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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만들어진 악녀, 달리아 에펜베르크 (17/29)

남장여주라고 했잖아요! 4

16. 만들어진 악녀, 달리아 에펜베르크

그런데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는 걸까.

아이네는 테고에게 이끌려 지난번의 수련장에 와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욱더 공녀는 자신의 몸을 지킬 방법을 알아두어야겠군요.’

왜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걸까.

“제가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말하질 못했습니다. 혹시 그 뒤로 마검을 소환해본 적이 있습니까?”

“마, 마검이요?”

겨우 나이프 정도 크기의 작은 단검에 마검이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확실히 마검일 겁니다. 그것도 공녀의 피를 먹고, 공녀를 주인으로 인식한.”

“…….”

이곳이 로판 소설 속이긴 해도, 여기서조차 아주 오래된 고서나 소설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이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 다마스커스 강으로 만들어진 단검이라 너무 많은 이들 앞에서 소환하면 곤란합니다.”

“왜요? 너무 귀한 금속이라서요?”

테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소환과 주인 각인까지 되는 마검이란 걸 알게 된다면…….”

잠시 뜸들이던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주인인 공녀를 제거하고서라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기겠지요.”

“네? 아니, 갖고 싶다면 그냥 줄 수도 있는데.”

“각인이 된 이상 아마 버릴 수도 없을 겁니다. 에고소드까지는 아니니까요.”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영 말도 안 되는 소린 아니다.

그런 설정을 가진 마검이 나오는 소설은 아이네도 꽤 봤었으니까.

“그, 그럼 어떻게 해요?”

“정말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소환하면 안 됩니다. 여전히 역소환은 안 되지 않습니까.”

그 뒤로 무기 없이 상대방에게 대항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아이네는 테고가 무기류뿐만 아니라 체술에도 심취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사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리고 그건 별로 알고 싶은 사실은 아니었다.

“무기가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제일 쉬운 건 상대의 눈을 찌르는 겁니다. 보호구를 착용할 수 없는 부위이기도 하고요.”

아이네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손가락에 눈알이 닿잖아요.”

“…….”

테고는 그 다음으로 효과적일 방법도 설명했다.

“주먹을 쥐어보십시오.”

“이렇게요?”

“…….”

그러나 그렇게 쥐어진 아이네의 주먹은 테고의 것에 비해 너무나 작고 앙증맞았다.

이 방법도 안 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으나 테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제 주먹을 들어 귀 밑 턱 쪽으로 가져다 대면서.

“여자의 힘으로도 남자를 기절시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아래턱 역시 쉽사리 단련되지 않는 부위 중 하나입니다. 잠시나마 기절시킬 수 있지요.”

“아하, 어퍼컷 같은 거네요?”

아이네가 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

순간 미덥잖은 느낌이 든 테고가 커다란 손바닥을 세워 아이네에게 내밀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주먹으로 제 손바닥을 쳐보겠습니까.”

묘하게 자신을 못 믿는 듯한 태도에 약간의 앙금이 쌓였던 아이네가 되물었다.

“아플 텐데, 괜찮겠어요?”

“일단 해보십시오.”

뭐어, 그렇다면 사양 않고!

아이네가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팡-

그리고 테고는 할 말을 잃었다.

“그게 답니까?”

“으아, 손바닥이 왜 그렇게 딱딱해요!”

아이네가 제 주먹을 감싸 쥔 채 울먹울먹해진 눈을 들어올렸다.

“……아까 한 말은 잊으십시오.”

“네……?”

“공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단검을 소환해내야 합니다. 뒷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테고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 * *

테고는 아이네를 저택까지 데려다주고 그 길로 다시 황도를 떠났다. 나딘과 저녁식사까지 모두 마친 아이네는 침실 안에 들어와 서랍을 열었다.

“이건 도대체 뭐길래 나한테 소환되는 거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아이네의 피를 받아먹은 검이다.

거기다가 각인까지 되는 마검인 주제에 역소환은 안 되고, 버릴 수도 없다고 한다.

애초에 베룸 영지의 모든 것이 그랬다. 원작에서 제대로 언급이 되기는커녕 사실상 존재감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이런 다마스커스 강으로 만들어진 단검이든, 검이든 원작에선 나오지도 않는 아예 생소한 물건이었다.

