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여주라고 했잖아요! 5
21. 존재의 증명
란델은 곧장 반사적으로 아이네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다리를 찔린 데다 그녀와 몸이 떨어지자마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묵직한 압력이 그를 압사시킬 듯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망치십시오.’
아이네는 끝까지 테고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 덕에 간발의 차이로 란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데에 성공했다.
“테고 경!”
그렇게 아이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테고의 품 안으로 쓰러지듯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그녀를 온전히 받아 안았다.
그 순간, 서로의 몸이 닿자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내지르는 듯하던 고통이 딱, 멎었다. 게다가 하나의 점으로 응집되던 마나의 흐름도 급격히 풀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변화도 느낄 새 없이 테고의 얼굴에는 대견하단 기색이 가득 들어찼다.
“잘했습니다.”
가까이서 그와 마주한 아이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으응, 아직 이런 시선은 좀 부담스럽다. 제발 상황 좀 봐 가면서 직진해주시겠어요? 테고 경.
“그나저나 이젠 어떡하죠?”
아이네는 뒤쪽으로 곁눈질을 하며 물었다. 피는 좀 흘리겠지만 허벅지를 찔린다고 죽진 않는다.
결국 누군가 마무리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관대해진 공기의 흐름이 아직 란델에겐 여전히 가혹하게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는 걸 보니.
더는 숨을 몰아쉬지 않게 된 테고가 비장한 얼굴로 그녀를 번쩍 안고 일어섰다.
“제가 처리할 테니……. 아니,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군요.”
“네?”
테고가 눈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어느새 란델의 근처로는 꽤 많은 다람쥐 마물이 몰려들어 있었다.
“다람쥐……?”
그때, 바닥에 엎드린 채로 품을 뒤적거린 란델이 이윽고 회중시계를 꺼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안톤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나부터 살아야 해.’
굳이 시그노의 현신이 아니더라도 일단 급한 대로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 마물들 중 유난히 새까맣고 큰 눈동자를 가진 녀석이 란델의 손을 콱, 물었다.
“윽! 안 돼!”
그러자 그의 손아귀에서 회중시계가 다시금 데구르르 굴러떨어졌다. 란델을 문 다람쥐가 기다렸다는 듯 회중시계를 꼬옥 끌어안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키익, 크이이익!”
곧이어 마치 명령이라도 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엎드린 란델의 주위를 촘촘하게 둘러싼 다람쥐들이 반응했다. 그들의 입이 쩍 벌어지고, 날카로운 이빨이 여러 겹으로 돋아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이내 다람쥐 무리가 란델의 몸을 새카맣게 덮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아이네의 눈은 충격으로 한없이 커져갔다.
“아니, 우리 귀여운 다람쥐가……!”
“아직도 저게 귀여워 보인단 말입니까?”
도저히 제게 애교를 부리며 땅콩과 호두를 얻어가던 녀석들로 보이지 않았다.
자그마한 견과류 조각을 겨우 오물거리던 입이었는데!
그 입이 쫙 벌어지는 순간부터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보지 마십시오.”
테고는 아이네의 양쪽 귀를 두 손으로 가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품 안에 넣은 채 그대로 뒤돌아섰다.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일은 테고의 예상과 한 치의 다름도 없었다.
“아아악!”
으드득- 와그작-
그들의 등 뒤에선 뼈와 살이 통째로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제가 이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 녀석들, 최상급 마물이라고.”
* * *
“…….”
“…….”
역시 모든 소설에서 최종 악역을 무찌르고 나면 급 완결을 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마나 폭풍이 휘몰아치던 때가 무색하게 숲속은 적막했다.
그리고 그 공간을 테고와 함께 걷는 아이네는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맞잡은 손을 꼼지락대며 그의 눈치만 보았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보지?’
실은 아직도 란델이 그렇게 허무한 최후를 맞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등 뒤에 바짝 달라붙은 테고 때문에 직접 목격하지 못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라니엘이 나오는 소설, 아니, 다시 되돌아오기 전의 세계에선 란델의 비중이 꽤 컸었으니까.
비록 최종 악역이었어도 그에겐 나름의 서브남 역할도 겸한 서사가 주어졌다. 라니엘이 반란군을 조사하는 에피소드에선 그 특유의 능글맞은 태도와 눈물점으로 꽤 인기가 있기도 했고.
결국 아이네의 존재로 인해 운명이 달라진 건 란델도 마찬가지였던 거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어도 똑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그녀와 다른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려 했던 만큼 그의 죽음에 충격받진 않았다.
지금이 빙의 초기라면 모를까, 이제 아이네에겐 지켜야 할 사람이 꽤 많아졌으니.
다만, 전혀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후,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함께 들어간 란델이 나오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기사들과 아버지가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예전부터 경계 안에 다람쥐가 살았는데, 그 다람쥐들이 잡아먹었어요?’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아무리 그녀의 말이라면 별이라도 따다 줄 듯 아끼는 가족들이라 해도 정색할 만한 소리다.
잠깐만……. 가족?
아이네는 사색이 되어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그래, 그러고 보니 잊은 게 있었다.
경계 안으로 막 진입했을 때 란델이 그녀에게 했던 협박!
‘내가 무사히 돌아가지 못하면 공작부인에게 쪽지가 하나 갈 거야.’
무슨 쪽지였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협박하기 바로 직전에 가족들도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으니까.
‘그러니 괜히 어쭙잖은 짓 하려고 들지 말고.’
……그리고 아이네는 했다, 어쭙잖은 짓을.
아직 경계 안이라 손을 잡고 있던 테고가 그녀가 굳은 걸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역시 몸이 불편합니까? 그러게 제가 성까지 안고 가겠다고 했는데…….”
