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예정된 위기, 그리고 의심 (13/29)

12. 예정된 위기, 그리고 의심

테고의 눈이 이전과는 달리 진득하게 아이네를 시야에 담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그토록 감정이 널뛰던 것도 이 결론 하나면 다 설명이 되었다.

‘그래서…….’

어떠한 사실을 온전하게 받아들인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자각하기 전 그를 흔들어대던 마음속 혼란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건 여태 제게 있는 줄도 몰랐던 새로운 감각이었다.

발현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궁금증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저도 몰랐던 감정과 제대로 마주하고 그 껍질을 벗겨내니 다른 것이 들어있었다.

자신은 아이네를 여자로 보고 마음에 품었었나 보다. 그것도 자각하기 꽤 오래전부터.

구체적으로 언제부터인지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이미 소유욕과 한데 엉킨 정욕이 뒤섞여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지럽게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왜 지금껏 깨닫지 못했을까 의아할 정도로 분명하고 명확한 감정이다.

‘라니엘과 어느 정도 겹쳐보고 있던 건 어쩌면 나였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다고 차마 단언할 수 없었다.

테고는 여전히 요란하게 쿵쿵거리는 심장박동을 무시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온 신경이 쏟아져 부딪히는 느낌에 집중했다.

이 마음이 그런 신체적 반응과도 충분히 분리된다는 것쯤은 금방 알았다. 단순히 여태 영애들을 가까이 겪어보지 못해서 착각하는 게 아니었다.

새롭게 깨닫게 된 이 감정을 따라 이름 모를 충동이 불쑥 솟았다. 그렇다고 아직 그걸 무작정 풀어놓을 만큼 자제력을 잃진 않았다.

아직 그를 바라보는 아이네의 눈빛이 너무 맑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그녀가 다가오면 물러서진 않을 거란 사실이다.

며칠 동안 쉬지 못하고 장거리를 오간 탓일까.

피곤에 젖은 테고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내리 감겼다 뜨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이며 따라 움직였다.

“아.”

그 모습에 아이네는 입을 작게 벌리고 탄성을 내뱉었다. 꽤 가까이 붙어서인지 그녀의 숨이 테고의 볼을 간지럽혔다.

“…….”

그리고 테고는 조금 전의 마음가짐과는 달리 너무도 쉽게 자제력의 끈을 잠시 놓고 말았다.

아주 잠깐 자제력이 느슨해진 사이, 몸집을 불린 충동이 잠시 잘못된 방향으로 튀었다.

‘하지만…… 피차 공녀도 나도 이미 성인이 아닌가.’

시작은 정치적 이해관계였어도 아니게 만들면 되는 것.

제 감정까지 자각한 테고에게 이제 망설임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겁도 없이 제 허벅지 위로 손바닥을 올린 아이네에게로 천천히 상체를 붙였다.

동시에 그녀를 품 안에 가두기라도 할 듯 다리를 서서히 벌렸다. 아이네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작고 말랑한 온기에 반응한 미약한 조바심과 흥분이 그의 뒷덜미를 곤두서게 했다.

“그럼, 공녀는…….”

테고가 무언가 말을 건네려는 찰나, 응접실의 문이 급하게 열렸다.

“공작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니. 뭐하시는 겁니까.”

그들을 발견한 나딘은 우선 재빨리 문부터 닫았다.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에 목소리가 금세 싸늘해졌다.

하지만 아직 테고는 손 하나도 까딱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커다란 몸과 기울인 자세 탓에 그가 아이네를 몸으로 가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

뒤늦게 그걸 눈치챈 나딘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이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좁힌 채로 빠르게 아이네의 팔을 잡아당겼다. 동시에 테고와 제 동생을 갈라놓듯 그 사이에 자신을 끼워 넣었다.

“응?”

동그랗게 뜨인 눈으로 아이네는 나딘을 올려다보았다.

나딘은 그런 제 동생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이 있진 않은 것 같지만.

나딘은 또다시 며칠 사이에 테고와 아이네 사이에 무언가 진전이 있었단 걸 알아챘다.

그리고 이번엔 테고가 아주 중대한 전환점을 지나쳤다는 사실도.

잠시였으나 이전과는 다르게 아이네를 향한 눈빛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흠, 잠시 영지에서 연락이 오는 바람에 자리를 비웠습니다.”

서서히 몸을 물린 나딘이 테고의 맞은편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사이에 테고는 이를 악물고 커다란 손으로 제 눈을 완전히 덮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거짓말처럼 아까의 충동이 완전히 멎었다.

“아이네, 너는 왜 안 자고 이 밤에 내려왔어?”

“아니, 사라가 테고 경이 왔다고 해서.”

나딘의 싸늘한 목소리에 아이네는 조금 눈치를 보았다.

평소 테고를 반갑게 맞던 반응이 아니었다. 휘하의 행정관들이 잘못했을 때나 나오던 뾰족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뭐, 난 테고 경 보좌관이기도 하잖아.”

아이네가 나딘에게서 주춤주춤 벗어났다.

그렇게 테고의 곁에 앉으려 하는 순간, 나딘이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제 옆에 앉혔다.

“퇴궁했는데 그런 게 어딨어. 안 그렇습니까, 리테루온 공작님.”

나딘의 바로 옆에 앉게 되자 아이네가 기겁하며 거리를 벌렸다.

“으앗, 오늘 왜 이래.”

어느새 테고는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그렇다고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아간 감정의 행방까지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딘이 때맞춰 들어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뭘 어쩌려고 했던 걸까.

강제하지 않겠다면서 아이네가 제 품으로 온전히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조금만 늦었어도 그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았을지도 모르지.

“바로 귀택하지 않고 이곳으로 먼저 오신 모양이군요.”

“한시가 급한 사안이니까요.”

아이네는 나딘과 테고를 번갈아 보았다. 이내 그녀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그러고 보니 테고의 옆에 갈무리해둔 까만 망토와 겉옷에 미처 다 털어내지 못한 먼지가 보였다.

“요 며칠간 사냥대회 정리를 도맡은 게 아니었어요?”

“…….”

테고가 나딘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나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애초에 그 도로를 고안한 것도 아이네입니다. 우리 베룸은 여아라고 해서 의사결정에서 배제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테고가 품 안에서 작게 접힌 지도를 꺼냈다. 이미 선을 죽죽 그어 표시해둔 지도 위를 그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리가 황도로 향하던 새로운 길에 대해 기억합니까?”

“으응, 네.”

테고는 베룸 영지에서 황도로 향하는 길목을 따라 검지를 움직였다.

“여기가 우리가 첫날 들른 마을이고, 그리고 둘째 날 들른 거점은 여기입니다.”

아이네는 그의 손가락에 집중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둘째 날 이후로는 마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잠든 기억뿐이었다.

“공녀가 도로의 거점마다 마을을 조성한 건 치안 때문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렇, 그렇죠.”

그때는 그렇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더니. 갑작스러운 언급에 아이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리고 새로운 도로가 완성되면서 기존의 길은 끊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어차피 쓰이지 않을 길이기도 하고, 자칫하면 산적들이나 불순한 무리가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깨끗하고 넓게 잘 닦인 데다가 일정을 반이나 단축시켜주는 경로였다. 그러니 숨길 게 없는 합법적인 일행이라면 새 도로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원래의 길에도 관문마다 최소한의 경비인력과 치안대는 존재했다. 하지만 정해진 인력만으론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아이네는 거점을 중심으로 마을을 조성했다. 검문 과정에선 숨길 수 있어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까지 완벽하게 감추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새로운 거점 마을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고려한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베룸 공작령 내부에서 정착하여 살아온 이들을 동원하지 않았다.

‘역사상 이런 일로 강제 이주하면 꼭 문제가 생겼거든.’

그래서 화전민이나 단속을 피해 떠도는 유민들을 이용했다.

상단과 여행객들을 상대로 숙박업과 특산물 판매를 허가해주면서 일정 기간 면세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그들을 정착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사실 아이네에게는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생각이었다.

거기에다 대강의 아이디어만 있을 뿐, 세세한 계획과 실행방안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공녀님! 방금 그 생각을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그냥 해본 말인데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지금 그걸 기존의 마을과 연계한다면…….”

하지만 베룸엔 숙련된 행정관과 관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단지 그 아이디어만으로도 아이네의 제안을 멋지게 재현해냈다.

“오오, 오! 여길 좀 보십시오. 기가 막히게 일직선으로 이어지는군요! 여기까지 계산하신 겁니까? 공녀님은 역시 우리 베룸의 보물이에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나도 양심이란 게 있는 사람이에요.”

도로 건만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변혁을 이루어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작게는 음료 레시피에서부터 크게는 제도의 정비까지.

보통은 다른 세계에서 미리 겪고 오기라도 한듯한 파격적인 아이디어의 향연에 위화감이 들었을 법도 했다. 그러나 모두들 어째서인지 당연하게 여기고 넘어갔다.

그건 아이네가 ‘진실의 눈’을 가진 발현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적어도 베룸 내부에서는 그녀 자체가 곧 개연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 * *

“덕분에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에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테고의 목소리가 낮고 은밀해졌다. 이미 보고받은 바 있던 나딘은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깊게 묻었다.

“남부에서 반출된 곡물이 대량으로 국경을 넘는 일 말입니다.”

“그럼, 그동안 그걸 조사하고 다녔던 건가요?”

