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파란(波瀾)의 사냥대회 (12/29)

남장여주라고 했잖아요! 3

11. 파란(波瀾)의 사냥대회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아이네는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역시 세세한 부분이 바뀌는 정도로는 원작의 큰 줄기가 틀어지지 않았어.’

생길 일은 반드시 생기고,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듯했다.

아마 아이네가 오늘 시장에 데리고 가지 않았더라도 둘은 근시일 내에 마주쳤을 테다.

황녀의 애정이 원작의 여주가 아니라 제게로 향한 건 조금 걱정스러웠다.

아니지, 생각해보면 황녀의 역할은 황태자와 테고가 자주 마주치게 하는 오작교 같은 거였으니까.

‘황녀가 날 자주 만나러 집무실로 오면 어쨌든 효과는 비슷한 거지.’

그나저나 황녀의 탄신연이 사냥대회 바로 다음이었다.

그 끔찍한 실사 인형을 줄 순 없으니 다른 선물을 알아봐야 할 텐데.

포근한 이불을 턱 바로 아래까지 바짝 끌어올리고 있던 아이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 없으면 내가 만들면 되는 건데. 사라!”

사라가 아이네의 침실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예, 아가씨. 잠자리가 불편하신가요?”

마침 그녀의 침실 밖 응접실을 정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저택에서 제일 솜씨 좋은 침방 하녀 좀 추천해줘!”

* * *

그렇게 불려온 안나에게 아이네는 방금 열심히 그린 종이를 건넸다.

“혹시 쉽게 닳지 않으면서 살에 닿는 촉감이 부드러운 옷감이 없을까?”

“새로운 드레스라도 만드시려고요?”

“으응, 아니. 그건 아닌데…….”

아이네가 그린 그림을 바라보는 사라와 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도대체 뭐지?

종이에서 눈을 뗀 안나가 골똘히 생각하다 무언가를 떠올렸다.

“예전에 제가 일하던 의상점에서 잘 늘어나면서도 부드러운 옷감을 본 적이 있어요.”

안나의 대답에 아이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안에 솜을 채워 넣어야 하니 잘 늘어난다면 금상첨화였다.

“좋아! 그럼 그거 구할 수 있을까?”

“하지만 드레스로 만들어 입기에는 좀 두껍고 무거울 텐데요.”

아이네가 검지를 세워 까딱까딱 흔들었다.

“아냐, 인형을 만들어 보려고.”

“인형 옷을요?”

여전히 그림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사라에게서 이를 건네받은 아이네가 의기양양하게 종이를 펼쳤다.

“잘 봐. 이게 뭐인 것 같아?”

“음, 경계 너머 산다는 최상급 마물인가요?”

순간, 아이네는 환장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곰이잖아. 곰!”

일전에 테고가 말했듯이 드물게 나타나는 최상급 마물들은 제법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많이 택하는 외양은 인간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귀여운 소동물이었다.

“하지만 곰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걸요. 이건…….”

“너무 귀여워서?”

“으음, 솔직히…….”

사라와 안나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멍청해 보여요.”

“너무 하찮게 생겼어요.”

설마 황녀도 멍청하게 생긴 최상급 마물 인형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 역시 오징어를 좋아하는 아주 평범하고 평균적인 이곳의 등장인물이니까.

아이네는 조금, 아주 조금 걱정이 됐다.

* * *

그 뒤로는 이렇다 할 일이 없이 시간이 흘러 어느덧 사냥대회 날의 아침이 밝았다.

“테고 경을 못 본 지가 벌써 사흘쯤 됐나.”

아이네는 매일 제2기사단으로 출근하여 집무실에서 간단한 서류 업무를 처리했다.

하지만 테고를 포함한 상당수의 인원이 사냥대회 준비를 위해 차출되어 테고를 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어쩐지 테고는 며칠 전부터 유달리 피곤해 보였다. 황도로 돌아오자마자 격무를 맡은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경비대 초소를 거친 순간 감쪽같이 행방이 지워진 한 남자 때문일 거다.

대공의 신분을 확인한 경비대장이 그의 기록 자체를 말소시켰을 테니까.

거기다 케이어드가 때려눕힌 놈들은 경비대도 골머리를 앓던 유명한 불량배들이었다.

그렇게 구렁이 담 넘듯 일이 처리됐을 테다. 원작대로라면.

하지만 그날 만난 남자가 면책 특권을 가진 대공인 걸 모르는 테고는…….

‘그 고지식한 성격 때문에 근무 외의 시간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겠지.’

아이네는 그 사람이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말해줄 수가 없었다.

왜냐고? 오늘이 그의 정체를 극적으로 알아채는 날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지금은 그녀가 절대 개입해서는 안 되는 구간이었다.

“아이네, 곧 대회가 시작되려나 봐. 오늘 해가 뜨거우니까 천막 밖으로는 나오지 마.”

천막 안에 앉아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져있는 아이네의 곁으로 나딘이 다가왔다.

“오빠도 참가하려고?”

“무려 8년 만에 열리는 사냥대회니까. 말을 탈 수 있는 귀족 자제라면 빠지고 싶어도 못 빠지지.”

하긴, 이번엔 황실에서 특히나 공을 들여 준비한 사냥대회였다.

그리고 아이네는 며칠 전까지 단검이라도 배워보겠다며 들떠 있던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어차피 난 말도 못 타는데, 뭘. 죽어라 걸어 다니다가 체력 떨어져서 쓰러졌을 거야.’

거기다가 테고와 케이어드가 만난다는 사실만 알지, 어디인지 위치까지는 모르기도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녀에게로 나딘이 손을 뻗었다.

“응? 뭐야, 왜.”

“손수건 줘야지.”

그가 당연하다는 듯 아이네의 손에 잡힌 손수건을 향해 눈짓했다.

“나한테서 오빠 손수건을 왜 찾아.”

“내가 전에 준 카탈로그 안 봤어? 그럼 그건 누구 건데.”

“당연히…….”

그리고 그때 베룸 공작가의 천막을 걷고 사흘 만에 보는 테고가 나타났다.

“제 겁니다.”

며칠 새 약간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턱선이 더욱 날카로워진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청초한 미모는 빛이라도 내뿜는 듯했다.

“아니, 테고 경. 나한테는 분명 아이네가 손수건을 준비한다고……!”

“그게 공자의 것이란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

아, 그렇게 된 전말이었구나. 어쩐지 건강염려증 중증병자인 나딘이 쉽게 참가 허락을 해주더라니.

아이네가 피식 웃으며 손가방을 열어 여분의 손수건을 꺼냈다.

“이거, 딱히 오빠 주려고 만든 건 아닌데. 망친 거라도 괜찮으면 줄까?”

