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 악역들의 갈림길(1)
드디어 건국 기념일 연회 첫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사라와 메이드들의 시중을 받으며 아이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회가 열리기 이틀 전에 깨어난 건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넉넉한 일정은 아니지만 사라와 다른 메이드들은 마치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도 폐하께서 보내주신 드레스를 입어야겠네.”
가장 중요한 첫날과 마지막 날의 드레스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공작저로 미리 도착해있었다.
“아가씨! 리테루온 공작님과 포인트 아이템으로는 어떤 걸 하기로 하셨어요?”
사라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거렸다. 그도 그럴 게 황제가 약혼을 공증한 이후 처음으로 함께하는 큰 무도회였으니까.
데뷔탕트 때조차 그저 우연히 터키석 커프스 링크 하나만 얻어걸리듯 비슷했을 뿐이었다.
“엥? 그런 거 안 정했는데?”
“네에? 하지만……. 공작님께서 무려 일주일 동안 어제만 빼놓고 매일 찾아오셔서 저는 당연히…….”
침방 메이드 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매일 찾아와? 그런 말은 처음 들었는데…….
아이네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으려는 찰나였다.
“아, 아이참! 내 정신 좀 봐. 요번엔 황제 폐하께서 보내주신 대로 입는 게 우선이죠.”
사라가 부러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자 아이네도 일단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으응, 그렇지.”
아이네가 쓰러졌다는 건 나딘과 사라, 집사장을 제외하고는 공작저 안에서도 아는 이가 없었다. 혹시라도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여긴 베룸 영지가 아니라 황도니까.’
그녀는 방 안에서 내내 황궁의 업무를 처리하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네를 위해 테고와 달리아가 드나들었다고만 알았다.
만약 연회 당일까지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지 나딘이 모든 대비를 해둔 상태였다. 단장인 테고가 자리를 비운 제2기사단의 업무와 연회 준비가 과중했다는 밑밥을 충분히 확보해놓았으니까. 이번만은 아이네의 병약공녀라는 이미지가 도움이 되었다.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시는 드레스를 입는 건 우리 아가씨뿐이니까요!”
사라의 말에 주위에 몰려있던 메이드들까지 꺄르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수를 바르던 아이네의 눈이 흐릿하게 접혔다.
‘가끔 이런 면을 보면 사라도 참…… 황제 폐하 못지않아.’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말을 돌렸지만, 평소와 같았다면 커플 아이템에 무척 열을 올렸을 터였다. 이미 의상이 지정되어버린 첫날과 세 번째 날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이번 연회에선 아쉽게도 테고와 상의할 시간이 모자랐다.
‘그럼 커플 아이템 대신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는 소린데.’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기사단에서 보인 모습이나 사냥대회에서의 일로 그들이 연인이라고 믿는 이들이 대부분이니까.
비록 제가 테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해도,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로 보여야 한다.
‘어휴. 내가 내 발등을 찍었지, 아주.’
장미꽃으로 만든 고급 화장수를 적신 수건이 아이네의 피부결을 조심스레 스쳐 지나갔다. 살롱에서 만났던 트라인 부인이 보낸 물건이었다.
화장수 외에도 아이네와 인사를 나눈 귀부인들이 선물한 것들이 저택 안에 가득했다.
이번 건국 기념일 연회를 준비한 그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거기엔 안 그래도 황녀 다음으로 신분이 높은 그녀를 명백히 사교계의 정점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이러니 약혼을 어떻게 지금 파기해.’
의외로 테고가 남자였다는 사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충격이었을지 몰라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덕분일 테다.
생각할수록 자신이 진짜 빙의한 그 원작이란 게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뭘 시작하려고 하길래 나는 살아야 하는 거고, 테고랑 라니엘은 어느 쪽이 살아있든 상관이 없다는 건지.’
‘시그노’를 만난 뒤 또다시 쓰러지고 며칠이 지나 깨어났다. 그러는 동안 아이네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꽤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동안 남자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원작 때문에 덮어둔 거였으니까.’
그리고 이어서 아이네는 불과 이틀 전 테고와의 일을 떠올렸다. 아무리 아티팩트가 달린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분리까지 해보아도 반응이 없었다.
‘처음 만졌을 때 같은 전기 자극이 하나도 없었어.’
마치 빛나는 건 최초의 한 번뿐이라는 ‘진실의 눈’과 같았다. 그리고 아이네가 주요 등장인물을 만나게 되면 떠올리곤 했던 ‘기억’과도 같았다.
어찌 되었든 아티팩트와 닿는 정도로 쓰러질 일이 없다는 데에 테고도 아이네도 안심했던 밤이었다.
다만 뜻밖에 그가 귀가 약하다는 엉뚱한 사실만 깨닫고 말았다.
‘원작이 아니라고 했으면서 이렇게 어떤 건 비슷하게 흘러간단 말야? 이러니 내가 착각하기 딱 좋았지.’
쌍둥이라서인지 거기까지도 원작 여주였던 라니엘과 똑 닮은 점이었다. 마침 케이어드와의 에피소드 중 하나이기도 했고.
거기서 아이네는 확신했다.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그 진짜 원작도 아이네가 착각하던 소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단 걸.
이상하리만치 제국에서 달리아의 자리를 없애려 드는 ‘영향력’까지 포함해서.
“아가씨, 이제 이쪽으로 오셔요.”
간단한 피부 정리를 끝낸 아이네가 드레스를 입기 위해 일어섰다. 듣자 하니 어깨 쪽에 약간의 노출이 있다고 했다.
어쩐지 사라가 어깨와 바로 아래에 위치한 팔뚝에 신경을 쓴다 싶었다.
오래 앓았던 탓에 유난히 가느다랗고 작은 골격엔 이제 겨우 보기 좋게 살이 붙어가고 있었다.
‘이제 보니 원래는 죽었을 몸을 살려놓아서 이렇게 키도 작고 힘도 없었던 거구나.’
반질반질하게 향유를 발라 촉촉하게 가꾼 어깨를 보며 사라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오징어만 안 가리시면 금방 살이 붙으셨을 텐데…….”
“차라리 운동을 할래.”
자칫 앙상해 보일 수 있는 어깨에 어떤 마법을 부린 건지 적당히 늘씬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와. 어떻게 한 거야, 사라?”
“아가씨께서 워낙 자세가 곧고 좋으셔서 그래요. 그리고 요즘은 정말로 많이 건강해지셨어요!”
그렇게 사라와 다른 메이드들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황제가 선물한 드레스가 입혀졌다. 하늘하늘한 옷감인 탓에 아이네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달리아 영애도 오늘 연회에 참석하겠지?’
이틀 전 어색해진 분위기 사이에서 테고는 도망치듯 공작저를 빠져나갔었다. 그러고 나서야 아이네는 달리아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쓰러졌다가 깨어난 다음 날인 어제, 황궁에 가 보려는 아이네를 막은 건 나딘이었다. 실은 이제 막 깨어난 그녀가 연회에 참석하는 것도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기껏 달리아 영애가 만들어 놓은 핑계니까 하루 더 쉬어. 어차피 연회 준비를 하긴 해야 하니까.’
어제만큼은 공작저로 찾아와 대신 결재를 받는 척하던 달리아도 오지 않았다. 그녀도 내일의 연회를 위해 준비를 하는 듯했다.
‘그래도 그동안 수고해준 게 고마운데, 후작저에 한번 가볼……. 으응, 아니야.’
아이네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 개차반이라는 후작과 소후작이 귀경해있을 테다.
감히 그녀에게까지 무례하게 굴진 않을 테다. 전형적인 강약약강 타입의 비겁한 작자들이니까.
그걸 아는데도 되도록 만나고 싶지 않았다. 탐욕스러운 그들의 시선을 받는 것조차 꺼림칙했다.
그래서 아이네는 달리아에게 친애의 표시로 사파이어 귀걸이를 대신 보냈다. 그녀가 달리아에게 호감을 갖고 있단 걸 다른 이들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부디 이번 연회에서는 달리아가 원작의 영향력 아래 상처받지 않기 바랐다.
‘연회만 끝나면 다시 단검을 이용하든가 숲으로 직접 가볼 거니까. 조금만 참아요, 달리아 영애!’
그리고 아이네는 직접 만나러 가지 않았던 이날의 결정을 후회했다.
* * *
“아가씨, 벌써 리테루온 공작께서 와 계신대요!”
“벌써?”
막 드레스를 입고 치장을 시작하는데 메이드 하나가 다가와 귀띔해주었다. 약속했던 시각보다 몇 시간은 일렀다.
그렇게 조금은 더 서두른 아이네의 준비가 모두 끝났다.
오늘 아이네는 옅은 연보랏빛 광택이 도는 은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황제가 직접 선택하진 않았겠지만 꽤 거금을 들인 드레스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목까지 살짝 올라오는 칼라에서부터 가슴 중앙부까지 화려한 보석이 크고 작게 박혀있었다.