심각해진 테고의 발언에도 아이네는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원작 소설의 최대 위기는 반란군과 연합왕국군의 침입이다. 전쟁을 잘 모르지만 곡물이 전쟁물자에 충당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현대에서 배운 상식으로 볼 때, 전쟁이 일어나면 곡물 값이 폭등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원작의 세부적인 진행 상황까지야 일일이 기억하진 못했다.

뭐니 뭐니 해도 원작 이야기의 중심은 황도에서 벌어지는 테고와 대공의 로맨스에 맞춰져 있었으니.

한편, 아이네의 반응을 살피던 나딘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역시,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어.’

마치 몇 년 앞을 내다본 것처럼 미리 조성된 도로와 때맞추어 이루어진 은밀한 움직임.

거기에 리테루온 공작과의 갑작스러운 약혼까지.

둘이 약혼 관계가 아니라면 테고가 저택에 드나드는 데에 누군가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당장이라도 어떻게 알았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나딘은 꾹 참았다.

* * *

대대로 베룸 공작가의 직계 중 후계자에게만 전해지는 단 하나의 전언이 있었다.

『흘러가는 대로 두어라.』

주어와 목적어가 생략된 불완전한 말이었다.

하지만 아티팩트 대신 대대로 핏줄을 타고 흐르는 이능과 직감은 지금이 그 순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과연…….’

나딘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말씀대로 발현자가 결정하고 판단하는 대로 두어야 하는 모양이다.

“케이, 아니, 헤이안드로 대공도 같이요?”

아이네의 말에 테고의 기세가 단박에 흉흉해졌다. 나딘은 등받이에 편히 묻었던 몸을 슬금슬금 뒤로 물렸다.

기사가 아닌 그가 받아들이기엔 살갗이 따끔해질 만큼 대단한 기운이었다.

흘러가는 대로 두기엔, 지금은 그냥 제 동생이 눈치가 너무 없는 거 같은데……?

“그는 남부 루트를 추적하고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대공령과 가까울 테니까요.”

“아아, 그렇구나.”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는 듯한 아이네의 목소리에 테고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그리고 곁에 앉은 나딘은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것처럼 불편해졌다.

“그런데 수상한 사람들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사람들이 거대 상단이 무언가에 쫓기듯 북쪽으로 향했다고 하더군요. 서북 영지민들이 듣기에 남부 억양은 확실히 튀었을 겁니다.”

테고가 말을 이었다.

“거기에 공용어가 어색한 사람들이 윗사람으로 보였다니 누가 보아도 이상했을 테지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딘이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팔랑팔랑 넘겼다.

“베룸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은 들르지 않았으니…….”

그의 말을 받아 테고가 덧붙였다.

“리테루온 공작령, 제 영지를 경유했을 겁니다.”

원작 소설에 정확한 경로까진 나왔을 리가 없다.

다만, 반란군의 지지를 받았던 최종 악역인 ‘그’를 생각할 땐 테고의 추측이 맞아 보였다.

아이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번에도 책빙의 딜레마구나.’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악역이 일으킬 일을 알면서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악역을 처치하는 과정에서 대공인 케이어드가 테고의 원래 성별을 알게 된단 말이다.

거기다 차후 여자로 밝혀진 테고가 공작위를 인정받게 되어야 해서…….

“아이네, 아이네!”

나딘이 멍한 그녀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응?”

“테고 경, 아니, 공작께서 하신 말씀 들었어?”

누적된 피곤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파리하게 질린 얼굴의 테고가 아이네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 어디까지 말했더라? 연합왕국 측이 남부에서 곡물을 조달해서 리테루온 공작령으로 향했을 거라고 했던가?

“흐음, 저도 테고 경의 추측이 맞는다고 생각해요. 리테루온 영지는 테르미누스 산맥과도 닿아있고, 제국 경계를 넘어 왕국으로 넘어가기에도 편할 테니까요.”

그 말에 나딘과 테고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그리고 테고는 또 한 번 드는 미묘한 위화감에 제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보았다.

‘연합왕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게다가 그가 직전에 하던 말은 그런 주제에 대한 게 아니었다. 아이네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아니, 당분간은 너랑 같이 출퇴근하는 게 어떻겠냐고.”

“왜?”

아이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그 짧은 사이에 왜 대화가 거기까지 갔담?

테고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아이네의 말을 받아 이어나갔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그 정도 규모의 곡물 반출이라면 경로 선택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심지어 단순한 사람의 이동이 아니라 대규모의 곡물 수레니까요.”

“아하, 옛길은 아직 해체작업을 하는 인부들 때문에 몰래 이동할 수도 없었겠군요.”

아이네가 신중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테고가 무기류에만 관심 많은 육체파인 줄 알았더니 제법이었다.

그리고 나딘이 뒤이어 추론을 내놓았다.

“굳이 새 도로를 통해야 한다면, 물자의 이동도 적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겨울이 제격이지요. 지금은 막 도로가 닦인 데다가 이런저런 마을 축제가 많은 시기라 몰래 일을 도모하기엔 최악인데 말이야.”

아이네는 속으로 조용히 납득했다. 그저 휙휙 반란과 침입이 진행된 줄 알았더니. 나름대로 준비과정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게 나랑 테고 경이 같이 출퇴근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큼.”

갑작스레 헛기침을 하는 테고 때문에 나딘이 대신 설명했다.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왜겠어? 공작께서 너랑 약혼해서 그런 거지.”

“으응?”

그 이유까지는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아이네는 이해되는 것과는 별개로 조금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비옥한 남부에는 지금의 황제에게 대항하는 귀족 세력이 대다수였다.

휘두르기 쉬웠던 선황 때와는 달리 지금의 황제는 만만치 않았다. 특히 세금 문제에서는 더더욱.

‘그러니까, 내가 테고 경이랑 약혼한 거에 위기의식을 느껴서 서두른 결과란 말이야?’

살았어야 할 사람을 살려야 한대서 달리아 영애 대신 약혼을 결심했는데.

덕분에 생각지 못했던 핵심 전개가 유지되는 듯한 건, 기분 탓이겠지?

하지만 아까부터 물어보고 있는데도 대답을 듣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대공 전하도 이 일에 관여하고 계신 거죠?”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 반란군과 연합왕국에 대해 조사하면서 앙숙 같던 둘 사이가 천천히 변화하게 되니까.

아웅다웅 싸우면서도 상처 많은 여주를 전우로서 보듬어주다가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거지.

“…….”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느라 아이네가 눈을 빛내며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테고는 점점 더 불쾌해졌다.

결국, 바늘처럼 찔러오는 살기를 견디다 못해 나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대공 전하는 왜 자꾸……. 혹시, 너 어렸을 때, 아니다.”

잘못된 화제 전환에 나딘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병상에서 일어나기 전의 기억이 흐릿할 테니까.

게다가 열한 살의 아이네가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이 당시 대공자였던 그였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묻지 못했는데.

‘아이네가 다시 깨어난 후로는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어.’

하지만 그 기억을 떠올리는 건 제법 괴로운 일이라 나딘이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아무튼 저들이 급할수록 흔적을 많이 노출할 수밖에 없을 거야. 당분간은 약혼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좋지.”

약혼자와 출퇴근을 함께 하는 건 눈에 띌 게 분명했다. 이왕이면 금방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비치는 편이 좋았다.

“아하, 그건 그렇네. 기사단 건물에서는 아무리 붙어있어도 소문이 나기 어렵기도 하고.”

아이네가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달리아 영애의 경우엔 진짜로 테고를 좋아해서 졸졸 따라다녀서 모두가 알았던 거니까.

‘이게 말로만 듣던 원작의 억지력이나 영향력, 뭐 그런 건가? 이런 식으로 결말까지 흘러가는 거였구나.’

한두 번이면 모를까, 매번 테고를 좋아한 척 연기하는 건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출퇴근을 함께 하는 것만큼 쉽고 확실한 친밀감 과시가 없어 보였다.

“…….”

철없이 눈을 반짝거리는 아이네를 보며 나딘의 표정이 애잔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제안이었다.

호감을 세련되게 표현하지 못하는 테고도 그렇지만. 가장 속 터지는 건 아이네의 단단한 철벽이었다.

‘내 동생이 이렇게까지 눈치 없이 둔할 줄이야.’

웬만해서는 제 동생에게 접근하는 외간 남자에게 반감이 들 만도 했다. 나딘은 전형적으로 동생을 꽤 아끼는 오빠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까지 짠한 상황이 연출되면 생판 남인 테고라도 조금은 불쌍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정말로 아이네랑 당장 결혼하겠다고 하면 곤란하지만.’

결혼이라니…….

제3자인 나딘이 보기에도 그건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누군가 가까이에서 그들을 반나절만 관찰해도 알 거다. 아이네가 테고를 전혀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걸.

“……진행 상황을 공유할 때도 의심받지 않을 겁니다. 큼!”

테고가 부러 한 번 더 헛기침을 했다.

그저 아이네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 꺼낸 제안이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해도 궁색한 핑계였다. 나딘이 알아서 잘 포장해주었기에 망정이지.

테고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억지스러운 말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여전히 민망한 마음에 귓불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볼까지 붉어지기 전에 오늘은 이만 일어서는 게 나을 듯싶었다.

어차피, 이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내일 아침 저택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그렇게 처음 등장할 때보다 몇 배는 지친 몸을 일으키려던 참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테고 경한테 보여줄 게 있는데. 할 말도 있고.”