평소라면 테고의 이런 모습에 한 번쯤 눈을 흘겨주었을 그녀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의 은근한 들이댐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우리가, 아니, 제가 경계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어요?”
다그치는 듯한 아이네의 말에 테고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그가 공작성에 들렀을 때 아이네 일행이 출발한 지 30분쯤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힘껏 말을 몰아 경계까지 도착한 걸 생각하면…….
“아무리 못해도 한 시간은 훌쩍 넘었겠군요.”
“안 돼!”
아이네가 비명 같은 외침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손과 뺨이 초조함과 긴장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어, 어떡하죠? 지금쯤, 지금쯤 어머니께 쪽지가 갔을 텐데…….”
평소 누굴 속이거나 연기를 하지 못하시는 분이니 아마 아버지가 미리 귀띔을 해주지 않으셨을 거다. 하녀장의 부축까지 받으셨다는 걸 보면 정말로 몸져누우셨을 게 분명하다.
그런 어머니께서 란델이 보낸 쪽지를 보셨을 때의 충격은…….
“테고 경. 나, 나 어떡하죠? 만약에요. 만약에 가족들이 다 알게 되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아이네의 눈가로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심히 듣고만 있던 테고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품 안에 손을 넣어 작게 접힌 무언가를 꺼냈다.
“혹시 쪽지라면 이걸 말하는 겁니까?”
“네?”
아이네는 아까보다 더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폈다. 몇 번이고 헛손질하던 그녀가 드디어 쪽지를 펼쳐 안에 쓰인 내용을 읽었다.
“그게 공녀가 찾던 게 맞습니까?”
“…….”
아이네는 처음부터 다시 쪽지를 읽어내리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정작 진실은 한 줌뿐인, 너무나 명백하게 악의적인 왜곡이 그 안에 존재했다.
거기엔 고대의 일족이니, 이 세계가 벌써 세 번은 되돌아갔다느니 하는 내용 따윈 없었다.
“내가, 내가……. 원래 있던 아이네를 죽이고 몸을 빼앗았다고?”
그녀가 본래의 ‘아이네’ 공녀 몸에 들어간 건 맞지만 빼앗은 건 아니었다. 시기를 따져보면 공녀가 열한 살 때,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그 몸으로 들어가게 된 거니까.
‘어떻게 뻔뻔하게도 이런 거짓말을 써놔?’
그것도 일족의 비밀에 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공작부인에게 남겼다는 게 더 악질이었다.
큰 충격을 받진 않았어도 미약한 동정심과 일말의 죄책감은 남아있었는데……!
잘 죽었다, 이 나쁜 놈!
분노에 차서 씩씩 숨을 몰아쉬는 아이네의 눈에 여전히 차분한 표정의 테고가 들어왔다.
‘잠깐만.’
그녀의 목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러자 테고가 미안한 낯으로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목이 마릅니까? 너무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그게 아니라!”
순간 목소리를 높였던 아이네의 음성이 다시금 작아졌다.
“이거…… 봤어요?”
“……예.”
담담했다. 너무 지나치게 담담해서 문제였다.
도저히 속내를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테고가 말을 이었다.
“공작성에 들렀을 때, 하인 하나가 내게 전하더군요.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걸로 보아 쪽지를 열어보진 않은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도 열어보지 않았다는 말에 아이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연하죠! 공식적으로 들어온 게 아닌 서신은 함부로 당사자한테 전하지 않도록 교육을 받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경계로 가는 길에 공작 각하께 전해달라면서 건넸었지만. 그 남자가 주었다는 말을 들으니 먼저 펼쳐보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러면서 테고는 다시 한번 그 하인의 판단을 칭찬했다.
“제 기억으로는 마구간에 들어온 신입이었을 겁니다. 역시 베룸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기강이 잘 잡혀있…….”
영 엉뚱한 소리를 하는 테고에게 아이네가 빽 소리쳤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잖아요. 이거, 이 내용……. 전부 읽었다면서요.”
“내용을 알아야 제가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이 역시 아이네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다. 가장 충격적인 진실은 그 자리에 두고 언저리만 뱅뱅 도는 듯한 대화라니…….
자신에 대한 진실이 테고에겐 한낱 공작가의 기강 이야기보다도 못한 걸까.
어느새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 눈물로 아이네의 눈가는 붉어지기 시작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아요?”
“…….”
목소리엔 울음기가 배어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테고가 고개를 들어 새파란 눈동자로 아이네를 응시했다.
“상관없으니까요.”
“뭐……라고요?”
냉정하고 차갑기까지 한 말에 결국 아이네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테고 당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분명, 내게 마음이 있다고 해놓고!
심지어 그 먼 황도에서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오지 않았나.
‘이건 서운함일까?’
그동안 아이네는 그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 왔다. 하지만 막상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심장이 새까맣게 다 타버려 재만 남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테고의 커다란 손이 머뭇거리며 천천히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들어 아이네의 눈물 자국을 슥, 훔쳐냈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흐, 뭘요!”
배신감에 고운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이 쪽지에 적힌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눈물 때문에 흐려진 시야 속에서도 테고의 새파란 눈동자 안에 넘실대는 빛은 또렷하게 보였다.
“내게는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네?”
응? 내가 가짜이든 아니든 테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라는 말이 아니었어?
아이네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테고가 여전히 진지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이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공녀에게 마음이 있다고.”
“…….”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손가락 하나가 아니라 오른손을 전부 편 테고가 조심스레 아이네의 뺨을 받쳐 들었다.
“내가 마음에 둔 사람은 처음부터 당신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녀가 가만히 있자 용기를 낸 테고가 나머지 왼손까지 뺨 위로 올렸다.
