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오징어가 세상을 구한다
누가 보아도 급격하게 변한 분위기에 티아는 자랑스레 가슴을 폈다.
그러다 달리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뒤늦게나마 그녀가 서운해하진 않을까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에펜베르크 영애. 본녀가 그대의 선물을 나누어 주었는데……, 괜찮지요?”
티아가 미안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달리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달리아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이미 황녀 전하의 것이오니, 모든 건 전하의 처분에 달린 일이지요.”
그렇게 티아가 받은 오징어 캔디의 절반가량이 참석자들에게 고루 나누어졌다.
심지어 어린 영애들과 영식들에게는 한 움큼씩 더 챙겨주기도 했다. 전부 합치면 적지 않은 양인데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직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준 달리아를 위한 선택이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단 한 명, 아이네만 빼고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아이네는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자꾸 제게 되돌아오는 오징어 식품과의 인연이 지긋지긋했다.
손바닥 위에 가득 담긴 오징어 캔디를 보는 아이네의 얼굴엔 시름이 가득했다.
“휴…….”
그건 그렇고 황녀의 대처가 제법이었다.
‘그 나이면 아직 먹을 거에 대한 소유욕이 상당할 텐데, 대단하네.’
역시 황녀는 황녀인가 보다. 아이네가 내심 감탄했다.
물론 그녀의 하사품을 받은 인원에는 황녀 앞에서 눈치 없이 엄마 이야기를 꺼낸 영애들도, 영식들도 포함되어있었다.
생각보다 대규모가 되어버린 황녀의 탄신일 연회가 그렇게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아직 어린 영애와 영식들은 뜻하지 않은 답례품을 안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이제 남은 건 몇몇의 미혼 영애들과 아이네, 그리고 달리아뿐이었다.
“황녀 전하, 아까 깜박하고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요.”
“우웅? 뭔가요, 영애?”
티아의 작은 볼이 쉴 새 없이 불룩거렸다.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달리아가 살포시 웃었다.
“이건 베룸 공녀님의 오라버니가 구해다 주신 거랍니다.”
“그!”
요정님의 오라버니?
티아가 서둘러 제 입을 꾹 막았다. 아직 다른 귀족들도 있는 곳에서 하마터면 말실수를 할 뻔했다.
그런 티아를 보는 달리아의 뺨도 아주 살짝 달아올랐다. 베룸 공자와는 데뷔탕트에서 마주쳤어도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베룸 공녀 역시 영지의 업무를 보는 데에 익숙하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땐,
‘나처럼 무능한 오라비 대신 일을 떠맡은 줄 알았는데…….’
공자니 공녀니 따지지 않고 함께 업무를 보아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본디 유능한 영식이나 후계자의 경우 영지의 고유 업무는 누이들은커녕 친형제와도 잘 나누지 않았다.
영지의 전권과 관련된 일일수록 더더욱.
아무리 복잡하고 힘든 일이라도 아랫사람에게 시키면 시켰지 형제와 의논하지 않았다.
그건 권력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니까.
그런데 보좌관도 아니고 여동생에게 세수와 세출까지 공개하다니. 달리아는 그런 영식을 처음 보았다.
거기다 유달리 밝아서 주눅 들지 않는 공녀의 성격은 분명 집안 환경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그렇게 어렴풋이 짐작만 했었다.
‘남매간에 그런 격의 없는 대화라니.’
그리고 베룸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어서 와라, 아이네.’
잔뜩 날을 세우고 방어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맥이 탁 풀렸다.
데뷔탕트를 치르기 전인 어린 소녀 시절부터 그녀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당황하거나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면 만만하게 여겨질 거야.’
그래서 외양뿐 아니라 내면까지 장미 넝쿨을 두르고 가시를 세웠다.
버릇이 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베룸 공자 앞에서 쌀쌀맞은 모습을 보였는데…….
살짝 미소 짓기는 했어도 달리아에게 큰 관심은 없다는 게 느껴졌다.
순간 얼음송곳 같았던 그녀 안의 장미 가시들이 뭉그러지는 걸 느꼈다.
그는 여동생인 베룸 공녀가 자리를 비웠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둘만 남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공자는 시종일관 담백한 태도였다.
‘참 이상도 하지.’
분명히 그가 다른 영식처럼 흑심을 품었다면 그 모든 기대감을 실망으로 돌릴 작정이었으면서.
그녀의 바람대로 그저 제 여동생의 손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태도를 보이자 묘하게 짜증이 났다.
과하게 화려하고 성숙한 제 외모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사실 어느 정도는 자신감이 있었다. 여태껏 달리아에게 다가오려던 남자들이 어디 그녀의 나이를 신경이나 썼던가.
그래서 사교계의 정점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더욱 발버둥을 쳤다. 적어도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아직은 자신을 쓸모 있다고 느끼게 해야 했으니까.
이대로 패배자 취급을 받으며 에펜베르크 영지로 돌아간다면…….
‘어디 돈 많은 늙은이의 재취 자리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분명 제 아비와 오라비는 누가 지참금을 두둑하게 낼 자인지만 고려해서 결정할 테다.
에펜베르크 영지는 북동쪽에 위치한 척박한 곳이었다. 연합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탓에 노략질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거기다 테르미누스 산맥이 애매하게 걸쳐 있어 면적에 비해 활용도가 낮기도 했다.
‘사실상 연합왕국이 급습했을 때 황도까지의 행군을 늦출 완충지인 곳이지.’
덕분에 국경 수비와 치안은 황실과 바로 옆의 리테루온 영지의 도움을 받아 왔다.
아마 제 아비와 오라비가 가장 탐냈을 사윗감은 리테루온 공작이었겠으나,
‘그분은 이미 베룸 공녀님과 인연을 맺으셨으니까.’
갑작스레 달리아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게 황태자비 자리는 가당치도 않다.
그렇다고 대공비의 자리를 노리는 건 더욱더 그랬다. 본디 대공가의 일은 황실에서도 개입을 못 하니만큼 더 현실성 없는 일이다.
제 가문에서 제시할 만한 지참금을 기꺼이 내어줄 가문이 어디가 더 있지?
‘……없어.’
적어도 열 살 이하로 차이 나는 또래의 미혼 영식들 중에서는 그랬다.
그걸 깨달은 순간 달리아의 낯은 파리하게 질렸다.
다행히 아버지와 오라비는 대부분의 낮과 밤을 술과 약에 절어 사는 치들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황도 소식을 느리게 받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곧 에펜베르크 영지까지 베룸 공녀와 리테루온 공작의 약혼 소식이 닿을 거다.
거기다가 황제에 의해 자신은 사교계의 정점은커녕 이상하게도 미움 받는 처지가 되었다.
‘아무리 손바닥 뒤집듯 처지가 바뀌는 사교계라지만…….’
