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진짜 진실 (18/29)

17. 진짜 진실

본궁에서의 업무 이틀 차, 어제와 완벽히 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이네와 달리아만 빼고는 폭풍 전야처럼 일감이 몰아쳤다. 실무진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걸 바라보는 게 준비위원장의 일이라니.

“하…….”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오늘은 출근 전 기사단 건물에 들러 처리할 서류를 가지고 온 게 다행이었다.

그때, 오른손 중지에 꽤 두꺼운 반지를 끼고도 막힘없이 글씨를 써 내려가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답답하시면 창문을 열게 할까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다만 오늘은 그녀들 말고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어제 추가 명단을 가지고 들렀던 아르비드였다.

완전히 펜을 내려놓은 그가 어색한 얼굴로 애써 웃었다.

“혹시, 제가 이곳에 있는 게 불편하십니까?”

“아니에요!”

“…….”

먼저 외친 건 아이네였고, 침묵한 건 달리아였다. 지금 그녀의 표정은 만나기 전 상상했던 딱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황태자에게 조금은 무례하다고 느껴질 수 있을 만큼 딱딱한 데다 미약하긴 해도 경계하는 기색까지 있었다.

혹시나 싶어 짐작은 했었지만…….

‘이거 참, 원작에서 그랬다고 여기서도 서먹하게 구는 거 아니지?’

아르비드의 녹색 눈이 무감하게 달리아를 슥 훑고는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는 다시 손을 움직여 멈췄던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이 부서의 총괄은 공녀이니, 공녀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런 아르비드를 바라보는 달리아의 눈에 이번에는 뚜렷하게 의문이 서렸다.

어제는 제 아버지와 오라비가 명단에 올랐다는 충격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굳이 영애들 틈에서 업무를 보겠다며 자리를 차지하는 황태자가 수상했다.

실질적인 예산과 인력 운용에 대한 권한은 그에게 있으니,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왜 자꾸 공녀님을 아닌 척 훔쳐보시는 거지?’

달리아는 테고 리테루온 공작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저 훤칠한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이번 반란군 진압 작전을 성공시킨 공작이라는 정도뿐.

가까이에서 말을 나눠 본 건 베룸 공작저에서 곡물 유출 건으로 회의가 벌어졌을 때뿐이었다. 그 전에는 데뷔탕트 연회장과 기사단에서 잠깐 본 게 전부였고.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리테루온 공작이 아이네에게 굉장한 호감을 품고 있다는 것. 그것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뚜렷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공녀님도 공작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공작에겐 안타깝게도, 같은 마음은 아니신 거 같던데.’

아이네와 다르게 달리아는 그런 쪽으로 꽤 눈치가 빨랐다.

비록 나이는 그녀보다 한 살 어리지만.

어려서부터 사교계에서 차근차근 제 자리를 만들어온 사람의 생존 본능과도 같았다.

그래서 황태자가 아이네를 의식하는 태도와 눈빛도 금방 알아챘다. 이성을 향한 호감이 막 싹트는 자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아이네의 매력에 그럴 수 있다며 넘기기엔 황태자가 너무 거물이었다.

황도 내에 모르는 이가 없는 둘의 약혼이 깨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싹이 더 움트기 전에 밟아 없애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달리아가 짐짓 모른 척 입을 열었다.

“공녀님, 리테루온 공작은 그럼 얼마나 황도를 떠나 있는 건가요?”

그 말을 들은 아이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달리아가 왜 또 테고한테 관심을 보이는 거야?

이럴 바엔 차라리 나딘에게 다시 관심을 보여줘!

요즘 이상하게 틀어졌던 전개가 도로 되돌아가려고 몸부림치는 느낌인데…….

최근 들어 영향력이라는 것의 존재를 알게 된 아이네는 긴장으로 등을 빳빳하게 세웠다.

아니지? 아니지, 달리아 영애?

“엥? 다, 달리아 영애……. 그런 게 궁금해졌어요?”

아이네의 표정과 목소리는 그저 순수하게 놀란 듯 보였다. 하다못해 제 약혼자의 일을 묻는 영애에게 미약한 질투마저 느끼지 않는 기색이었다.

“……아뇨.”

달리아는 그냥 이런 식의 자극은 포기하기로 했다. 리테루온 공작에게 제일 처음으로 갖게 되는 감정이 안쓰러움일 줄이야.

아이네가 침을 꼴깍 삼켰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적막함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어색해, 어색하다고…….

결국 그녀는 여러 번에 걸쳐 검증된 만능 치트키를 다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자, 자. 그러지 말고 오징어 캔디 드실 분?”

뭔지는 몰라도 이거 먹고 화해해라, 응?

여전히 둘 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지 않으면서도 오징어 캔디는 거절하지 않았다.

아이네의 손바닥 위 캔디를 집으려 아르비드의 손이 잠시 서류 위를 떠났다.

그리고 작성하고 있던 서류에는 까만 잉크의 점이 조금 넓게 퍼져 있었다. 마치 다른 생각을 하느라 펜촉을 오래 누르고 있던 것처럼.

달리아가 그것에 시선을 주려던 그때.

“에펜베르크 영애!”

분주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종 하나가 그녀를 찾았다.

“무슨 일이시죠?”

순식간에 익히 알던 이미지처럼 쌀쌀맞은 태도로 돌아간 달리아가 턱을 살짝 쳐들었다.

“바쁘신 건 알지만……. 재무부에서 영애를 급히 찾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네가 달리아 앞을 팔로 막았다.

“재무부가 왜요?”

그곳의 관료들도 사교계의 귀부인과 영애들처럼 달리아를 적대시한단 걸 이미 안다. 그래서 차라리 연회 준비를 핑계로 자신이 데리고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건데…….

“아이고, 에펜베르크 영애.”

아이네가 두어 번밖에 본 적 없는 재무부 대신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그때까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앉아있던 달리아가 일어섰다.

“각하……?”

“영애가 자리를 비우니 쌓인 서류가 벌써 한 뭉치라네. 지난번에 정리했던 그 방식 있지 않나. 그걸로 제일 급한 일이라도 좀 도와주게나.”

재무부의 다른 관료도 아닌 장관에 해당하는 대신이 직접 찾아왔다. 거기에 달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말까지.

‘아니, 이건 거의 매달리는 거 아냐?’

대신이 이렇게 절절매는데 다른 재무부 관료들이 그녀를 무시할 수가 있나?

하지만 아이네보다 더 놀란 건 달리아였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미 제출한 서류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퇴짜 놓으셨던 분인데.

하지만 달리아는 침착하게 놀란 표정을 감추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는 공녀님을 보조하는 황명을 수행 중입니다.”

그러자 재무부 대신인 후작이 이번엔 아이네에게 매달렸다.

“공녀, 지금 에펜베르크 영애가 없으면 우리 재무부는 올 스톱이오. 좀 양해해줄 수 없겠소?”

아니, 그렇게 말한다면야…….

어차피 앉아서 소소한 담소를 나누고 가끔 무언가를 결재하고 고르는 일뿐이었다. 그래도 달리아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 그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딘과 맞네, 맞아.’

달리아의 볼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몸도 조금씩 들썩들썩하는 게 당장이라도 서류의 숫자와 포옹이라고 하고 싶은 듯했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대접이 달라진 건 좋은 일이다. 아이네는 미심쩍었으나 결국 달리아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아이네가 달리아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만약에, 영애를 괴롭히려고 하는 거라면 제 이야기를 하고 이리로 오세요. 알겠죠?”

“예!”

그래, 가랏! 달리아 몬!

* * *

이제 건국기념일 연회 준비를 위한 사무실엔 아이네와 아르비드만이 남았다.

‘으음, 생각해보니 황녀님이라면 모를까, 황태자와는 거의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구나.’

기껏해야 오징어 캔디를 두어 개쯤 나눠준 게 다였다.

그렇다고 명백히 서브남인 그와 새삼스레 친분은 쌓는 건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네도 옆에 놓여있던 제2기사단 서류를 집어 들었다.

“제2기사단의 것입니까?”

“아, 네에.”

어느새 아르비드가 손에서 펜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사무실의 가장 안쪽에 있기는 해도 훤히 뻥 뚫린 공간이다.

그래서 아이네는 아르비드와 둘만 남았대도 별 감흥이 들진 않았다.

“그곳을 선택한 건 테고와 함께 있기 위해서입니까.”

왔다, 서브남의 견제 공격!

역시 달리아 영애가 아니라 자신이 약혼자가 되니, 일이 이렇게 되는구나.

“생각보다 오래 같이 있지는 않아요. 테고 경은 기사단의 훈련이나 황명으로 자리를 비울 때가 꽤 많거든요.”

테고에겐 미안하지만 아이네는 약간의 거리 두기를 시전했다. 원작의 달리아 영애처럼 황태자와 기 싸움을 하기엔 제 화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소파의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기댄 아르비드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부터 느꼈는데, 계속 테고 경이라고 부르는군요.”

“아, 이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테고가 처음엔 베룸 영지에 호위 역할로 왔고, 공작이란 걸 숨기려다 보니 그렇게 부르게 됐다.

그리고 나선 친구를 하기로 해서 딱딱한 호칭보다는 ‘테고 경’이라고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고…….

“혼인할 겁니까?”

아르비드 황태자도 돌려 말하는 법이 없구나. 누가 황제의 아들 아니랄까 봐.

“글쎄요, 태자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정략적인 의도가 있는 계약 약혼이라…….”

아이네는 이번에도 말끝을 흐렸다. 한다, 안 한다는 말보다는 확실한 사실이기도 했고.

“흠……. 그렇습니까. 둘 사이가 상당히 가까워 보여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앗, 그건 테고 경과 제가 친구라서 그래요.”

아르비드가 미간을 조금 찌푸려졌다. 친구라고? 테고는 전혀 그럴 기색이 아니던데…….

“아하.”

눈앞에서 그녀를 마주하고, 둘 사이에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또다시 가슴이 술렁거렸다.

