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남겨진 진실
“이건 에펜베르크 영지로 넘어갈 때까지만 쓰고 있으면 되는 거죠?”
“혹시 모르니 기사단에 합류하고 상황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는 방심하면 안 됩니다.”
아이네는 어색한 손길로 짙은 청록색 가발을 매만졌다. 로브를 입었다고는 하나 경계가 강화된 검문소를 지날 땐 얼굴을 보여야 했다.
그래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솜씨 좋게 가려진 채였다.
그러나 난생처음 써보는 가발에 익숙해지기엔 아이네에게도, 테고에게도 시간이 부족했다.
“앗, 최대한 조심조심 움직이셔야 해요. 아가씨.”
“가발이 이렇게 답답한 거였어?”
아예 다른 색의 가발을 고르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 혹여나 원래의 머리카락이 비어져 나올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같은 이유로 머리가 진한 밤색인 테고도 어두운 색의 가발을 썼다.
“완벽하게 숨길 수만 있으면 한 번쯤 다른 색 가발도 써보고 싶었는데……. 이건 완전히 나딘이잖아.”
끙, 앓는 소리를 내뱉는 아이네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이런 곳에서 뜬금없는 남매 인증이라니.
나딘의 머리카락은 아이네보다 조금 더 짙은 올리브색이었다.
거울을 보며 투덜거리는 아이네의 모습에 테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의 시선이 다시금 아이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힐끔 스쳐 지나갔다.
“…….”
머리만 짧아졌을 뿐 동글동글하고 앳된 이목구비며 가느다란 체구는 그대로다. 거기에 남자치고는 지나치게 가늘고 높은 목소리까지.
글쎄, 잘 봐줘야 십 대 초반의 어린 소년으로 보일 듯한데…….
애초에 이런 어설픈 남장에 속아 넘어가는 자가 있다면 차라리 눈을 감고 다니는 게 나을 테다.
‘음, 이런 말은 차라리 안 하는 게 낫겠군.’
그동안 아이네와 지내면서 테고는 눈치라는 걸 배운 참이다. 그래서 그는 마차 창문 밖으로 애써 눈길을 돌렸다.
한편, 아이네의 손에서는 어느새 거울이 내려간 지 오래였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테고의 모습을 요리조리 살피는 데에 열중했다.
‘그나저나 테고 경은 검은색 머리도 찰떡처럼 소화하네.’
진짜 미인은 피부색과 머리 색을 가리지 않는다던 말이 진짜인가 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원래의 밤색 머리카락도 언제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흑발도 타고난 색인 것처럼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번에는 손끝 하나 닿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 오히려…….’
평소처럼 노출 하나 없는 단정한 차림. 거기에 타고난 흰 피부와 어우러져 금욕적이다 못해 차가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이네는 방금 거울로 보았던 제 모습을 떠올리고 남장이 쉽지 않은 일이란 걸 깨달았다.
‘진짜 남자 옆에 있으면 이렇게나 바로 비교가 되는구나.’
그러고 보니 테고가 새삼 얼마나 잘난 남자인지 알게 된 것도 그랬다. 달라진 거라곤 그저 저 혼자 하던 착각을 걷어냈을 뿐인데.
그리고 이제 겨우 ‘친구’ 단계에서 한 발자국 더 내디딘 게 전부였다.
‘뭐야, 그보다 마차가 너무 좁은 거 아냐?’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안 그래도 평소보다 좁은 마차 안이 더 비좁게 느껴졌다. 자꾸 저번부터 숨쉬기도 좀 버거운 거 같고…….
그때, 옆얼굴로 와 닿는 따가운 시선을 견디다 못한 테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베르길리우스 남작저에 도착하면 바로 지하로 가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살짝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쉬었던 아이네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한 가지 염려되는 일이 떠올랐다.
“혹시, 단원들이 벌써 저택 지하까지 들어갔으려나요?”
그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테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저택 내부 수색 명령까지는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숨겨둔 곡물을 먼저 찾아내는 게 우선이니까요.”
그제야 눈에 띄게 안도하는 아이네를 보며 테고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저택 지하에 뭔가 중요한 게 있습니까? 공녀가 이렇게……까지 급하게 확인해야 할 만큼?”
그의 눈길이 아이네의 가발에 흘깃 닿았다가 떨어졌다.
“네, 아주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무릎 위로 제 두 손을 간절하게 맞잡았다. 그에 테고의 시선이 잘게 떨리는 손으로 옮겨갔다. 그러고는 신중해진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확인이 끝나면 제게 시간을 좀 내줬으면 좋겠어요.”
이미 아이네는 반쯤 결심했다. 그 ‘기록’이라는 걸 확인하고 모든 걸 확신하게 된 후엔 테고에게 이야기하겠다고.
여기는 누군가가 글로 써서 만들어낸 세계라는 걸.
‘그래서 그 세계를 믿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적어도 테고 경은 믿어줄 거다. 그리고 받아들여 줄 거다. 테고가 제게 그러겠노라 고백해서 그리 확신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우리 둘은 원작 시작 전에 이미 사라졌어야 했다는 것도 말해야 할까.’
