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작은 날갯짓이 불러온 바람 (15/29)

14. 작은 날갯짓이 불러온 바람

“공녀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나한테 손님이요? 누구……. 아, 달리아 영애.”

뒤를 돌아본 곳엔 어제의 수수한 차림과는 달리 한껏 꾸민 달리아가 서 있었다. 아이네는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슬그머니 뒤로 숨겼다.

으응? 오늘 연회라도 있는 걸까. 왜 저렇게 힘이 들어가 있지?

아이네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힌 달리아가 괜스레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어제 말씀하신 라벨 말이에요. 오늘 저택으로 받으러 가도 될까요?”

“네? 필요 없다고 하셨…….”

“황녀 전하의 탄신일 선물을 무엇으로 할지도 의논하고 싶고요.”

설마 나딘을 만나러 가고 싶다는 소린 아니겠지?

‘그래, 겉껍데기는 나쁘지 않으니까. 직접 가서 얼마나 쪼잔한 잔소리쟁이인지 겪어봐야 환상을 버리지.’

아이네의 표정이 불쌍한 중생을 바라보듯 아련해졌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심각한 얼굴인 테고를 보았다.

여기서 좀전의 대화를 더 이어나갈 순 없는 노릇이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이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저, 아마 퇴근 시간은 지났을 텐데……. 오늘은 달리아 영애와 함께 퇴궁할게요. 나머지는 다음에 해도 될까요?”

“그렇게 하십시오. 내일 아침에 또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이네가 고개만 까닥 숙이고는 달리아와 쪼르르 수련장을 벗어났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테고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도 달리아 영애는 계속해서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영애, 긴장할 거 없어요.”

보기보다 되게 하찮은 사람이거든요, 라는 말은 혈육 간의 마지막 의리로 참아냈다.

“저, 오늘 괜찮은가요?”

괜찮은 수준을 넘어서 파티라도 참석하는 줄 알았는데요.

그저 겸양을 떠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아이네의 확답을 바라는 목소리였다.

이게 다 그녀의 가치를 아름다움에만 가두는 환경에서 자란 탓이다. 달리아는 종종 이렇게 자존감이 낮아진 모습도 보였다.

볼수록 아이네가 생각하던 악역과는 거리가 멀어진 것 같아 보였다.

“그럼요! 어떤 영식이라도 달리아 영애한테 반할걸요.”

“정말인가요?”

그리고 뺨을 감싸 쥐는 그녀의 모습에 아이네는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아니, 나딘한테 미모를 낭비하지는 말고요.

그런 달리아에게 아이네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이게 영애의 본래 성격인가요?”

“아…….”

그 물음에 달리아는 잠시 대답할 말을 잃고 멍한 얼굴을 했다. 어떤 게 제 본래 성격이었는지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달리아 영애도 마음을 열 곳이 없어서 뾰족하게 가시를 세운 모습을 보였을 뿐.

낯가림이 가시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때까지 이렇게 여린 모습을 숨겨 두고 있었구나.

‘이래서 달리아 영애를 생긴 것부터 한 떨기 장미처럼 설정해놓았나.’

달리아 영애가 경계 너머 숲속의 ‘존재’가 말하는 그 인물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혹시 정말로 그게 황제 폐하라고 해도 아이네는 그녀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을 했을 테니까.

8년간 잠잠하다가 정신없이 사건이 몰아치는 요즈음이다. 그 와중에 아이네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달리아를 원래의 전개에서 비켜나게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엇나간 전개를 아이네 혼자 감당하기는 두려웠다.

제대로 된 설명을 들으려면 역시 조만간 베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무력이 없는 아이네가 적은 수의 호위만 거느리고 영지로 가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렇다고 이유 없이 호위를 늘리면 남부나 연합왕국 측에서 눈치를 챌 거고.

아이네는 속으로 꾸역꾸역 한숨만 삼켰다.

‘이러다가 원작이 다 끝나고서야 가게 되는 거 아냐?’

만약 숲속의 존재를 당장 만날 수 없다면 아버지라도 만나서 ‘진실의 눈’에 대해 여쭤보면 좋을 텐데.

그 순간 아이네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법 통신구!

마법 통신구는 마도구와 달랐다. 이미 마정석으로 마력이 충전된 데다 정해진 수식대로 움직이는 게 마도구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마법 통신구는 그때그때마다 발신자의 마나를 흡수해서 작동했다.

그렇기에 몸이 약한 아이네는 건강 염려증인 나딘과 아버지의 우려로 마법 통신구를 써본 적이 없었다.

‘여기 와서는 오빠가 저녁때마다 서재에 틀어박혀 있어서 엄두도 못 냈지.’

나딘이 매일 서재를 지키는 바람에 여태 통신구에는 얼씬도 못 했다.

아이네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은 달리아에게 향했다. 마침 나딘을 서재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구실이 함께 마차에 타고 있었다.

‘미안해요, 달리아 영애. 딱 한 번만 이용당해주세요.’

* * *

“안녕하세요, 베룸 공자님. 에펜베르크 가의 장녀 달리아가 인사드립니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어서 와라, 아이네.”

“으응.”

마차에서 내린 순간, 달리아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처럼 다시 가시로 제 몸을 뒤덮었다.

아이네가 조금 뒤늦게 따라 내렸다가 달리아의 태세전환을 보고 멈칫했다.

그래도 완전히 내리기 전에 마차 시트 쪽으로 한 번 더 시선을 주는걸 잊지 않았다. 용케 치맛자락에 숨겨왔던 단검을 마차 시트 사이로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참이니까.

벌써 여름에 접어들었는데 달리아의 주위만 삭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저게 낯가림이었다니…….’

새치름한 눈매와 말투에 따라 날카롭게 쏘는 듯 보이기도 하는 목소리가 어우러져서 조금은 쌀쌀맞은 귀족 영애가 되었나 보다.

거기다 남자에게는 유난히 더 가시를 잔뜩 세우고 경계하는 듯했다.

아마도 자신을 비싼 값에 팔아넘길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는 아버지와 오빠의 영향이 아닐까.

그러나 잠시 아이네를 뒤돌아본 달리아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선 나딘이 달리아 영애에게 형식적인 인사만 한 뒤, 금세 시선을 떼어내서인 모양이다.

‘달리아에게 반하지 않는 영식이 한 명 더 있었네.’

로비를 따라 걸으며 아이네는 마차 안에서 구상해둔 계획을 실행했다.

“오빠, 미안하지만 달리아 영애랑 먼저 저녁 식사를 함께 해줄 수 있어? 난 오늘 땀을 많이 흘려서 우선 씻어야 할 것 같아.”

“공녀님, 그럼 기다리…….”

아이네가 급히 달리아의 말을 막았다.

“달리아 영애는 아직 미성년자잖아. 너무 늦게 귀택하면 다들 걱정하실 거야.”

그 말을 들은 달리아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후작가에서 과연 그렇게 그녀를 걱정해줄 사람이 있을까?

저녁만 되면 약과 술에 취해 현실과 꿈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치들인데…….

그러나 달리아의 어두워진 얼굴을 본 나딘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식사는 간단하게 다시 준비하라고 할게. 후식 먹기 전에는 내려와.”

달리아를 데리고 다이닝룸으로 들어가는 나딘의 뒷모습까지 완전히 확인하고서야 아이네가 급하게 계단을 올랐다.

* * *

나딘은 아이네의 부탁대로 손님 대접이 한창이었다.

달리아의 나이를 알고 있었기에 여자의 범위에서 제외했을 뿐. 그는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적당히 친절했다.

그리고 그 친절한 면모는 오징어와 관련되었을 때 더 증폭되는 경향이 있었다.

베룸 영지의 자랑스러운 특산물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병이라도 있는 듯 굴었으니까.

그건 초면이었던 테고에게도 그랬고, 역시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달리아 영애에게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일반적인 소고기 스테이크는 결의 반대로 잘라야 하지만 오징어 스테이크는, 자아…….”