아바마마의 의도대로 되지 않겠다는 결심까지 하고 여기에 온 건데…….

‘제아무리 공작이라고 해도 황족보다 귀하진 않아. 아르비드, 권력이 무어라 생각하느냐?’

이런 식이면 자꾸만 아바마마의 말이 머릿속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 * *

아르비드가 말없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동안, 아이네는 무심코 눈길을 주었다가 그의 반지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테고의 아티팩트 외에도 대공이나 황태자에게도 아티팩트가 있었지.’

테고를 제외하곤 발현자가 아니기에 그 기능을 사용하진 못하지만 말이다.

리테루온의 아티팩트는 왼쪽 귀걸이, 헤이안드로의 아티팩트는 오른쪽 귀걸이. 마지막으로 황가인 에스피오의 아티팩트는 반지 형태로 존재했다.

‘꼭 세 개가 모여서 한 세트가 되는 구성 같네.’

순간, 아이네는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지난번 살롱에서 귀부인들 역시 ‘진실의 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오징어 캔디를 먹어서 그렇게 술술 말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작 ‘진실의 눈’이 베룸과 관련 있다는 것 외에는 모르는 듯했다.

그런데 아이네는 그들보다도 더 아는 게 없었다. 원작에서 본 적 없고, 정작 베룸 영지에서 8년을 살면서도 들은 적조차 없었다.

‘황태자는 고대 일족의 후예니까. 그래도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케이어드 대공도 무언가 아는 듯이 말했었다. 게다가 지금의 황태자는 우연찮게도 오징어 캔디까지 먹었다.

원작의 영향력이란 게 아이네에게 ‘진실의 눈’의 존재를 숨긴 거라면…….

지금이 그에 대해 물어볼 적기였다.

“으음, 전하. 혹시 ‘진실의 눈’에 대해서 아시나요?”

아르비드의 시선이 아이네의 커다란 눈동자로 바로 가 닿았다.

갑자기 왜 베룸 일족의 이능에 대해 말을 꺼내는 걸까.

역시 오색찬연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베룸의 ‘발현자’라서?

기이하게도 알려진 게 거의 없는 베룸 일족의 이능이었다. 거기다 황제가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아닌 탓에 아르비드도 그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왜 내게 베룸의 것에 대해 묻는 겁니까? 공녀가 ‘발현자’라서?”

“발현……자요?”

케이어드 대공과 똑같은 소릴 했다.

“베룸의 ‘발현자’는 어떤 이능이 있는데요?”

“그야…….”

아르비드의 말문이 막혔다. 여태까지 안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베룸 공녀인 그녀의 눈이 빛났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진실의 눈’이 발현됐다고 믿었다.

‘설마 본인도 모르는 건가.’

아르비드가 아이네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엄청난 연기력이 아니라면, 정말로 이에 대해선 하나도 아는 바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인 베룸 공작이 무언가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아뇨, 알긴 아는데. 황도에 오기 전에는 다른 고대 일족 직계들을 만나보지 못했거든요.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는지 궁금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네가 겨우 변명했다. 역시 고대 일족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으면서 원작과 자신에게만 숨겨진 사항이었다.

그럼, 테고 경도 알고 있었을까?

‘아니, 아르비드 황태자처럼 제대로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커.’

결국 도돌이표였다. 아버지인 베룸 공작이나 나딘, 그것도 아니면 숲으로 돌아가 그 존재에게 답을 얻어야 했다.

일단 이 연회 준비만 끝나고 나면!

하나 더 남은 고대 일족의 직계가 떠오르긴 했다. 하지만 그는…….

‘케이어드 대공과는 다시 접촉하기가 좀…… 그래.’

그때 잡혔던 턱이 아직도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 * *

왜 항상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건지.

멍하니 앉아 있기 싫어, 가져왔던 제2기사단의 서류를 놓아두러 기사단에 들렀다. 그러다가 정리할 겸 잠시 책상에 앉아 아까 황태자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 보던 참이었다.

‘테고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이고, 미래의 국정 파트너라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녀가 묻는 의도대로라면…… 저는 남자에겐 그런 쪽으로 흥미가 없습니다.’

혹시나 싶어 큰맘 먹고 테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원작 남주인 케이어드도, 원작 서브남인 아르비드도…….

‘테고 경을 좋아하긴커녕, 호감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아.’

오히려 그런 걸 묻는 의도가 뭐냐는 눈길만 받았다.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지금까지의 전개로 볼 때, 이제는 약간 느린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여태껏 달리아 영애니, 반란이니, 전쟁이니 그런 것에 신경을 쏟았다. 그러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주인공들의 관계 진전은 놓치고 말았다. 아니, 실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애써 자기 합리화로 무시해왔다.

자신이 모르는 어느 곳에서라도 테고와 케이어드는 전개를 따라가고 있을 거라던 믿음도 부서진 지 오래.

‘이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내가 원작 소설을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 걸까.’

아이네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늦지 않게 잘 찾아왔군.”

그녀의 머리 위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네가 시선을 들자 집무실 문 앞 삐딱하게 서 있는 케이어드가 보였다.

“앗! 여긴 어떻게…….”

“참고로 말하지만 난 분명히 노크도 했고, 기다리기도 했어.”

생각에 잠겨 있느라 하나도 못 들었나 보다. 서둘러 서류를 마저 정리한 아이네가 자리를 뜨려 했다.

“워, 아니. 잠깐만! 이번에는 손 하나 안 건드릴 테니 걱정 마.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온 거니까.”

그러자 케이어드가 기댄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저었다. 과연 작중에 묘사된 대로 커다란 덩치이긴 했다.

지난번에는 그저 당하고만 있었지만 이젠 호신술도 배웠고, 단검도 소환할 수 있다. 그러니…….

“또 이상한 소릴 하려는 거면 대답하지 않겠어요.”

“그래,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케이어드가 성큼성큼 다가와 아이네의 책상 앞에 멈춰 섰다. 테고와 비슷한 행동인데도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 ‘기억’이라는 것엔 내 미래 말고 다른 것도 보이는 거지?”

이상한 소릴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서 또 같은 이야기이다. 이번만큼은 말려들지 않겠다고 다짐한 아이네가 기어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니까요. 저 이만 가야 해요.”

“잠깐만!”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던 케이어드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이네가 있는 힘껏 제 어깨를 감싸고 고개를 숙인 모습을 본 탓이었다.

“하, 누가 보면 내가 널 겁박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 나 원래는 그런 놈 아니야.”

“……그런 줄 알았는데, 저번에 보니까 충분히 함부로 하시던걸요.”

몸을 감싼 팔 사이로 눈만 빼꼼하게 올려 뜬 아이네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 말에서 무언의 힌트를 얻은 케이어드가 책상을 짚은 채로 아이네에게 속삭였다.

“그런 줄 알았다니, 역시 넌 나에 대해서 알고 있어. 그렇지?”

“…….”

“네가 8년 전의 아이네든 아니든 난 신경 쓰지 않아. 베룸 공작가엔 아무런 감정도 없고.”

급하게 달려왔는지 조금 흐트러진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케이어드가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게 폐하의 명이 따로 내려온 것도 알고 있을 테지. 혹시나 해서 말인데…….”

……모른다. 그녀가 알고 있는 원작에는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다.

하지만 아이네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폐하께서 그 영애와 아이를 찾고 계신 이유를 알아? 아니, 그들이 살아있긴 해?”

무슨 영애? 무슨 아이?

“심지어 그 소문이 있던 곳 근처엔 리테루온 공작이 있더군. 남부에서 유출된 곡물이 그 근처에서 사라졌다고 하고.”

테고와 만난 걸까. 그럼, 아까 고민하던 전개대로 둘의 관계가 느리게나마 다시 시작되긴 하는 걸까.

여전히 일말의 미련이 남은 아이네가 케이어드의 말을 저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발현자든 뭐든 좋아. 네가 본 ‘기억’을 말해줘. 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야?”

아마도 전쟁일 거다. 그리고 사라진 반란군을 대신해 남부의 귀족파가 반정을 도모할지 모르고.

영애에 대해선 모르겠지만 ‘아이’라고 한다면 그녀도 조금쯤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네의 생각과는 달리 입에서는 다른 말이 새어나왔다. 계속, 계속 묻고 싶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한 말.

당장은 찾아갈 수 없는 숲속 존재에게 묻는 게 가장 확실했다. 그 다음은 본인에게 직접 묻는 것이겠지.

“케이어드, 아니, 대공 전하. 제 질문에 먼저 답해주시면……. 그러면 말씀드릴게요.”

“뭔데?”

“정말로, 테고 경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요만큼도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아요?”

떨리는 아이네의 목소리에 케이어드는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8년 전에도 들었던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불쾌하기 짝이 없다.

“누가 봐도 같은 남자인데, 이성이라니. 오히려 그자는 너를……. 아!”

그제야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케이어드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그때 아이네도 그런 말을 하더군. 아티팩트가 어쩌고저쩌고.”

등장인물 중 누구보다 고대 일족과 아티팩트에 대해 잘 아는 케이어드였다. 헤이안드로 일족은 여태 한 번도 끊기지 않고 직계에서 직계로 온전하게 이어져 왔으니까.

“혹시 리테루온 공작이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변장이라도 했다고 생각했어?”

“아, 아니에요?”

아이네가 마른침을 삼켰다. 전부 다 말한 적이 없는데도 케이어드는 바로 핵심을 찔러왔다.

“글쎄, 그 곱상한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아이네는 여전히 미약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마침내 케이어드의 입이 달싹이며 열렸다.

“설령 공작이 아티팩트로 변장을 했더라도 네 눈에는 보일 거 아냐?”

“네?”

그녀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져갔다. 그걸 빤히 바라보며 케이어드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아이네의 바람을 완전히 깨부수었다.

“너, ‘진실의 눈’을 가진 발현자잖아. 아티팩트를 가진 고대 세 일족이 무얼 하든 전부 꿰뚫어볼 수 있는 이능. 그게 너희 베룸의 발현자인 거, 정말 몰랐어?”