‘아무리 내가 변수라고 했어도 달라지는 게 너무 많아.’

특히 주인공들에 대해선 더 심했다. 초반부터 아이네가 노심초사했던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점점 균열이 커지고 있었다.

차라리 이게 원작 소설이 아니라고 하는 편이 더 믿을 법했다. 그것도 아니면 원작을 파괴하는 게 목적이라든지.

하지만 이미 깊숙하게 관여해버린 이상 결말까지는 믿어 보는 수밖에 없다.

“이런 걸 보면 책빙의자도 극한 직업이야.”

아이네가 단검을 들어올려 달빛에 날을 비추어 보았다. 도저히 사람이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단검을 얻은 이후로 이렇게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한때는 이렇게 작은 게 무슨 마검인가 했는데 이제 보니 그녀가 쓰기엔 크기가 딱 알맞았다.

레이피어도 한번 휘둘렀다가 끙끙 앓은 자신이 아닌가.

무게도 가볍고 그립감도 좋았다. 다만 한 가지 흠은 검날만 너무 완벽하다는 점일까.

오히려 손잡이가 조잡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음?”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어디서 봤다 싶었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네는 서랍 옆 또 다른 상자를 서둘러 열었다. 거기엔 지난날 베룸의 무기점에서 충동적으로 샀던 단검이 들어있었다.

“어? 어어?”

두 눈으로 보고 믿기지 않았다. 아이네가 다마스커스 단검과 무기점의 단검을 나란히 들어 올렸다.

날이 다른 금속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완벽하게 같은 모양새였다.

심지어 손잡이에 미세하게 긁힌 흔적까지도 똑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점점 더 알 수 없는 일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었다.

* * *

건국 기념일 연회까지는 한 달도 남지 않은 만큼 아이네는 다음 날부터 본궁으로 출근했다.

이어서 안내를 받아 임시로 꾸려진 부서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녀는 조금 분노했다.

‘황제 아저씨……. 정말 제대로 알려주는 게 없잖아?’

원작에 연회 준비 과정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아이네는 상식에 기대야 했다.

보통 로판 소설에서 연회 준비는 꽤나 힘든 일이었다. 여자주인공의 능력을 검증하는 하나의 장치로 쓰이곤 했으니까. 비록 여주가 맡지 않더라도 일의 특성은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촉박한 시일과 굉장히 과중한 업무를 예상했는데…….

“제가 뭔가 할 일은 없나요?”

“아닙니다, 공녀님. 공녀님께서는 저희를 감독해주기만 하시면 됩니다.”

달리아 영애까지 끌어들인 게 무색할 정도로 할 일이 없었다. 정식 부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매년 열리던 건국 기념일 연회의 특성상 이를 담당하는 숙련된 인력이 많았다. 사실상 실무자들이 열심히 차려놓은 밥상을 구경하는 일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건 그저 이 사람들의 노력 위에 숟가락 하나 올리는 것뿐이었네.’

어쩐지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이에 대해 항의했을 때에도 이상하다 싶었다. 뭐 그렇게 별 거 아닌 일에 법석을 떠느냐는 표정이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아이네는 베룸이고 황도고 간에 사교계를 겪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공녀님.”

달리아 영애였다.

아이네만 빼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무실에 들어온 그녀는 우아하게 소파에 앉았다.

“저를 공녀님 보조 역할로 요청하셨다고 들었어요.”

멍하니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이네가 달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아, 그게……. 미안해요. 연회 준비를 맡는다는 게 이런 건 줄 미처 몰랐어요.”

오늘도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달리아가 살풋 미소 지었다.

“그러실 수 있지요. 건국 기념일 연회 참석도 처음이실 테니까요.”

생각해보면 갓 성년이 넘은 아이네에게 그저 공녀란 이유로 중대사를 맡길 리가 없었다.

작은 티파티나 비정기적인 연회라면 모를까. 무려 건국 기념일 연회였다.

‘이런 건 소설들마다 설정이 다 다르단 걸 깨달았어야 했는데…….’