“…….”

나딘이 달리아의 접시를 끌어당겨 제 앞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한 입 크기로 잘라 다시 돌려주었다.

“이렇게 결대로 잘라 특제 소스에 푹 적셔 먹으면 풍미가 또 남다르지요. 물론 그냥 먹어도 맛이 떨어지는 건 아니라서…….”

한껏 고양된 표정으로 설명하는 나딘의 얼굴을 달리아가 빤히 바라보았다.

“공자님.”

“예?”

달리아는 제 접시를 가리켰다. 목소리 한편에 어딘지 싸늘한 구석이 있었다.

“이 크기는 혹시 영애들은 새 모이만큼만 먹어야 한다는 예법 때문인가요?”

그에 나딘이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음? 아닙니다! 너무 작은가요?”

“…….”

달리아는 포크로 조각을 쿡 찍어보았다. 한 입이 아니라 반 입이나 될까 말까 한 크기였다.

“아니, 우리 아이네한테 해주던 버릇대로 했더니……. 그 아이 입이 원체 작지 않습니까.”

달리아의 미간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그 작은 요정 같은 공녀님은 이런 일이 일상이었구나.

부러웠다.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작고 하늘하늘한 체구에, 같은 여자가 보아도 감탄할 만큼 깜찍한 외모. 거기에 천성적으로 밝은 성격 때문일까. 누구에게든 복숭앗빛 뺨을 밝히며 잘 웃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사랑스럽다는 단어를 응축해서 정성스레 빚어낸 존재 같았다. 자꾸만 눈이 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외양을 질투하거나 그 자리를 욕심낸 적은 없었다.

‘내가 그런 겉모습을 가져 봤자 무엇이 달라질까…….’

아이네 공녀와 꼭 닮은 색채를 지닌 나딘 공자에게로 시선이 옮아갔다. 곤란한 듯 말하면서도 제 여동생을 아끼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

공녀의 세계는 그녀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구나. 달리아는 그게 참 부러웠다. 아마 그들은 아이네 공녀가 지금처럼 아름답지 않더라도 사랑했겠지.

우연히 타고난 미색을 제 존재가치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과는 천지 차이였다.

‘그 치들은 내가 무얼 잘하고,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는지는 알까.’

달리아의 입매가 씁쓸하게 굳었다. 그걸 가리려 테이블에 놓인 와인 잔을 집은 순간이었다.

“잠깐! 영애는 아직 미성년이 아닙니까.”

“예? 무슨 문제라도……?”

싱글벙글 풀어져 있던 나딘의 얼굴에 엄한 표정이 덧씌워졌다. 아이네가 평소 꼰대 같다고 하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주류는 성년을 넘긴 후 드시는 게 좋겠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딘이 달리아의 손에서 부드럽게 와인잔을 거둬갔다. 생각보다 큰 키와 커다란 손에 놀랄 틈도 없이 달리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네?”

“이런 건 자기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마시는 겁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예쁜 아몬드형의 눈이 크게 뜨여 깜박이고, 매혹적인 붉은 입술이 작게 열렸다. 여러모로 아이네와는 다른 외양이라 나딘은 새삼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영애는 아직 어립니다.”

그 말을 들은 달리아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그리고 어쩐지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제국엔 미성년자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규율 따윈 없었다.

* * *

그때, 서재로 몰래 간 아이네는 마법 통신구를 작동시켰다. 혹시 자신이 사용할 수 없게 해두었을까 걱정했는데, 그렇진 않은 듯했다.

다행히 시전자들의 가까운 혈육까지만 감지하는 중급 수준의 보안뿐이었다. 황궁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특정 시전자의 기운만 완전하게 읽어내는 통신구는 서재에 두기엔 부피가 너무 크니까.

[그래, 나딘이냐.]

이곳의 마법 통신구는 영상을 송출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화처럼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지도 않았다.

마법 통신구에 대고 말을 하면 상대방의 화면에 글씨로 뜨는 식이었다. 마치 현대의 메신저와도 같았다.

다만, 그 글씨는 휘발성이 있어 따로 적어두지 않으면 사라져버렸다.

아이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네, 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녀석, 어제도 연락했잖느냐.]

아차, 너무 오랜만에 인사하는 아버지라서 실수했다. 하지만 하루 만에 건넨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인사였기에 베룸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수상한 움직임은 어떠니?]

수상한 움직임?

내용을 베껴 쓰던 아이네의 고개가 갸웃 움직였다. 케이어드 대공도 이런 말을 한 것 같은데. 남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여기서 시간을 너무 끌면 아버지가 의심하실지 모른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가장 중요한 걸 여쭤보아야 했다.

[아직 큰 진전은 없어요. 새로운 점이 생기면 알려드릴게요.]

[그래, 그래. 그럼 왜 연락한 거니.]

여기가 중요한 부분이었다. 아이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버지, ‘진실의 눈’ 말인데요.]

[왜? 아이네가 뭔가 새로운 걸 이야기하든?]

그녀는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있었다. ‘진실의 눈’.

자신은 모르는데, 아버지와 나딘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데에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다.

[왜 아이네는 ‘진실의 눈’에 대해 모르는 건가요.]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먼저 말해줄 순 없어. 그건 법칙에 위배되는 거니까.]

무슨 법칙인지 여쭤보면, 자신이 나딘을 가장했다는 게 탄로 날까?

아이네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 물을지 고민했다. 골몰한 나머지 문밖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는 걸 깜박하고 말았다.

그때, 서재의 문이 열리고 기다란 그림자가 그 앞에 드리웠다.

* * *

테고의 시야에서 아이네가 후작 영애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기 무섭게 벽에 등을 대고 주르륵 미끄러져 앉았다.

‘역시 나로는 안 되는 건가.’

날카롭게 곤두섰던 눈매가 금세 누그러져 조금은 울적한 기운을 띠었다.

시간이 지나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 안의 열등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어라, 공녀님은 후작 영애와 나가시던데, 왜 이러고 계십니까?”

“칼릭…….”

“단장님, 아니, 주군.”

어쩐지 테고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칼릭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곁에 가 앉았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혼자 앓지 말고 말을 하시라고.”

“…….”

“공녀님과 관련된 일 아닙니까? 계약이니 뭐니 해도 알게 뭡니까. 계약이 아닌 거로 만드시면 되죠.”

“그런 게 아니야.”

테고가 고개를 뒤로 젖혀 수련장의 천장을 바라봤다. 어느새 끝부분만 빼고 머리카락은 거의 다 말라 있었다.

칼릭은 묵묵히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오랜만에 보는 테고의 약한 모습이었다.

“누군가, 누군가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테고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칼릭은 그 누군가가 방금 이곳을 빠져나간 그 어여쁜 공녀님이란 사실을 금방 눈치챘다.

“날, 착각하고 있다면, 그럼 나는 이제 어떡해야 하지?”

“예?”

“그동안 나한테 보였던 호의가 나에 대해 착각해서 그런 거라면…….”

차마 라니엘과 자신을 착각한 것 같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아직 확실한 이야기도 아니고.

‘공녀님이 주군에 대해 착각하다니, 도대체 뭘? 막상 알게 되면 이보다 투명한 사람도 없는데.’

칼릭은 테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축 처져 있는 테고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입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지만 얼굴은 이미 반쯤 체념한 표정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보던 칼릭이 불쑥 말했다.

“오히려 잘된 거 아닙니까?”

“뭐?”

여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던 테고가 칼릭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로는 공녀님께서 주군을 친밀하게는 여기셔도 그 이상의 감정은 아닌 것 같아 고민이신 듯한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무언가를 착각했기 때문이라면, 오히려 더 승산이 있지 않을까요. 오해는 풀면 되니까요.”

“승산이라니.”

아이네를 모욕하는 말 같아 발끈했지만 테고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제가 그동안 알아서 잘하시겠지, 하고 뒤에서 지켜만 봤는데 말입니다.”

“…….”

그렇게 티가 났나.