“……어차피 망친 거나 안 망친 거나.”

툴툴거리는 나딘의 검집 고리에 손수건을 매어주자마자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높게 울려 퍼졌다.

“나 먼저 나갈게. 테고 경도 어서 나오십시오.”

그리고 천막 입구에 우두커니 서있는 테고에게로 아이네가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아주아주 중요한 날이죠?”

그가 내미는 검집에 예쁘게 손수건을 매는 아이네의 손가락에 테고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예, 그래서 마지막에 곰을 추가했으니까요.”

“네?”

마지막으로 매듭을 다듬던 아이네의 손가락이 삐끗 어긋났다.

“워낙에 생포하기 어려운 놈이라 며칠간 고생했습니다.”

“곰은 왜……?”

여전히 피곤한 기색의 테고가 결연한 얼굴로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속삭였다.

“곰 박제를 원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순간 아이네의 머릿속에 며칠 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정말로 이걸 돈 주고 살 겁니까? 이런 게 좋다면……. 차라리 제가 사냥대회 때 잡아서 박제해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테고는 천막 입구를 걷어 올리곤 자리를 떴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햇빛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잊고 있던 그의 성격이 떠올라 아이네는 입을 벌렸다.

‘그놈의 승부욕.’

그러니 원작 남주인 대공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거였지만 말이다.

“아니, 잠깐.”

다른 이들보다 늦게 출발하게 된 터라 테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에 올랐다.

아이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숲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고 보니, 사냥대회에서 테고가 뭘 잡아 왔더라?

대강의 전개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흐릿한 기억을 떠올려보려 그녀가 눈가를 가늘게 좁힌 참이었다.

“시그노.”

제법 따가웠던 햇볕이 가려지며 아이네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네?”

“‘남기다’라는 뜻의 고대어지.”

‘누군데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는 거야?’

역광에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을 더듬으면서 그녀는 고개를 한껏 쳐들었다.

테고만큼이나 키가 큰 남자였다.

“역시 넌 아이네가 아니군. 그럼 누구지?”

“무, 무슨 소리예요.”

아이네는 목이 콱 졸리는 듯한 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분주하게 여러 번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러자 그제야 그녀의 앞을 가리고 선 남자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케이어드, 대공…….”

“대공이라.”

며칠 전에 보았던 그대로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어두운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아이네를 내려다보았다.

“게다가 보통은 헤이안드로 대공이라고 할 텐데 말이야.”

“…….”

예, 예리한데?

‘그런데 왜 이 남자가 사냥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내 앞에 서 있는 거지?’

케이어드 대공을 만난 날 아이네가 본 ‘기억’ 역시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늘 그렇듯 원작 주요 인물들의 가장 중요한 장면들이었다.

케이어드의 경우는 맡은 배역이 원작 남주이기에 오랜만에 꽤 많은 장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사냥터인 숲속이었다. 베룸 공작가의 천막 앞이 아니라.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된 느낌이다.

아이네는 치맛자락을 들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베룸 공작가의 아이네이스라고 합니다.”

“저번에는 그저 날 못 알아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군.”

원작에서도 서술된 것처럼 케이어드의 싸늘한 시선이 그녀의 전신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저는,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통…….”

그는 한 손을 들어 아이네의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좋아, 앞으로 시간은 얼마든지 더 있으니까.”

“…….”

기이할 정도로 느릿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자리를 떠난 대공이 근처에 있던 제 말 위로 올랐다.

“이럇!”

그렇게 그가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아이네는 잔뜩 굳은 채 얼어붙었다.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윽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는 천막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그리고 그 모습을 가장 중앙에 설치된 높은 천막에 앉아 있던 황제가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 * *

아이네는 천막 안으로 돌아와 푹신한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고운 흰 손이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의 신분 덕에 감히 베룸 공작가의 천막을 젖히는 이는 없었다.

누군가 지금 아이네를 찾는다면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친구 없는 외톨이 공녀 신세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하지만 덕분에 제게 일어난 일을 천천히 곱씹어 볼 시간은 충분했다.

분명히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저번에는 그저 날 못 알아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군.’

아이네는 이 몸에 빙의한 후 지난 8년간 케이어드 대공의 그림자조차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럼 빙의하기 전에 만났던 적이 있나?’

단 한 번도 예상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빙의 전에 이미 주요 인물과 마주했을 거라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케이어드 대공, 아니, 그때는 대공자였겠구나.’

거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아이네는 혀를 깨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름과 직위를 연달아 불렀던 제 말에 그런 반응이었나 싶어서.

만약 어린 시절에 만났던 그를 기억하고 있다면 ‘케이어드 대공자’라고 불렀을 테다.

그리고 기억을 못 했다면 ‘헤이안드로 대공’이라고 불렀어야 했겠지.

“……망했어.”

하지만 아이네에게는 여타 빙의자들이 그랬듯 만능으로 쓸 수 있는 핑계가 있었다.

기억상실증!

심지어 그녀는 빙의되기 직전까지 죽을 만큼 앓던 병약한 공녀였으니까.

‘좋아, 나중에 또 뭐라고 하면 너무 독한 약을 많이 먹어서 기억이 드문드문하다고 하자.’

비록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좀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지만.

여태껏 그녀의 주위에는 어린 시절, 그러니까 빙의되기 이전의 기억을 잃은 걸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예? 이건 예전에 아가씨께서 꼭 달아놓으라고 하셔서……. 앗! 아니어요!’

‘그, 그래요! 아가씨! 신경 쓰지 마셔요.’

그들은 아이네가 상처받을 걸 우려해서 약속이나 한 듯 다들 입을 다물었다.

거기에 빙의 전, 원래의 공녀도 아픈 몸과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친구가 없었으니까.

그러니 연기만 잘 하면 기억상실로 이해시킬 수 있을 거다.

물론 대공을 마주치지 않으면 참 좋겠지만…….

‘원작 남주가 지옥의 주둥아리를 갖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테고도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었지만 순진한 여주인공답게 악의는 없었다.

그런 그와 대비되게 대공은 잘난 외모만큼이나 꽤 유들유들한 타입이었다.

‘보통 소설에서 이런 건 회피할수록 일이 꼬이더라고. 좋아, 정면돌파다.’

* * *

그 시각, 정면돌파를 마음먹은 건 비단 아이네뿐만이 아니었다.

대공이 말을 몰아 도착한 곳은 어중간한 소동물은 얼씬도 하지 않는 숲 가장 안쪽의 깊숙한 공간이었다.

사냥대회는 친목을 다지기 위한 목적인 만큼 구역을 지정했다.

