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방심은 순조로운 책빙의의 적
“참, 황녀 전하의 탄신일이 얼마 남지 않았죠?”
잠시 캔디 맛을 즐기다가, 달리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쪽 볼이 볼록한 채 행복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는 두 소녀를 바라보던 아이네도 그제야 떠올렸다.
이제 곧 곰인형 공정은 마무리에 들어가는 참이다.
과연, 황녀가 좋아해줄지는 미지수이지만.
달리아의 말을 들은 티아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모으고는 눈치를 보았다.
“혹시, 두 영애에게 초대장을 보내면 본녀의 초대에 응해줄 건가요?”
“…….”
지난번에 보았을 때도 그랬다. 황녀는 지나칠 정도로 남의 눈치에 민감했다.
그래서인지 이미 거절을 예상한 표정으로 미리 스스로를 방어하려 들었다.
“…….”
달리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이네를 돌아보았다.
나란한 침묵을 견디다 못한 황녀의 초록색 눈동자로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오, 오지 않아도 본녀는 이해해요. 궁정 일은 바쁘고, 또, 또…….”
오라버니인 아르비드가 어떤 표정과 어떤 말로 티아를 거절하곤 했는지가 그녀의 말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속으로 말을 고르고, 결국 내뱉는 말은 업무를 보느라 바쁘단 말이었을 테다.
그렇게 거절에 익숙해진 티아였다. 지금까지는 잘 참아왔는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눈물이 차오르는 걸 참기가 어려웠다.
어린아이의 몸이란 생리적인 반응을 숨기기에 너무나 미숙하고 연약했다.
그때 아이네와 달리아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티아의 손을 각각 붙잡았다.
“아니에요, 황녀님. 꼭 갈게요! 선물도 이미 준비했는걸요.”
“맞아요, 황녀 전하. 제가 아는 다른 영애들도 데리고 갈까요?”
다행히 눈물방울을 똑 떨구기 직전이었다. 황녀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걸렸다.
“정말요?”
“그럼요. 다른 영애들도 황녀님과 친해지고 싶어 할 거예요.”
“맞아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황녀님이신걸요?”
달리아와 아이네의 따스한 말에 티아의 눈물은 쏙 들어가 버린 지 오래였다.
‘다음엔 요정님이랑 장미 영애에게 친구 하자고 말해봐야지.’
달리아는 자기도 모르는 새 티아에게 ‘장미 영애’가 되어있었다.
* * *
그렇게 황녀에게 오징어 캔디를 몇 개쯤 더 집어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녀를 찾는 시녀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럼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내겠어요.”
“예,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황녀님.”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황녀님.”
단풍잎같이 작달막한 손을 팔랑대며 티아가 사라지자 아이네와 달리아도 몸을 일으켰다.
“예상외로 휴식시간이 너무 길어져 버렸네요. 이제 돌아가지 않으면 선배님들이 화를 내실지도요.”
“앗, 그렇군요. 이미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난 것 같은데…….”
괜찮다며 빙긋 웃던 달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공녀님께선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녀의 말에 아이네가 품 안에 껴안고 있는 서류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테고 경이 중요한 서류를 빠뜨려서 알현실에 전해주느라요.”
테고의 이름이 나오자 달리아의 얼굴이 조금 마뜩잖다는 듯 굳어졌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신랑감이라는 건 잘 알지만…….
이 다정하고 따스한 봄 햇살 같은 공녀에게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리테루온 영지는 너무나 척박한 곳이 아닌가.
제 가문의 영지인 에펜베르크 영지와 붙어있기에 달리아 역시 잘 알았다.
“리테루온 공작님 말씀이시군요. 그분도 참 바쁘시네요. 반란군 토벌을 끝내고 돌아오신 후 한 번도 쉬질 못하시고…….”
무심코 듣던 아이네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방금 뭔가 이상한 단어를 들은 듯했다.
“잠깐만요. 반란군 토벌이…… 끝났다고요? 잠시 중단된 게 아니라요?”
자신이 무어라 말했는지 속으로 되짚어보던 달리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3년에 걸친 그 진압 작전이요. 반란군 수뇌부까지 전부 소탕했다던……. 그래서 올해엔 사냥대회가 가장 깊고 울창한 동쪽 숲에서 열린 거니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안전문제 때문에 동쪽 숲은 무리였을 거예요.”
그 순간, 아이네의 팔 안에 있던 서류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뭐야, 동쪽 숲?
몰라! 그냥 원작처럼 사냥대회가 열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 * *
아이네는 달리아의 말을 듣고 나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는지 전혀 의식하질 못했다.
‘공녀님? 괜찮으세요? 기사단 건물까지 바래다 드릴까요?’
‘아니, 아니에요. 잠깐 손이 미끄러졌어요.’
놀라며 서류를 다시 주워준 달리아 영애는 그대로 돌려보냈다. 더 이상 업무 복귀가 늦어지면 안 될 테니까.
서류 뭉치를 꽉 껴안은 아이네의 두 팔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원작과 다르게 아르비드가 사냥대회 점검을 꼼꼼하게 한다 싶었다. 그리고 테고가 반란군 추적이 아니라 사냥대회 준비에 매달릴 때, 이상하단 생각은 했다.
‘그래, 생각해보면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테고 경은 반란군 진압 작전을 다녀오자마자 베룸 영지로 왔다고 했어.’
그때 진압 작전이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텐데.
당시의 아이네에게 중요한 건 드디어 원작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자신이 이 소설에 책빙의하게 되었는지 골몰하고 있었다.
그 탓에 3년간의 그 작전에서 반란군 수뇌부까지 전부 소탕해버렸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테고와 만난 시점이 원작 시작 전이라 너무 안심했어. 이런 중대한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다니.’
하지만 이건 꼭 아이네 자신의 실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지금 황제가 반정으로 황위를 침탈했기에, 긴 세월 동안 크고 작은 반란이 여러 번 일어났다.
그때마다 진압 작전에 나섰다가도 전부 뿌리 뽑지 못하고 돌아오기가 부지기수였고.
그러다 원작이 시작된 후 연합왕국이 일으킨 전쟁과 동시에 터진 반란이 소설 속 최대 위기였다.
반란군 수뇌부가 끈질기게 살아남아 기어이 황성까지 밀고 들어온 위협적인 사건.
그 위기가 있어야 원작의 여주 테고가 남주인 대공과 자꾸 엮이고, 소소한 위기를 해결하며 사랑에 빠진다.
‘게다가 테고의 정체는 반란을 이끈 ‘그’ 최종 악역 때문에 황궁에서 밝혀진단 말야!’
그러니 원작이 시작하기도 전에 반란군이 소탕될 거라고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을까?
이번 출정도 여러 번 반복된 진압 작전 중 하나일 거라고만 생각했지.
그들이 황성으로 침입하는 그 위기가 없으면 전개가 도대체 어떻게…….
“어?”
정처 없이 떠돌던 걸음이 다시 한번 멎었다. 그리고 아이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최종 악역 외에 죽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황제 폐하.’
연합왕국의 국경 침입으로 테고와 케이어드, 아르비드까지 자리를 비운 그때.
황제는 그 틈을 타서 습격한 반란군에게 살해당한다.
이제서야 떠오른 원작 속 사건에 아이네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럼, 살았어야 할 사람이 달리아가 아니라 황제 폐하라는 거야?’
달리아 영애는 국외로 추방되었기 때문에 그 후에 죽었으리라고 추측한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확실히 죽는다.
그러니 ‘살았어야 할 사람’이 누구일지 고민하던 때 달리아 영애보다도 황제가 더 먼저 떠올랐어야 할 텐데.
왜 여태 알아채지 못했을까.
‘황제가 중요한 등장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황제와 만났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
그녀가 황제의 죽음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황제 폐하는 처음부터 ‘기억’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다른 등장인물들과 다르게!
그리고 아이네 자신도 황제와 관련된 원작 속 사실을 생각해보려 애쓰지 않았다. 황제를 처음 알현했을 때는 이미 테고와 달리아, 아르비드를 만나 ‘기억’을 본 이후였다.