아이네가 먼저 일어서서 테고를 이끌려 하자 나딘이 제지했다.

“여기서 해. 밤도 깊었는데 어딜 가려고?”

“내 침실에 잠깐 들러서 보여줄 게 있어서 그래.”

“…….”

테고는 반쯤 일으켰던 몸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아버렸다. 겨우 자각하게 된 제 마음이 가여울 정도의 무심함이었다.

하지만 씁쓸한 마음과는 반대로 심장은 급격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단둘이 이 늦은 시각에 약혼자의 침실이라니.

듣기만 해도 벅차고 가슴 떨리는 단어의 조합이 아닌가.

생각보다 쉽게 저열한 기대를 품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음은 물론이다.

“아니,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제정신이야, 너? 그리고…….”

나딘의 시선이 아이네의 옷을 쭉 훑었다.

“……설마 안에 입은 거 잠옷 아니지?”

“괜찮아, 이번에는 숄 걸쳤으니까.”

이제 테고는 황망한 표정을 애써 감추지도 않았다. 제 앞에서 잠옷이라니. 자신이 아이네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남자였나.

아니, 남자이긴 한 건가.

“‘이번에는’? 그럼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거야?”

나딘이 저도 모르게 이마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창백하다 못해 핼쑥해진 테고를 딱하게 바라보았다.

아이네, 아무리 영지 안에서만 자랐다고 해도 그렇지. 약혼자한테까지 가족 대하듯이 구는 거니…….

나딘은 테고에게 같은 남자로서 깊은 연민과 동정마저 느꼈다.

“너, 여기가 베룸인 줄 알아? 알베르토만 빼면 사용인들은 전부 황도 사람이라고.”

“나도 알아. 그러니까 다들 자고 있을 때, 살짝 들렀다 가면 되는 거 아냐?”

요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아이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되겠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데.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두 남자는 더욱 참담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밤이 늦었으니, 조심히 귀택하시기 바랍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테고는 비틀거리며 몸을 세워 나딘의 정중한 인사를 받았다.

* * *

다음 날 테고가 베룸 공작저를 찾은 시각은 출근하기엔 상당히 이른 때였다. 이번엔 정복까지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털어내도 숨길 수 없는 먼지의 흔적이 남았던 전날과는 달랐다.

그러나 멀끔한 차림새와는 반대로 어딘지 퀭한 얼굴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안색은 조금 더 푸석푸석해진 듯도 했다.

집사 알베르토가 테고의 방문을 알리러 아이네의 방 문을 두드렸다.

“아이네 아가씨, 리테루온 공작께서 저택에 도착하셨습니다.”

마침 사라에게 도움을 받아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아이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약속한 시간까진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곱게 땋아 반묶음한 머리카락을 노란색 리본으로 마무리하며 사라가 발을 동동 굴렀다.

“거봐요, 아가씨.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셨어야 했어요. 어쩌죠? 우리 아가씨 아침은 꼭 드셔야 하는데.”

그러자 알베르토가 난처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아침식사를 함께 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이미 나딘 도련님께서 다이닝룸으로 먼저 가셨습니다.”

“아아, 그럼 다행이네.”

“그러게요.”

아이네와 사라는 테고와 함께하는 아침식사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황도 저택의 집사인 알베르토는 아니었다.

“하지만 공작께서 약혼자라고 하셔도 아직은 엄연히 외부인인데…….”

저녁 만찬이라면 모를까, 황도에서 조찬을 함께한다는 건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황도엔 지방 영지보다 사교 행사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늦은 오전쯤 기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미리 약속을 잡지 않은 오전 중의 방문은 꽤 무례한 일로 여겨졌다. 다만, 아주 친밀한 사이이거나 가족이라면 예외였지만.

“알베르토는 이제 황도 사람이 다 됐네?”

아이네가 푹신한 화장대 의자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괜스레 눙치듯 알베르토에게 말을 건넸다.

“역시……, 그렇습니까?”

알베르토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낮아졌다.

안 그래도 공작성에서 온 베룸의 사용인들 사이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던 참이었다.

왜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은 황도가 아니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황도에서 버티고 있다 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황도에 또 스며든 모양이다.

“이제는 영지까지 가는 데에 일주일도 안 걸리니까. 일이 다 끝나면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휴가를 가거나 영지로 복귀하는 것도 괜찮고.”

아이네의 말에 사라가 맞장구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맞아요! 케이트 경과 로윈 경의 둘째도 만나시고요. 아직 못 보셨죠?”

사라의 말에 알베르토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베룸 가문 기사인 케이트 경이 바로 그의 딸이었다. 곧 둘째 손주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울적함이 싹 가신 듯했다.

사라는 아기가 누굴 닮았는지 한참을 더 재잘거렸다.

그 바람에 두 사람 다 아이네가 흘리듯 이야기한 ‘일이 다 끝나면’이라는 말을 놓치고 말았다.

“그나저나 아가씨. 도련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이 있었습니다.”

“응?”

알베르토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옷으로 갖춰 입고 내려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평소에는 종종 잠옷을 입고 나와도 잘 모르더니.

솔직히 아이네가 입는 잠옷과 홈드레스인 꼬뜨는 그 디자인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나딘이 둘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에 한 달 치 오징어를 걸 수도 있었다.

* * *

“어서 와, 아이네.”

“좋은 아침입니다.”

손님을 초대한 정찬이 아닌 만큼 상석은 비어 있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앉은 두 남자의 시선이 아이네를 향해 돌아갔다.

테고는 물잔을 들어 천천히 목을 축였다. 아이네가 내려오길 기다리면서 어쩐지 목이 탔던 탓이다.

겉모습만 봐서는 전날보다 훨씬 안정되어 보였다. 그러나 어제 제 마음을 확실히 자각한 이후에 만나서일까.

이른 아침에 마주한 그녀가 못내 반가워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억지로 입가를 굳히느라 조금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맞은편에서 그걸 목격한 나딘 역시 애매한 얼굴을 했다.

‘저 얼굴, 저 신분에 왜 저렇게 쩔쩔매고 살까.’

하지만 아무리 잘난 남자라고 한들, 제 여동생의 짝으로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번쯤은 흰 눈으로 보게 되는 게 오빠란 생물의 마음이었다.

그런 나딘이 보기에도 테고는 꽤 괜찮은 청년이었다.

그 넓은 영지의 주인인 공작인데도 오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지위에 비해 욕심도, 야망도 없는 편에 가깝지.’

그렇다고 책임감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제국의 귀족치고는 독특한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외적인 부분이야 굳이 언급하기도 입이 아플 정도로 훌륭했다.

거기다 다른 기사들의 말을 듣자 하니 검술에도 타고난 천재에, 노력가라고 했다.

굳이 단점을 찾자면, 지나치게 요령 없고 말수가 적은 편이라는 것뿐.

그랬는데, 그런 그가…….

‘이젠 매일매일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또 저렇게 티를 내네.’

원래의 그를 알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이쯤 되자, 나딘은 제 동생이 의아스러워졌다.

분명 처음에는 테고에게 보기 드문 호감을 내비쳤었다. 그래서 테고의 저 잘난 외모에 홀렸나 싶었는데 또 그것도 아니고.

그와 친구라고 우길 때부터는 도리어 테고가 아이네에게 호감을 품었단 걸 느꼈다.

그래, 거기까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어제를 기점으로 테고의 태도가 급격하게 달라졌다. 이번에야말로 둘 사이에 무언가 진전이 있지 않고서야 설명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

“이렇게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아이네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다가왔다. 그녀의 걸음걸이를 따라 연보랏빛 드레스 자락이 하늘하늘하게 흔들렸다. 그 뒤를 테고의 시선이 집요하게 쫓았다.

“약혼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기에 더 적절하지 않습니까.”

“……아무 일도 없다는 말이네요.”

제 마음을 자각한 테고는 의외로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용기를 낸 직진 시도는 아이네에게 바로 튕겨나갔다.

“우리밖에 없는데 조금 더 솔직해져도 돼요.”

아이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수프 그릇을 가리켰다.

오징어 수프를 먹고싶어서 온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렇게 흔한 오징어 중독자로 전락한 테고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

그리고 이곳엔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매번 이런 식이었어?’

단순히 아이네가 둔하다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심한데.

나딘은 직감적으로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아이네는 절대 둔하지 않았다.

귀하게 사랑받고 자란 자 특유의 순진함은 있어도 기본적으로 타인의 감정에 무딘 편이 아니었다.

사교계에 나가지 않았다 뿐이지, 성안에서 아이네가 만나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그리고 어여쁜 외양과 다정한 모습에 호감을 품는 또래의 기사들도 종종 있었다.

“오빠, 나 호위기사 좀 바꿔줘.”

“왜? 켄트 경이 뭐 잘못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조금 더 있으면 날 좋아할 거 같아.”

켄트 경은 당시 서임을 받은 공작가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잘생기고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아이네와 고작 두어 살 차이는 났을까.

“그래. 네 감은 틀리질 않으니까.”

“앞으론 그냥 안전하게 결혼한 기사를 호위로 삼아야겠어. 켄트 경은 너무 남자 주인공스럽단 말이야. 아직은 위험해.”

“……요샌 또 무슨 책 보는데. 뭐 보냐, 도대체.”

그렇게 호위보단 훈련에 더 매진하라며 갈아치운 또래의 기사가 족히 다섯 손가락은 넘었다.

단순한 자의식 과잉이 아니었다.

