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그 악역들의 갈림길(2)
각각의 가문 직계들만이 착용할 수 있다고 알려진 아티팩트는 과거 마도 시대의 마지막 산물이었다. 고대 일족의 정체가 인간이 아닐 거라고 여기는 건 제작 과정에 고도의 마법 지식과 막강한 마나가 필요해서이기도 했다.
거기에 직계에게만 반응할 뿐 아니라 착용자가 사망하거나 일정 시간 몸에서 떨어뜨리면 일족의 땅으로 되돌아가는 속성까지.
그 긴 세월 동안 일족의 직계를 사칭하거나 가짜 아티팩트가 들키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고대 일족이 모여 제국을 세운 건국 기념일은 다른 어떤 행사보다도 뜻 깊게 받아들여졌다. 특히 3일간의 연회 중 마지막 날은 더더욱.
오늘은 바로 그 중요한 셋째 날.
황족은 물론이고, 특별한 사정이 아니라면 황도에 머무는 가주나 후계자는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아가씨, 정말 이 목걸이를 꼭 하셔야겠어요? 꼭 개목걸이…… 아니, 아니어요.”
“뭐야, 사라도 그렇게 말하기야?”
아이네의 목에 매인 초커는 황도에서 찬사를 받는 베룸의 양식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 빙의하기 전 현대에서 한때 유행하던 장신구였다.
‘얼굴이 작고 목이 기니까 똑같은 초커인데도 느낌이 아예 다르구나.’
이래서 빙의는 무조건 미인에게 하고 봐야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아이네는 오늘도 외모 덕 보는 복장이 무엇인지 톡톡히 느끼고 있었다.
황제 폐하가 미리 공작저에 보내온 드레스는 첫날과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아가씨, 폐하께서는 어쩜 이렇게 다 잘 어울리는 드레스만 보내시는 거죠?”
“폐하께서 직접 고르시는 건 아닐걸.”
사라의 말에 아이네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우리 영지에서도 불쌍한 역할을 담당하는 누군가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겠지. 황제 폐하와 동년배라는 게 믿기지 않는 로버트 시종장!
“허리 리본이 꽉 죄는 거 같으면 말씀해주셔요.”
아이네가 입은 건 조금 깊숙하게 파인 스퀘어넥에 퍼프소매가 부푼 다홍빛 드레스였다.
전체적으로 발랄하고 귀여운 디자인이었다. 진한 색감과 어우러져 아이네의 흰 피부를 더 생기 있게 보이게 만들었다.
거기에 허전한 목에 목걸이 대신 검은 레이스 띠로 된 초커를 매었다. 이번에도 가운데엔 아이네의 눈 색을 닮은 잘 다듬어진 터키석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물결치듯 곱슬곱슬하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까지. 딱 마무리된 참이었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오셨어요!”
그렇게 내려온 로비에는 나딘과 달리아, 테고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녀님. 역시 예상대로 잘 어울리시네요. 목에, 그것도요.”
“어휴, 결국 그걸 두르고 가겠다고? 아무튼 오늘 달리아 영애는 내가 에스코트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러면서 나딘은 마차에 출발 신호를 주러 현관을 나섰다.
아이네를 보고 눈을 반짝거리던 달리아가 나딘의 말에 상기된 뺨을 내보였다.
‘뭐야, 두 사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폐하의 알현실에서 딱딱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게 무색하게 느껴졌다.
눈을 가늘게 뜬 아이네의 곁에 다가온 달리아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제 아버지와 오라버니 때문에 그러시는 걸 거예요. 저는 언감생심 결코, 결코…….”
그 말에 아이네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항상 말하지만 영애가 과하게 아깝다니까요.”
혹시 사용인들이 들을까 싶어 소리를 낮춰 말한 아이네는 곧이어 테고의 앞에 섰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번에는 넋을 잃진 않았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게다가 지금은 달리아 영애도 보고 있으니 체통을 지켜야 한다. 아이네는 애써 새침하게 말을 건넸다.
“황궁에서 뵈어도 괜찮다고 전언을 남겨두었는데, 오셨네요.”
까만 정복에 대비되는 새하얀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네가 마지막으로 들은 대로라면 폐하의 명을 수행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약혼자의 이름으로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특권입니다.”
하지만 뭐가 그리 좋은지 그 피곤을 주렁주렁 달고서도 테고의 얼굴엔 이내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렇게 그가 아이네에게 손을 내밀 때였다.
“아가씨! 이거 두고 가셨어요!”
“사라?”
급하게 계단을 타고 내려온 사라가 아이네의 손에 천으로 곱게 싼 무언가를 건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이네의 눈동자와 꼭 닮은 푸른색 행커치프가 있었다.
“아니, 잠깐만. 사라…….”
“그럼 조, 조심히 다녀오셔요.”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사라는 제 아가씨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걸 본 아이네의 얼굴엔 낭패의 기색이 스쳤다.
계속 커플 아이템을 들먹이기에 모른 척, 급한 척 하면서 두고 나왔는데!
하지만 특이한 색에 먼저 관심을 보인 건 달리아였다.
“남성용 행커치프 아닌가요. 흔한 색이 아닌데 갑자기 왜……. 아!”
의아한 표정이던 달리아가 무언가 알았다는 얼굴로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고는 슬쩍 테고의 가슴팍을 힐끗거렸다. 그의 깔끔하고 까만 정장의 가슴 포켓에는 아무것도 꽂혀있지 않았다.
“그게…….”
당황한 아이네가 발을 동동 구르며 다가서자 달리아가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아이네의 초커에 달린 터키석을 힐끗 훑었다.
“사냥대회에서도 손수건을 주고받으셨다는 말은 들었지요. 역시, 약혼 관계이시니까요.”
거기까지 듣고서야 테고는 저 행커치프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장식이란 걸 안 모양이었다. 잠시 멈칫하던 그가 아이네에게 제 팔을 내밀었다. 어쩐지 조금 기뻐하는 얼굴로.
“미처 의논할 겨를이 없었는데 먼저 챙겨주어서 고맙습니다, 공녀.”
“흐으. 아니, 아니에요.”
망했다. 망했어.
아이네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테고의 팔에 손을 올렸다. 아무래도 이번마저 은근슬쩍 넘어가려던 계획은 다 틀어진 듯했다.
‘기회를 달라고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희망 고문을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래도 오늘까지 커플템이 없으면 분명 말이 나올 테다.
이, 이건 약혼자로서의 평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그렇게 달리아는 나딘의 마차에 오르고, 아이네는 테고와 같은 마차에 올랐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하자 테고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건네지지 않은 행커치프를 감싼 아이네의 손으로 향했다.
“내키지 않는다면 굳이 주지 않아도…….”
“아니에요! 하, 그런 게 아니라.”
굳이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테고의 목소리에서 시무룩한 느낌이 난다면, 기분 탓일까.
서둘러 행커치프를 되는 대로 접으며 아이네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런 식의 침묵이 조금 어색했다.
“그, 그러니까. 음……. 그때 사냥대회 때 드린 손수건은 잘 갖고 계시죠?”
“예, 물론입니다. 그거 말고도…….”
무심코 대답하려던 테고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네? 그거 말고도, 라니요?”
“아닙니다.”
다른 신사들의 포켓에 꽂혀있던 모양대로 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네는 가장 쉬운 세모꼴로 접어서 테고에게 건넸다. 이러면 까만 정장과 조화가 가장 잘 이루어지리라는 생각뿐이었다. 삼각형 행커치프의 의미까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거기에다 그의 반응이 조금 뻔뻔하기까지 해서…….
“…….”
테고는 순순히 받아들이는 대신 상체를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누가 보아도 직접 꽂아달라는 뜻으로 보였다.
아니, 이 남자가 정말?
아이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흘겼다. 그러자 테고는 하얀 볼을 슬쩍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다음번에는 제가 먼저 준비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가 부끄러워해서일까, 어쩐지 아이네도 뺨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 정말! 그럼, 가만히 있어요.”
그래, 맨몸도 아니고 정장 위에 가볍게 꽂아주기만 하면 되는 일인걸.
그렇게 아이네의 손이 천천히 다가와 테고의 가슴팍에 살짝 닿았다. 최대한 접촉을 줄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고는 파란 눈을 가늘게 접어 일말의 아쉬움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이젠 이것조차 부족하다고 느끼나 보다.
그때였다. 마차가 작게 덜컹거렸다. 평소 황궁으로 함께 출근할 때엔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던 미약한 진동이었다.
“앗!”
“윽.”
하지만 보통 때와는 달리 잔뜩 긴장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숙인 아이네에게는 꽤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것도 그에게 닿지 않으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반사신경이 뛰어난 테고가 재빨리 아이네의 양팔을 붙들어 부딪치는 일만은 막았다. 하지만…….
“까, 깜짝이야.”
“…….”
서로의 거리가 꽤 가까웠다. 마치, 사냥대회의 그 당시처럼.
그러나 과거의 아이네와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테고를 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으니까. 아이네의 목으로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때는 꼼짝없이 여자인 줄 알고……. 어, 어어? 그러고 보니.’
한편, 아이네를 붙든 테고의 얼굴이 서서히 굳기 시작했다.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어지고 있어서다.
손으로 쥐어보니 보는 것보다도 더 가냘프게 느껴지는 팔뚝이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제 손가락과 손바닥이 그 감촉을 더 느끼려 움직이기 전에 그녀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했다.
‘하, 제길.’
테고는 정말로 그러려고 했다. 아이네가 괜한 말로 그를 자극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있잖아요, 우리 그때요. 테고 경이 곰 잡아서 우승했던 날.”
“……사냥대회 말입니까?”