여전히 일말의 불안감은 마음 한구석에 눌어붙어있었다.
과연 다른 세계에서 온 빙의자라는 사실을 테고 경이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심각해진 아이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테고는 직감했다. 바로 지금이 그녀의 초조함과 긴장을 달래주고 의지가 되어줄 순간이란 걸.
그렇게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아가씨, 잠시 쉬었다가 가도 되겠습니까?”
언제나 그래왔듯 이번에도 어김없이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무슨 일 있어요, 로윈 경?”
“하…….”
달싹거리던 입술을 가볍게 깨문 테고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군.’
아이네의 예전 호위 담당이자 빨간 머리가 취향이라 케이트와 결혼하여 1남1녀를 둔 로윈 경의 목소리였다.
* * *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로 가야 하다 보니……. 이쯤에서 마차 바퀴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조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경사가 없는 평지라서 속력을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고는 로윈 경이 빈 수통을 들어 보였다.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이느라 작은 마차에 짐은 거의 싣지 않은 탓에 말에게 먹일 물이 금방 바닥났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서둘러 물을 떠 오겠습니다. 근처에서 물소리가 들려서요.”
로윈의 말에 아이네가 마침 잘되었다는 듯 반색하며 수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내 좁은 마차 안에 앉아있어 답답하던 참이니까.
“그럼 로윈 경은 여기서 바퀴를 조이고 있어요. 물은 다리 운동도 할 겸 나랑 테고 경이 떠올게요.”
“하지만, 어떻게 아가씨께…….”
머뭇거리는 로윈에게서 테고가 수통을 받아들었다.
“공녀의 말대로 하지.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는 편이 나을 테니.”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또 제게만 묘하게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아니, 예전에도 그렇고 왜 나한테만 이러시는 거야.’
로윈은 어쩐지 억울했다. 그러나 이제는 테고 경이 리테루온 공작이자 제2기사단장이란 걸 알았기에 한마디 반박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얼마 전에 왔던 제1기사단장이라던 루체 경이라는 사람도 무뚝뚝하기 그지없던데, 역시 황도 사람들이란…….
“금방 다녀올게요!”
“물소리를 들으니 여기서 금방이겠군요.”
아가씨에겐 변함없이 다정한 걸 보면 영 나쁜 분은 아닌 듯하고.
틀림없다. 날 싫어하시는 거다.
‘아, 케이트랑 우리 애들 보고 싶다.’
로윈은 마차 바퀴 앞으로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이네의 곁을 따라 걸으며 테고는 아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공녀, 어제 했던 말은 전부…… 진심입니다.”
“알아요. 그 말 하려고 로윈 경을 따돌린 거예요?”
“그건…….”
쓴웃음을 지으며 아이네가 물가로 다가가 앉았다. 테고의 진심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그보다 그에게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을 뿐.
하지만 자꾸 테고에게 끌리는 제 마음과 그의 태도에서 조금 답을 얻은 것도 같았다. 일단은 남작가에 도착해서 기록만 제대로 확인한다면…….
“줘요, 내가 채울게요.”
“아.”
뒤늦게서야 그녀를 따라 앉으려는 테고를 제지했다. 그러고는 수통의 뚜껑을 연 아이네가 제 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소매가 자꾸 흘러내리는데 이거나 좀 걷어줘요.”
“…….”
간신히 고정해둔 아이네의 가발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며 테고가 천천히 그녀의 소맷부리를 접어 올렸다.
별생각 없이 부탁했던 아이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고 경이 등 뒤에 선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쉽게 생각했다.
거기다 그의 커다란 손이 소매를 걷으며 제 맨살을 스치듯 훑기 시작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뭘 잘 모르는 그녀가 느끼기에도 분명 어떤 의도를 가진 손길은 아니었다.
오히려 담백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또 명치가 콱 막힌 것처럼 속이 답답해져 왔다.
‘으, 으으. 저번부터 왜 이러는 거지. 나대지마, 심장아.’
그런데,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야?
“뭐, 뭐예요. 팔꿈치까지만 걷으면 되잖아요.”
“아……. 팔이 왜 여기까지밖에.”
테고의 눈치는 종종 너무 뒤늦게 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말에 볼이 발그레해지려던 아이네의 눈이 단박에 세모꼴이 되었다.
“그거 지금 팔 짧다는 소리죠?”
정말로 이런 남자를 믿고 전부 다 설명해줘도 되는 걸까.
어제는 날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서요!
* * *
다행히 아이네 일행은 까다로운 검문을 거치지 않고도 에펜베르크 영지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게 다 주도면밀한 칼릭이 이미 검문소에 누군가를 보내둔 덕분이었다.
“앗, 당신! 맞네요? 더글라스 경!”
“예? 예에. 어, 그런데 두 분 다 머리가 왜…….”
