이 엄청 잘하는 거 맞죠?”
“원래도 대적할 만한 상대가 별로 없긴 한데, 오늘따라 좀…… 화가 나신 것 같군요.”
애초에 어떤 감정이든 드러내는 법이 거의 없는 테고였다.
잠시 본궁에 다녀온 사이에 벌어진 사건에 칼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제 옆에 선 자그마한 공녀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같이 있으라고 자리를 피해준 건데.’
그 덕분에 아마도 내내 함께였을 텐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한참 업무 볼 시간에 뛰쳐나가셨는지…….
“그래요? 왜 갑자기 화가 났지?”
정작 이 공녀님도 무슨 일인지 그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비록 현장에 없었던 칼릭이었지만 그는 단장님이 화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이요, 공녀 당신! 당신이 그 이유라는 데에 제 컬렉션 전부라도 걸 수 있어요.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이긴 했으나 칼릭은 베룸 공녀의 사고 회로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진즉에 파악했다.
단순히 둔하다고 치부하기엔 오히려 굉장히 영리한 공녀였지만…….
미묘했다, 무언가가.
지금은 테고의 곁에서 부단장 노릇을 하고 있는 그였다. 그러나 본디 정보를 주로 다루는 칼릭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테고를 비롯한 여타 다른 등장인물들과 확연히 다른 타입이었다.
그래서 애매할 땐 확실하게 물어봐야 한다는 걸 알았다.
“제가, 그때 여쭤보질 않아서 말입니다.”
“뭘요? 아, 끝났나 봐.”
단 한 번의 겨룸만으로 대련은 끝나버렸다. 뭐야, 시시하네.
테고가 출중한 기량을 갖추고 있다는 건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이네도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원작 여주는 불세출의 검술 천재인 데다가 아티팩트 힘도 빌렸을 테니까.
문제는,
“기사가 저렇게 약해도 돼요?”
“……단장님이 월등하게 강하신 겁니다.”
그래도 이렇게 싱겁게 끝날 줄 알았으면 나오지 말 걸 그랬다.
역시 원작 남주인 대공 정도는 나와야 밸런스가 맞는 건가.
재미없다며 툴툴거리는 아이네를 보는 칼릭의 표정이 묘해졌다.
보통 자신의 약혼자가 승부에서 이기면 기뻐하지 않나?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면 할수록 말이다.
애초에 황실에서 근무하는 제2기사단에 아무나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이건 테고가 이미 일반적인 기사 수준을 아득하게 넘은 탓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한 기분에 칼릭이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희 단장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으응? 그런 건 갑자기 왜 묻지?
눈가를 가늘게 좁힌 칼릭의 의도를 알아내려 아이네도 따라서 눈가를 좁혔다.
‘혹시, 계약 약혼이라는 사실을 모르나?’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심지어 테고가 여자인 것도 아는 칼릭에게 계약 약혼이 무슨 큰 대수라고 숨길까.
“저, 혹시……. 약혼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 들었어요?”
“아뇨, 들었습니다. 굳이 우리 단장님을 택하신 이유만 빼고는요.”
이래서 눈치 빠르고 머리 좋은 놈들은 곤란하다. 이때를 대비하여 준비해 둔 논리적인 답변이 있지.
“테고 경을요? 음, 그래도 꽤 좋아하는 편이고, 우린 친하니까.”
무논리로 일관하며 진땀을 흘리는 아이네를 보는 칼릭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의 경고등이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편’이라고? 보통 약혼자한테 그렇게 말하나?
‘아냐, 어쨌든 황제가 밀어붙인 정략혼이니까 그럴 순 있지, 그럴 순 있어.’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는 단장님이 워낙 숨길 수 없이 마음 가는 티를 내기에 간과했는데. 설마, 설마…….
“혹시 나딘 공자님처럼 오라버니 같은 느낌으로?”
“나딘처럼이라뇨. 말조심하세요.”
대부분의 경우 내내 생글거리는 얼굴이던 아이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여기서 나딘이 왜 나와. 나딘은 그냥 우리 엄마 아들일 뿐인데.
“그럼, 그럼 무슨 사이신데요.”
원작에서도 달리아 영애를 유난히 탐탁지 않게 여겼던 칼릭이라 그런 걸까. 이상하게 끈질겼다.
아이네는 미래를 위해서라도 확실히 해놓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우린, 친군데요?”
아아, 그쪽이었나.
칼릭은 테고를 진심으로 애도했다. 제 주군으로서든, 같은 남자로서든.
* * *
“칼릭, 본궁 식당이 더 맛있다고 할 땐 언제고.”
테고의 불퉁한 목소리와 마뜩잖은 시선이 칼릭에게 향했다.
“오늘은 미트파이도 나온다는데 제가 빠질 수 없죠.”
칼릭은 능청스럽게 받아치며 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중인 또 한 사람. 아이네는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빛내고 싶은 걸 겨우 참는 중이었다.
측근인 부단장과의 티격태격이라니. 이것도 기사물에서는 빠질 수 없는 장면이지.
“공녀님께서도 오늘이 첫 출근이신데 이것저것 궁금하신 게 많을 거고요.”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
“알아서 ‘잘’ 하신다고요?”
흐음.
칼릭의 눈가가 흐릿하게 접혔다. 도대체 공녀에게 뭘 어떻게 했길래…….
저 얼굴에, 저 키에, 공작이라는 지위까지 지니고도 겨우 친구 취급이나 받는단 말인가.
‘그러면서 여전히 본인 앞에서도 푹 빠졌다는 티는 숨기지도 않으시네.’
테고를 근처에서 봐왔던 이들이면 다 알 수 있었다. 그가 드디어 자신만의 요정을 찾아냈다는 걸.