* * *

그 후, 며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이 빠져 대답을 못 하는 아이네를 구원해준 건 지나가다 들른 칼릭이었다.

“전하! 아무리 대공 전하시라고 해도 여긴 황실 기사단입니다. 내부에 마음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제길, 그래. 안 그래도 공녀는 지금 뭘 제대로 답해줄 상황은 아닌 거 같군.”

케이어드가 다시 급하게 황도를 떠나는 바람에 더 물어볼 기회를 놓친 건 아이네도 마찬가지였다.

칼릭의 걱정을 들으며 공작저에 돌아가는 와중에도 아이네의 머릿속엔 온통 아까의 대화 내용뿐이었다.

“설령 공작이 아티팩트로 변장을 했더라도 네 눈에는 보일 거 아냐?”

“아티팩트를 가진 고대 세 일족이 무얼 하든 전부 꿰뚫어볼 수 있는 이능. 그게 너희 베룸의 발현자인 거, 정말 몰랐어?”

몰랐다, 정말로 몰랐다.

원작에 나오지도 않았던 내용을 그녀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제아무리 당사자라고 해도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아버지나 나딘한테 물어봐야 해.’

하지만 하필 돌아온 저택에는 나딘이 부재중이었다. 디고 상단 황도 지부에 다녀온다고 했다.

곡물 유출 건으로 혹시 사재기나 곡물 가격이 상승할 걸 대비해서 논의하러 떠났다는 메모를 보았다.

며칠 걸릴 수 있으니, 괜찮다면 달리아 영애와 출퇴근을 함께 하라고 쓰여 있었는데…….

지금 아이네는 도무지 그걸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몰래 서재에 숨어들려고 시도했다. 다시 한번 나딘의 흉내를 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번과 달리 작정한 외출이라서인지 서재의 문이 단단히 잠겨있었다. 알베르토를 시켜 열쇠로 열어볼 수 있긴 하지만.

‘그때 분명히 무슨 ‘법칙’이란 게 있어서 말해주지 않는 거라고 했으니까.’

도대체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이 아이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게 사실이라면 설령 지금 나딘을 다그쳐본다 해도 괜히 의심만 살 수 있었다.

가족들에게 책빙의자란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는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했다.

거기다 생각해보니 나딘이 상회 지부에 간 걸 아버지가 모르실 리가 없지.

괜히 아버지께 지난번의 마법 통신구도 자신이 사용했다는 걸 들킬 수 있었다.

역시…….

‘내 눈으로 확인, 확인해 봐야 해.’

* * *

건국 기념일 연회가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아이네는 점점 더 할 일이 없어지고 있었다.

황도를 비웠던 테고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건 막 퇴궁을 할 즈음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혼란스러운 마음을 억지로 꾹꾹 누르던 아이네는 폭발하고 말았다.

“오후에 입궁하셔서 보고를 하고 저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연회 전에 황도로 복귀하려고 무리하게 말을 달리셔서 공녀님을 뵙기엔 적절치 않은 차림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황도에 돌아왔다고요?”

“예! 이번에는 공녀님의 파트너로서 연회에 참석하셔야 하니까요.”

칼릭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건넨 말이었다. 아이네는 그에게 낮 동안 처리한 서류를 떠안기듯 건네고 바로 퇴궁했다.

그러고는 마차를 리테루온 공작가 저택으로 향하게 했다. 여태 베룸 공작저로 테고가 오기만 했지, 그녀가 직접 찾아가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남자 같았다.

‘원작이랑 키도, 덩치도, 성격까지도 미묘하게 달랐어.’

폴리모프 수준이라는 아티팩트만 아니었다면 남장여주라고 절대 믿지 않았을 거다.

하나씩 짚어나갈수록 그 원작이라는 것에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라니엘이 오빠인 테고의 인생을 대신 사는 소설이 있는 건 사실이야.’

도대체 어디서부터 뒤틀려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설마…… 처음부터 틀렸던 거야?’

만나기도 전에 테고가 반란군을 전부 처리해버린 게 잘못 꿰인 첫 단추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가 되었든 이제 곧, 알게 되겠지.

그리고 여태까지 해온 착각에 마침표를 찍게 될 리테루온 저택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처음 보는 집사가 아이네를 맞았다.

잿빛 머리카락에 외알 안경을 낀 중년 남자.

원작에서 테고, 아니, 라니엘의 저택 집사장이었던 그 사람이었다.

“주인님께서는 귀택하신 후, 방에서 씻고 계실 겁니다. 응접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혹시, 테고 경의 방 근처에서 기다릴 수 있을까요?”

‘테고 경’이라는 호칭과 ‘방 근처’라는 말에 그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미 테고로부터 베룸 공녀가 오면 무엇이든 허락해도 좋다는 언질을 받은 후였다.

‘그리고…… 주인님의 태도를 볼 때, 두 분은 연인에 가까우신 듯하니까.’

그 말을 할 때 테고의 반응을 떠올리며 집사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예, 그리하십시오.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 * *

방 근처라고 했지, 방 안의 응접실까지 원한 건 아니었다.

거기다가 테고의 침실과 이어진 문이 제대로 닫혀 있지도 않았다. 국경에서부터 쉼 없이 말을 달려 왔다고 들었다. 급하게 씻으러 들어간 모양이다.

으응, 그래도…….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가 너무 잘 들리는데?’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맨몸으로 걸어 나오기라도 하면 어떡해.

이미 마음속으로 반쯤은 테고를 남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네는 여전히 어째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녀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로 남자이든, 여자이든 간에 맨몸을 보는 건 실례니까.

그리고 침실 쪽 문을 닫아주러 다가갔을 때였다.

“…….”

“아니, 이게요. 그게 아니라 원래 열려 있었어요…….”

마침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테고와 눈이 마주쳤다.

“…….”

“닫아주려고 일어났던 거예요.”

문고리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아이네는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번엔 똑똑히 보았다.

거의 걸치지도 않은 듯 벌어질 대로 벌어진 목욕 가운.

그 안에는 탄탄한 가슴이 있었다. 게다가 여태 착각하고 있던 대로 아티팩트로 가슴을 납작하게 바꾸는 데에 성공했다고 해도…….

‘이렇게 당당하게 옷섶을 여미지도 않고 나오진 않겠지.’

실제로 원작의 라니엘은 그러지 않기도 했고.

* * *

“그래서 여기엔 무슨 일로 온 겁니까. 안 그래도 제가 저택으로 찾아가려고 했습니다.”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은 테고는 아이네와 제 방 응접실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런 테고의 목소리엔 평소 같으면서도 무언가 억누르는 기색이 있었다.

“확인, 할 게 있어서요.”

“…….”

또다시 모를 듯한 소리를 하는 그녀 때문에 테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며칠 전, 자신이 조사하던 곳에서 우연히 만난 대공의 말이 신경 쓰이긴 했다.

‘공작은 뭘 했기에 그 베룸 공녀한테 여자로 보인 건가?’

그러나 익숙하게 학습한 대로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확인이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십시오.”

그러나 이번만큼은 테고가 틀렸다.

“혹시 말이에요. 그 귀에 아티팩트…….”

테고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잠시만, 빼봐도 될까요?”

“……?”

그의 커다란 손이 곧장 왼쪽 귓불로 가 닿았다. 그러자 아이네가 테고의 앞으로 급히 다가가 섰다.

“제가, 제가 해도 될까요?”

만약 정말 원작대로 여자였다면 모습을 감춰주는 아티팩트에 관심을 보이자마자 화를 냈을 테다.

테고가 라니엘이 아니라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벌써 이렇게 많이 쌓였다.

‘아니야, 그래도 아직 혹시 모르잖아.’

잠시 생각에 잠겼던 테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착각하고 있었단 걸 아이네가 깨달은 모양이다.

‘이젠 좀……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소파에 기대앉은 테고의 앞으로 아이네가 다가왔다. 그리고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어서 아이네는 떨리는 손으로 테고의 아티팩트에 직접 손을 대었다.

조금은 서늘한 작은 손이 민감한 귓불에 와 닿았다. 그 감각에 그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그녀가 억지로 빼내려 하자 아티팩트에서 작은 저항이 느껴졌다. 그건 손끝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전기자극이었다.

“빼기 힘들면 저한테 맡겨도 됩니다.”

“아뇨, 이건……. 제가 해야 해요.”

드디어, 아이네의 손안에서 마지막으로 팟, 하고 작게 빛을 터뜨린 아티팩트가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건……. 여전히 테고였다.

“어떻게 이런…….”

정말, 정말로 원작 여주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다. 명백하게 드러난 증거에 숨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이라고는 왼쪽 귀에 매달려 있던 작은 아티팩트가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원작대로라면 아티팩트가 제거되는 순간, 원래 모습이 드러나야 했다. 그러니까 테고가 정말 여자라면 말이다.

그런 아이네의 모습을 바라만 보던 테고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실망했습니까?”

테고의 목소리가 낮고 조용하게 방 안을 울렸다.

그는 처음부터 단 한 순간도 아이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제게서 뭘 보고자 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경악에 찬 하늘빛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인 걸로 보아 긍정적인 방향이 아니란 건 알았다.

‘진짜 남자라고? 어떻게 된 거야.’

힘이 풀린 아이네의 손에서 아티팩트가 떨어져 내렸다. 테고의 커다란 손이 귀걸이를 받아들었다.

영지에 와 있을 때부터 테고였던 걸까? 그럼, 라니엘은 언제 사라진 걸까.

분명히 처음의 설정은 전부 다 똑같았는데…….

아이네의 두 손이 테고의 양 뺨에 천천히 가 닿았다.

“어, 언제부터 남자였어요? 아니, 왜…… 왜 남자인 거예요?”

그 말에 테고의 짙푸른 눈동자에 상처 입은 기색이 스쳤다. 그 순간, 아이네가 자신을 누군가와 착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던 추측이 사실이 되었다.

대공이 제게 중얼거렸던 말들과 여태 아이네가 보여준 행동을 조합해보면 금방 답이 나왔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역시…….