“당신이 당신인 이상, 내겐 당신이 ‘진짜’ 공녀이든, ‘가짜’ 공녀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
그래서 아까 란델의 폭로에도 그렇게 의연했던 거였구나.
‘상관없어.’
‘상관, 없다고.’
아이네의 눈과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게, 그 뜻이었던 거다. 아마 란델도 테고가 제가 미리 손써둔 쪽지를 이미 보았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겠지.
일부러 충성심과 소속감이 약할 신입을 고른 것도 그렇고. 역시 여러모로 치밀한 자였다.
이내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테고가 눈 밑을 붉혔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런 이유로 당신을 박대한다면…….”
여태까지 본 것 중 가장 긴장한 낯으로 테고는 결연하게 선언했다.
“리테루온 공작가로 오십시오.”
“네?”
이렇게 갑자기?
“저는 반대할 부모도, 형제도 없습니다. 그러니…….”
“자, 잠깐만요!”
아이네가 급히 그를 제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제 그만 돌아와! 너무 멀리 갔다고, 테고 경!
테고에게 뺨을 잡힌 채로 얼굴을 돌리느라 볼 살이 눌린 아이네가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말이에요.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요? 분명히…….”
이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지금이야 황제가 나름대로 계획이 있어서 아이네와 테고를 떼어놓은 걸 안다.
아마도 황족을 참칭한 란델을 내세웠다는 핑계로 남부의 귀족파들을 정리하려는 계획이셨을 테다. 하지만 그걸 위해선 테고가 아직 황성에 있어야 할 텐데……?
“황도에서 뒤늦게 말을 달려 이틀 만에 도착했습니다.”
“이틀요?”
아무리 테고라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황도에서 베룸 영지는 직선 도로가 생긴 뒤에도 마차로 닷새는 걸리는 거리였다. 제아무리 홀로 말을 달려 왔다고 해도 절반도 안 되게 단축하는 건 기적이었다.
“예, 말이 지치지만 않았어도 더 빠르게 올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테고는 외려 아쉽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아이네의 목을 바라보았다.
그가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다면 란델의 칼에 그녀가 위협받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니, 그럼. 타고 온 말이 살아 있긴 해요?”
엉뚱한 그녀의 말에 테고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잠시 멈칫하며 제 입매를 굳혔다.
지난 며칠간 공녀의 부재로 웃을 일이 없어서였나 보다. 어쩐지 입가의 움직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이네는 그제야 테고를 쭉 훑어내렸다. 그의 먼지투성이인 복장과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피부도 조금 상한 거 같고, 눈 밑도 좀 어두워졌네?’
그런데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 미모는 정말이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가까이서 제게 집중하는 아이네의 시선에 테고의 얼굴이 다시 진지하게 변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요?”
“모든 건 한시라도 빨리 공녀의 곁으로 오기 위한 결정이었으니…….”
테고의 목울대가 울렁이며 말끝이 늘어졌다.
뭐야, 뭔데?
* * *
테고가 말 잇기를 주저하는 사이, 아이네는 그의 말을 잠시 되짚어보았다. 거기다 조금 전까지 그녀와 잘만 맞추던 시선은 어느새 조금 빗겨나가 있었다.
‘결정’이라니, 무슨 결정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뭔데요?”
“…….”
아이네의 얼굴에 점차 의혹의 빛이 서리자 테고는 결국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여기에 공녀의 예비 남편 자격으로 온 겁니다.”
“네?”
뭔 편? 남편?
테고는 여전히 아이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제국법을 줄줄이 읊었다.
“전시나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후작위 이상 귀족 간의 혼사는 반드시 황제의 허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황제의 허가증은 그 즉시 전달되어야 한다.”
“엥?”
갑작스러운 법조항 이야기에 아이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게 지금 대화와 무슨 상관이에요?”
그녀의 지적에 테고의 고개가 점점 숙여져 이내 정수리를 내보였다.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한시라도 빨리 베룸으로 오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테고 경을 여기로 보내려고 폐하께서 나랑 테고 경의 혼인 서약서를 급조하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
아이네의 눈이 순간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이거, 이거 테고 경이 또 당한 거 같은데 말이지. 어디서 냄새가 나지 않아요? 사짜 냄새.
황제 폐하께서 또다시 훌륭하게 그를 속여 넘기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폐하는 그렇다 쳐도 귀족파들이 테고가 황도를 떠나는 걸 두고 봤을 리가 없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남부 귀족파나 다른 귀족들이 수긍하고 보내줬다고요?”
“그건……. 마지막 셋째 날 연회 때 말입니다.”
그렇게 이어진 이야기는 가관이었다. 그리고 아이네는 인정해야 했다.
‘응, 이건 내가 자초한 일 맞네.’
그런데 일이 이렇게 짜 맞춘 것처럼 흘러갈 수가 있어? 이게 가능한 일이야?
“그러니까 이게 다 내가 그날 테고 경한테 행커치프를 세모로 접어주어서 그런 거라고요?”
“저도 그 의미까지는 몰랐습니다.”
이쯤 되면 온 우주가 테고와 자신이 잘되라고 밀어주는 느낌이다.
손재주가 없어서 다른 모양을 만들 줄 몰라 그냥 대충 삼각형으로 접은 건데! 그게 결혼할 신랑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니!
어쩐지 그날따라 케이어드도 그렇고, 폐하도 유난히 ‘결혼’을 입에 올린다 싶었다.
아이네는 행커치프를 본 건 누군가의 결혼식뿐이었다는 사실에 뒤늦게 통탄을 금치 못했다.
행커치프는 다 똑같이 접는 줄 알았지,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누가 알았겠어!