테고는 다시 칼릭의 눈을 피해 허공만 바라봤다. 늘 자신보다 저를 더 잘 알아주는 그였지만 이런 부분까지 알아챘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고마우면서도 꽤 쑥스럽고도 민망한 기분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부딪쳐 보신 적 없지 않습니까.”

“그건…….”

칼릭은 설마하니 아이네가 테고를 여자로 착각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다만 공녀님이 테고의 성적 지향을 착각하지 않았나 추측해보았다.

테고는 여자와 관련된 소문 한번 없이 남자들이 많은 집단에서만 내내 머물렀다.

그와 더불어 연애에 서툰 모습이 오해를 불러온 게 아닐까 짐작한 것이다.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지만, 각자 다른 의미를 담은 둘의 대화는 위화감 없이 이어졌다.

“가십쇼. 가서 사실을 밝히고 주군의 마음을 말해보세요.”

“만약, 그래도 변하는 게 없으면?”

칼릭이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쾅쾅 쳤다. 자신이 지금 스물둘의 다 큰 청년과 마주하고 있는 게 맞는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죠. 전 주군 그렇게 안 키웠지 말입니다?”

“……다녀올게.”

테고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빠르게 걷다 이내 달려 나갔다.

칼릭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8년 전, 부모님과 여동생의 비보를 듣고 수련장 한구석에 숨어 벌벌 떨던 열네 살의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이 8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드디어 남자가 되려 한다.

‘주인님, 주인마님. 이만하면 절 거두어 주신 은혜, 절반의 절반쯤은 갚지 않았습니까?’

그리움과 회한의 한숨이 한데 어우러져 새어 나왔다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 * *

테고는 급한 마음에 말을 달려 공작저로 향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땀에 젖어 있던 셔츠를 갈아입는 건 잊지 않았다.

‘아까 내가 너무 심했나.’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참고 있는데. 연기를 해보라는 말에 그만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정말로 겁을 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밀어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새하얀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하.”

이미 테고의 방문에 익숙한 문지기들이 저택 정문을 개방했다. 테고는 본관까지 이어진 길을 내달려 현관 앞에 멈춰 섰다.

“리테루온 공작님.”

공작저의 집사장인 알베르토가 그를 보고 서둘러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이윽고 나딘이 테고를 맞이하러 나왔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혹시 무슨 정황이라도 발견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공자. 공녀는 귀택했습니까?”

잠시 알베르토와 시선을 마주한 나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달리아 영애와 함께 퇴궁하느라 따로 왔다고 했는데.

“잠시 공녀를 보아도 되겠습니까.”

제아무리 공작이라고 할지라도, 약혼자라고 해도, 집주인의 의사를 먼저 물어야 했다.

“…….”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만남을 청하다니. 나딘이 의심의 눈초리로 테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어딘지 모르게 간절한 얼굴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씻느라 아직 방에 있을 겁니다. 알베르토, 응접실로 안내해드리세요.”

달리아 영애만 아니라면 함께 응접실에서 기다릴 테지만. 아이네와는 또 다른 의미로 혼자 둘 수 없게 만드는 영애였다.

잠시 고민하던 나딘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둘 다 손님이긴 하지만 테고는 그들 남매에게 꽤 익숙한 존재였다. 그리고 손님용 응접실이라면 자주 만나던 곳이니 잠시 동안은 괜찮겠지.

“저는 손님이 있어서 마저 응대를 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집사장의 안내를 받아 테고는 응접실에서 초조히 아이네를 기다렸다. 부디 아까 일로 마음이 상하지 않았으면 했다.

물론 자신이 아는 그녀라면 지난날 베룸 영지의 별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되레 혼내려 들었지 모른다.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테고가 겁이 났다.

[……]

“……?”

테고의 예민한 청각에 웅얼거리는 소리가 걸려들었다. 무슨 말인지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히 아이네의 음성이었다.

초조하고 갈급한 마음에 그는 이곳에서 기다리는 말을 잠시 잊었다. 그러고는 홀린 듯이 그녀의 목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확인했다.

‘분명히 방에 있다고 했는데.’

아이네의 방은 반대쪽 복도였다. 의아함을 품은 테고의 시선이 가까이 있는 서재의 문으로 향했다.

[……진실의 눈…….]

그리고 그 안에서 아까보다 더 또렷하게 아이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혼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방적으로 중얼거렸다.

가까이 서 있어서인지 아이네의 발소리가 분명한 기척이 초조하게 안을 맴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아이네는…….]

본인 입으로 자신의 이름을 저렇게 지칭하나?

아이네의 평소 화법을 알고 있는 테고로서는 의문투성이인 중얼거림이었다. 그가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공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방 안을 빙빙 도는 불안한 움직임이 더 심해졌다. 결국, 테고는 문고리에 손을 올려 문을 열었다.

“……!”

그리고 그 안에는 놀란 기색의 아이네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마법 통신구가 있었다.

* * *

아이네는 서둘러 마법 통신구에 손을 올려 종료했다.

“까, 깜짝이야.”

소리를 지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마법 통신구에 음성이 인식될 뻔했으니.

주위에 흩어진 종이를 쓸어 담으며 아이네가 물었다.

“갑자기 여기까진 왜 왔어요?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요.”

그러자 테고가 곤란한 나머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갑작스레 만나서 대화를 시작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소처럼 대해주는 그녀의 태도에 안심이 됐다.

그의 입에서 조금은 성마른 변명이 튀어나왔다.

“아까, 아까는…….”

입을 여는 동시에 테고가 어두운 서재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당황함과 안도가 뒤섞여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자 아이네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메시지가 적힌 종이를 품 안에 숨기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순간 저도 모르게 아까 수련장에서 보았던 테고의 어두운 얼굴이 떠올랐던 탓이다.

“아…….”

그 모습을 본 테고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도로 서재 바깥으로 나가 열린 문 앞에 섰다.

그때, 마법 통신구가 다시 반짝였다. 아마 인사도 없이 갑자기 통신을 종료해서일 터.

아이네가 입술 위로 검지를 올려 주의를 준 후, 가볍게 손으로 두드려 마법 통신구를 발동시켰다.

[무슨 일 있는 게냐?]

[아, 아닙니다. 아이네가 불러서요.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테고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통신구에 가까이 붙어 속삭이듯 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멀찍이서도 모든 걸 듣고 있던 테고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나딘 공자 흉내를 내는 건가.’

그렇게 다시 마법 통신구를 끈 아이네가 서재 밖으로 나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그녀가 조용하지만 빠르게 테고를 채근했다.

“왜 여기까지 왔냐니까요? 그리고 서재에는 어떻게 올라온 거예요?”

그러고는 그의 등을 밀어 반대편 복도에 위치한 제 방으로 이끌었다.

입으로는 왜 여기 있느냐 물으면서도, 당황한 나머지 그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까진 미치지 못했다.

“잠시만 기다려 봐요. 옷은 갈아입어야 하니까.”

얼떨결에 아이네의 방 응접실까지 들어오게 된 테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침실 안쪽으로 사라지자 테고는 긴장이 조금 가시는 걸 느꼈다.

다행이다, 평소대로여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테고는 다시 등을 곧게 세웠다.

‘잠깐. 여긴, 공녀의 개인 응접실인데?’

그녀의 마음을 살피러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런 만큼 아이네에게 말도 없이 혼자 내려가기엔 테고는 꽤 소심해져 있었다. 결국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아이네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한편, 아이네는 재빨리 서랍 안에 종이를 쑤셔 넣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시간 관계상 씻지는 못하겠지만 어차피 핑계였으니 상관없다.

나딘이 의심하기 전에 옷만이라도 갈아입고 다이닝룸으로 내려가야 하니까.

새로 갈아입은 옷의 단추를 꿰는 아이네의 손이 조금 떨렸다. 바로 조금 전에 알게 된 사실이 이제야 약간 실감이 났다.