요즘 들어 사교계에서 평판도 떨어지고, 친하다고 생각했던 영애들이 그녀를 하나둘 외면하기 시작한 참이다.
그래도 새로운 일을 맡게 되면서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을 달래 왔는데.
임시직 관료로 일하는 것도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른다. 달리아는 처음부터 자신은 베룸 공녀를 끌어들이기 위한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았다.
황제 폐하의 목적을 달성하거나 베룸 공녀가 리테루온 공작과 혼인하여 일을 그만둔다면 없던 일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러면, 그렇다면…….
‘사람을 보내서 더 중독성 있는 약물을 취급하라고 해야겠어.’
직접적으로 아버지인 후작과 오빠인 소후작에게 술과 약물을 제공한 적은 없다.
다만 그들의 방탕한 생활을 더는 견디기 힘들어졌을 때, 자주 가는 고급 술집에 약물 브로커가 드나들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었을 뿐.
달리아가 한 건 더 센 약물에 손쉽게 닿을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여준 일밖에 없었다. 그 뒤의 결과는 순전히 그들이 선택한 거였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내가 살아야 했으니까.’
이미 결과가 정해진 일이라고 해도 당장 닥치지 않게 시간만이라도 벌고 싶었다.
그렇게 서서히 조급함에 목이 졸려오는 나날 중 하루였다.
“에펜베르크 영애라고 하셨나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자신을 안내해주는 그의 뒷모습에서 어쩐지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베룸 공녀와 꼭 닮은 상큼하고 싱그러운 머리카락이 단정했다. 황녀 전하가 말했던 대로 정말 어쩌면 이 두 남매는 요정일지도 모른다.
‘공녀님도 공자님도 내가 이렇게 추악한 사람인 걸 아실까.’
어차피 사는 세계가 다른 분들인걸. 부럽긴 해도 욕심내진 않는다.
황궁에서 베룸 공녀와 임시직으로 일하기로 결정된 때부터 자신의 주변은 변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후작저로 산더미처럼 쌓이던 초대장과 안부를 묻는 편지들이 하루아침에 끊겼다.
누군가 다들 그녀를 외면하라고 명령이라도 내린 것처럼.
달리아는 본인이 선택한 일인 만큼 후회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피상적인 관계에 불과했던 자들이니 그다지 속상하진 않았으니.
외롭지 않았다. 그랬는데…….
달리아가 저택 안을 둘러보았다. 공작 남매의 성정만큼이나 따뜻하고 아늑하게 꾸며진 공간.
분명히 처음 와보는 곳인데도 기시감이 들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베룸 공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베룸 공녀는 첫 만남부터 너무나 귀여워서 눈길이 갔다고 치지만, 베룸 공자에게선 그런 것과 다른 강렬한 끌림이 느껴졌다.
‘어디서 본 적이 있나?’
황도로 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는데?
“일반적인 소고기 스테이크는 결의 반대로 잘라야 하지만 오징어 스테이크는, 자아…….”
오징어 요리 이야기가 나오자 묘하게 돌변하는 모습은 물론.
“주류는 성년을 넘긴 후 드시는 게 좋겠네요.”
“영애는 아직 어립니다.”
자신의 술잔을 빼앗으며 단호하게 말리던 모습까지…….
‘날 그런 식으로 대하는 남자는 처음이었어.’
그때를 다시 떠올린 달리아의 심장이 기분 좋게 도근도근 뛰기 시작했다.
“아차, 황녀 전하. 베룸 공자가 꼭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어요.”
“그게 뭔가요?”
티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혹시 내 생일을 축하해주려는 말인가?’
그러나 나딘은 직접 만나본 적 없는 황녀를 그저 여덟 살의 어린이로만 생각했다.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달리아를 어린애 취급했듯이.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나딘은 달랐다. 그의 특기는…….
“오징어 캔디를 드시고 이를 잘 닦지 않으시면, 오징어 요정이 그 대가로 이를 가져간다고 하더라고요. 베룸에선 아주 유명한 이야기래요.”
이번에도 잔소리였다.
“히끅!”
“선물을 드리기 전에 이를 꼭 닦을 건지 여쭤보라고 했는데…….”
달리아가 말을 길게 늘였다. 티아가 자그마한 손으로 제 입을 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꼭, 꼬옥 그럴 거라고 전해주어요.”
* * *
황녀의 탄신일 연회 이후, 베룸 공작저에는 수많은 초대장들이 쏟아졌다.
“데뷔탕트 때는 한 명도 초대를 안 하더니……. 예법이 무섭긴 무섭구나.”
아이네가 초대장을 하나하나 읽으며 어깨를 떨었다. 곁에서 레터 나이프로 초대장 개봉을 도와주던 사라가 푸스스 웃었다.
“전 베룸에 있을 때는 우리 아가씨가 공녀란 사실을 깜빡 잊었지 뭐예요.”
가뭄에 콩 나듯 오는 초대장에도 매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을 했으니, 결국엔 뚝 끊겨버렸었다.
“그럴 수 있지. 나도 잊고 살았으니까.”
예법상 신분이 낮은 영애들은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영애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었다. 그건 살롱이나 티파티와 같은 초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약간의 친분이 쌓이면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초대장을 보내는 건 허용이 되었다.
‘어쩐지 다들 기를 쓰고 한 마디라도 더 나누려고 하더니…….’
몇 마디 환담이라도 나누면 친분이 생긴 것으로 치는지, 모두들 초대장을 보내왔다. 베룸은커녕, 조금 더 엄격한 황도에서의 사교계를 처음 겪는 아이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곳의 초대에 응하실 생각이세요, 아가씨?”
“어디 보자.”
아이네가 먼저 지위가 높은 가문들에서 온 초대장을 한쪽에 모아 분류했다. 아무리 그녀가 사교계에 무지해도 그 정도는 알았다.
‘여기서 내가 괜히 너무 한미한 가문을 먼저 선택하면…….’
그 가문의 영애나 귀부인이 곤란해지는 건 물론이다. 게다가 그보다 지위가 높은 귀부인들이 초청하는 티파티나 살롱의 순회공연을 거절하기 어려워진다.
아이네의 손가락이 신중하게 가문의 문양을 하나씩 짚었다.
“여긴 중립에 가깝고, 여긴 친황파……. 아니, 귀족파에서도 날 초청했어?”
엄밀히 말하면 현재 황제의 반정에 타격을 입고 진영을 바꾼 쪽이었다.
“여긴, 여긴 아니지.”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몰라도 곡물 반출 사건까지 있었으니 얽히는 건 좋지 않았다.
일단 영 아니다 싶은 가문들을 그 안에서 추려냈다. 그러다 보니 책상 위에는 단 세 장의 초대장만이 남았다.
“흐음.”