가까스로 대답하곤 테고는 그대로 숨 쉬는 걸 멈추었다. 피부에 따뜻하게 다가와 부서지는 숨결이 이번에도 달다는 사실이 의식됐다.
아이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그때 말인데요.”
“…….”
그리고 그 바람에 손등과 손목을 스치고 지나간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테고는 조금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예민한 감각이 더 극대화되고 있다.
갉작갉작, 인내심이 천천히 깎여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상황에 뜬금없다는 건 아는데, 으음…….”
아이네가 말끝을 흐릴 때마다 테고는 제 의식도 흐려지려는 걸 간신히 붙드는 게 고작이었다.
이건 필시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일 테다. 폐하께서 맡기신 일이 너무 많아서 조절이 잘…….
“우리 그때 진짜로, 닿았어요?”
“하.”
가늘게 깎이고 또 깎여 팽팽하게 당겨진 인내심이 팅, 소리를 내며 기어코 한 가닥 끊어졌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마차가 다시 한번 조금 덜커덩거렸다. 이번에는 그녀를 잡고 있던 테고의 손에서 조금 힘이 빠졌다.
“으앗?”
결국 그의 허벅지 끄트머리인 무릎 위로 살짝 주저앉은 아이네는 어깨를 움츠렸다. 몇 번이고 보았던 새파란 안광이 자못 형형하게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닿았습니다, 분명히.”
괘, 괜히 물었나 보다. 이놈의 호기심.
아이네는 맹수 앞에 놓인 토끼처럼 흠칫 떨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는 거다.
남자라는 걸 알게 됐는데도 여태껏 위기의식 없이 접촉하고 편하게 이야기하던 습관만은 그대로 남았으니까.
밀폐된 공간에 단 둘뿐이라는 상황과 피곤함 탓에 판단이 흐려진 테고의 얼굴이 점차 아이네와 가까워졌다. 순간 힘이 빠졌던 그의 손에도 다시 그녀의 어깨가 부드럽게 잡혔다.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돌려보려던 아이네가 툭, 말을 내뱉기 전까지는.
“어? 그럼 호, 혹시 처음이었어요?”
“……하.”
그 말에 조금씩 다가오던 테고의 고개가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차라리, 여자로 착각하던 때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면서.
* * *
그리고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아이네의 빙의 라이프는 다시금 운명의 소용돌이 안에서 요동쳤다.
전쟁만큼이나 더한 혼란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다음은, 에펜베르크령의 베르길리우스 남작가의 레스트리드 소남작입니다.”
아까부터 한쪽 구석에서만 웅성거리던 소리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히 커지던 소란스러움은 어느 순간 약속이나 한 듯 딱 멎었다.
그리고 충격과 경악에 빠진 인파 사이를 헤치고 키가 큰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도 안 돼.”
이제 그거 원작 소설 아니잖아요. 작가인지, 시그노인지 누구라도 나와 봐! 이렇게 뒤통수치기 있어요?
아이네는 들릴 듯 말 듯 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곁에서 듣고 있던 테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가 자신을 만났을 때 내뱉었던 말과 정확히 똑같은 말에, 똑같은 표정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감추지 못한 채 테고도 아이네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그들 앞에 다가온 청년은…….
잿빛이 도는 조금은 바랜 빛의 금발, 사파이어를 그대로 박아놓은 듯한 눈동자.
거기에 도저히 혈육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흡사한 이목구비까지.
“에스피오의 지지 않는 영원한 태양이신 황제 폐하께 베르길리우스 남작가의 장남 레스트리드 베르길리우스가 인사드립니다.”
맙소사, 목소리마저 황제와 비슷했다.
그에 가까이서 지켜보던 아이네와 테고, 나딘, 케이어드와 아르비드까지 모두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었다.
특히 아르비드는 제 일그러진 얼굴을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놀란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아이네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나타났다, 최종 악역!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 * *
레스트리드라는 남자가 나타난 뒤로 홀 안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다들 소남작이라는 젊은 청년과 황제를 번갈아 보느라 바빴다.
“어어, 뭐야.”
“어머? 저자는 폐하의 젊은 시절과 완전히…….”
“쉿, 경이라도 칠라. 조용히 해.”
그도 그럴 게 두 사람의 모습은 상당히 닮아있었다.
정작 황제의 유일한 아들이자 제국의 황태자인 아르비드보다 더.
정말로 끝이 날 때까지 끝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사실 조금 전까지 아이네는 꽤 자신만만한 상태였다.
‘이제 전쟁 위기만 넘기면 일단 라니엘의 소설은 대강 완결인가 했는데!’
우려와는 달리 남부 귀족들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셋째 날 연회에 참석했다.
거기다 빼돌린 곡물이 국경을 넘지만 않으면 연합왕국은 군사를 일으킬 수 없다.
국경은 본래 주시하고 있었지만, 달리아의 조언 덕에 에펜베르크 영지와 맞닿은 국경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이미 그곳엔 발 빠르게 병력이 배치된 상태였으니까.
‘반란군은 처음부터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지금 저렇게 모여 있는 남부 귀족을 황도에 묶어놓는 건 황제와 케이어드의 역할이었다.
초청이란 명목 하에 유력 인물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셈이다.
연회 이후의 축제기간이 지나기 전에 이적행위에 가담한 이들을 색출해내야 했다. 그래야 황제가 이들을 불러 모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테니까.
‘전쟁 없이 끝낼 수 있어.’
그렇게만 된다면 금방 베룸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경계의 숲속 오두막에서 시그노를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거고.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요즘 들어 직진에 직진을 거듭하는 테고뿐이었다.
그래서 아이네는 폐하께 인사를 마치고 물러난 뒤 테고를 가볍게 타박하기까지 했다.
“아까부터 너무 티 나게 행커치프만 만지고 있는 거 알아요?”
“……그랬습니까?”
자신을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서 과시하듯 내세우는데 누가 모를 수 있을까. 심지어 폐하께서도 피식 웃으셨는걸.
그렇게 테고와 자신을 기대에 차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을 외면하랴, 황제에게 인사를 올릴 차례를 기다리는 남부 귀족파를 견제하랴, 미처 주위에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탓에 황제를 처음 알현하는 하급 귀족들에까지는 시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큰 위기는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 아프게 찔러오는 법이었다.
소리 없이 경악하며 아이네는 자신이 알고 있던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 * *
원래 소설 속 최종 악역은 폐태자의 어린 아들이었다. 25년 전 막내 황자의 반정에 그의 할아버지인 황제와 아버지인 황태자가 희생됐다.
“제르, 아니, 폐하. 지금 황손을 처리하면 여론이 좋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너무 어린 데다 눈앞에서 선황과 제 아비가 죽는 걸 봤으니까요. 남부의 충성 맹세가 우선입니다. 아직은 안 됩니다.”
반정에 도움을 주었던 친우이자 충신들의 말이었다. 그들의 조언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잘생긴 미간을 찌푸렸다.
핏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옥좌에 앉았던 그 때, 기둥 뒤에서 숨죽여 울고 있던 황손을 발견한 건 황제였다.
‘여기 있었군. 잡아라, 황손이다.’
‘숙부가 어, 어떻게……!’
그리고 놀란 듯 크게 뜨인 눈이 이내 고요하고 격렬한 분노로 타오르는 걸 똑똑히 보았다.
고작 어린아이라고 치부하기엔 뭔가 찝찝했다. 그래서 황제는 제 친우들만 은밀히 불러 모았다.
“어린애라도 형님의 적통이자 직계야. 살려둘 순 없어.”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황제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황태자궁을 불태웠을 때 차라리 그 안에서 나오지 못했길 바랐다. 아무리 그래도 제 손에 조카의 피를 직접 묻힐 순 없으니까.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베룸 공자인 나타니엘이 말을 보탰다. 그의 머리 색은 이후 아이네와 나딘이 고스란히 물려받은 싱그러운 풀빛이었다.
“일단 몇 개월 정도 폐궁에 구금했다가 유배를 보내는 겁니다.”
“그럴 바엔 내 눈에 닿는 곳에 두는 게 나아.”
황제인 제르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바로 직전의 회의에서 황손 문제에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이던 게롤드 후작이 떠올랐다.
“언제까지 그 문제에 매여 있을 수는 없어. 디아나 공녀가 곧 황후궁에 들어오잖아. 제르, 너도 어서 후계를 봐야지. 공녀와 거래도 했다면서?”
짙은 갈색 머리카락의 리테루온 공작이 보랏빛 눈을 들어올렸다.
여태껏 묵묵하게 후방 병력을 책임졌던 황제의 든든한 우방이었다.
“마침 리테루온 영지와 테르미누스 산맥이 만나는 지점에 오래된 탑이 하나 있어.”
계속되는 반말에 나타니엘 베룸 공자가 옆구리를 쿡 찌르자 공작이 아, 하며 말을 고쳤다.
“……있습니다.”
사적인 공간에서도 말을 높이는 친우들의 모습에 황제가 푸스스 웃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존댓말은 고사하고 거친 말까지 오가던 막역한 사이였다.
반정에 성공해 황위에 오르고 나자 이렇게 제 지위가 달라진 게 실감났다.
“아무튼 거긴 북쪽이라 봄에도 삭풍이 부니까. 아니, 붑니다. 유폐되면 한 계절을 넘기기 어려울 겁니다.”
그렇게 몇 개월 뒤 가을 무렵, 여섯 살의 나이로 유배를 떠난 황손은 산적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해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폭설이 잦아서 황손의 흔적을 수습한 건 무려 반년이나 지나서였다.
그것도 떠날 때 입고 있었던 찢어진 옷가지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사체뿐이었다.
“딱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게 이 아이의 운명인 것을…….”
유해를 수습해 황궁 지하에 석관을 마련해주었다. 그렇게 반정의 후환은 대강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아 흩어져있던 반란군을 한데 모으는 주축이 되었고.