[왜? 아이네가 뭔가 새로운 걸 이야기하든?]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말해줄 순 없어. 그건 법칙에 위배되는 거니까.]

아직은 나딘과 아버지에게 자신이 ‘진실의 눈’이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걸 숨기는 게 좋을 듯했다. 제가 들었던 대로라면,

‘아마 지금 나딘이나 아버지께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커.’

테고 때문에 놀란 나머지 사라를 부르지 않아서일까. 옷을 갈아입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약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슥 빗으며 응접실로 향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몰래 서재로 뛰어간 탓이다.

“많이 기다렸죠? 혼자 입는 건 시간이 좀 걸려서……. 오, 오빠?”

“너, 너어!”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더 최악인 건 제 안이함이었다. 급한 상황이 되자 그를 또 습관처럼 달리아나 다른 동성 친구 대하듯 취급했다. 이래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다른 일로 머리가 복잡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이리로 데려오고 말았다.

그녀의 응접실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테고와 눈을 부라리는 나딘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아, 정말 요즘 일진이 왜 이래.’

아이네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지위도 테고보다 낮고 나이마저 한 살 어린 나딘이 둘을 나란히 세워놓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저는 얘는 못 믿어도 경은 믿었습니다. 손님용 응접실과 미혼 영애의 응접실은 다르단 걸 모르십니까?’

‘아냐, 내가 이쪽으로 데리고 왔…….’

‘네가? 씻는다며?’

‘…….’

마침 알베르토가 나타나서 달리아 영애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한참을 더 서 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오늘 저녁 식사의 후식은 달콤한 셔벗이었다. 격일로 나오는 오징어가 들어있지 않은 메뉴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이건 잔소리 때문일까, 서재에서의 일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요 며칠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연달아 닥쳐서일까.

“너, 왜 이렇게 손을 떨어?”

아무래도 나딘의 잔소리 폭격 이후, 심신을 진정시킬 시간이 부족해서였나 보다. 디저트 스푼을 든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힘을 꽉 주고 있으면 거의 알아채지도 못할 미세한 움직임인데도 나딘은 금세 알아보았다.

“아, 이거?”

서재에 들어갔다 온 걸 들키지 않았다는 데에만 신경 쓰느라 아이네의 머리는 적절한 핑계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자 나딘이 테고를 노려보았다.

“아까는 그저 응접실에 앉아 있기만 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잘못 짚었어. 그쪽 아니야.

이 오해를 어찌 풀어야 하나 싶은 찰나, 테고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요즘 공녀가 제게서 호신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잘게 떨리는 아이네의 손을 보고 아픈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 헤이안드로 대공의 일로 마음이 불안정해 보였는데, 내가 너무 몰아붙여서…….

테고는 정말로 제 탓이라 여기며 깊이 반성했다.

그런 테고의 마음을 모른 채, 아이네는 변명거리를 생각해준 그에게 속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 그래. 요즘 단검 다루는 법도 배우고 있거든.”

하지만 나딘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아이네가 쥐고 있던 스푼으로 단검 쥐는 시늉을 해 보였다.

“봐봐, 이렇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손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었나 봐.”

비록 지난번처럼 나이프는 아니지만 이번에도 역수로 쥐는 동작이 완벽했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제법 그럴듯한 모습에 나딘은 그제야 의심을 거둔 듯했다.

“근데 왜 갑자기 단검술을 배워?”

“전쟁이라도 나면 나도 유사시엔 내 한 몸 정도는 지켜야 할 거 아냐.”

아이네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전쟁이 날 거 같아?”

그러자 나딘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안 그래도 신경 쓰고 있던 전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바람에, 오늘 처음 온 손님인 달리아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것이다.

예전 같으면 무슨 얼빠진 소리냐고 물었을 테다. 하지만 아까 서재에서 들었던 말 때문인지 나딘의 이런 태도가 새롭게 보였다.

‘진실의 눈은 무슨, 그냥 책빙의한 거라서 아는 거지.’

하지만 아이네는 시치미를 딱 떼고 턱을 치켜올렸다.

“그냥, 요새 시국이 시국이잖아.”

그러자 맞은편에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있던 달리아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전쟁이요?”

“아…….”

여기에 남부의 곡물 유출 사안을 모르는 외부인도 있었지.

테고와 아이네, 나딘의 시선이 서로 빠르게 얽혀들었다. 특히 나딘을 향한 아이네의 시선이 매서웠다.

그러게 왜 농담처럼 한 말을 다큐로 받아들여선!

이제 원작에서처럼 반란에 가담할 이유가 사라진 만큼 달리아 영애는 모르고 있는 게 좋았다.

나딘이 먼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얘가 가끔 꿈에서 봤는지 헛소리를 할 때가 있어서요.”

아니, 그런 식으로 인신공격을 하면 안 되지!

둘러대려고 내놓은 말을 부정할 수도 없고.

아이네가 무어라 반박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릴 때였다.

달리아가 쓰게 웃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남부의 곡물 비축량과 관련된 사안 아닌가요?”

“어, 어떻게……?”

나딘이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는 급히 입을 막았다.

‘곧 전쟁 난다고 아주 광고를 해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아이네가 수습을 위해 변명을 이어가려던 참이었다.

“재무부로 남부 곡창지대의 출입 현황 자료도 들어오거든요. 세금 산정의 기준이 되어야 할 테니까요.”

디저트 스푼을 내려놓고 식사를 마친 달리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물론 장부상의 숫자들만 보자면 의심스러운 건 없어요. 세금도 예년과 비교해서 꼬박꼬박 잘 납부하고 있고요.”

나딘처럼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반짝반짝 빛이 나는 달리아였다.

“남부에서 취급하는 곡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서류의 양도 어마어마하지요. 그래서 다들 총계만 대충 맞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하지만…….”

달리아의 입가가 살짝 비틀어졌다.

“장부를 볼 때, 시간은 없고 의심스러운 부분을 빨리 찾고 싶으면 말이지요.”

점점 더 낮아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다.

“주석만 보면 돼요. 거기에 모든 오류와 횡령의 흔적이 남아있거든요.”

오랜만에 동류를 만난 나딘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그저 개인적인 횡령이라기엔 너무 동시다발적이고 규모가 커서 혹시나 했는데……. 전쟁 준비라면 모든 게 설명되는군요.”

아이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똑똑하고 영리한 달리아 영애를 고작 꿈 얘기로 속이려 했다니.

아이네는 나딘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노려봐주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기왕에 이렇게 된 것, 어차피 이제 악역이 아니게 된 그녀를 포섭하는 편이 낫겠다고.

* * *

식사를 모두 마친 그들은 응접실로 향했다. 이번에도 테고가 멋들어진 제국 전도를 그려냈다.

남부에서부터 곡물을 반출한 일행이 지나간 길과 추정 경로가 그 위에 덧그려졌다.

“그런데, 왜 리테루온 영지에서 바로 테르미누스 산맥으로 이어지는 건가요?”

“그야 최대한 국경을 빨리 넘어서 이동하는 편이…….”

“바로 옆의 더 빠르고 편한 길을 두고요?”

달리아가 리테루온 영지를 관통하는 길의 중간쯤에서 과감하게 오른쪽으로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곳은…….”

“맞아요, 저희 영지인 에펜베르크예요.”

이건 단순한 국외 밀수가 아니었다. 곡물이 연합왕국으로 흘러간 게 맞고, 전쟁에서 군량미로 쓰인다면 이건 이적 행위였다. 그야말로 적을 이롭게 하는 내부의 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적 행위의 최소 형량은 사형이었다.

이해되지 않는 새로운 경로에 아이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펜베르크 영지는 연합왕국의 바로 옆이잖아요. 국경을 넘으려면 검문이 엄청 까다로울 텐데. 굳이 그쪽을 통해서 갈까요? 차라리 산을 타는 게 낫지.”

달리아가 고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자들은 지금 돈을 준다면 뭔지 확인할 생각도 없을 거예요. 그게 나라를 팔아먹게 되는 일이라고 해도요.”