아이네가 팔짱을 끼고 초대장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어차피 시간을 내어 참석해야 한다면 무언가 생산적인 결과를 내는 쪽으로 결정하는 게 좋을 테다.
그렇게 그녀는 요즈음 가장 신경 쓰이는 문제에 대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조건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는 곳은,
“여기다! 사라, 내가 답장을 쓰면 알베르토에게 가져다줘.”
아이네의 펜촉이 유려한 흘림을 남기며 바쁘게 움직였다.
* * *
초대장 답신을 모두 적은 후, 아이네는 홀로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테고가 기사단을 다시 비웠으니 당분간 그녀가 전담해서 처리할 일이 제법 되었다.
제2기사단이 황제의 명으로 제국 이곳저곳을 수행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주 출장과 동원으로 차출되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서 늘 황도로 돌아올 때면 밀린 서류 작업으로 바빴던 모양이다.
‘원작 남주인 케이어드 대공도 또 어딘가로 조사를 간 것 같던데…….’
당연히 같은 문제에 대해 다른 방향으로 조사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쩐지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다른 종류인 듯했다.
아무도 그가 무얼 조사하는지 알지 못하는 데다가 보조하는 기사도 없이 홀로 수행 중이라고 하니.
‘이거 원작대로 진행되는 거 맞아?’
원작에서처럼 두 주인공이 함께 반란군에 대해 조사하는 전개는 이미 물 건너갔다. 진압되고 없는 반란군을 조사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전쟁만큼은 비슷한 흐름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아이네의 건의로 조성되었던 도로 덕분에 수상한 움직임이 발견되었다.
다만, 그건 원작에서는 알 수 없었던 내용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엔 그에 대한 조사 때문에 테고와 베룸 공작가가 바빠졌다.
황제가 확실히 믿는 우방 가문이니까. 또한 그게 제2기사단장인 테고의 주요 업무이기도 했다.
반란군의 추적 조사도, 전쟁에 대한 조사도 아니라면 케이어드 대공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걸까.
‘근데 애초에 케이어드 대공은 왜 그렇게 제국 일에 솔선수범 나서서 움직이는 거지?’
원작에서의 반란군 조사도 그렇고, 지금의 일도 그렇고.
아이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다가 테고와는 달리 케이어드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대공이 된 게 아니었다.
헤이안드로 공국의 왕이자 황제가 반정을 일으킬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선대공은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있다.
그저 케이어드에게 미리 양위를 하고 물러나 있을 뿐.
‘부모 세대에서도 무언가 이런저런 설정이 있었는데, 참.’
워낙 짧고 간단하게 서술하고 넘어간 데다 산발적으로 흩어진 내용이라 기억에 남지 않았다.
아이네가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지금은 이런 과거의 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휴일에는 아까 답장을 보낸 살롱에 참석을 해야 하고…….
건국 기념일 연회도 멀지 않았다.
* * *
“어후, 아가씨! 이 머리띠 한 번만 해보세요.”
“사라……. 잘 생각해야 해. 예쁘다고 아무거나 하다가 내가 이상한 걸 유행시킬 수도 있다고.”
아이네는 마치 월계수 잎과 데이지 꽃을 한데 엮은 것 같은 머리띠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벌써 두 번째였다.
그녀가 데뷔탕트 때에 달고 나왔던 원석 브로치를 박은 리본은 이미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황녀의 탄신일 연회에 입고 나갔던 드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크진 않았던 퍼프는 응용에 응용이 이어져 파워숄더로 거듭났고, 허리에 두르는 공단 띠도 벌써 다채로워질 기미가 보였다.
‘왜 그렇게 획기적인 유행인 것처럼 유난을 떠는지 모르겠네.’
베룸 영지의 가장 고귀한 아가씨이니만큼 최신 유행에 따라 의상을 짓긴 했다.
하지만 노출에 꽤 보수적인 데다 이번만큼은 유난을 떨었던 나딘 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디자인에 가까웠다.
아이네가 무언가를 입고, 걸치고 나타날 때마다 충격받은 표정을 하는 걸 보면 유행이 지난 쪽은 아닌 듯했다.
‘응, 확실히 그건 아니지.’
처음에는 그저 좀 폐쇄적이고 교류가 적었던 영지의 특성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질감이 느껴졌다.
더 이상한 건, 그 이질감은 아이네만 느낀다는 사실이다.
사라에게 이야기를 해 보아도 그녀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했다.
그저 원작 소설이 있고, 중요한 전개에 필수적인 사건들이 있고, 그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갖고 움직였던 인물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책빙의자라는 아이네의 존재로 바뀌는 게 있는가 하면, 바뀌었다고 믿었지만 결국엔 우회해서 원래대로의 전개로 나아가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원작의 영향력인지는 몰라도 세뇌된 것처럼 구는 사람들도 있고.’
아직은 짐작이지만, 아이네가 크게 주요 전개를 트는 걸 막기 위해 그런 부작용이 나타났을지 몰랐다.
약혼자이자 서브 악역이었던 달리아 영애의 역할이 바뀐 것보다 더 큰 사건이 도대체 뭐가 있길래…….
“아가씨! 항상 완벽하셨지만 오늘은 더욱더 완벽하세요!”
“다행히 이번엔 좀 무난한 거 같긴 하네. 근데 이런 색 블러셔……. 확실히 황도에도 있는 거겠지?”
“아니면 어때요! 이렇게 잘 어울리시는데!”
사라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거렸다.
“…….”
안 된다니까 그러네.
* * *
공작가의 마차가 초대장에 적힌 대로 초청을 받은 후작가에 도착했다.
‘트라인 후작가문이라…….’
아이네가 며칠 전 나름의 조건에 맞추어 심사숙고하며 고른 곳이었다.
이쪽은 명백히 친황파에 속하는 가문이었다. 예술과 문화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중년의 후작부인이 이 살롱을 주도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네는 여분의 오징어 캔디가 들어있는 손가방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때 황녀님의 탄신일 연회에는 미혼의 영애들만 왔었으니까.’
트라인 후작부인은 참석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교계의 귀부인들 중에서도 명망이 높은 편이라고 했다.
게다가 동부의 후작 가문으로서, 달리아 영애와도 퍽 친분이 깊었다고 들었다.
‘만약 이번에 이 부인마저 세뇌라도 된 것처럼 달리아 영애에 대해 험담을 한다면…….’
지난번에 느꼈던 그 이상한 상황을 한 번쯤은 검증해볼 필요가 있었다.
달리아 영애와 가깝게 지냈던 이들이 정말로 원작이 시작된 이후로는 그녀를 적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달리아 영애를 악역으로 몰아가려는 원작의 영향력을 오징어 캔디가 불식시켜줄 수 있는 건지.
어쩌면 자신이 원작에선 존재감이 거의 없다시피 한 베룸 가문의 공녀에 빙의한 것도, 왜 베룸의 특산물이 하필이면 오징어인지도.