그것도 황제가 갑작스레 밀어붙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기간에.
지금도 봐라, 말주변 없기로 유명한 주군이 자신을 쫓아내려고 새로운 핀잔을 계속해서 하나씩 던지고 있다.
본궁 관료들이 이용하는 식당에서 주로 식사를 했던 건 정보를 수집하기 쉬워서였지, 딱히 그곳 음식이 더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니었는데.
“저, 대화 중에 미안하지만. 여기에 뭐 오징어 분말이 뿌려졌다거나 그런 거 아니죠? 아니면 반죽할 때 오징어 육수가 들어갔다거나?”
갓 만들어져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미트파이를 손짓하며 아이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칼릭이 겸연쩍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황도에서는 오징어를 구하기 어려워서 말입니다. 매번 식재료로 쓰기에는 좀.”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해사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테고는 저절로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느라 헛기침을 했다.
“큼, 큼.”
그러나 애석하게도 칼릭은 아이네의 식성까진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저 그녀가 베룸을 그리워하는 줄로만 알고 불필요한 말을 덧붙였다.
“아, 하지만 정 고향의 맛을 원하신다면 공녀님 식사에만 넣으라고 할 수도…….”
“아뇨, 이제 제2기사단에 소속된 이상 공평한 대우를 원합니다.”
칼릭 경, 그렇게 안 봤는데 아까부터 선을 넘네? 뜬금없이 우리 테고한테 나딘을 묻히질 않나.
“아, 네에.”
칼릭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오징어는 다들 없어서 못 먹는 고급 식재료가 아닌가. 게다가 공녀는 집무실에 오징어 캔디까지 반입하기에 당연히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파악하던 칼릭은 어느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금방이라도 폭소를 터뜨릴 듯한 얼굴의 테고가 자연스럽게 공녀의 접시에 손을 댄 탓이다.
그러고는 제 앞으로 가져와 한 입 크기로 자르는 게 아닌가.
‘누가 봐도 본인이 먹으려고 그러는 모양새가 아닌데?’
아니나 다를까. 입을 꾹 다물고 웃음을 참아낸 그가 다 자른 미트파이 접시를 아이네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그리고 공녀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듯 능숙하게 테고의 호의를 받았다.
“앗, 고마워요.”
자그마한 입에 딱 알맞을 만한 크기로 잘린 파이 조각이 금세 아이네의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칼릭은 물론이고, 이미 식당 안에서 식기를 움직이는 이는 테고와 아이네뿐이었다.
다들 그가 공녀의 접시를 집어 들었을 때부터 동작을 멈춘 상태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 대화는 들리지 않아도 기사단원 모두의 신경은 단장과 공녀, 부단장을 향해 쏠려 있었으니까.
“황도의 음식은 간이 좀 센 편이니 입맛에 맞지 않으면 말하십시오.”
반면, 정작 둘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이네는 빙의한 후 8년 동안 아버지인 베룸 공작이 어머니 몫의 요리를 잘라주는 걸 보며 자랐다.
게다가 매번 툴툴거리면서도 그녀의 음식을 잘라주는 건 오빠인 나딘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질 수밖에.
테고 역시 처음에는 여느 귀족답지 않은 남매의 모습에 놀랐었다.
그러나 매번 아침과 저녁을 함께하며 어느새 익숙해졌다.
귀족 여성을 제대로 대면해본 지 오래된 그가 나딘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이네 한정으로.
다만 그조차도 테고를 잘 아는 이들에겐 먹던 오렌지 주스마저 쏟아낼 정도의 충격이었을 뿐.
“저는 웬만하면 다 잘 먹어요.”
“웬만하면…… 말입니까.”
아, 물론 오징어는 제외하고.
그녀가 테고를 향해 씩 웃어주자, 그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겨우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된 둘이었다.
비록 한쪽은 근본부터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런 둘의 몽글몽글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다름 아닌 더글라스였다.
“야, 우리 앞으로 단장실 근처에는 얼씬도 말아야겠다.”
“그래. 더글라스는 이미 글렀어도 우린 살아야 되지 않겠냐.”
“…….”
그러자 포크를 들고 있던 더글라스의 왼손이 파들거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오른손을 잃는 줄로만 알았다. 심지어 진검도 아닌 목검 대련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 좋지 못한 타이밍에, 적절치 못한 시선처리였나 보다.
친밀해 보이는 둘의 가까웠던 거리는 그렇다 친다 해도…….
공녀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제게로 옮겨오자마자 단장인 테고의 표정이 싸늘해졌던 걸 똑똑히 기억했다.
‘아까 진심이셨어, 진심이었다고.’
어쩐지 그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급기야 제2기사단 식당의 자랑인 미트파이에서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체할 것 같은 기분에 더글라스는 슬며시 제 명치를 쓸어내렸다.
* * *
“아참, 전에 그 단검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떤 거요? 아, 그때 우리 같이 갔던 무기점에서 산 거, 아니면……. 아하.”
그 짧은 시간 동안 무기점 데이트까지 했어? 그것도 한 번이 아냐?
곁에서 말없이 식사를 시작한 칼릭의 나이프가 삐끗 엇나갔다.
그릇을 긁는 불상사만은 막았다. 그러나 유난히 귀가 밝은 테고가 눈치채고 그를 힐끔 훑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린 테고는 벌써 세 번째 접시까지 모두 비워냈다.
“둘 다 아마 침실에 있을 거예요.”
“기껏 호신용으로 샀는데 공작령 침실에 있는 조각들처럼 전시만 해두는 겁니까.”
“컥!”
침실, 침실까지…… 들이는 사이야?
