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란델은 선택했다
아무리 인생은 실전이고, 정해진 전개에서 벗어난 미래는 미지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냐?
흔들림 없이 달리는 마차 안에서 아이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가 베룸으로 돌아가서 경계의 숲에 가야 된다고 다짐한 건 맞는데.’
구 원작의 최종 악역인 란델과 같이 가겠단 소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영지로 향하는 일행마저 아이네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일주일 전, 건국 기념일 연회는 그야말로 혼돈 속에 마무리되었다.
그저 머릿수만 채우는 주변인에서 스스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된 이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냈으니까.
“듣자 하니 베룸은 다른 곳과 다르게 마물이 나오지 않는다지요?”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묻는 란델의 시선이 아이네에게로 꽂혔다.
“본디 고대 일족의 수호로 경계가 생기고 마물이 넘어오지 못하게 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베룸은 영지의 결계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걸 꼭꼭 숨겨왔더군요. 이것 역시 폐하께 알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마치 베룸 혼자서만 고대 일족의 축복을 독차지한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안 그래도 근래에 새 도로를 정비하고 디도 상단을 이용하기 시작한 베룸이었다. 이전 같으면 그저 넘겼을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국 전체에 손을 뻗는 베룸을 다른 귀족들이 서서히 경계하기 시작했다.
“제가 황실의 정당한 직계임을 증명하려면 폐쇄된 지 오래인 에스피오 상투아리움이 아니라…….”
처연한 얼굴로 과거를 읊던 때와는 달리 여유 있는 얼굴이 된 란델에게로 시선이 모여들었다.
“아직 경계가 제 기능을 하는 베룸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국 대부분의 귀족들이 모인 건 확실히 양날의 검이었다. 게다가 이제 그들은 생각 없이 주요 인물들에게 호응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더불어 황제마저도 이 모든 상황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면 더더욱.
발현자인 아이네의 존재를 숨겼다는 것에서부터 경계에 관련된 일까지.
아무리 절친했던 친우의 가문이라고 해도 황제는 황제였다. 자신에게 중대한 비밀을 숨겼다는 데에 일말의 불쾌함을 갖는 건 당연했다.
‘왜 여태 베룸 일족만 다르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을까.’
소설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게 했던 영향력은 온데간데없었다.
“……자치권이 있다 한들 베룸 역시 제국의 일부다. 이 건에 대해서는 베르길리우스 소남작의 의견을 중히 고려하도록 하지.”
그리하여 베룸으로 향하게 된 건 아이네와 란델, 황제의 직속인 제1기사단뿐이었다.
“폐하, 그렇다면 저 역시도 아이네와 동행을…….”
“베룸 공자는 황실에 남아서 조사 결과를 듣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리고 약혼자인 리테루온 공작도 마찬가지.”
“…….”
밉살스럽긴 해도 든든하게 아이네의 뒤를 받쳐주던 나딘, 유사시에 아이네를 지켜줄 수 있는 테고까지 사실상 인질이 된 셈이다.
그리고 아이네에게 닥쳐온 위기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베룸 입성을 코앞에 두고 잠시 쉬어가기 위해 멈춘 사이, 란델이 그녀에게 접근해 속내를 드러냈다.
“공녀는 궁금하지 않나? 원래는 이미 죽었을 운명이라는 게 과연 뭔지. 듣고 나면 분해질 텐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아이네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실은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이 모든 걸 알았는지 묻고 싶었다.
“아, 이미 알고 있었군. 그래, 고대의 존재가 말해주던가? 이 세계는 만들어진 세계라고.”
그는 아직 아이네가 죽었어야 할 원래의 베룸 공녀라고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 말을 차마 이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책 속이란 걸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어? 어떻게……?’
란델이 책빙의자인 자신만큼이나 많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 * *
유난히 크고 동그란 아이네의 눈을 힐끔 바라본 란델이 덧붙여 말했다.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는 데다 제 취향이 아니라 그렇지, 공녀는 확실히 눈에 띄는 타입이었다.
“공녀는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 편인 걸 모르나?”
“…….”
모를 리가.
‘요즘은 그 둔한 테고 경도 내 생각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단검 찬스 한 번 더 쓰고 기절해 있는 게 나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표정을 굳힌 아이네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책 속 인물인 주제에 어떻게 아는 게 많은지 몰라도 더 이상의 정보를 줄 필요는 없으니까.
“적어도 베룸에 도착하기 전엔 내게 먼저 물으러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러질 않더군.”
사실 궁금했다.
그러나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란델의 말에 동조할 뻔한 자신을 빠르게 단속했다.
‘아냐, 하나도 안 궁금해! 이런 악역이 하는 말 따위…….’
제 얼굴이 생각을 읽기 쉬워 보여서 이런 식으로 툭툭 질문만 던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 변화까지도 고스란히 눈에 보인다는 듯 란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원래대로면 반란으로 죽는 운명일 내가 이름을 버리고 돌아온 게.”
하지만 이쯤 되자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 뭐가 원래대로인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바라던 대로 아이네의 반응을 이끌어낸 란델이 주위를 살폈다.
“봤으니까.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똑같이 반복되더군. 왜 마리에가 반쯤 미쳤었는지 알겠어.”
봤다고? 그리고 반복은 또 뭐며, 마리에 영애가 미쳤다는 건 무슨 뜻이지.
황제에게 접근하려는 명분 용도 이상으로는 마리에 영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마리에 영애는 정말로 황제의 첫사랑 역할, 딱 거기까지였으니까.
“원작……이라도 봤다는 거예요?”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딘가에 숨겨진 원작을 보고 책 속 세계인 걸 깨닫는 클리셰는 꽤 흔한 편이다. 지금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아이네의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그렇다기엔 란델의 개입은 너무 늦은 감이 있어서.