그때, 아이네의 뒤에서 테고가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더글라스, 임무를 수행 중일 땐 입이 무거워야 한다고 ‘훈련’받지 않았나.”
훈련이라는 소리에 더글라스는 잔뜩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검문소 앞쪽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토, 통과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또다시 ‘더글라스 꼴’이 된 그를 뒤로하고 검문소를 지났다.
다시 마차를 달려 도착한 베르길리우스 남작 저택은 그리 머지않은 거리에 있었다.
“수색 명령 없이도 우리가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어차피 실종된 진짜 베르길리우스 소남작도 찾아야 하니까요.”
근처에서 수색 중인 제2기사단은 다행히 아직 복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로윈 경을 경비로 세워 둔 채 아이네와 테고는 저택의 지하로 향했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내려간 곳에는…….
“이것 또한 마도구로군요.”
란델이 이야기했던 그 기록이 있었다. 테고 역시 보자마자 마도구라는 걸 단박에 알아챌 정도였다.
그렇지 않다면 허공에서 스스로 움직여 종이에 글을 적어나가는 펜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 옆에는 기록을 간추린 듯한 책이 몇 권 나란히 놓여있었다. 아이네는 정말로 질린 듯한 얼굴을 했다.
“왜, 왜 이렇게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설정들이…….”
그녀가 홀로 중얼거리는 동안 테고가 먼저 펜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기록을 하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는 마도구를 면밀히 살폈다.
“고대어인가. 지하에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해도 내용을 알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다가간 아이네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동안 그렇게 바랐지만 포기했던, 자신에게 주어진 빙의자 버프가 무엇인지.
“이건…….”
테고의 눈에는 지렁이같이 보일 글씨들이 아이네에겐 전부 명확하게 읽혔다. 버프가 아니라면 ‘베룸의 눈’ 덕분일지도 모른다.
아이네의 음성이 약간 떨리듯 지하실 안에 울려 퍼졌다.
“테고 경, 제국에 고대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글쎄요. 단순한 단어라면 모를까, 이런 긴 문장을 읽을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다만…….”
그러고는 테고의 시선이 천장 위로 향했다.
“남작의 병세가 위중하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베르길리우스는 제국을 건국할 때부터 있었던 오래된 가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건국 공신 가문들과는 다르게 변방 남작으로만 남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다.
이런 마도구를 여태 숨기면서까지.
* * *
시그노.
남겨진 자라는 뜻인 ‘시그노’로 스스로를 지칭하기 전, 그녀의 이름은 원래 베룸이었다. 유희를 통해 얻은 아이들에게 제 이름을 성으로 붙인 건 나머지 셋도 같았다.
고대의 마도 왕국이 멸망한 그 자리에는 에스피오 제국이 들어섰다. 단 네 명의 고대 일족이 제국을 세웠다는 건국 신화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넷인 건 맞지만 그 넷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자신들의 기원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존재했다. 그리고 주어진 삶의 주기를 무사히 마치면 그때마다 한 단계 위 고등 생물체로 다시 삶을 시작했다.
‘이렇게 생을 거듭하다 보면 그 끝엔 뭐가 있지?’
그때는 몰랐지만 막연하게 그런 의문을 계속 품었나 보다. 어느새 자신의 머릿속에 그 물음만이 남은 걸 보면.
이유도 없고, 목적도 모르는 삶이었다. 그렇게 기나긴 세월을 보낸 후, 베룸은 자신과 꼭 같은 존재를 셋 더 만났다.
“너희들도 그렇게 몸을 갈아타면서 살아왔다고?”
“갈아타다니! 우린 선택받은 존재야.”
“지금 이 몸은 인간이라는 종인 거지? 그럼 이 다음에는 뭐가 될까.”
그렇게 고대 왕국민의 삶이 끝나자 그들에겐 드래곤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고대 왕국을 망설임 없이 무너뜨렸다. 그건 고민할 필요 없이 당연하게 정해진 일이었다.
어느 순간까지는 베룸 역시 다른 셋처럼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삶을 즐겼다.
생각해보면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얇은 막에 둘러싸여 있던 ‘자아’가 예고도 없이 깨어난 건.
‘난 누구지? 왜 존재하는 거야?’
그렇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를 의심하는 첫 존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제 존재는 그 셋과도 조금 달라서였는지 모른다. 이미 완벽하게 구성된 세계에 부랴부랴 뒤늦게 끼워 넣은 듯한 제4의 존재.
그래서였을까.
자신이 다른 셋과 달리 ‘자아’라는 걸 갖게 된 건.
“아, 이번 유희는 뭘로 해볼까?”
갈색 머리카락의 잘생긴 청년이 무료하게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황도가 잘 보이는 언덕 위 나무 꼭대기에 서 있던 검은 머리 소년이 훌쩍 뛰어내렸다.
웬만한 성벽보다 높은 위치에서 뛰었는데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다. 다치기는커녕 착지하는 발걸음이 솜털처럼 가볍기 그지없었다.