연합왕국의 침입으로 인해 라니엘과 케이어드, 아르비드조차 없는 황궁으로 들어와 26년 만에 원수를 갚았다.
* * *
그래, 이거였다.
‘그런 내용이었잖아!’
하지만 이제 그런 전개도 의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최종 악역인 그가 나타나봤자 뒤를 받쳐줄 반란군은 테고 경이 다 박살냈는걸.
아이네는 혼란스러웠다.
베르길리우스 남작가는 또 뭐란 말인가.
유출된 곡물이 은닉된 영지, 그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최종 악역이 숨어 있는 곳이었다니.
‘내가 뭔가 놓치고 지나간 게 있는 거야.’
그러고보니 어제 회의 말고도 어디서 들었던 것 같긴 한데…….
그때 근처에서 굳은 얼굴로 서 있던 아르비드가 작게 읊조렸다.
“마리에 베르길리우스.”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아이네나 테고와는 달리 케이어드가 인상을 썼다.
“그 마리에 영애 가문의 양자라고?”
‘이건 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케이어드는 자신에게 잠시 닿았다가 떨어진 황제의 눈길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굳이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질책이 섞인 시선이었다.
분명히 그가 조사했던 레스트리드 베르길리우스는 저런 외모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진짜란 말인가.
한편, 아이네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그런데 원작 아닌 원작에서도 이름이 레스트리드였나?’
분명히 또 무언가가 바뀐 거다.
상당히 동요했을 게 분명한데도 부러 침착한 목소리로 황제가 소남작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 반갑군. 베르길리우스 소남작. 짐이 무엇 하나 물어도 되겠느냐.”
“하문하시옵소서.”
“올해 네 나이가 몇이냐.”
이제 장내에는 침 넘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게 조용했다.
“……올해 스물넷입니다.”
그 말에 좌중에는 경악한 기색이 번져나갔다. 일정한 나이 이상의 귀족들이라면 한때의 스캔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황제는…….
“그래?”
레스트리드라는 남자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보기 드물게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겉모습만은 태연한 낯을 유지하던 황제였다. 하지만 격하게 떨리는 동공만은 어쩌지 못한 듯했다. 여태 생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이었다.
‘설마, 마리에의 아들인가?’
제 눈으로 봐도 자신과 쌍둥이라고 할 만큼 닮아있었다. 다만 소남작이라는 저 아이는 눈 밑에 조그마한 눈물점을 지녔다는 것.
그 하나만이 달랐다.
‘그래서 도망갔던 거야? 마리에?’
황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훤칠한 청년에게서 필사적으로 그녀의 모습을 찾아보려 애썼다.
모두가 그 청년에게 시선을 집중한 사이, 아이네는 드디어 떠올려냈다.
레스트리드 베르길리우스라니, 거짓말이다.
“란델…….”
아이네는 자신이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이름이 불린 남자의 고개가 아이네 쪽으로 기울었다.
아주 작게 읊조린 말인데도 단상 아래 가까이 다가와 있던 그에게는 들렸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이네와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예상대로 아름답지만 공허해보이는 눈동자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기억이 안 보여. 이 남자는 폐하처럼 죽는 결말이 예정됐던 그 최종 악역이 맞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란델’이라는 이름에 반응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렇게 등장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 남작가의 양아들이라는 신분은 또 어떻게 된 거지?
그때였다.
“폐하, 소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아직 인사를 올리지 않은 남부 측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이제 얼굴에서 웃음기를 완전히 지워낸 황제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대의 차례가 오지도 않았거늘, 건방지군. 게롤드 후작.”
귀족파의 수장이자 폐태자의 측근이었던 자.
은밀하게 반란군을 지원했다는 심증은 있었으나 물증을 잡지 못해 번번이 두고 볼 수밖에 없었던 작자였다.
3년 전, 테고가 반란군 진압을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란군의 싹을 뽑겠다는 황제의 각오가 돋보이는 규모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각 영지로 향하는 길목엔 최소한의 경비만이 남았다. 그걸 핑계로 제 영지를 오래 비울 수 없다며 황도를 떠난 남부 귀족은 꽤 많았다.
내세운 명분과는 달리 반란군과의 연결고리를 들킬세라, 사실상 야반도주에 가까웠다.
그렇게 줄행랑을 쳤던 그때와는 달리 자신만만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걸려있었다.
“다들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 소신이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물러서십시오. 남부의 차례는 아직입니다.”
주먹을 꽉 쥐고 내내 굳은 표정이던 아르비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베르길리우스 소남작이라는 저 청년이 나타났을 때부터 아르비드는 어렴풋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게롤드 후작은 멋들어지게 자란 콧수염을 씰룩대며 아르비드를 주욱 훑었다.
건국 시조를 닮아 정통성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그의 짙은 금발이 지금만큼은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런, 태자 전하. 두려우십니까?”
조금 바랜 색이더라도 황제를 많이 닮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무슨 소립니까, 그건.”
아닌 척해도 아르비드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폐하, 베르길리우스 소남작이라니……. 참으로 우연치고는 얄궂지 않습니까?”
마치 홀 안의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였다.
“마리에 베르길리우스 영애를 기억하십니까?”
어느덧 황도에서는 그 존재가 지워졌던 황제의 옛 연인의 이름이었다.
조용하던 홀 안은 또다시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웬만해서는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는 황제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굳었다.
‘마리에…….’
그리운 이름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케이어드에게 은밀하게 명했던 게 바로 그녀의 행적을 찾는 일이었으니까.
한편, 뜬금없는 이름의 등장에 아이네는 의아스러웠다.
베르길리우스는 귀족 연감에서 본 적은 있지만 변방에 위치한 남작 가문이다.
제국의 건국 시기부터 존재한 오래된 가문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 긴 세월 동안 제대로 중앙정치에 나선 적이 없는 가문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저 란델이란 최종 악역과 엮이게 된 거지.’
아이네로서는 어제 회의에서 들은 게 다였다.
그 전에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긴 하지만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주위의 반응이나 아르비드의 침통한 얼굴을 보니 무언가가 더 있는 듯했다.
뭐야, 또 나만 몰라?
그래서 곁에 서 있던 테고에게 작게 속삭이며 물었다.
“마리에 베르길리우스가 누구예요?”
“글쎄요. 저도 거기까진 잘…….”
아이네의 물음에 테고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남작 가문에 대해서만 묻는다 해도 아는 게 거의 없다.
하물며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다는 스캔들 따위에 관심을 가졌을 리가.
그때, 아버지인 에펜베르크 후작과 오빠인 소후작을 피해 멀찍이 서 있던 달리아가 조심스레 그들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녀는 이미 레스트리드라는 청년이 홀 안에 등장했을 때부터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4년이 넘도록 황도 사교계에 몸담고 있다 보면 숨겨진 이야기 정도는 듣게 되기 마련이니까.
“마리에 베르길리우스. 폐하께서 황자 시절, 곁에 두셨던 영애예요.”
“곁에 두셨다는 건…….”
“맞아요. 연인 사이였어요.”
아이네는 그제서야 트라인 후작가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참, 예전에 베르길리우스 가문의 마리에 남작 영애도…….’
‘아이작 백작부인!’
‘그 남작 영애가 누구인가요?’
‘이런, 저도 잘 모릅니다.’
그 뒤로 어색하게 냉각된 분위기와 황녀의 곰인형 이야기 때문에 그저 지나가 버렸던 거다.
‘그러고 보니 분명히 고대 일족과 아티팩트에 대해 물어볼 때였어.’
그래서 잠깐 언급되고 말았던 이름이더라도 다시 알아봐야겠다고 다짐까지 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동안 대형 폭탄 같은 사건이 좀 많이 터졌어야지.’
그 와중에 잠시 스쳐지나가듯 들었던 영애의 이름까지 기억할 여유가 조금도 없었으니까.
아이네가 달리아의 곁에 가까이 붙었다. 그 바람에 테고의 한쪽 눈썹이 추켜 올라갔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네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낮아졌다.
“그럼, 그러면……. 폐하는 왜 그 영애와 혼인하지 않으신 건데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반정 직전에 사라져서 행적이 묘연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던 달리아가 아이네 옆에 바싹 붙어 섰다. 뒤로 밀려난 테고의 눈썹이 더욱 격하게 꿈틀거렸다.
“당시 이런저런 소문이 있었지만 폐하께서 즉위하신 뒤로 더 이상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는데……. 아마 죽었다고 알려져서일 거예요.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뒷사정이 있을 것 같은 말이었다. 아이네는 재빨리 되물었다.
“서류상으로는?”
“그 뒤로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까요. 폐하께서도 바로 황후 마마와 혼인하셨고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아이네의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에스피오 제국의 황실에선 벌써 8년째 황후가 자리를 비웠다. 명목상 요양을 갔다곤 해도 그게 아니란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아니, 이건 진짜로 그냥 캐릭터 서사를 위해 깔아놓은 배경일 뿐이었는데?’
황제에게 잊지 못하는 첫사랑을 만들어준 건 별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서브 남주였을 황태자 아르비드와 조연인 황녀 티아를 위한 설정에 불과했다.
반정 후 세력 형성을 위해 정략결혼을 한 황제와, 후계자인 아르비드와 황녀만 낳아두고 도망치듯 떠난 황후.
그건 모든 걸 다 가진 듯해도 애정과 온기에 항상 목말라하는 황실 남매의 서사를 위한 배경일 뿐이었다.
라니엘이 그들 남매에게 더 손쉽고 빠르게 특별한 사람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하나의 장치 말이다.
황후가 떠난 후 황제가 새로 들인 후궁조차 없는 것 또한 수월한 전개를 위해서였다.