‘라니엘이 나왔던 그 소설이라면 벌써 결말 부분이라고.’
그러고 보니 마리에 영애를 호칭도 없이 그저 이름으로만 부르는 것도 뭔가 수상했다.
“원작이라……. 그래, 아무리 용을 써도 바뀌지 않는 내 운명이 이번에 달라진 이유는 단 하나더군.”
란델의 길쭉한 손가락이 아이네의 얼굴 앞에서 바로 멈춰 섰다.
“바로 공녀, 당신이라는 존재 때문이지.”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울분에 얼룩진 분노로 천천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 길고 지루한 내용을 나는 처음부터 다 읽었어. 정해져 있던 대로 리테루온 공자 쪽이 아니라. 그저 여동생이 죽어서가 아니야. 왜 원래대로 공자가 죽지 않았는지 아나?”
란델이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아이네의 희게 질린 얼굴과 더 크게 뜨인 눈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죽었어야 할 네가 죽지 않아서.”
주어진 휴식시간이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란델은 쐐기를 박았다.
“테고 리테루온은 원래 네 장례식에 참석하다가 죽을 운명이었거든.”
“……!”
충격에 빠진 아이네를 보며, 란델이 흐리게 웃었다. 그 바람에 그의 가늘어진 눈매 아래의 눈물점이 도드라졌다.
그나저나 원작이라…….
‘마리에가 아주 미친 건 아니었군.’
* * *
공작성에 도착한 아이네와 란델 일행은 제1기사단의 삼엄한 경비 속에 별관으로 안내되었다.
“제르, 아니, 폐하께서 그러셨단 말이오? 내가 내 딸도 못 보다니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소. 폐하의 이름으로 자치권을 보장하신 베룸 영지이니 여기에선 내 의사가 먼저인 걸 모르는가?”
아이네의 아버지인 베룸 공작이 기사단장을 향해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더는 분노를 참을 이유가 없었다.
마침 공작부인은 퉁퉁 부은 눈으로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본관 안으로 들어갔으니.
그럼에도 제1기사단장은 딱딱하게 대꾸했다.
“각하께서는 공녀가 발현자인 걸 알고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이 건은 자치권 영역 밖의 일입니다. 공작께서도 추후에 황도로 직접 오셔서 해명하셔야 할 겁니다.”
공작의 으름장에도 기사단장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앞을 막아서기만 했다.
‘직접’ 황도로 와야 한다는 말에 베룸 공작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연기고, 어디까지가 진짜인 거야. 뭐 이리 돌덩이 같은 녀석을 보냈어.’
꽉 막힌 듯 융통성 없는 단장 앞에서 베룸 공작은 이마를 짚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건의로 선발된 기사단장이다.
제1기사단장은 고대 일족이나 작위와도 상관없이 순수하게 실력으로만 뽑힌 황제의 사람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건의로 그리 선발했다.
제 나름대로는 반란이 일어날 미래에 대해 알리지 못하는 대신, 친우가 무사하길 바랐던 걱정과 염려의 발로였건만.
‘아무리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어야 한다고는 해도…….’
베룸 공작의 마음 한구석에는 일말의 불안감이 내내 자리를 차지했다.
며칠 전, 마법 통신구로 황제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일단은 루체가 시키는 대로 해. 대충 화난 척 구색만 맞춰주고.]
[뭘 어쩌려고 그래. 내 딸의 안전이 걸린 문제야.]
[이쪽도 황실의 존엄이 걸린 문제다. 그저 무시하고 넘어갈 순 없어.]
그리고 망설이듯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마법 통신구는 황제의 메시지를 다시 비추었다.
[이상해. 여태 고분고분하던 황제파도 목소리를 낸단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베룸 공작도 황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그건 자신이 아이네를 통해 보았던 미래와는 확실히 달랐다.
반란은 일어나지 않고, 난데없이 마리에의 아들이라는 남자가 나타나고. 거기다 그자의 폭로로 나딘과 테고는 황성에 묶여 있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역시도 황제의 제안 외에 뾰족한 수를 내진 못했다. 그래서 기사단장 루체뿐 아니라 모두가 듣도록 더욱 큰 목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독도 풀지 못하고 당장 이틀 뒤에 경계의 숲으로 향한다니. 내 딸아이는 몸이 약하단 말일세!”
도저히 연기라고는 볼 수 없는 공작의 진지한 표정에 제1기사단원들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우리 아이네가 이걸 들으면 불안해할 텐데.’
마차에서 내리며 휘청거리던 아이네의 모습이 공작의 머릿속에 계속 잔상으로 남았다. 그리고 다른 마차에서 내리던 베르길리우스 소남작이라는 남자는…….
‘그래, 확실히 그자야. 미래에서 반란군을 이끌고 황성을 짓밟았던 자. 폐태자의 아들.’
그런 위험한 자와 제 딸을 경계 안으로 함께 들여보내라니.
어느 순간, ‘진실의 눈’과 ‘발현자’라는 말에 걸려있던 법칙과도 같은 금제가 풀렸다. 그 말은 아이네도 이제 모든 걸 알았다는 뜻이다.
베룸 공작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아, 정말.”
몇 달 전, 약혼 때와 마찬가지로 제르에게 말리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역시 필요한 방법인 건 맞았다.
* * *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일주일이나 걸린 마차 이동으로 아이네는 이틀 내내 앓아야 했다.
‘생각도 못 했어. 나 때문에 라니엘이 죽었을 거라고는…….’
어쩐지 왜 하필 자신이 빙의한 게 8년 전인가 의아했었다. 원작이 시작되기도 전인 그 시기에 빙의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제1기사단의 감시와 호위 속에 숲으로 향하는 마차에 탄 아이네는 창문 너머로 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했다.
유사시에 대비해 공작가의 기사단과 함께 멀찍이서 따라오는 것은 허락된 모양이었다.