‘알 수 있을지 몰라.’
양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을 동그랗게 말아 옆머리에 각각 고정시킨 아이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오늘의 머리 모양처럼 동그랗게 칠해진 볼은 옅은 분홍빛이었다.
사라가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권유했던 풀떼기 머리띠를 대신하여 타협한 산물이었다.
* * *
그리고 아이네는 잘못된 타협이었단 사실을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깨달았다.
“세상에, 이 깜찍한 헤어스타일은 뭐죠?”
“…….”
잘못됐다.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됐어.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사라.’
아이네가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방긋 웃었다.
“초대해주어서 고맙습니다, 트라인 후작부인.”
“어머, 어머머! 베룸 공녀님. 저야말로 초대에 응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예술에 조예가 깊은 명망 있는 중년 부인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목소리가 큰 줄은 몰랐다.
호스트인 후작부인이 정원 입구에서 감탄사만 터뜨리며 멈춰있자, 안에 있던 초대객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오늘도 정말 전위적인 감각이 빛나셔요, 공녀님!”
“듣던 대로 정말 독특하고, 시대를 앞서 나가는 감성이 느껴지네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아방가르드 공녀가 왔습니다.
오늘은 머리 양쪽으로 연두색 만두를 달고 왔는데요. 마음에 드시나요?
헤어스타일까지 황도에서는 생소한 것일 수 있단 걸 아이네는 뒤늦게 깨달았다.
‘리본에, 드레스에 이젠 머리 모양이라니. 다음에 도대체 뭐가 되려나.’
표정 관리하는 것을 잊지 않은 채 아이네가 턱만 아래로 까닥이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아…….”
현재 황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살롱 중 하나라더니, 과연 그럴 만했다.
후원 곳곳의 잘 길러진 초목들과 조화롭게 잘 배치된 각양각색의 꽃들.
그리고 후원 가운데에 하늘하늘한 베일을 걸어 세워둔 거대한 천막까지.
생각해보면 여태 기껏해야 미혼 영애들만 상대했지, 귀부인들을 만나는 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설마 돌리에 부인보다 깐깐하겠어?’
아이네는 그녀를 위해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 상석에 앉았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전의를 다졌다.
‘내겐 오징어 캔디가 있다!’
* * *
다행히 살롱의 분위기는 제법 자유로웠다.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노부인들의 티파티는 진작에 선택지에서 지운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과연 예술가들에게 많은 지원을 한다는 후작부인다웠다. 곳곳에 캔버스째로 놓인 그림들도 눈에 띄었다.
“베룸에서는 그런 식으로 찻잔을 드나요? 약지나 소지가 바깥이 아니라 안쪽을 향하도록요?”
“네?”
아이네는 급히 자신이 어떻게 찻잔을 들었는지 점검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손도 함께 살폈다.
다들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새끼손가락이 바깥으로 쭉 향하도록 뻗게 찻잔을 들었다.
아이네 역시 예법을 배울 때, 저런 방법도 있다고 듣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아직 어린 티아 황녀도 차를 마실 때 약지와 소지를 바깥으로 쭉 빼던 기억이 났다.
“아……. 맞아요. 이렇게 약지와 소지로 손잡이를 받치면 더 안정적으로 차를 음미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을 듣고 트라인 후작부인이 가장 먼저 실천에 옮겼다.
“정말이네요? 이러면 실수로 차를 쏟을 염려도 없고요.”
유난히 마르고 손목이 가느다란 귀부인 하나가 뒤이어 맞장구를 쳤다.
“손목에도 부담이 덜 가는 거 같아요.”
“앞으로는 이렇게 마시는 것도 좋겠네요. 베룸에는 있는 예법이라고 하니까요.”
역시 이번에도 미묘한 흐름의 대화였다. 하지만 아이네도 영애들이 고수하던 저 예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미심쩍긴 했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베룸에서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가장 편하고 합리적인 걸 선택하게 하거든요.”
아이네는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새로운 방식을 벌써 두 개째 전파하고 있었다.
* * *
소소한 일상 이야기와 가십이 한바탕 살롱 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이네는 이제 드디어 자신이 생각하던 바가 맞는지 확인할 기회라고 여겼다.
“흐음, 그런데……. 트라인 후작부인과 달리아 영애가 친분이 있다고 들었어요. 오늘은 초대하지 않으신 건가요?”
달리아의 이름이 나오자 트라인 후작부인이 탁, 하는 소리를 내며 트레이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에펜베르크 영애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지켜보던 아이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역시, 이 후작부인도 갑작스레 달리아에게 적대감을 느끼는 건가?
여기저기서 성토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게 말이에요! 와서 납작 엎드려도 모자랄 판에 말이죠.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다니까요.”
“자기 세상인 양 휘젓고 다닐 땐 언제고!”
이번엔 저번보다 비난의 강도가 더 세진 느낌이 들었다. 아이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갑자기요? 달리아 영애가 뭘 잘못했길래.
그러나 그 말은 의외의 인물에게서 먼저 흘러나왔다.
“아니, 여러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에펜베르크 영애가 뭘 어쨌기에요. 저는 그저 영애가 요즘 들어 제게 보내는 개인적인 서신이 뜸하기에 한 말이에요.”
조금 전에 먼저 운을 뗐던 트라인 후작부인이었다. 순하게 생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녀가 물었다.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가장 크게 목소리를 내던 두 부인이 움찔하며 얼버무렸다.
“뭐가 됐든……. 이제 황제 폐하께서 공인하신 사교계의 주인은 여기 베룸 공녀님이시니까요.”
아이네는 트라인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달리아를 옹호한 거 맞지?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이내 트라인 부인도 말끝을 흐리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렇죠? 역시 에펜베르크 영애는!”
또다시 달리아의 험담으로 살롱이 뒤덮이기 전에 아이네는 상황을 진화하기로 결정했다.
“잠깐! 제가 여러분께 드릴 게 있는데 말이에요.”
곧이어 모두에게 오징어 캔디가 공평하게 한 알씩 나누어졌다. 머뭇거리며 먹기를 주저하는 이도 있었고, 반색하며 포장지를 까서 바로 입에 넣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휴, 역시 황궁의 일이 바쁜 걸까요? 에펜베르크 영애가 몸이라도 상할까 걱정이 되네요.”
“그 고운 손에 잉크라도 묻는다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요.”
순식간에 모두가 순한 맛이 되었다.
아이네는 이제 거의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원작 소설의 영향력이 달리아 영애가 흑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단 걸.
그리고 그 영향력을 잠시나마 희석할 수 있는 건, 정말 애석하게도.
오징어 캔디였다.
‘생각해보니 꼭 캔디 형태가 아니라 오징어로 만든 음식으로도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다만 이해되지 않는 건 트라인 후작부인의 태도였다.