“공녀도 내가 아니라 라니엘이 살아남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담담한 음성이었다. 그에 아이네가 고개를 저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당황한 목소리가 나왔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이건, 이건…….”

테고는 제 얼굴 위에 올려진 채 떨리는 작은 손등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손안에 가득 차고도 남는 감각이 몹시도 기꺼웠다.

그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먼저 터뜨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칼릭의 말대로였다. 저를 여자로 착각해서 제게 그리 무방비하게 군 거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게서 뭘 기대했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소중히 쥔 연약한 손바닥의 살갗에 테고는 제 얼굴을 느긋하게 부볐다.

누군가와 착각했다는 것도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무얼. 상처받는 건 이미 그때만으로 족했다.

그게 누구든 죄다 뜯어내고 자신의 자리를 새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며칠간 쌓인 피로와 이미 한계에 달한 지 오래된 인내심이 테고의 어두운 욕망을 이끌어냈다.

그러면서도 새파란 안광은 아이네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아이네는 조금은 두려운 와중에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테고가 아직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게다가 그저 시선일 뿐인데도 옴짝달싹 못 하게 사로잡힌 것 같았다.

힘을 주어 잡은 게 아니란 걸 알았다. 하지만 아이네는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일견 평온한 듯한 음성에 열기가 스며들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 되었든, 너무 늦었습니다. 공녀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마치 머릿속을 읽힌 기분이라 아이네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

잠시만요. 이 소설……. 남장 여주라고 했잖아요! 저는, 도대체 어디에 빙의한 거예요!

그렇게 마음속의 외침만을 그저 망연하게 되뇔 뿐.

* * *

아이네에게는 정말 다행이게도 테고는 그 이상으로 추궁해오진 않았다. 다만 시간이 늦었다며 그녀를 공작저로 데려다주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렇게 된 것, 저는 더 이상 참지 않을 겁니다.’

뭘, 뭘 안 참는다는 건데요.

하지만 어쩐지 더워진 마차 안의 공기 탓에 아이네는 입술만 짓씹으며 침묵했다.

어떻게 그를 보내고 저택으로 들어왔는지 모른다. 혼자 퇴근했으니 달리아는 잘 왔는지 물어야 할 텐데 그럴 정신도 없었다.

넋이 나간 채 방으로 빨려 들어오듯 들어온 아이네는 사라도 물리고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베룸 영지 저택과 흡사하게 꾸며둔 침실은 침대의 감촉마저도 공작성에서와 비슷했다.

“당장이라도 그 경계의 숲에 가야 해.”

하지만 망설여졌다. 자신이 믿고 있던 원작이 처음부터 허상이었다는 건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온전히 미지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다른 것도 아닌 베룸 영지로 이어지는 도로를 이용한 세력이 있는 만큼 신중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진실의 눈’인지 뭔지 모를 이능을 빼면 허약한 체력뿐인 책빙의자니까.

‘소환되는 마검이라고 해봤자 여러 명이면 소용없잖아.’

아이네는 폭신한 데다 바짝 말려 햇빛의 향기가 나는 이불에 뺨을 부비며 발버둥 쳤다. 그러다가 다리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어?”

그래, 제겐 그 단검이 있었다. 오두막에서 알 수 없는 존재와 만나기 직전, 아이네의 피를 머금었던 바로 그 단검이.

“혹시, 어쩌면…….”

어느새 아이네는 침대 위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침대 옆 서랍을 열어 다시 그 다마스커스 단검을 꺼냈다.

당장 영지로 돌아갈 수 없는 아이네의 선택은 이것뿐이었다. 그 수상한 경계의 숲 너머 오두막에서 그녀를 따라나온 단검.

마치 아이네가 인상 깊게 본 걸 일부러 그대로 재현해둔 것처럼 똑같은 모양. 수상한 점은 굳이 손으로 꼽지 않아도 될 만큼 많았다.

‘일단 지금 해볼 수 있는 게 이거뿐이니까.’

오늘도 달빛이 예리한 날에 반짝이며 부서졌다. 검에 문외한인 그녀가 보아도 절삭력이 대단할 것 같았다.

‘으응, 설정상 금속 자체가 이 시대의 장미칼이긴 하지.’

그 칼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긴 무서웠다. 그래서 아이네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았다.

그날 오두막 안에서 조금 부주의하게 상자 안을 뒤적거렸었다. 검날의 색이 어두웠던지라 날카롭다는 생각이 미처 들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러다가 스치듯 베인 거였다.

‘혹시 그냥 피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효과가 있는 거라면?’

한 번 실험해볼 가치는 있었다.

역시 제일 쉬운 건 입술에 밴 핏방울이려나. 하지만 아이네의 입술은 밤낮으로 사라가 관리해준 덕에 갈라짐 하나 없이 매끈했다.

“…….”

억지로 깨물었다간 다음 날 난리가 나겠지.

아이네는 다른 서랍을 뒤적여 장식용 브로치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옷을 고정하도록 되어 있는 핀으로 아주 살짝 검지를 찔렀다.

이 정도면 피가 조금 나더라도 금방 멎을 테다.

“윽.”

도대체 검술을 배우고, 유혈사태를 겪는 다른 빙의자들은 어떻게 견디는 걸까. 이렇게 살짝만 찔려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픈데…….

소심한 마음만큼 제대로 찌르지 못한 터라 아이네는 급기야 검지를 꾹꾹 눌러 핏방울을 짜냈다.

제발, 제발 자신의 생각이 맞아야 했다.

겨우 손가락 끝에 핏방울이 맺히게 만든 아이네가 검날 위로 문질렀다. 그러자 지난날 그녀를 집어삼켰던 그 하얀 빛이 그곳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시도해볼걸.’

왜 그동안 직접 숲에 가봐야 한다고만 생각했을까.

[역시 대단한 응용력이네요.]

드디어 나타난 존재가 조금은 떨떠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녀인지 그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이네는 물어볼 게 아주 많았다.

우선은,

“왜 여주가 여자가 아닌 거죠?”

다짜고짜 아이네가 직구를 날렸다. 몸 쪽으로 꽉 찬 묵직한 직구였다.

“아니, 그러니까. 테고가 왜 남자인 거죠? 그리고 나만 모르는 ‘진실의 눈’은 또 뭐예요?”

[당신이 보고, 아는 그대로예요. 그리고 그건 베룸 일족의 이능이라고 부르더군요.]

존재는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는 것처럼 즉시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아이네가 정말 알고 싶은 건 왜 원작이 이렇게 엉망진창인지였다.

“……내가 빙의한 게 원작이 맞긴 해요?”

[그래요. 작가가 직접 쓴 걸 원작이라고 한다면 원작이 맞죠.]

물으면 대답해주지만 여전히 조금은 모호한 답변이었다.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며 아이네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구체적인 질문을 해야 구체적인 답이 돌아오는 듯했다.

“그럼, 원래의 원작 여주는요? 라니엘은 어떻게 됐어요?”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나요.]

아니, 단 한 번 의심한 적은 있지만 그 이상으로 생각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 참혹한 결론일 테니까.

“아니죠? 주, 죽었…….”

[…….]

아이네는 끝내 입 밖으로 생각을 내어놓지 못했다. 테고가 실은 남자라는 사실보다 원작의 여주가 잘못되었을지 모른다는 게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성별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나았다.

[바뀌지 않았어요. 그저 8년 전 사고에서 희생당한 게 쌍둥이 오빠인 테고가 아니라 라니엘이 되었을 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라니엘이 아닌 테고가 이 세상에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시리도록 새파랗고 맑은 눈동자와 따뜻하고 커다란 손.

종종 그녀를 볼 때면 슬쩍 올라가곤 하던 입꼬리, 여자인 줄 알고 있을 때조차도 아이네를 설레게 만들었던 목소리까지.

이미 그 모든 걸 겪어본 아이네에게 왜 테고가 대신 죽지 않았느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원작에 대한 믿음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아이네가 할 수 있는 건 ‘존재’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럼 그때 말한 건 다 뭐예요. 시작을 하니 마니, 살았어야 할 인물이 죽지 않는 결말이니 뭐니……. 날 속인 거예요?”

제 입으로 아이네를 데리고 온 게 자신이라고 했으니 최소한 그때라도 진실을 알려줬어야 했다.

그것도 모르고 그녀는 애꿎은 테고를 여자로 착각하고, 원작 남주와 이어주려고 애쓰기만 했잖은가.

아이네는 화를 가라앉히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미 제 눈으로 테고가 남자란 걸 확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모든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다.

거기다가 미묘하게도 흐름은 원작을 따라갔다. 그렇게 시작된 전개가 계속되어 이미 건국 기념일 연회가 코앞이었다.

[후후.]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네는 그 존재라는 것이 조금 웃고 있는 듯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웃어? 웃는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뭔가 착각하고 계시네요.]

존재는 조금 뜸을 들였다.

[……이 세계에서 원작이 시작되길 가장 바라는 존재가 나 말고 누가 있을까요.]

“무슨, 소리에요?”

원작이 시작된 지가 언젠데. 그때, 분명히 황궁에 도착해서 첫발을 내디뎠을 때…….

[당신. 단 한 번이라도 이상하다는 생각, 안 했어요?]

“…….”

안 했을 리가. 어느 순간부터 원작 그대로일 거라고 여겼던 믿음 위로 작은 의문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작은 의문들이 모여 견고한 믿음에 자잘한 상처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네는 그래도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소환했다고 주장하는 존재도 있는 마당에, 원작을 믿지 않는 편이 더 말이 안 되니까!

아이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래서, 뭐예요. 이제 와서…… 나 때문에 원작이 바뀌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흔한 일이었다. 책빙의자가 변수로 존재하는 것부터 원작의 전개가 틀어지는 경우는.

[원작은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하지만 존재는 단호하게 일갈했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원작’이라는 건, 아마 영영 시작하지 못할 거예요.]

“무슨, 소리예요. 정말…….”