‘만약 정말로 원작이라는 게 있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걸 볼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이네가 끙끙 앓았던 건 기실 그 이유 탓이 가장 컸다. 물론 반복된다는 말에 대해선 아직 의문이 남긴 했다.
그러나 란델의 말이 진실이라면 이곳 사람들도 읽을 수 있는 기록이 있는 거다. 그건 아이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원작에선 죽어야 했던 아이네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럼, 내 존재를 의심하게 되실 거고. 내가 빙의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파국이다.
테고 경이나 케이어드 대공에게 밝히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이기적인 걱정이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라니엘과 테고의 엇갈린 운명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워워!”
푸르릉-
이전에 테고와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기사들과 마차의 말이 일제히 멈춰 섰다.
그리고 바깥에선 제1기사단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허, 세상에…….”
“소남작의 말이 정말이었군.”
“왜 베룸의 경계는 살아있다고 했는지 알겠어.”
직접 눈으로 보자 란델의 말이 옳았다. 그걸 알게 된 황실 기사들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 찼다.
베룸은 건국 때부터 단 한 번도 황실을 배신한 적 없었다. 그렇기에 후계자도 아닌 공녀의 발현 여부를 숨긴 이유를 모두가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발현자의 명맥이 끊긴 후, 고대 일족의 위상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다른 영지와 이어진 회색 경계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예전과 다르게 종종 마물이 출몰하는 골치 아픈 지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뿐.
“어떻게 이런 공간이 존재할 수가…….”
절로 경외감이 드는 광경에 들썩이는 그들을 제지한 건 단장인 루체였다.
“다들 조용히 하라.”
무표정한 낯의 단장이 제 말을 진정시키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고는 손수 마차 문을 열어 아이네에게 손을 뻗었다.
모두가 경계 너머에 정신이 팔린 지금이 적기였다. 단 한 번도 아이네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루체의 입이 열렸다.
“폐하께서 보내신 전언입니다, 공녀님.”
“예?”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잔뜩 위축되어 있던 아이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냉랭한 얼굴에 이상하게 자꾸 눈길이 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제야 뺨에 난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응? 이 상처라면…….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기사단장이지?’
란델이 황궁을 점령했을 때, 황제의 최측근 호위였던 남자인 듯했다.
조연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만큼 짧게 등장한 인물이지만 외양 묘사는 꽤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분명 신분 문제로 단장 자리까지 오르기는 힘들었을 텐데…….
“어?”
그 순간, 아이네는 새로운 깨달음으로 몸을 떨었다.
그래, 이제는 정말로 인정해야 했다.
그녀가 알던 세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걸. 원작의 전개와 다르게 바뀐 건 주요 인물의 서사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아이네가 모르는 사이에 더 많은 사람들의 운명과 미래 자체가 달라진 거다.
란델의 말대로였다.
‘그러면, 여기는 이제 정말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닌 거네.’
지나치게 빤히 바라보는 아이네와 눈을 마주한 루체는 슬쩍 시선을 비껴 내렸다. 동시에 빠르게 읊조렸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경계를 넘는 것이 실종으로 이어지는 건,’”
“……실종?”
마른침을 삼키며 아이네가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러자 무감해 보이던 기사의 얼굴이 살짝 무너졌다.
마차에서 내리는 레이디를 위한 가벼운 접촉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접촉만으로도 루체는 알았다. 이 공녀의 몸은 육체적 단련이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걸.
손바닥 위에 닿은 공녀의 손이 너무 작고 연약하게 느껴져서다.
그러나 티내지 않고 마저 말을 이었다.
“……‘제법 흔한 일이 아닌가. 조금만 기다리면 네게 제일 필요한 사람을 보내주마.’”
루체는 말을 끝맺고 나서야 가까스로 표정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서는 흔치 않은 ‘생각’이란 걸 했다.
다들 아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속뜻은 공녀더러 함께 온 남자를 어떻게든 처리하라는 게 분명했다.
늘 폐하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요즘은 더 그랬다.
연회장에서는 그렇게 화를 내시더니……. 베룸으로 출발하기 직전에는 다시 평소처럼 여유롭게 웃는 모습으로 돌아와 계셨다.
“베룸 공작에게는 이미 말을 해두긴 했는데. 흠, 역시 공녀에게는 경계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전하도록 해.”
“예.”
“그리고 그전까지 공녀와는 되도록 말을 섞지 말고.”
“예?”
“이유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사람을 방심하게 만드는 면이 있거든. 거기다 그 아이는 생각하는 게 얼굴에 전부 드러나서.”
아이네에게 전언을 말하면서도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서 단언하셔서 발현자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연약한 영애가 아닌가.’
이렇게 자그마한 공녀가 어떻게 황제의 명을 따를 수 있는지.
하지만 그의 이성과 달리 마음은 아까부터 정체 모를 기대감에 들뜨고 있었다.
그건 베룸 영지에 들어와 경계에 다가갈수록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녀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줄 거란 막연한 기대감.
그때, 황제의 전언을 가만히 곱씹던 아이네가 대뜸 루체에게 물었다.
“저기, 그런데요. 제게 제일 필요한 사람이 누구죠?”
“……저는 그저 폐하의 손발일 따름입니다.”
그의 대답에 아이네의 눈매가 살풋 가늘어졌다. 과연 원작에서 폐하의 곁을 지키다 묵묵히 최후를 맞았던 인물다웠다.
그림자 호위 시절도 그렇고, 그는 기사단장이 되었어도 주군의 명에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인 거다.
루체의 에스코트로 마차에서 내린 그녀의 시선이 란델에게로 향했다.
‘똑같이 악역이 될 운명이었지만 달리아 영애와 란델은 다른 거야.’
제 존재로 각 인물들의 운명과 환경이 달라졌다고 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는 법이다.