식사를 마무리하느라 주스를 들어 꿀꺽꿀꺽 마시던 칼릭이 캑캑거렸다.
아무리 황도와 베룸의 문화가 좀 다르다고 해도 외간 남자가 레이디의 침실에 들어가는 법도는 없다.
대화만 들어서는 식만 안 올렸지 거의 부부나 다름없지 않은가.
‘공작님을 그렇게 키운 기억은 없는데.’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는다 해도 칼릭은 그의 최측근 가신이었다.
하루아침에 부모님과 하나뿐인 여동생을 잃은 어린 테고의 곁에 가장 오래 붙어있던 사람 중 하나가 그였다.
지위만 높고 통제할 어른이 없어 자칫 난봉꾼으로 자랄까 염려도 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테고는 그 흔한 연애는커녕 여자에 관심조차 갖질 않았다.
‘그때부터 극단적이시라는 건 알았지만.’
눈을 뜨고 있는 시간 내내 오로지 검밖에 모르던 도련님 아닌가. 그러다 아주 잠깐 황제의 명으로 베룸 영지에 들렀을 뿐인데.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나이 스물둘에 드디어 남자가 되셨군.
그래도 알아서 제 짝을 찾는 모습이 대견했다. 다만,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서 그렇지.
속으로 혀를 차던 칼릭의 표정이 돌연 하얗게 굳었다. 아니, 그런데.
‘아까 공녀는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설마……. 그냥 친구 수준이 아니라 공녀님에게 남자 취급도 못 받고 계신 건 아니겠지.
과연 정보를 취급하는 가문의 차남다운 추측이었다. 진실에 가까운 결론을 도출해낸 칼릭의 입매가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아이네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제 주군에게 향하는 저 웃음과 친밀함 안에 이성을 향한 호감이 정말 단 하나도 없는 건지.
“원래 암살자는 자고 있을 때 들어오는 거 아닌가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능합니다.”
“흠,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앞으로는 그냥 몸에 지니고 다녀야겠다. 그래서 위기의 장면에서는 이렇게!”
입으로 샥 소리를 내며 아이네가 들고 있던 나이프를 거꾸로 쥐었다.
검을 배워본 적이 없으니 그저 원래 세계의 매체에서 본 대로 흉내를 내었을 뿐인데…….
‘저렇게 신속하게 역수로?’
‘이분, 혹시 공녀가 아니라 암살자 아냐?’
테고와 칼릭의 눈이 동시에 크게 뜨였다. 암살자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듯한 그녀의 자세가 지나치게 정확했다.
‘예사 운동신경이 아니야.’
역시 지난번 레이피어를 휘두를 때부터 범상치가 않았다.
그때는 자신이 자세를 대강 다 잡아준 상태라 그저 초심자의 운인가 싶었다.
게다가 그 뒤로 근육통을 크게 앓았다기에 어쩌다 맞아떨어진 우연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엄청난 잠재 능력을 지닌 거 아닐까.
여태 제 품 안에 들이거나 직접 팔을 만져본 바로는 단련한 흔적이라고는 없었…….
“…….”
불현듯 아이네와 닿았던 감각이 떠오르자 테고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대식가답게 예닐곱 그릇 정도는 앉은 자리에서 해치우던 그의 입맛도 싹 사라졌다.
‘이 미친놈.’
제정신이 아니다. 지금 왜 그런 생각을 떠올려선.
자꾸만 다른 쪽으로 뻗어나가려는 망상의 가지를 억지로 끊어낸 테고가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그런 그와 여전히 해맑게 꺄르르 웃는 아이네를 모두 지켜본 칼릭이 있었다.
‘나이 스물둘에 알아서 남자가 됐다는 말 취소.’
아무래도 충신이 주군을 위해 나서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 * *
“하…….”
아르비드는 벌써 스무 번도 넘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늘따라 도무지 서류가 읽히질 않았다.
달리아 에펜베르크 영애와 아이네이스 베룸 공녀의 첫 출근으로 온 궁이 떠들썩했다.
내심 황태자인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오후가 되자 바스스 부서져 내렸다.
고위 관료도 아니고 그저 임시 보좌관 겸 행정관으로 들어온 영애들이었다.
주무대신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면 모를까. 여태 하급 관료들이 황태자에게 직접 임용 보고를 하러 오는 전례는 없었다.
그래도 재무부는 본궁 안에 위치했다. 그런 만큼 에펜베르크 영애에 대한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러나 제2기사단은 너무 멀었다.
‘갑자기 외성까지 갈 핑계도 없고.’
그날 알현실 옆 응접실에서 그렇게 처음 마주친 이후로 제대로 인사 한번 나눠본 적이 없다.
황성에 출근을 하게 되면 오다가다 만나며 인사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황제가 공인한 테고 리테루온 공작의 약혼자였다. 그런데도 둘의 약혼이 애정에 기반한 게 아닌 기한부라는 사실을 알아서일까.
자꾸 헛된 희망을 품게 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아르비드의 개인 집무실 문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그의 보좌관이었다면 더 정확한 박자로 두드렸을 텐데.
아르비드가 두 손으로 감싸 쥐었던 고개를 들자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의 것과 비슷하지만 좀 더 오렌지빛이 도는 금발이 틈새로 먼저 파고들었다.
“오라버니?”
“아, 도로테아.”
오묘한 풀빛 눈동자가 누군가의 머리카락 색과 꼭 닮은 아르비드의 어린 누이, 도로테아 엠릭 에스피오 황녀였다.
곱게 말린 금발이 찰랑거리며 방 안으로 쑥 들어왔다.
새침해 보이는 표정 한편에서도 아르비드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황녀 본인은 그게 티가 안 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무슨 일이라도 있어? 왜 여기까지 왔어, 티아.”