“사백 년 전처럼 용병 길드나 운영할래? 이번엔 리테루온 네가 용병 대장을 맡으면 되겠다.”
“아냐. 이제 용병 길드는 좀 어렵겠어. 마나 양이 이렇게 줄었는데 마법을 어떻게 써?”
리테루온이라 불린 갈색 머리의 청년이 허공에 손을 휘휘 저으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금발 청년이 손가락을 들어 제 안경테를 슬쩍 밀어 올렸다.
“역시 다들 느끼고 있었습니까. 이상하게 동면에 들었다가 깨어날 때마다 마나가 한 움큼씩 사라지는 것 같더군요.”
“에스피오, 넌 이번엔 무슨 컨셉이냐.”
검은 머리의 소년이 다가와 그가 품에 안고 있는 서류 뭉치를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서류의 가장 위에 쓰여 있는 글씨를 또박또박 읽었다.
“‘장자 세습 폐지와 여성의 작위 계승 필요성에 대한 고찰’? 이게 뭐야.”
“말 그대로입니다, 린데카이르. 신진 귀족들 사이에서 요즘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안건이지요.”
린데카이르라 불린 소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이제 고대어는 쓸 줄 아는 인간이 하나도 없는 거냐며 보고서를 팔랑팔랑 넘겨보다가 북북 찢어버렸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안 되지.”
“그러게. 요즘 인간들은 안 되는 일에 참 정성을 쏟는군.”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대던 리테루온은 손에서 작은 불덩이를 소환했다. 그러고는 갈기갈기 찢어진 종잇조각들이 바닥에 닿기 전에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때,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올리브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왜 안 되는데?”
셋의 고개가 일제히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가장 먼저 에스피오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제 금발을 쓸어 올렸다.
“베룸, 너 저번부터 이상하다?”
안경으로 가려져 있던 눈매가 제법 사나웠다.
이번 유희의 상징물은 안경인 모양이다. 안경을 벗자마자 이번 유희인 학구파 막내 황자 역할은 잠시 접어둔 걸 보니.
“그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거기에 이유가 어딨어?”
“제국을 세울 때부터 제국법으로 정해둔 걸 뭐 하러 바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에 동조하는 셋은 모두 남성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바꾸지 않을 이유도 없는 거잖아.”
베룸이 지지 않고 반박했다. 그러자 다들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리테루온이 특유의 느릿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넌 왜 매번 여성체의 모습인 거지?”
“…….”
마나를 실어 한걸음에 베룸의 앞으로 다가온 린데카이르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소년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정말 그렇잖아? 이제 마법사도 안 나오는데 여성체로 유희하기엔 너무 불리하지 않아?”
다시 안경을 쓴 에스피오가 점잖게 린데카이르의 말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마법을 못 쓰면 검이라도 들어야 하는데……. 그 몸으로는 힘들겠지요.”
늘 이런 식이었다. 그 누구보다 지성체인 것처럼 굴다가도 꼭 어느 지점에선 억지 의견을 고수했다. 오히려 의문을 제기하는 그녀를 별나고 이상한 존재로 몰면서.
“너 도대체 왜 그래? 이건 ‘정해져 있는 일’이잖아.”
그러니까 그게 왜 정해져 있는 일들이냐는 거다. 세상의 다른 모든 일은 자신들이 기준인 양 멋대로 뜯어고치면서.
베룸의 얼굴에 서린 마뜩잖은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린데카이르가 툴툴댔다.
“제국법을 만들 때 너도 다 동의해놓고 왜 이제 와서 딴죽을 거는 거야.”
“제국법? 동의?”
그녀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아직도 동면이 덜 깼어?”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던 리테루온도 근처로 다가왔다.
“우리에게 동면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나? 게다가 넌 한 번도 모습을 바꾸지 않는군.”
급기야 그녀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친우들을 앞에 두고 베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나도 에스피오 제국 건국에 참여했었다고?”
“그래! 그러니까 네 이름을 딴 ‘베룸’ 일족이 북서쪽에서 살고 있는 거 아냐. 우리 넷이 고대 왕국 성벽을 신나게 무너뜨렸던 거, 기억 안 나?”
대륙 동쪽에 자신의 레어를 마련한 린데카이르가 발을 구르는 시늉을 했다.
베룸은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흔들리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제 후손들에게 물려준 것과 똑같은 머리 색. 유희 때마다 성별과 모습을 달리하면서도 바꾸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아니지.
“무슨 소리야. 나는 전혀…….”
그때, 번쩍하는 섬광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통과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과거로 빠르게 시간을 돌린 듯한 기억은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뭐야, 이게.
‘팔백 년 전? 아니, 천 년쯤 전인가.’
한순간에 폐허가 된 돌무더기 위를 그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닐고 있었다. 그러면서 손을 뻗어 깃대를 우그러뜨리며 꺾었다.
처참하게 무너진 고대 왕국의 왕궁 꼭대기에 걸려있던 깃대가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휘어 바닥으로 추락했다.