가령, 타고난 성격이나 욕망이라든지.
하지만 달리아 영애는 같은 환경이 주어졌어도 정해진 운명을 스스로 벗어났다.
그러면, 저 남자의 운명은…….
아이네는 문득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결국엔 그녀가 또다시 선택하게 될 순간이 올 거란 예감이 들었다.
* * *
“그럼, 저희는 이곳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대공께서 말씀하시길 진정한 직계라면 경계 안에서 한 시간 이상 버틸 수 있는 것으로 증명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저희 모두가 그 증인이 될 것입니다.”
경계 앞에 선 루체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면서 그의 시선은 단원들의 얼굴과 기색을 낱낱이 살폈다.
“차출 인원은 따로 고르지 말고, 전부 데려가도록.”
“예, 폐하.”
폐하의 명을 따라 인솔해 온 이들이었다. 내부에서 보고 들은 바를 옮길 자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리고…… 몰래 다른 이들과 연락을 주고 받더라도 일단은 모른 척 해.”
“……예, 폐하.”
시시때때로 전서구가 오고 갔지만, 폐하의 명에 따라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직접 전해듣고 알아서 몸을 사린다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을테니까.
준비는 모두 끝났다. 폐하의 말씀대로 이제 나머지는 공녀에게 달린 일이다.
한편, 란델과 함께 경계를 향해 걸어가던 아이네의 발걸음이 잠시 멎었다.
잠깐만, 방금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한 시간?”
그러고는 한쪽 눈썹이 들려 올라갔다.
한 시간 이상 머무는 것으로 증명해야 한다니. 금시초문이었다.
‘애초에 직계는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가……. 아!’
이젠 그저 배경에 불과했던 설정 써먹기가 낯설지 않을 지경이다.
애초에 경계가 존재했던 것도 후반부를 위한 설정이었으니까. 란델이 황실의 직계이자 폐태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소설에서 경계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뿐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경계는 직계라 해서 깊숙하게 들어가거나 한 시간이나 버틸 수 있는 공간은 절대 아니었다.
예외는 오로지 발현자뿐이었다. 소설 속의 라니엘과 지금의 아이네, 단 두 사람.
나딘도, 테고도 직계였지만 깊이 들어간 어느 시점부터는 괴로워했으니까.
‘이것도 직계 중 제대로 작위를 승계한 대공, 그리고 나만 아는 일이야.’
발현자와 닿으면 괜찮다는 걸 알아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나딘을 보고 놀란 아이네가 손을 잡아보고 알았을 뿐.
심지어 케이어드도 이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을 터였다.
아이네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까 황제가 제게 남긴 말이 이해되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오두막 안쪽으로 유인했다가 그대로 뛰쳐나오면 되는 거겠지?’
그래서 베룸의 경계로 향하는 걸 허락하신 데다 굳이 ‘실종’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신 거구나.
‘역시, 황제 폐하는 계획이 다 있었어.’
그 자리에서 섣부르게 무마하려 들기보다는 정면돌파를 선택하신 거다.
작정하고 있던 남부의 귀족파는 물론,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던 중립파와 황제파까지도 염두에 둔 거겠지.
아이네의 얼굴이 희망으로 조금 밝아지자 란델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마차에서 내리고 나서부터 갑자기 달라진 공녀의 모습.
“발현자가 아닌 이상은 직계라고 해도 경계의 입구까지밖에 들어갈 수 없다고 나와 있던데. 한 시간이라니……. 순순히 내 말에 따라준다 싶었던 건 역시 함정이었나?”
“……!”
“처음부터 숙부에게 꿍꿍이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뭐, 상관없지.”
아이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낭패의 기색이 스며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원래의 전개를 이미 아는 란델까지 포함해야 한다.
예상 못 한 상황에 아이네는 불안함이 차올랐다. 약간 허탈해하는 듯한 말투 외에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움을 내리누르기 힘들었다.
‘상관없다니, 무슨 뜻이지? 왜 상관이 없어.’
도대체 어쩔 작정인 거야, 이 최종 악역은!
아이네는 뒤에 버티고 선 기사들을 힐끗 바라보며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다행히도 목소리를 떨지 않는 데에 성공했다.
“당신이 먼저 제안한 일 아닌가요. 이제 와서 함정이란 걸 증명하기엔 늦은 거 알죠?”
괜찮아, 침착해라. 아이네.
간단하게 비교군이 되어줄 테고와 나딘, 케이어드마저 이 자리에 없다.
처음에는 그녀 혼자만 베룸으로 보내는 폐하의 결정이 야속하게 느껴졌었는데…….
‘따지고 보면 폐하가 밀어붙인 약혼도 잘한 결정이었으니까.’
혼자 전개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와는 다르다. 제 뒤에는 테고도, 나딘도, 달리아도, 그리고 황제 폐하도 있다.
아이네는 의기소침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턱을 치켜들었다. 잘 생각해보면 결코 황제와 아이네 일행에게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인 게 아니다.
“그래, 공녀에게서 공작과 공자를 떼어놓으면서 내게도 아무도 붙지 못하게 한 셈이니.”
시간을 충분히 끈 건 물론이거니와 여긴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다.
무엇보다 지금에 와서 정해진 전개가 담긴 기록을 모두에게 공개하면 곤란해지는 건 란델이었다.
그 속에서 란델은 폐태자의 아들로 등장할 테니까.
“하, 24년 전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겠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흘리던 그가 아이네의 어깨를 꽉 잡아 돌려세웠다.
“그럼, 이렇게 하지.”
“네?”
란델은 막 경계를 넘기 직전, 한 걸음만을 남기고 아이네에게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베룸 공작 부부와 공자도 알고 있나?”
“뭐, 뭘요.”