아이네는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달리아 영애도 바쁠 텐데 제가 마음대로 결정해서 미안해요. 다시 폐하께 잘 말씀드릴 테니까 재무부로 다시 업무를 보러 가셔도 돼요.”

달리아가 그런 그녀의 앞으로 티푸드 접시를 밀어주며 입을 열었다. 아주 약간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음, 아니에요. 실은 이렇게 절 불러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달리아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곤란함이 배어있었다. 아이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역시 영애의 몸으로 공직의 언저리에서나마 일하는 걸 다들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니,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 테다. 그것도 원작의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일지 몰랐다.

“텃세……인가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달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점점 더 저를 업무에서 배제하시더라고요.”

확실했다. 그 영향력이란 건 사교계에서 달리아를 밀어내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아예 황궁, 아니, 황도에서 그녀를 몰아내는 게 목적일까.

마치 이러는 것 같았다.

‘어서 흑화해! 원작의 결말대로 악역이 되란 말이야! 이래도? 이래도 네가 제국민들을 증오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아이네가 원작에서 그녀에게 악역이 될 요소를 제거해버리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아이네는 차마 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럼 우리는 퇴근 시간까지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달리아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요. 아마 공녀님의 의견을 묻거나 결재를 받으러 오긴 할 거예요. 어쨌든 이번 연회 준비의 최고 담당자이시니까요.”

“네?”

그럼 역시 뭔가 고르고, 결정해야 하는 거잖아! 이런 쪽으로는 하나도 모르는데, 어떡하지?

찻잔을 든 채, 굳은 아이네에게 달리아가 손을 저어 보였다.

“그래봤자 어려운 건 아니고요. 충분히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할 테니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선택만 해주시면 되어요.”

그게 더 어려운 일인 거 같은데…….

아이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세세한 설정은 다르다곤 해도 역시 같은 로판 소설끼리는 통하는 게 있었다.

색을 잘못 선택하고, 연회장을 장식할 꽃을 잘못 골라서 망신당하거나 조롱받는 경우도 많이 읽어 보았다.

‘그, 그치만 나한테는 달리아 영애가 있으니까.’

이제 아이네는 찻잔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달리아의 손을 부여잡았다.

“영애가 같이 골라 줄 거죠? 그렇죠? 저 진짜 하나도 몰라요.”

베룸에서 이런 경우에 대해 아예 배우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베룸의 상식과 황도의 예법이 차이나는 경우를 많이 겪은 아이네로서는 걱정될 뿐이었다.

“당연하죠! 실은 공녀님께서 그런 제안을 해주셨다는 걸 듣고 무척이나 기뻤어요. 요즘은 조금…….”

말끝을 흐리는 달리아의 얼굴에 어둑하게 그림자가 졌다.

재무부의 관료들이 많이 괴롭히는 걸까.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스러움으로 가득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어떠한 기점에 원작의 영향력이 달리아를 압박하는 수위가 급격하게 높아진 거다.

아이네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이것도 달리아 영애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저지른 거긴 한데요.”

“네?”

“일이 많을 줄 알고……. 오빠한테 당분간 달리아 영애가 저택에서 함께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뒀거든요.”

달리아는 갑자기 가혹해진 주변 환경 때문에 조금은 지쳐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색을 띠며 밝아졌다.

“저는……, 저는 좋아요.”

설마 나딘에게 아직 관심이 있어서 이렇게 티 나게 기뻐하는 건 아니겠지?

아이네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취향은 존중하는 거라지만, 이건 좀. 보기보단 눈이 낮았었네.’

이렇게 아름답고 재기발랄한 영애가 왜 하필이면 나딘을?

여전히 그녀는 자신과 나딘이 똑 닮았단 사실은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반짝이는 금발이었다.

“아! 황태자 전하.”

“에스피오 제국의 지지 않는…….”

아이네와 달리아가 일어나 치마 끝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아르비드가 손을 저어 이들을 막아섰다.

대놓고 티 내진 않았으나 아이네 쪽으로 시선이 길게 머물다 떨어졌다.

“일할 때 그런 인사는 생략하는 걸 허락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그녀들의 눈앞으로 서류를 들이밀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폐하께서 추가하신 초대 명단입니다. 확인 후, 실무자들에게 전달하면 됩니다.”