아이네는 이제 자신이 울먹이기 시작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여전히 시야에는 새하얀 빛들만이 가득했다. 지난번처럼 몸에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발밑이 푹푹 꺼지는 기분이었다.

[나를 이 지긋지긋한 곳에 남게 만든 원작은 그 소설이 아니니까요.]

말을 잇는 존재의 음성에서 해묵은 분노와 억울함이 느껴진다면 잘못 생각한 걸까.

아이네는 점점 숨이 가빠져오는 걸 느꼈다. 아니, 숨이 가빠지는 게 맞나. 생각해보면 자신은 이곳에서 숨을 쉬고 있지도 않았다.

답답한 가슴을 움켜잡고 잠시 헐떡인 그녀가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실제로 감각이 느껴지진 않았어도 버티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상해, 호흡 같은 게 문제가 아니라…….’

이 공간과 아이네의 몸을 드나들며 흐르는 거대한 기운이 갑자기 버거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공간에선 충격으로 기절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기절 역시 육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잠시 말을 잃었던 아이네가 따지듯 물었다.

“그럼, 그 원작이란 건 뭔데요?”

말하는 순간, 그녀는 여태까지 느껴왔던 것 중 가장 기이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알지 못하지만, 이미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면 알 수밖에 없다.

[불행히도 나는 신이 아니지요. 나 역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하고요. 그래서 ‘법칙’을 벗어나는 질문에는 답해줄 수 없어요.]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지난번엔 테고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있었잖아요.”

[당신이 물어본 적 없으니까요.]

아이네의 탓으로 돌리려는 말투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녀가 묻지 않았기에 말해줄 수 없었다는 의미로 들렸다.

“왜요? 왜 내가 물어봐야 답해줄 수 있는 건데요.”

[이 모든 건 당신이 무언가에 대해 의심하고, 인식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가능성이거든요.]

선문답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네는 어쩐지 어렴풋이 이 세계의 법칙이란 걸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저는 한 번도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원작이라고 한 적은 없어요.]

생각해보면 그랬다. 테고와 함께 오두막에 가서 이 존재를 만났을 때도 그녀가 믿었던 원작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라니엘이 남장여주인 소설이 원작을 뜻하는 거라고 여겼다.

그러면, 아직도 시작하지 않았다는 그 소설은 도대체 뭐야? 다른 이야기가 또 있다는 거야?

[곧 기억하게 될 거에요. 그리고 이번에는 책임지고 나를 이곳에서 해방시켜줘요.]

“당신은, 뭐예요?”

중요한 건 하나도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기억하라니, 해방시켜달라니!

지난번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이미 알고 있잖아요. 신은 아니지만 이런 힘을 가지도록 설정한 건 당신인데.]

“제가 설정했다고요?”

지금껏 일련의 사태들을 겪고 어렴풋이 느꼈을 텐데도 아이네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걸 알아챈 존재가 조금쯤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분한가요? 누군가에 의해 이미 다 정해진 역할이라는 게. 제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당신도 겪어보니 기분이 어때요?]

어느덧 새하얀 공간 사이로 아이네 방의 전경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존재의 목소리가 지지직거리며 천천히 흐려졌다.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가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여태껏 그랬듯이 그냥 흘러가게 두세요.]

[나에겐 이게 마지막 기회예요. 이 지긋지긋한 세계도.]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아이네가 다급하게 외쳤다. 처음부터 이렇게 물었어야 했다.

“내 역할이 뭔데요!”

[살았어야 했는데, 죽어버린 존재. 그게, 당신이에요.]

목소리가 완전히 끊겼다.

그렇게 아이네가 발 디디고 있던 세계가 산산조각이 났다. 무참히 깨어져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몸에 힘이 풀린 아이네는 부드러운 이불 위로 털썩 쓰러져 내렸다.

브로치의 핀에 찔렸던 그녀의 검지 끝은 이번에도 아무 일도 없이 깨끗했다.

그 뒤로 아이네가 눈을 뜬 건 건국 기념일 연회가 열리기 고작 이틀 전이었다.

* * *

천장이 익숙했다. 몰랐는데 정말로 내부의 대부분이 베룸 영지 공작성과 비슷하게 꾸며져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리자마자 아이네는 그런 생각이나 했다. 그런 그녀의 귀로 약간 날카로운 음성이 꽂혀들었다.

“아이네!”

나딘이었다. 말이 좀 많긴 해도 기본적으로 온화한 성정이라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별로 없는데.

“아…….”

그러고 보니 기시감이 느껴졌다. 처음에 빙의했을 때도 그렇지만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곧이어 아이네는 제 한쪽 손이 자유롭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멍한 기분으로 제 오른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테고……경?”

“다행, 다행입니다…….”

아직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눈으로 보아도 퍽 초췌한 모습이었다. 희미한 조명이 비추는 뺨은 창백하게 질려있기까지 했다.

이것만큼은 처음에 아이네를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테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작은 손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부여잡은 손 위로 테고의 짙은 밤색 머리칼이 흩어졌다.

그것도 잠시, 아이네의 왼편에 다가와 선 나딘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시 나가주시겠습니까?”

“…….”

꽤 단호하게 들리는 축객령이었다. 그래도 테고에겐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친근하게 굴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오빠…….”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 아이네를 나딘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 가문과 일족의 일입니다. 나가주십시오, 리테루온 공작님.”

“알겠, 습니다.”

조심스레 아이네의 손을 놓아준 테고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탁, 하고 침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청력이 유난히 뛰어난 테고의 특성을 아는지라 나딘은 한참이나 더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이제 되었다 싶었는지 침대 왼편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앉았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왜? 오빠랑 테고 경이 왜 여기 있어?”

몇 달 전, 테고와 처음 마주쳤을 때와 비슷한 반응.

자신이 쓰러졌다가 깨어난 것도 모르는 듯한 반응에 나딘이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역시 몰랐구나. 너, 무려 나흘이 넘게 쓰러져있었어.”

“나흘?”

깜짝 놀란 아이네가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자 나딘이 다시 그녀를 밀어 눕혔다.

“아파서 그런 게 아닌 건 알고 있어. 그리고 이거…….”

나딘은 침대 옆 서랍장을 열어 상자를 꺼냈다. 그러고는 아이네에게 상자 안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테고가 마검이라고 했던 다마스커스 단검이 들어있었다.

“혹시 그 숲속 오두막에서 갖고 나온 거야?”

“어? 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그곳에 다녀온 걸 나딘이 알고 있었던가? 언제부터?

아이네의 핏자국이 있을 법한 단검의 날은 이번에도 그 어떤 흔적조차 없었다. 그저 반들반들하게 빛나며 조명을 반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처음 침실에 들어와서 네 꼴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사라는 방문이 잠겼다고 울고불고 난리지. 기껏 문 따고 들어왔더니 너는 죽은 듯이 누워있지.”

나딘이 말하다 말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그는 여전히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목소리에는 희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바닥에는 단검이 떨어져 있었으니까.”

“으응, 그랬구나.”

생각해보니 충분히 극단적인 상황으로 오해받을 만했다. 하지만 아이네는 자신이 그렇게 오래 쓰러져있을 줄은 몰랐다. 숲속 오두막에서도 정신을 잃었던 건 고작 십여 분에서 삼십 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기껏해야 그 정도일 줄 알았지.’

아이네는 애써 시선을 회피하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이것만은 나딘이나 아버지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요즘 바빴잖아. 몸이 잠깐 안 좋아졌었나 봐.”

아이네의 말에 나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와 거의 같은 빛을 지닌 눈동자가 한층 짙어진 색을 띠었다.

“만났지? 우리에게 ‘진실의 눈’을 남긴 고대의 존재.”

“……!”

이번에는 아이네가 눈을 크게 홉떴다. 마치 목이 콱 졸린 듯 잠시 숨마저 멎었다.

“어, 어떻게……. 오빠, 알고 있었어?”

아니, 그보다 저번에 아버지는 자신에게 ‘진실의 눈’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제 말해도 되는 거야?

그 ‘법칙’이라는 건 어쩌고? 원작의 영향력의 다른 이름이 법칙 아니었나?

묻고 싶은 건 많았으나 아이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정도였다. 차마 며칠 전 나딘인 척 몰래 마법 통신구를 이용했다는 사실까지 밝힐 순 없었다.

“네가 기절한 듯이 잠만 자고 있고, 옆에는 이 검이 있었으니까. 기억 안 나? 이거 우리 예전에 숲속 오두막 갔을 때 상자에서 봤던 거랑 같은 다마스커스 검이잖아. 하룻밤 사이에 네가 영지에 갔다 왔을 리는 없고. 이 검이 매개가 된 거, 아니야?”

잠시 잊고 있었다.

잔소리가 심하고 아이네의 앞에서 위엄을 세우려 들지 않아서 그렇지, 나딘은 꽤 명석했다. 빙의 전의 지식 덕을 보고 있는 그녀와 비교해 보아도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단검과 숲속 존재를 바로 연결 지어 떠올리는 건 이상했다. 애초에 나딘은 그 존재를 알 리가 없는데…….

의아해하는 아이네는 아랑곳없이 나딘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 숲에 갔을 때, 거기서 만난 거지? ‘시그노’를.”

“시그노?”

그 존재의 이름이 ‘시그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이네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아.”

……있다.

사냥대회 날, 천막 앞에 나타난 케이어드 대공이 느닷없이 던지고 갔던 말이었다.

‘시그노. ‘남기다’라는 뜻의 고대어지.’

도대체 그자는 소설의 등장인물인 주제에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게다가 케이어드 대공만이 아니다. 이제 보니 아버지와 나딘도 자신조차 모르는 걸 당연하게 언급했다.

원작, 아니, 이제는 원작이 아니라고 했지. 어쨌든 자신처럼 책에 빙의한 사람도 아니면서, 어디에서 알아낸…….

“아이네?”

짤막한 탄성만 내뱉고는 다시 생각에 잠긴 그녀를 나딘이 불렀다.

그래, 이전의 ‘아이네’.

빙의하기 전의 아이네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분명히!