그 때문에 무의식중에 제가 신경 써야 하는 인물이라면 같은 경험을 하리라 믿었던 거다. 원작을 떠올리게 해준 ‘기억’이라는 장치에 너무 의존하는 바람에!
하지만 생각해보면 비중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황녀나 칼릭 경도 ‘기억’이 읽혔잖아?’
아이네의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아직은 모른다. 어떤 기준으로 ‘기억’이 떠오르는지 확신할 만한 증거는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 만약에.
원작에서 죽어버린 인물의 기억만 읽히지 않는 거라면, 그래서 황제 폐하의 기억이 보이지 않았던 거라면…….
‘난 어떻게 해야 되지?’
그럼 기억이 떠올랐던 달리아 영애는 국외추방은 당했어도 결국 죽지는 않았던 걸까.
생각을 거듭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아이네는 한계가 왔단 걸 깨달았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제가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단 것도 그제야 알았다.
“흐, 헉!”
안 그래도 체력이 부족한 몸으로 너무 빠르게 달린 탓이다.
맨 처음 테고를 만났을 때처럼 갑작스러운 현기증이 그녀를 덮쳤다.
가느다란 몸이 속절없이 바닥을 향해 추락하려는 순간이었다.
“읏차.”
그리고 이번에도 누군가가 아이네의 몸이 그대로 쓰러지는 걸 두고 보지 않았다.
“이봐, 정신 차려! 아이네!”
남자가 막 그녀의 뺨이라도 쳐야 하고 고민하는 사이, 아이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 깜짝이야. 갑자기 눈을 뜨면 어떡하나?”
“어어……. 당신, 케이어드, 대공.”
아이네의 말에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전히 건방지고, 부주의하군. 지난번에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날 그렇게 불러?”
서서히 호흡을 안정시켜 나가는 그녀의 시야에 언젠가의 그날처럼 누군가의 얼굴 윤곽이 뚜렷해졌다.
밤하늘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떼어서 칠하기라도 한 듯 새카만 머리카락.
자수정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최근 아이네의 순조로운 책빙의 생활을 어지럽히는 주범인 원작 남주, 케이어드 대공이었다.
* * *
완전히 정신을 차린 아이네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어색했다.
심지어 기억상실증이든, 부분 기억상실증이든 모른 척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왜 황후궁 정원까지 걸어온 걸까. 여긴 제2기사단으로 가는 방향과 완전히 반대인데.
“왜, 여기에 계세요?”
“황궁이 공녀의 것인가? 폐하께서 부르시니 오는 거지.”
“…….”
테고도 처음에는 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보단 아니었다.
아이네는 말꼬리를 잡으며 시비 거는 타입보다 차라리 과묵한 게 얼마나 바람직한지 절실히 깨닫는 중이었다.
‘앞으로 테고 경한테 잘해줘야지.’
역시 사람은 더한 놈을 만나봐야 이미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는 법이다.
“아.”
그러고 보니, 테고 생각을 하다가 잠시 정신을 잃었다. 정확히는 테고에서 황제 폐하의 죽음까지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
여전히 평소의 맑은 정신으로는 돌아오지 못한 아이네가 대뜸 물었다.
“혹시 말이에요. 반란군 진압 작전에 대해 알아요?”
케이어드는 한심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맥락 없이 던지기엔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것도 아직 오래전의 반정을 기억하는 황궁에서는 더더욱.
“너는…… 아이네보다도 생각이 없군.”
그리고 아이네는 그의 말에 바짝 얼어붙었다. 누가 들어도 자신을 ‘아이네’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케이어드가 그녀를 정원의 더 깊은 곳으로 이끄는데도 그저 끌려가기만 했다.
마침내 사방 어느 곳이든 누군가 숨어 들을 수 없는 안쪽까지 들어왔다. 그러고 나서야 케이어드가 아이네의 팔을 놓아주었다.
“아이네, 아니, 공녀. 그래, 네가 그걸 왜 궁금해하지?”
케이어드의 목소리가 자못 날카로웠다. 추궁하듯 물어오는 음성에 아이네는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별 건 아니고……. 반란군이 완전히 소탕되었는지 아닌지만 말해주세요.”
그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의향을 살피려는 듯하던 케이어드가 툭 내뱉었다.
“몰라.”
“왜요? 대공 각하이시잖아요.”
케이어드가 잠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더욱 은밀하고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남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건 이미 알겠지?”
“네, 이번에 새로 놓은 도로를 지나갔더라고요.”
아이네는 그의 망설임 가득한 입술을 끈질기게 응시했다.
“내가 황명을 받고 간 곳은……. 북쪽이었어. 테르미누스 산맥 근처 말이야.”
“그럼, 혹시……?”
아까까지만 해도 엉망진창으로 뜯겨 있던 머릿속이 다시 희망으로 덕지덕지 이어졌다.
“바로 얼마 전까지 반란군이 모두 괴멸했다고 알려졌던 건 맞아. 하지만 반란군 수뇌부가 전부 죽었는지는 불확실해.”
그렇지? 역시 그런 거지?
아이네의 목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건 정말 중요한 전개 내용이었다.
“말 그대로 ‘모르는’ 상황인 거야. 하지만 수뇌부 한둘 살아남았다고 해서 단기간에 그들이 세력을 다시 모으긴 쉽지 않아.”
“휴. 다행, 다행이다.”
그동안 숨을 참고 있었나 보다.
케이어드의 말을 듣자마자 한꺼번에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반란군의 규모가 얼마나 되었는지 그런 건 아이네도 모른다.
다만 ‘반란군’이라는 존재와 최종 악역 한 사람만이 서술되었을 뿐이니까.
쓰러지는 와중에도 꼭 쥐고 있었는지 꾸깃꾸깃해진 서류뭉치가 그녀의 품 안에서 더욱 구겨졌다.
그것을 흘긋 바라본 케이어드가 또다시 폭탄 발언을 쏟아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군. 이런 기밀사항을 왜 아무것도 아닌 네게 술술 이야기하는지 궁금해하지도 않나?”
날카로운 지적에 아이네의 몸이 움찔 굳었다.
“그리고…….”
그러나 뭐라 변명할 틈도 없이 케이어드의 입에서 더 강력한 폭탄이 터졌다.
“왜 다행이지? 그게 네가 본 ‘기억’에 있기라도 하나? 혹시 내가 네 약혼자와 결혼이라도 한다고 말하려고?”
“……!”
이 남자,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아이네의 하늘빛 눈동자가 크게 뜨이며 잘게 흔들렸다.
“그래, 이번에 네가 본 내 ‘기억’은 어때? 8년이 지나도 난 남색하는 취미는 안 생기던데.”
“무슨, 무슨 소리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딱 잡아떼야 했다. 초조함에 아이네의 입 안이 꺼끌꺼끌하게 말라왔다.
입을 꾹 다무는 데에 집중한 나머지 불안한 눈빛은 전혀 감추지 못했다.
그런 아이네를 보고 픽 웃음을 흘린 케이어드가 덧붙여 말했다.
“너 같은 가짜, 아니, 네 정체가 뭐야?”
케이어드가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짜라고 하기엔 자신의 눈으로 그 ‘이능’이란 걸 똑똑히 확인했다.
열한 살의 아이네와 지금 눈앞의 여자가 둘 다 진짜일 수도 있는 건가?
‘뭐가 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얼빠진 채로 서 있는 아이네를 내려다보며 케이어드는 쏘아붙였다.
“아무튼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원래의 아이네와 같은 사람이 아니란 것만은 알겠어.”
“대체 무슨 말인지……. 제가 가짜라뇨?”
“아닌가? 그럼 8년 전에 만난 일은 왜 기억도 못 하고 있지? 네가 진짜라면 잊었을 리가 없을 텐데.”
“그건, 어렸을 때고……. 치료받느라 기억이 드문드문할 수도 있잖아요! 즈, 증거 있어요?”
이를 악물고 끝까지 우기는 그녀의 턱이 탁, 하고 잡혔다. 그러고는 케이어드가 바짝 얼굴을 대고 읊조렸다.
“조금 더 시간이 있으면 좋겠지만 말야. 애석하게도 당분간 또 황도를 떠나야 하니, 한꺼번에 말해두지.”