곧 여덟 살 생일을 앞둔 어린 누이가 귀여워 애칭을 부르는 황태자의 목소리가 다정해졌다.
“성 전체가 영애들 이야기로 떠들썩해서요.”
나풀거리는 밑단을 잘 정리해 소파에 앉은 티아가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영애들? 아.”
‘공녀든 영애든 티아와는 나이 차이가 좀 나는데…….’
넓디넓은 황성 안에 황족이라곤 아르비드와 티아 남매 그리고 황제뿐이었다.
반정 과정에서 최고위 귀족들이 대거 쓸려나간 터라 황녀의 격에 맞는 또래 영애는 찾기가 힘들었다.
티아와 연령대가 겨우 맞다 싶으면 지위가 너무 차이가 났다.
피의 반정으로 올라선 황제가 있는 황궁이다. 그걸 기억하는 궁인들은 늘 어딘가 경직되어 있었다.
황녀는 나이는 어려도 유난히 눈치가 빨랐다. 특히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는 기색은 더더욱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서 부모에게 억지로 떠밀려 와 제대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또래의 남작, 자작 영애들을 매번 되돌려 보내기 일쑤였다.
아르비드가 이유를 물으면 한껏 턱을 치켜세우면서 또박또박 말을 이으려 애를 썼다.
‘소녀와는 수준이 맞지 않아서 말이에요.’
겨우 예닐곱 살인 황녀의 발언이라기엔 오만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커다란 눈망울 너머 상처 입은 기색까지 감추기엔 그녀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전하, 조사해보니 아무래도 염려하셨던 대로였던 듯합니다.”
“고작 여섯 살짜리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그것도 제 자식한테?”
아르비드는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데.
‘싫어도 꾹 참고 황녀와 친한 척이라도 하다 보면 좋은 가문으로 시집갈 수 있을 거라니.’
황녀궁에 가기 싫다 떼쓰는 자녀들에게 그 부모가 달래듯 하는 말을 티아가 들은 모양이었다.
“송구합니다만 하급 귀족들이 황족에게 느끼는 압박감은 전하의 생각 그 이상일 겁니다.”
“…….”
평소 최대한 말을 아끼던 스승 같은 보좌관의 말이었다. 그도 자작가 출신이니 정확한 분석이었겠지.
그렇기에 제안을 받았을 귀족들의 마음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티아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내 생각이 모자랐구나.’
결국 그는 제 누이에게 친구 만들어주기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자격이 될 만한 영애를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티아의 마음이 점점 더 빠르게 닫히는 게 눈에 보여서.
‘제게는, 음, 오라버니도 있고요. 이제 시시한 친구 같은 건 필요 없답니다. 책이면 충분하여요.’
황녀를 낳고 도망치듯 황도를 떠난 어마마마를 아르비드가 대신하기엔 한계가 뚜렷했다.
그렇다고 지금의 폐하께 부성애를 바랄 수도 없으니.
유일한 황녀라는 고귀한 신분만 본다면 모두의 부러움을 살 만했다. 그러나 황태자인 아르비드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티아는 황성에서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아르비드는 그게 자못 안타까웠다.
타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제대로 된 애착 형성 과정을 경험해본 적 없는 티아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이 되는 어린아이다.
“에펜베르크 영애는 본궁에 근무하게 됐는데, 소개해줄까?”
“흐응, 안 그래도 요 앞에서 만났답니다. 바빠 보여서 인사만 하고 보내주었어요.”
또, 또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턱을 추켜올린다. 요 앞에서 만났다고는 해도 분명 한참은 재무부 앞을 얼쩡거렸을 게 뻔하지 않은가.
황녀라는 이유로 외롭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것마저 어린 시절의 자신과 꼭 닮아있었다.
‘그래도 나는 케이어드 대공자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공이 된 케이어드가 그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나이가 조금 더 들어서는 테고가 황제의 대자라는 이유로 황궁엘 들락날락거렸다.
비록 그렇게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어도 종종 인사 정도는 했다.
그것도 3년 전 반란군 진압 작전에 참여한다며 홀연히 떠나버리기 전의 이야기다.
테고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겨우 다시 친분이라도 쌓아볼까 싶었는데.
그때, 그에게 베룸 공녀라는 약혼자가 생겼다.
그리고 아르비드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일 때마다 테고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르비드 본인이라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은 씁쓸했다.
그래도 느슨하게나마 친구의 범주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티아에게는 이런 관계조차 없지 않은가.
아르비드가 쓰게 웃는 사이 황녀가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와 섰다.
“오라버니가 내성 밖으로 나갈 때는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하셔서 말인데요.”
“베룸 공녀를 보고 싶으니?”
“네? 꼭 보고 싶다기보다는…….”
가장자리가 갈색인 페리도트빛 눈동자가 빠르게 깜박였다.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반, 또다시 상처받을까 망설이는 두려움이 반이었다.
티아가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굴려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아르비드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다.
“그러니까, 음. 그래도 제국의 공녀라면 황녀인 제가 마땅히 알아두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매번 벽을 느끼고 좌절하면서도 티아는 친구를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베룸 공녀는 이미 성인인 열아홉인데.
나이 차이가 많아 친구가 되긴 어려울 거라고 말하려던 그의 입이 딱 다물렸다.
‘마침 제2기사단에 가볼 핑계가 필요하긴 했으니…….’
그리고 베룸 공녀라면 어쩐지 티아와도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해도 티아는 황녀다. 상대와 서로 친밀한 관계가 되는 데에는 나이보단 비슷한 신분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처음 봤을 때부터 베룸 공녀는 뭔가 달랐다.
