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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언제나 시작은 작은 균열로부터 (11/29)

10. 언제나 시작은 작은 균열로부터

아이네는 비교적 영특한 머리와 뛰어난 운동신경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타고난 자질을 살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체력의 소유자였다.

‘그놈의 병약한 공녀 설정!’

그래서 지난 8년간 제대로 된 육체 활동이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요즘 들어 좀 나아졌나 했더니 역시 과한 자신감은 독인가 보다.

나름대로 좋은 기억력 덕에 체력을 절약하는 요령을 터득한 춤은 곧잘 추었다.

그러나 다른 요소가 들어갈 여지가 없는 육체 활동은…… 처참했다. 다시 한번 그녀는 춤과 훈련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특히 달리기가 그랬다.

“아직도 두 바퀴째입니까.”

“헉, 허억.”

테고가 바로 옆에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아이네는 씨근덕거리며 눈을 흘겼다.

애초에 테고는 원작에서 공인한 검술 천재였다.

‘그리고 당신은 아티팩트 템빨도 있잖아!’

있는 힘껏 달리는 그녀의 곁에서 테고는 그저 성큼성큼 걷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게 아이네를 더 약 오르게 했다.

다리 길이의 차이도 있었지만 아이네의 발이 워낙 느린 탓이다. 걷는 건지 달리는 건지 모를 그녀를 지켜보던 테고는 착잡한 얼굴을 했다.

‘이래서야 도망가다가도 금방 잡히겠군.’

검과 오징어에 있어서만은 진심인 테고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러면 검을 휘두르긴커녕 적에게 뺏기기나 할 겁니다.”

“흐, 헉…….”

그녀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터져 나왔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밉살스럽게 말을 붙이는 그에게 대꾸해주기도 어려웠다.

아이네는 누군가 시간을 되돌려 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게 가능하다면 다시는 검에 대해선 입도 뻥긋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과거의 나는 왜 괜히 단검술을 배워보겠다고 해서!’

이틀 전 테고가 장담한 대로 아이네는 아무런 잡음 없이 사냥대회 참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나딘은 생각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고가 무어라 나딘을 설득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성공했다.

이후 나딘이 아이네에게 물은 건 단 한 가지였다.

‘나중에 필요한 일이야?’

사냥대회가 필요하냐는 건지, 검술 훈련이 필요하냐는 건지 모를 모호한 물음이었다.

검은 배워두면 언젠가 쓸 일은 생긴다. 하지만…… 사냥대회가 필요하냐고 묻는 건 굉장히 이상한 말이니까.

그건 원작을 아는 아이네만이 알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단검술 이야기겠지?’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딘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단지, 망쳐도 괜찮다며 손수건 판매용 카탈로그만 조용히 내려놓았다.

아버지와 제 것을 만들어달라는 뜻인 걸 알았지만 어쩐지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이상하네. 요즘 서류만 보다가 머리가 어떻게 됐나. 점점 말이 없어져.’

원래도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네가 테고와의 약혼을 결정하고부터 나딘은 답지 않게 심각해졌다.

저녁을 먹고 나면 서재에 틀어박혀 무언가 몰두하질 않나.

서재에서 연애편지라도 쓰냐고 놀려도 입을 꾹 다물어버리기 일쑤였다.

‘요즘 아버지와 통신구로 계속 서신을 주고받는 거 같기도 하고.’

아버지가 허락해줬다고 하기에도 좀 이상했다.

나딘보다 더 아이네의 은둔 생활을 지지했던 사람이 바로 아버지인 베룸 공작이었다.

‘겨우 손수건 하나에 갑자기 양육 방침을 바꾸신 거면 너무 캐릭터 붕괴 아냐?’

하지만 원작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이네에겐 손수건 이상의 이유를 떠올리기 어려웠다.

그게 아니라면 남은 건, 대공이 등장하는 순간에 테고의 약혼자를 함께 맞닥뜨리게 하려는 원작의 영향력이라고 할 수밖에.

‘이럴 줄 알았으면 단검술 배운다는 말은 꺼내지도 말걸.’

후회는 늦었을 때, 더 늦은 법이란 걸 아이네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현실의 테고는 더 느려진 그녀에게 가차 없이 지적했다.

흑흑, 주인공의 팩트에 맞아 부러진 뼈는 어딜 가서 붙여야 하나요? 이쪽 세계엔 신전도 없는데.

“다리를 조금 더 빨리 움직일 순 없습니까. 이건 차라리 걷는 게 나은 속도 아닙니까.”

“이익!”

비록 거북이걸음이었으나 그래도 최선을 다해 달렸던 아이네가 폭발했다.

아까부터 다른 단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꾸 바짝 붙어 참견하고 말이야.

“헉, 흐으……. 기권! 나, 난, 히익, 이제 더는, 헥, 못 해.”

운동신경이 좋다고 넌지시 귀띔해주던 칼릭의 말에 우쭐한 게 잘못이었다.

단기 속성으로 단검이라도 배워 테고와 대공의 첫 만남을 근처에서 지켜보려 했건만.