아이네가 지목한 기사들은 전부 크게든, 작게든 그녀에게 마음을 품은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테고는 그 경계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듯 굴고 있지 않은가.

‘리테루온 공작이야말로 매번 노래 부르는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의 정석인데 말이지.’

확실히, 이상했다.

어째서 이번만큼은 둔감할 걸 넘어 저리 무신경한 모습을 보일까.

나딘의 옆자리에 앉아 식사 준비를 하는 아이네.

그런 그녀를 의식하고 있다는 티를 숨기지 못하는 테고.

드디어 의심의 싹은 나딘에게서도 움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씩 모인 균열은 조금씩 그 틈을 벌리고 있었다.

* * *

공작성에서처럼 그들은 자연스럽게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아이네는 제 앞에 놓인 오징어 수프를 검열하듯 노려보았다.

“어?”

기분 탓인가. 오징어 건더기가 엄청 줄어든 거 같은데.

그녀는 먼저, 가라앉은 얼굴로 말없이 수프를 떠먹기 시작한 테고를 보았다.

그리고 나딘을 향해 수프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아이네의 시선을 느낀 나딘이 입을 열었다.

“맞아. 갑자기 저번 달 오징어 어획량이 확 줄었어. 로버트가 그거 때문에 급하게 온 거야.”

“잘됐네! 우리도 특산물을 바꿀 때가 됐지.”

아이네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런 그녀를 나딘이 흘겨보았다.

“……이번 달부터는 다시 회복세라고 하니까, 일시적인 거야.”

“다행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기색이었던 테고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딘이 말을 이었다.

“이상한 건 기온도, 강우량도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거지요. 예년과 비교해도 갑자기 줄었으니까요. 그것도 테르미누스 산맥과 닿은 만의 안쪽으로만.”

그 말에 아이네의 수저가 잠시 멎었다.

엥? 설마……. 아니지?

“그거, 정확하게 언제쯤이래?”

그녀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비장해져 있었다.

“우리가 아직 영지에 있을 때니까. 네가 검 휘두르다가 근육통으로 앓아누웠던 그즈음일 거야. 왜?”

“아니야, 아무것도.”

끙, 소리를 내며 아이네가 이마를 짚었다. 나딘의 말처럼 정말로 다른 변수가 하나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때쯤이면 나랑 테고 경이 경계 너머 이상한 오두막에 갔을 때잖아.’

신은 아니라고 했지만, 아이네를 이곳으로 불렀다는 미지의 그 존재.

설마 정체가 오징어의 요정, 이런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이네는 나중에 영지로 돌아가면 꼭 그 존재를 다시 확인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오징어 요정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애초에 베룸 영지 자체가 원작과 거리가 먼 곳이었다.

베룸 영지뿐인가. 지금 곁에서 신나게 오징어 샐러드를 먹어치우는 나딘도,

‘심지어 나마저도…….’

원래대로라면 원작에 아예 나오지 않았거나 나왔어도 존재감이 미미했을 인물들이다.

오징어 요정이 아니라 그 어떤 게 나와도 이상할 건 없긴 하다. 물론 오징어 요정만큼 끔찍한 존재는 없겠지만.

괜히 수프를 휘휘 젓던 아이네가 테고에게 시선을 주었다. 평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던 것보다는 현저하게 느려진 식사 속도였다.

짐작건대, 오징어 건더기가 적어져서 적잖이 실망한 것 같았다.

‘그때 경계 안에서 정말 아무것도 못 본 걸까.’

이 세계의 주인공인 테고가 못 봤다면 더더욱 확신이 굳어진다.

이건 자신이 책빙의하면서 새롭게 생긴 변수다. 한낱 원작의 배경 이야기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오징어 어획량이 줄어든 거지?’

아이네는 하고많은 변수 중 왜 아필 오징어에 영향이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민간에 알려지면 혼란이 생길까 봐 일단은 우리 가문에서 대량 수매한 것으로 해두긴 했는데. 한 번쯤은 영지에 다녀와야 할 수도 있겠어.”

“그럼, 나는?”

나딘의 말에 아이네가 되물었다. 무슨 대화가 오가더라도 묵묵히 식사를 이어가던 테고는 그제야 조용히 식기를 내려놓았다.

“…….”

제게로 쏟아지는 두 쌍의 눈길. 그리고 나딘은 테고의 새파란 눈동자에서 초조한 기색을 읽어냈다. 그러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렇게나 티를 내는데, 정말 모른단 말야?

“아냐, 너는 여기 있어. 갑자기 출근을 안 하면 저들이 눈치챌 수도 있고.”

그 순간 안도하며 짙푸른 눈을 내리까는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

“공작께서 알아보신 대로라면 베룸으로 가는 길도 당분간은 안전하지 못해. 그렇다고 호위를 갑자기 늘려서 불안을 부추길 수는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아이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도와 영지를 잇는 도로와 근접한 곳에 조성한 마을이다. 수상한 일행을 금방 알아채기 쉬웠다는 건 마을 주민들의 눈을 피하긴 힘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굳이 수상하지 않은 일행이라도 마찬가지일 테다.

타 영지의 귀족과 약혼하여 황성에 드나들던 공녀가 어느 날 갑자기 많은 호위를 이끌고 베룸으로 돌아간다. 거기에 남부에서 곡물이 대량으로 반출된 사실까지 퍼진다면?

누구나 추론하기 쉬운 결론이 도출된다.

전쟁, 아니면 소요 사태 정도는 임박했으리라고.

“아니, 잠깐. 그러면 이거 생각보다 큰일 아니야? 갑자기 곡물 가격이라도 폭등하면……!”

아이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너무 안이했다. 그저 원작대로 언젠가 일어날 전쟁과 악역 등장만 생각했는데…….

“괜찮아. 다행히 수확이 끝날 때까진 유출한 쪽에서도 쉬쉬할 테니까. 확실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저쪽도 비축분을 전부 털어서 넘겼을 거야.”

황제는 반란군 진압이라는 명분으로 남부에서는 양곡을, 북부에서는 병력을 차출했다. 영지민들이 곤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남부 귀족들이 여유분을 비축해두기는 어려웠다.

당장 남부 귀족들을 도려내질 못하니 차선책으로 고안해낸 방법이기도 했고.

“그래도 수확 철이 오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야. 들판의 곡식이 다 자랄 때까지는 섣불리 나서지 못할 테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대책을 세워야 해.”

가장 좋은 건 반출된 곡물을 추적해 찾아내고, 연루된 자를 처벌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딘은 이런 일에서 최악을 가정하고 대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다.

“우린 그래도 괜찮지만……. 리테루온 영지는 어떻습니까.”

그나마 서북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베룸 영지는 빠듯하게라도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하지만 문제는 테고의 리테루온 영지였다.

안 그래도 척박한 북쪽인 데다 무력에 치중하느라 농업이 취약했다. 리테루온은 병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황실의 지원을 받아 그 틈을 메웠다.

그렇게 남부에서 거둔 양곡의 상당수가 리테루온 영지로 흘러 들어갔다.

때문에 황실 쪽에서 곡물 공급이 끊어지면 제일 먼저 곤란해질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영지의 주인인 테고가 그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기까지 했으니.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딘과 아이네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테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태껏 그는 반란군과 마물, 연합 왕국의 동태를 살피는 게 다였다.

영지 경영에 대해 제대로 알려줄 스승도 없었을뿐더러, 있었다 해도 배울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물론 테고가 자책하기에는 베룸 공작가 두 남매의 정세 판단이 남달리 빨랐다.

“대공 전하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오늘 입궁하면 폐하께 바로 대책을 강구하시라 말씀드려야 해요.”

“예.”

완전히 식욕을 잃은 듯 테고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 커다란 남자가 축 처져 있는 건 의외로 안쓰러운 광경이었다. 그가 청초하게 생긴 미남자라면 더더욱.

“일단 우리는 입궁하는 게 좋겠어요.”

“……그렇군요.”

아이참, 이렇게까지 침울해할 일은 아닌데.

* * *

가볍게 입 안을 헹구고 저택을 나와 마차에 오를 때까지도 테고의 어깨는 펴질 줄을 몰랐다.

아이네가 맞은편에 앉아 치맛자락 정돈을 끝내자 그가 팔을 올려 천장을 가볍게 두드렸다.

가벼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

“…….”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아이네는 다시 한번 테고의 옷차림을 흘끗 보았다. 어제와 비교되어서일까. 오늘은 더 완벽했다.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걸까. 피곤했을 텐데.’

리테루온 공작저는 황궁을 기준으로 베룸 공작저와 거의 반대쪽에 위치했다.

심지어 리테루온 공작저에서 황궁까지의 거리가 더 짧았다. 이만한 수고를 들여서 굳이 오려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역시 오징어 아니면 내가 첫 친구라서겠지?’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매번 여기까지 오려면 너무 힘들잖아요. 우리 집엔 나딘도 있고.”

사랑에 빠진 남자가 그렇듯 테고에게는 수고로움보단 아이네와 더 오래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혹시 불편하다면…….”

아이네는 손사래를 쳤다.

“너무 일방적으로 테고 경만 우리 집으로 오게 하는 거 같아서 그렇죠.”

“……제 저택에는 언제든 공녀가 올 수 있도록 말을 해두겠습니다.”

별생각 없이 수긍하려던 아이네가 멈칫했다. 테고의 저택에는 ‘그’ 사람이 있다.