열한 살의 그녀에게 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까 나한테 시험해본답시고 대뜸 시그노라는 말부터 꺼냈겠지.’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많았다. 빙의하기 전인 아이네 역시 소설에서 탄생한 인물일 텐데, 어째서…….

‘네가 가진 ‘진실의 눈’ 말이야. 그거 최초의 한 번밖에 반짝이지 않아.’

‘나는 이미 예전의 아이네가 ‘진실의 눈’을 발현하는 걸 봤거든.’

‘너, ‘진실의 눈’을 가진 발현자잖아. 아티팩트를 가진 고대 세 일족이 무얼 하든 전부 꿰뚫어볼 수 있는 이능. 그게 너희 베룸의 발현자인 거, 정말 몰랐어?’

그리고 단검에 피를 먹여 만난 존재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당신이 보고, 아는 그대로예요. 그리고 그건 베룸 일족의 이능이라고 부르더군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확신에 가까웠던 케이어드의 어투와 숲속 존재의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다소 달랐다. 하지만 아이네는 단 한 가지만은 알 것 같았다.

“오빠, 내가 베룸 일족의 ‘발현자’인 거지?”

“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딘은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진실의 눈’이라는 이능을 가진 거고?”

“…….”

원래 이 몸의 주인인 아이네 공녀 역시.

이제 나딘은 입만 떡 벌린 채로 아무런 말조차 잇지 못했다.

[살았어야 했는데, 죽어버린 존재. 그게, 당신이에요.]

존재와의 만남 끄트머리에 흩어지듯 들린 음성까지 뒤늦게 떠올려냈다.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긴 해도.’

아이네는 결국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시작도 못 한 원작은 따로 있고, 거기에서 ‘아이네이스 베룸’ 공녀는 이미 죽은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의 죽음 때문에 진짜 원작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걸 테다.

‘원래의 아이네가 살아있어야 해서 내가 이곳으로 빙의한 거라면……. 결국 이것까지도 진짜 원작의 영향력인 거야.’

이상하게도 아이네는 크게 충격 받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종종 위화감이 들 때마다 그녀의 내면에선 자신도 몰랐던 생각들이 툭툭 튀어나오곤 했으니까. 마치 적절한 때에 자물쇠를 하나씩 풀어내주는 것처럼.

거기다 테고가 여주가 아니라 그녀의 오빠였다는 걸 알았을 때, 놀라움이라는 감정은 다 소모해버린 지 오래였다.

이제 아이네가 알아내야 할 건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진짜 원작의 정체.

둘째, 자신을 불러낸 ‘시그노’.

셋째, 그녀가 여태 라니엘이 주인공인 소설을 원작이라고 믿게 했던 ‘기억’.

‘나는 분명히 그 기억에서 라니엘과 케이어드의 이야기를 봤단 말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엉뚱하게도 달리아 영애를 극한으로 몰아가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영향력’까지.

생각보다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인 아이네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이래서야 테고를 만나기 전과 다를 바가 없잖아. 이제 와서 다시 원작 찾기를 시작해야 하다니…….

“기억해낸 거야?”

나딘의 눈이 어둡게 침잠했다. 아마 쓰러지기 전 열한 살 때를 말하는 것일 테다.

아이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치만 오빠 말대로야. 오빠가 말하는 ‘시그노’와 같은 존재인지는 몰라도 경계 안에서 만났던 누군가를 또 만났어.”

그러고는 금세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있어봐. 뭔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근데, 오빠가 그 단검 주워서 상자에 넣은 거야? 그리고 내가 숲속 오두막에 가서 누굴 만난 거랑 이번에 다시 만난 건 어떻게 알았어?”

아티팩트의 주인인 테고조차 제대로 손대지 못했던 마검이다. 그리고 피로 각인이 된 이후론 주인 외에는 다룰 수 없다고 했는데?

“맨손으로는 엄청 따갑더라고. 그래도 두꺼운 천으로 감싸니까 간신히 들 수는 있더라.”

“…….”

아이네의 피로 각인된 마검이다. 만약 베룸 일족의 이능이라는 ‘진실의 눈’에 반응하는 거라면, 그리고 그게 직계의 핏줄로 이어지는 능력이라면.

나딘도 잠깐의 접촉 정도는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또 오징어 포획량이 일시적으로 줄었다고 연락하셨어.”

“오징어……?”

갑자기 여기서 오징어가 왜 나와?

아이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나딘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가 어렸을 적 경계 너머 숲속 오두막 안까지 몰래 들어갔을 때, 그리고 이번에 네가 공작과 경계를 넘었을 때, 아버지께서 어떻게 아셨을 거 같아?”

“그때도 오징어가 줄어들었다고?”

좀 전에 알아야 할 게 겨우 네 가지라고 했나? 아이네는 곧바로 그 생각을 취소했다.

‘지금 이 상황, 실화냐…….’

* * *

아이네가 오징어 포획량에 대해 질문을 꺼내려는 순간, 나딘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나도 경계 너머를 넘나들 때마다 포획량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는 이번에 들었어.”

“그럼 아버지는 뭐라셔? 아버지는 뭔가 알고 계신 거잖아.”

“나도 그게 답답해서 계속 여쭤봤는데, 네가 이미 알 거라고 하시던걸.”

“내가 뭘 안다는 거야, 도대체.”

아이네는 이불 위에 그대로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진실의 눈인지 뭔지도, 시그노도, 이 괴상한 오징어 이야기도 전부 처음 듣는 것들일 뿐.

그런 그녀의 뒤통수만 빤히 쳐다보던 나딘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다시 그 단검을 써서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하지 마. 그동안은 달리아 영애 덕분에 쓰러졌다는 소문이 안 난 거니까.”

“뭐? 소문이 안 났어?”

연두색 뒤통수가 번쩍 위로 들렸다. 그러고 보니 나흘 넘게 쓰러져 있었다는 건 그동안 황궁으로 출근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떻게 소문이 안 났지?

“건국 기념일 연회가 이틀 뒤잖아. 황도의 영애들이나 귀부인들이 이런 큰 무도회에 참석하려면 준비 기간이 보통 일주일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

“그럼 내가 쓰러진 건 아무도 몰라?”

“아니, 폐하께 보고가 들어갔으니 달리아 영애랑 황태자 전하는 아시겠지.”

고맙게도 오늘까지 닷새 동안 달리아 영애가 소문이 안 나게 수고해주었다.

사람들은 몸이 약한 공녀가 연회 준비와 총괄 업무를 병행하기 힘들어 보조인 달리아 영애가 돕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오늘도 달리아 영애가 공작저에 들러서 아이네에게 결재를 받아가는 척했다고 나딘이 설명했다.

그 말을 듣던 아이네가 잠시 코끝을 찡긋거렸다.

‘달리아 영애라고?’

꼬박꼬박 에펜베르크 영애라고 부를 때는 언제고.

지난번 늦은 밤의 응접실 사태 이후, 나딘에게서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달리아 영애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다른 거 같은데…….

기본적으로 모든 레이디들에게 친절한 나딘이지만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 봤다.

확실히 그날 나딘이 달리아 영애에게 뭔가 잘못한 것 같진 않았다. 그건 마차를 타고 함께 출근했던 달리아의 반응만 보아도 알았다.

“근데, 둘이 언제 그렇게…….”

“참! 아까 그 ‘존재’ 말인데.”

타이밍 좋게도 나딘이 아까 미처 더 캐묻지 못하고 지나간 일을 다시 꺼냈다.

“응? 둘? 무슨 둘?”

“아냐, 됐어.”

자신과 닮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모습에 아이네는 입을 다물었다.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뭘 뜻하는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건 나중에 물어보고, 그러니까 또…….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되나 싶어 말을 고르던 아이네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참! 테고 경! 테고 경 벌써 집에 갔어?”

“왜? 이건 우리 일족의 일이야. 리테루온 공작이 같은 고대 일족 직계이긴 해도 엄연히 외부인이라고.”

“오빠, 전쟁 말이야. 이제 일어나지 않아도 될지도 몰라.”

“…….”

아이네의 말에 나딘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이상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아마 제 동생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마치 전쟁이 일어나야만 했다가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처럼…….’

하지만 그에 대해서 섣불리 먼저 물어볼 수는 없었다. 베룸 일족의 발현자를 뜻하는 ‘루카’.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그 존재들은 영지 발전의 핵심이었다.

그게 바로 베룸이 황도와 교류가 적은 폐쇄적인 영지임에도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하, 그 ‘법칙’이라는 거 때문에 물어볼 수도 없고.’

아무리 직계라고 해도 스물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는 일족의 땅의 상투아리움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나딘은 아버지께서 일러주신 대로 ‘법칙’에 따라 행동했다.

『발현자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닌 한, 관여하지 말 것.』

흘러가는 대로 두라는 가문의 전언 바로 다음 구절이었다. 왜냐고 여쭤보면 아버지는 늘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만 대답하셨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딘은 수없이 많은 궁금증을 눌렀다.

“알베르토, 리테루온 공작께서 아직 계시다면 여기로 모셔오세요.”

* * *

“그럼 연합왕국 쪽에선 아직 움직임이 없다는 거예요?”

“더 깊이 들어가면 다를지 모르지만, 일단 국경에서 사흘 거리 내에선 의심스러운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그 말에 사라가 다시 여미어준 숄을 걸친 아이네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손님용 응접실에서 이마를 감싸 쥐고 있었다던 테고는 연신 나딘의 눈치를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아이네에게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도끼눈을 뜨고 버티고 선 나딘은 자리를 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 쪽에서 갑자기 국경으로 병력을 배치시킬 수도 없겠네요.”

“그렇습니다. 이미 반란군까지 전부 토벌했다고 알려진 마당에 명분도 마땅찮은 데다…….”

테고의 말을 아이네가 이어 받았다.

“애초에 교전권이 없는 연합왕국에 빌미를 줄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는 여전히 핼쑥해 보이는 테고의 얼굴을 슬쩍 눈에 담았다. 이제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청초한 미인이라는 점만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마음고생이라도 한 듯 살이 더 빠져 날카로워진 턱선은 그런 미모를 더 돋보이게 할 뿐.