먼지 하나 묻지 않았건만 괜스레 손을 탈탈 턴 그녀가 뒤로 돌았다. 입가엔 제법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자, 그럼 귀찮은 제국법은 내가 다 정리했으니까 약속대로 레어 선택 우선권은 나한테 있는 거다?”
‘어?’
틀림없는 제 목소리였다. 시야로 보이는 손도 분명 제 손이 맞았다. 여태껏 어렴풋했다가 점점 선명해지는 제 기억도 틀림없이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투와 태도는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입도, 몸도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어.’
한참을 끙끙거린 후에 고작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간신히 시선을 돌리는 것뿐.
무심코 이리저리로 눈을 돌리던 베룸은 구름 사이의 균열을 눈치챘다. 본래의 하늘을 억지로 찢어낸 듯한 작은 틈이었다.
그걸 깨닫자 그 사이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도 들렸다. 아니, 들렸다기보단 머릿속을 뚫고 울리는 감각에 가까웠다.
[하, 이제 와서 연작을 어떻게 쓰라는 거야. 벌써 외전 구상까지 다 해놨는데…….]
소녀는 아니지만 꽤 앳된 여자의 목소리였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숨겨진 일족이 하나 더 있었다고 설정하고……. 여기는 좀 폐쇄적인 편이어서 본편엔 등장 안 했었다고 해야겠다.]
거기까지 듣고 나니 베룸에게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윽.’
마치 작은 목소리에 손이라도 달려서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는 것처럼 기억이 뒤죽박죽 섞이기 시작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처음부터 존재 자체가 재구성되는 고통이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연작에서 주무대는 황도보다 역시 새 영지 쪽이 좋겠지? 특산물을 하나 둬서 초반 에피소드는 이걸로 이끌어가야겠다. 음, 그리고 또…….]
다시금 들려온 목소리에 반응하듯 제 입이 의지와 상관없이 열렸다.
“어디 보자. 뭐야, 오징어? 내 레어랑 영역을 여기로 정하면 동면에서 깨자마자 먹을 수 있겠는데!”
“와, 치사하게 혼자 독차지하겠다고?”
이때는 늘씬한 여성체의 모습이던 검은 머리카락의 린데카이르가 투덜거렸다. 곁에서 막 만들어진 제국법전을 살펴보던 에스피오가 흘러내리는 금발을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여기 쓰여 있는 대로면 나보고 초대 황제가 되라는 건가?”
“그래, 네가 제국 건설에 제일 게을렀잖아. 그리고 넌 금발이니까.”
린데카이르의 말에 에스피오가 발끈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제국법전이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금발이랑 황제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검은 머리나 갈색 머리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아, 그거 내가 써놨어. 그런 법 있어.”
그때, 베룸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이젠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과 몸이 놀랍지도 않다.
과거의 제 몸 안에 갇힌 그녀의 시선이 허공에 띄워둔 지도 위 표시된 위치로 향했다.
‘이런 식으로 결정됐다는 걸 나는 왜 여태껏 몰랐지? 그리고 저 목소리는 도대체 뭐야.’
과거의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제 처지가 답답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연작 설정은 그럼 뭘로 하지……. 아! 본편이 남장 여주였으니까 이것도 비슷한 패턴으로 해볼까. 그대로 하기는 좀 그렇고, 약간만 비틀어서 이렇게…….]
낭랑한 음성과 더불어 무언가를 적는 모양인지 사각거리는 필기 소리도 함께 들렸다. 죽죽 거침없이 긋는 소리를 따라 다른 일족들의 대화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를 제외한 모두는 이 작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베룸, 너는 왜 아티팩트를 안 만들었어? 우린 유희할 때를 대비해서 벌써 만들어놨는데…….”
린데카이르가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그러고는 제 오른쪽 귓불을 두드린 후 나머지 둘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각자 귀와 손가락에 걸고 끼운 아티팩트가 그 자리에서 반짝 빛을 발했다.
왼쪽과 오른쪽 귀걸이, 그리고 하나의 반지.
그렇게 세 개의 아티팩트가 이미 완전한 한 세트를 이루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여기에 더 추가할 만한 거라고는……. 팔찌라도 하나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중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에스피오를 보며 베룸이 씩 미소를 지었다. 아니, 기억에 갇힌 그녀는 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감각을 느꼈을 뿐이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아티팩트 같은 거 말고, ‘눈’을 남겨줄 생각이야.”
그와 동시에 베룸의 눈동자가 여러 색으로 섞여 찬연하게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무슨 눈?”
다른 셋의 물음에 베룸의 얼굴에 일순 기묘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무슨 눈이긴, 내 ‘눈’ 말이야.”
“뭐?”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다들 알았다. 드래곤의 눈이라면 아티팩트의 얄팍한 눈속임 정도는 얼마든지 간파할 수 있다는 걸.
하지만…….
린데카이르가 미간을 찌푸린 채 되물었다.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해? 아티팩트만 물려주면 간단할 일이잖아.”