제국으로 편입되기 전부터 베룸 영지는 신분 차별이 엄격하지 않은 곳이라서일까.
그런 가문에서 자라서인지 황제인 아바마마를 어려워하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게다가 티아는 제가 이제 다 큰 줄로만 알고 있으니.’
어른스러운 척 굴어도 아르비드의 눈에 황녀는 한참 어린 아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티아에게 해맑고 아이 같은 면이 있는 그녀가 곁에 있어준다면…….
공녀라면 외로움을 달래려 종일 책만 본다는 황녀의 마음을 열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 폐하께서도 그녀를 황녀가 더 자랄 때까지 사교계를 맡아줄 재목으로 보셨고.
둘이 잘 지낸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이미 결론을 내린 아르비드의 머릿속에서 어떻게든 이유를 찾으려는 힘겨운 노력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는 서로를 향해 웃어주는 공녀와 티아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꽤 기꺼운 기분이라 그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건, 그러니까…… 절대 사사로운 목적이 아니라.
“그럼, 베룸 공녀를 만나러 가볼까?”
* * *
“다들 요정처럼 생긴 공녀라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오라버니?”
미리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보낸 후 외성으로 가는 마차 안이었다. 황녀 티아는 치맛자락을 꼭 쥐고 놓질 못했다.
오늘 아침뿐 아니라 며칠 전부터 소문이 자자한 공녀였다.
실은 그녀의 머리카락 색이 제 눈과 비슷하다는 말을 듣고 만나기도 전에 먼저 호감이 자라난 참이었다.
“요정? 그런 느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처음 마주쳤을 때와 데뷔탕트 때의 아이네를 떠올린 아르비드의 입매가 늘어지며 허물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티아는 어쩐지 제 오라비가 평소와 달리 들뜬 기색이라고 생각했다.
아르비드는 황족답지 않게 모두에게 다정하고 친절한 편이었다.
게다가 고위 관료에게나 하급 관료에게나 공평했다.
그래서일까. 누군가는 그더러 황족으로서 이상적인 미덕을 갖췄다고 칭송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나치게 담백해서 무기력한 면이 없지 않았다.
어린 티아의 눈에도 늘 흐릿한 미소만 짓거나 힘없이 웃는 모습을 보이던 오라버니가 오늘은 달라 보였다.
‘그렇지만 공녀는 분명히 리테루온 공작의 약혼자라고 했는데.’
문득 티아는 아까 마주쳤던 달리아 에펜베르크 영애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그녀를 멀리서 본 적은 있어도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에펜베르크 영애를 만나자마자 티아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그녀가 굉장히 아름다운 소녀라는 거였다.
게다가 유치하고 일차원적인 또래들보다 지적 수준이 자신과 꼭 맞을 듯 보였다.
“에, 에펜베르크 영애군요. 본녀는…….”
“에스피오의 영광된 이름을 받으신 자, 도로테아 에스피오 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
본궁 앞을 서성이다 마주친 달리아는 우아하게 드레스를 잡아 맞절을 올리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을 따라 티아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이렇게 압도적인 미인을 본 적이 없어서인지 황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
‘겨우 열 살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성인인 베룸 공녀보다는 같은 미성년인 에펜베르크 영애가 더 어울리기 쉬울 거라 여겼다.
그런데 종종 보는 귀부인들보다도 더한 기백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먼저 말을 거는 무례를 용서해주시어요. 죄송하지만 황녀 전하, 별다른 용건이 없으시다면…….”
“아.”
그제야 그녀의 팔 안에 가득 들린 서류가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는 몰라도 에펜베르크 영애가 바쁘다는 사실만은 알아차렸다.
그런 사람을 그저 만나보고 싶다고 오래 세워두고 있었구나.
“벼, 별 건 아니니 이만 물러가도 좋아요.”
티아의 싱그러운 풀빛 눈동자가 진득하게 어두워졌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리아는 꾸벅 인사를 하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니, 조금 걷는가 싶더니 다시 슬쩍 고개를 기울여 황녀를 살피곤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그래도 베룸 공녀는 나랑 눈동자 색도 비슷하고, 다들 요정이라고 하니까.’
오전의 기억으로 다시금 침울해졌던 티아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각자 다른 설렘과 기대로 부푼 남매는 도착했다는 마부의 말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흠, 흠. 본녀가 여기 들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 그러니까. 영애들이 잘 지내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예요.”
잔뜩 붉어진 뺨을 한 황녀를 보며 아이네가 고개를 기울였다.
“네? 이렇게 갑자기요?”
“…….”
미트파이를 먹고 잠시 쉬는 동안 들이닥친 황족 남매의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그렇게 기사단 건물 앞마당에서 그들을 맞이한 아이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그러고 보니 황태자한테 여동생이 하나 있었지?’
서브 남주인 아르비드와 여러모로 닮은 황녀에게 그녀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건넸다.
그때, 자신만만해 보이는 목소리와는 달리 미묘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던 티아가 아이네와 눈을 마주했다.
“어?”
“…….”
그리고 황녀의 눈동자 너머의 ‘기억’들이 어김없이 흘러들어왔다.
그래, 맞아. 이 작은 황녀의 역할은 황태자가 원작 여주에게 더 큰 호감을 갖게 해주는 거였지.
정략결혼을 해서인지 자신이 낳은 아이들에게도 애정이 없는 황후가 떠나버린 황궁이었다.
정치적 필요가 없다면 관심을 보이지 않는 황제와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오라버니.
물질적으로 풍족한 환경 속에서도 애정 결핍에 시달리던 어린 황녀는 테고와 만나 가까워졌다.
‘아마 외로운 황녀에게서 자기 자신을 본 거겠지.’