그리고 참가자들의 수준을 고려해 그 구역별로 난도가 상이한 사냥감을 몰아두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중에서도 붉은 리본으로 표시해둔 구역을 넘는 자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렇게 테고와 케이어드는 원작에서 그랬듯 어렵지 않게 대면할 수 있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잡으려고 석궁까지……. 아버레스트로군.”

테고의 손에 들린 사냥용 무기로 케이어드가 시선을 주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석궁이 아니라 철로 보강한 강력한 크로스보우였다. 웬만한 근력이 아니면 두 손과 발을 다 이용해도 장전할 수 없는 물건.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그의 등장으로 있는 대로 끌어올렸던 집중력이 깨지자 테고의 입에서 뾰족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내가 알기로 우린 초면이지 않나? 아니지, 며칠 전에 보긴 했군.”

“……이곳은 가장 위험한 구역입니다. 오는 길에 붉은 리본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엄연히 따지면 공국인인 대공은 사냥대회의 손님이었다. 그저 참가에 의의를 두고 천막에서만 머물러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일이었다.

“봤지. 마치 이곳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것처럼 많이도 달아놨더군.”

“…….”

정곡을 찔려 아무 말도 못 하는 테고의 얼굴을 보며 케이어드가 빙글빙글 웃었다.

“그리고 들어오기 전에 아이네 공녀도 만났지.”

그 말에 줄곧 난처한 기색이던 테고의 기세가 날카롭게 돌변했다. 대공은 아직 자신도 단 한 번밖에 불러보지 못한 그녀의 애칭을 너무도 쉽게 입에 담았다.

“제 약혼자에게는 무슨 용건이십니까.”

“듣자 하니 폐하께서 공증까지 해주셨다던데. 정략이겠지?”

케이어드는 다른 이들처럼 그 약혼이 테고의 휴가 도중 피어난 로맨스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는 황제도, 아이네도 충분히 잘 알았다.

아니, 아이네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대공께 대답 드릴 의무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날을 세우는 테고의 반응에 자신이 오판했음을 인정했다. 거기다,

‘애초에 내가 알던 그 아이는 아니었지만.’

며칠 전, 그를 올려다보며 찬란한 눈동자를 내보였던 공녀는 역시 베룸의 발현자였다.

외모 역시 케이어드가 8년여 전에 만난 적 있는 그 아이의 모습으로.

지난 세월만큼 달라진 구석이 보였지만 금방 알아봤다.

그 증거로 제 오른쪽 귀에 달린 아티팩트가 뜨겁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다.

반짝이는 눈과 그에 반응하는 아티팩트. 모두 전에 겪은 것과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다시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케이어드의 한쪽 입매가 비뚤게 올라갔다. 그러고는 무심코 말을 꺼냈다가 손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아이네, 아니, 그 석궁 좀 내려놓지.”

“…….”

테고가 저도 모르게 쳐들었던 석궁을 천천히 내렸다.

“아무튼 공녀가 ‘진실의 눈’의 발현자란 사실을 알고 있……. 이미 알고 있군.”

물으려던 케이어드가 테고의 눈빛을 보고 서둘러 말을 고쳐 맺었다.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케이어드가 씩 웃었다.

베룸 공작과 공자도 아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케이어드가 확실하게 아는 건 황제와 황태자는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하긴, 지금의 폐하는 정상적으로 아티팩트를 승계한 게 아니긴 하지.”

거기에 반정 이전만 해도 황위 계승권에서 한참은 멀리 떨어진 막내 황자에 불과했다.

직계에서 직계로 이어진 전설 같은 이야기의 근처에도 오지 못했을 위치다.

다른 두 아티팩트와는 달리 황실에선 대대로 황제가 아닌 황태자가 이어받았다. 각 가문의 가주와 격이 맞는 건 황제가 아닌 황태자일 테니까.

결국 지금의 황제는 아티팩트를 한번도 착용해 본 적이 없는 셈이다.

‘지금까지는 그 아이가 말한 게 거의 다 맞았는데, 왜 최근 들어 달라진 거지?’

비쩍 마른 베룸 공녀가 미래랍시고 기억을 언급한 날 이후, 케이어드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놀라웠다.

하지만 불과 몇 개월 전부터 미래를 보았다던 ‘기억’과 모든 게 달라지고 있다.

그 변화의 첫 번째는 제 짝이 될 거라 장담했던 테고 리테루온 공작에게서부터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과는 달리 아무리 봐도 눈앞의 녀석에겐 한 터럭의 끌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왜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았지? 아셨다면 자네와 약혼하게 두지 않으셨을 테니까?”

테고 역시 장자이긴 했으나 부모님에게서 정식으로 아티팩트를 승계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뒷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케이어드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우리의 약점을 두고 보느니 그대로 흡수하겠다는 생각인가? 선조들 중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법인데.”

약점이라니, 흡수라니.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처음 듣는 말에 테고가 눈가를 설핏 찡그리려던 참이었다. 케이어드도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르릉-

“……기다리던 손님이 오셨군.”

이번에는 테고의 석궁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했다.

* * *

“굳이 집계할 것도 없겠군.”

황제의 말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테고가 잡아온 사냥감이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몰이꾼들이 열 명도 넘게 붙어 낑낑대며 실어올 정도였다.

‘마지막에 곰을 추가해야 한다고 그렇게 우기더니, 이래서였나. 쯧.’

황제의 시선이 천막 앞에 나와서 구경하는 인파들 사이를 훑었다. 그러고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린 채 굳은 베룸 공녀를 손쉽게 찾아냈다.

체구가 자그마한데도 수많은 사람 중 단연 눈에 띄는 존재감이었다.

“아니, 이렇게 큰 곰을 단 한 발로 잡았단 말이오?”

“제아무리 큰 놈이라도 이렇게 깔끔하게 눈을 관통당했는데 당해낼 리가 있겠나.”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릴 만큼 커다란 곰이었다. 그런데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휑했다. 그것만 빼면 어쩔 수 없는 관통상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온전한 모습.

“마치 잠들어 있는 듯한 모습이군요.”

주둥이에서 길게 삐져나온 혀와 없는 눈만 빼고는 동면에라도 든 것처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수군거리는 귀족들 사이에서 칼릭과 제2기사단 단원들은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단장님이 괴물처럼 힘이 센 건 알고 있었는데…….’

‘응, 이건 진짜 괴물이지.’

강력한 위력만큼이나 장전하는 데에 한참이나 걸리는 석궁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몇 분이나 걸려 재장전했을 리가 없으니 이건 단번에 성공했다고 할 수밖에.

“이번 사냥대회의 우승자인 리테루온 공작은 앞으로 나오라.”

마치 산책이라도 나갔다 온 것처럼 산뜻한 차림 그대로인 테고가 걸어나왔다.