“정말, 정말로 아름다우세요!”
“연회장 불빛 아래서 보면 누구보다 귀하게 반짝이실 거예요!”
으응, 이미 조금 과한 거 같은데. 약간 묵직한 느낌도 들고.
하지만 옷감 자체가 워낙 가벼워서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드레스에 달린 보석이 많은 탓에 팔찌를 제외한 장신구는 걸치지 않아도 충분했다.
대신 아이네의 머리카락과 엮어 땋은 비즈가 길게 이어졌다. 자잘하게 섞여든 비즈와 보석조각들이 빛을 받아 각도에 따라 다른 색을 반사해냈다.
“이러면 내가 꼭 연회의 주인공 같잖아.”
“오늘은 아가씨께서 주인공이신 거나 마찬가지지요!”
“도련님과 공작님께서는 로비에서 기다리고 계신대요. 어서 가요, 아가씨.”
황도에 올라온 귀족이라면 누구나 참석해야 하는 건 셋째 날 무도회였다. 그래서 그날이 아니라면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일정 작위 이상의 귀족들만 참석을 허락하는 첫날의 연회는 으레 주인공이 정해져 있었다.
‘이번 연회의 준비위원장은 나였지, 참.’
준비한 노고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첫 춤까지 그녀가 시작하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별다른 일을 한 게 없는 아이네는 조금 떨떠름할 뿐이었다.
거기다 마지막에는 일주일 가까이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으윽. 아무리 나라도 이건, 이거는 양심의 상태가…….’
그리고 이번엔 데뷔탕트 때와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이제 그녀의 에스코트는 약혼자인 테고가 맡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이상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걱정되는 건 따로 있었다.
‘이러면 원작을 모르던 8년 전처럼 아무나 만나면 안 되는 건데!’
아무리 흘러가는 대로 두라고 했다고 해도!
유난히 제게 호의적인 세계라고 해도!
아이네는 여전히 조금 두려웠다. 그래서 테고의 용기 내 다가오는 발걸음과 슬며시 열어 보인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지는 건 사실이다.
“생각보다 빨리 준비했네?”
“내가 오늘 시간이 남아서 조금 빨리…….”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나딘의 앞에는 테고가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린 순간,
“아.”
중앙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던 아이네도, 그 아래서 기다리던 테고도 모두 말을 잃었다.
“…….”
그냥, 받아들일까?
* * *
지금에야 그 경계가 흐릿해졌지만 아이네에겐 지난 8년간 금과옥조처럼 고수해온 원칙이 있었다.
특히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인물들에 대처하기 위한 마음가짐이었다.
첫째, 여주와 척을 지지 말 것.
둘째, 남주든 섭남이든 흑막이든 남성 주요인물과는 엮이지 말 것.
그때 아이네는 그런 말뿐인 원칙 따위 다 부수는 파괴적인 미모가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애송이였어.’
테고가 남자란 사실을 확실하게 받아들이자마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여성스럽다고 느꼈던 점들을 머릿속에서 모두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유난히 섬세한 얼굴과 달리 몸만은 완연한 남자인 청년이었다.
“거기서 뭐 해. 얼른 내려와.”
“어? 응.”
나딘의 타박에 아이네는 난간을 잡고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그리고 여전히 말을 잃은 테고를 머리끝에서부터 눈에 담았다.
기사답게 단정하긴 해도 훈련을 하느라 종종 흐트러지기도 했던 머리카락이 깔끔하게 빗겨있었다. 결대로 빗어 이마가 약간 보이게 들어 올린 머리도 잘 어울렸다.
거기에 짙은 눈썹과 꼭 어울리는 빽빽하고 긴 속눈썹 아래 신비로운 심해의 색을 띤 눈동자.
그 눈은 언젠가부터 아이네를 좇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아래에서 보면 더 오뚝한 콧날까지.
그 밑에는…….
‘으응, 전에 온실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관찰했었는데 이젠 못 하겠다.’
차마 입술까지는 시선을 옮기지 못하고 아이네는 계단을 내려와 나딘과 테고 앞에 섰다.
새파란 눈동자를 거의 깜박이지도 않는 테고와 달리 나딘의 콧잔등에 주름이 생겼다. 그러고는 아이네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거 정말 폐하께서 주신 드레스라고?”
“황도에서는 이런 게 유행인가 봐.”
“너한텐 노출이 너무 과한 거 같은데…….”
오프숄더도 아니고 어깨 끝만 살짝 드러낸 거거든?
또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같은 잔소리를 시작한 나딘 때문에 아이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봤자 이제 와서 갈아입지도 못한다. 거기다가 황제 폐하의 하사품을 어떻게 무시하라고?
끙, 소리를 내는 나딘의 말을 듣고 테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러고는 연신 동의하는 듯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직은 좀 춥기도 하겠군요. 그보다는…….”
뭐래, 테고 경까지?
아이네가 눈에 힘을 주어 노려보았다.
목까지 자잘한 보석으로 꽉 채워져 있는 터라 어깨가 살짝 드러난 정도는 그다지 티도 나지 않았다.
“옷이 너무 얇지 않습니까?”
하늘하늘한 데다 은은하게 연보랏빛이 감도는 은빛 드레스라 언뜻 보면 살이 비치는 듯했다. 물론 아이네는 사라의 시중 아래 제대로 된 속치마를 챙겨 입었다.
“촌스럽게 이러기예요? 저번에 보니 황도에선 이 정도는 노출 축에도 못 끼던데.”
“노출 때문이 아니라 추워 보여서 그렇습니다.”
“…….”
그게 그거 아닌가.
저렇게 뻔뻔하게 우기면 할 말이 없었다. 테고가 오늘도 목 끝까지 올라오는 정복을 입고 있어서 더더욱. 과연 땡볕 아래서도 고집스레 셔츠를 고집하던 그다운 복장이었다.
게다가 그게 무심하고 금욕적인 테고의 외모와 더없이 어울렸다.
그래도 연회용으로 제작된 정복인지 군청색으로 된 디자인이 유려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몸에 딱 맞춰 제작되어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깔끔하기까지 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곧은 바지선이 근육질일 긴 다리를 날씬하게 타고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 아래로 한 시선이 앞코가 반질반질한 새카만 예식용 구두에서 멈춰 섰다.
새삼 완벽하고 이상적인 테고의 체구에 이번엔 아이네가 말을 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의 성격과 외모의 장점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할 수 있는지 잘 아는 게 틀림없다.
다시 고개를 위로 올린 아이네는 한참이나 목을 꺾어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렇게 남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자신은 몇 달이나…….
그런 아이네를 내려다보는 테고의 눈썹이 약간 꿈틀거릴 즈음이었다. 그사이에 나딘은 사라를 시켜 가져온 무언가로 그녀의 어깨를 덮었다.
“이게 뭐야.”
“이번에 영지에서 맞춰온 연회용 숄이잖아.”
자신도 모르고 있던 의상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정말로 무슨 옷을 가져가는지 다 확인했던 거야?
안이 훤히 비치진 않는 촘촘한 레이스로 짜인 숄은 뜻밖에 아이네의 드레스와 잘 어울렸다.
다만 그걸 걸침으로써 조금쯤 제 나이로 보일 법했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금 확 어려 보이는 단점이 있었다.
그대로 여미기엔 가슴 앞을 화려하게 수놓은 보석 장식 때문에 여의치가 않았다. 그래서 나딘은 공작가의 인장이 크게 그려진 브로치를 가져와서 양 끝을 이었다.
그러자 보석과 베룸의 인장이 조화를 이루어 드레스와 숄이 한 쌍처럼 보이는 차림이 완성되었다.
빼꼼히 드러난 어깨 정도만 가리는 용도라 추위는 막아주지 못할 테다. 그래도 나딘의 얼굴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이 걸렸다.
테고도 굳은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린 듯 보였다.
“아직도 조금은 추워 보입니다만 훨씬 낫군요.”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아이네는 심통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깨를 드러낸 모습보다 그녀에게 훨씬 잘 어울리는 것만은 사실이라 뭐라 반박하진 못했다.
“이제야 좀 사람 같네. 악!”
나딘의 말에 아이네는 기다렸다는 듯 발을 밟았다.
“가요, 테고 경.”
“…….”
* * *
아이네와 테고는 리테루온 공작가의 마차에, 나딘은 베룸 공작가의 마차에 올라 각각 황궁에 발을 디뎠다.
시간을 맞춰 왔기에 나딘은 그랜드홀로 먼저 입장했다.
“공녀님, 공작 각하. 여기서 조금만 대기해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아이네와 그 파트너인 테고는 가장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했다.
본디 건국 기념일 연회같이 큰 무도회는 황후가 준비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만약 장성한 황녀가 있다면 황녀가 도맡기도 하고.