‘괜히 다른 후궁이 들어오면 이야기만 복잡해질 테니까.’
단지 그랬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누군가 짜 맞추어 놓은 것처럼 처음부터 그랬다.
아티팩트라는 중요한 아이템을 등장시키려 만들어 놓은 설정 속의 시그노라는 존재부터.
주요 인물들의 성장 배경에서 한 줄 설명조차 되지 못할 마리에 영애까지.
큰 줄기의 곁가지로만 밀려나 있던 배경과 설정들이 이야기 자체를 바꾸는 가장 큰 변수가 되고 있었다.
‘애초에 나부터 원작 전에 죽어서 등장도 안 하는 역할이었는걸.’
아이네는 혼란으로 가득 찬 그랜드홀 내부를 주욱 훑어보았다.
특히 올해는 예년과 달리 남부의 귀족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시작은 분명 황제의 의도대로였다.
하지만 그 기회를 이용하려 드는 세력이 황제만 있었던 게 아닐 뿐.
이런 자리에서 터뜨린다면 굳이 소문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과연 자신의 눈과 귀로 들은 것만큼 확실한 게 더 있을까.
그건 나딘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수상한 움직임엔 이런 건 없었는데.’
어느덧 케이어드까지 아이네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러고는 단상 위에서 황제와 함께 있는 아르비드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제일 먼저 언급되면 안 되는 거였어. 어쩐지 귀족파 놈들이 순순히 명을 따르더라니. 저쪽도 내세울 게 있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올해로 황제가 반정을 일으킨 지 꼭 스물다섯 해가 된다. 연인이었다던 마리에 영애가 자취를 감춘 햇수와 같았다.
뒤늦게 나타난 저자의 나이는 스물넷. 그런 데다가 여러모로 황제를 쏙 빼닮은 외모.
홀 안에 모인 모두의 생각은 아주 당연하게 한 곳으로 흘러갔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추측은 그 내용이 대강 비슷했다.
“그럼 폐하의 첫 번째 아들인 거야? 태자 전하는 스물셋이시니까.”
“쉿, 조용히 하라니까! 이미 황태자 전하가 계신데 무슨.”
아르비드라고 쉬쉬하면서도 자신과 새로 나타난 청년을 저울질하는 분위기를 모를 리 없다.
아이네는 물끄러미 아르비드를 바라보았다. 샹들리에 불빛이 잘게 쪼개지는 화려한 금발 아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질끈 깨문 아랫입술엔 피가 몰리고 긴장과 충격으로 굳은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주먹은 언제부터 쥐고 있었는지 아까부터 저렇게…….
“어떻게 생각합니까, 공녀.”
나딘과 달리아, 심지어 케이어드에게까지 밀려났던 테고가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아르비드를 향한 아이네의 시선을 퍽 자연스러운 각도로 차단하면서.
눈을 들어 바라보니 테고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는 곁에서 아이네가 무언가에 놀랐다가 홀로 생각에 빠져 골몰하는 모습을 전부 지켜봤다.
예전에는 그저 이상한 일이라고 여겼었지만, 이젠 그게 아니란 걸 잘 알았다.
‘또 공녀가 알고 있던 미래와 뭔가가 달라졌나?’
그래서인지 제법 차분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테고뿐만이 아니었다.
“그래, 나도 궁금하군. 너, 아니, 공녀의 의견이.”
아이네의 대답을 기다리는 건 나딘과 케이어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그들은 미래의 기억을 엿보는 발현자로서의 판단을 원하고 있겠지만.
“글쎄요.”
애석하게도 그녀는 단순한 빙의자였다.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 알고 있던 소설의 일부를 떠올리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리에라는 영애가 거론되는 건 원작의 영향력과 관련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어느 시기까지는 아이네가 알지 못하도록 덮어두는 방향으로 작용했다면 모를까.
그 생각에 이르자 그녀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하, 이거 ‘진실의 눈’이랑 같은 맥락 아냐? 그래서 내가 여태 들어본 적이 없던 거고.’
마리에 영애도, 자신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었던 ‘진실의 눈’도 전부 비슷한 시기에 처음 들었다.
그녀가 믿고 있던 모든 게 착각이었음을 깨닫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말이다.
아이네는 이제 반쯤 확신했다. 자신이 진짜로 빙의한 원작이라는 건,
‘라니엘 이야기 이후의 연작이구나.’
그것도 굳이 라니엘이라는 존재가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인 거다.
시그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 더 확실했다.
[……이 세계에서 원작이 시작되길 가장 바라는 존재가 나 말고 누가 있을까요.]
레스트리드라는 가명을 쓰는 저 최종 악역도, 방금 앞으로 나섰던 남부 귀족들도 정리된 미래 시점의 연작 말이다!
더불어 황제까지 흘깃 훑었다.
‘그럼 폐하는 어떻게 되시는 거지?’
남장여주 소설의 연작인 진짜 원작에선 누가 주인공인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는 아직 모른다.
‘확실한 건 내가 알고 있던 전개대로는 그 원작이 시작되지 못한다는 거야.’
그러니 아이네가 전개를 지키려고 개입하면 개입할수록 점점 더 어그러지기만 했을 수밖에.
차라리 전개가 아니라 각 등장인물에게 부여된 역할과 목적대로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얼마 전 달리아 영애가 반쯤 흑화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솔직히 말해서, 에펜베르크 영지고, 제국이고 모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그동안 원작의 영향력은 결국 달리아가 이런 생각을 하도록 몰아간 거다.
그래야 언젠가 시작될 진짜 원작에서 살아 숨 쉴 달리아는 에펜베르크 후작과 소후작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근데, 그러면 나딘이랑 왜 자꾸 가까워지는 거야?’
베룸 영지로 도피해서 정착이라도 하나?
그때, 홀로 느긋하게 모두의 시선을 즐기던 최종 악역, 란델의 입이 열렸다.
“폐하께 꼭 드리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무엇이냐.”
그렇다면 저 남자의 역할과 목적은,
‘원수를 갚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거겠지.’
원래는 반란군 안에서 정통성 있는 직계라는 명분으로 보호받고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테고가 라니엘 대신 살아남게 되면서 그 반란군을 모두 진압해버렸다.
그때 놓쳤다던 중요한 인물이 란델이 맞긴 하겠지만…….
이제 더는 반란군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은 걸 테다.
폐태자의 아들인 황손이 아니라 황제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루트로!
아이네는 근처에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뭐가 되었든.”
그러자 그녀의 근처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다시 모였다. 아이네가 발현자라는 걸 알고 있는 테고와 나딘, 케이어드 외에 그걸 모르는 달리아까지.
숨죽인 채 그녀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가짜예요.”
저 남자가 원하는 건, 황위다.
남부와 내통해서 확보한 대량의 곡물이 베르길리우스 영지에 있는 것부터, 하필 그 가문 출신 영애가 황제의 옛 연인이란 것까지.
이 모두가 우연일까?
* * *
“가짜라고요?”
아이네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달리아였다. 그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단상 아래에 선 베르길리우스 소남작을 꼼꼼하게 훑어내렸다.
‘혈육이 아니고서야 저렇게까지 닮을 수가 있나?’
뒤이어 아이네의 어조에도 생각이 미쳤다. 마치 일말의 다른 가능성도 없다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
방금까지 마리에 영애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눈치였는데…….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역시 그렇지? 나도 레스트리드 베르길리우스 소남작을 조사하긴 했는데 절대 저런 외양이 아니었어.”
아이네와 서로 데면데면해 보이던 케이어드 헤이안드로 대공부터.
“국경이 틀어막힌 걸 알고 마지막으로 귀족파가 발악하는 건가? 그렇다기엔 게롤드 후작이나 다른 자들이 너무 자신만만한데…….”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빠진 나딘 공자에,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감히 황족을 참칭하진 못할 겁니다. 다른 자리도 아닌 건국 기념일 연회에 폐하의 앞에서라니, 재판 없이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까.”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아이네 공녀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는 리테루온 공작까지.
왜 다들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들이는 걸까.
달리아는 목 끝까지 의문이 차올랐다. 하지만 모두가 아이네의 의견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황이다.
그러다 문득 제 주위의 인물들이 보통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고대 일족의 피를 이은 고귀한 직계들이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
자신 같은 변방의 후작가 영애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테지. 그리고 그건 이 자리에서 굳이 제가 궁금해하거나 서운해할 일도 아니고.
저란 인간은 어쩜 이리 뻔뻔하기 짝이 없는지.
달리아는 살짝 눈을 내리깔고 공손하게 두 손을 그러모았다.
지독하게 외롭고 공허하기 짝이 없던 세계에서 건져내 주었다고 감사히 여긴 게 고작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가 몸을 물리려는 참이었다. 자그맣고 깃털 같은 온기가 달리아를 붙들었다.
‘공녀님……?’
그와 동시에 낭랑한 아이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께선 원래 레스트리드 영식의 행방을 조사해보시는 게 좋겠어요.”
“그럼, 저건 ‘가짜’ 소남작이란 이야기군?”
가짜라는 말에 유난히 강세를 둔 케이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의 시선은 새로이 나타난 청년에게 꽂혀있었지만…….
‘저거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가만히 있던 아이네가 괜히 뜨끔했다. 하여간 원작이 달라졌다고 해도 저런 밉살스러운 면은 원래 알던 캐릭터와 똑같았다.
역시 나중에라도 케이어드와는 담판을 짓긴 해야 했다. 그러나 당장 급한 것은 아니라 아이네는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길리우스 가문과는 상관없는 자니까요.”
그러고는 여전히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달리아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 잠시만 기다려줘요.’