아이네는 쿨하게 포기했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자신의 병약한 설정값을 굳이 부정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렇지, 달리아 영애도 하지 않았던 짓을 굳이 할 필요 없잖아.

“…….”

그렇게 그녀는 땀을 닦으려 가지고 나왔던 흰 손수건을 바닥에 던졌다.

아이네를 따라 멈춰 선 테고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는 그를 보고서 그제야 아이네는 깨달았다.

‘아, 맞다. 이 소설에서만 나오는 특이 설정!’

독창성을 확보하겠다는 작가의 일념인지 종종 보통의 로판과는 다른 설정들이 존재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흰 수건을 던지는 건 기권이라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테고는 아이네의 표정과 행동으로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무참하게 내팽개쳐진 손수건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사단에서는 합당한 이유 없이는 열외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씨이, 몰라요! 안 해!”

* * *

지난번 레이피어를 들었을 때처럼 꼼짝없이 근육통으로 앓아눕게 생겼다. 이렇게까지 가진 능력이 없을 수가 있나.

‘생각해보니까 나는 왜 아무 능력이 없어?’

모름지기 책빙의 시키면서 이렇게 존재 이유를 던져줄 거면 그걸 실현할 수 있는 능력도 줘야 양심이 있는 거 아닐까.

그렇다고 빙의하자마자 원작을 알려준 것도 아니고. 허송세월한 게 8년이었다, 무려 8년!

부들거리는 아이네에게 테고가 눈치도 없이 기름을 부었다.

“공녀의 입으로 이제 기사단의 일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전에 지나가듯 한 말을 여태 기억하고 있단 말이야?

거칠어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머리는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아 팽팽 돌아갔다.

동서고금 누구나 납득할 만하면서 앞으로 이런 훈련하지 않게 될 핑계가 뭐가 있지?

‘그냥 체력이 약해서라고 하기엔 테고도 같은 여잔데…….’

역시 체력 핑계를 대기엔 자존심이 상한다.

아이네는 일부러 발을 구르며 연무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테고가 일단 손수건을 털어 품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아이네의 뒤를 따랐다.

도대체 갑자기 왜 손수건을 던지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단검을 배우는 조건으로 사냥대회 참석을 허락받은 게 아닙니까? 아까는 전쟁이 날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걸 언제 다 들었대?

다행히 원작에 대해 밝히지 않고도 얼버무릴 수 있는 일반론 수준이었다. 아이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 전쟁 나면 그냥 가요! 날 먼저 두고 가.”

“아무리 그래도 공녀를 전쟁터에 내보내진 않습니다.”

“씨이. 눈새, 정말. 여기는 평발 공익, 뭐 이런 거 없어요? 그냥 나도 그 비슷한 거로 생각하란 말이에요…….”

금세 테고에게 따라잡힌 그녀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네가 하는 말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귀담아 듣게 된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평발이 공익적이라는 말입니까. 애초에 평발은 뭘 뜻하는 겁니까? 눈새는 또 무슨 뜻인지…….”

와, 설마 이쪽 세계엔 평발도 없어? 어쩐지 검만 잘 휘두르면 다들 기사를 꿈꾸더라니.

하지만 아이네는 그걸 설명할 기력마저 잃은 상태였다.

‘됐어, 이제 그만 나를 좀 포기해줘.’

얼마나 걸었다고 벌써 이렇게 힘이 빠진 건지.

너무 힘이 들어 진작에 바싹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샘이 다시 촉촉해졌다.

모든 걸 다 가진 원작 여주의 앞에서 아이네는 다시금 눈물이 핑 돌았다.

“앗.”

그 바람에 힘이 풀린 그녀가 발을 헛디뎠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테고가 빠르게 아이네의 허리를 잡아채 안아들었다.

이미 지친 나머지 그녀는 느끼지 못했으나 테고의 팔에는 순간, 힘이 잔뜩 들어갔다.

게다가 일전에 그와 말을 탔을 때도 그랬듯 아이네는 처음에만 조금 놀랄 뿐이었다.

다른 남자였다면 질색팔색했을 접촉도 오히려 테고라서 몸에서 힘을 풀어버리기까지 했다.

‘같은 여자끼리 요 앞까지는 괜찮겠지? 테고는 아티팩트 써서 힘도 세졌으니까.’

아이네는 사기템의 힘을 빌려 세진 테고의 근육에게는 미안해하지 않았다.

“아…….”

안 그래도 긴장한 그의 팔뚝에 근육 하나 없이 말랑한 여체가 적나라하게 와 닿았다.

매번 아이네의 자그마한 체구를 보면서도 그는 이렇게 또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렇게 가벼운 몸이라니.

차마 함부로 손대기도 겁이 났다.

그녀가 과거에 몸이 약했다는 걸 새삼 상기하자 테고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래서 자꾸 아득바득 검술 같은 육체활동을 하려고 드는 걸까.

“무거울 테니 이제 내려줘도 돼요.”

“아니, 가볍, 아니, 네.”

“…….”

이럴 때는 빈말로라도 가볍다고 해주지 않나?