물론 아까 이후로 그녀 역시 테고를 친구로만 여기지 않게 되었단 걸 깨닫긴 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설레자마자 결혼이라니요! 전개가 너무 빠르잖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아이네가 드디어 허점을 찾아냈다.
“잠깐만, ‘전시나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라고요? 이건 혼인을 쉽게 허락해주지 않으려고 만든 조항 아니에요?”
혼란을 틈타 황제의 허락 없이 혼인동맹을 맺는 걸 방지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게다가 연합왕국은 쳐들어오지 않았고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전시 상황도 아니었다.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제가 직접 서명하지 않는 이상 처음부터 혼인은 성립된 게 아니고요. 이건 무효라고요!”
이어진 아이네의 말에 테고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동작을 멈췄다.
“……그렇군요.”
황제와 온 우주의 공격을 훌륭히 막아내어 들뜬 아이네와 달리 테고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럼 그렇지. 조금쯤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결혼은 우리의 약혼……에 근거한 거니까요.”
“아.”
그리고 그 약혼은 언제든 합의로 해지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어있지 않았나.
테고의 어깨가 급격하게 축 처졌다. 역시 안 되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잠깐! 잠깐만요.”
이번엔 아이네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생각해보니, 굳이 전부 무효로 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예?”
“어차피 지금 우리는 약혼 관계일 때랑 크게 다르지 않잖아요. 아, 물론 혼인 서약서까지 쓴 이상, 이제는 테고 경이 먼저 파혼할 순 없겠지만.”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테고가 딱 잘라 대답했다.
“으응. 그런가요…….”
아까 테고가 그랬듯 아이네의 말끝도 길게 늘어져만 갔다. 정식 고백이 아닌 단순한 제안도 쉬운 게 아니구나.
“그럼, 우리 만나볼래요?”
“……?”
테고는 선뜻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만나본다는 걸 말 그대로만 해석하면 지금도 이미 만나서 얼굴을 마주한 상태니까.
거기다 이곳에선 고위귀족 간의 연애결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애매하게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이야기해야 했다.
아이네의 뺨이 조금씩 달아올랐다.
“제 말은……, 우리는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시작한 게 아니잖아요.”
물론 그건 아이네만 그랬다. 그저 그녀만이 테고의 성별을 홀로 착각하고 받아들인 탓이다. 하지만 테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싸늘하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져 죽어있던 심장이 급격히 되살아나 뛰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에, 그러니까……. 우리,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좀 가져보는 건 어때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테고의 눈빛이 점차 단단해졌다.
만약, 지금 공녀의 이야기가 자신이 원하고 바라던 그 뜻이 맞는다면.
“공녀도 익히 알고 있겠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기회를 마다하는 타입은 아닙니다.”
조금 전 보았던 새파란 불길이 테고의 눈동자 안에서 아른거렸다.
“네에? 아니, 너무 급하게는 말고요…….”
이번엔 호기롭게 제안했던 아이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거, 아무래도 잘못 건드린 거 같은데.
* * *
“아버지!”
“아이네!”
경계의 바로 바깥에서 내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베룸 공작이 아이네를 발견했다. 거리는 멀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를 부르는 소리는 보이지 않는 경계의 막에 막혀 웅웅대듯 들렸다.
‘무사했구나, 우리 딸!’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칼로 잰 듯한 성정인 베룸 공작의 눈시울이 어쩐지 조금 붉었다.
서로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그동안 제 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 건네지 않았나.
그러나 이내 그의 시선이 아이네와 테고가 꼭 붙잡은 손으로 가 닿고는 싸늘하게 변했다.
“…….”
큰 키만큼이나 손도 어찌나 큰지 아이네의 손이 파묻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기에 황제가 시키는 대로 한 건데. 저놈이 벌써 아이네에게 손을 대?
베룸 공작이 테고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모두의 입에서 경악에 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경계에서 마물이!”
“뒤, 뒤를 보세요!”
“어서 밖으로 나오십시오, 공녀님! 공작 각하!”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아이네의 앞으로 다람쥐 한 마리가 뽈뽈거리며 다가왔다.
“응?”
“아까 그 무리 중의 대장 녀석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다람쥐 마물이 아이네의 편이란 걸 아는 테고가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다람쥐가 자그마한 손으로 아이네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아, 앉으라고?”
“키이!”
그렇다는 듯한 울음소리에 아이네가 엉거주춤하게 주저앉았다. 그러나 아까 일이 머릿속에 떠올라 조금은 주춤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너, 마물이라며. 여기까지 왜 왔어?”
“끼잉.”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너, 너무 귀여워!
그래, 마물이건 아니건 뭐가 중요해!
여전히 새까맣고 큰 눈망울이 촉촉하게 빛났다. 거기에 앞발을 얌전히 모은 채 낑낑거리는 녀석을 마주한 자리엔 일말의 두려움조차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도 그럴게 아이네가 아까 본 건 고작해야 다람쥐가 란델의 손등을 콱 깨무는 정도였으니까.
이게 다 테고의 철통 수비로 다람쥐 무리가 란델을 씹어 삼키는 장면을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한 덕분이다.
“어쩌지, 도토리나 호두 같은 건 아무것도 안 갖고 왔는데…….”
제아무리 마물이라는 걸 알았어도 겉모습에 현혹되고 마는 게 당연하다. 아이네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러고는 테고와 맞잡지 않은 손을 뻗어 조심스레 다람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르르, 키이잉.”
그러자 기분 좋다는 듯 고로롱거리며 다람쥐가 아이네의 손에 제 머리를 한껏 비볐다.
“……이젠 좀 가증스럽기까지 하군.”
잡은 손을 놓기 싫어 함께 꿇어앉은 테고의 눈이 못마땅하게 변했다.
그때, 한참을 아이네의 손안에서 재롱을 피우던 다람쥐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 나 주는 거야?”