케이어드의 목소리가 더욱 비밀스럽게 낮아졌다.
“네가 가진 ‘진실의 눈’. 그게 반짝이는 건 최초의 한 번뿐이야.”
진실의 눈……?
생소한 단어에 아이네의 동공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나는 이미 예전의 아이네가 ‘진실의 눈’을 발현하는 걸 봤거든.”
“그게 무슨…….”
여전히 그녀와 시선을 맞추던 케이어드가 잠시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가 빠르게 말했다.
“그런데 너도 시장에서 날 보는 순간, ‘진실의 눈’을 발현시켰잖아?”
도통 아이네가 모르는 소리뿐이었다. 급기야 멍청하게도 입이 조금씩 헤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너와 진짜 아이네는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지.”
짓씹듯 말하며 케이어드가 아이네의 턱을 놓았다. 그러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뭐 하는 짓입니까.”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녀를 제 등 뒤로 데려와 세운 널찍한 등짝이 보였다.
조금 더 시선을 들자 목덜미에서 짧게 흔들거리는 고동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테고…… 경.”
아이네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테고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새하얗게 질린 낯과 붉어진 눈가를 보고 기세를 끌어올렸다.
조용한 분노를 담은 살기가 이미 멀찍이 선 케이어드를 향해 쏘아졌다.
“지금 제 약혼자를 위협하셨느냐 물었습니다.”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중간중간 잇새가 뿌득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심상치 않은 테고의 기색을 본 케이어드가 조용히 손을 들고 물러섰다.
마음이 급해서 아이네를 다그치긴 했으나 답답한 건 케이어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자신을 찢어 죽이기라도 할 듯 노려보는 테고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남자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남자에겐 조금도 관심이 없고. 그런데 8년 전 아이네도, 저 여자도 제게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하, 진짜든 가짜든 너희는 눈이 어떻게라도 됐나? 내가 어떻게 남자랑…….”
케이어드는 아이네를 힐긋 보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그 말 속의‘진짜’와 ‘가짜’라는 말에 순간, 테고의 어깨가 움찔했다.
순간 뒤돌아 공녀의 표정을 확인하고픈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이겨내곤 케이어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대답하지 않으시면, 정식으로 결투를 요청하겠습니다.”
알 수 없는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테고가 강경하게 말했다. 케이어드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먼저 내게 물었기에 대답해주었고, 나도 궁금한 걸 물었을 뿐이야.”
테고의 얼굴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이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베룸이 도대체 뭐길래. 다들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지도 않아?”
“그게 무슨 뜻…….”
아이네가 재빨리 테고의 옷자락을 힘주어 끌어당겼다.
그제야 뒤돌아본 테고의 눈엔 세차게 도리질치는 연둣빛 정수리가 보였다.
케이어드는 그 모습을 보고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제 성적 지향을 마음대로 재단해놓고서 정작 저들은 저런 분위기라니…….
그러다 문득 폐하를 알현할 차례가 테고의 다음이었단 사실을 떠올렸다.
“하, 그래. 좋아, 좋다고. 지금 저 녀석, 아니, 공녀의 상태도 도저히…….”
이건 또 다음에 이야기하면 되니까.
케이어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이네를 뒤로 숨긴 테고에게서 물러섰다. 이성적 호감이 생기긴커녕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말수는 좀 적을지언정 자신과 꽤 비슷한 타입의 사내였으니까. 동족혐오라고 해도 좋았다.
“잠깐!”
정원 깊숙한 곳이라 풀이 스치는 소리가 날 법도 한데, 케이어드는 거의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저자가 공녀를 위협했습니까?”
테고의 등 뒤에서 붙잡고 있던 아이네의 손에 커다란 온기가 와 닿았다.
그러고는 그 손이 천천히 떨어져나가는 동시에 테고가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공녀가 만약 공론화하길 원한다면…….”
“아뇨, 아니에요.”
안 그래도 이미 바닥을 향해 있던 아이네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테고로서는 커다란 덩치를 아무리 굽혀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한껏 몸을 낮췄다.
“그럼, 왜.”
아이네의 뺨 위를 따뜻한 손가락이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왜, 울고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정말, 정말로 모르겠다.
누군가가 자신이 빙의자라는 걸 알지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테고를 만나기 전에 원작을 모를 때 떠올렸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아이네로 8년을 살면서도 어디에 빙의했는지, 왜 빙의했는지만 알아내려고 했지.
‘이제 와서 내가 빙의자란 게 알려지면…….’
전개, 중요했다.
분명히 그 존재는 ‘결말’을 언급했고, 가장 확실하게 결말로 가는 방법은 전개를 유지하는 거니까.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정체가 까발려지자 아이네의 뇌리를 잠식한 건, 틀어졌을지 모를 전개 걱정이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 나딘, 사라 그리고 베룸 공작가의 모두들.
순간 왈칵 겁이 났다. 몇 년간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온갖 부정적인 상상이 물밀 듯 밀려들어왔다.
“공녀…….”
눈앞의 테고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보자 아이네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냥, 그냥 나는…….’
원작 여주와 원작 남주를 결말대로 잘 이어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리고 자신이 빙의한 목적은 ‘누군가’를 결말까지 살리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어떻,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개대로라면 지금쯤 테고와 케이어드는 함께 작전을 수행하며 정이 들었어야 하는 사이다.
제 두 눈으로 보진 못해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믿었다. 아니, 믿어야 했다.
그런데 방금 제가 본 상황은,
‘정이 들기는커녕 남보다도 못한 사이 같았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 원작이라는 남장여주 소설은 어떤 결말을 원하고 있는 걸까.
“대공이 뭐라고 한 겁니까?”
눈과 귀를 꽉 막고 있던 막이 벗겨진 기분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이미 테고가 그를 지칭하는 호칭부터 틀렸다.
이때쯤이면 적어도 그를 ‘케이어드’라고 이름으로 불러야 했다. 그런데 ‘대공’이라는 딱딱한 호칭이라니.
거기에 낮은 목소리에 은근하게 실린 적개심까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이네의 입에서 울음 섞인 투정이 조그맣게 새어 나왔다.
“나더러, 어떡하라고…….”
“예?”
그러고는 테고의 어깨에 그대로 얼굴을 묻어버렸다.
“으아아앙!”
그저 눈앞에 딱 기대기 좋은 넓은 어깨가 있었고, 그가 밀어내지 않을 줄 알아서 한 행동이었다.
“아니, 잠깐…….”
그리고 놀라서 조금 허둥대던 테고는 이내 한쪽 어깨를 조금 더 앞으로 숙여주었다.
“끄으, 흐읍. 이럴 거면, 처음부터, 흐으응, 알려, 킁, 주든가.”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는 아이네 때문에 테고의 어깨는 점점 흥건해져 갔다.
어찌할 바를 몰라 두 눈만 끔뻑거리던 테고가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대공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야…….”
“아! 이럴 땐 가만히 좀 있어요!”
여전히 얼굴을 그의 어깨 위로 묻은 채 아이네가 주먹으로 테고를 퉁 쳤다.
“……예.”
그가 한쪽 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한참을 아이네의 등 뒤만 맴돌다 결심한 듯 가볍게 위에 얹혔다.
그 온기에 어쩐지 더 안심한 아이네는 테고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의 생각과는 달랐는지 모른다.
애초에 케이어드의 말대로라면 그는 아이네가 빙의하기도 전부터 이미 원래 역할에서 반쯤 비켜나간 셈이니까.
그런데도 숲에서 만난 ‘존재’는 결말을 운운했다.
그럼 그 존재가 원하는 결말은 원작 여주와 남주의 해피엔딩 따위가 아닌 거다.
테고에게 폭 안긴 아이네는 훌쩍거리며 결심했다. 따뜻한 온기에 기대자 생각도 천천히 정리되는 듯싶었다.
물론 그 와중에 터져나가기라도 할 듯 격하게 맥동하는 누군가의 심장소리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조만간 그 숲에 다시 가야 해.’
그리고 확인해야 했다.
* * *
그렇게 한참을 정원 한가운데서 테고에게 안겨 울었다.