웃으면서 말로 사람을 패는 공포의 외알 안경 집사!

특히 시도 때도 없이 저택에 찾아오던 달리아 영애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기억한다.

“기, 기회가 되면…… 감사히 방문하도록 할게요.”

“…….”

으응, 아마 원작이 끝날 때까지 갈 일이 없을 듯한데.

그렇게 마차 안에는 또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테고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는 지금 전개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점검했다.

아이네가 연합왕국의 침략 전쟁과 반란을 떠올린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원작에 나온 사건이었으니까.

의외로 영지 경영과 정세에 밝은 나딘은 제외하더라도 이런 사안의 판단은 으레 행정관들이 맡는 법이었다.

게다가 여긴 아이네가 살던 원래의 세계가 아니다.

귀족들의 안위와 제국의 존명보다 영지민들을 먼저 고려하는 사고방식은 좀처럼 흔치 않았다.

곡물 사재기로 인한 일시적인 물가 상승보다는 군량미 걱정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선 어땠더라?’

아이네의 눈동자가 천천히 허공을 더듬었다.

보통의 소설이 그렇듯 그저 반란이 일어나고 뒤이어 혼란을 틈타 연합왕국이 전쟁을 일으킨다는 서술이 다였다.

그 전쟁과 혼란을 제압하는 주인공들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과정에 대해선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테고는 성장형 주인공에 가까웠다. 겨우 열넷에 가족을 다 잃고 8년간 검만 휘두르며 살았다. 이런 쪽으로는 잘 모르는 게 당연하지.

‘으음, 그렇다고 모르는 게 설정값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할 순 없잖아.’

그것도 아니면 모르는 게 보통이라고 해봤자 와 닿지도 않을 거고. 역시 나딘이 문제야, 나딘이.

음울하게 가라앉은 테고를 보다 못한 아이네가 손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안 되겠어. 이쯤에서 여주의 자존감 명예 소방관 재출동이다!

“저어, 테고 경?”

“……예.”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아이네의 심장을 따끔하게 찔렀다. 자고로 로판 독자가 가져야 할 첫 번째 마음가짐은 여주맘이 되는 거다.

어쩔 수 없다. 조금 급작스럽긴 하지만 칭찬거리를 하나 만들어주는 수밖에.

“그……, 어제 말이에요. 새 도로를 거쳐서 그 일행이 빠져나갔다고 했죠?”

아이네가 빈 종이 위에 제국의 영토와 산맥을 간략하게 표시했다.

그러고는 테고와 함께 황도로 향했던 도로를 한 줄로 죽 그어 그렸다.

그녀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던 테고가 불쑥 물었다.

“이게 뭡니까?”

“제국 지도잖아요……?”

아, 혹시 거꾸로 그려져서 잘 모르나?

아이네는 종이를 돌려 반듯한 방향으로 테고에게 내밀었다.

“음, 이게?”

잠깐, 방금 ‘이게?’라고 했어? 약간 상처받을 거 같은데.

“혹시 뒷면에 제가 새로 그려보아도 됩니까?”

테고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무언가 마뜩잖다는 듯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다.

이것은 도전인가, 도발인가.

“아니, 뭐. 그러시든가요.”

갑작스레 그림 실력을 공격당한 아이네가 새로운 종이를 꺼내 건넸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원작과는 달리 연합왕국의 침략 징후를 미리 알아 왔기에 칭찬해주려고 그린 그림을 지적받다니.

딱 보아도 단단하고 탄탄한 허벅지 위에 종이를 올려둔 테고의 손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마차 안이라는 사실도 그에겐 중요치 않은 것 같았다.

“어, 어, 어…….”

……인정합니다, 방금 제 그림은 가시 돋은 망개떡이었습니다.

지리 시간에 배웠던 제국 전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림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제국의 윤곽이야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베룸 영지에서 황도로 오는 새 도로는 기껏해야 두어 번 다녀보았을 텐데도 정확하게 그려냈다.

“급하게 그리느라 엉망이지만 대략 이러한 경로로 생각됩니다.”

“…….”

종이를 쥔 아이네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뭐야, 이 새로운 재능은? 전생에 개미셨어요?

“새로 난 도로는 아직 제대로 된 지도가 없을 텐데, 어떻게…….”

“이번까지 두 번 다녀갔으니 충분합니다.”

……이 정도면 원작에도 안 나온 가상의 상황에 좌절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요.

전쟁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작전을 수행해 본 기사답게 테고는 지형을 읽고 재현해내는 데 익숙했다.

기초 중의 기초인 독도법 따위는 십 대 초반부터 이미 빠삭했다.

그렇다고 해도 지도를 읽을 줄 아는 것과 지형지물을 빠르게 파악하고 구현해내는 건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다.

그러나 유난히 본인에게 박한 구석이 있는지라 테고는 그게 재능이란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마차만 흔들리지 않았더라도 더 잘 그릴 수 있었는데……. 쯧.”

“…….”

“나중에 집무실에서 새로 그리도록 하지요.”

그만해! 눈앞에 있는 애 기죽는 거 안 보여요? 흑흑.

* * *

테고의 자존감을 채워주려다 새로 발견한 그의 남다른 재능에 아이네는 기가 죽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잘 몰라서 그렇지 서류 작업이나 업무도 한 번 알려주면 곧잘 익히곤 했다.

‘역시, 성장형 주인공이야.’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주인공 걱정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다.

아이네가 한숨을 내쉬며 받아든 종이를 다시 테고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그려진 도로를 훑듯이 가리켰다.

그 바람에 테고는 허벅지 위를 간지럽히는 아이네의 건조한 손길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그의 몸이 작게 파득 떨렸다.

“여기 중간 길목의 마을에서 리테루온 영지 쪽으로 움직였다는 거지요?”

베룸 영지에서 리테루온 영지로 넘어가며 아이네의 손가락이 조금 더 옆으로 움직였다.

테고는 여기까진 어찌어찌 참아냈다. 사실 그의 재능 중 제일은 인내심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여기서 조금만 더 동쪽으로 가면 에펜베르크 영지가…….”

“윽, 잠깐.”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안쪽으로 옮겨가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선득한 느낌에 결국 아이네의 손을 낚아채듯 쥐었다.

“앗?”

“나중에, 나중에……. 집무실에서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새파란 눈동자가 끝도 없이 짙게 물들었다. 아까는 텅 빈 유리구슬 같더니만.

조금은 화가 난 듯한 기색에 아이네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다.

“후…….”

테고가 심호흡을 하며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 와중에도 아프지 않도록 슬쩍 잡은 손아귀에서 아이네의 손이 빠져나갔다.

혹시…….

‘완벽한 지도가 아니면 납득하지 못하는 타입인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면 테고가 기꺼이 마차 밖으로 몸을 던졌을 법한 생각이었다.

* * *

“…….”

그 뒤로 테고의 시선은 창밖으로 내내 붙박여 있었다. 당연하게도 매일 출근하며 보는 광경 따위가 특별할 리는 없다.

아이네에게서 필사적으로 멀리 떨어져 앉은 채 방어적으로 팔짱까지 단단하게 끼었다.

이내 한숨을 내쉬던 그가 급기야 이를 악물었다. 나이에 비해 소년처럼 여물지 않은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게 보일 정도로.

‘왜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테고는 그녀가 제게 스스럼없이 손을 뻗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는 게 아니었다. 처음엔 어리둥절하던 아이네는 금세 그에게 사과했다.

‘아, 미안해요. 아무 생각 없이 그만…….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물론, 저 사과에도 지적할 사항들은 여럿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뭘?

그리고 앞으로는 주의하겠다니, 뭘?

동시에 아이네가 배시시 웃으며 귓가를 긁적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이번에도 귀여웠다.

‘…….’

순간 그렇게 생각한 자신에게 열불이 터졌다.

제가 아이네에 대한 감정을 자각했다고 해서 그녀도 그리해 주길 원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테고는 어제 이후로 괜히 티를 내지 않도록 자신을 단속하는 중이었다.

제게 이렇게 어둡고 음험한 구석이 있는지 처음 알아서다.

생각보다 자신은 욕심이 꽤 많았다.

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꾹꾹 억눌러야겠지. 어디까지 드러내도 되는지 판단하는 것조차도 테고에겐 미지의 영역이었으니까.

섣불리 접근했다가 작은 요정처럼 포르르 날아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아마 곧 베룸으로 돌아가야 할 거 같기도 하고.’

‘제 집은 베룸 영지니까요.’

“하…….”

아이네가 했던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언저리가 조이듯 아팠다.

베룸은 공국에 준하는 자치권을 가진 곳이었다.

반역과 이적행위가 없는 이상 제국의 다른 귀족들처럼 황명으로 강제할 수도 없는.

그래서 더 애가 탔다. 만약 아이네가 베룸으로 돌아간 뒤, 가문의 문을 닫아건다면……?

이미 베룸은 중앙정치로 나오라는 역대 황제들의 명을 그렇게 방어한 적이 있었다.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혹시 그럴 경우를 대비해 방문할 핑계 하나는 마련해 두어야 했다. 그러니 자신은 공녀와 ‘친구’라는 관계라도 유지하려 노력해야 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미리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마음에 소극적으로 굴었는지 모르겠다. 여태 대단한 야심은 없을지언정 무언가를 결정할 때 망설여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공녀는 달라.’