“키익!”
“과연…… 최상급 마물이라 자체적으로 아공간까지 갖고 있는 듯합니다.”
다람쥐가 경계 외부와 가까운 풀밭 위에 올려놓은 건 란델이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던 회중시계였다.
“이걸 왜……. 어, 어쨌든 고마워. 람쥐야.”
그에 아이네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시계를 주우려 손을 뻗었다.
“잠깐만, 공녀.”
그러나 무언가를 보고 미간을 찌푸린 테고가 이를 제지했다.
“이래 봬도 꽤 무거울 테니 그건 내가 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회중시계를 제 손에 쥔 그는 옆면에 묻은 핏자국을 서둘러 옷에 문질러 닦았다.
허술한 마물 같으니…….
이런 걸 공녀에게 보여줄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크이이익.”
“그래, 다음에 또 올게.”
분명 말이 통할 리 없는데도 대화를 나누는 듯한 둘 사이에 테고가 끼어들었다.
“공녀……. 방심하면 안 됩니다. 저건 인간만큼 지능이 높은 최상급 마물이란 말입니다.”
“아니, 저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방심을 안 해요.”
“…….”
아이네의 말에 테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귀여움에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일에 대해선 자신도 할 말이 없으니까.
“아이네!”
“어서 이쪽으로 넘어오셔야 합니다, 공녀님!”
“마, 마물이 이렇게 가까이!”
다람쥐 마물을 보고 새파랗게 질린 공작과 기사들이 경계 가까이로 몰려들었다.
심지어 몇몇은 검까지 빼 들고 기세를 끌어올린 상태였다.
‘테고만 이상한 게 아니었네.’
음, 역시 다람쥐가 귀엽고 무해하다고 생각하는 건 원래 세계에서 비롯된 편견이었나 보다.
여전히 새카만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는 다람쥐를 향해 아이네가 손을 뻗어 가리켰다.
그래! 다람쥐의 귀여움을 모른다면 이제부터 알면 되지!
“괜찮아요! 우리 애는 안 물어요!”
“키이잇!”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다람쥐의 작은 입이 좍 벌어지며 여러 겹으로 난 이빨이 차례로 돋아났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아이네도 할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제가 잘못 알았네요. 생각해보니 우리 애가 다른 사람은 물더라고요.
“…….”
“…….”
날카로운 이빨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한껏 건치를 과시하던 다람쥐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폴짝폴짝 뛰어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눈앞에서 최상급 마물을 마주한 모두가 침묵한 그때, 베룸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크, 흠흠! 그나저나……. 이제 그만 그 손 좀 놓지?”
* * *
“흠흠, 그럼 어서들 들지.”
“네!”
“예.”
공작성으로 돌아온 일행의 저녁 식사 자리엔 테고도 함께였다. 그래봤자 베룸 공작과 아이네, 테고 셋뿐이었지만.
아이네는 성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인 공작부인에게 달라붙어 있다 온 참이었다. 다행히 기력을 많이 회복한 어머니는 당장 내일이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수 있을 듯했다.
무사히 돌아온 아이네를 한번 끌어안아 주고는 내내 테고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궁금해하셨으니까.
“네 아버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리테루온 공작이 마음에 들더구나.”
“네? 처음부터요?”
“잘생겼잖니!”
왜 아버지가 테고에게 더 퉁명스레 구시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따로 더 묻지는 않으셨다. 아마 궁금한 게 많으실 텐데도.
‘그사이에 테고 경이랑 아버지가 이야기를 마무리한 걸까.’
아까 경계의 숲 밖으로 나와 아이네가 한 거라곤 가만히 고개를 젓는 것뿐이었다.
“아이네, 베르길리우스 소남작은……?”
“…….”
차마 다람쥐들이 란델을 처리했다고 말하기는 껄끄러웠다. 여전히 그 보들보들한 촉감이 손안에 남아있었으니까.
“아아, 역시”
“좀 닮았다고 해서 전부 혈육인 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황족 참칭자의 최후로군요.”
그러나 이미 눈앞에서 최상급 마물을 마주한 이들은 그녀의 생각보다도 더 쉽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뒤늦게 뛰어 들어간 테고조차 멀쩡하게 아이네와 걸어 나오지 않았나.
그렇게 란델 건은 황실의 직계도 아니었던 자의 소동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받아들이는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
그러고 나서야 아이네는 깨달았다. 란델의 존재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지워진 것도 원작의 영향력의 일종이란 걸.
게다가 사건의 전말을 목격한 테고와 아버지도 이 기묘한 위화감을 눈치챈 듯했다. 아직 완전히 끝나진 않은 거다.
“제1기사단은 오늘 밤에 황도로 즉시 출발한다고 하더구나. 루체 경은 여전히 폐하와 통신 중인 모양이야.”
빠르지만 우아하게 저녁 식사를 끝낸 베룸 공작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앗, 그럼 저희도.”
“안 돼. 너는 지금 이 상황에 황도로 갔다간…….”
이 다음에 아이네를 보는 건 결혼식장에서일지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베룸 공작이 이를 갈며 테고를 노려보았다.
데뷔탕트를 하라고 황도에 보내놓았더니 도착하자마자 약혼에, 이번엔 황제가 친히 공증한 혼인 서약서가 날아들었다.
아무리 눈뜨고 있어도 코 베어 간다는 황도라지만!
이 모든 게 테고보다는 황제의 농간이라는 걸 잘 안다. 아마 가족 없이 홀로 남은 리테루온 공작의 입지를 더 단단하게 다져주려는 의도도 있을 테다.