왜 그녀만 처음부터 달리아 영애를 적대시하지 않았을까?
그때, 정원 안으로 누군가가 난입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하녀가 혼비백산하며 따라 들어왔다.
“엄마아.”
“오, 에비. 왜 더 자지 않고선?”
아이네의 기억이 맞는다면 황녀 탄신일 연회에 참석한 어린 영애 중 하나였다.
‘그때 나눠 받은 오징어 캔디를 후작부인도 드셨나 보네.’
이러면 남아있던 궁금증도 풀린다. 하지만 마지막에 혼란스러워하던 부인의 태도로 보아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 * *
에비 영애가 하녀 손에 이끌려 돌아간 후, 아이네는 퍼뜩 어떠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나딘과 아버지가 말했던 그 ‘법칙’이란 게 영향력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 오징어 캔디로 그 영향력이 희미해졌을 때,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었다.
“여기엔 제국의 고귀한 부인들과 영애들이 계시니 말인데요. 혹시 ‘진실의 눈’이라고 아시나요?”
그러자 다들 아이네를 돌아보았다.
“예? 당연히 알고 있지요.”
“그럼요! 공녀님의 가문인 베룸의 것 아닌가요?”
아이네는 경악했다.
‘다들 알고 있어? 나만 빼고? 그것도 이렇게 공공연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처음으로 주요 등장인물이 아닌 이들에게 ‘진실의 눈’ 이야기를 꺼낸 만큼, 그들 모두가 알고 있다는 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몰려있어 크게 놀란 티는 내지 못하고,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인지도 알고 있나요? 왜 ‘진실의 눈’이라고 불리는지 말이에요.”
“그건…….”
“글쎄요, 거기까진 잘.”
이상한 점이 하나 더 늘었다. ‘진실의 눈’이라는 것이 있는 줄은 알지만, 그 이름이 붙은 이유와 정확한 정체는 모르는 눈치였다.
다들 오징어 캔디를 먹었으니 원작의 영향력 탓도 아닐 텐데 말이다.
“고대 일족 가문인 에스피오, 리테루온, 헤이안드로의 아티팩트에 대해서는요?”
“각각 귀걸이와 반지의 형태로 존재하는 고대 마도구 아닌가요?”
“왜 그런 걸 물으시는지…….”
의아해하는 기색의 여인들 사이로 귀부인 하나가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참, 예전에 베르길리우스 가문의 마리에 남작 영애도…….”
“아이작 백작부인!”
트라인 후작부인이 호통치듯 말을 잘랐다. 그러자 아이작 백작부인이 시선을 회피하며 입술을 오므렸다.
아이네는 본능적으로 방금 그 이야기가 중요한 정보라는 걸 알아챘다.
아마 원작의 영향력 아래 가려져 있다가 그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드러났겠지.
“그 남작 영애가 누구인가요?”
“이런, 저도 잘 모릅니다.”
트라인 후작부인이 단호하게 입을 다물었다.
‘……분명 뭔가가 있을 거야.’
베르길리우스 가문. 원작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굳이 저 이름이 나왔다는 건 고대 일족 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뜻인가?
아이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신분이 가장 높은 그녀가 말이 없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트라인 후작부인이 자책하며 아랫입술을 질근 물었다.
‘이크, 너무 과민반응했어. 좀 더 부드럽게 화제 전환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이 사안에 다른 귀부인들까지 관심을 가지게 해선 안 된다.
결국 트라인 후작부인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아이네를 불렀다.
“……공녀님?”
“네?”
아이네는 고개를 들고 트라인 후작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제 눈치만 보고 있단 걸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아, 안 돼. 이런 데서 사교 모임 안 해봤다는 티를 또 내다니.
괜스레 멋쩍어진 아이네가 배시시 웃었다.
자연스럽게 웃어야 한다, 아이네. 자연스럽게.
“아,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저도 모르게…….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좋아, 자연스러웠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부인이 급히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참, 공녀님. 황녀 전하 탄신일 때, 선물로 진상했던 것 말이어요. 그게 무엇인가요?”
아, 그 자체 제작 곰인형?
* * *
띨롱, 하는 귀여운 종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예요, 여기.”
황도에 위치한 가게로 중년의 부인들과 소녀들이 들이닥쳤다.
“어서 오세요! 어떤 용도로 쓰실 건가요, 손님! 저주? 헌팅 트로피?”
“…….”
“앗! 내 정신 좀 봐. 이게 아니지. 무엇을 찾으시나요, 손님?”
언젠가 등장했던 으스스한 가게 내부는 완벽하게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 가게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양갈래 머리 소녀가 발랄하게 손님을 맞았다.
“요즘 유행하는 인형을 찾고 있는데요.”
“아하, 그 ‘마물’ 인형 말하시는 거군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점원 소녀가 손뼉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된 인형들을 손님들 앞에 선보였다.
“생각해보니까 여기……. 예전에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지 않았나요?”
일전에 실수로 가게에 들어와 본 적이 있던 한 부인이 중얼거렸다.
“호호, 저희는 인형 제작으로 황도에서 몇백 년의 경험을 보유한 가게로서, 빠르게 시류를 반영했답니다!”
그도 그럴 게 가게 안을 꾸민 색채부터가 눈부시게 밝고 화려했다. 손님들의 시선이 점원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자아, 여기 보시면……. 뾰족한 이가 두 겹으로 난 다람쥐 마물의 인형도 있고요.”
소녀들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다람쥐 털 말이에요. 설마 사람 털은, 아니죠?”
“돼지 털인데 원하시면 사람 털로도 제작해드려요!”
“…….”
무언가 단단히 비틀려 있었다. 하지만 황녀의 탄신일 연회에서 단 한 번 보았던 인형이다. 제대로 된 털 디테일까지 기억할 시간은 부족했다.
“그, 그럼 여기 곰인형 같은 건 없나요?”
그러자 점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그런 인형을 찾는 손님이 두 번째라는 듯.
“곰……인형이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런 걸 찾는 분이 계시긴 계셨죠.”
“그럼 그걸로 준비해주시겠어요?”
두 손을 마주 잡고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는 또 다른 소녀를 점원이 힐끔거렸다.
“어, 네에.”
그리고 얼마 뒤, 그녀들은 혼비백산하며 앞 다투어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손님께서 찾으시던 곰인형입니다아!”
점원이 창고에서 꺼내온 곰인형은…….
일전에 아이네도 본 적이 있던 인형이었다. 그레즐리 베어를 그대로 박제한 듯한 흉흉한 비주얼의 바로 그것!
“꺄아아악!”
“으아아앙!”
꿈과 기대, 희망이 한순간에 파괴당한 소녀들과 그 어머니들의 비명이었다.
“아니, 보여달라고 하셨잖아요. 손님…….”