“네가 진짜 공녀가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란델의 올라간 입꼬리가 조금 더 짙어졌다.
“내가 무사히 돌아가지 못하면 공작부인에게 쪽지가 하나 갈 거야.”
뒤따라 온 공작과 달리 몸져누운 공작부인은 여전히 성안에 있었다.
“알리고 싶지 않다면 내게 협조하는 게 좋을 거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널 발현자라고 밝힌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그때는 단순하게 황제와 테고 경을 이간질하려고 폭로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란델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은 아이네를 먼저 경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처음부터 이 계획엔 네가 꼭 동행해야 했거든. 알고 있나? 발현자가 아닌 자가 경계 안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는 걸.”
굳이 아이네의 대답을 기다린 건 아닌 듯 란델은 바로 이어서 말했다.
“발현자와의 신체 접촉.”
“어떻게 알았…….”
아이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라니엘이 나오는 원작만 봤다면 알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럼 란델이 봤다는 건 도대체 뭐야?
“그러니 괜히 어쭙잖은 짓 하려고 들지 말고.”
그의 손아귀의 힘이 더욱 세어졌다.
“얌전히 날 고대 일족에게 안내해.”
이제 마지막 단계야. 곧 전부 해결되니까.
란델은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즐거워 보였다.
* * *
“아…….”
이번에도 경계 내부는 바깥과는 단절된 또 하나의 세계 같았다. 키가 웃자란 울창한 나무도 지금 제국에선 볼 수 없는 한참 예전의 품종이었다.
슬슬 더워지기 시작한 계절과는 상관없이 기분 좋은 바람이 뺨을 간지럽혔다.
거기다 이곳은 외부와는 다르게 공기의 밀도가 촘촘하고 묵직했다.
이파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까지도 유난히 밝고 강했다.
경계 너머와 같은 세계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사박사박-
말없이 걷는 두 사람의 발밑으로 풀 밟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정말로 이런 곳이 있다니, 내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이게 마지막이라는 게 정말 아쉬울 정도야.”
란델은 숲 안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처음엔 쥐어짜듯 아이네의 어깨를 잡았던 그의 손아귀 힘이 조금 약해졌다.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아이네는 잠시 그 틈을 타 도망칠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제 막 들어온 데다 아직 숲의 입구 언저리일 뿐이다. 이런저런 경우를 다 따져 판을 짜둔 황제의 계획이었다.
어깨를 꽉 잡혀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거기에 재를 뿌릴 순 없었다.
‘나만 침착하게 굴면 돼.’
이제 이 세계는 그녀 혼자 일방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게 아니었다. 저마다 자기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홀로 모든 비밀을 끌어안고 전전긍긍하던 때와는 다르게 마음이 단단해졌다.
“고대 일족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아이네의 단호한 대답에 거짓인지 아닌지 가늠해보려 란델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흐음.”
거짓말은 아닌 듯하지만 고집스레 앙다문 입술을 볼 때, 방어적인 태도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아이네의 태도에 이상하게도 못마땅한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막연히 그녀에게 미움을 사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이 기분은 도대체 뭘까.
‘이게 공녀가 발현자라서 그런 건 아닐 텐데. 애초에 ’진실의 눈‘에 특별한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는 어느새 경계로 들어오기 직전 보였던 적개심과 분노가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레어. 레어가 어디 있는지는 알 거 아닌가.”
“엑? 무슨 레어요? 그런 게 왜 여기에…….”
레어라니, 그 말이 지금 여기서 왜 나와?
보통 판타지 소설에서 레어는 드래곤의 거처를 뜻하는 말인데.
순간 떠오르는 기억에 아이네는 조금 전에 했던 결심을 잊고 멍한 얼굴을 했다.
“어?”
그러고 보니 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 테고도 언급한 적이 있었다.
‘혹시 여기가 드래곤의 레어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드래곤 레어요?’
그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설마.
“고대 일족이 드래곤이란 말이에요?”
그에 란델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왜 묻느냐는 듯한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아이네의 어깨너머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몰랐나?”
몰랐다. 아니, 생각도 못 했다. 아티팩트의 기능 때문에 스치듯 의심해본 적은 있었지만.
란델의 목소리가 혼잣말하는 것처럼 작아졌다. 그러면서 방금 목격한 이상 현상에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녀는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군.”
분명 공녀의 심리적 동요에 잔디와 수풀이 반응하듯 움직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움직임이었다.
이건 어떤 의미인 거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란델이 마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너도 모르는 게 꽤 있는 것 같고, 나도 네게 궁금한 점이 있으니……. 서로 공평하게 하나씩 대답해주는 건 어때?”
“…….”
공평이라니. 란델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미심쩍은 단어였다. 하지만 이내 아이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란델이 보았다는 기록.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이나 ‘원작 소설’과는 또 다른 그게 무엇인지 알아 두어야 했으니까.
“당신이 봤다는 게 뭔지 말해줘요.”
처음부터 가장 궁금했던 사항이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란델은 다시 빙글거리는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그것 역시 마도구지. 고대인들 중 고대 일족만이 만들 수 있고, 기록할 수 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네의 얼굴로 란델의 분석하는 듯한 시선이 가 닿았다.
‘역시 이 아이는 내가 찾는 존재가 아냐. 그럼 이 공간의 주인인 고대의 일족은…….’
아이네의 정체를 끊임없이 추측하는 속내와는 달리 란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왜 고대 일족이 처음부터 드래곤이라고 알려지지 않았는지 아나?”
“왜, 그런 건데요?”
“그들은 한때 인간이었던 적이 있는 드래곤들이거든.”
아이네는 이제 조금쯤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껏해야 로맨스가 대부분이었을 소설에 이 과다한 설정들은 뭐란 말인가.