“아하, 네에.”

“…….”

그러나 그 명단의 어느 지점에 시선이 꽂힌 달리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 어떻게…….”

얼굴만 새하얘진 게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가녀린 몸을 휘청이기까지 했다.

“달리아 영애?”

곁에 있던 아이네가 간신히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자 이마 위로 손을 올린 달리아가 바들거리며 물었다.

“왜, 왜 제 아버지와 오라버니까지……?”

아이네를 도와 달리아를 부축하려던 아르비드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의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펜베르크 후작가가 참석하지 못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황제에게 이미 보고가 들어간 사안이니 황태자인 아르비드도 알고 있을 터였다. 남부에서 빼돌려진 곡물이 에펜베르크에 상당수 모여 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아르비드가 묻는 건 그 곡물 유출 건과 에펜베르크 후작가와의 연관성이었다.

아이네와 달리아가 나란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아닐……걸요?”

“그건 아닙니다. 다만…….”

달리아가 더듬거리면서도 힘겹게 말을 이었다.

“태자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이런 큰 연회에 참석할 상태가…….”

그러나 그런 그녀의 말을 아르비드가 한숨을 내쉬며 끊었다.

“압니다. 하지만 이번엔 마차에 짐짝처럼 실려서라도 황도로 와야 할 겁니다. 폐하께서 이번만큼은 모든 귀족들의 참석을 명하셨으니까요.”

역시, 아이네와 테고가 짐작했던 대로였다. 원작에서는 없었던 일이었다. 그땐 소설의 결말 부분에 이르기까지 아직 반란군이 완전히 토벌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국경이나 주요 거점의 영지에 머무르는 모든 귀족들을 황도로 불러올릴 수는 없었다.

아직 반란군이라는 위험 요인이 있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왜인지 몰라도 이번에는 원작이 시작도 되기 전에 반란군이 거의 다 소탕되었다. 애석하게도 남부 귀족파의 핵심과 관련되어있다는 증좌는 찾지 못했고.

건국 기념일 연회가 수확의 시기보다 앞선 여름이니, 그들은 쉽사리 곡물을 국외로 유출하는 도박까진 못 할 터였다.

그리고 연합왕국은 남부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군량미가 부족한 상황.

당장 전쟁이 발발할 위험은 낮았다.

이제 아르비드는 황제의 결정에 담긴 저의를 일일이 설명으로 듣지 않아도 대부분 정확하게 짐작 가능했다.

‘아바마마께는 이보다 적절한 절호의 기회가 없었을 테지.’

에펜베르크 영지로 떠난 테고가 시일 내로 사라진 곡물의 행방을 먼저 찾아오면 좋겠지만.

설령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일단 황도에 모든 귀족들이 모이게 된 상황을 황제가 이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이미 남부에서 대량의 곡물이 반출되고, 장부 조작이 있었다는 것까진 증명되었다. 그건 테고와 여기 있는 베룸 공작가 남매가 알아낸 사실이었다.

건국 기념일 연회를 축소하거나 취소하기는커녕, 아바마마는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다며 즐거워하셨다.

‘이적 행위로 엮으려면 나머지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으신 분이지.’

그래서 이번 건국 기념일 연회가 꽤 중요했다. 연회의 준비과정에 아르비드가 직접 관여하는 건 이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처럼 명단을 건네는 일까지 그가 직접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평소 마주칠 일 없는 누군가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다만 한 가지, 모든 상황을 황제 못지않게 알고 있는 아르비드도 모르는 게 있었다.

‘케이어드 대공에겐 도대체 무슨 일을 맡기신 거지? 황도 밖이란 것 외엔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가 없고.’

* * *

건국 기념일 연회 준비를 맡은 첫날, 아이네는 큰 문제 없이 업무를 마칠 수 있었다. 황태자가 다녀간 후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달리아만 빼면.

결국, 보다 못한 아이네가 달리아에게 공작저에 들렀다 가라며 먼저 말을 꺼냈다.

본래는 당장 오늘부터 저택에 오라고 강권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 달리아는 혼자 두면 안 될 듯이 위태로웠다.