그러나 지금 에스피오 제국은 황후가 오래 자리를 비웠고 황녀는 너무 어렸다.
결국 건국 기념일 연회는 8년 전부터 실무진 선에서 준비되었다.
건국 기념일 연회 준비위원장은 제국 사교계의 정점이자 가장 고귀한 여인이 맡는 중책이었다. 그래서 첫날 연회만큼은 설령 황제가 참석할 때도 마지막에 등장하는 게 법도였다.
테고와 팔짱을 끼고 대기한 채로 아이네가 대뜸 입을 열었다.
“건국 기념일 연회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러고는 넓은 황궁 부지 위로 서서히 땅거미가 아스라이 내리깔리는 광경을 바라봤다. 정원에 깔아두었던 마정석들이 길을 따라 하나둘 빛을 밝혔다.
뒤이어 황궁 중앙 정원을 장식하는 조명들도 깜박거리며 은은하게 주위를 빛내기 시작했다.
“…….”
그 말에 담긴 함의를 모르지 않기에 테고는 잠시 얼굴을 굳혔다.
베룸 일족들이 머나먼 황도에서까지 이렇게 오래 머문 적이 없다는 건 테고도 알았다. 불과 백여 년 전에는 아예 다른 왕국으로서 존재했으니 더더욱.
그럼 연회가 끝나고 돌아가게 되는 걸까.
지난번에 경황없이 베룸 공작저를 떠난 후 수없이 후회했다.
무작정 기회를 달라고 하지 말고 조금 억지를 부리더라도 다른 방법을 써야 했을까.
“곧 돌아갈 겁니까?”
낮게 가라앉아 다소 음산해진 테고의 목소리에 아이네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제 저녁 어스름이 그랜드홀의 2층까지 스며든 터라 테고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뇨, 언젠가는 돌아가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일단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막아볼 생각이었다. 정말로 전쟁이 고작 라니엘의 정체가 밝혀지는 데에 쓰인 거라면 이제 의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숲속 경계 안 오두막에 가려면 최대한 빨리 영지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오래 쓰러져 있던 게 그곳과 거리가 멀어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아직 여기서 더 지켜봐야 할 일이 있어서요.”
라니엘이 주인공이던 원작과 관련 있지만 시간대가 뒤라면 연작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라니엘의 원작이 끝난 시점이 되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일인 데다가.
여전히 그 시그노라는 존재가 했던 말 중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여럿 있었다.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가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분한가요? 누군가에 의해 이미 다 정해진 역할이라는 게. 제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당신도 겪어보니 기분이 어때요?]
회귀도 아니고 두세 번 반복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이며, 당신도 겪어보니까 알겠냐는 묘한 말은 뭘까.
정작 자신은 원작 뒤에 일어날 일은 하나도 모르고 있는데…….
‘시그노’라는 존재도 그렇고, 아버지도 어째서 자신이 이미 안다는 듯 말하는 건지.
거기다 왜 하필 자신이어야 했는지도 여태껏 불분명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히 변수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걸.
“응?”
그러다 아이네는 자신의 손이 얹어진 테고의 팔에 힘이 빠져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잔뜩 긴장한 기색이더니.
당장 돌아가진 않는다고 하니까 바로 안심한 듯했다.
하여간 너무 티를 낸다니까. 여자로 착각하지만 않았다면 그녀조차 진작 알아챘을 정도가 아닌가.
문득 아이네는 궁금증이 생겼다.
‘테고 경은 여자도 아니고 발현자도 아니니까 이게 전부 진짜라는 거지?’
저 커다란 키와 떡 벌어진 어깨와 골격.
제 손 따위는 두 개를 한꺼번에 넣고도 넉넉할 큼직한 손.
보통 사내들보다 훨씬 세다는 힘과 근력까지.
‘굳이 아티팩트가 없어도 이 정도면 라니엘보다 더 사기캐인 거네?’
그래서 아이네는 제 손에 닿은 테고의 팔뚝을 슬쩍 만져보았다. 단지 힘을 좀 뺐을 뿐 그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 테고가 미간을 찌푸렸다.
“공녀.”
“네?”
“내가 지난번에 한 말 때문에 날 시험하는 겁니까?”
테고가 고개를 숙여 아이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오늘따라 한순간 숨이 멎을 만큼 빛이 나는 미모가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
평소엔 금욕적인 얼굴에 천천히 피어오르기 시작한 위험한 분위기가 배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이런 말을 하지 않았었나?
‘이렇게 된 것, 저는 더 이상 참지 않을 겁니다.’
와, 안 돼. 안 돼. 그만 생각해라, 아이네!
새삼 파괴적인 외모라고 생각하며 아이네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 아니에요. 진짜 남자 팔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신기해서…….”
“후, 됐습니다.”
테고는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뭘 기대한 걸까. 자신이 남자인 걸 알았다고 해서 없던 감정이 갑자기 생기지도 않을 텐데.
* * *
“아이네이스 베룸 공녀님, 그 약혼자인 테고 리테루온 공작께서 입장하십니다.”
마침 안쪽에서 곧 등장할 시간이라고 알려주었다. 게다가 이번엔 황제 폐하와 황태자도 입실해있다고 했다.
덕분에 테고와 아이네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허리를 세웠다. 그러고는 천천히 열리는 그랜드 홀의 문을 응시했다.
“아.”
데뷔탕트 때보다 훨씬 큰 규모이니만큼 압도적인 인파였다. 눈부신 샹들리에 빛을 받으며 2층에서 천천히 내려가는 아이네는 감회가 남달랐다.
그때는 그저 달리아 영애를 대신해 약혼자 역할을 떠맡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평온했던 8년 동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많은 일들이 그사이에 몰아닥쳤다.
아이네가 화려하게 꾸며진 중앙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고서를 통해 골랐던 꽃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러고는 테고와 함께 가장 상석에 앉은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에스피오 제국의 지지 않는 태양이신 황제 폐하께 아이네이스 베룸.”
“테고 리테루온이 인사 올립니다.”
마치 둘이 맞추기라도 한 듯 타이밍 좋게 나오는 인사에 황제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이것 봐라?
“그래, 지금 우리 제국에서 가장 큰 화제인 커플이 아닌가. 수고했다, 아이네 공녀. 근래 들어 가장 성대한 연회가 되었구나.”
마치 일전에 따지러 왔던 아이네더러 들으라는 듯 뼈가 있는 칭찬이었다. 그걸 아는 그녀의 표정이 새초롬하게 변했다.
“감사드립니다, 폐하. 다른 일도 아닌 건국 기념일이니 베룸이 나서는 건 당연합니다.”
사교계를 이끄는 이에게 맡겨야 할 자리를 은둔하던 베룸 가문 공녀에게 내주었다.
리테루온 공작가와 혼약까지 맺었으니 남부 귀족파들 내부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을 테다.
베룸 일족이 드디어 중앙 정치에 나서는 게 아니냐면서.
얼굴을 비치기는커녕 소식도 듣기 힘들었던 베룸 공작가 직계가 참석한 것도 모자라 지난 3년간 불참 사유로 내세웠던 반란군은 기어코 싹을 뽑았다.
그뿐일까. 황궁에 행정관으로 들여두었던 휘하의 가신들도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공녀와 후작 영애가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벌써 다른 가문의 영애들에게도 연락이 갔다고 하더이다.”
“저는…… 다음 달부터 다시 업무에 복귀하기로 했습니다. 저희 가문은 공직에 있지 않으면 이번 대를 끝으로 작위를 환수당한단 말입니다.”
도저히 황도로 올라오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하지만 황도에 벌써 도착했는데도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그들은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까지도 전부 예상대로였다.
애초에 황제는 이번 기회에 구실을 잡아 핵심 인물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연회는 세 번째 날이니 정말로 흠이 되지 않지만 나중에 트집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무려 건국 기념일에 건국을 주도했다던 네 일족의 직계가 모두 모였으니까.
그 모든 걸 눈치챘다는 건 아이네가 황제를 바라보는 시선과 목소리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결국 그는 팔걸이를 치며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어두운 낯빛의 아르비드를 슬쩍 바라보았다.
‘아깝다, 아까워. 황태자비로도 나쁘지 않은데. 안 본 사이에 테고 녀석과 분위기도 제법……. 흠.’
하지만 아쉬움을 능숙하게 감춘 황제는 손을 휘휘 저었다.
“짐이 내린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군. 숄과 ……브로치까지 말이지.”
황제가 내린 드레스 위로 걸친 숄과 제 가문의 인장이라니. 어찌 보면 황실과 베룸 가문의 단단한 결속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일족이 결코 중앙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건 황제도 잘 알았다.
어디까지나 일단은 황실에 힘을 실어준다는 거겠지.
정당성을 완성해주는 것만으로도 우선은 되었다. 황제는 기쁜 목소리로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자,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공녀와 약혼자인 공작의 첫 춤으로 연회를 시작하지.”