‘쓰러졌던 건 나인데, 왜 본인이 병자 같은 얼굴이람?’

그를 처음 만나고서 제가 이틀간 기절했을 때는 저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는 테고를 보고 그 앞에서 쓰러졌으니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을 법했다. 물론 당시의 테고는 그런 기색 없이 오히려 탐색하듯 빤히 쳐다보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눈앞에서 정신을 잃은 것도 아니고 저택으로 돌아와서 벌어진 일인데.

왜 본인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저렇게 며칠 앓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걸까.

“저, 근데 테고 경? 얼굴이 왜……. 아니, 아니에요.”

안색이 왜 그 모양이냐고 물으려던 아이네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부름에 여태껏 애써 시선을 피하던 테고가 티 나게 어깨를 떨며 눈을 맞춰 왔을 뿐 아니라,

“……예?”

심지어 한 박자 늦은 대답까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나딘이 이쪽을 향해 눈을 번득이고 있으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이 상황에 테고를 만나고 왔던 날 밤 이야기까지 얹어지면 큰일이다.

‘지금도 저런 식인데 여태 테고를 여자로 알았단 걸 오빠한테 들켜봐. 10년은 잔소리감이야.’

온몸을 꽁꽁 감싼 숄을 다시 당기며 아이네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나딘의 의심을 피하려 말을 돌렸다.

뭐라고 둘러대지? 얼굴이 잘생겼다? 오늘도 예쁘다? 아니, 이젠 여자도 아니지, 참.

안색이 나빠 보인다는 말만 아니라면, 뭐라도…….

대답이 늦어지자 점점 더 따가워지는 나딘의 시선이 느껴져 아이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도 얼굴이 참, 좋다고요.”

“…….”

“알베르토! 다시 주치의 좀 불러주세요. 얘 눈이 좀 이상해진 거 같은데.”

흑흑, 틀렸다. 누가 봐도 며칠 밤샘한 몰골로 앉아 있는 테고에게 이런 소리라니.

결국 아이네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 * *

급하게 불려온 주치의가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해주었다. 그런데도 나딘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한참을 아이네의 눈만 들여다보았다.

‘아, 진짜! 테고 경 얼굴이 내 취향이라 좋다는 뜻이었다고!’

그 말에 주치의가 짜게 식은 표정으로 물러나고, 남은 건 더 굳게 버티고 선 나딘과 다시 허공을 바라보기 시작한 테고뿐이었다.

목덜미가 금세 붉어졌지만 요 며칠 사이 길어진 뒷머리 덕에 아슬아슬하게나마 가려졌다.

이번에는 아이네의 눈길이 테고의 왼쪽 귓불로 가 닿았다. 그녀가 덜덜 떨며 빼내었던 아티팩트는 오늘도 그대로였다.

‘그때는 공포의 외알안경 집사가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그렇게 넘어갔지만…….’

이미 테고는 자신이 그를 라니엘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언젠가는 설명하긴 해야 될 텐데…….

‘그치만 뭐라고 말을 해?’

제 눈에 보였던 ‘기억’ 속에선 쌍둥이 오빠인 테고가 죽고, 여동생인 라니엘이 살아남아 남장했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려면 자신이 책빙의자라는 사실까지 말해야 할 수도 있다. 그걸 털어놓는다고 생각하면 머릿속이 아득했다.

그때, 테고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흐, 흠! 그런데, 전쟁이 일어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아이네와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서도 더 이상의 침묵은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딘은 ‘법칙’에 얽매여 할 수 없었던 말이기도 했다.

내심 궁금했다는 표정으로 나딘 역시 아이네를 응시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애초에 아이네가 전쟁과 반란이 일어날 걸 알면서도 막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쟁과 반란을 통해 테고는 공훈을 인정받고, 동시에 여자인 게 밝혀진다.

원래대로라면 말이지.

‘아무 공적 없이 여자라는 사실만 밝혀지면 작위를 방계의 영식에게 빼앗겼을 테니, 그 사건이 꼭 필요했던 건데.’

물론 여자로서 작위를 잇는 것도 제국법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가 피살되고 옥좌가 찬탈당할 뻔했다.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 공을 세운 여주라서 대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아이네가 새삼스럽게 테고를 머리끝부터 천천히 훑어내렸다. 정신없는 와중이었어도 제 눈과 손으로 확실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존재’에게도 확답을 받았다.

‘정체가 밝혀지긴커녕 여자도 아니고, 주인공도 아니었어.’

그렇다면 전쟁과 반란은 이제 불필요한 게 아닐까.

여기까지가 아이네가 내린 결론이었다.

여전히 시작도 못 했다는 진짜 원작이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원작에 필요한 일이라면 또다시 ‘영향력’이라는 이름으로 결국은 일어나게 될 테다. 오직 그 가능성 하나만이 변수로 남은 상태였다.

그래서 아이네는 쉽사리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다시 단검으로 ‘존재’를 불러낼 수도 없고.’

혹시 또 며칠간 정신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이번엔 연회와 시기가 맞물린 데다 보조를 맡은 달리아가 도와주는 운이 따랐던 덕분인걸.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예전엔 반드시 일어나야 했다면 이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일 뿐이에요.”

“그렇군요…….”

테고가 조금은 성의 없이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러고는 초조하게 손에 깍지를 끼었다 풀었다 반복했다.

아이네가 확인을 하러 들이닥쳤던 그날 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전쟁과 반란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는 태도.

역시 나딘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태에서 제대로 대화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오빠, 잠시만 자리 좀 비켜줘. 테고 경이랑 할 말이 있어.”

그 말에 새파랗게 질려가던 테고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그리고 아이네는 테고도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단 걸 직감했다. 그러니 가장 큰 장애물인 나딘만 제 발로 나가준다면……!

“안 돼, 이 시간에 밀폐된 공간에 레이디가 남자와 단둘이 있다니!”

이럴 줄 알았다. 책 속 세계에서도 체험하는 본격 남녀칠세부동석 유교 라이프! 휴, 비겁하게 다 마무리된 일까진 언급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다년간에 걸친 여동생 경험으로 나딘 퇴치법은 물타기가 제격이란 걸 아이네는 잘 알았다. 나딘을 향해 가늘어진 그녀의 눈초리처럼 말끝도 길게 늘어졌다.

“그러기엔 오빠도 며칠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을 텐데……?”

달리아와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는 말에 나딘이 그제서야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테고가 고개를 모로 갸웃했다.

“아니, 그건 달리아 영애가…….”

“잠깐이면 돼. 그렇죠, 테고 경?”

“예.”

결국 이번에는 나딘이 축객령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럼 정말로 잠깐만인 거야, 어? 나 진짜 나간다?”

“나갈 때 문이나 닫고 나가.”

“…….”

나딘이 나가자마자 테고가 몸을 일으키더니 아이네의 침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혹시, 공녀가 쓰러진 게 나 때문입니까?”

“네?”

“그날…….”

말을 잇지 못하는 테고에 아이네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가 쓰러진 건 ‘존재’에게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 존재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건 그녀 자신인데. 왜 테고가 제 탓을 하는 거지?

단둘이 남게 되면 당연히 라니엘과 헷갈린 이유부터 물어올 줄 알았는데, 이건 또 뭐람. 바로 세세한 기억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하나하나 되짚어보던 아이네가 툭, 말을 내뱉었다.

“더 이상 참지 않을 거라고 했던 말이요?”

“아니…….”

그때, 쾅 하고 아이네의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뭐라고? 테고 경, 우리 애한테 그런 말을 했습니까?”

나딘이 씩씩거리며 등장했다. 그리고 요란한 소리에 아이네의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알베르토가 따라 들어왔다.

“이번엔 무슨 일이십니까.”

나가라고 했더니, 엿듣고 있었어?

안 그래도 며칠 굶은 몸으로 머리를 굴려야 했던 아이네는 슬슬 두통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그녀가 이마 위로 자그마한 손을 올리며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이 정도 남매 사이면 찐인데, 나중에 내가 아이네 몸에 빙의했다고 털어놔도 안 믿어주는 거 아니야?’

그녀와 나딘 사이엔 8년이라는 세월이 있단 걸 깜박했다.

며칠 전만 해도 책빙의자인 걸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던 게 바보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알베르토, 이번에는 오빠 데리고 확실히 내 방 밖으로 나가주겠어요?”

아이네로서는 겨우 마음을 다스리며 차분한 목소리를 낸 거였다. 그러나 흥분하자 다시 예전처럼 테고 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나딘은 물러서지 않았다.

“너, 너……. 아무리 그래도 결혼 전에는 절대 안 돼! 이건 테고 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셨습…….”

빙의자이든 아니든, 아이네는 이미 8년 차 숙련된 여동생이었다.

“아, 나가! 나가라고!”

* * *

알베르토에 테고까지 동원되고서야 나딘은 아이네의 방 밖으로 완전히 쫓겨났다.

“갔어요?”

“예.”

끝까지 확인하면서 침실과 개인 응접실에 연결된 문을 닫고 테고가 뒤돌아섰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물체에 잠시 멈칫했다.

“…….”

문까지 닿기에 한참 거리가 못 미치는 곳에 베개가 떨어져 있었다. 테고는 말없이 베개를 주워들었다.

커다란 손으로 부러 탈탈 털어서 침대 앞에 놓인 벤치 소파 위에 올렸다.

“어,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공녀가 쓰러진 이유 말입니다.”

이 말을 하기까지 거쳐야 했던 아이네의 돌발발언들이 생각나 테고는 잠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러다 이윽고 결심한 얼굴로 아이네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도 침대 왼편에 마련된 의자가 아니라 바닥에 다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세웠다.

아이네와 덩치 차이가 크게 나서 그녀와 눈높이가 맞지 않는단 걸 알아서였다.

그러고는 제 왼쪽 귓불에 달린 아티팩트를 재차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그날……. 이걸 만져서 그런 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아니, 왜요?”