그에 달리아의 얼굴이 울기라도 할 듯 조금 일그러졌다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또다시 자신을 잡아준 손이었다. 달리아는 이번에야말로 마음을 굳게 먹고 아이네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딘이 다가와 달리아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 폐하께서 영애까지 부르셨다는 건 우리 모두 같은 배를 탔다는 뜻입니다.”
아이네 역시 작은 음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영애가 아니었다면 아직 다들 테르미누스 산맥만 뒤지고 있었을 거예요.”
또다시 밀려난 채로 둘이 맞잡은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테고가 다가와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저 영식은 폐하의 핏줄은 아닌 거로군요.”
“그건…….”
지금까지의 단호한 태도와는 다르게 아이네는 망설였다. 황제의 아들은 아니지만.
황제의 조카였다. 그건 혈육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녀의 대답이 늦어지자 기다리다 못한 케이어드가 채근했다.
“그럼, 저자는 누구지?”
“…….”
거기까진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폐태자의 아들인 황손이 살아있다는 걸 아는 건 란델 본인과 남부 귀족파 정도일 테니까.
섣불리 대답했다가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다면 둘러댈 핑계가 없었다. 특히 지옥의 주둥아리인 케이어드가 있는 앞에서는 더더욱.
‘책빙의자라고 밝히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그렇게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근위대에게 몸수색을 받은 란델이 황제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사교계에 모습 한번 드러내지 않은 변방의 소귀족이라기엔 거침없고 당당한 발걸음이었다.
“이것을 기억하십니까?”
그의 손이 천천히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한눈에 보아도 귀하게 생긴 회중시계가 있었다.
“……네가 이걸 어떻게.”
여태껏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해오던 황제의 얼굴이 끝내 무너져내렸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을 들어 란델의 손 위에 올려진 회중시계를 집어 들었다.
다시금 고요해졌던 좌중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오오, 저건……!”
“폐하의 어머니이신 케일 황비 마마 가문의 것이 아닙니까.”
고대인이 남겼다던 아티팩트를 제외한 마도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직계인 핏줄을 감별하며 모습까지 바꿔주는 아티팩트의 기능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을 뿐.
여전히 적지 않은 마도구가 고대 마도시대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로 남아 있었다.
그 역시 대다수는 황궁의 비밀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역사가 오래된 가문에는 몇몇이 가보로 내려오고 있기도 했다.
“제 어머니께서 저에게 유품으로 남겨주신 것입니다.”
란델이 내민 건 확실히 황제의 외가인 레지오 후작 가문의 물건이 맞았다.
“유품?”
이제 황제의 목소리는 확연히 티가 나도록 떨리고 있었다. 옥좌의 팔걸이가 부서져라 꽉 붙잡은 손등엔 핏줄이 불거졌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아르비드의 눈에는 짙은 상실감이 감돌았다.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동요하실 정도로…….’
자신이 아바마마의 마음에 쏙 드는 아들이 아니란 건 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조금 더 과감한 성정의 군주가 되길 원하신다는 것도.
“무른 녀석 같으니……. 그런 마음가짐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저 귀족파 같은 놈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기만 할 뿐이야.”
“하지만 아바마마. 엄연히 국법이 있는데 절차에 따라 일을 해결하심이…….”
“쯧, 내가 당했던 일들을 너만은 겪지 않길 바라서 유일한 후계자로 만들었거늘.”
어느 순간부터는 권력에 더 욕심을 가지라고 은근히 부추기기도 하셨다. 자신이 베룸 공녀를 마음에 담았다는 걸 안 이후로는 더더욱.
“네 취향이 베룸 공녀인 줄은 몰랐구나. 아르비드, 권력이 무어라 생각하느냐?”
“그건…….”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힘이다. 그게 설령 그 사람의 뜻에 반하더라도.”
모두의 관심이 회중시계로 쏠린 모습을 여유 있게 바라보던 란델과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황제와 눈동자 색만 같은 게 아니었다. 그는 명백하게 제 아바마마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아르비드는 생전 처음으로 제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아바마마께서 어마마마와 혼인하시기 전이니, 엄밀히 말해서 완전한 사생아는 아냐.’
그 초조함을 눈치챘는지 란델의 얼굴엔 비웃는 듯한 기색이 슬쩍 지나갔다. 그러고는 금세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예, 저희 모자는 그동안 게롤드 후작령에서 지내왔습니다. 원체 약하신 분이라 저를 낳고 더 쇠약해진 몸으로…….”
그쯤에서 란델은 침통한 척 부러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향한 호의와 동정을 이끌어낼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직전, 베르길리우스 가문의 영애였다는 말과 함께 이걸 남겨주셨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연이었다. 황제의 옛 연인이 그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홀로 아이를 낳아 길러왔다는 이야기이니.
“마리에…….”
딸깍.
25년 만에 열어본 회중시계의 뚜껑이었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시계의 유리 표면 위에 그때와는 달리 회한 어린 표정이 비쳤다.
“그래, 이건 내 어머님께서 주신 가보가 맞다. 그리고 내가 베르길리우스 영애에게 준 것도 맞지.”
슬픈 얼굴을 가장한 채 경청하던 란델은 잠시 움찔했다.
‘베르길리우스 영애라니.’
자신의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를 연인을 가리키는 호칭으로는 퍽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과연, 제 숙부는 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의 목소리까지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이 자리에서 증명해 쐐기를 박는 게 낫겠군.’
란델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게롤드 후작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베르길리우스 영애를 그곳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끝내 알 수 없었을 방도가 하나 있었다.
잠깐의 혼란과 동요를 깔끔하게 지워낸 황제가 느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 가보가 자네의 신분을 보증해줄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렇지 않나? 베르길리우스 소남작.”
여전히 작게 경련하는 입가까지는 숨기지 못하면서.
‘아무리 마리에의 아이라고 해도, 이번에 귀족파를 제거하지 못하면…….’
황제의 시선이 새하얗게 질린 아르비드의 옆얼굴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한편, 어느새 훌륭하게 감정을 수습한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그렇지! 황제 폐하, 최고!’
역시 자신에게 테고 경과의 계약약혼을 팔아넘긴 분다웠다.
아이네가 알았던 원작 속의 란델은 제 아버지인 폐태자가 남겨준 유품으로 자신의 정체를 증명했다. 그러나 전략을 바꾼 지금 그건 무용지물이 되었을 테니까.
‘이대로면 내가 빙의자라는 걸 말하지 않고도 다 끝낼 수 있겠는데?’
그도 그럴 게 감히 거짓으로 황실을 기만한 죄로 란델은 물론이고, 남부의 귀족파까지도……!
그러나 아이네는 인생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걸 이번에도 뼈저리게 통감해야 했다.
“제가 증명하면 믿어주시겠습니까. ……폐하?”
마치 내키지 않는다는 듯 ‘폐하’라는 호칭은 그저 흘리듯이 덧붙였다.
“증명?”
아까까지 란델의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던 물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형형한 빛을 냈다.
그걸 보는 황제의 눈가가 설핏 찌푸려졌다.
‘저 눈, 어디서 보았더라.’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그때, 시종일관 느물대는 미소를 입가에 길게 걸고 있던 게롤드 후작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건방진 태도로 아르비드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태자 전하께서 착용하고 계신 저 아티팩트, 그거면 증명이 되지 않겠습니까.”
* * *
게롤드 후작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수많은 시선이 그대로 옮겨붙었다. 곧이어 아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술렁임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황제파, 귀족파 할 것 없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태자 전하의 아티팩트라면…….”
“그렇군. 황실의 직계인지 확실히 알 수 있겠는걸?”
“젠장, 그럼 이제 일이 어떻게 되는 거야?”
여기까지는 모든 게 란델과 게롤드 후작이 의도했던 반응이었다.
“쯧.”
그러나 란델의 얼굴에 마뜩잖은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의혹의 씨앗만 심어두어야 했다.
그리고 남은 축제기간 동안 미리 심어두었던 자들을 이용해 소문을 부풀리고 의혹을 키울 작정이었다.
그랬다면 혼란을 부추길 시간을 조금 더 끌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황제파 내부에서부터 천천히 균열이 일어나길 바랐건만.
계획이 틀어졌다.
자신과 제 측근 쪽에서 먼저 아티팩트를 이용하자고 말하는 건, 계산 밖의 일이다.
‘기왕이면 여론에 떠밀리듯 증명하는 편이 저들에게 타격이 컸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란델은 이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선 제가 어떤 이미지를 구축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욕심 없고 가여운 황제의 장자.
이제는 반란군의 무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황제파나 중립파를 자극하지 않는 한편, 자신의 편으로 돌리는 게 중요했다.
‘의외로 황제는 생각보다 침착하군. 역시 만만치가 않아.’
하지만 황태자의 동요는 티가 날 정도였다.
그의 시선이 아르비드에게 향했다. 처음 보는 제 사촌 동생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나는 죽음으로 몰아넣고, 제 자식은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웠나.’
제 아비만 한 기개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란델에게는 기회가 올 터.
실제로 아르비드는 자신이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당황했다.
아까부터 같은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증명하는 방법. 그리고 아티팩트.’
안 돼. 이건 내 것이다.
저도 모르게 제 오른손 중지를 움켜잡았다. 여태까지 당연하다는 듯 반지형 아티팩트를 끼고 있던 바로 그 위치였다.
기억도 하지 못할 때부터 제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다. 이 반지도, 황태자의 자리도 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곤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이러다가 황태자 책봉도 다시 이뤄지는 거 아냐?”
“글쎄, 일단은 두고 보자고.”
그렇게 연회장 안의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는 걸 보던 아이네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 어?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고는 바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원래라면 쓰지 않았을 제대로 된 증명법이다.
비록 지금은 베르길리우스 가문 출신인 척하지만 란델은 선황의 장남인 폐태자의 아들이다.