여전히 테고에게 달랑 들려 안긴 와중이었으나 아이네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너무 가볍다고 하면 상처받을까 싶어 테고 나름대로는 말을 아낀 배려였다.

하지만 오늘도 그것을 알아줄 리 없는 아이네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 * *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테고에게 제법 두꺼운 종이 한 장을 대뜸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평발이 뭔지 모른댔죠? 자, 이게 평발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오래 걷고 뛰는 거 못하는 게 원래는 상식이라고요!”

“상식?”

여전히 불퉁한 아이네가 대뜸 자기 할 말만 하고 쌩하니 제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테고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책상 위에 놓인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는 이내 새파란 눈동자에 의문이 서렸다.

‘이건…… 발, 인가.’

까만 잉크로 찍힌 발바닥이 ‘그려진’ 종이였다.

단순히 발바닥만 찍힌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아치로 인해 공백이 있을 부분에 붓으로 덧칠한 흔적이 너무나 명백했다.

거기다 아랫부분에는 ‘아이네이스 베룸’이라는 이름마저 쓰여 있었다.

‘이런 발을 가지면 걷지도, 뛰지도 못한다고? 그리고 원래라는 건 또 뭐며, 이게 어째서 상식이라는 거지.’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 마치 지금은 그 ‘원래’ 상황이 아니라는 듯이.

베룸의 특수성 따위를 뜻하는 건 아닐 테다. 테고의 단정한 이마가 살풋 찡그려졌다.

이건 베룸 영지에서 공녀를 만난 이후 느꼈던 이질감과 관련이 있는 걸까.

‘이상하군. 짜여진 각본이나 법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또다시 테고의 머릿속 어딘가가 파삭 소리를 내며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생소한 느낌에 그의 손가락이 잠시 관자놀이를 눌렀다 떨어졌다.

이번만큼은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힐끔 다시 바라본 아이네는 어제부터 제게 말 걸지 말라는 분위기만 폴폴 풍겼다.

테고는 이미 서류 처리에 몰두한 그녀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어내었다.

무언가 이상하단 직감은 그저 제 느낌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 저 상태의 공녀를 건들면 안 된단 사실만큼은 상식에 가까웠다.

나중에,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물어도 늦지 않겠지.

그래서 테고는 일단 그 종이를 책상 가장 아래 서랍 안으로 소중히 넣어두었다.

* * *

티아는 오늘도 설레는 가슴 위로 얌전히 두 손을 모아 꾹 눌렀다.

“베르너 부인, 앞으로 당분간은 지금처럼 오전에 수업을 전부 마칠 거야.”

“하지만 전하, 그러면 너무 이른 시간에 일어나셔야 하는걸요.”

황녀의 옷매무새를 손수 다듬어주던 베르너 자작부인이 난색을 표했다.

티아는 또래보다 영특해 수업 수준이 꽤 높았다. 벌써 아카데미 출신 학자와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의견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이게 다 친구가 없는 외로움을 학문에 쏟은 결과였다.

“흥, 그 정도 잠을 줄이는 건 본녀에겐 아무것도 아니야.”

“……전하.”

전하는 아직 여덟 살도 안 되셨어요. 어린이의 수면시간은 의지로 줄일 수 있는 게 아닌걸요.

베르너 자작부인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 삼켜냈다. 그녀가 모시는 황녀께선 본인이 아직 어리다는 사실을 유난히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참, 전에 말한 터키석 브로치는 어떻게 되었어?”

“베룸 공녀가 데뷔탕트에서 선보인 이후로 구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전하께서 쓰실 물건이니 이번 주 내로 받아보실 수 있을 듯하여요.”

새하얗고 나풀나풀한 드레스에 터키석이 박힌 리본 장식만을 두르고 나타났던 아이네의 등장은 금세 화제가 되었다.

지나치게 병약한 탓에 바깥 걸음조차 삼간다고 알려진 소문의 공녀에 대한 호기심이라기엔 과할 정도로.

다소 작고 마르긴 했으나 볼을 발그레 붉힌 그녀는 퍽 건강해 보였다.

게다가 단순히 어여쁘다고 말하기엔 좌중의 눈길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부인은 데뷔탕트 때 공녀를 보았지? 어땠어?”

“가까이서 뵙진 못했어요. 하지만 다들 요정이라고 부르는 게 이해가 갈 만큼 아름다우시더라고요.”

“흠흠! 그렇지? 부인이 봐도 본녀의 친구가 되기에 충분했지?”

“……예, 그럼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하. 공녀는 벌써 열아홉 성인이어요. 친구가 되기엔 나이 차이가 크답니다.

특히 이 시기의 열한 살 차이는 더더욱이요.

황녀가 막 걸음마를 하던 무렵부터 곁에 있던 자작부인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이러한 귀여운 설레발 역시 한두 번 겪는 게 아니었다.

베르너 부인은 티아가 가장 좋아하는 진주알 머리핀이 단단하게 고정되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지고한 황녀의 최측근이면서도 그녀는 정작 황녀가 가장 원하는 친구가 되어주진 못했다.