* * *
연회에 참석한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네와 테고가 홀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해진 아이네와 달리 테고는 약간 긴장한 기색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춤을 추어야 한다는 게 문득 의식이 되어서였다.
“테고 경?”
하지만 맑게 빛나는 커다란 눈망울이 물끄러미 저를 응시하는 걸 본 순간, 일말의 망설임과 긴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공녀와 첫 춤을 추게 되어 영광입니다.”
“네? 이제 와서……?”
아이네는 의아하단 얼굴을 했지만 테고에겐 꽤 중요한 선언이었다. 그러고는 언젠가 축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네의 손을 잡고 허리를 깊게 끌어안았다가 멈칫했다.
잔잔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긴장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듯 팔에 힘을 풀지 않은 채로 자세를 유지했다.
“엑?”
그러자 갑작스레 끌어안긴 꼴이 된 아이네가 눈빛으로 그를 타박했다. 테고가 애써 모른 척하는 사이, 춤곡이 시작되어버렸다.
‘하, 스킨십은 전진만 있을 뿐 후진은 없다더니. 그 말이 딱이네.’
아이네도 안정감 있게 받쳐주는 느낌이 나쁘진 않았다. 제 등을 한 손으로 가리고도 남을 듯 커다란 손바닥의 열기가 그대로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듯했다. 아이네의 뺨이 조금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괜스레 태연한 체하며 새침하게 속삭였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어요?”
“……모릅니다. 검 외에 사람에게 욕심내어 본 건 처음이니까요.”
그 말에 순간 아이네는 목덜미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가 진짜!
‘아니, 잠깐만요.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요.’
옆에 난 샛길이라곤 하나 없이 오롯이 곧은 직진이었다.
아이네와 테고가 춤곡을 마무리했다.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쌍쌍이 무리를 지어 홀 가운데로 몰려들었다.
첫 춤을 마치고 나니 황제는 이미 연회장을 나간 후였다. 아마 늘 그렇듯 마지막 날인 셋째 날이 아니라면 길게 참석하지 않을 터였다.
이번엔 아이네를 통해 베룸과의 관계를 과시하고자 잠깐 얼굴을 비쳤을 뿐이었으니.
잠시 아래로 떨어진 아이네의 손을 테고가 당겨 제게 팔짱을 끼게 했다. 그런 그에게 잠시 눈길을 주다 아이네는 나딘을 찾아 홀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어렵지 않게 발견해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역시 어디서나 눈에 띄는 외모였으니까.
그리고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아이네는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요즘 들어 자주 그녀의 심기를 어지럽혔던 바로 그 ‘영향력’.
사교계의 주축인 귀부인들과 영애들만이 아니라 어느새 홀 안에도 짙게 맴돌고 있었다.
“달리아 영애…….”
“……그리고 에펜베르크 후작과 소후작이로군요.”
아이네보다 먼저 달리아를 발견한 테고의 목소리도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이 발견한 달리아의 모습은 차마 똑바로 보기 힘들었다.
수치심으로 금방이라도 울 듯 일그러진 얼굴도 그렇지만. 사실상 거의 헐벗은 거나 다름없는 차림새였다.
언뜻 보기엔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속내는 처참할 터였다.
“참으로 천박한 자들입니다.”
“…….”
누가 그렇게 시켰는지 금방 짐작했기에 테고가 경멸을 담아 중얼거렸다.
뒤에서 벌써 불콰하게 달아오른 낯으로 서 있는 에펜베르크 후작과 소후작.
그들이 달리아를 비싼 값에 팔아넘기기 좋은 상품으로만 여긴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최소한의 대우도 해주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장면은 원작이라고 믿고 있던 소설에서도 나온 적 없었다.
‘역시 어제라도 후작저에 가봤어야 했어.’
달리아의 귀에 걸린 사파이어 귀걸이가 빛을 받아 애처롭게 반짝였다.
어릴 적부터 황도로 올라와 스스로의 힘으로 사교계에 군림했다. 이런 식의 노골적인 취급에 수치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늘 도도함을 유지하던 얼굴은 그녀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어져 있었다. 그리고 애써 눈물을 참는 듯 이미 눈가는 발갛게 된 지 오래되어 보였다.
아주 지방의 사교계라면 모를까, 적어도 황도에서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구는 귀족은 없었기에 더더욱.
지나치게 천박한 방법이었다. 누군가 달리아에게 춤이라도 청한다면 그대로 지참금을 받고 팔아넘기겠단 의도가 분명하게 보였다.
‘에펜베르크 후작 가문에서 곧 성년이 될 영애를 비싸게 넘겨받을 상대를 물색한다더라.’
게다가 이미 그런 종류의 소문이 황도 내에 알음알음 퍼진 지 오래되었으니까.
만약 또다시 원작의 영향력이라는 게 달리아를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가려 한다면……. 이건 정말이지 최악의 방법이었다.
그사이, 두 번째 춤곡을 마치고 뒤늦게 달리아를 발견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영식들과 남자 귀족들도 흘깃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앞에 나서지 않았다.
지켜보던 나딘의 입에서 뿌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저자들은 도대체…….”
“오빠, 잠깐만.”
결국 견디다 못해 나딘이 그들에게로 뛰쳐나가려는 참이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던 아이네가 그의 팔을 잡아 만류했다.
‘그 영향력이라는 건 도대체 달리아 영애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거야.’
아직도 연작인지 모를 그 원작이 바라는 바는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아이네가 관련되어 있다면 이것만은 그녀가 해결해야 했다.
어쩌면 아이네의 황도 등장이나 그로 인한 전개의 뒤틀림이 빚어낸 일일 수도 있으니까.
아이네가 나딘과 테고의 곁을 떠나 달리아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브로치의 뒷면을 딸깍 열어 제가 입고 있던 숄을 달리아에게 걸쳐주었다.
간신히 아슬아슬한 부분만 가리고 있던 달리아의 몸이 숄 안으로 가려졌다. 아이네가 입고 있던 것이라서인지 숄에는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제 친구인 달리아가 추위를 많이 타서 말이지요.”
“공녀님…….”
달리아의 눈에 결국 눈물방울이 어룽졌다. 거의 다 드러나있던 어깨와 가슴을 가리는 숄의 따뜻함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달리아를 친구라고 불러주는 아이네의 말 때문이었다.
“달리아 영애는 베룸의 친우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이어서 다가온 나딘이 보란 듯이 달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당신의 첫 춤을 제가 청해도 되겠습니까.”
다정한 웃음과 함께.
이곳을 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면 달리아는 주저앉아 펑펑 울었을지 몰랐다.
‘공자님과 공녀님께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달리아는 의도치 않았겠지만, 그 생각이 원작에서 달리아를 악역으로 만들려던 영향력의 반작용을 가져온 셈이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내밀어진 손을 도저히 잡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이게 바른 길이라고 등을 떠미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동경하던 베룸 공자가 눈앞에 내민 손 위에 그녀의 손이 얹혔다.
“……기꺼이.”
그리고 그 순간, 이상하리만치 홀 안 사람들 대부분을 구속하고 있던 영향력이 일시에 소거됐다.
마치 핍박받고 제국에서 외면당한 달리아가 그녀를 구원해줄 운명의 길로 제대로 들어섰다는 듯이.
* * *
아이네는 세 번째 춤곡을 추러 나간 나딘과 달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어깨가 조금 무거워졌다.
“응? 테고 경?”
일전에 맡은 적 있던 청량하면서도 묵직한 나무향이 확 풍겨왔다. 테고의 정복 재킷이 아이네의 어깨를 덮고 있었다.
“입고 계십시오.”
정복과 마찬가지로 그의 몸에 딱 맞게 재단된 흰 셔츠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연회용 재킷 없이 셔츠와 바지 차림만으로도 테고는 빛을 잃지 않았다.
어느 날 아이네가 처음으로 그를 보고 넋을 잃었던 날 같기도 했고, 또 어느 날 그녀가 그가 주인공처럼 빛난다고 저도 모르게 생각했던 날 같기도 했다.
“이대로는 춥지 않습니까.”
그리고 테고의 옷을 빌려 입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의 향기를 가까이서 맡은 것도.
그런데, 어쩐지 아이네는 이번만큼은 조금 부끄러웠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 * *
세 번째 춤곡이 끝나고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이어졌다.
아이네는 우려했던 대로 귀부인들과 영애들에게 둘러싸였다.
“어머, 두 분께선 사냥대회 때도 그렇게 정겨우시더니 여전하시군요.”
“다른 커플들과 달리 매일 함께 집무도 보셨을 테니까요!”
“좋은 소식은 올해인가요? 내년?”
“하하…….”
하나씩 물으세요, 하나씩. 그렇지만 세게 물어도 대답해주진 않을 거니까 살살 부탁드려요.