그리고 모두는 그의 허리춤에서 보란 듯이 흔들리는 핑크색 손수건에 주목했다.

“허헛, 역시 청춘이군.”

“이게 몇 년 만에 보는 광경인지.”

무려 8년 만에 열린 사냥대회에서도 역시 낭만은 존재하는 모양이다.

과거의 사냥대회를 기억하는 나이 많은 귀족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이제 저 손수건을 건네준 레이디가 직접 승자에게 화관을 씌워줄 장면을 기다릴 뿐.

“테고 리테루온 공작.”

황제가 제 앞에 묵묵히 부복한 테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제 곁에 서 있는 황태자와 대공을 번갈아 보았다.

사슴과 멧돼지를 잔뜩 잡아 온 황태자는 그렇다 쳐도.

부리나케 숲으로 달려 들어간 주제에 대공은 토끼 한 마리 없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선이 끈질기게 베룸 공녀에게 향해 있었다.

다만 아르비드나 테고가 그녀에게 보이는 호감과는 결이 다른 눈빛.

저 연약하고 작은 공녀에게 도대체 뭐가 있길래. 아까 천막 앞에서는 무슨 대화를 나눈 거고.

턱 끝을 가만히 쓸던 황제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황제는 이 세계관에서 공식적인 선동과 날조의 달인이었다.

“그 손수건은 약혼자인 베룸 공녀가 준 것이겠지? 공녀도 이리 오라.”

곰을 보고 여전히 혼비백산한 아이네가 비척비척 걸어 앞까지 다가왔다.

황제는 곁에 서 있던 시종장에게서 준비된 화관을 받아들어 그녀에게 건네며 씩 웃었다.

“그럼, 제국의 전통대로 승자에게 화관과 키스를 건넬 시간이군.”

그 말에 테고와 아이네, 아르비드는 물론이고 케이어드까지 고개가 번쩍 들려 올라갔다.

물론, 나딘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안 됩니다!”

갑작스럽게 생긴 새로운 전통에 가장 먼저 반발한 건 나딘이었다.

“……누가 들으면 베룸 공자더러 하라고 한 줄 알겠군.”

죽은 곰이 되살아난 듯한 나딘의 포효에 황제가 먹먹해진 귀를 문질렀다.

“우리 아이네는, 아직 어려서……. 차라리 제가!”

쓸데없이 결연해진 나딘의 눈빛과 기개에 테고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저런 팔불출까지 제 아비와 판박이군. 열아홉이 뭐가 어리단 말이야.”

황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어두운 얼굴로 곁에 서 있던 아르비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 공녀 역시 갑작스러울 터이니 이번엔 화관 정도로 넘어가시고…….”

“하여간, 요즘 것들은 우리 때보다 더 꽉 막혔어. 누가 입에 하랬나. 손등 위 키스 정도야 흔한 게 아닌가. 아니 그런가, 공녀?”

아니요, 방금 그 뉘앙스는 누가 들어도 최소 볼 키스였는데요.

그제야 실물 곰과의 대면에 넋이 나가 있던 아이네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가 여기서 빼면 진짜 재미없는 사람 되겠는데?’

아버지뻘 중년 귀족들의 김빠진 표정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제 또래 영애들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한때는 테고와 너무 친하게 지내면 미움받을까 걱정한 적도 있었는데.

그러긴커녕 다들 가슴팍에 두 손을 모아 그러쥔 모습이었다. 그뿐일까. 그녀들의 눈빛이 아주 강렬했다.

앞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바람직한 전통의 탄생을 고대하는 눈치였다.

‘제국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래도 전통으로 만들어야 할 분위기잖아, 이거.’

직접 사냥대회를 겪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이네는 수많은 로판 소설에서 승자의 키스를 간접 체험해왔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승자의 키스라는 이벤트가 그다지 생소하지 않았다.

황제가 말한 손등 키스가 아니라 볼 키스까지도 충분히 수용 가능했다.

‘테고가 진짜 남자도 아니고. 이 정도는 인사지.’

실제로 데뷔탕트 때 거의 스치는 수준이긴 해도 이미 손등 키스는 해봤잖아?

그녀가 단상 앞 잔디밭에 발을 내딛어 가까이 다가왔다. 그 한 걸음마다 테고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따가운 햇볕 아래서 제 몸집보다 배는 큰 곰을 사냥할 때도 변하지 않았던 안색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실시간으로 핼쑥해져 갔다.

“아니, 아이네! 진짜로 하려고?”

제 동생의 거침없는 발걸음에 나딘은 적잖이 당황했다.

나딘은 아이네가 테고를 그저 친구로만 여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함께 지내본 그는 좀 무뚝뚝해도 막돼먹은 인사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여태껏 테고가 아이네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걸 알면서도 필요 이상으로는 간섭하지 않았다.

‘아버지 말씀대로 폐하께서 귀족파를 솎아내고 나면 자연스럽게 정리될 약혼인데.’

거기에 덧붙여 유사시에 그의 곁보다 안전한 곳은 없을 거라는 말까지 들은 참이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테고와의 약혼을 굳이 더 반대하지 않은 이유는 또 있었다.

리테루온 공작은 그들 남매가 황도에 머물 동안 훌륭한 방패막이기도 했다.

‘우린 어차피 베룸으로 돌아갈 테니까.’

잘난 외모에, 젊고 미혼인 공작.

이제 성년이 된 아이네에게 부나방처럼 몰려들 어설픈 쭉정이들을 막아주기에 적격이었다.

제국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그에게 견줄 만한 남자라고는 기껏해야 황태자나 대공 정도뿐이다.

전형적인 베룸인인 나딘은 당연하게도 영지 바깥에서 오래 머물 거라 여기지 않았다.

왕국이던 시절은 물론이고, 다시 제국에 편입되고 나서도 베룸의 직계는 영지 바깥의 세력과 혼인한 사례가 없었다.

‘아버지가 특히 폐하께 말려들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이라도 맞춘다면 후에 아이네의 이름이 오르내릴 수 있었다.

그저 조건에 맞춰 약혼을 유지하다 파혼하는 것과는 상황이 달라진다.

“자, 잠깐만요. 폐하. 어차피 이 약혼은…….”

다급한 나딘의 말을 황제가 냉소적으로 잘라냈다.

“왜 그러지? 그렇게 공녀의 키스를 받고 싶으면 공자가 곰을 잡아 오지 그랬나.”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남매간에 건드려선 안 되는 부분을 정확하게 눌러 터뜨렸다.

“엑? 아니, 그건 아니지요. 폐하,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나딘이 극도로 질겁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모든 장면을 목도한 아이네는 당연히 울컥했다.