원작 여주인 테고 역시 마력 폭주로 어린 나이에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친해진 두 사람을 보며 황태자는 제 곁에 테고 같은 사람이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고.
확실히 원작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긴 하구나.
슬쩍 고개를 들어 테고와 아르비드의 굳은 표정을 확인한 아이네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이거 봐. 둘 다 벌써 심상치 않아.’
달리아의 역할은 얼떨결에 제가 맡긴 했지만 서브 남주의 역할까지 그녀가 대신할 순 없다.
안됐지만 일단 원작이 끝날 때까지 황태자는 짝사랑남으로 남는 수밖에.
한편, 테고는 옆에서 아이네의 눈동자가 또다시 총천연색으로 일렁이는 걸 목격했다.
‘또다.’
그리고 제 앞의 아르비드 역시 그녀의 변한 눈 색을 보고 놀라는 모습 역시 알아차렸다.
‘역시 이자의 눈에도 보이는 거야.’
시선을 돌려 황태자의 녹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자 아르비드도 놀란 기색을 싹 지우곤 테고에게 도전적으로 눈을 마주쳐왔다.
정작 도로테아 황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했다. 그 사실에 테고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폐하와 황태자, 황녀 모두 직계 혈족인데 왜 황태자만?’
뭐가 되었든 그는 지난번부터 황태자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처럼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공녀와 함께 산책이라도 하려나 했는데. 대뜸 황녀까지 대동해서 등장하다니.
더글라스에게 했듯이 경고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도 했고.
“아, 정말로 요정님이야.”
“응?”
그때, 황녀가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네에게로 손을 뻗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그녀의 손을 맞잡아준 아이네는 속으로 감탄했다.
‘손이 부드러워.’
조금은 통통하게 꽉 찬 느낌이 그대로 느껴졌다. 황녀라고는 해도 이런 면에서 보면 전형적인 어린아이였다.
이야, 대단한데. 육아물도 한 스푼 넣었어? 미래를 내다봤네, 이 소설.
귀엽게 생긴 데다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어린이라니. 함박웃음을 짓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꼭 잡아주며 아이네가 헤실헤실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어……. 그러니까.”
눈앞의 꼬마가 황녀라는 사실도 잠시 잊고 그녀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자 아이네의 손가락에 캔디 서너 개가 닿았다.
‘이럴 수가. 그 와중에 가진 게 오징어 캔디뿐이라니.’
이마저도 오징어 캔디를 전부 압수당하고 실의에 빠진 나딘을 위한 인도적인 처우였다.
아무리 그래도 전부 다 수거해간 건 야박한 듯해서 말이지.
“황녀님. 캔디 드실래요?”
물론 여전히 아이네에게는 도무지 먹고 싶지 않은 흉물이었다.
하지만 황녀도 이쪽 세계 사람이니까 오징어를 좋아하지 않을까.
나딘에게는 안된 일이긴 해도 뭐, 어쩔 수 없지. 운이 없는 본인을 탓해야지.
“이, 이런 건 어린애들이나 먹는 것인데, 본녀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티아는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어린아이답게 침샘까지 제어하긴 무리였던 모양이다.
결국 아이네가 포장지를 벗겨내 입 안에 넣어주자 황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요정의 맛?”
아니에요, 황녀 어린이. 자꾸 그런 말씀 하시면 무슨무슨 요정 모독죄로 잡혀가실 수도 있어요. 오징어랑 엮는 건 되도록 지양해주세요.
티아가 볼이 볼록해진 채로 우물거렸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내는 게 꼭 그 나이 또래답게 귀여웠다.
입 안에 든 게 오징어 캔디라는 사실은 매우 유감이었지만.
흐뭇하게 바라보던 아이네의 옆얼굴로 테고의 시선이 따갑게 내리꽂혔다. 황녀와 아이네를 번갈아 보는 눈빛에 약간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
‘뭐야, 본인 거 애한테 좀 먹였다고 그러는 거 아니지?’
오징어 음식만 등장하면 인격이 바뀌는 듯한 그였기에 아이네가 샐쭉한 눈으로 맞받아쳤다.
“오랜……만입니다. 공녀.”
그사이 의도치 않게 소외되어 있던 아르비드가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앗, 네에. 그러네요.”
그제야 그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단 걸 깨닫고 아이네의 눈매가 다소 누그러졌다.
‘역시 테고를 의식하기 시작한 거야. 그러니 황녀를 내세워 여기까지 온 거지.’
원작에서도 달리아와의 약혼이 계기가 됐던 것과 똑같은 흐름이다.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자신이라는 변수를 걱정하는 그녀에게 전개와 같은 흐름을 확인하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다만 조금 신경쓰이는 건,
만인에게 공평히 다정한 황태자답지 않게 그의 시선이 제게 너무 길게 머무는 듯하단 건데.
기분…… 탓이겠지?
황도에 온 뒤 주목받는 일이 잦아졌다고는 해도 저렇게까지 노골적인 눈길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아!”
괜스레 딴청을 피우던 아이네는 그제야 자신이 인사를 올리지 않았단 걸 기억해냈다.
“에스피오 제국의 지지 않는 작은 태양이신…….”
“아니, 아닙니다. 앞으로도 인사는 되었습니다.”
으응? 이게 아니야? 그럼 달리 원하는 게 있나.
그녀의 시선이 주위를 쭉 훑었다.
두 남자와 더불어 자신의 손을 맞잡은 티아까지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이건 확실히 좀 부담스러운데.’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주요 인물 셋의 눈길을 빤히 받는 일은 역시 조금 벅찼다.
마치 간식을 손에 쥔 훈련사가 된 기분…….
설마, 이건가?