딸꾹질하는 아이네의 등을 쓸어주며 테고는 오늘도 인내심 수련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선배님, 저기 좀 보시지 말입니다.”
“뭐가? 어……. 모른 척해.”
“그래, 인마. 더글라스 꼴 나고 싶지 않으면.”
“…….”
마침 기사단 건물 앞을 지나가려던 몇몇은 조용히 몸을 숨겼다.
거기엔 바로 옆에서 ‘더글라스 꼴’이라는 고유명사의 주인공이 된 더글라스도 함께였다.
아이네는 테고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한 상태였다.
케이어드에게 받은 충격에 울기까지 해서인지 약하게 탈진하고 말았다.
‘그래도 테고 경 앞이라 다행이야.’
이제 겨우 오전 나절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그녀는 한 달이라도 지난 기분이 들었다.
너무 한꺼번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여기저기서 폭탄들이 터져대니 오히려 겉모습만은 평온해 보였다.
“괜찮습니까?”
“네, 네에.”
집무실로 들어와 핑크색 소파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한 아이네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맡에는 테고가 커다란 몸을 쭈그려 앉았다.
그 와중에도 참 예쁜 얼굴과 잘 만들어진 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만들어진 몸! 아티팩트로 만들어진 몸이잖아, 이건.
문득 아이네의 머릿속으로 아까 케이어드가 한 말이 떠올랐다.
‘8년이 지나도 난 남색 하는 취미는 안 생기던데.’
그건 너무 완벽하게 남장한 테고를 알아보지 못해서 하는 소리일까, 아니면 테고가 진짜 남자이기라도 해서…….
아이네의 시선이 테고의 왼쪽 귓불로 향했다.
거기엔 오늘도 녹색 빛으로 반들거리는 아티팩트가 얌전히 걸려 있었다.
‘내 눈으로 증거를 보고 있잖아. 뭘 의심하는 거야, 아이네.’
아이네가 그의 귀를 향해 반쯤 팔을 뻗었다가 다시 축 늘어뜨렸다.
테고의 얼굴에는 어느새 수심이 가득했다.
늘 밝고 생글생글한 표정의 그녀만 보다가 이렇게 시들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왜 나딘 공자와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아이네의 건강에 노심초사했는지 절실히 느꼈다.
‘하, 아까 그 대공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또 물으면 안 되겠지.’
그녀가 충분히 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러면 차분한 목소리로 물어보자.
절대 아까 불시에 얻어맞은 약해빠진 펀치에 상처받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솜뭉치 같은 주먹으로 힘주어 때려봤자 뭐 얼마나 아프다고.
‘오히려…….’
테고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그러고는 아까의 상황을 억지로 쥐어짜 떠올려 보았다.
공녀가 다녀갔다는 시종장의 말을 듣고 서둘러 걸음을 옮겨 그녀를 찾아 나섰다.
아마 중간에 아이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시종들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기사단 건물로 갔을 테다.
‘뭐? 황후궁 정원 쪽으로? 거긴 왜 가시는 거래.’
‘나야 모르지. 근데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여쭙지도 못했어.’
그리고 주인 없이 비어있는 황후궁 정원에서 공녀를 발견했을 땐, 심연에 빨려드는 듯한 절망이 온몸을 감쌌다.
‘나를 남자로 안 보는 이유가 혹시…….’
새까만 머리카락의 대공.
별다른 접점이 없을 텐데도 공녀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어 보였던 그였다.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 혹여 공녀가 그에게 반하게 될까 봐 염려한 적이 있지 않던가.
자신이 사냥대회 이후 자리를 비운 동안 무언가 진전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게 두 사람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웠다. 몸도, 얼굴도.
결정적으로 대공의 손이 공녀의 얼굴에…….
‘잠깐.’
뭔가 이상했다.
기감이 예민한 기사답게 테고는 그들 사이에 감도는 게 로맨틱한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감지해냈다.
오히려 사나운 기색의 음성이 바람결에 드문드문 섞여 들렸다.
자세히 보니 공녀의 뒷모습은 턱이 들린 채 바들바들 떨리고 있기까지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참을 수 없었다.
‘감히……. 나는 함부로 손도 못 대는 공녀에게.’
제 감정을 자각한 뒤에도 그가 먼저 아이네에게 손 끝 하나 닿으려 하지 않았다.
닿았다가는 참지 못할 듯하다는 예감이 들기도 했지만, 아이네와 제 감정이 같지 않다는 걸 알아서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를 빠르게 파고들었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새빨간 분노가 들이찼다.
그 순간만큼은 대공에게 검을 뽑는 게 하극상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제 기분대로 다짜고짜 대공에게 화를 냈다.
‘지금 제 약혼자를 위협하셨느냐 물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서 전율을 느꼈다. 그러고는 다시 입안에서 천천히 굴려보았다.
‘제 약혼자.’
그래, 지금 그녀의 약혼자는 자신이다.
비록 계약 약혼에 저 혼자 공녀를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있는 관계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제3자에게는 알 게 뭔가.
아이네를 위협하는 사람이 있다면 약혼자 지위를 이용해 얼마든지 막아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녀에겐 그럴 수가 없었다.
방금 말한 대로 형식적인 약혼 관계니까.
그리고 공녀는 여전히 자신을 친구로만 여길 텐데…….
‘만약 대공과 밀회 중이었다고 해도.’
자신에게 화를 낼 자격이나 있나.
오히려 자각을 하고 나니,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하나하나 검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체념과 현실 인식조차 공녀의 눈물 앞에서는 무의미해졌다.
함부로 닿지 않겠다던 말이 무색하게 제 손은 이미 그녀의 뺨을 스치고 있었다.
어느새 이렇게까지 마음에 담아버리게 된 건지…….
그 예쁜 눈망울에서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에 가슴이 아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공녀를 울린 대공에 대한 적개심이 조용히 들끓었다.
‘어떻,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이런 태도는 처음이었다.
늘 모든 것을 이미 아는 듯이 행동하던 공녀인데.
그래서 눈치 없이 되묻다가 한 대 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조차 심장이 뻐근할 만큼 사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면, 드디어 이번에야말로 자신은 미친 걸까.
오늘 아침 신경 써서 차려입은 정장이 눈물로 젖어 엉망진창이 되어도, 그녀가 꽉 움켜잡은 탓에 잔뜩 구겨져도.
그때의 테고에겐 온전히 제 품 안에 공녀가 들어있다는 감각만이 중요했다.
한번 손에 넣어보니 그제야 저란 인간을 제대로 알 것 같았다.
‘계약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제게 누군가의 ‘대신’이 아니라고 말해준 사람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무채색이나 다름없던 자신의 세계가 실은 살아있었단 걸 알려준 그녀다.
베룸에서 공녀 덕분에 실없이 웃게 되었을 때, 그게 도대체 얼마 만에 지어본 웃음이던가.
그리고 자신은 언제부터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나.
꿈에 저와 똑 닮은, 짧은 머리의 라니엘이 나오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던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오늘도 그녀와 만날 생각에 설레는 한 남자만 존재했다.
‘정말 둔한 건 나였어.’
이렇게 명백하기 그지없는 감정을 지금에 와서야 깨닫다니.
힘없이 소파에 늘어져 있는 아이네의 모습을 새삼스레 눈에 담았다.
그의 세계는 며칠 사이에 한바탕 뒤집히고 재구성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역시, 지금에 와서도 자신만 공녀를 의식하는 건 조금은 억울했지만…….
일단은 기다려볼 작정이다.
친구라는 이름이든, 약혼자라는 껍데기든 그녀의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남자는 자신이니까.
“흐응.”
공녀가 누운 채로 뒤척이는 바람에 치맛자락이 아주 살짝 펄럭였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건 기껏해야 새하얀 종아리 윗부분까지였다.
그랬는데,
“…….”
당장 오늘 아침에도, 조금 전에도 감정을 억누르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벌써 인내심이 반쯤은 뭉텅 깎여나갔다.
‘내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던가.’
검은 매일 수련을 하면 느는데, 인내심은 왜 그렇지 않은 걸까.
애써 고개를 돌리니 평소엔 생기 있게 빛나던 입술이 버석하게 마른 게 눈에 들어왔다.