‘그렇게 치면 난 오빠랑 같은 공기 마시고 있는 모든 순간이 기분 나쁘거든?’

테고에게 향하던 걸음을 나딘에게로 홱 돌린 그녀가 톡 쏘아붙였다.

“그러게. 곰이 오빠를 잡아서 나한테 키스를 받는 게 더 빠르겠지.”

“너, 조용히 안 해? 사람들도 많은데……!”

쌍둥이처럼 닮은 공작가 남매가 서로 잡아먹을 듯 조용히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영애들이 속닥였다.

“역시 베룸인들은 동기간에도 사이가 좋군요.”

애초에 소소한 다툼조차 기본적인 애정과 동등한 관계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귀족 사회 바깥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이들에게는 조금 생경한 일이었다.

제국의 영애들은 제아무리 귀한 신분이라 해도 작위를 잇거나 공직에 나갈 수 없었다. 그러니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남매관계를 맺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집안의 영애들을 기껏해야 비싸게 거래하는 용도 이상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도 더러 있었다.

보수적인 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동부 쪽으로 갈수록 더욱더 그런 경향이 짙었다.

물론 드물게 제 누이를 아끼는 후계자가 있긴 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우위에 선 자가 베푸는 시혜의 성격이 은연중에 묻어났다.

“저는 실은…… 부러워요.”

“그래서 베룸인들이 영지를 떠나지 않나 봐요.”

“어머나, 오징어 때문이 아니고요?”

영애들 사이에 자그맣게 웃음이 번졌다.

“이번에 입으신 드레스는 어디서 맞추셨을까요. 오늘도 자그마한 요정님 같네요.”

“그렇죠? 아이작 백작 부인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여요.”

아이네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소곤거리는 영애들도 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조금은 이상했다.

비록 달리아가 이번 사냥대회에 참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여태 사교계의 정점에 있던 인사였다. 그런데 그녀들은 마치 달리아의 부재가 그다지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굴었다.

아직 아이네와 제대로 인사를 주고받은 영애가 없어 먼저 초대장을 보낼 수가 없었다. 신분이 낮은 쪽이 먼저 교류를 청하는 건 예법에 어긋났으니까.

결국, 공직에 나갈 기회가 없는데다 멀찍이서 공녀를 본 게 다인 영애들 사이에서는 아이네의 미모와 드레스 정도가 화제였다.

영애들이 작게 웃는 소리와 눈빛이 아이네의 뒤통수를 콕콕 찌르는 듯 와 닿았다.

‘아차! 여기 영애들도 엄청 있었지?’

먼저 다가갈 용기는 없었지만 모처럼 영애들 앞에 섰으니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오빠 놈 때문에 이게 뭐야!

그렇게 그녀는 잔뜩 약이 오른 상태였다.

그런 아이네를 자극하는 마지막 도발 버튼을 누른 건 원작 남주인 케이어드였다.

“폐하, 공녀도 그렇지만 리테루온 공작 역시 곤란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케이어드가 짙은 보랏빛 눈동자를 굴려 테고를 눈짓했다.

그도 그럴 게 테고의 자세가 상당히 어정쩡했다.

화관을 든 아이네의 손이 가까이 다가온다 싶어 한껏 허리를 굽혔었다.

그러다가 나딘이 중간에 끼어들어 말을 보태는 바람에 엉거주춤하게 다시 몸을 일으키던 와중이었다.

“…….”

잔뜩 굳어 커다란 덩치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우스울 만도 했다.

그러나 수려한 외모를 가진 그가 멋쩍은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올리자 오히려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솔직히 테고는 이제 곰이든 화관이든 키스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

그럼, 그렇지. 뭘 기대한 걸까.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긴장과 섞인 기대감이 핏줄을 타고 쿵덕거리며 온몸을 흐르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아이네가 또다시 테고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저 말없이 고개만 깊게 숙였다.

곧 제 머리 위에는 그 빌어먹을 화관이 얹힐 테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게 끝이겠지.

“테고 경, 저 믿죠?”

“예?”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믿어? 누굴? 뭘?

그래서 아이네가 제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것도, 그녀의 작달막한 손이 제 턱에 닿았다는 사실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새하얀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발현자로서의 눈이 아니더라도 남다른 생기를 머금고 반짝이는 청명한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검집에 매달린 핑크빛 손수건처럼 보들보들한 작은 입술까지.

그제야 테고는 뒤늦게나마 제게 벌어지려는 일을 눈치챘다. 서둘러 뒷목에 힘을 주고 버텨 벗어나려 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자, 잠깐. 공녀! 읏.”

“잉?”

방금…… 닿았나? 아니, 그냥 스친 거 같기도 한데.

볼에 입 맞추는 척만 하려던 그녀의 시도가 테고의 저항으로 살짝 어긋났다. 그뿐이었다.

그 뒤로는 테고가 바로 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뭔가를 더 시도할 수도 없었다.

“…….”

둘을 주시하고 있던 장내에 한없이 어색한 침묵만이 깔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 화관. 화관도 이렇게 씌우면…… 이제 된 거죠?”

아이네는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이젠 완전히 얼굴을 숨긴 그의 머리 위로 화관을 살포시 얹어 주었다.

‘흑흑, 차라리 저 곰이 되어서 저기에 눕고 싶다.’

아이네는 민망함에 눈물이라도 찔끔 나올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상황이 종료되고 넘어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다들 레이디인 아이네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기대했을 터.

키스를 받아야 할 테고 쪽에서 이런 반응일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공작께서 마, 많이 부끄러우신가 봅니다. 허허.”

“어머나, 호……호호.”

사람들의 속닥거림에 테고의 고개가 더욱더 바닥으로 깊게 처박혔다.

“…….”

아까까지만 해도 조용히 황명에 따르는 듯했던 그는 고집스레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러자 결국 고요함만이 주위에 내려앉았다.

그래도 그가 거부한 모양새라기보다는 부끄러움에 피한 기색이라 아주 파국으로 치닫진 않았다.

하지만 방금까지 로맨틱한 기대로 가득 찼던 분위기는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내가 미처 리테루온 공의 의견을 묻지 않았군.”

황제는 떨떠름하게 얼굴을 굳혔다.

베룸 공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기에 굳이 묻질 않았더니.

‘반란군은 쥐 잡듯이 잡던 놈이 이런 쪽으로는 숫기가 없을 줄이야.’

속으로는 분위기도 못 맞추는 한심한 놈이라며 끌끌 혀를 찼다. 하지만 무려 8년 만에 열린 사냥대회였다.

황제인 그는 어떻게든 이 행사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래서 곰과 테고 앞을 지나 멧돼지와 사슴이 쌓인 곳으로 향했다.