‘적어도 황후 폐하께서 황녀 전하의 곁에 계셔주셨더라면…….’

아르비드는 그나마 황후의 손길을 받고 자랐지만 티아는 나면서부터 혼자였다. 황후는 티아가 태어나자마자 젖 한 번 제대로 물리지 않고 친정인 공작령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나는 계약한 대가를 다 치렀어. 이젠 폐하도, 이 황궁도 지긋지긋해. 미안하지만, 황녀를 부탁해.’

황후의 뒷모습은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거기에 원체 자식에게 무심한 황제 폐하까지.

멀쩡히 양친이 살아있는데도 가족의 정이라곤 모르고 자란 황녀가 가엾었다. 그러나 베르너 자작부인의 역할은 그녀의 측근 시중인에 그쳐야 했다.

제아무리 부인이 티아에게 정을 준다 한들 황족과 하급 귀족의 신분 차이를 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자작부인 또한 굳이 그 견고한 벽을 넘으려 하지 않았고.

그랬기 때문에 황녀의 곁에 남을 수 있었다.

“본녀가 가까이서 보았는데 말이지. 공녀의 머리 색과 내 눈 색이 똑 닮았어.”

“두 분 다 고귀한 색을 지니고 계시지요.”

잔뜩 들떠 조잘거리는 티아의 목소리에 자작부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꼭 친구를 사귀시길 바라요, 전하.’

* * *

호기롭게 황녀궁을 나온 기세와 달리 티아는 오늘도 아르비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벌써 사흘째 모른 척 오라버니의 집무실에서 달콤한 디저트만 축내고 있었다.

아직 어린 황녀가 황성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범위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특히 외성에 위치한 제2기사단에 가려면 황태자의 허락이 필요했다.

‘분명히 저번에는 기사단에서 사냥대회 준비를 잘하고 있나 확인한다고 하셨는데?’

제 오라버니는 도무지 그 ‘확인’이라는 걸 하러 가시지 않을 생각인가 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늘도 잔뜩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충분히 어른스러운 어린이이기도 했다. 오라버니가 바쁘다는 걸 알면서 무작정 조르지 않을 만큼.

“티아, 요즘 방문이 잦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니?”

아르비드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쿠키를 오독오독 깨물어 먹던 황녀가 얌전히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후움, 소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오라버니 일을 하시어요.”

오랜만에 열리는 사냥대회 준비까지 더해져 집무실에는 평소보다 많은 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르비드는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꾹꾹 눌러댔다.

그 모습을 티아는 푹신한 소파에 등을 대고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문득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날 오라버니는 평소하고 달랐어.’

그러니까 함께 공녀를 만났던 날 말이다.

티아는 제 오라버니가 귀족 영애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걸 처음 봤다.

늘 잔잔한 미소가 기본이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풀어졌다가 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달랐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베룸 공녀와는 머지않아 가까운 사이가 될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건 역시 친구겠지?’

제2기사단에서의 짧은 만남 후, 마차를 향해 걸으며 티아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공녀가 잡아 준 한쪽 손을 자기도 모르게 만지작거렸다.

베르너 자작부인은 물론이거니와 시중을 들어주는 시녀들, 하다못해 다감한 오라버니마저 티아의 손을 그렇게 잡아 주진 않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의 감촉보다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주었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아마 그녀가 여섯 살만 되었어도 찔끔 눈물을 흘렸을지 모를 정도로.

“오라버니. 베룸 공녀가 하는 일은 많이 바쁜 일인가요?”

“제2기사단에 일이 그렇게 많진 않겠지만 처음엔 적응하느라 바쁘지 않을까. 왜?”

“우움, 그렇군요. 아무것도 아니어요.”

아바마마께 공녀를 제 동무로 삼을 수 있나 묻고 싶었는데. 역시 성년이 지난 데다 이미 곁에 약혼자가 있으니 안 되려나.

‘내 동무가 되려는 건 좋은 가문의 귀족과 결혼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니까.’

아직 남녀 간의 감정을 잘 모르는 티아가 보기에도 티가 났다. 리테루온 공작의 시선이 공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는 건. 게다가 오라버니마저…….

“저, 오라버니.”

“왜?”

“공녀는 그럼 리테루온 공작과 결혼하면 공작의 영지로 가버리겠죠? 아까 제국 지도를 봤는데 리테루온 영지는 여기서 너무 멀던걸요.”

“…….”

피로해 보이긴 해도 미소를 잃지 않던 아르비드의 얼굴에 순간, 실금이 그어졌다. 그러나 그 작은 균열도 일시적이었다.

그는 티아의 동그랗게 뜨인 눈을 보고 서둘러 표정을 수습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떨리기 시작한 오른손과 이미 휘어버린 펜촉은 원래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티아. 오후엔 수업이 없다고 했지?”

“네! 당분간 쭉 없을 예정이어요.”

“그렇구나. 그럼 기사단에 잠시 사냥대회 점검이라도 하러 함께 가겠니?”