여러분의 생각이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애매모호한 유체이탈 화법과 화제 돌리기 신공으로 아이네는 겨우 위기에서 잠시나마 벗어났다. 한숨 돌리고 나자 다시금 그녀의 시선은 달리아를 찾아 홀 안을 배회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는 내 일에는 그렇게 난리 부리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말이 없네?’
아이네가 그녀를 감싸주고 나딘이 춤 신청을 했다 해도 아까 달리아가 처했던 상황은 분명 이야깃거리가 되기 딱 좋았다.
황도까지 와서, 그것도 건국 기념일 연회에 미성년 영애를 홀딱 벗겨 내어놓는 건 아마 몇십 년 동안에 없었을 일일 테다.
제국 건국 초기에는 귀족들이 노골적으로 그런 행태를 보였다는 기록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교양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게 대부분의 인식이었다.
그런데 다들 마치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 기억에서 그 부분만 싹 도려낸 것처럼 굴었다.
그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이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리테루온 공작님께서 공녀님을 정말 아끼시나 봐요. 연회복을 그렇게 선뜻 벗어서…….”
대신 모든 화제의 중심에는 아이네와 테고가 오르내리고 있었다.
유난히 인구밀도가 높은 주위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 때문에 아이네는 조금 덥다고 느꼈다. 하지만 재킷을 벗을 수는 없었다.
벗으려 팔을 움직일 때마다 누군가의 노골적인 시선이 뚜렷하게 느껴져서이다. 눈빛으로도 말을 할 수 있다면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추우니 절.대.벗.지.마.십.시.오.’
저 메시지에서 점이 유달리 많이 찍히고 엄격, 근엄, 진지한 음성이 느껴진다면,
삐빅! 정상입니다.
결국 아이네는 또다시 사람들에게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곤 비어있는 테라스로 피신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테고가 따라 들어왔다.
“더워요. 이제 벗어도 돼요?”
“안 됩니다. 땀이 갑자기 식으면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까요.”
언제쯤 주위에 득실거리는 나딘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네는 질린 표정으로 테라스에 마련된 소파 위로 털썩 앉았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테고가 옆에 앉는 게 보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선선한 밤바람을 쐬자 다소 상기되었던 얼굴이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고 나니 어깨에 얹힌 테고의 정장 재킷의 무게가 적당하게 느껴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거 공녀도 느끼고 있습니까?”
“어? 테고 경도 알고 있었어요?”
“사실 이번뿐만이 아닙니다. 그래도 여태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는데 오늘은 전혀 그렇지가 않군요.”
그러면서 테고의 손끝이 테라스 유리문을 지나 홀 안을 가리켰다. 그곳엔 네 번째 춤곡이 시작되어 다시 춤을 추고 있는 나딘과 달리아가 있었다.
달리아가 걸친 숄에 달린 브로치에 새겨진 베룸 공작가의 문양이 샹들리에 빛을 받아 반짝였다.
‘설마 나딘과 달리아가 잘되는 방향을 원했던 걸까?’
둘의 모습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빠진 아이네에게 테고가 말을 걸었다.
“공녀가 쓰러졌을 때도 황궁의 관료들이 에펜베르크 영애에게 무리한 일을 많이 시켰다고 하더군요.”
“네?”
이전처럼 재무대신까지 달리아에게 매달리는 광경이 다시 벌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동료들을 볼 때, 제법 살갑게 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러다가도 영애가 공녀의 결재를 받으러 공작저에 가는 퇴근 시간만 되면 모두들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습니다. 마치 무언가 세뇌라도 된 듯 말입니다. 심지어 황태자 전하께 말씀드려도 잘 인식하지 못하시더군요.”
이번엔 아이네가 의아한 눈빛으로 테고를 보았다.
그렇다면 자신과 같은 빙의자거나 베룸 일족이거나 발현자도 아닌 테고는 어떻게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걸까.
“어, 그런데 테고 경은…….”
물으려던 아이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테고는 그녀를 빼면 유일하게 원작에서 등장하기도 전에 죽은 인물이었다. 이거, 어쩌면…… 어쩌면.
“예?”
지금껏 오징어의 도움이 없이도 원작의 영향력에 지배당하지 않는 건 자신과 나딘, 테고와 달리아 정도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황녀 티아까지.
여기서 아이네와 테고는 빙의자이거나 애초에 정해진 역할을 부여받은 적 없는 인물이라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딘과 달리아, 황녀는 그럼 왜?
전혀 단서도 잡을 수 없던 안개 속에서 일말의 힌트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 정말로 연작이나 이후의 이야기 같은 게 있다면 그곳의 주요인물이라서가 아닐까?
‘마치 내가 라니엘이 주인공인 소설의 주요인물들의 ‘기억’만을 읽었던 것처럼.’
바로 곁에서 흥미로 반짝이는 아이네의 눈을 바라보던 테고가 무심코 이야기를 꺼냈다.
“공녀가 이런 이상한 현상이나 미래에 대해 아는 것 같은 건 역시 ‘진실의 눈’의 발현자라서입니까?”
“네에? 으음……. 뭐, 비슷하긴 해요.”
진실의 눈이라는 애매한 이름과 책빙의자로서의 특성이 합쳐져서 그렇게 오해하는 듯했다.
여전히 이것만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이네가 쓴웃음을 베어 물었다.
“발현자들은 다 성격이 비슷한가 봅니다. 라니엘도 그렇다고 들었거든요.”
테고의 말에서 아이네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이 직접 본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엔 공녀를 보고 라니엘이 살아있었다면 저런 모습이었을까 싶었습니다.”
하핫, 그건 아닐걸요.
이제 더 이상 원작이 아닌 이야기 속에서의 라니엘은 오히려 지금의 테고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어릴 때는 명랑하고 밝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부모님과 오빠를 모두 잃고 간헐적으로 마력폭주가 일어나는 몸만 남은 그녀였다.
그나마 작위를 지키기 위해 제 존재를 죽이고 지내야 했으니 원래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일이 더 어려웠을 터였다.
이것도 테고는 알 수 없었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이야기.
게다가 아이네는 테고가 지금 꺼낸 말의 종착점이 어디가 될지 알 것 같았다. 아마 그때 친근하게 다가왔던 점에 끌려 마음을 주게 되었다고 말하겠지.
“저어, 테고 경? 으음, 저는요.”
이미 아이네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아온 테고였다. 그 역시 그녀가 하려는 말을 모를 리 없었다.
“아니요, 압니다. 나한테 별 감정은 없었다는 거, 그리고 착각해서 그랬다는 거.”
테고가 급하게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쓸며 마른세수를 했다.
“…….”
아니다, 그를 라니엘로 착각한 건 맞지만…….
안타까워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던 건 꼭 그가 여자주인공이라고 여겨서만이 아니었다.
그저 여자이든 남자이든 어린 시절의 상처로 마음을 닫고 있는 게 안쓰러웠다. 그러면서도 고지식한 모습 사이에서 종종 보이는 인간적인 면모에 끌렸다.
그게 테고가 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었기 때문인 줄 몰랐을 뿐.
‘그래, 딱 그 정도인걸.’
오늘도 그랬고, 요즘 들어 테고에게 자주 설레고 두근거리던 마음을 애써 무시했다. 어쩐지 불쑥 치솟는 반발감에 아이네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동안 왜 이런 말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럼 그렇게 오래 착각하지도 않았을 텐데…….”
안다. 먼저 제멋대로 착각해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게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거.
하지만 이미 내뱉고 나서 자각한 터라 아이네는 아랫입술만 질끈 물었다.
그 말에 테고는 별안간 입을 꾹 다물고 잠시 말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기억을 되짚듯 이어나갔다.
“그건, 나 역시도 자각한 지 얼마 안 됐을뿐더러…….”
테고의 얼굴에 자조 어린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애초에 공녀가 날 남자로 보지도 않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말을 합니까.”
어, 어떻게 알았지.
아이네는 테고 본인은 물론이고, 칼릭과 나딘, 달리아까지 알고 있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반응에 테고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전에 칼릭이 해준 말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굉장히 낙담했을 테다.
그러나 오히려 이렇게 달라진 반응을 보면 자그마한 희망이라도 가져볼 수 있는 건 지금이었다.
“정말 친구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섣불리 다가갔다가 도망가면 정작 아쉬운 건 자신이니까, 라는 말은 테고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기회만 생기면 단단한 껍질 속으로 숨으려 드는 아이네를 알았다. 그리고 그게 테고 자신이 싫어서가 아닌, 다른 이유라는 것도 어렴풋이 눈치챘다.
한편, 테고의 말과 해탈한 듯한 미소 하나하나가 예리한 칼이 되어 아이네의 양심을 푹푹 찔렀다.
“그건, 그거는…….”
아이네는 밤공기에 식었던 땀이 다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공녀에게 마음이 있으니까요.”