“거기다 인간이 처음인 것도 아니지. 그 이전 단계도 있었으니까. 그들이 처음 지각이 있는 생물이었을 때부터 남긴 기록. 그게 내가 베르길리우스 성의 지하에서 본 거야.”
이건……. 당장이라도 그 레어인지, 오두막인지로 가봐야 하는 거 아닐까.
들으면 들을수록 새로운 사실들에 놀라는 것도 지칠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시그노를 소환해 따지고 싶어질 정도로.
아이네의 입이 힘겹게 떨어졌다.
“그럼, 그러면……. 그건 어디까지 쓰여 있어요?”
란델은 눈물점이 도드라지도록 활짝 웃었다.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례인 거 같은데, 아닌가?”
올 게 왔구나.
아이네가 긴장한 낯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케이어드가 다짜고짜 저더러 ‘가짜’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에 비할 수 있을까.
“내게 궁금한 게 뭐죠?”
“전에 말했던 ‘원작’이란 건 무슨 뜻이지? 아니, 질문을 바꾸도록 하지.”
순간, 란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걷혔다.
“너는, 마리에가 말했던 다른 세계에서 온 자인가?”
직구였다. 그것도 몸쪽으로 꽉 찬 직구.
황실의 핏줄로 이런 직설 화법도 유전되는 게 틀림없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단정하고 속단하면 안 되고, 불길한 예감은 늘 빗나가지 않는 법이다.
케이어드가 ‘가짜’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이상의 충격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
아이네는 눈만 끔벅이며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란델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서 이미 답을 들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놀란 모양이군. 그래서 이곳에선 미래에 대해 아는 게 너뿐일 줄 알았나?”
아이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여기서 아니라고 해봤자 란델이 믿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제 입으로 직접 인정할 순 없지 않은가.
“당신 말대로 난 베룸의 발현자니까요. 그러니까 당연히……!”
란델이 코웃음을 쳤다.
“여태까진 발현자라 미래를 안다고 우겨왔었나 보군. 누가 ‘진실의 눈’이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하던가?”
폐쇄적이고 아티팩트조차 없는 베룸 가문의 이능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테고조차도 아이네에게서 느껴지던 위화감을 발현자이기 때문이라 여겼던 거다.
그나마 그 기능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여태까지는 케이어드뿐이었다.
‘너, ‘진실의 눈’을 가진 발현자잖아. 아티팩트를 가진 고대 세 일족이 무얼 하든 전부 꿰뚫어볼 수 있는 이능. 그게 너희 베룸의 발현자인 거, 정말 몰랐어?’
“‘진실의 눈’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다른 일족의 아티팩트 사용을 알아채는 기능뿐인데 말이야. 진실의 눈이라는 명칭조차 잘못되어 있었단 걸 아나?”
공평하게 묻고 답한다는 조건이 무색했다. 이래서야 서로의 의문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란델의 의심에 확신을 더해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고대어를 배우고서야 알았지. 고대어인 ‘베룸’에 ‘진실’이라는 뜻이 있다는 걸. 그러니…….”
란델이 손가락을 뻗어 아이네의 눈을 가리켰다.
“원래는 ‘진실의 눈’이 아니라 너희 일족의 이름인 ‘베룸의 눈’이라고 불렸어야 했던 거야.”
제가 아이네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란델이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고대 일족의 기록엔 ‘베룸의 눈’에 대해서도 쓰여 있었거든. 그래서 생각해봤지. 지금의 상황을 ‘원작’이라고 지칭하는 네 정체가 무엇일지…….”
“무, 무슨 말이에요. 정체라니.”
아이네는 이제 심장이 터질 듯이 뛰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리에는 미친 게 아니었어. 그녀의 말대로 이게 만들어진 세계라면, 이걸 만든 존재가 있을 거고. 그럼 그 존재가 사는 바깥의 세계가 있겠지.”
그 세계를 만드는 매개체가 ‘소설’이라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란델의 추론은 정확했다.
그걸 증명하듯 어느 순간부터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거기다 마리에가 기껏 고대 일족 셋의 마나를 끌어다 시간을 되돌려도 변하지 않던 미래가 달라진 건, 이번뿐이었……고.”
마치 무형의 압박감과 싸우는 듯 란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아이네의 어깨를 쥐고 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품 안 회중시계의 무게감이 그에게 조금 더 여유를 갖게 했다.
여유뿐일까. 오히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기 어려웠다.
이제, 정말로 얼마 안 남았다.
“그 최초이자 유일한 변수는 오직 하나, 너였다는 걸……. 흡, 알았지.”
처음엔 그저 밀도가 좀 높다고만 생각했던 공기의 흐름이 더 매섭게 란델의 몸을 억눌렀다. 단순히 무겁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금 더 본능적인 공포에 가까운 압력.
아이네에게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이 공간의 주인이 경고라도 하는 듯했다. 그리고 란델은 그 반응에서 자신이 제대로 짚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 하하……. 내가 왜 이렇게 모든 걸 다 이야기해주는지 아나?”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악에 받친 음성에 아이네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내 란델의 손에 더 세게 잡히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아무리 악당이 자신의 목적과 이유를 주절주절 다 말하는 게 클리셰라고는 해도…….
‘이제는 내가 전부 다 알아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란델의 이런 태도는 아까부터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숙부에게 꿍꿍이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뭐, 상관없지.’
지금 이 순간의 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말들.
자꾸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부터 교묘하게 숲길이 같은 곳만 돌도록 바뀌고 있더군. 그건 네가 나에게 레어를 알려줄 마음이 없다는 걸 누군가가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누군가라고요?”
숨쉬기도 버거운 듯 눈을 깜박거리던 란델이 씩 웃었다.
“여태 네 눈을 통해 고대 일족이라는 작자가 다 보고 있었던 건 알고 있나? 아마 지금도 내가 무얼 하려는지 알고 있을걸?”