꼬박꼬박 황녀의 수업 일정을 보고받으면서도 아르비드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생각해봤더라면 금방 알 수 있을 일이었다. 어린 동생의 하루 일정이 오전에 전부 끝난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좋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황녀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이틀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터라 벌써 눈꺼풀이 묵직해져 왔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 그녀의 목소리는 밝기 그지없었다.

* * *

‘그런데 오라버니는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신가 봐.’

마차 좌석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낸 티아가 아르비드의 눈치를 봤다.

제2기사단으로 출발하라는 말만 남긴 채 황태자는 내내 무언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는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티아와 함께 공녀를 만나고 온 이후, 그가 업무를 보다 답답한 마음에 잠시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도무지 집중하지 못하는 아르비드를 눈치챈 황제가 툭, 질문을 던졌다.

‘제아무리 공작이라고 해도 황족보다 귀하진 않아. 아르비드, 권력이 무어라 생각하느냐?’

‘……상대를 강제할 수 있는 힘과 권위가 아닙니까. 하지만 참된 군주라면 그것을 남용하는 걸 가장 경계해야 하고…….’

‘쯧, 됐다. 아카데미의 샌님들이 또 그렇게 고상하게 가르쳤나 보군. 잘 들어라. 권력이란 건…….’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힘. 그게 설령 그 사람의 뜻에 반하더라도.

‘아바마마는 대체 내게 뭘 원하시는 걸까.’

황제와 다르게 찬란한 금발이 아르비드의 손안에서 복잡하게 엉켜들었다.

“도착했습니다, 전하.”

이윽고 제2기사단 건물 앞에 멈춰선 마차에서 황태자와 황녀가 나란히 내려섰다.

곧이어 지난번에 멀리서 탄식만 내뱉던 분홍머리 남자가 다가왔다.

“에스피오 제국의 지지 않는 작은 태양이신 황태자 전하와 에스피오의 영광된 이름을 받으신 자, 황녀 전하께 라파엘르 백작 가문의 차남인 칼릭 라파엘르가 인사드립니다.”

“자네는 부단장이로군. 공녀와 공작은 안에 있나?”

티아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저번에 공녀가 줄줄이 인사를 읊으려고 할 때는 막으셨으면서.

“으음,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긴 합니다만.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녀는 그제야 분홍머리 남자가 제2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드디어 요정님을 또 만날 수 있어!’

비록 남들에겐 아이네를 공녀라며 다소 정 없이 부르긴 했다. 하지만 황녀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이미 요정님이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집무실로 가는 작은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커다란 나무문이 가까워질수록 공녀가 입 안에 넣어주었던 독특한 오징어 캔디의 맛이 다시금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순간 티아와 아르비드, 칼릭의 눈에 보인 건.

“아, 아니. 이건…… 자세를 잡아 주려고.”

무얼 하고 있었는지 서로 가깝게 붙어 선 두 사람이었다.

아이네의 등 뒤에서 감싸 안듯 서 있던 테고가 변명과 함께 빠르게 떨어져 나왔다.

“와, 안녕하세요. 황녀 전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

두 사람의 온도 차가 현격했다.

테고는 구석으로 도망을 갔고, 아이네는 늘 그렇듯이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녀에게로 도도도 달려갈 뻔한 두 발을 잔뜩 움츠리며 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워요, 좋은 오후군요. 베룸 공녀, 그리고 리테루온 공작.”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마땅히 들려야 될 오라버니의 대답이…… 없었다.

그에 서서히 눈을 들어 올린 황녀가 본 건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얼굴의 아르비드였다.

* * *

“어쩌죠, 황녀님. 오늘은 오징어 캔디가 없는데…….”

누가 다 먹어버렸거든요. 그 많은 걸 하루 만에!

아이네는 황녀가 보지 못하게 테고를 향해 눈을 흘겼다. 정작 테고는 제 의자로 멀찍이 떨어져 이마를 감싸 쥔 채 앉아 있었다.

“보, 본녀는 그런 걸 먹고자 온 게 아니어요!”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티아가 얌전히 두 손을 모았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보며 아이네가 싱긋 웃음 지었다.

아마 지난번에 보고 갔던 테고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황태자를 앞세워 찾아왔을 테다.

“그럼요, 그럼요. 사냥대회 준비 잘 되어가나 점검하러 오신 거죠?”

하지만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녀의 말에 움찔한 건 뜻밖에도 아르비드였다.

그의 시선이 연거푸 마른세수하는 테고에게 향했다. 메마른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약혼한 사이라지만 업무 시간에는 오롯이 일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곁에서 지켜보던 아이네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무언가 거슬리는 기분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한 거 맞지, 이거?

하지만 황태자가 테고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자각하기 전에 가능성이 없다며 포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아이네는 자신이 나서야 할 타이밍이 있다면 그게 바로 지금이란 걸 알았다.

“아, 그게 아니라 제가 단검 사용법을 배워볼까 해서 자세를 잡아주던 중이었어요.”

“공녀가 말입니까?”

아르비드의 눈길이 그녀의 가느다란 팔뚝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으레 받곤 했던 걱정스러운 시선이었다.