테고가 물이라도 가져다주려 일어섰을 때였다.
“자, 잠깐만요.”
미약한 힘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는데도 테고는 그 손에 꼼짝없이 붙잡혀 다시 주저앉았다.
“왜 그럽니까.”
아이네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비장한 얼굴로 물었다.
“있잖아요. 우리 처음 만난 날 말이에요.”
차마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테고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조금 기대하고 말았다.
처음 만날 날, 뭘……?
“그때, 반란군 토벌 작전을 끝내고 막 돌아온 거죠?”
“아……. 그렇습니다.”
테고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아이네는 제 주먹을 꽉 쥐었다.
입술과 입 안은 바싹 말랐는데,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벌써 축축해졌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물어야 했다. 그게 제일 정확할 테니까.
“3년 동안, 반란군을 전부 진압한 거예요?”
“예, 그런데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 겁니까.”
테고의 대답을 듣는 순간, 아이네의 목구멍 위까지 무언가 울컥하는 게 치밀어 올랐다.
아냐, 아직은 몰라.
그녀는 아까 케이어드에게서 발견했던 희망을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반란군을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처치……한 건가요?”
이젠 심장이 목구멍 안에서 뛰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제발, 제발.
“……글쎄요.”
테고가 말을 흐렸다. 그리고 주위를 잠시 둘러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전부 다, 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혹시 제가 베룸 영지에 왜 가게 되었는지 압니까?”
아이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저를 호위하러 온 것은 알지만, 그 뒤에 숨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건 제가 귀환 명령을 어기고 전장에서 바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저를 베룸 영지에 보내신 것은 일종의 근신 처분이었죠.”
“귀환 명령을 어겼다니, 무엇 때문에…….”
“마지막에 반란군 수괴의 최후를 본 건 바로 접니다. 그때, 그자가 한 말 때문에 바로 황도로 복귀하지 않은 겁니다.”
아이네가 긴장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반란군 수괴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정체를 감추고 있을 ‘그자’는 아니니까. 아직은,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
“그 말이 뭔데요?”
테고는 잠시 고민했다. 이건 황제 폐하에게만 보고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이네의 간절한 눈빛과 그녀가 ‘진실의 눈’을 가진 발현자라는 사실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자가 그러더군요. 우리가 가장 중요한 걸 놓쳤다고.”
* * *
테고가 한 말에 아이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활기를 되찾았다. 불과 삼십 분 뒤 점심시간엔 기운을 차리고 식사까지 했다.
‘그래,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역시 본인한테 물어보길 잘했어.’
다시 웃음이 돌아온 아이네를 확인하고서야 테고는 오후 수련을 위해 연무장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오늘은 일하지 말고 쉬라는 말에 그녀는 창틀에서 바깥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창밖으로 연무장이 훤히 보였다.
“합!”
“하아압!”
기사들의 우렁찬 기합 소리를 배경음 삼아 아이네는 천천히 손가락을 꼽고 있었다.
결말이 반드시 남녀 주인공의 맺어짐이라는 해피엔딩을 의미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여태 책빙의 소설 중에 커플링 어긋난 소설이 얼마나 많은데.’
핵심적인 전개 과정이 모두 끝나 원작이 마쳐지는 그 시점.
바로 그 시점을 무사히 넘기는 것도 결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다시 한번 원작 전개를 점검해보자.’
첫째. 테고는 ‘남장여주’인가?
그의 귓불을 떠올린 아이네가 손가락을 접었다.
그럼, 두 번째. 테고는 원작 남주인 ‘대공’과 사랑에 빠지는 해피엔딩을 맞게 될 것인가?
……모르겠다. 두 사람이 여전히 진전이 없어 보이는 건 둘째 치고라도 아이네는 남자주인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으로 봐서는 반말이나 찍찍 내뱉는 대공과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싶었다.
‘진짜 숲에서 만난 그 이상한 빛덩이 말만 아니었어도……. 대공은 요즘 스타일 남주가 아니란 말야.’
게다가 엄연히 따지자면, 아직 원작의 초입을 겨우 지난 지점이라 둘 사이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확실히 비주얼 때문일까. 테고인 채로 둘이 이어지는 건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장르가 BL로 바뀌어야 할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세 번째. 주인공 외의 다른 등장인물들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이 부분에 이르자 양심에 찔린 아이네가 손가락을 접으려다가 폈다. 다른 인물들은 모를까, 달리아 영애의 역할은 완전히 엇나가버린 셈이니까.
하지만 서브남인 아르비드 황태자는 또 원작대로 미묘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말이지.
결국 아이네는 세 번째 손가락마저 접었다.
‘으응, 서브남 처리는 나중에 생각해보고……. 달리아 영애 역할은 내가 하고 있으니까 그런 셈 치는 거야.’
네 번째. 주요 전개에 필수적인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는가?
이 뒤까지는 모르겠지만 각 인물들의 첫 만남이나 사냥대회 같은 이벤트는 착실하게 발생했다.
역시 문제는 반란과 전쟁인데…….
전쟁 준비는 벌써 낌새가 보이고 있었다. 반란 부분이 애매했지만 테고의 말을 들었을 때,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대상이 바로 최종 악역일 듯했다.
그리고 황제의 죽음은 그 때문에 일어나니까.
‘이것도 아직은…… 시간이 있어.’
지금이라도 알게 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했다. ‘기억’과 등장인물의 죽음이 관계가 있다는 게 확실한 것도 아니고.
이번에도 아이네는 네 번째 손가락을 기꺼이 접었다.
“하, 뭐가 문제야. 도대체 왜 이렇게 찝찝하지.”
이게 다 케이어드 대공 때문이다. 자신이 빙의하기 전의 아이네를 아는 사람이 하필 원작의 남주일 줄이야.
원작에 나오는 아티팩트도 모두 멀쩡하게 존재했다.
자신이라는 존재와 그 때문에 조금 엇나가버린 케이어드 대공만 빼면 삐걱거리면서도 원작은 전개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아이네가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때문이다.
‘진실의 눈’인지, 원작에는 나오지도 않았던 무언가와 케이어드의 아리송한 말들.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더욱더 신경 쓰였다. 특히 다른 것보다도 테고를 완전히 남자로 단정 짓는 듯했던 언급들이.
‘안 그래도 가끔 테고가 진짜 남자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한단 말야.’
그리고 어렵지 않게 테고를 찾아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훤칠한 키에, 기사라곤 믿기지 않는 새하얀 피부.
그런데도 몸만큼은 훌륭해서…….
“으응?”
아이네는 문득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내가 테고 경이 상의 탈의한 걸 본 적이 있었나.’
지금도 그랬다. 여름의 초입을 지나 한여름으로 향해 가는 계절이다.
가뜩이나 몸 쓰는 일 많은 기사들은 기온에 상관없이 훈련할 때마다 땀이 날 거다.
그래서일까. 연무장에는 웃통을 훤하게 벗고 훈련에 매진 중인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사들을 맨 앞에서 통솔하는 테고는…….
상의를 입은 채였다.
그리고 아이네가 기억하기로 그는 단 한 번도 상의를 탈의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창틀을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역시 그랬던 거지?”
그런 아이네의 모습에 마침 집무실로 복귀하던 칼릭이 움찔했다.
“공녀님, 아까 오전에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 칼릭 경! 마침 잘 왔어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소문을 듣고 찾아온 칼릭의 말은 무참히 무시당했다.
칼릭은 잠시 멈칫한 채 멀찍이서 아이네를 바라보았다. 생생해진 몸 상태로 창문 밖을 향해 손짓까지 하는 걸 보면,
‘분명히 단장님께서 공녀님을 껴안고 다녔다고 들었는데.’
거기다 단장님의 얼굴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진지했다는 말까지 따라붙었다.
단원들은 직장에서 너무 티 나게 연애하는 게 아니냐고 투덜댔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칼릭은 잘 알았다.
‘내가 아는 주군이라면, 그럴 리가.’
그렇게 온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티를 내고는 있지만 과연 본인 감정을 자각이나 했을까 의심스러웠다.