그리고 곁에 잠자코 있던 리테루온이 맞장구를 치며 거들었다.
“그래, 마나 사용량이 아티팩트와 비교도 안 되게 많을 거라고! 몇백 년간 꼼짝없이 잠만 자야 할 수도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형편없는 효율이었다. 유희하며 얻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큰 희생을 할 일인가.
“나도 알아. 핏줄을 타고 흐르게 하는 쪽이 훨씬 조건이 까다롭다는 건.”
베룸의 말에 린데카이르와 리테루온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알면서 왜……?
그때, 에스피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조용히 가늘어졌다. 황당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 나머지 둘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네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을 통제하게 되겠군.”
베룸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역시 황실 가문의 시초가 된 에스피오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통제라니, 견제라고 해 둬.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잖아.”
“좋아, 대신 조건이 있다.”
검지와 엄지를 딱,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대륙 지도가 소환됐다. 그 지도 위에서 에스피오의 손가락이 어느 경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분간 베룸 일족은 제국 정치에서 물러나는 게 그 조건이야. 최소한 네가 동면에서 깨어날 때까지는.”
별다른 아티팩트 없이 직계 핏줄만으로 이어질 드래곤의 눈도 통제가 필요할 테니까.
에스피오의 제안에 베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베룸은 그날 이후로 몇백 년간 제국에서 분리된 왕국이 되었다.
* * *
“아…….”
베룸의 입에서 깊은 숨이 토해지듯 터져 나왔다. 까마득히 깊은 물속에 잠겨 있다가 막 뭍으로 끌어 올려진 기분이 들었다.
순식간에 몇백 년 후의 현재로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
새삼스레 제 두 손을 펼쳐 이리저리 뒤집어보았다. 이번엔 의지대로 몸이 움직였다.
방금 제게 보인 기억은 도대체 뭐였을까.
분명히 제 얼굴과 목소리였다. 하는 말도 자신이 생각했을 법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질감이 들었다.
“왜 그래? 역시 너무 오랜만에 깨어나서 적응이 안 돼? 그러게 인간의 핏줄에 ‘눈’을 심는 건 무리였다니까?”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린데카이르가 핀잔하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흐름이 과거의 기억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걸 베룸은 드디어 깨달았다.
자신이 보고 온 그 장면들이 기억으로 심어지는 데에 성공한 거라고.
‘아까 그 목소리……. 그럼 그건 누구지?’
궁금했다, 누구일지.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가장 위대한 지성체인 드래곤의 기억마저 조작할 수 있는 존재라니.
‘왜 중간에 새로운 기억을 심었지? 아니, 내가 처음부터 있었던 건 맞는 건가?’
한번 제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하자 그 뒤로는 걷잡을 수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그럴듯하게 짜 맞추어진 가짜란 걸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번 생긴 균열은 없어지지 않고 더 큰 균열로 발전했다. 마치 만들어진 세계에 틈이 생기고 그 사이가 벌어지는 일이 예정된 수순인 것처럼.
‘그 존재가 바라는 목적은 뭘까.’
이제 와서 뒤늦게 과거를 뒤집어 엎어가며 원하는 게.
처음엔 호기심이 더 컸다. 그래서였을까. 이제 갓 성년이 지났을까 싶은 앳된 목소리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숨겨진 일족이 하나 더 있었다고 설정하고……. 여기는 좀 폐쇄적인 편이어서 본편엔 등장 안 했었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그 목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제국의 모두는 베룸 영지를 잊기라도 한 듯이 행동하기 시작했으니까.
공교롭게도 베룸 영지 안의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국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은 것처럼 굳이 영지 밖으로 나가려 하질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예견된 비극이었다. 이 어색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었을 때부터.
‘아이네이스 베룸 공녀가 결국 죽었다는군.’
‘장례식만 치르고 나면 아예 베룸 가문의 문을 닫는다고 하던데?’
‘아무리 아끼던 딸이 죽었다고 해도 너무 과하군.’
이 세계는 베룸이 팔백 년 넘게 동면하는 동안 마나가 희박해졌다. 그 와중에 동면 후 처음 나온 베룸의 발현자였다. 베룸의 눈을 다시 이어갈 직계가 죽은 건 그저 단순한 공작가의 비극이 아니었다.
“이게 뭐야, 안 돼!”
결계 안에 갇혀 벗어나지 못해 발버둥 치던 베룸은 8년이 넘도록 꼼짝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남장한 채 가문을 이어오던 리테루온의 발현자가 반란과 전쟁을 막아내는 걸.
그리고 알았다.
“라니엘 리테루온 영애가 작위를 잇는 건 제국법에 어긋납니다!”
“하지만 여태 잘 해내지 않았습니까? 천 년도 넘은 제국법입니다. 이젠 바뀔 때도 되었습니다.”
“어허, 지금껏 바뀌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시니 바뀌지 않은 겁니다.”
어떠한 서사라는 게 있다면 지금이 그것의 막바지라는 사실을.