“그자들이라면…….”

방금까지도 생기로 가득하던 달리아의 눈동자가 텅 빈 것처럼 공허해졌다. 그리고 희미하게 걸렸던 웃음기마저도 싹 사라져 무표정이 되었다.

“제 아버지인 에펜베르크 후작과 오라버니인 에펜베르크 소후작이지요.”

“…….”

원작에서고, 여기서고 방탕하고 무능력하기 이를 데 없는 부자였다. 거기다 달리아에게 후작가의 내정을 떠넘긴 것도 모자라, 팔려갈 날만 받아놓은 물건처럼 취급했다.

아무리 보수적이고 유난히 여성을 낮잡아 보는 동부라고 해도 그들은 좀 심한 편이었다.

결국 데뷔탕트도 치르기 전에 보호해줄 어른 하나 없이 황도로 온 달리아는 모든 걸 혼자 해내야만 했다.

그런 달리아가 후작성의 집사와 관료들을 통해 영지 사정을 챙기지 않았다면 진작에 파산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마 더 이상 뇌물을 받아먹을 구석도 남지 않았을 테니까요. 돈만 준다면 국경을 넘어가는 물건이 뭔지 알아보지도 않고 눈감아줄 거예요. 국경 검문소 장부를 조작하기가 쉽진 않지만 완전히 불가능하지도 않아요.”

거의 확신에 차서 말하는 달리아의 음성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확실히 제 영지에서 에펜베르크로 넘어가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평소에도 병력 이동이 잦은 편이라 상단 행세를 했다면 일이 더 쉬웠을 겁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저 종이 위의 까만 선이었다. 그러나 테고의 눈에는 그 외의 다른 것들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쪽 지역이라면 공작께서 누구보다 훤히 아실 테니까요.”

나딘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했다.

정확한 경로나 곡물 유출의 흔적에 관해선 테고의 의견을 신뢰할 만했다. 3년간의 반란군 진압 작전이 그를 한층 더 치밀한 군사 전문가로 거듭나게 했으니까.

“하지만 이 역시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입니다. 확실한 물증이 나오지 않는 이상 영애의 추측만 믿고 모든 인력을 집중할 순 없어요.”

그러나 직접 현장을 둘러보지 않고서 결정하기엔 너무 큰 사안이었다.

나딘에 말에 잠시 고민하던 테고가 제안했다.

“그럼 이 내용을 내일 폐하께 보고드려도 되겠습니까?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에펜베르크 영지도 함께 조사할 수 있을 겁니다.”

“예, 그래주세요. 저는 제 예상이 맞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테고가 달리아를 새삼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확실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일에 제 영지가 연루되었을지 모른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의심받는 정황만으로도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테고로서는 달리아가 어째서 스스로에게 흠이 될 만한 추측을 쉽게 내어놓는지 의아했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으나 이 역시 직접 가서 파악해야 할 일이다.

“영애가 그토록 확신한다면야, 에펜베르크를 경유했을 경우도 유력한 조사대상으로 포함하겠습니다.”

테고가 지도를 잘 갈무리해서 품 안에 넣었다. 에펜베르크 영지를 통해 연합왕국까지 이어진 선이 그려진 채였다.

확실히 험준한 산맥보다는 평지를 달리는 편이 훨씬 쉬울 테다. 이게 사실이라면 반출된 곡물은 벌써 연합 왕국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

“…….”

뜻밖의 동료를 획득하게 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고 나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잠깐! 생각해보니까 테고 경이랑 달리아 영애는 거의 초면이잖아?’

그렇다고 이제 와서 둘을 친하게 만들기엔……. 피차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티가 너무 많이 났다.

멀뚱멀뚱 앉아서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한 나딘과 대화를 이어주기엔 달리아가 아깝고.

무슨 말을 해야 갑자기 싸늘해진 이 분위기를 부술 수 있지?

“아!”

아이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달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황녀 전하의 탄신일 선물을 의논하고 싶다고 하셨죠?”

달리아는 조심스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건으로 공녀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요.”

“저한테요?”

어딘지 모르게 쭈뼛거리며 말을 하기 꺼리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그때 그…… 오징어 캔디를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엥? 오징어 캔디를 선물로 드리려고요?”

아이네의 말에 달리아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어제 공녀님께서 주신 게 너무 맛있었고, 또…… 황녀 전하께서도 굉장히 좋아하는 기색이셨으니까요.”

으응? 생각도 못 한 아이템 선정이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감탄해 마지않는 오징어 관련 식품이었지만 정작 아이네에겐 혐오 식품이었다. 그랬던 터라 그쪽으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아니, 그게. 황녀님의 탄신일 선물로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아요! 아마 황녀 전하께서는 보석이나 드레스보다도 그걸 더 좋아하실 거예요. 확실해요.”

진짜로 보석보다 그걸 좋아한다고?

다들 오징어에 너무 과몰입했어. 좀 빠져나오세요.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이네가 나딘을 빤히 응시했다.

“왜?”

“오빠, 갖고 있는 오징어 캔디 다 내놔 봐.”

그 말에 나딘이 펄쩍 뛰었다.

“너, 너, 그거 전부 압수해가는 바람에 이번에 로버트가 갖고 온 게 전부란 말야.”

“그래서 몇 갠데?”

“…….”

나딘은 아이네의 시선을 회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오빠! 황녀님이 몇 살이신 줄 알아? 이제 8살이 되신다고. 오빠는 스물하나잖아. 철 좀 들어라.”

평소 나딘이 하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아이네가 혀를 찼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달리아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께서도 요정님의 오빠가 주셨다고 하면 좋아하실 거예요.”

달리아의 말에 나딘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아이네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요정님의 오빠……? 설마, 그 요정이란 게.”

“어머.”

달리아가 모처럼 소리 높여 웃었다. 늘 경계심을 담아 바짝 올라가 있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지고, 매끈한 입술이 길게 벌어졌다.

사교계의 닳고 닳은 귀부인들처럼 그저 맞장구 쳐주느라 내는 가식적인 웃음소리가 아니라, 딱 그 나이대의 소녀가 낼 법한 낭랑한 웃음소리였다.

역시 달리아는 원작에서처럼 잔뜩 날을 세운 모습보다는 지금이 보기 좋았다.

“컥, 황녀님한테 요정이라고 사기라도 쳤어? 그거 황족 기만죄 아냐?”

한창 좋은 분위기에서 나딘이 또 초를 쳤다. 아이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요정보다 귀한 달리아의 진짜 웃음을 감상 중인데,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저번에 어획량 보고서 실수한 거 아버지는 모르시지?”

그리고 나딘에게 철퇴를 내리쳤다.

“아니, 여기서 그 말이 왜 나와.”

그가 쩔쩔매는 사이, 아이네는 이 틈에 쐐기를 박았다.

“그럼, 황녀 전하한테 오징어 캔디 다 드리는 거다?”

“……그래.”

그렇게 나딘은 영지에서 로버트가 공수해 온 신선한 오징어 캔디를 다시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아이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물량을!

모두의 신경이 달리아 영애와 전쟁, 황녀의 탄신일 준비에 쏠린 사이.

테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내내 참았던 숨을 뱉어냈다. 갑작스럽게 다른 사안으로 흘러간 이 상황이 고맙게만 느껴졌다. 제대로 부딪쳐보라며 조언해준 칼릭에게는 미안하지만.

‘역시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무엇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를 대하는 아이네를 보고 새삼스레 느꼈다. 거절당했을 때 잃게 될 이 일상을 자신은 아직 감당할 수 없었다.

* * *

테고와 달리아가 무사히 자신들의 저택으로 돌아간 깊은 밤.

아이네는 아까 마차 시트 안으로 대충 밀어 넣은 단검을 어떻게 가지고 들어올 것인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마차 보관소까지는 너무 먼데…….’

다른 곳도 아니고 거기까지 가면서 사용인이나 경비병 하나 만나지 않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시킬 수도 없다.