불현듯 처음 시그노와 만났을 때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 두 눈으로 잘 보고, 내게 전해주세요. 나와 시선을 주고받아주세요.]
그 말이……. 이런 뜻이었다고?
그 순간, 란델이 아이네의 몸을 홱 돌려 세워 한 팔로 단단하게 조였다.
“꺅!”
그러면서 품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내 그녀의 목에 가져다 댔다.
“왜, 왜 이래요! 갑자기…….”
아이네의 살갗에 서늘한 금속성의 무언가가 닿았다.
“이제는 당장 나와야 할 거야. 내가 당신의 변수를 죽여버리기 전에.”
죽인다는 말이 그저 위협만은 아니었는지 아이네는 목이 따끔하다고 느꼈다.
“혼자서 이 다음 이야기에 갇혀 떠나지 못했지? ‘시그노.’”
고대어로 ‘시그노’는 남기다, 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걸 어떠한 존재에게 이름으로 붙이면 고대어 문법상으로는…….
‘남겨진 자.’
여태 잠잠하던 숲 안을 통째로 휘감는 거대한 흐름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지금껏 짙은 마나로 가득 찬 공기를 체감하지 못했던 아이네도 알아챌 만한 움직임이었다.
“흐, 흡.”
참으려 했지만 본능적인 공포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렸다. 거기엔 약간의 고통과 분노가 섞여들어 있었다.
“그, 더러운 손, 당장, 치워.”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와중에도 씹어뱉듯 으르렁거리는 음성은 분명히 그였다.
“테고…… 경.”
아이네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 * *
지금껏 무의식적으로라도 떠올리지 않으려 했었는데, 생각보다 더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테고 경…….”
방울방울 흘러내린 눈물이 모여 아이네의 얼굴을 흠뻑 적시기 시작했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아, 자신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모두가 준비해준 마지막 무대이니만큼 어떻게든 란델을 잘 처리해야 한다고 결심했는데.
‘역시 혼자서는 너무…… 무서웠어.’
그도 그럴게 빙의자니, 발현자니 해도 그 흔한 버프 하나 없는 신세잖아!
란델을 경계 안에서 따돌리고 도망치기엔 사실 체력과 힘, 어느 것 하나 자신이 없었다.
금세 울멍거리기 시작한 눈동자로 테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사나워진 눈매도 이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공녀…….”
순식간에 애틋해지는 분위기에 란델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시시때때로 조여오는 압박감에 맞서며 입을 열었다.
“공작이 여기까진, 어떻게 왔지?”
그러나 란델이 끼어들자마자 테고의 표정은 금세 싸늘해졌다.
“네놈은, 알 거 없다. 공녀에게서 손이나 떼.”
“하……?”
테고의 적의 어린 시선을 받으며 란델이 헛웃음을 지었다.
‘원래는 진작에 죽어 이미 흔적도 없었을 놈이 운 좋게 살아서는…….’
엄밀히 따지자면 테고 리테루온 공작이야말로 자신 덕분에 산 목숨이 아니던가.
여동생인 라니엘에게 세 번이나 죽임당한 운명을 바꾸려다 보니, 이번엔 어쩌다 우연히 오빠인 테고가 살았을 뿐이다.
‘건방진 놈. 적어도 내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는 적개심 어린 눈빛을, 인질로 잡힌 공녀에겐 거의 맹목적인 애정이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란델은 어쩐지 삐딱한 마음이 솟았다. 어차피 지금 이 순간도 시그노만 현신한다면 마도구인 회중시계로 되돌릴 시간이다.
그렇기에 공녀에게도 거리낌 없이 전부 대답해주었던 거고.
‘과연 진실을 알고도 저 꼿꼿한 태도가 여전할까.’
이번에 시간을 돌려 반정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저들의 운명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물론 그때엔 아직 공작과 공녀, 둘 다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지만.
란델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짓누르는 압박감 때문에 말이 뚝뚝 끊겼지만 흥미로운 기색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가,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공작?”
그리고 그가 아이네의 정체를 밝힐 마음을 먹자 숲 안을 휘감은 마나의 흐름이 더욱 격해지기 시작했다.
란델은 나이프로 아이네의 목을 겨눈 제 오른손에 특히 거대한 압력이 가해지는 걸 느꼈다.
그 압력에 조금이라도 굴복하면 나이프를 놓칠 것만 같았다.
‘어서, 어서 모습을 드러내!’
역시 이 공간의 주인인 고대의 존재가 가장 신경 쓰는 건 공녀의 목숨과 정체인 모양이니까.
이제 칼을 쥔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저려올 정도로 압박의 강도가 세어지고 있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나이프가 아이네의 목을 쿡쿡 찔렀다.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을 참지 못한 아이네가 결국 소리를 냈다.
“읏.”
그리고 멀찍이서 그걸 바라보던 테고의 얼굴에 아연한 빛이 서렸다. 지금은 란델을 자극하고 도발할 때가 아니었다.
황제의 명이든, 제국의 안녕이든 그에겐 아이네가 더 중요했다. 곧바로 테고의 목소리엔 간절함이 배어들었다.
“그, 칼, 내려놔. 그럼, 내 이름을 걸고, 네 목숨만은 보장하지.”
“웃기지 마.”
란델은 차갑게 일갈하며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더 유리한 게 누군데. 어림도 없지.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제대로 제어되지 않는 손 때문에 낭패 어린 기색이 스쳤다.
‘이러다가 실수로 공녀의 목을 꿰뚫기라도 하는 거 아냐?’
이제는 정말로 거의 다 왔다. 여기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시그노를 불러내는 데에 실패한다면 안톤은…….
“제길!”
결국 란델은 칼끝을 돌려 잡고 칼자루로만 아이네의 목을 압박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반란군 생활을 함께했던 안톤이 살아있는 시점으로 가려면 모험을 할 순 없다.