‘오늘은 오징어 메뉴가 나오는 날이니까.’

원작의 영향력을 약하게 해주는 음식이니 혹시 모르지. 달리아 영애의 심신도 편안하게 만들어 줄지.

그래도 진정하지 못한다면 하룻밤 자고 가라고 권해볼 생각이었다.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도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달리아 영애, 우리 집에 가는 게 혹시 불편하면…….”

“아니요! 아니에요. 오히려, 오히려 제가 갈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인걸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도 달리아가 입가를 억지로 늘여가며 웃었다.

‘달리아 영애가 정신이 없을 만도 해. 에펜베르크 후작 부자가 어지간히 개차반이어야지.’

원작에선 직접 등장하진 않았지만, 서술만으로도 끔찍한 인간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에펜베르크 영지를 떠나 황도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달리아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는 건 아이네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설마, 때리나?’

아냐, 때리진 않는다.

달리아 영애 자체를 최고의 상품으로 보고 있을 테니 그 상품에 흠집을 내려 하진 않을 테다.

거기다가 이번 건국 기념일 연회에 모든 귀족들이 모이게 된다면 제 딸을 마음껏 전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심지어 연회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달리아 영애가 성년을 맞이하니 몸값을 한껏 부풀리려 할 게 분명했다.

‘하, 정말 설정 한번 쓰레기 같네.’

아이네가 혀를 찼다. 왜 이렇게까지 달리아를 괴롭히지 못해 온 우주가 나서서 안달인 걸까. 그게 원작인지, 작가인지 몰라도 말이다.

오늘도 나딘은 공작저에 도착한 아이네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함께 내리는 달리아를 보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침에 나한테 통보하듯이 말해놓고, 바로 오늘 데리고 오면 어떡해!”

그 말에 달리아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마를 짚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나딘이 한숨을 쉬었다.

“영애가 지낼 방은 아직 준비가 다 안 됐는데…….”

“아!”

다행이다, 싫어하시는 게 아니었구나.

저도 모르게 달리아가 작은 소리를 내었다. 나딘의 잔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설마 영애한테도 오늘 말하고 오늘 데리고 온 거야?”

정확한 추측에 아이네는 조금 주눅이 든 얼굴을 했다.

“으응, 내가 오늘 달리아 영애랑 같이 있고 싶어서.”

“너……!”

나딘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려 했다. 그러나 이내 곁에 조용히 서 있는 달리아를 의식하고 인사를 건넸다.

“아직 준비를 완전히 마치지 못해서요. 원치 않으시면 저녁만 드시고 귀택하셔도 됩니다.”

순간, 번쩍 얼굴을 든 달리아가 절박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응접실에서 자도 괜찮은걸요.”

그 말을 들은 아이네가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집이 공작저인데…….’

손님을 응접실에서 재울 리가.

* * *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달리아는 준비된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으며 아까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 참. 갑자기 묵게 되어서 잠옷이 마땅치 않겠네요.”

하루 종일 미안해하는 아이네에게 달리아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어요.”

“음, 제가 한 번도 안 입은 잠옷이 꽤 많은데……. 선물로 하나 줄 테니 골라볼래요?”

그 순간, 달리아는 조금 나쁜 마음을 먹고야 말았다. 구석까지 몰릴 대로 몰린 절박함의 발로이기도 했다.

“엑? 이런 디자인 좋아해요?”

“아, 공녀님 마음에 든 옷인가요? 그럼 다른 걸로…….”

“아뇨, 아뇨. 그것보다 영애한테는 조금 짧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아요!”

회상을 마친 달리아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제 스스로를 이토록 비참하게 여긴 건 처음이었다.

비록 요즘 들어 갑작스레 바뀐 주위 환경 탓에 많이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러면, 이러면 정말 안 되는 거 알지만.’

공녀님이 알면 이런 자신을 경멸하시겠지. 호의를 베풀었더니 원수로 갚는다고 하실지도 모른다.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잠옷을 마저 다 갈아입었다.

‘무서워. 하지만…….’

정말로 달리아에게는 이제 선택권이 없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 * *

“공자님.”

마침 깊은 밤이 되어 서재에서 나오던 나딘을 가냘픈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아, 영애.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군요.”