“원래는 활을 배워보려고 했는데, 다들 가능하다고 해서 저도 그런 건 아니더라고요.”

“다들?”

아르비드는 그저 고개만 갸웃했지만 테고는 이번에도 그 이상한 화법의 하나란 걸 눈치챘다.

그러나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아이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게 다 다른 소설에서 궁술에 능한 빙의자들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

활시위만 당기면 되는 줄 알았던 궁술에 그렇게 온몸의 근육이 다 쓰일 줄이야.

아이네는 궁술을 위한 준비물이 건강한 몸과 체력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단검술에 필요한 체력 단련도 못 이겨낸다면 활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연무장을 몇 배는 더 뛰어야 할 겁니다.’

그 말에 바로 포기했다. 그러고는 바로 호신술 수업으로 넘어간 참이었다.

마침 치한 역할을 어설프게 하며 자세를 잡아주던 테고에게는 정말로 좋지 못한 타이밍이었다.

그때, 멋쩍은 표정으로 헤헤 웃는 그녀와 아르비드의 시야를 차단하듯 테고가 끼어들었다.

“동쪽 숲은 현재 몰이꾼을 제외하고는 통제된 상태입니다.”

아까 아이네가 깔끔하게 정리해둔 현황 보고서가 황태자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이건 각 가문의 천막 위치와 혹시 모를 병력 배치도입니다.”

처음의 엉망이던 모습과 달리 한번 서류 처리를 익힌 테고는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다.

게다가 평소 과묵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속사포처럼 보고서의 핵심만 조목조목 읊었다.

“앞으로는 부단장을 통해 보고서를 보낼 테니 번거롭게 이곳까지 발걸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아이네는 어쩐지 두 사람 사이의 눈빛이 점차 진지한 기색을 띤다고 생각했다.

‘좋아, 이쯤에서 눈치 있게 빠져주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서 졸린 눈을 크게 뜨려 애쓰는 황녀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황녀 전하. 저희는 잠시 나가 있을까요? 이 앞에 작은 정원이 있더라고요.”

“뭐어, 공녀가 그리 원한다면 본녀가 들어주지 못할 건 없지요.”

본인의 키에 비해 다소 높은 소파에서 불안하게 발을 내딛는 티아에게 다시 손이 쑥 내밀어졌다.

“제 손 잡으세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어요.”

아랫입술을 꾹 다문 황녀가 아이네의 하얀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황태자에게 설명을 이어가면서도 이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테고의 미간이 잠시 꿈틀거렸다.

“저는 황녀 전하께 요 앞을 안내해드리고 올게요.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

“…….”

아이네가 황녀의 손을 잡고 문밖을 나섰다. 그러자 집무실에는 서로에게 별다른 용건이 없는 두 남자만 남았다.

그리고 문밖에서 칼릭을 만난 그녀는 세심한 조언까지 잊지 않았다.

“칼릭 경. 지금 집무실 안은 아주 중요한 장면이니까 절대 들어가지 마세요.”

“……예. 그럼 두 분께서는 어딜 가십니까.”

“몰랐는데 바로 앞에 작은 정원이 생겼더라고요.”

늘 그렇듯 밝은 표정의 공녀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이런…….’

잠시 냉랭하던 주군과의 사이가 잠시 회복되었나 싶은 찰나였는데.

저번부터 테고가 공녀와 무언가를 해볼라치면 귀신처럼 알고 들이닥치는 황실 남매였다.

거기다 언제 황녀와 공녀가 이리도 친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 겨우 두어 번 본 사이가 아니던가.

태생이 귀족이라면 친자매조차 쉽사리 손을 맞잡지 않는 황도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심지어 누가 봐도 황녀 쪽에서 먼저 움켜잡고 놓지 않으려는 모양새.

‘빨리 나서지 않으면 뜬금없이 황녀 전하에게 빼앗길지도.’

칼릭은 두 사람이 이미 약혼 관계여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공녀는 그럼 리테루온 공작과 언제 혼인하나요?”

“테고 경이랑 결혼을요?”

말이 정원이지 겨우 한 뙈기밖에 되지 않는 화단이었다. 아이네와 티아는 순식간에 둘러보고 벤치에 앉았다.

황녀가 초조한 얼굴로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생각보다 센 악력에 아이네가 놀란 것도 잠시, 그녀는 의아해졌다.

‘테고 경과 황녀는 아직 말도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는데. 벌써?’

언제 이렇게 애착형성이 되었지?

아이네를 간절하게 올려다보며 티아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자가 공녀의 약혼자 아니어요?”

“앗, 약혼하긴 했는데 결혼할 사이는 아니에요.”

작은 금빛 고개가 갸웃갸웃 기울어졌다.

으응? 약혼이란 무릇 결혼을 약속하는 예비 행위가 아니었나.

그렇게 둘은 멀뚱멀뚱 서로를 마주보기만 한 채 갸우뚱거렸다.

그때, 아이네는 황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갑자기 작은 웃음을 흘렸다. 입가에 묻은 작은 부스러기를 발견해서였다.