상자에 넣거나 천으로 꽁꽁 감싸지 않는 이상 그 단검은 아이네 말고는 누구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원작이 나한테 해준 게 뭐야! 은신 능력, 이런 거 하나만 줘도 얼마나 좋아.’

사라가 곱게 빗어준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아이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내가 왜 직접 가지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

얼떨결이긴 했지만 침실에 있던 단검이 황궁 기사단 수련장까지 소환됐다. 그럼 같은 공작저 안에서는 더 쉬울 테지.

그런데…….

“뭐, 뭐라고 말해야 돼? 소환술 같은 거 하나도 모르는데…….”

어릴 적 읽었던 <해리 포터>에선 ‘아씨오’라고 주문을 외우면 물건이 소환되던데, 여기서 그런 게 통할 리도 없고.

에이, 몰라.

“나, 원한다! 소환! 단검!”

소환됐다.

정말로…….

* * *

황녀의 탄신일 연회 날 아침이 밝았다.

데뷔탕트도 치를 수 없는 어린 나이의 황녀인 만큼 조촐한 가든파티 형식으로 열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참석자들도 황녀 나이 또래의 어린 영애와 영식, 그리고 친분 있는 몇몇 미혼 영애 정도가 다였다.

아니, 다였어야 했다.

“뭐야? 나 잘못 온 거 아니지?”

마차를 타고 황녀궁 앞에서 내린 아이네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초대장에 적힌 대로라면, 간단한 티푸드와 생일 케이크 정도가 함께하는 소규모의 파티여야 할 텐데?

황녀궁의 정원은 황녀의 연령대에 맞게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어머나! 베룸 공녀님이 오셨어.”

“오늘은 꼭 공녀님과 이야기를 나눠봐야지.”

거기다가,

‘이 어마어마한 규모는 또 뭐야?’

아이네는 자신이 ‘조촐하다’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건지 잠시 고뇌에 빠졌다.

본래대로라면 참석 인원이 그리 많지 않은 만큼 테이블도, 음식도 적어야 했다. 그러나 아이네가 참석한다는 걸 알게 된 황제가 규모를 키웠다.

그 탓에 전례 없이 황녀궁 전체를 연회 장소로 삼은 대규모 사교 행사가 되어버렸다. 아이네와 황녀를 주축으로 사교계를 재편하겠다는 황제의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난 연회였다.

초면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줄 때까지 인사를 올릴 수 없다.

그래서 공녀인 아이네에게는 신분이 높은 황녀와 안면을 튼 달리아 영애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개만 숙였다.

‘으……. 역시 아직은 적응이 안 돼.’

데뷔탕트나 다름없는 드레스의 향연이었다. 그 사이를 지나 아이네는 정원의 가장 중앙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쳐 오는 동안 그녀는 터키석이 가운데에 박힌 풍성한 리본을 열 개도 넘게 본 것 같았다.

‘유행이라더니, 정말이었네.’

뜻하지 않게 황도의 유행을 주도하게 된 아이네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로열티라는 개념이 없는 세계관에 절망하면서.

“아, 요저……. 공녀!”

실수로 마음으로만 생각하던 호칭을 부를 뻔한 티아가 손을 흔들었다.

어느덧 티아의 앞에 선 아이네가 무릎을 살짝 구부려 인사했다.

“에스피오의 영광된…….”

“으응, 아니, 아니. 이제 그런 인사는 하지 않아도 좋아요. 왜냐하면, 우린, 우린…….”

자그마한 입술을 달싹거리던 티아는 이번에도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네의 다정한 눈빛에 다시금 용기를 얻었다.

괜찮아, 기회는 또 올 거야!

“본녀가 손수 초대한 손님들의 자리는 이쪽이에요!”

과연 어려도 황족은 황족이었다. 호스트다운 면모를 보이며 티아는 아이네를 상석의 테이블로 이끌었다.

‘평소에 나한테 보여주는 모습이랑 너무 다른데?’

달리아 영애도 그렇고, 티아 황녀도 자신 앞에서는 무해하고 귀여운 모습만 보여주더니.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테이블에는 이미 달리아가 와서 앉아 있었다. 황궁에 출근할 때와는 달리 싱그러운 연두색 드레스를 입었다.

“아, 달리아 영애.”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공녀님.”

붉게 굽이치는 머리카락과 함께 어우러지자 달리아는 정말로 한 떨기 우아한 장미 같았다. 그러고는 아이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저 사라가 입혀주는 대로 입고 나온 아이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의 의상은 황녀의 탄신일인 만큼 연한 오렌지빛이 메인이 되는 드레스였다.

비교적 단신인 아이네의 키를 감안하여 허리선이 높게 올라왔다. 그리고 그 위를 두툼한 공단 띠로 둘러 맵시 있게 리본으로 마무리했다.

어깨엔 과하지 않은 퍼프와 레이스를 더해 산뜻하면서도 어느 곳 하나 부족하지 않았다.

베룸 영지에서 미리 맞춰 온 의상 중의 하나였다.

‘으응, 분명히 최신 유행 디자인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유행에 뒤떨어진 건지, 앞서 나가는 건지 모를 노릇이다.

아무리 유행이 빠르게 변화한다고 해도 드레스를 맞춘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패션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의 눈에도 다른 드레스와 미세하게 다른 점이 보였다.

전체적인 드레스의 선부터 주로 사용되는 원단까지.

의도치 않게 조금 튀는 복장이 되어버린 아이네가 어색하게 웃었다. 데뷔탕트 때는 정신이 없어서 주의 깊게 살피지 못했다.

그런 아이네에게 달리아가 작게 소곤거렸다.

“항상 공녀님의 차림은 독특하고 전위적인 느낌이 있어요.”

전위적이라는 말……. 패션에서는 반드시 칭찬은 아니지 않나?

한순간에 아방가르드 패션 리더가 된 아이네는 진땀을 흘렸다. 아무래도 영지로 가면 마담 클로제와 면담이 필요할 성싶었다.

이번에도 베룸과 황도 사이에 미묘한 간극이 있었으나, 아이네도 연회에 참가한 모두도 그저 예사로 넘기고 말았다.

* * *

티아 황녀를 측근에서 모시는 베르너 자작부인의 안내로 연회장은 크게 두 무리로 나뉘었다.

열 살 남짓의 어린 영애, 영식들과 이미 데뷔탕트를 치른 영애들로.

그리고 데뷔탕트를 치른 미혼 영애 무리의 중심에는 아이네가 있었다.

‘이거 누군가 프락치가 있는 게 분명해.’

원하지도 않고, 원한 적도 없건만 어쩐지 그녀를 강제로라도 사교계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아이네는 아까부터 다 외우지도 못할 수의 영애들에게 인사만 받고 있었다.

“안녕하셔요, 베룸 공녀님. 하이델 백작가의 장녀 데이지여요.”

하이델 백작가라. 친황파까지는 아니어도 비교적 황실에 우호적인 중립파 가문이었다.

영지에서 했던 연감 수업의 효과를 톡톡히 체험하며 아이네가 부드럽게 고개를 까닥였다.

“반가워요, 하이델 영애. 아이네이스 베룸입니다.”

날씨와 시시콜콜하고 가벼운 잡담이 이어지고 나면 또다시 새로운 영애가 나타나 무릎을 굽혔다.

“앗, 베룸 공녀님. 오늘도 너무나 아름다우십니다. 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한둘이지. 영애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자 체력이 약한 아이네는 금세 지치고 말았다.

하아, 집에 가고 싶다.

‘내가 여기에서 계속 인사만 받느니, 차라리 집에서 나딘이랑 오징어 잼 먹는다.’

물론 진짜 먹겠다는 건 아니다. 그만큼 지겹고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다른 소설에서 흔히 보았듯 피 말리는 기 싸움은 하나도 없었다. 정말 이상하리만치 모두들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런데도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웬만한 영애들의 인사를 다 받고 나서야 아이네는 달리아 영애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쉬러 갔나.’