“부디, 부디……. 제, 밤을 받아주시겠어요?”

그 말을 들은 나딘의 표정이 요상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들은 게 정말 그 뜻이 맞는지 한참을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초조해진 달리아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그러자 하늘하늘한 얇은 잠옷만 입은 모습이 드러났다.

어두운 와중에도 언뜻 살이 비쳐 보일 만큼 거의 속옷이나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심지어 아이네의 키에 맞춘 옷이라 기장마저 짧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정말이에요.”

달리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운 마음 반, 결국은 이런 식으로라도 그를 붙잡고 싶어 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반이었다.

‘비겁하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은 이렇게 해도 나딘 공자는 함께 밤을 보낸 여인을 모른 척할 사람이 아닌 걸 아니까.

본능적으로 가슴 부근을 가리려는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던 참이었다.

“공자님의 명예에는 절대, 절대 누를 끼치지 않도록……. 꺅!”

파들거리는 달리아의 어깨 위로 재킷이 걸쳐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재킷의 기다란 옷소매를 잡은 나딘이 그대로 잡아당겨 꽉 묶었다.

“저기, 잠깐…….”

“조용히 하세요.”

“…….”

달리아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토록 무표정한 나딘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냉랭하기까지 한 모습과는 반대로 목소리엔 화를 참는 기색이 숨길 수도 없이 실려 있었다.

실패……일까.

하긴, 그런 요정 같은 여동생을 평생 보고 살아온 사람의 눈은 훨씬 더 높겠지.

달리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망연한 낯으로 서 있는 그녀의 등을 나딘이 손가락 하나만으로 슬쩍 밀었다.

“공자님?”

“따라오세요.”

지금까지와는 달리 나딘이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평소 아이네나 달리아의 걸음걸이를 맞춰주던 그답지 않았다.

‘이대로 쫓아내려는 걸까?’

달리아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 *

“그런 못된 건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나딘의 목소리가 짐짓 매서웠다.

“배우다니요…….”

달리아는 손님용 응접실 소파에 앉은 채 웅얼거렸다.

어리고 예쁜 소녀를 마다할 남자는 없다는 말을 제게 공공연히 하던 이들은 있었지만.

나딘은 달리아 혼자만의 생각으로 저지른 일이라는 걸 믿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누군가 나쁜 바람을 넣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영애, 영애의 나이가 몇입니까.”

“열여덟이지만, 올 가을이면 성년이 되니까…….”

달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로 나딘의 재킷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이제 석 달 정도만 지나면 성년인데.

“어쨌든 지금은 미성년자 아닙니까.”

나딘이 단호하게 말을 잘라냈다.

“…….”

“여성이라면 순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애의 사생활은 영애의 것이니까요. 하지만.”

맞은편 소파에 있던 나딘이 달리아의 앞에 와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어떤 선택이든 거기엔 책임이 따릅니다. 중요한 선택일수록 온전히 그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해야 하는 겁니다.”

아까처럼 화를 억누르는 음성은 아니었다. 조금쯤 평소처럼 다정해진 목소리에 달리아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저는 공자님을 선택한 거예요.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제 의지로요.”

“…….”

아이네와 친하게 지내는 것 같더니, 막무가내인 성격이 옮았나. 처음 보았을 때는 분명히 이런 영애가 아니었는데.

‘옷은 또 어디서 이렇게 짧은 걸 입고…….’

그렇게 생각하던 나딘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그러고는 그의 오른쪽 팔이 달리아의 다리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닿지는 않았지만, 조용한 가운데 갑작스레 큰 움직임이 일자 그녀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 모습에 나딘은 속으로 나지막이 한숨을 삼켰다.

이 영애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 정도에도 이렇게 잔뜩 겁을 먹으면서.

“그 책임을 질 최소한의 나이가 성년이라는 겁니다, 영애.”

마지막의 영애, 라는 말과 함께 나딘은 결국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오른손에 잡힌 담요를 그녀의 무릎 위로 덮어주었다.

“아…….”

따뜻했다. 위에는 재킷이, 아래엔 털이 포슬포슬한 담요가 덮이자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달리아가 기다란 속눈썹을 깜박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석 달 뒤에는…… 절 받아주실 건가요?”