무방비한 모습에 겁을 줘보려던 시도는 이미 실패로 돌아간 전적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자신을 남자로 봐달라는 의도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제 가슴팍에 겨우 찰 만큼 작은 몸으로 어찌나 당차게 저를 꾸짖던지.

‘생각해보면 난 그때도 공녀에게만큼은 무르게 굴고 있었군.’

테고는 커다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 그때부터인가.’

공녀가 자신을 남자로 보지 않은 것이?

아니, 감히 단언하건대. 그것보다 이전이다.

흑심을 품지 않는 것 같기에 스스럼없이 다가와도 밀어내지 않고 두고 보았다.

그랬는데, 그 실수가 지금 와서 이렇게 뼈아플 줄이야.

도대체 자신의 어떤 면모가 그녀로 하여금 제게서 남성성을 거세하게 만들어버린 걸까.

나이에 비해 앳된 얼굴?

남들보다 성장이 느렸던 터라 수염도 없이 매끈한 턱?

하지만 키도 꽤 큰 편이고, 어깨와 체구도 탄탄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그것도 아니면 북부인 특유의 흰 피부 때문일까. 곱상하게 생긴 이목구비와 한데 어우러져 다소 유약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테고가 난데없는 자기검열의 시간에 빠진 사이, 심심해진 아이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살짝 흐트러진 서류가 들어왔다.

아까 테고가 기겁을 하며 들썩거리는 바람에 가지런한 모양이 무너졌나 보다.

그래도 여태까진 친구라고 어느 정도의 접촉엔 별말이 없었는데…….

‘으응, 허벅지를 더듬는 건 좀 심했지.’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랬다.

원작에서 달리아 영애의 육탄공세에 테고가 얼마나 곤란해했는지 잊으면 안 된다, 아이네!

그녀가 몸을 일으켜 서류 뭉치에 손을 뻗자 다시금 테고의 몸이 움찔거렸다.

눈을 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역시 경계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려 아이네가 과장된 목소리를 내었다.

“와, 와아. 이거 전에 제가 알려준 분류법대로 한 거 맞죠? 우선순위 정해서 라벨 붙이는 거.”

“확실히 재분류하는 시간이 줄더군요.”

사안의 중요도와 시급함까지 세부적으로 나누어 분류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도 처음에 비해 대단한 발전이다.

먼 길을 오가느라 피곤했을 텐데 우리 여주님은 참 성실하기도 하지.

“이건 제가 다시 검토하고 처리해둘게요.”

물론 다시 살펴보고 제대로 나눠놓는 일까지 포함해서.

아직 그의 업무 능력을 온전히 믿기에는 종종 미숙한 부분이 보였다.

아이네의 작은 손이 테고 옆에 놓인 서류를 착착 끌어모았다. 그 손길을 테고의 시선이 멍하니 뒤따랐다.

그렇게 그대로 제 무릎으로 옮겨오려던 아이네가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테고 경은 금방 배우는 편이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아까는 실패한 칭찬 거리 만들기의 일환이었다. 실제로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배우는 속도가 빠르긴 했으니까.

“그렇습니까.”

아이네의 말에 테고의 목소리가 늘어지듯 낮게 억눌려 나왔다.

제게 야속하게 구는 것이 원망스럽다가도 이렇게 또 눈길이 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하얀 손에서 서류 끝에 붙은 라벨로, 그 근처를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으로…….

결국엔 또 그녀의 얼굴로 홀리듯 끌려들어 가고 만다.

허벅지를 만져진 이후로 잔뜩 힘이 들어간 몸의 근육들이 느슨해졌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처럼 팔짱을 끼고 버티던 방어적인 자세도 슬그머니 아래로 처졌다.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마차 안.

얕보이지 않으려 평소 힘을 주던 미간과 눈가도 조금은 편안하게 풀어두었다.

어차피 공녀는 알아보지도 못할 거고, 누군가 제 마음을 눈치채지도 못할 공간이다.

아이네더러 무방비하다고 탓했으나 정작 그녀에게 무방비하게 열린 건 테고 자신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약혼 관계 이상으로 너무 티를 내선 안 되는데.’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눈빛이 자꾸만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평소에는 제 어지러운 마음을 주변에 내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는데 말이다.

물론 그것은 테고의 생각이었을 뿐, 그는 마음을 자각하기 이전부터 자신이 주위에 얼마나 티를 내고 다녔는지 까맣게 몰랐다.

매주 칼릭이 담당하는 훈련 보고 시간은 그야말로 성토의 장이 된 지 오래였다.

“제2기사단이면 뭐 합니까. 맨날 출장에, 동원에……. 저는 이번에도 애인이랑 헤어졌지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단장님은 어떻게 그런 저희 앞에서 그렇게 본인 연애만 신경 쓰실 수 있답니까.”

훈련조장을 맡고 있는 상급 기사들의 울분에 찬 외침에 칼릭은 늘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이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아닐걸.”

“아니, 부단장! 더글라스가 저 꼴이 된 걸 보고도 그러십니까? 저놈은 이제 단장님 전용 시범 상대라고요.”

“그건……. 으음, 더글라스 경이 많이 힘들다고 하던가?”

칼릭의 말에 질문을 받은 기사 하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말입니다. 좀 애매하긴 합니다. 그 녀석이 ‘더글라스 꼴’이 되긴 했어도 실력은 확실히 늘었으니까요.”

“…….”

테고의 고통은 눈곱만큼도 모르는 단원들과 약간은 알고 있는 칼릭의 일상이었다.

그 잘난 단장님을 남자로도 생각하지 않는 존재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이런 사정은 조금도 모른 채 오늘도 제 감정과 싸우고 또 지기를 거듭하는 테고였다.

“어디 보자. 아! 찾았다.”

어느새 느슨하게 풀어진 테고와 시선을 마주하던 아이네가 손가방을 뒤적였다.

이윽고 그녀의 손바닥 위에 포장지에 곱게 싸인 동그란 무언가가 놓였다.

“으음, 있죠. 이번에 영지에서 오징어 캔디가 많이 조달됐는데, 하나…… 드실래요?”

그러고는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이걸로 아까 허벅지 만진 건 좀 잊어줬으면 좋겠는데.

달리아 영애를 대신하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니. 생각보다 참으로 어려운 역할이었다.

하지만 의도한 바는 아니었어도 문서업무로나마 테고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원작에선 전적으로 부단장인 칼릭에게 의지하던 일이었는데 말이지.

“…….”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던 테고는 아이네의 손바닥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황녀에게는 손수 입에 넣어주었으면서…….’

무심코 생각하던 테고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저도 모르게 질투를 했다는 생각에 눈매가 일그러졌다.

올해 겨우 여덟 살이 되는 황녀다.

제 키의 반밖에 오지 않는 어린 황녀와 비교하다니, 어쩌면 저는 미친 게 아닐까.

마음을 자각한 지 이제 겨우 이틀 차.

그나마 어떤 감정인지 몰라 답답하기만 하던 느낌은 사라졌다.

하지만 제 감정을 인정한 뒤에 따라오는 여파도 그만큼 거셌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괴롭군.’

연애는커녕 여자를 마음에 들이는 것조차 처음인 청년에게는 모든 게 너무 고난도였다.

대신 그에게는 남다른 끈기와 인내심이 있었다.

덕분에 겉으로는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바야흐로 한 사람만 빼고 모두가 아는 짝사랑의 서막이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춰 섰다. 서류뭉치와 손가방을 한꺼번에 껴안은 아이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집무실에 가져다 놓을게요. 폐하께 바로 다녀오실 거죠? 저번 주부터 밀린 결재가 있는데, 오늘은 꼭 처리해주셔야 해요.”

품에 안긴 서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테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며칠 함께 업무를 보고 또 아주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당연하게 자신의 부재를 채워주고 앞으로의 업무와 일상도 함께한다고 말해준다.

그건 어쩐지 테고에게 더없이 기꺼운 기분이 들게 했다.

‘다녀오시라니. 꼭…….’

짝사랑의 시작부터 망상만 폭주하고 있었다.

결국 테고는 시선을 피하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금방, 금방 다녀올 테니까…….”

“저기, 일단은 문부터 좀 열어주세요.”

“…….”

원작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이 그와 아이네 사이에 존재하는 이상 당연한 마무리였다.

* * *

“알겠습니다, 공녀님. 그러면 이 보고서는 바로 전달하도록 하지요.”

어디서나 상사에게 혹사당할 운명의 이름인 로버트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겨우 며칠 만인데 그는 한층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흰머리도 조금 더 늘어난 것 같고.

‘폐하와 동년배라고 들은 거 같은데…….’

아이네의 시선이 주름진 그의 눈가로 가 닿자 로버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 리테루온 공작의 보고서는 베룸 공자와 공녀께서 도움을 주셨다지요? 공녀께서도 알현을 청하신다고 여쭐까요?”

그의 말에 아이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이만 물러가야 할 것 같네요.”

황제에게 걸리면 또 무언가 홀린 듯이 결제해야 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약장수, 아니, 사기꾼, 아니, 이게 아니라! 뭐가 되었든 마주할 기회를 안 만드는 게 상책이다.

본궁의 알현실 앞 복도를 종종걸음으로 걸어 나오며 아이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원작을 알아도 소용이 없는 거 같은 이 기분은 뭐지.

어제오늘 유난히 상태가 좀 이상해 보이던 테고는 폐하께 드릴 보고서마저 두고 가질 않나.

서류 뭉치를 빤히 보던 게 무색하게 다른 생각이라도 했던 걸까.