‘결국 따지고 싶으면 나더러 황도 중앙 정치에 발을 들이라는 뜻이겠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으나 베룸 공작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가 여전히 베룸 영지를 벗어날 수 없는 금제에 묶여 있는 한은.
‘황손까지 제거됐으니 8년 전에 본 장면들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까지 내 개입을 막을 셈인 거지?’
어느 순간부터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무형의 힘은 베룸 공작이 영지 밖의 일에 개입하는 걸 철저히 막아섰다.
그가 짐작하기론 그건 숨이 멎었다가 깨어난 아이네의 눈 안에서 미래를 본 대가였다.
그러니 지금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다.
‘이제 아이네가 발현자라는 게 알려진 이상 예전처럼 베룸 안에만 둘 수도 없고.’
역시 당분간 아이네를 가까이서 지켜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건 똑똑하긴 해도 검술 쪽으로는 그다지 재능이 없는 나딘보다는…….
베룸 공작의 시선이 훤칠한 미청년인 테고에게로 가 닿았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남자다. 외모, 지위, 아이네와 비슷한 나이, 적수가 없을 만큼 출중한 무력.
“그렇다면 저도 베룸에 잠시 머물겠습니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산지의 오징어 정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테고의 앞엔 빈 그릇이 가득했다.
오징어를 즐길 줄 아는 바람직한 식성까지.
‘그래, 아이네의 신랑감으로는 이만한 자가 없지. 안다, 아는데…….’
베룸 공작은 마음과 달리 조금 못마땅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공작은 돌아가도 좋네만.”
그런 대답에도 불구하고 테고의 시선은 아이네에게 똑바로 향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알아볼 게 좀 남아서 말입니다.”
엥? 뭐, 뭘?
아이네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테고와 아버지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지금 이 남자가 아버지 앞에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설마 아까 서로 알아가는 사이가 되자고 했던 말을 꺼내려는 건 아니겠지?’
직진도, 직구도 다 좋지만 때와 장소를 좀 가려서 해달라고요.
“아버지, 그게 아니라요!”
다급하게 변명하는 그녀와 달리 테고는 침착하게 탁자 위로 무언가를 꺼내어 올려두었다.
“이게 바로 그…….”
“유폐되었던 황손이 갖고 있던 베르길리우스 남작가의 물건입니다.”
그건 아까 테고가 아이네 대신 주워서 갖고 있던 회중시계였다. 다시 한번 공들여 닦았는지 표면에 반사되는 다이닝룸의 조명이 눈부셨다.
“폐하께서 마리에 남작 영애의 물건이 맞는다는 건 확인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왜 그자의 손에 들어가 있었는지, 베르길리우스 남작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아, 그 이야기였어?
괜히 머쓱해진 아이네의 두 손이 무릎 위로 다시금 얌전히 내려갔다.
후, 다행히 파국만은 면했네.
테고의 말이 맞았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베르길리우스 남작가 지하에 있다는 그 기록이라는 거. 그게 아직 남았잖아.’
역시 란델에 대해서는 이미 둘 사이에 충분한 말이 오고 간 듯했다. 아버지께선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으니까.
“그런데……. 뭐가 아니란 거니, 아이네?”
허둥지둥하던 아이네에게로 베룸 공작의 다정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이 날아들었다.
어찌 베룸 공작이 모를 수 있으랴. 제 자식을 한두 해 보아온 것도 아닌데.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하며, 분명히 저 리테루온 공작과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거다.
다시금 아이네의 등에 식은땀이 솟기 시작했다. 나딘의 빠른 눈치와 영민한 감각이 누구에게서 왔겠는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연신 마른침만 삼키는 아이네는 ‘네’만 반복하는 로봇이 되었다.
“네? 네에?”
“아,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완전히 식사를 마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고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이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게 눈을 맞춰준 후, 베룸 공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늘 그렇듯 담담해 보이는 표정 아래, 긴장으로 굳은 턱이 단단했다.
설마, 설마 뭘 말하려고?
“저와 따님의 교제를 허락해주십시오.”
“지금, 뭐라고……?”
결국 이 직진남이 저질렀다.
아이네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아아, 파국이다.
* * *
하지만 테고의 정중하고 우직한 태도는 공작으로부터 정원 산책 허락까지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제 마음을 드러내는 그 앞에서 누가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심지어 두 사람은 표면적으론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약혼 관계였다.
딱히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한 베룸 공작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럼, 딱 한 시간이다. 그건 아이네가 본관으로 복귀하는 시간까지도 포함일세.”
아직 정식으로 교제를 허락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 뒤따르긴 했지만.
“아버지께 그렇게 바로 말씀드릴 줄은 몰랐어요.”
오늘따라 조명이 더 환하게 비치는 정원을 걸으며 아이네가 입술을 비죽였다.
“이미 성인인 공녀의 의견을 무시한 건 아닙니다, 다만.”
테고가 잠시 말을 멈추고,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루체를 비롯한 제1기사단을 배웅하고 나니 어느덧 꽤 어둑해진 시간이었다. 테고는 이제 아이네의 느린 발걸음을 꽤 익숙하게 맞춰 걸을 줄 알았다.
그녀의 걸음걸이 따위는 무시하고 쌩하니 먼저 정원을 빠져나갔던 지난날과는 달리.
“다만?”
목을 한참 꺾어 올려다보아야 하는 테고의 큰 키 때문에 아이네는 고개를 든 채로 두 눈만 깜박였다.
조명과 새하얀 달빛이 그대로 부서지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테고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역시 베룸 공작에게 미리 교제 허락을 구한 건 잘한 일이었다.
‘이젠 이렇게라도 내게 브레이크를 걸어 놓아야 할 테니까.’