어쩐지 달리아의 목소리에 간절한 물기가 묻어났다.

“아뇨.”

그런 그녀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며 나딘이 눈을 마주했다.

“성년은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조금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큰 세계를 겪어보세요, 영애.”

아이네보다 약간 짙은 영롱한 터키색 눈동자가 단단하게 빛났다. 달리아는 정신없이 그 빛을 쫓았다.

“당신은 아직 어려요. 겉모습이 어른과 비슷하다고 성인이 아닙니다. 충분히 많은 선택지를 알고 고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영애의 의지로 선택을 하세요.”

그러는 공자는 자신과 겨우 세 살 차이이면서…….

달리아의 눈가가 끝내 붉어지기 시작했다.

다정한 타이름에 아까부터 억눌렀던 수치심과 이름 모를 안도감이 뜨겁게 섞였다. 그리고 그것은 끝내 달리아의 눈가에 아롱지듯 매달렸다.

‘역시, 공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언젠가 그때가 와도 내 선택은 당신일 거예요.’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분명 아직 어린 영애의 섣부른 고백으로 치부할 게 뻔하니까.

더 혼내기나 하겠지. 바로 이렇게.

“아,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어리더라도 영애의 선택이니 존중한다느니 뭐니 헛소리하는 놈은 반드시 걸러야 합니다. 정말 비겁한 놈들이나 그런…….”

“…….”

나딘의 잔소리가 더 길어지기 전에 달리아는 몸을 살짝 일으켜 그에게 기대듯 안겼다.

“아니, 잠깐! 영애. 여태껏 뭘 들은 겁니까.”

“……잘 알았으니까. 잠시만, 잠시면 돼요.”

달리아의 목소리가 다시 평소처럼 새침하게 돌아왔다. 그에 안심한 나딘이 어정쩡하게 안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세를 다시 고쳐주려던 참이었다.

“뭐야, 왜 이 시간에 불이 켜져 있……, 오빠? 달리아 영애?”

졸음이 주렁주렁 달려있던 아이네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달리아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래서 나딘의 어깨에 더 깊숙하게 얼굴을 묻었다.

“아냐, 잠깐! 아이네, 오해야.”

나딘의 재킷을 걸친 채 소매로 몸이 꽁꽁 묶인 영애. 그리고 힘없이 쓰러져 그에게 안긴 모습.

누가 보아도 오해하기 딱 좋은 장면이었다. 그것도 꽤나 일반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이, 개…… 쓰레기 같은! 죽어!”

“아냐! 아니라고!”

아이네의 분노에 찬 목소리와 나딘의 새된 비명이 저택을 울렸다.

그날 밤의 소동은 달리아의 악몽 때문인 것으로 일단락이 났다. 아이네가 그 자리에서 나딘을 처단하려 단검을 소환하려던 순간, 달리아가 입을 열었다.

“공자님 말씀이 맞아요. 오해예요, 영애.”

말간 얼굴에 눈가와 코끝만 붉어진 채였다.

하지만 정말로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던 게 맞는 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결연한 기색마저 엿보였다.

“정말, 정말로 지독한 악몽을 꾸었지 뭐예요. 이제야 꿈에서 깨어난 것만 같아요.”

그렇게 눈꼬리에 매달린 물기를 훔쳐내며, 달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영애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어쩔 도리가 없지만…….

어딘가 후련하면서도 처연해 보이는 모습에 아이네와 나딘 모두 말을 잃었다.

특히 나딘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다음 날, 출근길 마차에 아이네와 달리아가 함께 올랐다. 어딘지 모르게 달리아의 얼굴이 조금 부은 듯했다.

아이네는 아닌 척 눈치를 보며 그녀를 힐끔거렸다.

‘역시 요새 많이 힘들었나 봐.’

악몽까지 꾸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잠옷만 입은 채로 낯선 저택을 헤맸을까.

원작의 영향력은 어디까지 그녀를 괴롭히려는 걸까. 어젠 분명히 저녁 식사 메뉴로 오징어까지 나왔는데 말이지.

원작이 어서 끝이 나야 이 영향력도 사그라들려나.