확실하게 시그노를 온전히 불러내어 회중시계를 쓰지 않는다면 회귀하게 될 시점을 장담할 수 없으니까.
눈에 띄게 안도하는 테고를 보며 란델은 다소 조급하게 아까의 대화를 이어갔다.
이젠 꽤 차분하게 가라앉은 테고와는 달리 이제 초조한 건 란델이었으니까.
빨리 시그노가 모습을 드러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단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말이다.”
“흡!”
목이 눌린 아이네가 숨을 들이켰다. 그걸 눈앞에서 목격한 테고는 다시금 란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지금이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인가.
“헛소리는, 네 놈이 하고 있군.”
갈수록 묵직해지는 공기가 모두를 짓누르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는 아이네는 물론이고, 란델과 테고의 음성에도 점점 더 힘겨운 숨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그래? 후, 네가 아는 이, 공녀는 ‘아이네’가, 아닌데도?”
“그게, 크흡, 무슨, 소리…….”
테고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다.
드디어 란델이 원하던 반응이 나왔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폭로에 아이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금 이 자식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막아야 돼.
그러나 딱딱한 칼자루에 꽉 틀어막힌 목에서는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아니……! 캑.”
란델은 말을 꺼내려는 아이네의 목을 더 세게 압박했다. 그 바람에 괴로워 보이는 기침이 새어 나왔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공녀!”
그녀를 함부로 다루는 모습에 테고는 이를 갈았다. 저 자식이, 감히 누구에게……!
안 그래도 악을 쓰고 버티던 테고의 눈이 더 새파랗게 불타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란델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이죽거렸다.
“알고, 있었나? 이 여자는, 이미 한참 전에, 죽은 공녀의 몸을, 차지한…….”
계속해서 이어지려는 란델의 말을 테고가 끊었다.
“상관없어.”
하, 겨우 그런 이야기나 하려고? 아이네가 좀 독특한 수준을 넘었다는 건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번만큼은 테고의 목소리에 거친 숨이 단 한 번도 섞여들지 않았다.
심지어 아까부터 느껴지는 강한 압력이 계속해서 그의 뒷목을 잡아 누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테고는 바닥으로 고꾸라지려는 고개를 기어코 빳빳하게 들어 올렸다.
“뭐?”
그리고 반문하는 란델을 노려보았다. 이내 테고의 시선은 작은 뺨이 눈물범벅이 되도록 울고 있는 아이네에게로 옮겨갔다.
이를 악물고 다시 읊어주었다.
“상관, 없다고.”
그저 안타까웠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눈가가 새빨개진 채로 충격에 사로잡힌 그녀가.
어차피 그가 아는 아이네는 지금의 아이네다. 그러니 그녀가 진짜든 가짜든 테고에겐 무슨 문제가 있으랴.
“좋은 말로 할 때, 물러서.”
사실, 발현자가 아닌 그가 경계 안 깊숙이 뛰어드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모험이었다. 심지어 이전에도 이곳에서 견디기 힘든 압력을 겪은 적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테고는 아드득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쓰러지지 않으려 들고 있던 검으로 땅을 짚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느리지만 한 걸음씩 아이네에게로 나아갔다.
“윽!”
그러나 이내 한쪽 무릎이 푹 꺾여 앞으로 쓰러졌다.
도저히 의지로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대단한, 흡, 정신력이로군.”
란델이 비웃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역시 썩 견딜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버티던 그의 시선이 돌연 위로 향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쾌청하기 이를 데 없었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서서히 한곳에 응집되고 있는 마나의 흐름처럼 폭풍이라도 몰아칠 듯이.
그렇게 란델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테고가 아이네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이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지금, 입니다, 공녀.”
“흐?”
무슨 뜻인지 몰라 두 눈만 동그랗게 뜬 그녀에게 테고는 있는 힘을 다 짜냈다. 점차 한계였다.
“제가 책임, 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테고는 한 번 더 제 아랫입술을 깨물며 바닥으로 추락하려는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외쳤다.
“하십시오!”
그 말에 아이네는 문득 예전에 테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공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단검을 소환해내야 합니다. 뒷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애초에 상대의 목숨을 반드시 거두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방법은 훨씬 많아집니다.’
‘만약, 상대가 많이 방심하고 있다면 눈을…….’
아이네는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단단하게 옭아맨 란델을 곁눈질했다.
아, 역시 저런 소릴 듣고도 방심하는 멍청한 악당은 없겠지.
“무슨, 책임?”
아쉽게도 테고가 소리치는 바람에 란델의 주의가 그들에게로 돌아온 탓이다. 게다가 키 차이와 자세를 생각할 때, 제대로 보이지도 상태에서 정확히 눈을 찌르는 건 무리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허벅지를 찌르십시오.’
아이네가 이번엔 눈을 굴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제 시야에 란델의 다리가 보인다.
‘좋아, 허벅지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테고는 이미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듯했다. 이제는 정말 그녀가 ‘선택’해야 할 시간이 온 거다.
‘후, 이걸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아이네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좀 모양은 빠지지만, 단검을 소환는 주문을 미리 알아둬서 다행이다.
“소환! 단검!”
덕분에 헤매지 않고 바로 소환할 수 있었으니까.
“뭐, 뭐야. 무슨……!”
그리고 제 오른손 안에 묵직한 칼자루가 느껴지는 순간,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푹-
“아악!”
있는 힘껏 란델의 허벅지로 단검을 찔러 넣었다. 테고가 늘 칭찬하던 완벽한 자세로.
그러고는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퍽, 소리 나게 밀었다.
“윽!”
동시에 죽을힘을 다해 앞을 향해 발을 놀렸다.
‘허벅지를 찌르면 상대에게서 기동력을 앗을 수 있습니다.’
테고의 말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