아르비드와 비교해도 진정한 의미의 직계에 가까웠으면 가까웠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만약 란델이 여기서 황족의 일원으로 인정이라도 받는다면…….
‘이게 어떤 의미에선 반란군으로 등장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거 아냐?’
그 어느 때건 황성에 드나들 수 있게 되는 거니까!
거기다가 저 남자는 폐하에게 원한이 있으니 더더욱 위험하다.
생각만으로도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식은땀이 솟았다.
‘내가 가짜라고 말해서 다들 저 남자가 기껏해야 방계일 거라고만 생각했을 텐데.’
케이어드도, 나딘도, 달리아까지도 의아한 표정일지언정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공녀, 뭔가 문제가 생긴 겁니까?”
걱정스레 자신을 내려다보는 테고 경을 제외하면.
‘와, 원래대로면 란델이라는 저 남자, 서른 살이잖아!’
도대체 누가 여섯 살이나 속여서 황제의 숨겨진 아들로 등장할 거라고 생각하냐고요.
그냥 넘어갈 거라곤 생각 안 했지만, 이건 정말 너무한 거 아냐?
아이네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사실, 생김새가 저렇게나 비슷하니 황실의 피가 흐르지 않을까 의심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의심이 곧 증거가 되지는 않는 법이다.
황족들이 대개 금발을 가진 건 맞지만 모든 금발이 황족인 건 아니었으니까.
‘여기 아이작 백작 부인도 금발이고. 트라인 후작도 흰머리가 많이 나서 그렇지, 어쨌든 금발인 것처럼.’
드물긴 해도 몇 세대를 건너 금발의 아이는 태어날 수 있다. 그 정도는 이곳 사람들에게도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상식이었다.
그러니 지금 너나 할 것 없이 품고 있는 의혹은 여전히 추측에 불과했다.
‘하지만 란델이 저 반지를 끼면…….’
그 추측이 사실이 되어버리는 거다. 이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지금 저 남자가 하려는 거……. 막아야 해요.”
“예?”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의심해도, 의혹으로만 남는 것과 확실하게 증명하는 건 엄연히 다르니까.
그런데, 무슨 수로 막지?
아이네는 급하게 제 곁에 선 테고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지금 이 상황을 덮을 만한 어그로가 뭐가 있을까요?”
“어그로? 그건 또 뭡니까.”
순식간에 훅 가까워진 거리에 붉어지려던 테고의 뺨이 미미하게 굳었다.
또다. 또 공녀는 별세계에서 살다 온 것처럼 낯선 단어를 쓴다.
“아이참, 사건은 더 큰 사건으로 덮는 게 정석이란 말이에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오는 테고를 보고 아이네는 잠시 나쁜 생각을 했다.
급한 대로 사냥대회에서처럼 입이라도 맞추면……. 안 되겠지?
‘아, 이건 아냐. 이젠 남자인 거 뻔히 알고, 날 좋아한다는 것도 아는데.’
방금 전의 생각은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독자였다면 이런 대책 없는 등장인물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줄 만한 생각이 아닌가.
역시 이건 기각!
아이네는 결국 입술을 굳게 다물고 결심했다. 증명을 할 땐 하더라도 일단 지금만큼은 안 된다.
‘진짜 베르길리우스 소남작도, 사라진 곡물들도 먼저 찾아야 해.’
그래, 빙의자라는 것만 안 들키면 되는 거다. 그 비밀에 비하면 ‘진실의 눈’을 가진 베룸의 발현자라고 밝히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어차피 여기 사람들은 다들 그게 뭔지 제대로 모르잖아. 심지어 무슨 예지 능력이라도 되는 줄 아는걸.’
그러니까, 케이어드만 모른 척 넘어가 준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이네는 테고의 옷을 바짝 잡아끌었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테고 경, 나 믿죠?”
지난달, 사냥대회에서 들었던 말과 꼭 같았다. 심지어 쓸데없이 결연한 표정과 꼬옥 쥔 작은 주먹까지.
악몽처럼 떠오르는 기시감에 테고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무슨…….”
그때, 앞으로 나서려는 아이네를 막은 건 케이어드였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뭐 하는 거야. 나가서 무슨 말을 하려고.”
“저 사람, 가짜이긴 해도 황실의 핏줄은 맞아요. 차라리 내가 나가서 베룸의 발현자라고 밝히려고요.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낫겠어요.”
“잠깐, 아이네!”
곁에 서 있던 나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저 남자가 뭐길래 아이네가 이렇게 다급히 나서는지……. 발현자로 밝혀진 후엔 다시는 예전의 평범한 베룸 공녀로 지낼 수 없을 게 뻔한데도.
여전히 아이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케이어드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모르는 게 다 있군. 황실의 핏줄 정도가 아니라 진짜 폐하의 자식이라고 해도 가만히 내버려두면 밝혀질 텐데, 왜…….”
아!
그러다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침음성을 냈다.
“설마? 저 녀석……. 낯이 익다 했더니 돌아가신 선황제 폐하와 똑같이 생겼잖아. 혹시 24년 전에 죽었다던 그 황손인가?”
“……맞아요.”
드디어 남자의 정체를 알아낸 케이어드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살아, 있었다고? 분명히 예전의 아이네는…….”
뒷말은 거의 속삭이듯이 낮아졌다. 거기까진 아직 이 자리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곁에 서 있는 테고의 귀에 그 이상한 뉘앙스가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뭐지, 저번부터 마치 다른 공녀를 아는 것처럼.’
잠시 생각에 잠겼던 케이어드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잘됐어. 황태자가 이미 끼었던 아티팩트를 저자도 낄 수 있다는 건, 저자가 가짜라는 더 확실한 증거가 될 테니까.”
“네? 왜요?”
아이네뿐 아니라 나딘도, 테고마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자 케이어드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제 오른쪽 귓불에 걸린 아티팩트를 가리켰다.
“이게 무슨 직계 감별용 마도구인 줄 알아? 그럴 거면 왜 대대로 후계자들에게만 전해지겠어.”
직계 중 발현자에게만 반응하는 아티팩트는 이 세계의 핵심 설정이었다. 그리고 제국 초기만 해도 발현자는 지금처럼 희귀하지만은 않았다.
“한 부모 아래 태어난 형제자매 중에 아티팩트를 착용할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야.”
케이어드가 턱짓으로 테고를 가리켰다.
“즉, 리테루온 공작이 지금 아티팩트를 끼고 있다는 건 여동생의 귀에는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다는 뜻이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테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라니엘이 열네 살이 되도록 아버지께서는 아티팩트에 대해 별다른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발현자가 아닌 이상 대개는 장자에게 물려주는 법인데, 이상하군. 쌍둥이라 뭔가가 달랐나?”
아티팩트가 발현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는 말에 테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튼 폐하도 똑같아. 정당한 승계가 아니라 반정으로 그 자리에 올랐어도 이 나라의 황제인 건 사실인데.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아티팩트를 착용하지 않으셨겠어.”
케이어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나딘이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이미 폐태자의 손을 탔기 때문이겠군요.”
“그래, 그러니 저자가 정말 폐하의 아들이라면 아티팩트를 손에 끼었을 때, 거부반응이 나타날 거야. 그러니 아르비드와는 아버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스스로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곧이어 케이어드의 시선이 테고에게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발현자를 언급하자 달라진 안색이 언뜻 보기에도 심상치가 않았다.
“아마 저자도 거기까진 모르고 있을걸. 이건 나처럼 정식으로 아티팩트를 넘겨받을 때, 후계자에게만 전해지는 사항이니까.”
그때,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달리아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렇다면 지금 그 사실을 아는 건 대공 각하와 폐하뿐 아닌가요? 저도 그랬지만 일단 아티팩트를 착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다들 황실의 직계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어? 그렇네요.”
“달리아 영애의 말대로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겐 결국 직계 감별기나 다름없겠군요.”
나딘과 아이네가 제 말에 맞장구를 쳐주자 달리아의 뺨이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베룸 공작 남매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서.
달리아를 향해 씩 웃어준 아이네가 이어 말했다.
“맞아요. 케이, 아니, 대공이 말씀하신 사실을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는 이상 결과는 같을 거예요.”
설령 그 사실을 알려서 황제의 아들이 아니란 게 밝혀진다 해도 황족 중 누구의 직계냐는 의문은 그대로 남을 게 뻔했다.
그에 깊은 한숨을 내쉬던 케이어드가 아이네의 등을 슥 밀었다.
“제길. 그렇다면 공녀가 무슨 말이든 해서 시간을 끌어 봐.”
뭐라고? 이 지옥의 주둥아리 대공이 또!
“아까는 가만히 있으라면서요!”
테고는 아이네의 등에 닿은 케이어드의 손가락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티격태격하려는 두 사람 사이로 슥 끼어들었다.
그래, 아까 공녀도 본디 사건은 더 큰 사건으로 덮는 법이라고 했으니.
“공녀, 날 믿습니까?”
“네?”
이번엔 아이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어쩐지 들어본 말인 거 같은데……. 이를테면 사냥대회라든가, 바로 조금 전이라든가.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니, 좋은 말 같더군요.”
테고가 제 가슴 언저리에 꽂힌 행커치프를 만지작거리며 옅은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아이네의 마음속엔 뭔지 모를 불안함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게 직진뿐인 남자가 좋은 명분까지 손에 쥐면 뭐다?
* * *
“폐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테고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뒤에 남겨진 아이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오빠, 역시 내가 발현자라고 밝히는 게 나았을 거 같지 않아?”
“그러게. 불안한데…….”
나딘의 뒤를 이어 케이어드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남 앞에 나서기는커녕 여태 연회엔 코빼기도 안 보이던 공작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다 멍한 표정의 아이네를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이 상황을 무마하겠다고 결혼 발표라도 터뜨리려는 건 아니겠지?”