“자, 그럼 다음 순위는 누구지. 황태자인가? 호오, 뿔이 상하지 않게 용케도 잘 잡았군.”

“그렇군요! 과연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세상에, 저 뿔 좀 보세요!”

어색해진 상황에서 모두가 기다려 마지않은 화제 전환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잠시 수사슴의 웅장한 뿔로 쏠린 사이, 테고의 한쪽 무릎이 풀썩 꺾였다.

닿았다, 분명히. 입가에 살짝이지만.

그리고 잡아 온 사냥감이 없어 어딘지 소외되어 있던 케이어드는 질색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까 그 큰 곰을 때려잡을 때는 감정도 못 느끼는 놈처럼 굴더니.’

공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렇게 사색이 되었다. 기껏해야 스치는 것이 다였을 텐데.

뒤이어 걱정스레 다가간 아이네가 테고의 어깨를 조심스레 톡 건드리는 게 케이어드의 시야에 들어왔다.

누가 보아도 자신과 리테루온 공작보다는 저 둘을 엮는 게 일반적일 텐데.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

테고의 나머지 한쪽 무릎마저 힘없이 꺾이는 걸 보고 케이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테고는 날 때부터 남자치고는 유난히 흰 피부를 갖고 있었다. 햇빛을 보아도 잠시 발갛게 달아오를 뿐, 타지 않는 피부는 늘 그의 은근한 콤플렉스였다.

안 그래도 곱상한 외모에 흰 피부는 남자답지 않다는 세간의 인식 때문에.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제 얼굴이 사냥의 여파로 약간 붉어져 있던 게 더없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저기, 테고? 다 끝났어요. 승자의 키스니 뭐니 하는 건 폐하께서 그냥 하신 말인 거 같아요.”

아이네는 여전히 일어나질 못하고 굳은 그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이 정도면, 충격이 어지간히 컸나 본데?

이대로 계속 쌍둥이 오빠인 척 살아가다 보면 원치 않게 여자와 접촉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 걸까.

지금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는 타이밍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그녀가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테고의 귀에 속삭였다.

“걱정 말아요. 이런 건 원래 노카운트예요.”

애초에 거의 닿지도 않은 것 같고.

그러자 여태 반응이 없던 그의 고개가 들렸다. 무릎을 꿇고 허벅지만 세운 채로도 테고의 눈높이는 아이네와 엇비슷했다.

“노카운트라니……. 분명히 닿았습니다.”

“그, 그래요? 그래도 아무도 못 봤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반항심 어린 그의 눈동자와 마주하자 이번에는 아이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테고는 여전히 입을 가린 손을 완전히 떼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이는 눈가가 자못 붉었다.

‘그렇게 억울했나. 같은 여자끼리 입가에 스치기만 한 건데.’

갑자기 순진한 여주의 입술을 훔친 악역 조연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네의 입에서 불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게 가만히 있었으면 됐잖아요. 볼에 하는 척만 하려고 했는데.”

“그럼, 공녀는…… 아무렇지도 않았단 말입니까?”

평소보다 배는 짙어진 심해 같은 눈동자가 의중을 살피려는 듯 집요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아니, 이런 건 첫 키스도 뭣도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친구끼리 그런 게 어딨어요.”

“…….”

아이네가 ‘친구’ 공격을 시전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그 말에 여전히 미미한 홍조를 띠고 있던 테고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그리고 근처의 나무 뒤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칼릭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단장님, 아니, 주군.”

* * *

황도의 귀족 사이에서 은밀한 소문이 도는 건 한순간이었다.

반란군 토벌의 일등공신인 테고 리테루온 공작이 희대의 순정남이라는 소문.

이제 갓 성년이 된 공녀를 지나치게 아껴 손도 대지 못하고 애지중지한다고 말이다.

아이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은 내가 테고 경이 싫어하는 약혼을 억지로 밀어붙였다고 소문나는 게 정상 아니야?”

상당한 근거가 있는 추론이었다.

실제 원작에서도 달리아의 스킨십을 테고가 정중하게 거절했을 땐 그런 소문이 났었으니까.

게다가 달리아 영애는 아이네보다도 한 살 어린 미성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가씨를 보고도 그런 망발을 할 작자가 어디 있겠어요!”

“맞아요, 저도 리테루온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무척 아끼신다고 생각해요! 목숨 걸고 저택만 한 곰까지 잡아 오셨잖아요.”

저택만 하다니…….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냐?

곰인형의 얼굴 도안을 다시 그리고 있던 아이네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그때, 사라가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솔직히 처음 뵀을 때는 눈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앗, 저 그거 뭔지 알아요! 그게 다 여자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안나가 꺅꺅거리며 맞장구쳤다.

‘안나도 로맨스 소설에 푹 빠져 산다고 했나.’

저녁나절마다 아이네의 응접실에서 봉제 인형의 본을 뜨며 둘은 꽤 친해진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네가 이마를 짚었다.

으응, 눈치 없다는 거 빼고 전부 틀렸어. 지적해야 할 부분이 한둘이 아닌 거 같은데.

‘하아, 착각이 이렇게 무섭다니까.’

아무래도 나딘이 자신더러 아직 어리니 어쩌니 하던 말과 섞여 와전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마 곰 잡을 때 목숨도 안 걸었을걸?

테고가 승자의 키스 어쩌고 할 때부터 급격하게 식은땀을 흘려서 그렇지. 그 전까지는 얼마나 멀쩡했다고.

“그런데, 아가씨. 정말 이걸 선물로 주실 건가요?”

“왜?”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아직 어린 분께 선물로 인형을 드리는 건 좀…….”

그건 이쪽 세계에서 인형이라고는 괴상한 실사 버전만 만드니까 그런 거지!

아이네는 아직 어리고 외로움 많이 타는 황녀에게 애착 인형이라는 걸 꼭 선물해주고 싶었다.

의도치 않게 테고에게 가야 할 애정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이 이상 그녀의 직접적인 개입을 늘렸다가 전개가 어그러질까 걱정이 됐다. 당장 케이어드 대공의 일만 해도, 결심대로 정면돌파 하기는커녕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아이네는 결국 다시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아가씨! 그분이 오셨어요!”

밤이 깊어지기 시작하자 사라가 안나를 내보내고 온 참이었다.

“누가?”

막 침실로 향하려던 아이네에게 사라가 숄을 걸쳐주며 호들갑을 떨었다.

“리테루온 공작님이요!”

근래 사냥대회 마무리 문제로 집무실에도 못 들르고 한창 바빠 보이더니. 이 시간에 무슨 일이람. 그건 그렇고,

“……사라는 예전에 영지에 있을 땐, 테고 경 별로라고 하지 않았어?”