거기다가…….

‘에이, 설마.’

달리아를 향한 아이네의 시선이 조금 더 짙어졌다. 어제는 위태해 보이는 달리아의 분위기 때문에 미처 묻지 못한 게 있었다.

‘진짜로 오빠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나딘으로 말할 것 같으면 테고와는 완전히 다른 타입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나딘은 과묵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다. 잔소리만 심했지.

“…….”

으응, 요즘은 테고도 나딘과 좀 비슷해지긴 했지, 참.

비슷한 시기에 관심을 보였던 황녀도 나딘에게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요정님의 오라버니, 아니, 공자에겐 늘 이렇게 오징어 캔디가 많은가요?”

거기까지 들은 아이네가 동그랗게 눈을 뜬 채로 목소리를 낮췄다. 황녀가 다른 영식에게 호감을 보이는 건 그저 보통의 영애들이 가십처럼 내뱉는 것과 그 무게가 달랐다.

“저어, 황녀님. 오빠는 보기보다 간섭도 되게 심하고요. 에, 또…….”

어떻게든 나딘의 험담을 짜내려는 아이네에게 티아는 처음으로 정색했다.

“공녀! 내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공자의 나이는 알아요. 올해 스물하나라고 들었어요. 나와 열세 살이나 차이 나는걸요?”

“와앗! 역시 그렇죠?”

안심하는 아이네에게 황녀는 이렇게 말했더랬다.

“공녀를 많이 좋아하는 건 맞지만, 이 몸이 제일 닮고 싶은 사람은 세피아 황후예요.”

“아…….”

세피아 황후는 건국의 기틀을 닦고 빈민구제와 의복의 간소화 등 여러 업적을 세운 초대 황후였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제국의 모든 소녀들에게 훌륭한 선례를 남겼다는 것이었다. 연하인 황제와의 나이 차이가 무려 열두 살.

“상대가 태어나려면…… 아직 4년 정도 남았겠네요.”

“살아온 햇수의 절반 정도만 기다리면 되니까요.”

“그러게요, 얼마…… 안 남았어요.”

야무진 티아의 말에 아이네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여기까지가 이제 여덟 살 생일을 맞은 황녀의 탄신일 연회에서 나눈 대화였다.

그러니 달리아만 나딘의 미끈한 외양에 속지 않길 바랄 뿐이다. 다시 면밀하게 달리아의 옆얼굴을 살펴본 아이네는 서둘러 결론지었다.

‘그래도 막 상기된 얼굴이 아니라 심각한 표정인 걸 보면…….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한편, 달리아는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가 한심하기 이를 데 없어서.

늘 자신을 값비싸게 팔아먹기 좋은 상품으로 생각하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증오했다.

절대로 그들이 생각하는 천박한 상품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보다 천박했어.’

보고 들은 게 그것뿐이라 궁지에 몰리자 생각해낸 게 겨우 몸을 던지는 일이었다.

그대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공녀님에게까지 그런 추한 모습을 들키느니 쫓겨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남자가 다른 영식들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랬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른에게 보호받는 기분을 알았다.

외롭고 험한 길을 혼자 걸어가다 잠시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뒤에서 지켜보고 올바른 길로 가도록 손잡아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보호자가 있다는 게…….

‘이런 거였나.’

혼이 나면서도 이상하게 눈물이 날 만큼 좋기도 했다. 길이가 짧아 허벅지까지 올라왔던 잠옷 치마 위를 덮어주던 담요가 더없이 따뜻했다.

그리고 달리아는 동시에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들 남매와 자신은 어떤 면에서든 다른 사람이라는 걸.

‘나는 이렇게 올곧은 분을 내 욕심으로 더럽히려고 한 거였구나.’

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공녀님과 공자님을 기만하는 일은 없을 거다.

곧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건국 기념일 연회에 참석하러 올라온다. 그들이 영지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망쳤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달리아는 그들에 대한 기대를 진작에 버렸다.

‘이름뿐인 후작 영애가 무슨 소용이 있어. 이젠 차라리……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영지도 전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그러면 공자님이 제게 실망하실 일이 더는 없으려나.

자신도 모르게 그리 생각하던 달리아가 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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