아이네는 셋 중 가장 순해 보이는 금발을 가진 아르비드에게로 고개를 돌려 웃어주었다.
“어, 아르, 아니. 전하께서도 하나…… 드시겠어요?”
앗, 속으로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부르는 게 습관이 되어서 하마터면 또 실수할 뻔했다.
잠시 흐트러진 표정을 빠르게 수습한 그녀가 오징어 캔디 하나를 마저 내밀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이네의 손바닥 위로 세 사람의 눈빛이 한데 엉겨 붙었다.
“…….”
왜, 이것도 아니야? 여기 사람들은 워낙 오징어를 좋아하기에 만능 치트키인 줄 알았는데.
하긴 이제 오징어를 싫어하는 사람이 하나쯤은 나올 때도 됐지.
침묵을 견디다 못해 그녀가 뻗었던 손을 슬며시 움켜쥐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급히 허리를 숙여 아이네의 주먹을 붙잡았다.
“아닙니다, 공녀의 성의인데 거절할 리가.”
“참고로 그것도 오징어 캔디예요.”
“오라버니! 요정님 같은 맛이 나요.”
엄중하게 경고하는 그녀의 목소리 위로 잔뜩 들뜬 티아의 음성이 겹쳤다. 황녀는 여전히 아이네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어딘가 신이 난 듯했다.
캔디를 오물거리느라 한쪽으로만 볼록 튀어나온 황녀의 뺨이 연신 씰룩거렸다.
요정의 맛이라니…….
그거 아니라니까! 가만, 여기서는 요정이 다른 의미인 거 아니지?
이제 아이네는 사람들이 제게 요정 같다며 감탄하던 상황마저 슬슬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기꺼이.”
테고만큼이나 키가 큰 황태자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런데 그녀의 자그마한 손가락을 벌려 그 안에 쥔 캔디를 집는 과정이 묘하게 느릿했다. 아르비드는 아이네를 향해 뻗은 손가락 끝으로 모든 감각이 집중되는 기분이 들었다.
티아보다는 크지만 제 손보다 확연히 작은 공녀의 손아귀가 절로 의식되어서.
무엇보다 별로 힘을 주지 않아도 저항 없이 제게 잡혀 열리는 모양새가…….
“큼!”
결국 별것 아닌 접촉인데도 아르비드의 뒷덜미는 얼핏 붉게 물들고야 말았다.
“…….”
그리고 황족 남매가 등장할 때부터 저조해지기 시작하던 테고의 기분은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싸늘하게 피가 식는 느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황녀든 황태자든 아이네에게서 떼어놓고 싶었다.
“이곳까지 방문하신 이유가 그저 영애들의 첫 출근을 독려하시기 위한 겁니까?”
자연히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게 깔렸다.
그때, 다 자란 두 남자의 대치를 올려다보는 티아의 큰 눈이 깜박였다.
‘이 남자가 요정님의 약혼자인 테고 리테루온 공작이구나.’
듣기로 3년여 전만 해도 황궁에 자주 들렀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 황녀는 겨우 다섯 살 남짓이었다.
사실상 지금이 그녀에게는 첫 대면이나 마찬가지였다.
곧 인생 8년 차가 되는 것치고 티아는 나이에 비해 영특한 데다 눈치도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지금 제 오라버니와 테고의 신경전이 무엇 때문인지 빠르게 알아차렸다.
‘이건, 이건! 서로 요정 공녀를 차지하려는 거야!’
그러나 정작 요정님의 시선은 황태자가 쥔 캔디에 꽂혀 있었다.
요정님은 두 남자의 마음은 아랑곳하지도 않는 것처럼.
티아의 생각대로, 현재 아이네의 최대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과연 아르비드 역시 오징어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이곳 사람일 것인가!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린 아이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린 티아가 보기에도 애매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공기가 어색해지는 순간에 유달리 민감했다. 통통한 입술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또 내가 오고 싶다고 졸라서 이렇게 된 걸까? 이제 이런 분위기는…… 싫어.’
눈을 굴리며 아이네, 테고, 아르비드를 차례로 바라본 티아는 결국 먼저 공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제 오라버니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아까의 들떴던 기색이 무색하게도 힘이 쭉 빠진 목소리였다.
“오라버니, 오늘은 이만 가요.”
그제서야 아이네는 갑작스레 허전해진 손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만드는 것으로 오늘 황녀의 목표는 달성되었을 테다. 거기에 캔디 획득이라는 보너스까지.
‘다음 약속도 없이 이렇게 벌써 돌아가면 안 되는데!’
황태자와 테고를 자주 만나게 해주는 역할이 바로 티아였다. 어린이 메신저인 그녀가 아니라면 근무지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기 어려울 테니까.
으음, 원작에서도 약혼자가 생긴 이후의 첫 만남이 다소 어색하긴 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서로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고 헤어지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아이네가 보기에 원작과 지금이 달라진 부분이라고는 그녀 본인과 오징어캔디뿐이었다.
그렇다면 오징어로 틀어진 전개는 오징어로 치유하는 게 인지상정!
“저기, 황녀 전하. 오늘은 저도 첫 출근이라 모시기 힘들지만, 다음에는 집무실로 놀러 오시겠어요? 거기엔 오징어 캔디가 더 많아요.”
결국 아이네는 만능 치트키인 오징어를 꺼내 들었다.
“본녀가,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다정한 아이네의 유혹에 티아가 머뭇거렸다.
또 먹고 싶을 만큼 맛있는 캔디이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눈앞의 공녀에게 호감이 퐁퐁 솟았다.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이상하게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어릴 적 읽었던 책에 나오는 숲속 은자와 꼭 닮은 생김새까지. 티아는 공녀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것도 아주 많이!