결국, 이번에도 점원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기만 했다.
“도대체 이게 곰인형이 아니면, 뭐가 곰인형이라는 거야!”
이런 일이 있었으리라고는 지금의 아이네는 꿈에도 몰랐다. 소문으로나마 알게 되는 건 그저 먼 훗날의 일일 뿐.
* * *
아이네는 씩씩거리며 본궁의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살롱을 다녀온 직후, 황궁에 알현 신청을 넣고 바로 다음 날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잠시 어제 살롱에서 있었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올해는 정말 몇 년 만에 데뷔탕트와 사냥대회, 건국 기념일 연회까지 전부 다 열리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공녀님은 세 가지 행사에서 전부 주인공이 되시니 올 한 해가 정말 바쁘시겠어요.”
무, 뭐? 주인공? 무슨 주인공?
원작에 실시간으로 시달리고 있어서인지, 아이네는 사소한 단어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흡!”
하필 그녀는 마침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사레들릴 뻔한 걸 겨우 진정시킨 아이네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라렌느 후작 영애?”
지목당한 라렌느 후작 영애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야 공녀님은 황제 폐하께서도 인정하시는 사교계의 일인자시고, 데뷔탕트도 치르신 성인이니까요. 황녀 전하를 제외하면 황도에 있는 분들 중 가장 고귀한 신분이시기도 하고요. 건국 기념일 연회 준비도 공녀님께서 하시는 게 아닌가요?”
후작 영애의 말이 끝나자 트라인 후작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렇죠, 그래서 폐하께서도 공녀님의 데뷔탕트 때 티아라를 보내셨을 거예요.”
“맞아요, 그것만큼 폐하의 확실한 의지를 표명한 게 어딨겠어요.”
아이네는 결국 뒷목을 잡았다.
이, 이 황제 아저씨가!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원작에서 왜 퇴장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원한 살 일을 만드신 거 아냐?’
상당히 사실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그렇게 어제 일을 떠올리며 알현실 앞에 다다른 아이네는 숨을 가다듬었다. 곧이어 이미 그녀와 만난 적 있는 시종장 로버트가 물었다.
“준비되셨습니까? 폐하께 공녀님이 왔다고 아뢸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아이네는 눈을 감고 잠시 심호흡을 하며 결의를 다졌다.
그래, 잘생긴 얼굴만큼 언변에도 통달한 분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내 의사도 안 묻고 중요한 일을 맡기려 하실 줄이야.’
오늘에야말로 정신 차리고 똑바로 따질 건 따지고 말…….
……려고 했는데,
“오래간만이군, 아이네이스 공녀.”
“에스피오 제국의 지지 않는 태양이신…….”
“하, 됐다. 번거로우니 본론부터 이야기하라.”
황제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을 종용했다. 그에 아이네가 고개를 들었다.
“예. 어……?”
몇 번 보지 않은 아이네도 알 수 있었다. 황제의 얼굴은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단순히 잠을 못 자서 피곤한 것과는 달랐다. 그는 몹시 지쳐 보였다.
‘큰일이야, 약간 전의를 상실할 거 같아.’
생각해보면 황제 폐하는 요즘 남부 곡물 반출 사건과 더불어 연합왕국의 동태를 살피느라 한창 바쁠 터였다.
과연, 겨우 이런 사소한 사안으로 따지고 드는 게 옳은 걸까.
‘아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리고 제게는 절대 사소하지 않다.
아이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미중년의 고단한 얼굴에 약해지려던 마음을 다잡았다.
“곧 건국 기념일 연회가 열리지 않습니까.”
“그래.”
아이네는 최대한 공손하고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 연회 준비를 저에게 맡기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 말이 맞다.”
너무나 여상한 황제의 목소리에 그녀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런 아이네의 표정을 보고는 오히려 황제가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이미 성년이 지난 데다가 내가 데뷔탕트 선물도 주지 않았나. 그 티아라 말이다.”
아니, 그게 무슨 뜻인지 알려주면서 주신 건 아니었잖아요.
당황하는 아이네를 보고서 황제가 다시 느른하게 의자에 기대앉았다.
“황후가 자리를 비운 이상 공녀이자 리테루온 공작의 약혼자인 자네가 맡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어떻게 당연한 일이냐고 물으려던 아이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이게 원작에서 달리아 영애가 맡았던 일인가 보다.’
원작에서 이 시기는 테고와 케이어드가 반란군을 조사하면서 다투다 정이 들고 있을 때다. 당연하게도 소설의 주무대는 두 주인공이 있는 국경 지역으로 바뀌어 있었을 거고.
황도에 남은 달리아 영애가 건국 기념일 연회 준비를 했다 한들, 자세히 서술되었을 리가 없다.
원작에 기대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뜻이다.
‘진짜로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참석해 본 적도 없는 연회 준비를 어떻게 해.’
그래도 건국 기념일 연회는 데뷔탕트나 사냥대회와 달리 매년 열렸으니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럼…… 달리아 영애도 함께 하도록 허락해주세요.”
“에펜베르크 영애를?”
말을 꺼내고 나서야 아이네는 아차 싶었다. 황제와 똑같이 달리아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대뜸 요청하다니.
아마 후작이 손 놓고 있을 에펜베르크 영지 업무와 재무부 일로도 바쁠 텐데.
‘차라리 역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아이네가 막 방금 한 청을 물러달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보다 앞서서 곰곰이 생각하던 황제가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도록 하라. 다만 주축은 아이네이스 공녀가 되어야 하고, 에펜베르크 영애는 보조 역할에 그쳐야 할 게야.”
“엑? 아니, 그게.”
“그럼 용건은 끝났겠지? 공녀가 어제 급하게 알현 요청을 하기에 내 쉬지도 못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재상이나 고위직 관료도 아닌데 알현 일정이 바로 잡혔다. 그건 상당한 특혜임을 그녀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황제의 말에 더는 토를 달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정수리 위로 또 다른 벼락같은 말이 떨어져 내렸다.
“아, 참. 경비나 인력, 의전 같은 문제는 아르비드에게도 말해두었으니 함께 진행하고.”
“태자 전하랑요?”
* * *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아이네이스 공녀가 나간 후, 황제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새벽녘에 겨우 눈을 붙이긴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악몽만 꾸면서 깨어났다.
‘이게 무슨……. 이십 년도 더 된 일인데, 이제 와서.’
그녀의 소재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다. 이번엔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반란군 진압을 끝내고부터 황제는 은밀하게 그녀를 찾아보려 시도했다. 그날 새벽,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진 이후로 그저 마음에 묻고 살았다.
그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날엔 귀족파와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여야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반란군도 거의 씨를 말렸으니, 조금쯤 궁금해해도 될 테다.
‘그때 그렇게 사라져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았다면…….’