물론 손끝이 따끔해질 정도의 작은 저항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겨우 정전기 수준이나 되었을까. 테고가 다시 말할 때까지 그녀의 의식 속에 남아있지도 못했다.

조금 머뭇거리던 테고는 마저 입을 열었다.

“황도로 돌아오기 전 에펜베르크 영지에서 케이어드 대공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공녀가 나에 대해 무언가 잘못 알고 있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 말을 꺼내는 그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며칠이나 지난 일인데도 여전히 다시 떠올리기조차 괴로운 기억이었다.

대공을 통해 확인한 건 아이네가 자신을 라니엘로 여기고 있었으리란 사실. 그리고…….

“그와 어릴 때 만나 있었던 일들까지 말입니다.”

다른 것보다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아이네는 잠시 심장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테고한테 진짜니, 가짜니 하는 말을 한 건 아니겠지?

“……대공이, 뭐라던가요?”

애써 태연한 얼굴을 했지만 아이네는 속이 바짝바짝 탔다. 두 사람은 다른 목적으로 움직이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만났는지 모를 노릇이다.

그러나 테고의 반응으로 볼 때 원래의 아이네와 다른 사람이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네가 허리춤까지 올라온 이불을 저도 모르게 꽉 쥐었다.

손등뼈가 도드라지게 힘이 들어가는 모습에 잠시 시선을 주던 테고는 이내 허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공녀에게 여자로 보인 거 같다고요.”

쥐어짜듯 나온 목소리였다. 하지만 다행히 아이네가 걱정하던 이야기는 아니라 조금 안도했다.

어쩐지 그날 너무 쉽게 ‘라니엘’을 입에 올린다 싶었는데. 대공의 말을 듣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거다.

“그건…….”

테고가 라니엘이 아니란 걸 알게 된 뒤, 아이네가 깨달은 건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압니다. 진실의 눈으로 ‘기억’이란 걸 본 거겠지요.”

지금 이렇게 테고가 왼쪽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씁쓸한 목소리를 내는 이유.

“그리고 다들 제가 그 아이와 많이 닮았다고 했었으니까요.”

체념한 듯 말끝에서 엿보이는 미약한 절망.

제 손을 살며시 감싸 쥐고 얼굴을 기대던 몸짓.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제 옆자리를 아이네에게 선뜻 내어준 테고. 원작 여주와 친구가 되었기에 설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자리.

‘으응, 역시 나한테 감정이 있었나. 후우……. 그래서겠지?’

본의 아니게 그동안 천하의 눈치 없는 여주가 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원작’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는걸.

정확히 언제부터 테고의 감정이 바뀌었는지는 아이네도 알 수 없었다.

분명 처음에는 그녀를 조금 귀찮아했다. 가끔 신기한 동물 보듯 바라보기도 했다.

‘친구가 되겠다는 일념 하에 그 시선도 이겨냈는데…….’

함께하다 보면 서로의 좋은 동성 친구가 될 거라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겠다. 일방적인 믿음 아래 서슴없이 다가간 제 태도가 언제부턴가 테고에겐 다르게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어찌 보면 테고 경도 원작의 농간에 놀아난 피해자인 거지.’

아이네도 테고가 싫은 건 아니었다. 심지어 여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종종 설렌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아이네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당장 이틀 뒤로 닥쳐온 건국 기념일 연회부터 원점으로 돌아온 원작의 존재, 전쟁까지.

물론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때에 섣불리 약혼을 무를 순 없었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혹시 모를 희망을 주는 게 더 잔인하단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입술만 달싹거리던 아이네는 조심스레 말을 이어가며 테고를 흘끗 바라보았다.

“저기, 테고 경.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뇨, 지금 제 마음에 대해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테고는 고개를 저어 아이네의 말을 끊어냈다. 계속해서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있던 그가 새파란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내게 미안한 겁니까?”

똑바로 눈을 마주쳐 오는 테고 때문에 이번에는 아이네가 눈을 돌렸다. 그러면서 우물쭈물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네……. 지금은, 당장은 말해줄 수 없지만요. 나중에 때가 되면…….”

“그렇다면 공녀도 내게 기회를 주면 됩니다.”

말끝을 흐리는 아이네를 바라보는 테고의 눈이 형형한 빛을 냈다.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잠시 눈길을 주었던 아이네는 그대로 사로잡히는 기분이 들었다. 작은 입술이 홀린 듯이 열렸다.

“무슨, 기회를요?”

“더도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 말하고 테고는 심호흡을 했다. 환자를 위해 희미한 조명뿐인 방 안에서 그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공녀가 내게 친구가 되어달라 청했던 그만큼, 딱 그만큼만 내게 기회를 주면 됩니다.”

“…….”

어떤 기회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테고에게 붙들린 아이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전까지 느꼈던 불안함과는 달랐다.

미약한 설렘의 불씨가 그녀의 마음 가장 밑바닥에서 도닥거리며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아, 아냐. 거절…… 거절해야 해.’

이런 어중간한 대응이 끝내 집착남을 길러내 파국으로 이르는 소설은 수도 없이 보았다.

그렇게 떨리는 눈에 힘을 주려는 순간, 테고의 고개가 앞으로 푹 꺾였다.

“역시 공녀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라니엘이었군요.”

“아, 아니에요! 그럴게요! 그렇게 할게요.”

화들짝 놀란 아이네는 이불까지 걷어내고 그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어둑한 방 안에서 테고의 머리카락은 거의 까맣게 보였다. 그래서 힘없이 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이 조금은 가련하기까지 했다.

차마 테고의 얼굴에 손을 대지 못하는 아이네가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몰라 팔만 휘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테고에게도 그런 그녀의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꽉 다물린 테고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가 바로 사라졌다.

‘비겁하다는 건 알지만.’

아이네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그녀만 테고를 파악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네는 원작이라는 틀에 갇혀 그를 온전히 알지 못했다.

반면 테고는 오로지 그가 보고 느낀 대로만 아이네를 알아갔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남자로 보지 않았을지언정, 제 얼굴에 상당히 약하단 사실만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테고 경 얼굴이 내 취향이라 좋다는 뜻이었다고!’

얼결에 나온 듯하긴 했으나 아까의 그 발언까지.

황제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테고는 필요한 상황이 되자 자신의 외모를 망설임 없이 이용했다. 그것도 꽤 능숙하게.

“으으, 그게 아니라요.”

허공을 정처 없이 부유하던 아이네의 손가락이 테고의 옆얼굴을 슬쩍 스쳤다. 그러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테고 경?”

“괜찮습니까, 닿지 않았습니까?”

“아뇨, 아뇨. 그런데 왜 그래요?”

이번에는 오히려 테고의 미간에 금이 갔다. 침대 위에서 커다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까이 다가와 있는 모습은, 역시 조금…….

왼쪽 귓불에 달린 아티팩트를 감싼 채로 테고는 조금 더 몸을 물렸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아이네를 위해서였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딘과 공작저 사용인들이 있다는 사실도 끊임없이 상기했다.

테고의 말이 약간 빨라졌다.

“대공이 그러더군요. 열한 살의 공녀가 쓰러진 건 아마도 자신 때문일 거라고요.”

“네?”

“공녀가 대공의 아티팩트를 만진 후에 바로 쓰러져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어쩐지 계속해서 ‘아이네이스 공녀’인지 확인하려 들더라니…….

아이네의 둥근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생각해보면 그녀 역시 테고의 귓불에 걸린 아티팩트를 만질 때 미세한 저항을 느끼긴 했다.

손끝을 아릿하게 물들이며 아이네의 접근을 거부하는 느낌. 하지만 당시엔 긴장과 당황스러움이 더 커서 무시했던 감각을 그제야 떠올렸다.

그래서 눈을 떴을 때, 테고가 그렇게 겁에 질린 얼굴로 제 손을 붙잡고 있었구나. 그 절박했던 표정이 떠올라 조금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모든 오해와 착각은 바로바로 확인한다!

“아니에요, 테고 경 때문에 그런 거.”

“그러면…….”

테고의 물음에 아이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여태까지와 달리 퍽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 의미에서 딱 한 번만 더 만져봐도 돼요?”

“뭘 말입니까.”

반면에 테고의 목소리엔 본능적인 경계심이 섞였다.

고작 몇 분 전, 희망 고문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아이네에게는 새로이 얻은 단서를 확인하는 게 더 중요했다.

“쓰러진 이유가 이거 때문은 아닌데요. 그래도 확인해봐야 할 거 같아요.”

원작이라 믿었던 고대 세 일족의 아티팩트. 각각 왼쪽, 오른쪽 귀걸이와 반지 하나.

그리고 그 이능의 발현을 파훼한다는 베룸 일족의 ‘진실의 눈’. 반드시 진짜 원작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

이미 멀찍이 몸을 물린 테고는 마른침만 삼켰다. 그녀와 닿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이런 식은 곤란했다.

“그러고 보니 아티팩트를 가진 사람이라면 대공이나 황태자도…….”

그러나 골똘히 생각에 잠긴 아이네의 말에 테고는 신속하게 침대 맡으로 다가와 앉았다.

“제가 잠시 빼서 건네주는 걸로는 안 되는 겁니까.”

“네? 그치만 저번에는 제가 직접 뺄 때, 전기 오르는 느낌이 났거든요. 그때와 같은지 확인해보려면…….”

결국 테고는 아이네에게 고개를 돌려 왼쪽 귀를 내주었다. 눈을 감고 입을 앙다문 얼굴에는 못내 비장함까지 맴돌았다.

지난번처럼 아이네의 손이 천천히 그의 귀로 다가왔다.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테고의 귀에 한참은 서늘한 손가락이 닿았다. 그리고…….

“읏.”

순간, 아이네와 테고 둘 다 멈칫했다. 특히 아이네는 두 눈을 빠르게 끔뻑였다.

이런 반응은 정말로 예상 못 했는데…….

“새, 생각보다 민감하시네요.”

“…….”

이제 테고는 수치심으로 죽고 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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