차라리 더글라스의 말처럼 공녀님이 어딘가 아프셔서 그런 게 아니냐는 추측이 더 신빙성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기사단에서 조금 하찮은 존재가 된 그의 발언은 그대로 묻혀버렸다.
병약하다는 소문이 워낙 자자했던 탓에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한 줄 알았다. 아무래도 여러 입을 거친 소문이니만큼 과장된 것이었을까.
“빨리, 빨리 와봐요.”
아이네의 손짓에 창문 밖을 내다본 칼릭이 의문을 표했다.
“맨날 보는 광경이 아닙니까.”
“제가 지금부터 물어보는 말에 대해 심사숙고해서 대답해줘요.”
그녀와 칼릭 모두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졌다. 감정엔 무딘 공녀님이지만 서류 업무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날카롭고 꼼꼼했다.
혹시 연무장이나 기사단 건물에 심각한 문제라도…….
“테고 경이 남들 앞에서 한 번이라도 상의를 탈의한 적이 있어요?”
칼릭의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도무지 예상할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공녀님이다.
갑자기 그런 건 왜.
“예? 아니, 그러고 보니…….”
눈가를 좁히며 칼릭은 생각에 빠졌다. 아주 어린 공자 시절, 칼을 드는 모습부터 지켜봐 온 그였다.
한여름에라도 상의를 탈의한 적이 있으셨던가?
아이네의 반짝이는 눈앞에서 서둘러 회상을 마친 칼릭이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없습니다.”
“역시! 그렇죠?”
그리고 칼릭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또다시 혼돈에 빠졌다.
‘공녀님은 상의 탈의를 원하시는 건가, 아니면 원하지 않으시는 건가.’
아니, 그보다 이런 쪽으로 생각하는 게 맞는 건가.
보통은 잘난 사내의 웃통을 보고 싶은 은밀한 마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쩐지 이 공녀님은 그런 걸 바라지 않으실 것 같았다.
“본래 살갗을 노출하는 걸 굉장히 꺼리십니다.”
아이네의 눈이 한층 더 반짝였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로 테고가 여자였다면, 여자라는 비밀을 아는 칼릭이 이러한 질문에 순순히 답해주지 않았을 거란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아이네는 아까 접었던 첫 번째 손가락을 더욱더 강력하게 마음속에서 꾹 눌러 접었다.
‘어차피 러브라인이라는 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거야.’
원작 시작 전에 빙의자인 자신의 개입이라는 변수로 내용이 조금 달라졌다고 치자.
그래도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8년 전 그녀가 막 빙의했을 때보다 더 오래된 과거의 일들. 그리고 최소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물들의 존재만은 그대로여야 한다.
분명 아이네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며 끊임없는 외침이 이어졌다. 여태 믿고 있던 원작이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원작의 존재는 아이네가 책빙의한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이 절대적인 목적이 없는 세계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건 어쨌든 남장여주 소설이야.’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 내면의 목소리를 자기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지그시 짓밟았다.
* * *
다음 날도 아이네는 테고를 관찰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다.
어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치 문제도 그랬다. 완벽한 지도도 의심스럽고, 방향치인 원작 여주 때문에 발생하는 에피소드가 어제 그렇게 지나가버린 것도 이상했다.
가장 확실한 건 지금이라도 경계의 숲으로 가서 다시 그 ‘존재’를 만나는 거였다. 거기에 더해 확실하게 살려야 할 인물도 알아내고.
연무장 근처 풀숲에 숨은 그녀는 저려오는 다리를 주무르며 테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번에도 혼란스러운 아이네에게 명쾌한 해답을 내려준 건 사라였다.
‘사과인 척하는 오징어가 오징어라는 증거요? 차라리 반대로 그 오징어가 진짜 사과인지 확인하는 게 빠르지 않아요?’
‘사라는…… 서울대 결정학과가 있으면 수석 입학이었을 거야.’
‘와! 서울대는 좋은 건가요?’
오늘의 아이네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역발상을 해보기로 했다. 테고가 여자라고 믿는 게 아니라 남자라 생각하고 관찰할 작정이었다.
‘이런 건 처음 만났을 때 했어야 했는데.’
하긴 그때의 테고는 제게 곁을 내주지 않았으니, 그럴 기회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그건 그렇고, 테고가 남자라고 생각하면 또 그렇게도 느껴지고.’
신기한 일이다.
어제 집무실에서 멀찍이 바라볼 때와는 달랐다. 겨우 윤곽이나 보일 만한 거리에서 보면서도 참 주인공답게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주위의 기사들 사이에서 유난히 더 튀어 보였다.
가끔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땀도 잘 흘리지 않는다고 들었다. 상의를 벗지 않는다기에 혹시 땀이 나지 않는 건가 했는데, 그렇진 않은 듯했다.
흰 피부를 타고 날카로운 턱선에 맺힌 땀방울에 햇빛을 반사하며 빛이 났다.
‘저런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면 누가 주인공이란 말이야?’
그 모습까지 확인하고 나니 수런거리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어쩐지 이런 곳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는 자신에게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래서 아이네는 저린 다리를 통통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윽!”
“아얏!”
정수리 부근을 감싸 쥔 아이네가 이번에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물을 글썽이며 뒤를 돌아보니 턱을 매만지는 테고가 눈에 들어왔다.
“뭐 하시는 거예요?”
“그러는 공녀야말로 여기에 숨어서 뭘 하는 겁니까.”
“…….”
잠시 잊었다. 테고에겐 아주 먼 거리에서 난 기척도 눈치챌 만큼 뛰어난 청력과 감각이 있다는 걸.
어느새 정수리의 아픔이 꽤 가셨는데도 아이네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저, 테고 경. 죄송하지만 저 좀 일으켜주시겠어요?”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아이네는 제 다리를 가리키며 울상을 지었다.
“다리에 쥐가 났어요.”
“…….”
이번에도 가뿐하게 그녀를 들어 올리는 순간, 아이네는 이전에 맡은 적 있는 향기가 짙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 그녀 쪽으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온 덕에 훅, 하고 끼쳐왔다.
청량하면서도 조금은 따뜻한 나무향이 나는 체취.
‘이게 남자의 땀 냄새라고?’
당연하겠지만 여자라고 해서 땀에서 꽃향기가 나진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쿰쿰한 남자 특유의 냄새와는 다른 체취를 풍겼다.
그런데 테고는 딱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닮은 냄새가 났다.
이걸 과연 땀에 흠뻑 젖은 남자의 체취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냄새가 옅어졌다.
그래서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테고에게 붙어 킁킁댔다.
“공녀!”
그녀의 양팔을 잡은 손을 놓을 순 없었다. 그랬다가는 다시 땅바닥에 주저앉게 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테고는 팔을 쭉 뻗어 거리만 겨우 띄어두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많은 단원들이 있었다.
“와, 저건……. 저건 진짜 사람이 아니다.”
“조용히 해. 단장님 귀 얼마나 밝으신지 몰라?”
물론 이번에도 연무장의 모두는 아무것도 못 본 척했다.
* * *
결국 테고는 아이네를 그대로 안아들고 그의 개인 수련장으로 향했다. 몸이 달랑 들린 상태에서 아이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자……. 남자인 걸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더라?’
자연스럽게 아이네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향했다. 아무리 눈가를 좁혀 쳐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아냐, 이건 안 돼.’
물론 상의를 벗어보라고 한다거나 또다시 대놓고 냄새를 맡는 것도 안 된다. 처음은 그러려니 넘어갔다 해도 테고가 바보가 아닌 이상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 테다.
막무가내로 나가기에 아이네는 아직도 원작에 대한 미련이 더 큰 상태였다.
지금처럼 사건 진행 자체는 원작대로 흘러간다면, 테고의 원래 성별이 밝혀져야 할 시기는 따로 있다.
‘여자에게도 작위를 주는 게 허용될 만큼 커다란 공을 세웠을 때!’
반란도, 전쟁도 일어나지 않은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라.
수련장에 도착한 테고는 아이네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가 제 발로 서는 걸 보자마자 팔짱을 끼고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다리는 이제 괜찮지 않습니까?”
“네에.”
테고의 표정을 보니 무어라고 잔소리를 할지 말을 고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보는 아이네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어차피 남자라고 해도……. 날 여자로 보지도 않을 텐데.’