“황태자 전하, 아니, 폐하. 용단을 내려주소서. 애초에 고대 일족 전부가 모이지 않았는데 제국법을 바꾼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반란 중에 목숨을 잃은 황제 대신 그 자리에 오른 아르비드가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베룸 일족은 제국법 수정에 찬성합니다.”
본궁 회의장 문을 활짝 열고, 귀족파의 반대를 가볍게 꺾어버릴 이가 등장했다.
“자네가 나딘 베룸 공자인가.”
“예, 폐하. 아버님을 대신해 제가 참석했습니다. 황실의 부름에 뒤늦게 응답한 불충, 벌을 주시면 마땅히 받겠습니다.”
“베룸은 그간 가문의 문을 닫았으니, 그럴 의무가 없었지. 그럼 이제라도 의견을 낸다는 건…….”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베룸은 다시 가문의 문을 열 겁니다.”
그제야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금제에서 벗어나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베룸은 맥이 탁 풀렸다.
‘겨우, 이걸 위해서였어?’
기껏 나타난 제 발현자를 죽게 만든 건 고작 가문을 닫게 하기 위한 사건이고, 다시 가문의 문을 연 것도 저 라니엘이라는 아이의 계승을 인정해주기 위한 장치라고?
그 뒤는 불 보듯 뻔했다. 리테루온의 발현자인 여자와 검은 머리의 린데카이르 가문의 직계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이제 정말로 끝인 거 같은데, 그럼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도 뒤늦게 억지로 주입된 기억과 앳된 목소리가 하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하, 이제 와서 연작을 어떻게 쓰라는 거야. 벌써 외전 구상까지 다 해놨는데…….]
[연작에서 주무대는 황도보다 역시 새 영지 쪽이 좋겠지? 특산물을 하나 둬서 초반 에피소드는 이걸로 이끌어가야겠다. 음, 그리고 또…….]
그러나 베룸은 그 불안함을 애써 마음속에서 몰아냈다. 어쨌든 이 세계를 만든 목적을 달성했으니 자신은 해방될 테다.
‘나뿐만이 아니지. 나머지 세 녀석들도 함께…….’
가만, 그러고 보니 그 셋은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베룸은 너무 늦게 알았다.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셋은 모든 제약에서 풀려나 이 세계를 떠났고, 자신만 홀로 남았단 걸.
감쪽같이 사라진 고등 생명체들의 기운. 마나가 희박해져서 그녀가 감지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왜, 나만 남았어?’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흔적을 찾아 전 대륙을 뒤졌다. 그러는 동안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말았다.
“아하, 여기가 베룸 영지란 말이지? 폐쇄적인 곳이라고 하길래 시골인 줄 알았더니, 황도랑 비교해도 뒤지진 않겠는데?”
높고 발랄한 목소리가 절망한 베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했다고는 해도 체격과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는 음성이었다.
이내 금발 머리의 소년은 정신을 놓고 시장을 구경하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꺅!”
“……꺅?”
뒤로 밀려 넘어지지 않도록 어깨를 잡아주는 억센 손. 뒤이어 들린 의문이 가득한 반응에 소년은 뒤늦게 낮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아, 아니. 으앗!”
“…….”
싱그러운 풀빛 머리의 훌쩍 키가 큰 청년이 미간을 좁혔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쯤 작은 소년을 빤히 응시하다가 툭, 말을 내뱉었다.
“억양을 들어보니 이방인이군. 제국에서 왔나? 여기까지 여자 혼자서?”
“여, 여자라니요! 이래 봬도 성년은 넘긴 남자거든요!”
더듬거리는 금발 소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청년의 어깨에 누군가 팔을 걸쳤다. 까만 머리카락에 새파란 눈동자가 인상적인 또 다른 청년이었다.
“하, 레이. 그렇게 먼저 가버리면 어떡하냐. 난 또 혼잣말이나 하는 이상한 사람이 됐잖……. 누구야, 아는 사람?”
“놔, 너는 이제 그만 너희 영지로 좀 가라. 언제까지 눌러앉아 있을 셈이야.”
레이라고 불린 올리브색 머리 청년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며 검은 머리 청년이 금발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웬일로 네가 관심을 보인다 했더니……. 남자잖아?”
“……네 눈엔 이게 남자로 보여?”
“그러면? 이봐, 친구. 키가 좀 작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가 되진 않아.”
“누가 네 친구야.”
연신 마른침만 삼켜대는 금발 소년의 손가락에 레이의 시선이 닿았다.
무난한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는 반지. 말로만 들었던 아티팩트가 틀림없다.
금발에, 에스피오 가문의 아티팩트라…….
‘황녀로군. 그것도 후계자.’
아티팩트를 바라보는 레이의 눈이 총천연색으로 반짝이는 찰나, 세상이 그대로 멈췄다.
단 한 명, 숨죽인 채 지켜보던 베룸만 남겨두고.
“왜 멈췄지? 왜…….”
그리고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절망스러운 사실 하나를 더 깨달았다.