“네에? 저희 아직 그런 사이 아닌데요?”
아이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 제가 했던 철없는 생각을 들킨 것만 같아 뜨끔했다.
요즘 그의 태도를 보아선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테고 경이 그렇게 막무가내인 성격은 아니니까.’
그러나 어쩐지 그 방법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한편, 게롤드 후작은 펄쩍 뛰며 목소리를 높이다 란델과 눈이 마주치곤 움찔했다. 란델이 냉랭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리테루온 공작! 이건 엄연히 황실의 일……! 큼, 크흠!”
헛기침을 하며 게롤드 후작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고대 일족의 후계자로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저희가 가진 아티팩트는 고작 직계를 감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지금껏 그렇게 쓰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선례를 남기셔서는 안 됩니다.”
테고를 바라보는 란델의 눈이 서늘하게 변했다.
이미 정해져 있다던 모든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건 저 젊은 공작 때문이었다.
란델은 불과 몇 달 전, 그날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 * *
“어서 도망치십시오, 전하. 공작이라는 그 단장 놈이 곧 여길 찾아낼 겁니다.”
유배 가던 여섯 살의 자신을 산적으로 가장해 구해낸 건 안톤이 이끄는 반란군이었다. 그렇게 꼬박 스물네 해를 그들 틈에서 살아왔다.
“이럴 리가 없는데, 자네도 들었잖아!”
란델은 안톤에게 건네받은 가방을 들고 망연히 서 있기만 했다.
“급해서 많이 넣지는 못했습니다. 금화 약간과 전하의 신분을 증명할 물건들만 넣어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안톤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목소리에 적개심과 분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 마녀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습니다. 경계 근처를 들락날락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결국 미쳐버린 겁니다.”
“하지만 여태까진 그 여자 말이 전부 맞았잖아.”
“그러니 더 악질인 게지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공자 쪽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아무리 발현자라고 해도 작위도 잇지 못하는 계집애 따위보다는……!”
란델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틀어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가 마리에 베르길리우스 남작 영애를 만난 건 겨우 열두 살 무렵이었다.
그때만 해도 세가 작았던 반란군 무리는 리테루온 산맥을 옮겨가며 이동했다. 감시와 추적을 피하기 위해 불가침 영역이라는 경계와 아슬아슬하게 붙어서.
그리고 어느 날, 경계 근처에서 허름한 차림으로 뱅뱅 맴돌기만 하는 여자 하나를 만났다.
“누구냐! 이 이상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걸 몰라?”
힘없이 뒤돌아선 여자가 란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진한 호박색 눈동자엔 생기가 돌다 못해 형형한 빛까지 떠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찾았다. 에스피오의 직계…….”
안톤의 말대로 처음엔 미친 여자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여자 혼자 깊은 산속을 헤매면서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으니까.
단 하나, 품 안에 소중하게 간직한 회중시계 말고는.
하지만 그 뒤로 그녀가 미래를 예지라도 한 듯 반란군이 위기를 넘기게 해주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여자는 자연스럽게 조직에 스며들었다.
명분으로 내세울 황손을 확보했다고는 하나 성공한다는 보장도, 기약도 없는 조직이었다. 위기를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하게 해주는 여자에게 의지하고 싶은 건 본능과도 같았다.
“다들 정신 차려! 미래를 본다는 게 말이 돼? 저건 마녀라고.”
그렇게 처음부터 싫은 기색을 내비친 안톤을 제외하곤 모두들 여자를 신뢰했다. 그건 어린 란델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베르길리우스 남작 가문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제국사의 제일 앞줄에 등장하는데.”
“모른다. 네 말대로 나는 겨우 여섯 살에 쫓겨난 폐태자의 아들이 아닌가.”
황궁에서의 시절은 어렴풋하게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유배길에 올라 반란군에 합류한 이후로는 겨우 배를 채우기도 급급한 생활을 해왔으니까.
란델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여자가 눈동자를 빛내며 웃었다. 그리고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고대 일족이 제국을 세우던 시기에도 존재했던 가문이지요. 인간으로서는 유일하게 그때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기도 했고요.”
“인간으로서……?”
“저희 가문 가장 깊은 곳에는 후계자만 볼 수 있는 그때의 기록이 있답니다.”
묵은 때를 말끔하게 씻어낸 여자는 제법 미색이 고왔다. 젊은 여자와는 처음 이야기를 나눠보는 란델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반란군 내부에서도 란델의 존재는 기밀이었기에 더더욱 그럴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아직 그가 어리다는 이유로 안톤과 반란군 수뇌들이 해주지 않은 뒷이야기를 마리에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는 달리 할아버님인 선황과 제 아버지인 폐태자가 마냥 선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사실까지.
“제가 정말로 전하의 미래를, 아니,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다면 믿어주실 건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짜 안톤의 말대로 마녀였어?”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그건 미래라고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벌써 몇 번이나 겪었던 과거라고?”
“제가 기억하기로는 세 번째지요.”
그러면서 그녀는 품 안에 손을 넣어 회중시계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흥미가 있으신가요?”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리테루온 공작가의 공녀가 홀로 살아남아 오빠인 공자인 척 남장을 한다든지.
결국엔 그녀가 란델을 죽음으로 이끄는 건 물론이고,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다든지.
“그 마리에라는 여자 말대로 공작가 마차가 출발하긴 했는데, 방향이 조금 다른뎁쇼. 그리고 그 마차에는 공자가 아니라 공녀가 타고 있다고 합니다.”
“뭐? 흠, 차라리 잘됐군. 일족의 땅 언저리면 몰라도 상투아리움 안까지 우리가 들어갈 순 없으니까. 깨끗하게 처리해.”
희귀한 발현자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오빠가 살았으니, 이번엔 미래가 달라져야 했다. 그랬는데…….
“일단 전하께서 살아계셔야 뒷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아버님의 수하였던 게롤드 후작을 찾아가십시오!”
“안톤……!”
연합왕국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려던 계획은 완전히 백지로 돌아갔다.
테고 리테루온 공작의 기습으로 뜻밖에도 반란군 조직이 전부 와해된 탓이다.
인간이라면 최소한의 잠과 휴식은 필요할 거라며 그를 과소평가한 게 패착이었다.
란델은 제2기사단의 추격을 따돌리자마자 서둘러 게롤드 후작을 찾아갔다.
“아니, 조부이신 선황 폐하를 정말로 빼닮으셨군요. 제게 굳이 태자 전하의 유품을 보여주지 않으셨더라도 전 믿었을 겁니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그쯤 하고, 반란군에 지원하려던 곡물은 어떻게 됐나.”
잘 관리된 콧수염을 과장되게 들썩이던 게롤드 후작에게 란델은 차갑게 일갈했다.
“그, 그걸 어떻게…….”
남부 귀족파의 수장이자 제 아버지의 수족이었다 해도 믿을 만한 작자는 아니었다.
24년 전, 진실로 자신을 끝까지 지키려는 마음을 먹었다면 제 것이라 알려진 유해 정도는 확인했어야 했다. 서슬 퍼런 현 황제의 불똥이 튈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겠지.
‘어차피 나도 내 자리를 찾기 위해 저자를 이용하려는 것뿐이야.’
그렇게 폐태자의 아들이자 ‘란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계획을 세워야 했다.
마리에가 회중시계를 얻으려 황제에게 접근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떠올리지 못했을 방법이었다.
처음에야 썩 내키진 않았지만 제가 황제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내세우는 이 방법 외엔 도리가 없었다.
“대단하십니다, 전하! 이런 계획을……! 역시 황좌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막상 계획을 세우고 나니 이야기는 술술 만들어졌다.
황제가 핍박받던 막내 황자 시절, 묵묵히 그 곁을 지킨 변방의 남작 영애.
그러나 반정에 성공하자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공작 영애와 정략결혼을 하고 변심한 황제. 그렇게 버려진 옛 연인.
거기에 란델은 조금 더 극적인 서사를 보태어 지어냈다.
남작 영애는 아이까지 가지고도 황제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 정체를 숨기고 홀로 길러왔으며.
그러던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제 아이에게 유언을 남긴 것으로.
“하지만 전하, 이 경우에 실제 마리에 영애 본인이 나타나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후작,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죽은 자가 어찌 말을 할 수 있겠어.”
“그럼, 이 회중시계는…….”
* * *
짧은 회상을 마친 란델은 황제의 손에 들린 회중시계에 시선을 주었다. 마침 절묘하게도 황제가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곳은 마지막까지 핏자국이 잘 닦이지 않던 부분이었다.
“일족의 후예인 리테루온 공작이 아티팩트는 직계 감별 마도구가 아니라고 하는군, 게롤드 후작. 어떻게 생각하지?”
“하,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증명을……!”
처음부터 게롤드 후작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던 테고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 주군이자 대부이신 폐하께 미리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테고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긴장한 채 주먹을 쥐었다 펴기만 반복했다. 그 손으로 황제의 눈길이 가닿았다.
한쪽 구석에서 저들끼리 모의한 결과가 이것이었나.
‘아르비드를 도우려고? 아니면 이제 와서 황태자가 바뀌면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까 걱정이 되어서?’
황제는 갑자기 끼어든 테고의 의중을 짐작해보았다. 저들의 부모가 제 반정을 도왔던 이유도 그랬으니까.
처음엔 마리에의 이름에 흔들린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황제도 이내 베르길리우스 소남작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버지 선황과 닮은 외모에 작은 눈물점.
거기에 대여섯 살짜리 어린애가 보이기엔 유달리 표독스러웠던 눈빛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어디서 어설프게 직계만 아티팩트를 착용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와서는…….’