“흐, 흐음! 공녀가 그리 원한다면 한 번 정도는 시간을 내어보도록 하지요.”
호기롭게 뱉어낸 말과는 달리 황녀의 두 눈은 도로록거리며 습관처럼 바쁘게 굴러갔다. 아닌 척해도 영락없이 눈치를 보는 모양새였다.
혹시라도 제 말에 언짢은 기색을 내비칠까봐 걱정하면서.
“와, 꼭 오셔야 해요!”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아이네에게 티아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았어, 황녀가 테고랑 자꾸 마주칠 계기는 이거면 됐고. 문제는…….’
아이네의 시선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티아와 꼭 닮은 짙은 풀빛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잠시 움찔했다.
언제부터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순간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나머지 캔디를 뒤로 숨길 만큼 퍽 집요한 눈길이었다.
‘원작에서도 이상한 데에 집착하는 면이 있더라니……. 그래도 이제 남은 캔디는 하나뿐인데.’
한편, 경계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아르비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런……. 티아도 보고 있는 앞에서.
“아! 큼. 그러니까…….”
그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걸 들켜서일까. 아르비드는 저도 모르게 말이 점점 빨라졌다. 티아가 찾아오기 전, 제2기사단 방문을 위해 생각해두었던 핑계를 겨우 떠올리곤 말을 이었다.
“곧 사냥대회이기도 하니 제2기사단의 상황도 파악할 겸 들렀습니다.”
“사냥대회요?”
아이네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생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사냥대회라니, 로판에서 빠질 수 없는 이벤트지! 게다가 이 소설에서도, 아이네에게도 특별했다.
‘원작 남주인 대공이 여기서 처음 자기 신분을 밝히거든.’
드디어 곧 등장하겠구나.
내심 아이네는 생각지도 못한 약혼자 역할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바람에 긴장하고 있던 차였다.
안 그래도 원작에선 없던 데뷔탕트마저 열리게 됐으니까. 그러니 어떻게든 원래의 흐름으로 돌아오는 전개를 확인해야 안도가 되었다.
‘휴, 이젠 좀 안심해도 되겠어.’
대공은 엄연히 따졌을 때, 제국의 일반적인 귀족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상당한 부분에 걸쳐 자치권을 가진 작은 공국의 왕이었다.
그래서 3년 만에 열린 이번 데뷔탕트에 참석하지 않았을 때 아이네는 안심했다. 그가 등장할 시기가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번 사냥대회만큼은 참가할 테지.
원작 소설이 생각보다 전개에 충실하다니까?
이야기의 큰 흐름이 그대로 가고 있다면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남주가 나타나면 이제 진짜 시작이야.’
금세 얼굴이 밝아진 그녀가 테고를 올려다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원작 여주인 테고의 성격이 좀 더 까칠해서 걱정했는데. 역시 본격적인 로맨스가 시작되지 않아서 그랬나 보다.
이래야 두 사람이 초반에 티격태격 부딪칠 테니까.
‘어차피 초반부에서 내 역할은 테고의 껍데기 약혼자야. 좋아, 이건 나딘을 속여서라도 참여한다!’
“안 됩니다.”
테고가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짧은 기간이었어도 아이네를 제법 파악한 그였다. 물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런 표정, 저런 눈빛일 때 아이네는 꼭 한 번씩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안 그래도 그녀와 황태자 사이 눈 맞춤에 불쾌감이 절정에 이른 참이었다. 고작 찰나에 불과했는데도.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게 뭐가 됐든, 안 됩니다. 나딘 공자도 반대할 겁니다.”
테고는 혹시나 싶어 나딘의 이름을 들먹여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네의 표정이 새초롬하게 변했다.
“누가 직접 사냥하겠대요? 그냥 대회 구경만 하겠다는 거지.”
생각 같아서는 숲속에서 같은 사냥감을 두고 여주와 남주가 다투다 서로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허약하기 그지없는 체력 또한 잘 알았다.
“그럼 공녀는 누구에게 손수건을 선물하나요?”
곁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황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티아는 나이가 어려 아직 아무런 사교 행사에도 참여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황족의 기본 소양 교육으로 크고 작은 행사들에 대해선 제법 잘 알았다.
“제가 손수건을요?”
“사냥대회에서 레이디는 응원하는 기사에게 손수건을 선물한다고 배웠어요.”
반란군이 기회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사냥대회가 개최되는 건 근 8년 만이었다.
‘그럼, 사냥대회는 다들 처음인 거였네?’
다시 말해서 당시 갓 태어났을 황녀는 물론이고 아이네와 테고, 아르비드 역시 처음 참가하게 된 셈이다.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네가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참! 그런 게 있었죠. 으음, 참여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테고의 얼굴을 향해 슬금슬금 올라갔다.
바로 며칠 전, 데뷔탕트 때 폐하까지 나서서 약혼 선언을 했으니. 굳이 말할 것도 없이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이네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테고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나딘 공자 쪽은 제가 설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전엔 뭐가 됐든 안 된다며!
아이네는 갑작스레 태세를 전환한 그가 마뜩잖았다.
하지만 나딘을 설득해준다는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편 이제 황녀의 눈길은 아까부터 멀리서 얼쩡거리는 핑크빛 머리의 사내에게로 가 닿았다.
‘저 사람은 아까부터 뭐 하는 거지?’
거기엔 아까부터 애꿎은 머리카락을 쥐어뜯다 결국 벽에 머리를 박아버린 칼릭이 있었다.
‘오라버니도 오늘따라 이상하고.’
티아는 또래보다 조숙하고 똑똑했다. 하지만 단순한 호감 이상의 미묘한 감정까지 알아채긴 역시 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