그 상태에서 테고는 아이네의 반응을 곁눈질하며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이젠 시도 때도 없이 툭툭 치고 들어오는 테고 때문에 아이네의 심장은 덜커덕 내려앉았다.
“네? 네에에? 아니, 아직은 그러면…….”
역시,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칼릭이 조언했듯이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라 믿었다. 부술 수 없는 벽처럼 보이던 공녀의 착각이 무너진 것처럼 말이다.
토끼처럼 휘둥그레진 눈을 보며 테고가 빙긋 웃었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공녀가 무방비하다는 것쯤은 일찍이 알았지만 말입니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이 이어졌다.
“아까처럼 너무 달라붙어서 자꾸 날 도발하는 건…….”
그리고 잠시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말끝을 길게 늘였다. 마침 구름에 달이 가려져 사위가 어둑해졌다.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다가오면 나는 또 매번 착각하고 기대할 테니까요. 뭐, 아직까진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이네에게 슬쩍 고개를 기울인 얼굴이 지독하게 섹시했다. 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히끅! 흡!”
재빨리 입을 막았지만 미처 숨기지 못한 딸꾹질이 밤공기 사이로 퍼져나갔다.
* * *
첫날의 연회 이후 달리아는 당분간 베룸 공작저에 머물게 되었다. 제안은 아이네가 했지만 에펜베르크 후작저에 서신을 넣어 허락을 얻어낸 건 나딘이었다.
달리아 영애가 아직 미성년인 탓에 가주의 허락 없이는 다른 저택에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달리아 영애, 머무르고 싶은 만큼 계셔도 됩니다.”
그 말에 안도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달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하지만 쉽게 물러설 자들이 아닌데…….”
“와, 오빠. 진짜 할 때는 하네? 그 인간들한테 뭐라고 했어?”
곁에 있던 아이네도 궁금한지 나딘을 재촉했다.
“뭘 뭐라고 해. 공작가문에서 친우를 초대해서 좀 지내겠다는데……. 뭐, 그거면 된 거지.”
순간 달리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아이네가 활짝 웃으며 두 손을 부여잡고 흔들자 금세 마주 웃는 얼굴이 되었다.
“잘됐어요, 영애. 전에 지내던 그 방도 괜찮고, 다른 마음에 드는 방이 있으면 거길 준비해두라고 할게요.”
“아니에요, 그저…… 이번에도 공녀님과 공자님께 또 폐를 끼치게 되어서,”
미안한 목소리로 작게 말하면서도 달리아는 나딘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나딘은 그녀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옅은 미소만 지어주었다.
마치 아직 어린 달리아는 그런 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지난날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는데도 여전한 다정한 모습에 안도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여동생의 친우에게 베푸는 호의에 불과할지 모른다.
‘공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호의는 어디까지일까.’
그렇게 달리아는 막연한 기대감 뒤에 찾아오는 불안함에 몸을 떨었다. 제 집안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호의도 끝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제 아버지와 오라비의 행실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
달리아는 최근 후작성의 집사와 전시 상황에 재정이 어찌 될지 의논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미 문제가 꽤 심각했다.
[그럼,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아가씨? 전쟁이라뇨.]
집사의 다급한 메시지가 마법 통신구 위로 떠올랐다.
[아니, 우리는 연합왕국과 맞닿아 있는 접경 영지니까요. 만약의 경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요?]
달리아의 말에 마법 통신구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솔직하게 말입니까?]
음성이 포함되지 않은 단순한 메시지에서도 그 침통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후작성이 있는 직할령만 말씀하시는 거라면 성문을 전부 봉쇄했을 시 약 일주일 정도 항전이 가능합니다. 다만 이 경우에도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절식을 전제로…….]
당황한 달리아가 급히 집사의 말을 끊었다.
[직할령만이라뇨? 후작령 전체로 보았을 때는, 그럼…….]
[예, 애석하지만 하루도 버틸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일주일이라는 것도 연합왕국이 테르미누스 산맥 바깥을 점령하느라 시간을 지체했을 때만 가능합니다.]
달리아는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두어 달 전만 해도 유사시를 대비한 곡물과 병력 배치에 대한 장부를 확인했는데…….
[산맥 바깥쪽 중 가장 큰 영지가 베르길리우스 남작령이죠? 저번에, 확실히…….]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지시한 대로 집행하려고 했는데 작은 주인님께서 급하게 돈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고 하셔서.]
그녀의 하얀 손이 평소보다 훨씬 창백해진 이마를 짚었다. 분명 또 도박장에 가려고 돈을 가져갔을 테다.
달리아가 아무리 열심히 분석하고 물자를 적재적소에 배분하여 지시를 해도 종종 무용지물이 되었다.
결정권자가 너무도 손쉽게 그 지시를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달리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귀족가에서 태어나 험한 일 한 번 할 필요 없이 배부르게 먹고, 좋은 잠자리를 가졌으니 그 정도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여겼다.
체계적으로 알려줄 선생도 없이 독학한 뒤, 재정 문제를 제게 맡겨달라고 소후작인 오라비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건방지다며 욕만 들어야 했다.
“어디서 여자가 돈 문제를 욕심내? 이건 남자 일이야!”
오라비는 손까지 치켜들면서 겁을 주었지만 한 번도 달리아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쓴 적은 없었다.
그게 하나뿐인 여동생을 아껴서라거나 어린 소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도적인 이유는 결코 아니었다.
“하여간 반반한 낯짝만 믿고 어지간히 기어오른다니까. 얌전히 있다가 돈 많은 남자나 물어와. 그게 네가 할 일이야.”
윗사람인 주인이 대책 없이 흥청망청이니 관리인들은 점차 대담하게 굴었다.
으레 그렇듯 처음에는 단순 계산 실수 정도로 넘어가도 무방할 정도로 아주 적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감사가 들어오긴커녕 크고 작은 횡령쯤은 걸리지 않는다는 걸 모두가 금세 알아챘다. 그러자 그 빈도와 액수는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겨우 열두 살이지만 독학으로 장부를 볼 줄 알게 된 달리아와 대대로 후작가에 충성해 온 집사가 아니었다면 진작 파산했을 영지였다.
어쩌면 영지를 반납하고 이름뿐인 귀족으로 남거나 폐하의 진노를 사서 귀족작위조차 박탈됐을지 몰랐다.
“요즘 랄로가 안 보인다 했더니만, 네가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멋대로 관리인들을 해고해?”
뒤에선 횡령을 하면서 후작에겐 입 안의 혀처럼 굴던 관리인들을 해고했다는 말에 술과 약에 절어 살던 후작이 달리아를 불러들였다.
“계집애가 어디서 아비를 무시하고!”
그때가 처음이었다. 후작이 비틀거리며 던져 깨진 빈 술병 조각에 상처를 입었던 게.
뺨을 스치고 지나간 상처였다. 단 일주일이면 흉도 남지 않을 만큼 경미한.
그러나 열네 살의 달리아는 절망했다. 늘 아버지와 오라비가 작은 상처라도 나면 나이가 다섯 배는 많은 늙은이에게 팔아넘길 거라며 윽박질러 왔으니까.
제국법에 따라 열네 살은 혼인을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달리아는 매일 밤 공포에 떨었다.
“제발, 제발…… 내일 눈뜨면 다 나아있게 해주세요.”
다행히 긁힌 자국은 금방 사라졌다. 하지만 달리아는 더 이상 이렇게 후작가에서 팔려갈 날만 기다릴 수 없었다.
“아버지, 저를 황도로 보내주세요. 그곳에 가면 저를 더 어여삐 봐주실 신사분들이 많을 거예요.”
“그으래? 끄흡! 그건 그렇지이. 이런 변방 촌구석보단, 어? 돈 많은 놈들이 많겠지?”
“잘할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너, 이년! 괜히 허튼 짓이라도 하면, 끅! 노망난 얀츠 자작한테 내일이라도 팔아버릴 테다!”
그렇게 빌고 또 빌어 올라온 황도였다.
그리고 은밀하게 집사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간신히 후작령의 재정을 이끌어갔다. 동시에 한참 어린 나이에 사교계의 정점으로 인정받으며 겨우 황도에 머물 명분을 얻었다.
제 가족은 그런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황제 폐하께서 보낸 전쟁 물자까지 손을 댔다. 만약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고 추후에 잘잘못을 따진다면 작위가 몰수되어도 할 말이 없었다.
보다 못한 달리아가 그들에게 흘러가도록 한 건 더 강력한 중독성 약물이었다.
그런데 그 약물에 이렇게까지 빨리 중독되었을 줄은 그녀도 몰랐다.
달리아를 직업여성이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연회에 내보낸 건 이제 완전히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일 테다.
“아버지, 제발요. 여긴 황도예요. 이번 연회만 무사히 넘기게 해주시면 누구와 결혼하라고 하시든 따를게요.”