황제는 란델이든 게롤드 후작이든 이대로 두고 볼 생각이었다. 차라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황손을 귀족파에서 빼돌려 숨겨두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거야말로 반역으로 한데 모아서 처리하기 쉬울 테니까.’
이미 모두가 황성 안에 들어와 갇힌 상태나 마찬가지다. 언제 증명을 하든 그건 시기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황제는 한껏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내 대자로서의 부탁이라니, 무슨 이야기일지 짐작이 가긴 하지만……. 어디 말해보거라.”
슬쩍 뒤로 고개를 돌려 아이네와 눈을 마주한 테고는 황제를 향해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에스피오 황실의 일족의 땅, 그곳을 제게 개방해주십시오.”
아하, 지금 이 상황에서 시간을 끌어보겠다?
저들 중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저 ‘가짜’ 소남작의 정체를 눈치챈 이가 있는 듯했다. 그리고 황제의 시선이 곧바로 아이네에게 향했다.
‘역시 베룸 일족인가.’
저 아이들의 아비인 나타니엘도 가끔 남들은 모르는 걸 아는 기색을 보일 때가 있었으니까.
“그래, 아티팩트는 황태자의 상징인데 아무에게나 끼워줄 수야 없지. 그래서 직계만 들어갈 수 있는 상투아리움에 들어가는 걸로 증명을 하려고?”
“예, 그리고…….”
테고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제 약혼자이자 베룸 일족인 공녀의 동행을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그의 대부로서 베룸 공작을 대신 설득해달라는 뜻일 거고.
“아아,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는 또 공녀와의 결혼이라도 허락해달라는 줄 알았네만.”
황제의 말에 테고의 얼굴이 터질듯이 붉어졌다. 그 방법까지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스캔들이야말로 여러 사안을 덮기엔 제격이니까. 덤으로 제 사욕도 채울 수 있고.
‘하지만 아직 공녀의 허락은커녕, 마음도 얻지 못했는데. 아직 거기까진…….’
그때, 잠시 물러나 있던 란델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외람되오나 폐하, 베룸 공녀가 저에 대한 증명을 위해 동행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닙니까?”
“이유?”
“아이네이스 베룸 공녀는 베룸의 발현자이니까요.”
“뭐?”
황제가 회중시계를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란을 주려고 거짓을 고한다기엔 테고, 그리고 한쪽에 서있는 케이어드와 나딘, 아이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심지어 아르비드까지.
‘내게 여태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어?’
그리고 그걸 알아챈 순간, 황제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게 사실이냐, 테고 리테루온.”
* * *
아이네는 이번에야말로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악역이 악역 했네.’
역시 악역이다. 내용이며, 타이밍까지 완벽했다.
그의 손에 쥐어지는 악역 합격 목걸이…….
아니, 그보다 어떻게 알았지?
게다가 발현자에 대한 모두의 반응이 달라졌다.
“발현자? 베룸 공녀가 발현자라고?”
“그 진실의 눈인지 하는 능력 말하는 거야?”
트라인 후작가에서처럼 머뭇거리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법에서라도 풀려난 듯이 여기저기서 자신들이 아는 바에 대해 말을 늘어놓았다.
‘주요 인물이 아니라면 다들 딱 내가 아는 만큼씩만 알게 되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주요 인물이라기보단 아티팩트와 관련 있는 일족의 직계들이라고 편이 맞았다.
주요 인물이었던 달리아 영애는 아까 아이네의 입에서 ‘발현자’라는 말이 나온 이후로 내내 혼란스러운 얼굴이니까.
“공녀님? 아까부터 무슨 이야기인지 저는 잘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달리아 영애?”
“지금은 또 제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도대체…….”
주위를 둘러보니 나딘과 케이어드는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상한 거야? 아니면 갑자기 이러는 저 사람들이 이상한 거야.”
달리아의 발언과 나딘의 중얼거림을 곱씹어 보던 케이어드는 무언가 눈치챈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고대 일족과 관련된 일이야. 같은 일족의 직계들은 영향을 안 받는 걸 보면.”
그러고는 아이네를 향해 잔뜩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와 ‘시그노’, 그리고 고대 일족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 거야?”
그걸 다들 있는 자리에서 물어보면 잘도 대답하겠다.
아이네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멍청한 표정을 보니, 지금 이 상황도 ‘기억’에 포함된 건 아닌 듯하군.”
저, 저 주둥이를 진짜!
기억? 그런 건 진작에 다 틀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혹시, 혹시 말이에요. 고대 일족이라는 존재를 만나본 적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발현자라고 해도 ‘진실의 눈’을 갖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래도 경계 너머 숲에서 만났던 존재, 시그노에게 가 봐야 할 거 같아서 그래요. 지금 당장.”
이제 케이어드는 숫제 아이네를 이상한 사람 보듯 했다.
“경계를 넘었다고? 숲은 또 뭐야.”
“못 믿겠다면 여기 나딘이나 테고 경에게 확인해보아도 좋아요.”
케이어드의 의아한 시선에 나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네의 말이 맞습니다. 베룸의 경계는 다른 곳과 달리 살아있으니까요.”
“너희, 이렇게 중요한 일을 숨기고 있었다고……?”
경악해 마지않는 케이어드를 뒤로한 아이네는 란델을 노려보았다.
‘저 남자는 나랑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거야.’
시그노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테다. 하지만 제게는 알려줄 수 없었을 뿐.
아이네는 그제야 시그노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 것 같았다.
[불행히도 나는 신이 아니지요. 나 역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하고요. 그래서 ‘법칙’을 벗어나는 질문에는 답해줄 수 없어요.]
[이 모든 건 당신이 무언가에 대해 의심하고, 인식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가능성이거든요.]
그리고 처음부터 자꾸만 저더러 변수라고 했던 말까지도.
[당신이 내 ‘변수’니까요.]
뒤늦게 끼워 넣어진 듯한 베룸의 시그노만 제외하고, 나머지 고대의 일족 셋은 전부 사라졌다. 거기에 베룸의 숲과는 달리 주인을 잃은 것처럼 온통 회색 안개로 가득한 불투명한 경계들.
‘결국 나라는 존재가 아니었으면 이 다음 전개를 바꿀 수 없는 데다 시그노도 위험해졌을 거야.’
일단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면 그 영향력과 법칙에 얽매이게 될 테니까.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가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나에겐 이게 마지막 기회예요. 이 지긋지긋한 세계도.]
그때는 수수께끼 선문답 같다고 생각했던 말들이었다. 세 번째 겪는 기회라는 말과 사라진 고대의 존재 셋.
이번에 시그노에게 묻는다면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의심하고 인식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한편, 황제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테고 때문에 웅성이는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그러면……, 리테루온 공작가에서 발현자를 독점하려 했다는 건가?”
“일단은 베룸 공작가가 더 잘못인 거 아니겠소? 가문에 발현자가 나왔는데도 황실에 숨긴 것 아니오.”
신이 없는 이 세계에선 종교나 신전이 들어서지 않았다. 그렇게 건국 이후 제국인들의 정신적 지주는 줄곧 고대 일족이라는 초월적 존재였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요직에 책임자를 임명할 때도 일족의 가문을 가장 먼저 고려했다.
세뇌에 가깝도록 당연하게 여겨지던 굳건한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고작 란델의 말 한마디로부터.
“하긴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가. 이젠 그때처럼 발현자가 나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산맥의 경계도 그래. 우리 증조부님 윗세대에선 마물이 나온단 기록 따위 없었다고!”
“이제 일족의 직계 중에 발현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핏줄이 흐려질 대로 흐려졌다는 뜻 아닌가.”
작은 균열과 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의 견고한 벽에 구멍이 생기자 그 뒤는 걷잡을 수 없었다.
다들 정해진 역할에서 벗어난 듯 제각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한 꺼풀 막의 안쪽 깊숙하게 눌려있던 의문과 불신이 연회장 홀 안을 휩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란델은 이제 빙글거리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마리에의 말이 맞았다. 이 세계의 주축을 전부 무너뜨린다면, 바꿀 수 있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원래는 황자로 인정받고 터뜨리려 했던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제례도 사라진 지 오래되어 폐쇄되다시피 한 에스피오 일족의 성지. 그곳으로 저를 보내려는 황제의 의도가 투명하게 느껴졌다. 잠깐 시간을 끈 후 자신과 남부를 엮어 황도 밖에서 처리하려는 속셈이겠지.
그렇게 나온다면 자신도 손 놓고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란델의 눈길이 황제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회중시계로 가 닿았다.
말이 되는가. 각자에게 이미 정해진 결말과 운명이 존재한다는 게.
그것도 누구보다 정당한 혈통인 자신이 한낱 반역자가 되어 비참하게 죽을 운명으로 예정되어 있다면.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다.
‘마리에는 그 고대 일족이란 것들을 만나 이곳의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 듯하지만.’
란델은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두세 번 반복되는 동안 점차 약해지는 최초와의 고리.
늘 똑같은 과정과 결말로 이어지다 이번 세계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베룸 공녀라는 존재.
베르길리우스 가문의 지하에 보관된 마법 고서를 보고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거기엔 지금껏 세 번이나 되돌아온 기록이 고스란히 존재했다.
제 죽음으로 끝을 맺는 게 여태껏 반복된 이 빌어먹을 세계의 결말이라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짐작대로라면 이제 하나 남은 고대 일족은 베룸에 있을 테다. 그것만 처리한다면 이 세계는 온전히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저 시계만 되찾아서 그 일족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어느새 연단에서 내려온 황제가 란델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한없이 낮아진 목소리로 조용히 뇌까렸다.
“너, 단순히 황좌를 노리는 게 아니군.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
“역시 눈치채셨군요. 오랜만입니다.”
숙부.
싱긋 웃는 모습에서 황제는 25년 만에 제 형의 얼굴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