이 작고 순진한 공녀는 아마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여태 그에게 제동을 걸었던 건 오로지 아이네의 의사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부로 그녀 역시 자신의 마음과 같은 방향이란 걸 알았으니…….
고삐를 풀어내고 마음껏 날뛰고 싶어 하는 제 욕망과 충동들을 언제까지 억누를 수 있을까.
“좀 더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교제를 숨길 관계는 아니지 않습니까.”
웬만해선 표정 변화를 잘 내비치지 않는 고요한 얼굴에서 단 한 군데. 테고의 눈에서만큼은 갖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 일렁였다.
‘그러니까 내가 나중에 모른 척 발을 뺄까 봐 미리 퇴로를 차단했다 이거지?’
보면 볼수록 은근히…… 계략남 같은 면모도 있다니깐. 하긴 여태 그녀가 빤히 보이는 테고의 마음을 모른 척하며 얼버무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흐, 흥! 아니, 뭐. 제가 설마 한 입으로 두말할까 봐 그래요?”
이런 남자를 여자로 착각했었던 흑역사까지 떠오르자 아이네는 슬쩍 시선을 내려 피했다.
그때, 그녀의 눈앞으로 커다란 손이 내밀어졌다.
“그럼, 제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공녀와 제가 손잡기 정도는 별 이유 없이도 할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경계의 내부나 연회에서처럼 안전을 위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어쩔 수 없이 잡았던 것 말고. 연인으로서 그녀와 손을 잡고 싶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테고의 제안에 아이네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이, 이 정도는 어렵지 않지!’
그의 손 위로 올리는 제 손바닥이 쿵쿵대며 잘게 떨렸다. 그리로 심장이 옮겨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아이네의 손끝이 가까스로 테고의 손바닥에 닿았다. 그러자 그가 서둘러 제 손안에 아이네를 가두어 잡았다.
따뜻하고 약간은 건조한 살갗이 마주 닿은 느낌에 아이네의 뺨이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라, 이거 뭐야. 어쩐지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거 같은데…….’
괜스레 심술이 난 그녀가 톡, 하고 쏘아붙였다.
“겨우 이 정도로 증명이 되겠어요?”
그럴 리가.
하지만 지금 이 손을 잡은 것처럼 천천히, 서두르진 않을 생각이다.
테고는 말없이 미소만 조용히 지었다.
* * *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하고, 욕심엔 끝이 없는지 모른다.
“…….”
테고는 처음 알았다. 자신이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스스로 했던 다짐을 번복할 수 있는 인간이었는지.
천천히 다가간다고? 서두르지 않겠다고?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참겠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닐까.
“이쪽은 이번에 새로운 걸 심었나 봐요! 확실히 저번이랑은 다르지 않아요?”
오랜만에 돌아온 제 집 정원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자 아이네는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바빴다. 물론 그 와중에도 테고와 꼬옥 맞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로.
그 바람에 테고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이네가 그에게 잡힌 모양새였지만 말이다.
“그렇습니까.”
여전히 나지막하고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하면서도 테고의 눈길은 다른 곳에 머물렀다. 여린 새싹처럼 옅은 초록빛 머리카락이 돋아난 정수리가 자꾸만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공녀가 날 남자로 봐주기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이네가 제게 마음을 열었다는 걸 알고 나니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 한 번 손을 잡아보고 나니 손깍지 정도는 괜찮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고.
손가락이 서로 얽혀드는 손깍지가 가능하다면…….
‘그럼 살짝 안아보는 정도도 사실상 손잡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흘러갔다는 걸 깨닫자마자 테고는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동시에 당황했다.
큰일이다.
함께할수록 더 가까이, 더 많이 닿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불쑥 치솟았다.
‘역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거야.’
지난번, 그녀에 대한 제 마음을 자각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극도의 피로함이 제 인내심에 타격을 준 게 틀림없다.
결국 테고는 여태껏 아이네에게 끌려 다니기만 하던 제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제지했다.
“잠깐만, 공녀.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들어가는 게…….”
그러다 자신이 어디까지 들어왔는지를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지금까지 제 말 거의 안 듣고 있었죠?”
“이곳은…….”
아이네가 뾰로통한 표정과 함께 자그마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웃은 얼굴 다음으로 테고가 귀엽다고 여기는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제 욕망을 익숙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에겐 확실히 버거운 자극이었다.
“온실 근처라면.”
“맞아요, 웬만해서는 사용인들이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테고는 마른침을 삼키며 남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급히 쓸어내렸다. 그녀와 닿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누르고 있는 제게 이런 최적의 환경까지 제공해주는 건 곤란한데.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아이네가 꼭 그만큼 다가와 테고의 바로 턱밑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 이제 말해봐요.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죠?”
“뭘, 말입니까.”
심지어 여기엔 다른 장소에서처럼 그들을 감싸는 화려한 조명조차 없었다. 빛에 약한 식물들을 위해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들만 드문드문 박혀있을 뿐.
“그럼, 한 번만 안아봐도…….”
“아버지랑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낮고 탁한 테고의 목소리와 낭랑한 아이네의 목소리가 한데 얽혀들었다.
“한 번만? 방금 뭐라고 했어요?”
다행히 공녀는 듣지 못한 듯했다. 하마터면 교제를 시작한 첫날, 제 속내를 들킬 뻔한 테고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아닙니다.”
그러고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공녀에겐 황도의 상황이 전해지지 않았겠군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 머리를 보며 테고는 차오르는 한숨을 겨우 삼켜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 대화만 마무리 지으면 허락받은 한 시간이 대강 채워질 테니.
“이미 베르길리우스 남작가로 제2기사단이 급파되었습니다. 곡물 수레의 흔적도 대거 발견되었다고 하니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아이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란델은 일이 틀어질 걸 대비해 연합왕국을 끌어들일 생각이었던 거다.