“야, 달리아! 너 더 건방져졌다? 어디서 아버지가 말씀하시는데 말대답이야?”
“오라버니……. 제발…….”
폐하께서도 참석하시는 연회였다. 게다가 몇 년간 얼굴을 마주하던 귀부인들과 영애들 앞이다. 이번엔 베룸 공작가 남매도 있다.
비참한 마음에 처음으로 반항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래도 완전히 정신을 놓지는 않았는지 폐하께서 자리를 떠나신 후 그녀를 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공녀님과 공자님께서 날 구해주지 않으셨더라면…….’
더구나 달리아를 치장해주던 후작저의 하녀들마저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따르던 후작령 출신의 하녀들은 저들끼리 흉을 보았다.
“어차피 지참금을 많이 주는 곳으로 팔려 갈 텐데 뭘 저리 도도한 척이람?”
“그러게, 그럼 그 지참금이 우리한테까지 돌아올까?”
“적어도 빵 하나, 계란 하나라도 더 지급되지 않을까?”
빵과 계란이라니. 저들의 사정도 이해는 하지만 그녀에겐 인생이 달린 문제였다.
달리아의 입매가 주체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얘, 그거 아니? 남부 귀족 중 하나인데, 다리 하나는 없지만 곡식이 많이 나는 땅의 백작님이 있대.”
“부인이 있겠지.”
“아니야. 나이는 육십이 넘었어도 정력이 어찌나 좋은지 견디지 못하고 죽어 나간 부인만 여섯이래!”
“어머, 그건……. 호호호.”
이번 연회엔 남부의 귀족들까지 전부 소집되었다. 아비와 오라비가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약에 절어버린 머릿속에 친황파니 귀족파니 하는 구분이 남아있을 리가 있나.
달리아는 자신이 지쳤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집사에겐 미안하지만 이제 무얼 더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방법이 남았대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절망 속 마지막으로 제게 찾아온 베룸 공작 남매가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았다. 대신, 미약하게나마 붙들고 있었던 제 영지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하지만 자신이 놓는다고 놓아줄 아버지가 아니었다. 나딘 공자는 도대체 어떻게 자신을 빼내온 걸까.
‘혹시, 혹시……. 지참금이라도 치르기로 하고 날 데려와 주신 건.’
달리아는 못된 희망이 비죽 솟는 걸 느꼈다.
배은망덕하다는 걸 알아도 쿵쿵 뛰기 시작한 심장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죽어도 팔려 가기 싫다고 소리 없이 절규하던 열네 살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얻은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 * *
연회 둘째 날, 황제의 알현실에 모인 사람은 황제를 제외하면 모두 여섯이었다. 이미 둘째 날의 연회는 시작되었을 시각이기도 했다.
다행히 이날 연회는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을 배려해 고위 귀족들이 참여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덕분에 그들이 비밀스럽게 모일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그렇게 아이네와 달리아, 나딘, 테고와 케이어드는 황제의 앞에 섰다. 아르비드만이 오고 가는 이야기를 적으려 황제의 곁에 앉아있었다.
알현실 의자에 앉은 황제가 여태 받았던 보고를 종합한 보고서를 휙휙 넘기며 읽었다.
“결국 사라진 곡물 수레를 은닉해놨을 가능성이 제일 큰 곳은 에펜베르크 영지의 테르미누스 산맥 바깥쪽이라는 거지?”
“정확히는 베르길리우스 남작령입니다.”
테고의 말에 황제가 보고서를 넘기던 손가락을 잠시 멈추었다. 곁에 있던 아르비드 또한 움찔하느라 펜을 놓칠 뻔했다.
잠시 인상을 쓴 황제가 아이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 베르길리우스 남작가에서는 누가 참석하지?”
아이네가 참석명단을 확인하려 펼치자 달리아가 곁에서 페이지를 짚어 알려주었다.
“베르길리우스 남작은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불참하고, 양아들인 레스트리드 베르길리우스 소남작이 참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레스트리드라……. 그 가문에는 직계가 없을 텐데, 양아들이라고?”
규칙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던 황제의 시선이 케이어드에게 가 닿았다. 그러자 케이어드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모두의 관심에서 비껴나 있지만 아까부터 아르비드의 손은 멈춘 채였다. 그는 간신히 왼손으로 떨리는 오른손을 진정시켜 펜을 움직일 수 있었다.
“좋아, 베르길리우스 남작가는 에펜베르크 후작가의 가신 가문이지. 에펜베르크 영애.”
“예.”
모인 이들 중 유일하게 고대 일족의 가문이 아닌 달리아가 부름을 받은 건 이 때문이었다.
황제 역시 거의 파산 직전인 에펜베르크 가문의 상황을 잘 알았다. 그리고 가문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 겨우 열여덟 살인 눈앞의 어린 영애라는 사실도.
“네 의견을 듣고 싶구나. 리테루온 공작의 말로는 이미 산맥 바깥쪽인 베르길리우스령은 연합왕국의 끄나풀들과 결탁했을 가능성도 있다던데……. 어찌 생각하느냐.”
아이네의 데뷔탕트 날 이후 처음 보는 황제 폐하였다. 하지만 이미 베룸 공작가와 맺은 인연과 제 처지를 알고 계실 테다. 그러니 이건 시험에 가까웠다.
달리아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송구하옵니다만, 폐하. 산에 걷잡을 수 없는 불이 났을 때, 이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진압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황제의 입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지난번 옛 방식으로 인사를 올릴 때부터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다.
굳이 제게 답을 구하려는 게 아닌 줄 알았기에 황제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어냐.”
달리아가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황제를 응시했다. 예쁜 다갈색 눈동자엔 어느새 독기가 서려 있었다.
“맞불 작전입니다, 폐하.”
* * *
뜬금없는 소리에 나딘과 아이네, 테고와 케이어드까지 일제히 달리아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흥미롭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 맞불 작전이라……. 들어본 적은 있지.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달리아는 다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내리깔았다.
“큰 산불이 났을 때 불이 번지는 방향으로 또 다른 불을 피워 불길을 제압하는 방법이지요. 양쪽 모두 남김없이 다 태워서 더 탈 것이 없게요.”
거기까지 말하고는 테고를 향해 몸을 틀어 물었다.
“리테루온 공작께서도 베르길리우스 영지라는 범위만 특정하시고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하신 게 아닙니까?”
아직 달리아가 무슨 의도로 말을 꺼낸 건지 짐작하지 못한 테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에펜베르크 영지를 통했을 거란 가능성을 늦게 떠올려서인지 이미 이동 경로는 뒤섞여 버렸다.
그래서 연합왕국이나 제국 남부 귀족파의 의심을 사지 않을 선에서 기사와 병사를 최대한 동원했다.
하지만 그 일대는 테르미누스 산맥과 맞닿은 지역이라 원체 험준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테고는 시간과 인력 부족 문제로 알아내지 못하고 황도로 귀환해야 했다.
공작인 그가 건국 기념일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다면 의심을 피하기 힘들었으니까.
게다가 이번에는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약혼 스캔들의 주인공까지 되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달리아가 다시금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연합왕국 측은 그 곡물이 없이는 황도로 진군하진 못할 겁니다. 안 그래도 척박한 땅에서 벌써 몇 년째 흉작이 이어졌으니까요.”
“그렇지. 그러니 남부 놈들과 손잡을 생각을 한 거겠지.”
황제의 얼굴에는 여전히 빙글거리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제 폐하께서 검문을 엄격하게 관리하시니 약속받은 곡물만이라도 얻으려 국경을 침범할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리고 달리아의 목소리는 이제껏 들어본 적 없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에펜베르크 영지에서 테르미누스 산맥 바깥쪽은 과감히 포기하고 바로 봉쇄 작전을 펴서 이 기회에 모두 토벌하심이 어떠신지요.”
“영애……!”
그 말을 듣고도 웃음을 지우지 않은 사람은 황제뿐이었다. 이미 달리아가 말을 꺼냈을 때부터 무슨 의도인지 짐작한 듯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한 맞불 작전이라는 게 국경과 산맥을 사이에 두고 그 안에 적군과 영지민을 모두 몰아넣어 섬멸하라는 소리인 게냐?”
황제는 굳이, 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예, 황실 창고에는 고대인들이 남긴 마도구 중 일정 범위에 투하하면 모든 걸 폭파시키는 무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군사를 파견하지 않아도 되니 제국 측의 피해는 거의 나지 않을 겁니다.”
달리아는 제국 측의 피해엔 베르길리우스 영지나 에펜베르크 영지의 일부분, 그리고 영지민들은 포함되지도 않은 것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산맥에 숨은 게릴라군을 대비해 정말로 불을 놓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이 시기는 주로 북동쪽을 향해 남서풍이 부니까요.”
그 말에 황제와 달리아를 뺀 모두가 기겁했다.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한 건 나딘이었다.