아까부터 어쩐지 점점 창백해져 가는 안색이 신경 쓰였던 참인데.

그때, 유난히 야망 가득한 눈으로 아이네를 바라보던 한 영애가 입을 열었다.

“달리아 영애는 어디로 간 걸까요?”

마침 아이네도 궁금했던 차라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어쩐지 우쭐해진 영애가 다들 들으라는 듯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공녀님께 밀려서 꼬리라도 말고 도망쳤으려나요?”

잠깐, 단어 선택의 상태가……?

아이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뒤이어 조롱하는 듯한 언사가 계속 이어졌다.

“후후, 정말요? 그 도도하기 그지없는 영애가?”

“모르죠, 어디 구석에라도 가서 울고 있을지.”

영애들 사이에서 비웃음의 물결이 일었다. 아이네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요, 영애.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해요?”

최초로 목소리를 내었던 영애에게 아이네가 물었다. 그러자 순진한 눈망울을 끔뻑이는 영애가 왜 그러냐는 듯 되물었다.

“네? 제가요?”

“…….”

질문을 던지는 영애는 물론이고, 그에 동조하던 다른 영애들도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네는 그제야 원작에서 달리아를 몰아세웠던 또 다른 환경이 바로 사교계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말이 없자 다시 영애들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말이 후작 가문이지, 그냥 변방에 처박힌 쭉정이 땅이 아닌가요.”

“어머, 그래도 그곳에서 나오는 술은 제법 맛이 좋다고요.”

“흥! 그깟 싸구려 리퀴르 따위.”

굉장히 인위적이고, 작위적이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직전까지 사교계의 꽃으로 추앙받던 달리아다. 거기에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처럼 부유한 영지는 아니지만 변방을 지키는 후작 가문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아이네와의 대결 끝에 패배하거나 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그녀가 서열 1위라면, 달리아는 그저 2위 정도로 밀려난 것뿐이었다.

게다가 저 중에는 달리아와 친하게 지냈던 영애도 있을 거고, 그녀보다 지위가 낮은 영애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유난히 달리아 영애에게만 적대적이네.’

한 번쯤은 다른 영애의 험담을 할 만도 한데, 다들 세뇌라도 받은 것처럼 달리아의 이야기만 했다.

마치 원작 소설의 마지막 부분처럼 있는 힘을 다해 그녀를 악역으로 만들려는 모습과 비슷했다.

아이네는 혀를 끌끌 차며, 슬그머니 무리의 틈에서 빠져나왔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작가가 문제야.’

그러고는 달리아가 있을 법한 한적한 장소를 찾아 움직였다. 운 좋게도 지난번처럼 바람이 잘 통하는 외진 곳을 금방 찾아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곳에는 달리아가 있었다.

“달리아 영애.”

“제가 왜 죄송하다고 했는지 아시겠죠?”

“…….”

아이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대뜸 달리아가 대답했다.

“몸이 안 좋아서 한 번이라도 빠지면 금세 남들 입에 오르기 쉬운 곳이에요.”

아니, 아마 달리아에게만 그랬을 테다. 마치 끊임없이 악역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주위 환경이 그녀를 벼랑으로 떠밀었겠지.

“그래도 엄청난 악의가 있어서 그렇게 구는 영애는 거의 없어요.”

도대체 왜 이렇게 달리아에게 가혹하게 구는 걸까. 다른 등장인물들은 이 정도로 센 영향력 아래에 있지는 않았는데…….

아이네가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런 걸까요.”

“학습된 거죠. 이 길뿐이라고.”

서로 다른 의미의 질문을 하고, 다른 의미의 대답을 했는데도 묘하게 아귀가 맞았다.

그리고 아이네는 여태 몰랐던 원작의 ‘법칙’이란 걸 새로이 하나 깨달았다. 주인공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에겐 꽤 높은 자유도를 주면서도 악역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걸.

‘그래서 그 최종 악역도 반란군이 괴멸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는지 몰라.’

* * *

아이네는 달리아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원작 소설이라는 게 있고, 거기에서 그녀의 역할이 따로 있었노라고.

그러나 아이네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달리아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영애들에겐 이것뿐이거든요. 그리고 저한테도 그랬고요.”

그럼 이제 달리아는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걸까.

“각자가 가진 재능과 능력, 그런 것보다 미모와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이 그 사람 자체처럼 여겨지니까요.”

달리아는 아이네의 대답이 굳이 필요하진 않은 것 같았다.

“작위도, 공직으로 가는 길도 모두 차단된 영애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어요.”

그건, 원작 여주의 정체성을 위한 설정이고.

“끊임없이 평가하고, 평가당하는 대상이 되어요. 누군가의 평가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요.”

“그게 뭔가요?”

“내가 평가하는 입장이 되는 것.”

이게 달리아 영애를 악역으로 만들기 위한 설정이었을 테다. 아이네는 계속해서 드는 위화감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달리아는 확실하게 원작 속 역할에서 벗어났다. 그런데도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자꾸 그녀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이유가 뭐지?

원작 소설과 이 세계가 영애들에게 마냥 유리한 곳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 인권이 마냥 끔찍하게 낮은 곳도 아닌데. 무언가 다른 뒷이야기가 있는 걸까.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달리아가 아이네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수줍게 이어 말했다.

“저는 운 좋게도 공녀님 덕분에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된 사람이에요.”

아이네는 직감했다. 원작 때문인지, 숲속의 그 존재 때문인지는 몰라도 결말이 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때가 올 때까지 달리아를 곁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하지만 가엽게도 저 어린 황녀님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렇게 길러지거든요.”

그 말에 아이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달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황녀님께 가볼까요? 아마 우릴 기다리고 계실지도 몰라요.”

아이네는 모르겠지만 달리아는 과거 황녀궁에 불려가던 어린 영애들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영애나 영식일수록 주로 화젯거리 삼는 말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도.

“네!”

달리아는 아이네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 * *

“아아, 이건 우리 엄마가 사준 거예요.”

“머리도 우리 엄마가…….”

“엄마가 신으라고 했는데, 다른 구두로…….”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영애들과 영식들이 모인 자리였다. 개중에는 조숙하게도 보석이나 값비싼 사치품의 가치를 아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직 부모가 그들의 세계 자체일 터였다. 대화 중간중간에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황후 폐하가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면 다들 주의했겠지만, 공식적으로 황후는 요양을 위해 황도를 비운 상태였다.

“아하! 그렇군요. 영애에게 참 잘 어울려요.”

“영식의 구두도 참…….”

티아는 아무렇지 않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베르너 자작부인이나 아르비드처럼 다 큰 어른들의 생각과는 달리 티아는 별 감흥이 없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마마마다. 그리울 리가.

하지만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근처에서 이를 지켜보다가 견딜 수 없어진 베르너 자작부인이 다음 순서를 진행했다.

“곧 선물을 열어볼 시간이니 밖의 영애들께도 아까의 중앙 정원으로 모이라고 전해주세요.”

“예, 부인.”

* * *

아이네는 이제 와서 다시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이 인형을 생일 선물로 고른 건 잘못된 선택 아닐까? 굳이 이곳에 없는 걸로 할 필요가…….’

이게 다 아까 전위적이니 어쩌니 한 발언들 때문이다.

정말이지 아이네는 원작에 세뇌된 것처럼 구는 저 영애들에게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맨 처음보다는 맨 뒤에 선물을 주는 게 덜 주목받으리라고 생각했던 걸 후회하게 되었다.

“이건 테르미누스 산맥의 경계 근처에서 난다는 귀한 약초여요. 만병통치약이라고 하더라고요.”

으응, 산삼인가. 저건.

뭐가 되었든 아홉 살 정도로 보이는 영애가 여덟 살의 황녀에게 줄 탄신일 선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저들의 부모가 챙겨줬겠지.’

그리고 가장 많은 선물은 보석류였다. 티아가 매일매일 바꿔 끼어도 족히 한두 달은 걸릴 정도로 많은 보석 장신구들이 진상되었다.