“쿠키를 드시다 오셨나 봐요.”

스스럼없이 뻗은 손이 제 입가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져 나간 순간, 티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 그럼. 본녀의 놀이 동무가 되어주지 않겠어요?”

“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이미 보좌관 업무를 맡고 있어서…….”

“그렇군요. 하긴 공녀는 충분히 좋은 가문과 연을 맺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쓸쓸한 기색이 가득했다.

놀이 동무와 좋은 가문과의 인연에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지?

아이네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어보려던 참이었다.

“아이네이스 공녀는 제 보좌관입니다.”

어느새 뒤따라 나왔는지 그들이 앉은 벤치 위로 테고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 * *

다음 날, 테고와 아이네는 마차 안에 나란히 앉아 황도의 시장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테고 경도 황녀님과 마주친 게 어제까지 겨우 두 번째였다는 거죠?”

“더 어릴 때도 몇 번인가 본 적 있긴 하지만 아마 황녀님이 기억을 못 하실 겁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시장으로 가야 할 이유가 됩니까?”

“…….”

아이네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황녀와 테고가 따로 만나서 친분을 쌓은 게 아닌 이상 그녀가 애착을 갖게 된 대상은 자신인 듯했다.

‘그치만 나랑도 두 번밖에 안 만났는데.’

그저 아이네가 황녀와 만나서 했던 것이라고는 손잡은 거랑,

“오징어 캔디…….”

진짜? 정말 이거라고?

이쯤 되면 이 세계에서 오징어는 아티팩트급 만능 치트키 아닐까.

“황도에서 오징어 캔디는 팔지 않습니다.”

“그걸, 테고 경이 어떻게 알아요?”

“…….”

으응, 파나 안 파나 알아봤나 보네. 이건 알아본 거야.

테고가 딴청을 부리며 마차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릎에 올려진 단정한 손가락이 까딱이는 걸 보니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아마 오빠한테 말하면 영지에서 공수해올 수 있을 거예요. 다음에 가지고 올게요.”

“그게 아니라, ……예.”

아이네가 오늘 시장으로 나온 가장 큰 이유는 하나였다.

원작의 전개가 틀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즈음이었다.

사냥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공국에서 넘어온 대공이 황도의 중앙 시장에서 테고와 처음으로 대면하는 시기.

초반 부분의 그들이 티격태격하게 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약혼도 그렇고, 황녀도 그렇고 벌써 두 개나 달라졌어.’

그것도 모두 아이네가 직접적으로 개입한 탓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불안함에 사로잡혔다.

거기다 며칠을 지켜봐도 테고는 시장 쪽으로 가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아이네가 이렇게 어설픈 핑계라도 대어 끌고 나올 수밖에.

“황녀님의 탄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미리 선물이라도 골라보려고요.”

그런데 이제 보니 오징어 캔디 때문에라도 알아서 시장에 드나들 듯했다. 물론 두 인물이 만나는 장면을 제 눈으로 봐야 안심하겠지만.

“그런 거라면 황도 상점 거리의 부티크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흔한 선물 말고요.”

전에 살던 세계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여기선 이상하게 아무도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선물!

* * *

띨롱, 하는 귀여운 종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예요, 여기.”

황도 공작저에 5년 넘게 근속한 집사장인 알베르토에게 미리 물어 알아둔 가게였다.

“이걸, 선물로 주겠다는 말입니까?”

“…….”

아이네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곳에서 왜 ‘인형’이 아이들에게 선물이 될 수 없었는지.

알베르토가 어째서 재차 정말로 인형을 선물하시려는 거냐고 물었는지.

이곳의 인형들은 극사실주의의 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어떤 용도로 쓰실 건가요, 손님! 저주? 헌팅 트로피?”

으스스한 가게 분위기와 달리 귀엽게 양갈래 머리를 한 소녀가 발랄하게 외쳤다.

“새, 생일 선물로 하려는데요.”

“그렇다면 역시 이런 인간형 인형이죠!”

지금 어린애보고 구체관절 인형을 갖고 놀라는 거예요?

점원이 내민 인형은 턱관절의 이음새가 너무 뚜렷해서 괴기스러울 정도였다.

거기다가 머리카락이랑 속눈썹이 너무 진짜 같은데…….

“이거 진짜 사람 털은, 아니죠?”

“돼지 털인데 원하시면 사람 털로도 제작해드려요!”

“…….”

아이네는 지나치게 사람처럼 생긴 인형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여기 곰인형 같은 건 없나요?”

그러자 점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그런 인형을 찾는 손님은 흔치 않다는 듯.

“곰……인형이요? 있긴 있는데.”

“그럼 그걸로 보여주시겠어요?”

로브를 걸쳤지만 누가 봐도 귀한 티가 나는 아이네를 점원이 힐끔거렸다.

“어, 네에.”

그녀는 극사실주의가 인간형 인형에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그렇게 점원이 창고에서 꺼내온 곰인형은…….

“아니, 이게 뭐죠?”

“손님께서 찾으시던 곰인형입니다아!”