정신없이 전달하러 오느라, 다른 서류까지 죄다 들고 온 자신도 할 말은 없지만.

‘그러고 보니 본궁은 정말 구조가 복잡하구나.’

황성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라 그런지 이어지는 갈림길도 많았다.

거기에 관료들도 드나드는 곳이니만큼 화려하고 개성적인 인테리어보다는 복도마다 획일적인 카펫으로…….

“어?”

계단을 내려가 그대로 본궁을 빠져나가려던 아이네의 발걸음이 멎었다. 기묘한 위화감이 뒷머리를 쭈뼛 몰아세운 탓이다.

그러니까, 본궁을 이렇게 복잡하게 설정해놓은 이유가…….

‘원작에서 여주의 방향치 에피소드 때문인데.’

그저 두 번 지나간 것만으로도 완벽한 지도를 그려내는 사람이 방향치일 수가 있나?

지도에서는 방위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베룸 영지에서도 알려주지 않은 온실을 찾아오기도 했었다.

그때는 용케 찾아냈구나 생각하고 넘겼는데…….

이제 보니 방향치는 고사하고 길눈도 아주 훤한 사람 같잖아?

아이네는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그때, 나긋하면서 매혹적인 목소리가 복도 너머로 들려왔다.

“공녀님?”

“아…….”

달리아 영애였다. 아직 출근하기에 조금 이른 시간인데도 그녀는 완벽한 상태였다.

장미향 그윽한 향유를 발라 윤기가 흐르는 고수머리에, 단정하지만 달리아의 피부색과 잘 어울리는 간단한 원피스까지.

“어?”

그렇게 달리아를 쭉 훑어보는 아이네의 눈에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이 띄었다.

“아아, 이걸 보고 계셨나요?”

그녀가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는 장신구를 떼어내어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다고 한 게…….

“혹시 이거 내 데뷔탕트 때 그 리본이에요?”

“예, 불쾌……하셨나요?”

아이네가 데뷔탕트 날 가슴에 달고 왔던 크고 풍성한 리본과 가운데에 박힌 터키석.

크기만 줄어들었을 뿐, 똑같은 모양이었다.

아니, 근데 이걸 왜 굳이 작게 만들어서 허리에 차고 다니지?

아이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달리아의 얼굴이 조금 빨갛게 달아올랐다.

“절대, 절대 공녀님을 따라 하려거나 그런 게 아니에요. 저도 선물 받은 거라……. 요즘 부띠끄에서 이 장식이 유행하고 있거든요.”

“이게 유행한다고요?”

아이네가 손에 든 터키석과 크게 뜨인 그녀의 눈동자 색이 똑 닮은 빛을 내었다.

* * *

뒤늦게야 인사를 주고받은 둘은 황궁 뒤뜰의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와아!”

“공녀님께서도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비어있는 벤치 앞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탁 트인 정원이 펼쳐졌다.

점점 여름이 다가와서인지 각양각색의 꽃과 풀, 나무가 가장 아름다울 시기였다.

본궁의 재무부에서 일한다더니 벌써 이런 근사한 곳을 찾아낸 모양이다.

‘외성엔 그 작은 화단이랑 연무장 말고는 오로지 성벽뿐인데!’

달리아가 먼저 손수건을 꺼내어 벤치 위에 깔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에 푹 빠진 아이네를 불렀다.

“공녀님, 여기 앉아서 보세요.”

“네, 네에…….”

몇 마디 나눠본 달리아 영애는 원작과도, 심지어 첫인상과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손사래를 치며 얼굴도 붉히지 않았나?

“영애와 이렇게 이야기해보는 건 처음이네요.”

“그러게요, 당분간은 제게 좋은 일만 있으려나 봐요.”

어쩜,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할까.

가슴 위에 두 손을 얹고 살포시 눈을 감은 달리아는 배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원작에 묘사된 악녀와 외모를 제외하곤 닮은 점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그건 아이네의 심장이 기분 좋게 도곤도곤 뛸 정도로 설레는 광경이었다. 달리아의 미모가 특출해서라는 이유를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지켜냈다는 데에 조금, 뿌듯해졌다.

‘아, 역시 테고도 그렇고 이런 미인들은 제국 차원에서 보호해야 해!’

혹시, 고도의 연막작전은 아니겠지?

일말의 의문을 품고 아이네는 그녀를 살짝 떠보기로 했다.

“그, 데뷔탕트 때 말이에요. 폐하께서 제게 티아라를 주신 건…….”

차마 원작의 당신 약혼자를 빼앗았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사교계 이야기로 운을 떼었다.

처음부터 제게 잘해준 사람을 자꾸 의심하는 건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원작에서 너무 강력한 악녀 역할이어서 말이지.’

아직도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누르지 못한 아이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걸 본 달리아는 어떤 말을 꺼내려는지 금방 알아챘다.

“혹시, 저에게서 사교계를 뺏었다고 자책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아니, 그러니까……. 네, 속상하지 않나요?”

작위 계승도, 공직에 진출하는 길도 막혀버린 영애와 귀부인들에게 유일하게 열린 곳이 사교계였다.

물론 지위와 혈통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정점에 오를 수 없는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달리아가 후작 영애라는 신분에 기대지 않고 사교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노력해왔음을 잘 알았다.

사교계에서는 통달한 예법과 박학다식한 지적 능력은 물론이고, 선물을 보내고 답례하는 방법까지도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귀부인들도 하나쯤은 소홀히 하기 마련인 일을 아직 미성년자인 달리아는 완벽하게 해냈다.

그렇게 얻은 정점의 자리였다.

그런데 그걸 갑자기 막 데뷔한 자신이 황제의 권위를 빌려 채간 셈이니.

‘모로 보아도 내가 악녀인데……?’

생각할수록 아이네의 얼굴은 점점 흙빛이 되어갔다.

그걸 본 달리아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뇨! 저는 오히려 공녀님께 죄송해요.”

“왜……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네를 보고 달리아가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눈앞에 펼쳐진 정원보다 더 먼 곳에 시선을 두며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한테 맞지 않는 옷이었어요. 진심으로 원한 적도 없고요.”

달리아의 옆얼굴로 쓸쓸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제게는 그 길밖에 없는 줄 알았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저는 가치가 없었으니까요.”

“아니에요! 누가 그래요? 사교계의 꽃이 아닌 영애는 가치가 없다고?”

잔뜩 흥분한 채로 아이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손수건이 바닥으로 밀려 떨어졌다. 달리아가 손수건을 주워 톡톡 털어서 다시 벤치 위로 올려두었다.

“그러게요. 그래서 공녀님께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요.”

“감사하다고요?”

설마, 본인의 운명이 저로 인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챈 건 아니지?

아이네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하게 흔들렸다.

잠시 짧게 목소리를 가다듬은 달리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공녀님이 아니셨다면 제가 황궁에서 임시직으로라도 일할 수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아, 깜짝이야.

그래서 데뷔탕트 때도 그렇고 눈만 마주치면 웃어준 거였구나.

“으음, 그건……. 저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그저 테고의 약혼자가 아니게 된 달리아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으로 운명이 바뀐 달리아가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지 깊이 관심 두지 않았다.

“그래도 제가 도움을 받은 건 바뀌지 않지요. 그리고……. 아, 아니에요.”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사라질 듯 달리아가 웃었다.

겉으로 내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귀여운 걸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공녀님보다 어린 내가 건방지게 그런 말을 하면 불쾌해하시겠지.’

달리아는 실수를 감추고자, 아이네에게 감사를 표하던 말을 얼른 이었다.

“제 가족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얻기 힘든 자리였지요. 제가 일을 하도록 내버려둘 사람들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공녀님께 무척 감사하고 있어요.”

“아뇨! 감사할 일까지는…….”

오히려 아이네가 안절부절못하며 입만 달싹였다.

하, 그 인간들이 정말.

차마 달리아의 가족들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이미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티를 낼 수도 없으니.

그래서 달리아가 그녀를 보는 시선은 미처 알아차릴 여유가 없었다.

‘하여간 원작에서건, 여기서건 분노유발자들이야.’

원작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며 씩씩거리느라 아이네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가부장적이기만 할 뿐, 무능력하고 부패한 달리아의 아버지와 오빠.

거기에 에펜베르크의 보물이라는 별칭답게 기적적으로 아름답게 태어난 여자아이.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 소녀가 되고, 곧 성년을 맞이할 그녀가 보고 들었을 일들은 뻔했다.

‘네 가치는 오로지 그 잘난 얼굴과 몸뚱이로 잘난 남자를 낚는 일이야. 그리고 여태 널 키워준 우리 집안을 다시 부흥시켜야지.’

원작에 나왔던 그녀의 회상 장면이 떠오르자 아이네가 부들부들 떨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나중에 저지른 악한 일들을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진짜 악역은 그놈들이잖아?’

새빨개진 얼굴로 화를 참는 아이네를 보며 달리아는 소녀처럼 웃었다. 그리고 결국 생각만 하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죄송, 흡, 죄송해요. 하지만 정말 너무 귀여우셔서……푸흣. 아앗, 죄송해요.”

‘나보고 귀엽다고……?’

아이네는 달리아가 자신보다 한 살 어리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유교걸인 아이네는 은근히 나이에 민감했다.

이건 굴욕이다.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조차 귀엽다는 소리를 듣다니.

‘내가 키만 조금 더 컸어도!’