여태까지 겪어본 그의 행동만 봐도 그랬다. 되도록 그녀와 많이 닿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모습만 봐왔다.
“아!”
“…….”
좋은 방법이 생각나긴 했는데.
“테고 경, 우리 전에 단검을 이용한 호신술, 마저 배우기로 했잖아요.”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옵니까?”
테고는 기가 찬다는 듯 하,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공녀가 이렇게 조심성 없이 그를 자극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는 이제 이런 쪽으로는 체념과 해탈 그 어드메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인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녀가 여기서 조금만 더 자극한다면 여태껏 꿋꿋하게 유지하고 있던 신사의 가면을 기꺼이 내려놓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아이네가 비장한 표정으로 요청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케이어드를 팔았다.
요즘 트렌드에 안 맞게 함부로 여자의 턱을 쥐는 그런 남자 주인공 따위!
“어제처럼 누가 또 위협할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확실히 그건, 그랬다.
방금까지 아이네를 철없이 여기던 테고는 순식간에 납득했다. 다시 말하지만 테고는 검과 오징어에 상당히 진심인 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네도 포함되었다.
결국 이번에도 삼켜진 한숨과 함께 시작된 호신술 강의.
“이미 손에 익은 방법이 있는 것 같으니 쥐는 법은 생략하겠습니다.”
아이네의 손에 나무로 된 모형 단검이 쥐어졌다. 그녀가 또다시 역수로 단검을 쥐어 보이자 테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건 암살자들이 주로 쓰는 방법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끄응, 역시 나X토 때문이야.’
그런 아이네에게 테고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서서 물었다.
“만약 공녀가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대응할 겁니까.”
아, 이 정도는 알지! 확실하게 절명시킬 수 있는 방법! 각종 매체에서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네는 주저하지 않고 외쳤다.
“역시, 목……이 아닐까요? 아니면 심장이나?”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관상동맥 쪽을 노려 빠르게 제거하곤 했으니까. 그리고 사람은 심장이 멎으면 죽기도 하고.
하지만 테고는 고개를 저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공녀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네? 왜요?”
“목의 어느 부위를 찌르거나 그어야 한 번에 끝장낼 수 있는지도 압니까?”
아니, 모른다. 목의 앞부분이던가? 아니면 옆부분? 그것도 아니면 찔러 넣어야 하는 걸까?
테고가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제 목을 가리켰다.
“가만히 있을 테니 공격해보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아이네가 가까이 다가가 팔을 뻗어 테고의 목울대 주변에 모형 단검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 이걸 그대로 맞을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그녀보다 키가 훌쩍 큰 테고에게 닿기 위해 상당히 높게 팔을 들어야 했다.
“공녀는 신장이 작은 만큼 팔을 움직이는 동작이 큽니다. 속도도 느릴 거고요.”
테고가 담담한 목소리로 아이네의 뼈를 때렸다.
“숙련된 상대라면 공녀가 팔을 들기도 전에 단검을 쳐서 빼앗거나 손을 자를 겁니다.”
그리고 끝내 팩트만으로 아이네는 골절상을 입었다.
역시 책과 영상으로만 배운 호신술은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을 찌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는 것과 실전은 더 다르고요.”
테고가 아이네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고는 제 가슴으로 옮겼다.
“심장을 정확하게 찌르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상대가 숙련된 자라면 보호구를 갖춰 입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테고는 그녀의 손에서 모형 단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아이네의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누르게 했다.
이미 몇 번인가 겪어 알고 있었던 단단하기 그지없는 테고의 가슴에 손이 닿았다.
무심코 접촉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아이네는 왠지 부끄러워졌다.
‘이, 이건 애매해. 판단 보류!’
같은 여자끼리는 가슴을 만지는 데에 비교적 관대하다. 그것도 교육적인 목적으로 스스로 제 가슴을 만지게 한다면 더더욱.
혹시 남자……라고 해도, 이성을 향한 호감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아직은 결론 내릴 수 없다.
반면, 어이없어하던 처음 반응과 달리 테고는 꽤 진지했다. 어제 실제로 위협당하던 아이네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흉곽 뼈는 생각보다 단단합니다. 초심자의 경우엔 심장을 노리느니 차라리 폐에 구멍을 내는 게 더 효과적이지요.”
“폐에 구멍을……요?”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아이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는 잡고 있던 아이네의 손에서 힘을 빼 놓아주었다.
“이 역시 공녀의 신장과 힘으로는 불리할 겁니다. 상대가 방심하지 않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니까요.”
“그럼요……?”
자꾸만 안 된다고, 불가능하다고 하는 통에 아이네의 표정이 샐쭉하게 변했다.
그럼 처음부터 호신술을 알려주지 말든가. 호신술 절망편, 이라고 말하면 이번에야말로 세게 때려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묘하게 계속 키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테고가 대신 들고 있던 모형 단검을 제 얼굴 가까이로 들어올렸다.
“애초에 상대의 목숨을 반드시 거두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방법은 훨씬 많아집니다.”
모형 단검의 뭉툭한 끝부분이 테고의 파란 눈동자 앞에서 멈췄다.
“만약, 상대가 많이 방심하고 있다면 눈을…….”
그 다음으로는 모형 단검을 쥔 손을 천천히 움직여 제 허벅지를 꾹 눌렀다. 어찌나 근육이 단단한지 오히려 모형 단검이 튕겨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허벅지를 찌르십시오.”
눈보다는 허벅지가 더 쉽긴 하겠지만, 치명상이 아니지 않나?
아이네의 눈동자에 서린 의구심을 테고도 읽은 듯했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옅게 웃었다.
“제가 처음부터 알려드리지 않았군요. 호신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와 맞서 싸우려 들지 않는 겁니다.”
절망편이다, 역시 절망편이었어.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가만 안 둬.
아이네는 어느새 테고에게서 모형 단검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허벅지를 찌르면 상대에게서 기동력을 앗을 수 있습니다.”
왜인지 모르지만, 아이네는 지금의 가르침을 반드시 필요로 할 상황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도망치십시오.”
* * *
테고의 새파란 눈동자를 처음 보는 게 아닌데도 잠시 홀리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아이네가 고개를 흔들었다. 또 저 진득한 눈빛에 끌려들어갈 뻔했다.
잊지 말자. 맞서 싸우려고 하지 말고 허벅지를 찌르고 도망…….
‘아니, 그런데 진짜로 호신술 배우겠다고 말 꺼낸 게 아니지 않았어?’
워낙 진지한 테고의 태도와 눈높이 교육 덕에 몰입이 과해졌다. 게다가 정작 원래 목적이었던 설레는 순간은 제대로 구분할 틈도 없이 그녀를 통째로 흔들고 지나가 버렸다.
“아, 허벅지를 찌르고, 이렇게 도망을…….”
아이네는 시선을 내리깔고 어설프게 따라하며 천천히 몸을 뒤로 빼냈다.
벌써 보통 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인단 걸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테고의 가슴을 밀었을 텐데.
아까 부지불식간에 단단한 가슴에 닿았던 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쩐지 손끝이 따끔거리고 뜨거워서 차마 팔을 뻗기가 망설여졌다. 이제 보니 거리도 너무 가깝고.
누군가 수련장에 들어온다면 테고와 그녀가 밀회라도 갖는다 오해할 법하지 않은가. 어제 케이어드 대공과 함께 있던 모습도 멀리서 보면 이상한 소문이 나기 딱 좋았으니까.
순간,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아이네가 멈칫했다.
……뭔가 다르다.
케이어드 대공을 떠올리니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둘을 비교해보면 어떨까?
‘어제 케이어드 대공은 가까이 붙으니까 설레기는커녕, 좀 무서웠는데…….’
특히 턱을 탁, 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을 때는 등골이 오싹했다.
똑같은 상황에서 테고는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해졌다.
베룸 영지에서 비슷한 일이 있긴 했다. 멋도 모르고 테고를 따라 별관으로 쪼르르 쫓아 들어갔던 바로 그때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땐 어떤 기분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설렜던 건지 놀랐던 건지 구분이 되어야 말이지.