그럼 폐태자의 아들인 란델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그자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남부 귀족들은요?”
그 말에 테고가 속이 후련하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삼 년간 아무리 애써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귀족파와 반란군의 연결고리도 이제 곧 밝혀질 테다.
“폐하께서 어떤 계책을 쓰셨는지 몰라도 벌써 그 황손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음알음 알려진 모양이더군요.”
란델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테고는 슬쩍 아이네의 목 부근으로 눈길을 주었다.
경계를 나온 이후엔 남아있던 작은 상처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놈에게 위협받은 사실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테고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제 손으로 응징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저 가느다란 목에 검을 댈 곳이 어디 있다고.’
물론 란델은 차라리 단칼에 죽는 게 나을 만큼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자가 아이네에게 칼을 겨누고 압박하던 장면은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계획이 틀어진 걸 알고 황성을 빠져나오려던 몇 명과 게롤드 후작은 이미 구금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 곡물 수레의 행방만 찾아내면!”
아이네가 밝아진 얼굴로 손바닥을 마주쳐 짝, 소리를 냈다.
“그 부분은 재무부의 에펜베르크 영애와 나딘 공자에게 맡겨도 될 겁니다.”
“와, 이제 드디어 끝이구나.”
저도 모르게 흥분한 아이네는 곧바로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은 탓이다.
‘이것까지 모른 척해줄 리는 없겠지?’
역시나 그녀를 바라보는 테고의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요.”
잠시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테고가 아이네의 나머지 한쪽 손까지 한데 모아 그러잡았다.
“나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면, 전부 다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정작 아이네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테고의 침착한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공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직 나만이.
당신이 내게 그랬듯.
비록 대상을 착각했다고는 하나, 모닥불 앞에서 아이네가 해주었던 말은 큰 위안이 되었으니까.
‘네. 테고 경이 아니면 안 됐어요.’
‘당신이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이유가 다른 누구의 ‘대신’이라서는 아니에요. 이거 하나만은 믿어도 돼요.‘
처음으로 약한 속내를 온전히 드러낸 자신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존재를 긍정해주던 공녀였다.
“나에게 ‘아이네’는 당신뿐이니까요.”
어느새 테고의 손가락이 아이네의 손 사이로 얽혀들어 갔다. 손가락 굵기가 현격하게 차이 나 받아들이기에 버거운 느낌이 들었지만…….
“정말, 정말로 상관없어요?”
내가 어떤 존재라도?
망설이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준 아이네의 목소리엔 어느새 물기가 배어있었다. 거기에 눈가도 조금 붉어진 듯했다.
어둑하고 으슥한 정원의 가장 깊은 곳. 희미한 조명만이 미약한 빛을 내는 가운데 이제 막 연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는 두 남녀가 있었다.
“물론입니다.”
또다시 뜨거운 피가 빠르게 온몸을 데우며 간신히 억눌러둔 욕망을 충동질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울멍울멍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아이네는 심장에 아주 해로웠다.
서로 두 손을 맞잡고 있는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기꺼이 허리를 잔뜩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춘 테고가 조금은 괴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약간은 위험할지도.
이성과 본능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설령 당신이 남자였다고 해도, 나는 감수할 겁니다.”
있는 힘을 다해 끌어 모은 한 줌의 이성이 본능을 물리쳤다. 그로서는 흔치 않게도 눙치는 듯한 발언과 함께.
“그, 그건……. 아무튼 그런 건 아니에요!”
아이네가 금세 눈에 힘을 주고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서로 간에 오가던 긴장감이 싹 걷혔다. 그러자 테고는 끝까지 참아낸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한편, 남몰래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와는 달리 자신은 정말로 아이네가 남자였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서.
* * *
“…….”
“어때요? 잘 어울려요?”
그렇다고 해서 공녀가 남자가 된 모습을 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베르길리우스 가문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아이네는 연신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았다.
“그럼, 리테루온 공작은 당장 내일 아침 떠나겠다는 건가?”
“예, 일단 베룸 영지에 머무는 것으로 하고 비밀리에 베르길리우스 영지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칼릭을 포함한 제2기사단 전부가 베르길리우스 영지에서 수색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테고가 제2기사단의 단장이라고 해도 그쪽으로 바로 넘어갈 순 없다.
폐하에게 공증받은 혼인 서약서를 핑계로 베룸 영지에 온 만큼 나중에 말이 나올 수도 있는 사안이니 말이다.
그러나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네가 번쩍 손을 들었다.
“아버지! 저도 갈래요.”
“무슨 소리냐. 너는 좀 더 쉬어야 해.”
테고 역시 이번엔 베룸 공작과 같은 의견이었다. 베르길리우스 영지는 갈라져 나온 테르미누스 산맥에 걸친 척박한 곳이다.
란델도, 반란군도 모두 제거되었다고는 하지만 어제 아이네가 한 말대로라면 아직 무언가 남았을지도 모르니까.
무엇보다 또다시 위험에 처하게 될 그녀를 볼 자신이 없었다.
“……공녀까지 함께 움직이면 분명히 누군가 알아챌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표현력의 한계로 테고는 이런 식으로밖에 만류할 방법이 없었다.
“걱정 말아요. 어차피 황도의 일은 폐하께서 처리 중이라고 하시니…….”
아이네의 눈이 다시 한번 결연한 빛을 띠었다. 란델이 말했던 그 기록, 누구보다 그녀가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 안에 아이네에 대한 내용과 진짜 원작이 언급되어 있다면…….
“제가 직접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그래요.”
그에 대비하든, 기록을 처리하든 대책이 필요했다. 다시 소환하여 허리춤에 숨겨둔 단검의 존재가 묵직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