이거 그 무슨 그레즐리 베어인가, 그거 맞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앞발에 이미 머리가 날아가고 없다는.

당장이라도 앞발로 연어를 낚아챌 듯 흉흉한 비주얼이었다.

한순간에 아이네의 취향을 오해하게 된 테고는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정말로 이걸 돈 주고 살 겁니까? 이런 게 좋다면……. 차라리 제가 사냥대회 때 잡아서 박제해드리겠습니다.”

테고, 당신은 좀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이대로라면 강아지 인형을 보여달라고 해도 도사견이 나올 판이었다.

결국, 아이네는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점원의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받으며 가게를 나왔다.

“지금이라도 부티크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

“…….”

아이네는 자신이 이곳에서 8년이나 살았지만 오징어 외의 또 다른 장벽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했다.

그렇게 머리를 짚으며 걷던 그녀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테고 경. 자, 잠깐만요.”

확실했다. 여기 어딘가의 골목일 텐데.

“아, 이런. 미안하군. 우리 공국에선 흉기 소지자는 다소 과잉 제압해도 죄가 안 돼서.”

동부 특유의 억센 발음이 섞인 낮은 목소리.

‘그’였다.

기사단의 더글라스 경이 바로 그 동부 억양을 썼었으니 틀림없다.

“뭐, 이젠 못 듣나?”

뒤이어 묵직한 무언가를 툭툭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운이 좋았다.

크나큰 충격을 받아 오늘은 이만 포기하고 귀가하려던 참이었는데.

“물러서십시오.”

아이네의 귀에도 들린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테고가 젖혀져 있던 그녀의 후드를 급하게 덮어씌웠다.

그러고는 검집이 있는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그녀를 자신의 뒤로 밀어 넣었다.

‘와, 내가 이 장면을 보게 되다니.’

제 몸이 가려지고도 한참 남는 널따란 등 뒤에서 아이네는 도근거리는 심장을 꾹 눌렀다.

“……공녀, 숨소리를 좀.”

저도 모르게 제법 거칠어진 숨이 나왔던 모양이었다.

“아! 헤헤.”

“…….”

테고는 요즘 들어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는 빈도가 급증했음을 느꼈다.

안 그래도 그녀가 제 옷을 꼬옥 붙잡고 등에 매달리는 바람에 순간 집중이 흐트러졌는데.

그로부터 십여 초나 지났을까.

털레털레 아무렇게나 걸어 나온 키 큰 남자가 골목 입구를 지키고 선 테고를 보고 멈추어 섰다. 로브에 가려진 테고의 체격과 발도 직전의 자세에 남자가 말했다.

“뭐야, 수도 경비대인가?”

“……제국법 325조에 따르면 시가지에서의 소란은 경범죄 처벌 대상입니다.”

테고는 아까 혼자 중얼거리던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혹시나 싶었던 가정을 확신으로 굳혔다.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에 진득하게 가라앉은 자안.

그였다.

지금 테고가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 중 하나.

‘하필 공녀와 함께 있을 때 나타나다니.’

그는 제 허리춤을 부여잡은 자그마한 흰 손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일단 초소 근처로 가서 신분확인 후 협조 부탁드립니다.”

골목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니 널브러진 무리들이 대강 눈에 띄는 숫자만 대여섯이었다.

“데이트하는 와중에도 본분에 충실한 기사군. 소속이 어떻게 되지?”

용케 테고 뒤에 숨겨둔 공녀의 존재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신원미상자에게 밝힐 소속은 없습니다.”

그러고는 테고가 검집을 짚었던 손을 옮겨 아이네의 손등을 가리듯 덮었다.

원래대로라면 사냥대회가 열리기 전까지는 마주칠 일이 없었을 자였다.

아이네의 생각이나 원작과는 다르게 테고는 케이어드 대공을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아버지 선대공의 작위를 이어받은 후 황제에게 승인을 얻으려 제국에 왔을 때였다.

반란군 토벌 작전을 나가기 전 알현실에 들렀다가 스치듯 본 게 다였지만.

그러니 어차피 경비대에 들른다 해도 면책 특권으로 유야무야 넘어갈 게 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기다 정황상 저 치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을 거고.’

지독하게 운이 나빴다.

하필 어제 황녀와 아이네의 대화를 듣게 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테고 경이랑 결혼을요?’

‘앗, 약혼하긴 했는데 결혼할 사이는 아니에요.’

자신도 모르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 않냐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 모른 척했을 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굳어있는 테고의 곁을 케이어드가 지나쳤다. 물론 테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동안 황도에서 못 보던 기사로군. 그리고 이쪽은…….”

“아.”

아무리 제 뒤에 꼭꼭 감춰둔다 해도 공녀가 고개를 들어버리면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테고는 제가 씌워둔 후드 틈으로 대공과 눈을 마주한 아이네를 무력하게 바라봐야만 했다.

“호오.”

역시…….

그의 예상과 한 치도 다름이 없었다.

“…….”

케이어드와 정면으로 마주한 아이네의 두 눈은 총천연색으로 한참이나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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