아이네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테고를 보았다.
‘좋아, 확인해 보는 거야.’
대공에게 위협당하던 일과 비교해보려면 아까처럼 유한 상황이면 안 된다.
그래서 이번엔 상당히 과감하고, 무모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테고는 이만하면 강의가 충분하다 생각하고 마무리하려던 참이었다. 아이네는 그런 테고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했다.
마치 당장 떠오른 좋은 아이디어인 것처럼.
“설명만 들으면 잘 모르겠는데……. 음, 있잖아요. 그럼, 저번처럼 ‘연기’해줄 수 있어요?”
“무슨 연기 말입니까.”
아닌 척 테고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늘였다. 그러다 그가 관심을 보이자 갑자기 아이네의 목소리는 빠르고 단호해졌다. 눈동자도 조금쯤은 초롱초롱해졌다.
“제게 위기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연기면 돼요.”
그러나 그 말에 등을 돌리고 있던 테고의 한쪽 입가가 굳었다. 인내심에도 허용치라는 게 있어서 매일 정해진 수용범위가 있다면…….
가뜩이나 점점 그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는 게 빨라지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떨고, 울었으면서 위기감을 느낄 연기를 해달라고?’
제가 어제 어떤 절망을 맛보아야 했는지 그녀가 알기나 할까?
마침 황궁 시종들의 이야기를 듣고 제때 정원에 도착한 건 순전히 운이었다. 앞으로도 그런 행운이 계속될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내일이면 또다시 폐하의 명을 받아 황도를 떠나야 한다. 대공과 황태자 아르비드가 있는 황도에 아이네를 두고 가야 한다는 초조함이 끝내 테고의 인내심을 전부 갉아먹었다.
좋다, 판을 깔아준다면야, 거절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난번과는 다르게 이번엔 꽤나 진심일 테다. 그렇게 무서운 줄 모르고 테고를 시험해보려고 하던 아이네가 기어이 그의 가면을 살짝 벗겨냈다.
테고가 무겁고 진득한 걸음을 한 발자국씩 옮겼다. 본능적으로 아이네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련장 벽에 그녀의 등이 닿았다. 이윽고 아이네의 머리 위로 까만 그림자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순진한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잇새로 뿌득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오늘은 꼭 대답을 들어야겠습니다.”
무, 무슨 대답이요?
하지만 그 말은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저 친구로 남고 싶었다면 약혼을 좀 더 신중히 결정했어야지요.”
아이네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지난번과는 달랐다. 이게 정말 연기인 걸까.
서, 설마 정말로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던 건 아니겠지?
그러면서도 얼굴에 음영이 진 채 위에서 내려다보는 테고가 지독하게 매력적이어서…….
여태까지 그와 마주한 순간 중 가장 격렬하게 심장이 뛰었다.
그를 도발할 때까지만 해도 제 심장의 판단에 따르겠다고 단언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방향치 설정, 아이네와 만나기 전에 이미 처리된 반란군들, 원작과는 달리 제 약혼자에게 관심이 많아 보이는 모습까지.
아이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하지만 원작의 존재가 그녀의 눈과 귀를 가린 채 끈질기게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직…… 확실하지 않잖아.’
아이네가 이번엔 떨리는 손으로나마 테고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이, 이제 진짜로 됐어요.”
그런 그녀의 두 손을 테고가 한 손만으로 얽어맸다.
“실전에서도 그렇게 말할 겁니까?”
“힉?”
아파서 낸 소리는 아니었다. 늘 그렇듯 놀라서……. 놀라서 그랬다.
이전에 실수한 이후로 테고는 아이네를 세게 잡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도 거칠게 뿌리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세기였다.
그런데, 그의 뜨거운 손에 잡힌 제 손목이 이제는 숫제 다 타버릴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저 따끔거리기만 하던 손끝에서 옮겨붙은 불이 손바닥을 거쳐 손목으로 번지는 듯했다. 결국 아이네는 테고를 뿌리치며 도리질을 쳤다.
“지, 지금은 단검도 없는데, 어떻게 찌르란 거예요! 내가 원한다고 소환되는 것도 아닌데!”
“…….”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아이네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보기 좋게 달아오르던 두 뺨의 홍조도, 아주 조금쯤 야릇하게 흘러가려던 둘 사이의 분위기는 그렇게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거, 뭐예요?”
테고의 눈이 가늘어졌다. 익숙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건 역시 자신의 예상대로 마검이었던 모양이다.
“경계의 숲에 있던 그 다마스커스 단검이군요.”
* * *
아이네는 제 손에 들린 단검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니, 여기에 마검이 있긴 있었어요?”
금속 자체가 워낙 희귀한 것이라 가지고 왔을 뿐이었다. 원할 때 소환이 가능한 단검인 줄은 몰랐는데.
‘역시 그 빛덩이가 준 건가. 물어봐야 할 게 또 늘었네.’
여전히 타인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는 탓에 테고는 그저 눈으로 보기만 했다.
“그럼 역소환은 안 되는 거군요.”
“아까 눈이랑 허벅지라고 했죠?”
테고가 짧게 끄덕여 긍정했다. 그러다 아이네의 시선을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방금……. 그 말은.”
자신도 모르게 지나치게 진심을 담아 위협했다. 적어도 대사만이라도 평범한 걸로 읊었어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그럴 정신이 있었다면 시도하지도 않았겠지.
아이네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손에 쥐어진 단검을 향했다.
“확인해 본 거예요.”
테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뭘 말입니까.”
또 무심코 입을 놀리고 말았다. 아이네는 잔뜩 당황한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그러니까 테고 경이 진짜……라면 내가 그럴 리가 없으니까.”
테고는 이번에야말로 확신했다. 공녀는 자신을 누군가와 착각하고 있었다.
‘그럼, 누구와?’
황도로 출발하는 첫날, 그녀가 모닥불 앞에서 제게 해주었던 말을 기억한다.
‘당신이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이유가 다른 누구의 ‘대신’이라서는 아니에요. 이거 하나만은 믿어도 돼요.‘
가슴 한편이 싸늘해졌다. 그리고 테고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진실의 눈’을 가진 발현자의 반응이었다. 허투루 넘길 수 없다는 걸 테고는 수많은 경험으로 알았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아티팩트의 미약한 거부 반응.
그저 도구에 불과한 무생물일 텐데. 이상하게도 테고는 아티팩트를 처음 제 귀에 달았을 때 그것이 놀라워한다고 느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건 자신이 아닌 것 같다고 속삭이는 듯 묘한 이질감까지.
아이네를 만나기까지 8년 내내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테고는 또다시 습관처럼 왼쪽 귓불에 매달린 아티팩트를 매만졌다. 아버지의 피가 잔뜩 묻은 채 일족의 땅으로 소환된 아티팩트로 제 생살을 뚫었던 그날처럼 가슴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착각을 했다면, 역시…… 그 아이와?’
늘 익숙하게 반쯤 발을 담그고 살았던 절망의 늪이었는데도 새삼스레 진창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다시 열네 살의 그때로 돌아가 버린 테고는 더 이상 묻거나, 궁금증을 드러내는 것조차 포기해버렸다. 아이네에게 확인받으면 그걸로 끝일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테고는 제 목소리와 눈빛이 얼마나 어둡게 가라앉았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당황한 아이네가 어떻게든 말실수를 무마하려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요. 그러니까 테고 경이…….”
하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된 변명은 떠올리지 못했다.
그냥 확 다 까놓고 이야기해버릴까? 여주인 라니엘이 맞으면 맞는 거고, 아니라면.
순간, 아이네는 덜컥 무섬증이 들었다. 만약에, 정말로 테고가 ‘남장여주’가 아니라면…….
‘이 뒤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 경우엔 진짜 여주는 어디로 간 걸까. 애초에 테고가 여주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저렇게 원작 속 묘사와 똑같은 생김새, 똑같은 머리 색과 눈 색을 지녔는데.
그때, 아주 예전에 보았던 비 내리는 어느 밤, 폭우를 뚫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마차의 모습이 다시 흐릿하게 떠올랐다.
‘뭔가 생각날 것도 같은데.’
아이네가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려고 눈가를 좁혔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