이제 꽤 더워지는 날씨인데도 사라는 아가씨의 숄을 꼼꼼하게 여몄다.

“그건, 무례한 황도 기사님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예요. 그런데 이젠 우리 아가씨의 약혼자이시기도 하고……. 아앗, 안 돼요! 답답해도 참으세요.”

사라가 목 부근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는 아이네의 손을 떼어냈다.

“으응?”

“아가씨의 첫 친구가 되신 분 아닌가요? 자아, 다 됐어요. 덥다고 단추 푸시면 안 돼요.”

“…….”

느슨하게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빗은 사라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나딘 도련님께서 아래층 응접실에서 함께 기다리고 계셔요.”

“있지, 사라.”

테고가 귀족인 첫 친구는 맞지만 사실 진정한 의미의 첫 번째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건 사라였다.

“네?”

“아, 아냐. 고마워.”

그러나 아이네는 그런 말을 굳이 입에 담진 않았다.

이방인인 자신이 이곳의 근본적인 신분체계까지 흔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건 자신이 열한 살의 아이네의 몸에 빙의한 후, 정한 원칙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베룸 영지는 신분을 엄격하게 따지는 권위의식이 약한 편이었다. 그래서 무리 없이 금방 적응할 수 있었기도 했고.

이건 모두 그저 병석을 털고 일어난 것만으로 베룸 공작가의 모두가 보인 호의 덕분이었다.

“저야말로 늘 아가씨께 감사드려요.”

사라 역시 빙긋 웃으며 굳이 덧붙이지 않았던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요즈음 들어 리테루온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보는 눈빛이 변한 걸 제가 모를 리가요.’

그녀의 눈엔 언제나 비쩍 마른 몸으로 가쁜 숨을 색색 몰아쉬던 어린 아가씨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래서 아가씨가 세상으로 나오겠단 마음을 먹은 게 기뻤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황실 기사라며 나타난 테고 덕분이라는 건 알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아가씨는 뭔가 변하셨어.’

가족도 모르는 아이네의 모습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시중을 드는 사라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일전에 말씀하신 좋은 역할이라는 게 황실 기사를 지칭하는 것이었을 테다.

게다가 황도로 와보니 그는 지체 높으신 공작님이었더랬다.

약혼 소식을 들었을 때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가 아이네를 아낀다는 소문이 뒤를 이었다. 테고에 대한 호감이 금세 자라기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 *

요즘 들어 나딘은 물론이고 저택의 사용인들이 테고에게 친절해진 듯했다.

아무래도 사냥대회 소문에 다들 너무 과몰입하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여주인공 특유의 사교성……일 리는 없지.’

애석하게도 원작에서부터 그에게는 보통의 여주들이 가진 사교성이 부족했다.

실제로 만나보니 부족하다는 말조차 과장일 정도로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아이네가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것도 잊고 멈춰 섰다.

‘아니, 그럼 도대체 원작 남주랑 썸은 어떻게 타려고?’

얼마 전에 본 케이어드 대공도 한 까칠 하던데. 그러고 보니 둘이 그날 뭔가 진전이 있긴 있었으려나.

“들어오십시오.”

그때, 테고가 벌컥 문을 열었다.

아이네의 고개가 절로 한참이나 올라갈 정도의 큰 키. 그녀의 시야에서는 겨우 턱밑이나 보이는 게 다였다.

“와, 저번에도 그렇고 어떻게 알았어요?”

“……발소리가 다릅니다.”

테고는 꼼꼼하게 숄을 여민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와 다르게 드디어 자각이라도 생긴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금세 그는 다시 피곤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문을 열어두곤 먼저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황도의 저택에도 자주 와서인지 제집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것도 그가 늘 앉던 자리에.

‘여기가 대체 누구 집이야.’

응접실에는 테고 뿐이었다. 거기다 무언가 심각한 일이 있는지 소파에 앉은 널따란 등이 잔뜩 굳어 보였다.

“그런데 오빠는 어디 갔어요?”

“그때 본 보좌관이 울면서 매달려서 잠시 올라갔습니다.”

“아, 로버트가 왔어요?”

아이네의 입에서 나온 친근한 호칭에 테고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공작성에서도 둘이 퍽 가까워 보였었지. 그자와는 어떤 사이이기에.

‘……또 이러는군.’

테고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요 며칠간 제대로 자지 못해 날카로워진 감각을 억누르기엔 그나마 이 방법이 효과적이었다.

“잘 지냈어요?”

그때 약간 앞으로 숙여진 그의 고개 앞으로 아이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테고는 자신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짚던 손가락을 천천히 떼어냈다.

내내 습관처럼 굳어있던 미간이 흔적도 없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는 인정해야 했다.

“……예.”

제 감각을 느슨하게 만드는 데에 탁월한 존재가 앞에 있었다. 그것도 맥이 풀릴 만큼 이토록 손쉽게.

“있죠, 그때 본 헤이안드로 대공 말이에요. 어땠어요?”

아이네가 눈을 빛내며 다짜고짜 물었다. 그러자 테고의 목소리가 다시 한없이 낮아졌다.

“……불쾌했습니다.”

아니, 다시 예민하게 날을 세우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날 보았던 케이어드를 떠올리자 그의 심장 언저리가 다시금 싸늘하게 식었다.

생각 같아서는 아이네를 다그치고 싶었다.

‘당신의 애칭을 익숙하게 부르더군. 마치 원래부터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하지만……. 자신이 왜?

그저 친구라는 이유로 설명하기엔 한계에 부딪힌 지 오래라는 사실을 그도 잘 알았다.

한편, 아이네는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으며 두 눈을 반짝였다.

이게 그 유명한 입덕부정기인가 뭔가 하는 그거 맞지?

잔뜩 찌푸린 미간과 고뇌하는 표정까지 원작에서 묘사된 그대로였다.

아무리 원작의 방향에 맞는다고 해도 너무 빠른 전개를 밀어붙이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래도 약간의 도움을 주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감정을 자각하게 만드는 자극까지 꼭 원작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을 테니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아이네의 목소리가 비밀스레 낮아졌다.

“테고는 제 친구니까 특별히 말해주는 건데요.”

“…….”

친구라는 단어가 등장한 순간, 테고는 또다시 약간 흥미를 잃었다.

“생소한 감정이라고 해서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에요.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서 또 완전히 같은 감정은 아니고요.”

“하……. 이번엔 또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다시 미간을 누르기 시작한 그에게 아이네가 가까이 다가왔다.

“예를 들면,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이성을 향한 호감일 수도 있는 거죠.”

“…….”

“알려줄까요?”