그리하여 아이네는 오늘의 이 치욕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리멤버, 달리아.

* * *

“제2기사단 일은 많이 바쁘신가요?”

“무기 반입 자료 정리랑 식자재 지출 계산하는 일이 제일 많아요.”

과연 기사들의 집단이라 그런가. 식비 지출이 어마어마했다. 특히, 거의 매 끼니마다 고기를 제공해야 했으니까.

‘그놈의 근손실, 근손실!’

아이네는 그동안 예산 담당이었던 칼릭의 머리 색이 왜 바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재무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야근도 자주 한다고 하던데.”

“아아, 장부 정리 말씀이시군요.”

일 이야기를 시작하자 달리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아이네는 이 얼굴을 어디선가 보았다고 생각했다.

달리아 영애, 나딘이랑 같은 과였어?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굳이 더 듣지 않아도 달리아가 어디서 제 자아를 찾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산과 자본, 부채를 기입해서 표를 만드는 거예요. 이러면 한눈에 숫자들을 볼 수 있는 거 아시죠? 그래서…….”

아니요, 모르겠는데요. 저 여기 오기 전에는 문과여서요.

그때, 아이네를 구원해줄 또 다른 인물이 등장했다.

“헉, 헉! 베, 베헤, 베헤룸, 공녀어, 허억, 여기에, 있, 흐억, 다고, 들었, 들었어요.”

가녀린 몸체와 하나가 된 듯한 오렌지빛 금발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한참 숨을 고르며 벤치에 몸을 기댄 티아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달리아 영애의 주머니는 아공간과 이어지기라도 하는지 물통까지 들어있었다.

“후, 하아…….”

그리고 티아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던 달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피오의 영광된 이름을…….”

“아뇨, 괜찮아요. 영애.”

어느새 또랑또랑해진 목소리로 그녀의 인사를 제지한 티아가 선언했다.

“이, 이제 두 영애는 내게 그런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아.”

마지막에는 눈치를 보느라 말이 조금 느려졌다.

하지만 황녀의 위엄은 적당히 잘 실려 있었다.

“그런데 황녀님. 여기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아이네가 말을 걸어주자 티아는 신이 나서 볼을 씰룩였다.

“본녀가 가끔 본궁을 탐색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나가던 시종들이 하는 말이, 공녀가 본궁엘 들렀다고 하지 않겠어요!”

“엑? 그럼 여길 찾으실 때까지 계속 돌아다니신 거예요?”

아이네와 달리아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목을 통해서 이곳까지 왔다.

그러니 어느 정도 그녀들의 동선을 따라잡았다 해도 몇몇 장소는 직접 뒤졌을 테다.

“뭐어. 세, 세 군데? 아니, 두 군데? 얼마 걸리지 않았어요. 황궁은 제 집이니까요.”

어린아이 몸으로 그 넓은 황궁을 헤매고 다녔다니…….

아이네와 달리아의 얼굴에 짠하다는 기색이 어렸다.

“여기, 이쪽으로 조금 더 편하게 누우실래요?”

“이런 곳에서 눕는 건 어린아이들이나……!”

티아는 조금 발끈해서 씩씩거렸다.

“그럼, 제게 조금 기대실래요?”

“으음. 그건, 그건…….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황녀는 아이네의 이번 제안만큼은 거절하지 않았다.

* * *

어색하게 쭈뼛거리던 모습과 달리 티아는 몸을 기대자마자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졸았다.

그리고 아이네는 처음 본궁에 온 목적이자 대화하느라 벤치에 놓아두었던 보고서에 손을 뻗었다.

이미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보고서라 색색의 라벨이 달려있었다.

그걸 본 문서 귀신, 아니, 달리아 영애가 관심을 보였다.

“이건, 왜 붙이신 건가요?”

“아! 중요도에 따라 색깔을 다르게 분류한 건데요. 우선 빨간색은 이렇게……. 그리고 중요하면서 시급한 사안은 이런 식으로.”

이번엔 구체적인 숫자 맞추기보다는 업무 분장이나 경영 요소에 강한 아이네가 신이 났다. 그리고 그녀의 설명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듣던 달리아가 감탄했다.

“그렇군요, 이런 방법도 있군요.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이렇게 정리해두면 편리하겠어요.”

“공작저에 라벨이 많이 있는데 내일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아이네의 말에 달리아의 입가가 조금 굳었다.

“글쎄요, 재무부 선배님들이 과연 이 방식을 좋아하실지.”

여태 공직에는 진출할 수 없었던 영애인 데다,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이었다.

황명이라는 명분과 후작 영애라는 신분 때문에 대놓고 업신여기진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편견에 갇혀 어린 영애의 의견을 제대로 들어주진 않는 조직이기도 했다. 게다가 요즘 들어 조금 더 버거운 텃세가 생긴 듯도 하고.

“그, 그럼 영애 혼자 쓰시거나 후작가에서 사용하시면…….”

“앗, 그러면 라벨이 너무 아까운걸요. 어차피 한 번 보면 대강 다 기억해서 저에겐 별로 필요치 않아요.”

볼수록 나딘이었다. 맨 처음 저 분류 시스템을 도입했을 때 나딘이 했던 말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아이네의 마음이 싸늘해졌다.

“우리 집 누구와 같은 말을 하시네요.”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겐 일종의 욕이었지만 아마 달리아 영애는 모르겠지.

“베룸 공자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달리아의 말에 나른하게 기대있던 티아도 번쩍 몸을 일으켰다.

“공녀의 오라버니?”

다갈색 눈동자와 페리도트빛 눈동자가 동시에 아이네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나딘이…… 왜요?”

그러자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그 공자님도 공녀와 함께 업무를 맡는다고 했죠?”

“그분도 요정인가요?”

서로의 관심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질문이었다.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누가 한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비록 나이는 달리아가 더 많지만 황녀의 질문에 먼저 답을 해주었다.

“일단 저랑 머리카락 색이랑 눈 색이 비슷하긴 한데, 요정은 아니에요. 그리고 저도 요정이 아니랍니다, 황녀님.”

남들이 보기에 닮았다는 말은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걸 스스로의 입으로 말한다는 것조차 그들 남매에겐 모욕이었다.

그 말에 무언가 반박하려는 듯 티아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나 곧 입술을 앙다물고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다음은 달리아의 차례였다.

“으음, 제가 이런 말은 안 드리고 싶었는데……. 영애와 아주 잘 맞을 거 같긴 하네요.”

“아, 아하.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달리아 영애는 데뷔탕트 때, 나딘을 가까이서 보았을 테다.

아이네의 말에 조금씩 수줍은 기색이 다갈색 눈동자에 스며들려는 찰나, 티아가 소리쳤다.

“그 요정 오라버니는 그럼 황궁엔 안 오나요?”

정말, 정말로 요정에 내가 아는 것 말고 다른 뜻이 없는 거 맞겠지?

“요정이 아니에요……. 그냥 저택에서 일만 하느라 아마 연회가 아니면 황궁엔 오지 않을 거예요.”

말하고 나서 생각하니 좀 이상했다. 사실 누구보다 황궁 관료로 일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나딘 아닌가.

전형적인 워커홀릭이라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할 텐데.

‘왜 황성에서 일해보겠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했지?’

그리고 아이네의 대답은 또다시 엉뚱한 곳에서 불씨를 피웠다.

“저어, 공녀님. 라벨……. 제가 직접 받으러 가도 될까요?”

아니야, 아니라고! 다시 생각해 봐, 달리아 영애.

그 나딘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

“아아, 부럽군요. 본녀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을 때까지는 외출이 자유롭지 아니하여서 말이에요.”

황녀님, 당신도 그만 하세요. 어린이는 그런 데에 관심 갖는 거 아니에요.

그 나딘은 아주 해로운 나딘이야!

아이네의 표정이 숨길 수 없이 썩어들어갔다.

* * *

하지만 두 사람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나딘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결국 나딘에 대한 관심을 차단하기 위해 그녀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아까 마차에서 테고에게 건넨 것 말고도 오징어 캔디가 더 남았단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거라도 드셔보실래요?”

아이네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러자 이미 맛을 본 적 있는 황녀가 가장 먼저 반색했다.

“와! 오징어 캔디!”

“오징어…… 캔디? 그런 것도 있나요?”

일단 드셔보세요, 드셔보시면 압니다! 아니, 나는 모르겠지만…….

껍질을 까서 황녀와 달리아 영애의 입 안에 손수 넣어주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굉장했다.

“오늘도 요정의 맛이어요!”

“마, 맛있네요.”

이렇게 두 사람은 책 속의 인물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이네의 작전은 반만 성공한 셈이었다.

나딘을 떠올리지 않게 하려던 오징어 캔디는 달리아에게서 분노와 절망을 지워냈다. 십 년도 넘게 그녀의 안에서 억눌리기만 했던 해묵은 감정이었다.

한순간, 깨끗하게 사라져버린 감정에 더 당황한 건 달리아 자신이었다. 여태 제 의지라고만 생각했던 원망과 미움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시시각각 달리아의 몸과 마음을 집어삼키려 들던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진 곳엔 새로운 감정이 자리를 잡았다.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 그리고 약간의 호감.

이번에야말로 오롯이 그녀의 의지대로였다.

그렇게 달리아는 이런 오징어 캔디를 생산하는 영지의, 자신과 비슷한 취미를 가진 공자를 점점 더 궁금해하게 됐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게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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