꼬박 25년이 다 되도록 이렇게 마음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귀족 영애로 한평생을 살아왔는데, 그리 감쪽같이 증발할 수가 있나.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제 연인인 그녀에게라도 반정을 일으킬 거라 말할 수는 없었다. 혹여 실패하더라도, 그녀만은 무사하길 간절히 바랐으므로.
그래도 결행의 그날, 그는 정말로 밝히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 그녀는 이미 남작저에 없었으니까.
‘케이어드 녀석이 이번엔 제대로 된 정보를 좀 알아 와야 할 텐데.’
황제의 쓸쓸한 눈빛에 아주 미약한 기대의 빛이 스쳤다.
* * *
별 소득 없이 황궁 복도를 걸어 나오던 아이네는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공녀.”
오랜만에 보는 테고였다.
“아, 테고 경.”
폐하의 명으로 조사를 나갔다가 방금 돌아왔는지 테고의 옷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아이네가 다가가자 멈칫하며 한 발자국 물러선 그가 잠시 이마를 짚었다.
“지금 제가 복장이 단정치 못합니다. 폐하께 보고만 올리고 바로 뒤따라 갈 테니, 기사단에 먼저 가 계시겠습니까?”
“아, 보고를 하러 잠시 돌아온 거군요. 네! 그럴게요.”
아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먼저 몸을 돌려 본궁 로비를 지나 밖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테고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외성으로 가는 간이 마차에 올라탄 아이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대로라면 원작에서 남주와 여주가 산맥과 국경을 조사하면서 관계가 진전되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그동안 서브남인 아르비드는 황도에 남아 테고의 약혼자인 달리아 영애와 함께 건국 기념일 연회 준비를 하게 됐을 테고. 아무래도 주인공 남녀의 서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이때의 상황은 아이네조차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당연히 아르비드가 달리아 영애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언급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황태자가 달리아를 은근히 적대하는 태도로 바뀌었다는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왜지? 그렇게 같이 준비를 하다가 테고에겐 달리아 영애가 아깝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나.
‘원래는 아직까진 아르비드도 테고가 여자인 걸 모르고, 여전히 미묘한 감정만 느낄 때이긴 한데…….’
하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주인공들의 감정과 러브라인이 어긋나버렸다. 서브남주인 아르비드만 온전히 원작대로 테고를 짝사랑할 거라 생각하는 건 우스운 일일 테다.
애초에 황실 기사단에 머물면서 본궁을 왔다 갔다 하는 테고와 자주 마주치며 친구였던 그에게 서서히 끌리기 시작해야 했는데!
‘칼릭만 발에 불이 나도록 본궁에 드나들고, 정작 테고 경은 황도에 있을 땐 기사단 건물을 떠나질 않았으니까.’
테고와 감정이 싹트질 않았을 테니, 약혼자인 달리아 영애를 적대할 이유도 없어진 셈이다. 그 증거로 아르비드는 똑같이 약혼자 역할인 자신에겐 퍽 친절한 편이었다.
하지만 역시 불안했다.
그래서 달리아 영애에게 한마디 언질도 없이 귀찮은 일을 맡게 한 게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보니 달리아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고, 흑화할 요인도 얼마든지 남아있었다.
지금껏 함께 어울렸던 사교계 인사들이 갑자기 적으로 돌아선 것만 봐도 그랬다. 이래서야 그녀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이런 명분으로 내가 곁에서 지켜보는 게 나을지 몰라.’
같이 있다가 누군가 달리아 영애를 괴롭히거나 자극하려고 한다면 오징어 캔디를 쥐여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아이네가 마차에서 내려 제2기사단의 집무실에 앉기 무섭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대답을 하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테고였다.
“……생각보다 보고가 조금 길어졌습니다.”
“네? 저도 방금 도착했는데요.”
늦었다고 하기엔, 너무 바로 뒤따라왔는데?
심지어 테고는 흙먼지 위에서 구른 듯했던 옷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서둘러 달려온 걸 들킨 테고가 조금 당황해 헛기침을 했다.
아이네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책상 위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테고에게도 말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게 되면 기사단 일은 좀 소홀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저기, 테고 경. 제가 곧 당분간 여기 일을 못 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예? 무슨 일입니까.”
“흡.”
다짜고짜 묻는 테고 때문에 잠시 움찔했다. 지난번 그의 너무 실감나는 연기 이후로 가끔 테고를 완전히 예전처럼 편하게 여기지 못하게 됐다.
그런 아이네를 눈치챘는지 그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멈춰 섰다.
“아…….”
어색해진 분위기에 아이네는 잠시 눈동자만 굴렸다. 이윽고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푸념했다.
“제가요. 건국 기념일 연회 준비를 맡게 되었거든요. 자세한 건 달리아 영애와 상의를 해봐야겠지만 좀 바빠질지도 몰라요.”
그 말에 안심한 듯 테고가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곧 조사를 하러 다시 황도를 떠나야 합니다.”
“음, 아아. 그렇죠.”
역시 이 시기엔 황도에 머무르지 않는 모양이구나.
테고가 재차 물었다.
“에펜베르크 영애와 함께 준비하시는 겁니까?”
“네! 그런데 이런저런 예산 승인 문제 때문에 황태자 전하도 함께 할 것 같아요.”
그 말에 테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르비드…… 황태자와 말입니까?”
“달리아 영애도 같이요.”
“그렇군요, 태자 전하와 함께…….”
저기요, 선택적으로 골라 듣지 말아 주시겠어요? 달리아 영애도 함께한다니까요?
‘그나저나 역시 달리아 영애보다는 아르비드 황태자한테 반응하네.’
이런 것만 보면 역시 테고는 원작 여주일 수밖에 없는데…….
도대체 케이어드 대공은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한 거지?
“그리고 말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미처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테고가 조심스럽게 아이네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이번엔 그녀가 놀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테고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이제 저번처럼 섣불리 제 마음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거다. 설령 공녀가 자신을 다시 도발한다고 해도.
“이제 저는 곧, 아니, 늦어도 한 시간 뒤엔 다시 길을 나서야 합니다.”
“이렇게 급하게요?”
“그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조금 난처한 기색이 테고의 얼굴을 스쳤다.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에펜베르크 영애의 예상이 맞긴 했습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제 영지를 지나 에펜베르크 영지 쪽으로 갔다고 볼 만한 정황도 충분하고요. 하지만…….”
테고가 이어서 말했다. 무언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의아한 목소리였다.
“에펜베르크 영지 안에서의 움직임이 두 갈래로 나뉘었단 걸 알았습니다. 일부는 국경을 넘긴 했습니다만, 나머지 한쪽은 에펜베르크 영지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길게 늘어지는 테고의 말을 듣던 아이네가 참다못해 다그치듯 물었다.
“국경을 넘은 게 얼마큼인데요?”