그건 아주 간단하고, 전통적인 클리셰 중 하나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왜 클리셰였는지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 * *

테고가 등받이 쪽으로 몸을 물리곤 가만히 팔짱을 끼었다. 과연 공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겠다는 태도였다.

“공녀는 어떻게 매번 나도 모르는 내 감정을 안다는 겁니까.”

“우, 우린 친구잖아요.”

또, 또 저 친구라는 소리.

테고는 이젠 명치 부근에서 억울한 감정이 한데 뭉쳐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느끼기에도 꽤 냉소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습니까? 그럼 이성에 대한 호감과 친구로서의 감정은 뭐가 그렇게 다릅니까.”

입에서 나온 건 질문의 형태였다. 하지만 이미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답을 알아채 가고 있었다.

“내게 알려준다는 건 공녀는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까?”

“당연히 알죠. 내 나이가 몇인데.”

그녀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와 표정에 테고의 기분이 수직으로 곤두박질쳤다.

‘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로 이렇게 저를 쥐락펴락했던 존재가 있었나.

뒷목이 뻐근해질 만큼 열이 올랐다.

공녀에게 이성에 대한 호감을 알게 한 상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그래서 테고는 턱에 단단히 힘을 주고 짓씹듯 내뱉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일단 눈을 감아봐요. 다 끝날 때까지 절대, 뜨지 말고.”

그 말에 테고가 미심쩍은 표정을 내보였다. 아이네는 억울했다.

“이거 진짜 꿀팁, 아니, 만고불변의 진리라니까요?”

여전히 의심스러운 기색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제가 그녀에게 약하다는 걸 재확인할 뿐이었다.

“눈 감아봐요, 얼른!”

테고가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았다.

이전에도 본 적 있는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천천히 내리깔렸다. 긴장했는지 눈두덩이가 간헐적으로 움찔거렸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눈을 감은 그를 보고 아이네는 속으로 웃었다.

‘어휴, 아닌 척해도 진짜 순진하잖아.’

자신이 그를 남자로 알고 있는 보통의 영애면 어쩌려고.

웃음기를 미처 지우지 못한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자, 이제 내가 어떤 행동을 할 건데. 그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잘 기억해둬요.”

“…….”

바보 같게도 테고의 가슴은 또다시 기대로 들뜨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무언가를 상상하지 않을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 애를 썼다. 대신 온몸에 힘이 들어가 뻣뻣해졌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두 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하지만 테고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네도 눈치채지 못했다.

‘윽.’

누군가 제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귀에다 처박아둔 것 같았다. 이제 그는 숨 쉬는 법조차 잊었다.

한계까지 예민해진 기감이 속삭였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그리고 숨결이 제 얼굴을 간지럽히는 감각이 너무…….

‘젠장, 제길.’

이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싶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침이 꼴깍 넘어가는 것마저도 의식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테고가 할 수 있는 모든 인내를 끌어 모아 간신히 인내해낸 순간,

“……!”

말랑한 촉감이 입술에 닿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졌다.

깜짝 놀라 눈을 뜬 그의 얼굴 바로 앞에 보인 건 아이네의 눈동자였다. 그걸 인지하자마자 내내 억눌러왔던 열기가 볼 위로 훅 끼쳐 올라왔다.

“뭐, 뭐 하는…….”

테고는 제 뺨과 입을 감싸고 몸을 돌렸다. 그 과정에서 촉망받는 기사로서의 반사신경은 또다시 열심히 일을 했다.

남은 손으로는 미친 듯이 뛰는 가슴 위를 꾹 눌렀다. 불시에 당한 공격에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어땠어요?”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아이네는 천진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자각이 없어도 어떻게, 입술을…….”

타박하는 듯한 테고의 목소리에 아이네가 손사래를 쳤다.

“엥? 아, 저는 입술 댄 거 아니에요. 이거 손가락, 손가락이에요.”

그러고는 그녀가 다급하게 검지를 들어 제 입술에 가져다대는 시늉을 했다.

“아.”

아까까지만 해도 갈빗대를 부수고 튀어 오를 것 같던 심장이었다. 그랬는데, 아니란 걸 안 순간 드는 이 느낌을 무어라 해야 할지.

“그래도 아까는 입 맞추는 것 같지 않았어요? 기분이 어땠어요?”

“…….”

기분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처음에는 말캉한 감촉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부드러운 게 좀 좋은 거 같기도 했다.

‘아니, 그런 단순한 촉감 따위가 아니라.’

습관처럼 테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기대감이 허물어진 자리를 채운 실망감? 아니, 그보다는 좀 더…….

부족한 말주변으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손으로 얼굴만 가린 채 굳은 그에게 아이네가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정상이에요.”

“무슨?”

“이성으로 좋아하면 입을 맞춘다고 생각해도 거부감이 안 들거든요. 그런데 만약 친구로서의 호감이라면! 으…….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죠?”

‘방금 그 굳은 표정만 봐도 엄청 질색했다는 건 알겠다.’

아이네는 어깨를 으쓱이며 질색하는 표정을 꾸며냈다. 그런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는 테고의 입가에서 천천히 손이 내려갔다.

거부감이라니.

그런 건 단 한 번도 아이네 앞에서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오히려 테고가 느꼈던 건,

설렘을 배반당한 일종의 분노와 허탈함이 엉망으로 뒤죽박죽된 그런 종류에 가까웠다.

자신의 저택이라고는 해도 밀폐된 응접실에 남자와 단둘이었다. 심지어 그가 굳이 손을 뻗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까웠다.

의도한 건 아니었어도 이미 그녀를 여러 번 품에 안아본 적 있는 감각이 여전히 생생했다.

게다가 저와 아이네는 이미 약혼한 사이가 아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테고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어둡게 가라앉았다.

늘 자신도 잘 모르는 제 일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듯 구는 그녀였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도 자신만만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저 입을 맞추는 것 이상의 상상이 가능하면?’

테고의 한쪽 입가가 삐딱하게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일그러졌다.

그는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대공인 케이어드가 그녀에게 친근한 척 굴었을 때 들었던 불쾌한 기분이 뭐였는지.

아르비드가 하염없이 공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때 어째서 제 몸으로 시야를 차단했는지.

그리고 아이네의 입에서 친구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왜 그리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는지.

언제든 파기할 수 있는 약혼이라는 사실에 불안했던 이유까지.

그건 모두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절대 지금처럼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렇군요. 확실히…… 알았습니다.”

아이네의 바람대로 테고는 친구와 이성에게 느끼는 호감을 구별하는 법을 완벽하게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그녀가 원작을 안다는 이점만으로 우위에 서서 테고를 쥐고 흔들어왔다.

이제는 그 일방적인 판의 흐름이 서서히 흔들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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