그중에는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하고 티아에 대한 배려가 없는 선물도 있었다.

“황녀 전하께 드리는 구두입니다.”

딱 보아도 황녀에겐 작아 보이는 데다 사치스럽게도 크리스털로 만들어져 있었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신으라고 보낸 건지. 신고 바닥을 내딛는 순간 여기저기 깨질 뿐 아니라 깨진 조각들이 발을 해칠지도 모르는데.

“다음은 베룸 공녀님께서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아이네는 뭐가 되었든 반짝반짝하고 진귀한 선물들 가운데 이걸 내놓으려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과연 티아가 서운해하지 않을 것인가.

그녀로서는 황녀가 아직 어린아이라고 생각해서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보니 마냥 어리지만은 않은 듯해 뒤늦게 염려가 되었다.

“탄신일을 경하드려요, 황녀님.”

“고, 고마워요, 공녀.”

벌써 울지는 말고요.

그저 아이네가 선물을 줬다는 것만으로도 기쁜지 티아의 눈가가 벌써 불그스름해졌다.

곁에 서 있는 시녀가 아이네의 선물을 조심스레 풀어내었다.

“응?”

“저게 뭐죠?”

아무리 생소한 거라도 그렇지, ‘저게’라니요. 다들 말이 좀 심하시네요.

그래도 걱정했던 것만큼 최악의 반응은 아니었다. 그저 처음 보는 물건에 놀란 정도일 뿐.

완성된 곰인형은 아이네의 걱정과는 달리 제법 완성도가 높았다.

티아의 머리카락 색을 닮은 오렌지빛 도는 골드에, 눈도 티아와 꼭 닮은 오묘한 감람색이었다.

“이게 뭔가요. 본녀는 이런 것을 처음 보는군요, 공녀.”

오늘부로 아이네는 자신이 아방가르드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곰인형입니다, 황녀님.”

인형이라는 소리에 좌중에 소리 없는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어린아이에게 인형이라니…….

티아가 손수 곰인형이란 것을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러자 그것의 생김새를 그제야 확인한 사람들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와, 부드러워.”

특히 근처에 앉아 있던 어린 영애들과 영식들의 반응이 남달랐다. 확실히 어른들보다는 인형에 대한 편견이 없어서인 듯했다.

“축하드려요, 황녀 전하!”

“정말 귀엽네요.”

그리고 아이네는 또다시 권력과 신분의 힘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현재 저 곰인형에는 그다지 값비싼 재료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무도 흉을 보거나 하질 않는다.

아까는 그렇게 달리아 영애 뒷이야기를 늘어놓더니…….

값비싼 재료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선물들보다 정성은 가득 들어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아이네도 처음엔 눈과 코에 보석을 박아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으응, 아니지. 애착인형처럼 껴안고 자라고 준 건데 보석으로 만들면…….’

잘 때 뒤척임이 심한 나이일 아이들의 특성상 얼굴과 몸이 긁힐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네는 예쁘고 가벼운 단추를 둥글고 납작하게 갈아 눈과 코로 만들었다.

가장 공을 들인 건 바로 곰인형의 주재료인 원단이었다.

현대의 모찌 인형 같은 촉감을 주는 원단을 찾아냈다. 옷으로 만들어 입기에는 무겁고 땀이 나기 쉬운 재질이지만 무척 부드럽기도 했다.

‘곰인형 안에는 어차피 솜이 들어갈 거니까.’

그리고 속에는 깨끗한 솜을 채워 넣었다.

어려운 봉제는 베테랑인 사라와 안나가 수고해주었지만 곰인형의 디자인은 전적으로 아이네가 한 것이었다.

숲속에서 만났던 귀여운 다람쥐를 생각하며 한 땀 한 땀 그려냈다.

그렇게 완성된 곰인형은 겉모습만큼이나 촉감이 보들보들해서 껴안고 자기에 딱 좋았다.

‘처음엔 황녀의 애정을 저 인형으로 돌려보려고 만들기 시작했지만, 뭐 어때.’

벌써 마음에 든다는 듯 꼬옥 껴안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인형과 황녀 둘 다!

귀여운 것과 귀여운 것이 만나면 왕 귀여운 것이 되는 법.

또다시 의도치 않게 황도와 사교계의 유행을 이끌게 될 ‘인형’의 탄생이었다.

마지막 화룡점정으로 아이네는 곰인형의 머리 위에 자그마한 티아라를 올려놓았다.

“어머나! 보석이 저렇게 많이…….”

“정말로 황녀 전하를 위한 선물이네요.”

이 티아라야말로 곰인형에 들어간 재료비의 족히 100배는 될 테다.

그렇게 정성과 재력 모두 놓치지 않은 아이네는 당당하게 자리에 앉았다.

만약 선물 대회가 있어서 승자를 가린다면 그건 자신일 거라고.

‘그래, 성공할 줄 알았어!’

불과 5분 전에 했던 생각을 손바닥 뒤집듯 바꿔 행복회로를 돌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직 선물을 전달하지 않은 한 영애가 있었다.

“에펜베르크 영애의 선물이 가장 커서 마지막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래봤자 커다란 유리병 안에 든 오징어 캔디인데, 뭘.

아이네는 또다시 오징어에 대한 이 소설 속 사람들의 호감을 과소평가했다. 그리고 그것은 패착이 되었다.

시녀 여럿이 붙어서 포장을 뜯어내었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건, 성인의 허리 정도까지 올만큼 커다란 유리병이었다.

“안에 든 건 뭘까요?”

“흥, 에펜베르크 영지에서 유명한 게 하나 더 있지 않겠어요.”

“영애! 아무리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녜요? 황녀 전하께 마약을 진상하다니요, 호호.”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야.

하지만 아이네가 여기서 대놓고 지적하기엔 장소가 좋지 않았다. 영애나 귀부인들의 모임도 아니고 아직 어린 황녀의 탄신일 연회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렇게 큰 규모로 열린 건 처음이라는 듯했고.

자칫하면 분위기가 얼어붙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모처럼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느라 기뻐하던 티아가 상처받겠지.

‘달리아 영애. 내가, 내가 다음에는 꼭 다 무찔러줄게요. 두고 봐요.’

그때, 병 안의 내용물을 빤히 보던 티아가 외쳤다.

“앗! 설마, 오징어 캔디인가요?”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

아이네가 나딘에게서 강탈한 오징어 캔디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오징어 캔디요? 그게 뭐죠?”

“애도 아니고 누가 그런 걸 먹나요.”

생전 처음 보는 괴식에 대부분의 이들은 경계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정확한 속사정까지는 몰라도 아까부터 묘하게 경직된 분위기 정도는 티아도 알고 있던 바였다. 그래서 그녀는 연회에 참석한 모두에게 오징어 캔디를 조금씩 나눠주었다.

자신이 먹을 때마다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었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러길 바라는 순진하고도 기특한 배려였다.

그런 티아를 아이네가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걸요? 흐음.”

“하지만 황녀 전하께서 하사해주시는 거니 어쩔 수 없지요.”

그래, 처음엔 다들 그런 반응이지.

아이네는 포장지가 벗겨지고, 그 끔찍한 것이 모두의 입으로 들어간 뒤 딱 3초를 세었다.

캔디를 맛본 이들의 얼굴에 행복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앗, 이 맛은!”

“미미!”

방금, 여기서 들려서는 안 될 말이 들린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아이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에펜베르크 영애는 다르네요!”

“저도 늘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이번에는 그녀의 고개가 더 크게 기울어졌다.

뭔가……. 이상했다.

‘이거,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비밀이 있었나 보다.

경계의 숲에, 단검에, 이젠 오징어까지?

오징어 캔디의 또 다른 효능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마치 무엇에 세뇌라도 된 듯 달리아를 공격하던 모두가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오징어 캔디가 원작의 영향력을 막는 아이템이야?’

아이네는 믿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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