“그게……. 얼마 안 되더군요. 검문소를 지나간 수레의 규모를 최대한으로 추산해보아도 대부분은 아직 영지 안에 남은 것 같습니다.”
의아한 일이었다. 남부의 귀족파 측에서 연합왕국의 침략을 은밀하게 지원하고자 했다면 최대한 빨리 국외로 빼돌렸어야 했다.
“그럼, 왜…….”
아이네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테고는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아직 정확한 위치는 파악이 안 됩니다. 놈들이 추적당할 걸 예상하고 경로를 교란한 걸로 보입니다.”
“흐음.”
어쩐지 아이네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핵심 전개 중에서도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원작의 영향력은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당장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이 영향력이 유도하려는 방향을 떠올리면 역시 에펜베르크 영지와 엮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달리아 영애를 기어코 이적 행위로라도 묶어서 악역으로 만들려는 건가?’
반란군이 사라졌으니 병력이 분산될 여지도 없어졌다. 원래대로면 반란군을 추적하는 데에 동원되어야 했을 제2기사단도 국경과 연합왕국 측을 주시하고 있다.
게다가 곡물을 군량미로 제공하려는 남부 측도 당장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을 거고.
‘수확이 가능한 계절까진 비축 물량이 없을 테니까.’
어느새 아이네의 머릿속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또 일어나려고 원작에도 없던 내용으로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는 건지…….
“혹시, 혹시 말이에요. 이 일들이 에펜베르크 후작가와 연관되어 있던가요?”
제발, 제발 아니어야 할 텐데…….
아이네의 꽉 쥔 손 안으로 땀이 배어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정말로 원작의 농간이 틀림없다. 아니, 솔직히 어떠한 ‘목적’이라는 것 때문에 원작 자체가 와해됐다고 봐도 좋았다.
“아닙니다. 저도 가장 먼저 의심해봤지만…….”
말끝을 흐리던 테고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일단 확인한 바로는 에펜베르크 후작과 소후작 모두 술과 약물에 찌들어 영지 경영에서 손을 놓은 지 오래됐다고 하더군요. 반란이든 전쟁이든 관여할 판단력조차 없을 거라는 게 중론이었습니다.”
테고의 말에 아이네가 대놓고 안도한 기색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안심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작정하고 에펜베르크 후작가에 누명을 씌우려 할 수도 있겠네요.”
일견 타당한 추측이었으나 테고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있던 종이에 다시 대강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후작 가문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에 있는 영지는 여기, 테르미누스 산맥을 경계로 한 내륙 지역뿐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쪽으로 넘어간 흔적은 없습니다. 조사 가능한 경로는 다 살폈는데도요. 겨우 소량의 곡물이 국경을 넘은 걸로는 엮을 수 없을 겁니다.”
아이네의 예상이 틀렸다. 이렇게 된다면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영지 관리를 소홀히 했다고 문책할 수는 있어도 직접적인 이적죄는 물을 수 없다.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뭐 때문에 곡물들이 거기에 모여 있는 거야.’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고는 좀 더 확실하게 알 듯했다. 공녀는 이미 어떠한 결론을 정해놓고 이런저런 의견을 짜 맞추고 있었다. 왜 나딘 공자가 지난날 그녀에게 대뜸 결론부터 물었는지 이해가 갔다.
이게 정말 베룸의 발현자라서인 걸까.
그런데 베룸의 발현자라는 건 도대체 뭐지? 마치 미래를 읽기라도 한다는 소리인가.
“공녀는 여전히 연합왕국이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모할 거라고 봅니까? 황도는커녕 에펜베르크 영지를 넘어오기도 전에 제국군에 진압될 텐데요.”
지금 상황으로선 테고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황도 내부를 교란해줄 반란군도 없는 데다 남부 귀족파는 입만 요란할 뿐, 동원할 사병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턱을 손으로 받치고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네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젠 모르겠어요.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그 어느 것보다 달리아를 악역으로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후작 가문을 엮지 않은 걸 보니 여기엔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다.
그 말을 듣던 테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원하다니, 누가?
하지만 티 내지 않고 이어지는 아이네의 말을 경청했다.
“그치만 아직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곡물이 완전히 왕국에 흘러들어가지도 않고, 남부로 돌아가지도 않은 채 국경 근처에 있다면……. 언제고 넘어갈지도 모르죠.”
“일부 국경을 넘어간 건 남부 측이 우선 왕국을 엮어두려는 의도였겠군요.”
“맞아요. 제가 남부 귀족 입장이라면 연합왕국을 신뢰하진 않을 거 같거든요. 지난번에 말한 대로 수확철 전에는 비축량이 충분치 않으니까, 벌써 그 많은 곡물을 왕국에 넘겨주기엔 위험하죠.”
원작에서도 그들은 연합왕국과 완전한 동맹관계가 아니었다. 반란이 성공할 수 있게끔 양동작전을 벌여주는 미끼로 생각했을 뿐이니까.
지금은 당장 전쟁을 일으킬 형편이 아니니 간 보듯 조금만 내주고 남겨두었을 테다.
“지금 다시 가면 최대한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 겁니다. 그래야 그들의 속내도, 전쟁 시기도 가늠할 수 있겠지요.”
“분명 연회 이전은 아닐 거예요. 건국 기념일 연회는 남부 귀족들이 황도로 대거 상경하더라도 의심받지 않을 명분이니까요.”
반란군이 와해되었고 전쟁도 바로 일으킬 수 없으니 남부 귀족파가 황도에 진입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 건국 기념일 연회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럼 지금이라도 건국 기념일 연회를 중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들이 황도에서 일을 꾸밀 여지를 주지 않는다면…….”
“아!”
아이네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설마, 이렇게 일이 진행되는 건가?
어쩐지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것들이 하나둘 퍼즐처럼 맞춰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폐하께 아까 말한 사실들을 보고 드렸나요?”
“그렇습니다.”
“그럼 더욱더 건국 기념일 연회를 성대하게 치르실 거예요. 특히 대부분의 지방 귀족들 모두가 참석하게 하실 거고요.”
아이네는 이제 거의 확신했다. 원작의 시작 전, 테고가 반란군을 진압한 때부터 틀어진 전개가 어째서 이렇게 흘러왔는지.
제가 알고 있는 황제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폐하는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 오셨던 거예요. 모두를 황도로 모이게 해서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 그물을 말이죠.”
조금 소름이 돋았다. 반란군이 따로 있나. 황제에게 반기를 들면 그게 곧 반란군이 되는 거다. 애초에 황제가 남부의 귀족파까지 반란군의 범위에 넣었다면…….
아이네가 애쓰지 않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내가 전개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도 계산된 걸지도…….’
원작의 영향력은 이미 처음부터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결말을 향해 작동하고 있었던 셈이니까.
‘그 존재가 말했던 살아야 할 사람이 정말 폐하였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