“영애, 그러면 베르길리우스 영지의 대부분이 소실되는 건 물론 죄 없는 양민들은 그야말로 학살당하게 됩니다. 폐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그들도 제국민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르비드도 차갑게 일갈했다.
“황실 창고의 마도구는 이제 더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일에 허비할 수 없어요.”
의자에 등을 깊게 묻은 황제가 말이 없는 다른 이들에게도 턱짓을 했다.
“그럼 나머지 셋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역시도……. 이건 너무 무리한 작전 같아요. 게다가 불을 질렀을 때 바람이 반대로 불기라도 하면 산맥을 타고 에펜베르크 영지 전체가 위험해질 거예요.”
달리아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아이네는 바짝 얼어붙은 채로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자 테고도 입을 열었다.
“이제 제국엔 반란군이라는 위협 요인이 없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도 연합왕국군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오직 케이어드만이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왜 하필 베르길리우스 영지 부근인지…….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달리아의 의견이 지나치게 극단적이란 건 그도 동의했다.
아무도 제 말에 동조하지 않자 달리아가 새파랗게 날이 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공작께서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연합왕국 국경 침략을 은밀히 돕는 게 남부 귀족파란 걸요. 국경으로 군사가 쏠리면 남부 귀족들은 황성으로 향할 겁니다. 그 두 세력이 미약하다 해도 양동작전을 편다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물론 제국군이 이기긴 하겠지만 피해가 막대할 거여요!”
“……!”
거기까지 들은 아이네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소리 없이 경악했다. 방금 달리아의 말에서 남부 귀족만 반란군으로 바꾸면 그녀가 알고 있던 바로 그 전개였다.
“그렇다고 해서 에펜베르크령 전부를 희생시킬 순 없습니다. 폐하, 이번에도 제게 맡겨주십시오. 산에서의 전투라도 자신 있습니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테고의 말에 달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지막으로 걸어보았던 희망이 전부 사그라들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가 체념하듯 흘러나왔다.
“그러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계속…….”
달리아의 바로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아이네는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은 내가 아는 달리아 영애 같지가 않았어. 마치…….’
이상하게도 라니엘이 여주고, 달리아가 악역이던 바로 그 소설에서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때까지도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기회에 연합왕국군의 씨를 말리는 것도 나쁘진 않지. 산맥 바깥쪽에 사는 영지민이라고 해봤자 등록도 되지 않은 화전민일 거고.”
“아바마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르비드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고, 앞으로 볼 일이 없을 이들이라 해도 제국민이었다. 세금도 내지 않고 숨어 산다고 해서 이들이 타국의 백성이 되는 건 아니니까.
무릇 제국의 황제와 같이 지배자의 위치에 있다면 그런 이들까지도 보호하는 게 옳았다. 아르비드는 그렇게 배웠다.
제 아들의 큰 목소리에 황제가 절레절레 손을 내저었다.
“누가 정말 그렇게 한댔느냐. 만약의 상황을 가정해본 것이지. 에펜베르크 영애의 방책은 확실히 극단적이지만, 성공한다면 빠르고 효율적이긴 하겠구나. 짐이 이런 인재를 임시직으로 쓰고 있었다니. 영애가 영식이었다면 내 진작에…….”
쓸모없는 후작과 멍청한 소후작을 치워주었을 텐데.
황제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그 말에 달리아의 주먹엔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여전히 충격에 가득 찬 이들의 얼굴을 황제가 하나씩 면밀하게 뜯어보았다.
“누가 혈기왕성한 나이 아니랄까 봐, 쯧. 전쟁은 가장 최후의 수단으로 고려해야지. 가장 좋은 건 이번 연회와 축제 기간 동안 남부 귀족놈들만 도려내는 거고.”
그러고는 황제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그 건방진 것들이 첫날 연회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지?”
그러고는 ‘감히…….’라며 작게 이를 갈았다.
“그럼 오늘 너희들은 연회에 참석할 테냐?”
황제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고위 귀족인 데다 다들 미혼인 몸이었다. 이들이 참석하는 순간 이목이 확 쏠릴 게 분명했다.
돌발상황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았다. 안 그러면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심어둔 자들이 고려해야 할 변수가 늘어난다.
“미안하지만 베룸 공자와 공녀는 오늘만큼은 저택에 머무르는 게 좋겠군.”
“예, 폐하.”
“예!”
제 친우와 그 부인을 꼭 닮은 남매의 모습에 황제가 히죽 웃었다.
“정 아쉬우면 내년에도 또 참석하면 될 테니.”
“…….”
“…….”
그렇게 간략한 회의를 마친 황제는 나딘과 아이네, 달리아를 내보냈다. 안에 남은 건 테고와, 케이어드 그리고 아르비드였다. 특히 테고와 케이어드에게는 그가 따로 지시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이만 물러가도록.”
나딘은 다시 후드를 둘러썼다.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가기는 하지만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연회를 준비한다는 명분이 있는 아이네나 달리아와는 다르게 그는 최대한 은밀하게 황궁을 드나들어야 했다.
“먼저 마차를 타고 영애와 저택으로 돌아가 있어, 아이네.”
“오빠는?”
“시종장이 준비해둔 마차가 황궁 통로 밖에 있대.”
그렇게 알현실 출입문으로 나온 건 아이네와 달리아 둘뿐이었다.
“그래, 그럼 제2기사단은 남부 귀족파가 누구와 접촉하는지 계속 감시하고. 케이어드, 너는…….”
안에서 황제가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얼핏 들렸지만 곧 문이 닫혔다.
조심스레 돌아선 아이네가 잠시 달리아를 응시했다. 그녀는 달리아에게 꼭 확인해야만 할 게 있었다.
아까의 그 얼음 같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달리아는 아이네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잠깐 나 좀 봐요, 달리아 영애.”
* * *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아이네와 달리아는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에 함께 올랐다.
아이네는 솔직히 말해서 커다란 망치에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달리아의 흑화할 운명을 바꾸기 위해 했던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된 줄로만 알았다.
‘제국 전체를 파괴할 뻔한 전개에서 영지로 스케일만 좀 작아졌을 뿐이잖아?’
혹시 그 영향력이란 게 달리아를 아예 제국에서 몰아내려고 작정한 건 아닌가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막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 맞불 작전이라는 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어요? 그리고 게릴라군을 잡겠다고 불을 지른다고요? 이건, 책 바깥에서도, 아니, 기후와 풍향에 따라서 실패할 확률이 아주 높은 방법이에요. 잘못하면 에펜베르크 영지 전부가 불바다가 될 수도 있다고요! 그리고…….”
아이네는 낮게 속삭였다.
“산맥 바깥을 아예 포기하면 그 너머의 후작성이 최종 저지선이 돼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래요?”
부실하기 그지없는 후작성은 필시 금방 무너지고 말 터였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에펜베르크 후작 가문에는 큰 벌이 내려질 가능성이 컸다.
‘이러면 전쟁이나 반란에 가담하지 않더라도 후작가는 몰락할 수도 있어.’
그저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전쟁과 반란이 모두, 익히 아는 전개에서 이미 일어난 사실들이라서다.
심각한 아이네의 얼굴과는 달리 달리아의 얼굴은 한층 밝아졌다.
‘어떻게 그런 잔혹한 생각을 했냐며 비난하실 줄 알았는데, 내 걱정부터 하셨구나.’
그리고 달리아는 꽤 행복한 표정으로 웃었다.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걸 보면 곧 제가 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공녀님이 추측한 실패 사례 모두가 자신이 바라 마지않은 일이라고 한다면, 미쳤다고 하실까?
“제 미래를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그 모습이 아이네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은 달리아가 악역으로 나왔던 소설에서도 그랬다. 반란이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 만약 성공했다고 해도 달리아가 얻을 수 있는 게 그다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제 안위는 신경 쓰지 않고 뛰어들었다. 마치 제국과 에펜베르크 가문을 망가뜨릴 수 있다면 제 몸 하나 던지는 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당연하죠! 우린 이제 친구니까요.”
속상한 기색이 아이네의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리고 친구라는 단어에 달리아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감사해요. 공녀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아이네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달리아가 지난번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얼굴로 힘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솔직히 말해서, 에펜베르크 영지고, 제국이고 모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네?”
“……라고 예전엔 생각했었어요.”
물론 에펜베르크 영지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제겐 공녀님도 계시고.”
공자님도……. 라는 말은 달리아의 입 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그러고는 아이네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에 띄었던 아몬드형 눈매가 일그러졌다. 곧이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눈가가 뿌옇게 흐려졌다.
“전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공녀님. 그런데, 다들 제게 왜 그렇게 가혹하기만 했던 걸까요.”
아까의 독기 가득했던 눈은 오간 데 없었다. 달리아의 눈동자가 비쳐 다갈색으로 보이는 눈물방울이 속절없이 아래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