이미 30년 전쯤에 죽은 아이네이스 공녀 이후로는 베룸의 눈을 가진 발현자가 나올 수 없다는 걸.
그래서 새로 시작된 이야기가 세상의 법칙에 위배되는 순간, 그대로 세상은 멈추어 버렸다.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 채로.
‘결국, 나 혼자 남겨졌구나.’
그렇게 베룸은 ‘시그노’가 되었다.
* * *
혹시 자신처럼 자아를 갖고 깨어있는 존재가 있을까 온 대륙을 헤맸다. 하지만 어딜 가도, 누굴 만나도 그녀는 혼자였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나도 같이 멈춰버리는 게 나았잖아!’
죽어버린 회색빛의 세계에서 얼마의 시간을 홀로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니 순전히 우연이었다. 회중시계로 된 마도구를 지닌 마리에 영애를 마주치게 된 건.
“이 아이도 초대 베르길리우스와 지독하게 닮았네. 머리 색이며, 눈 색이며…….”
공교롭게도 이번 대의 아이들은 유난히 제 선조들과 닮아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거기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추려내 제국어로 정리하는 대신 살아남은 고대 왕국인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이걸 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가 갖고 있어?”
“…….”
시그노는 그녀의 손에 들린 회중시계를 살피는 데에 열중했다. 그래서 굳어버린 마리에가 눈동자만 도로록 굴리는 걸 놓치고 말았다.
“흐음, 이걸 제대로 쓸 수 있는 인간은 이제 없을 텐데.”
대부분의 마도구가 그렇듯 마나가 희박해진 지금에 와선 거의 쓸모가 없어진 물건 중 하나였다. 마나를 주입하면 잠시 시간을 멈추거나 아주 직전의 시간으로…….
“잠깐, 설마?”
갈 곳 없는 마력으로 가득 찬 시그노의 심장이 오랜만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그녀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멈춘 건 법칙에 어긋난 이야기가 시작돼서다.
‘그럼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않는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베룸의 새로운 발현자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세계의 법칙과 공존할 수 없는 레이라던 그 남자아이.
시그노의 머릿속에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들기 직전 보았던 올리브색 머리칼의 청년이 떠올랐다.
‘억양을 들어보니 이방인이군. 제국에서 왔나? 여기까지 여자 혼자서?’
‘……네 눈엔 이게 남자로 보여?’
어린 나이에 죽은 공녀를 제외하면 유일한 직계인 나딘 공자의 아들이 확실했다. 그리고 공자의 부인이자 아이의 어머니는 국외추방을 당했던 붉은 머리칼의 후작 영애였다.
‘그래, 분명히 이름이 달리아인가 하는 아이였지.’
최소한의 접점도 없던 그 둘이 어떻게 만나 아이까지 낳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때의 시그노는 사라진 나머지 셋을 찾느라 반쯤 미쳐있었으니까.
초침이 멈춰버린 회중시계를 손에 쥔 그녀의 표정이 일순 비장해졌다.
어차피 이제는 시도해볼 만한 일도 남아 있지 않다. 이 감옥 같은 곳에서 혼자 미쳐가느니 뭐라도 해 봐야 한다.
‘둘이 만나지 못하게 하거나 최소한 아이는 낳지 못하게 해야 해.’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시그노의 시선이 마리에에게로 힐끔 가 닿았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그녀의 손에 회중시계를 다시금 쥐여주었다.
어차피 시간만 돌릴 수 있다면 회중시계는 딱히 필요치 않다. 게다가 이 마도구가 인간의 손에 들어간다고 해서 쓰이게 될 일은 더더욱 없을 거고.
“변수는 최대한 줄이는 게 좋아.”
혹시 시간을 돌렸을 때 너무 많은 게 바뀌어 있으면 안 될 테니까.
그러나 시그노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회중시계를 쥐여주며 닿았던 마리에의 거친 손이 못내 신경 쓰여서.
노년에 가까워진 나이 때문이 아니었다. 수십 년은 궂은일을 한 평민들처럼 오래된 굳은살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남작 영애여도 물질적으로 부족한 가문은 아니었을 텐데.
“쯧, 그래도 명색이 선황제의 연인이었는데. 그간 고생을 많이 했나 봐.”
시그노의 말에 마리에가 눈을 크게 홉떴다. 하지만 이번에도 눈치채지 못한 시그노가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채 회중시계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이십 년, 아니, 최소한 이십오 년 정도면 적당하겠지?”
잠깐의 시간을 돌리는 데에도 비효율적일 정도로 많은 마력을 소모하는 마도구였다. 무려 몇십 년을 돌리려는 시그노의 의지에 반응해 그녀의 마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히 멈춰있던 회중시계의 초침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리에의 다른 한 손이 시그노를 붙잡았다. 메마르고 딱딱한 살갗이 닿는 느낌은 서늘하기까지 했다.
곧이어 혼자 남은 세계에서 한참이나 듣지 못했던 거친 음성이 들렸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무척이나 기쁜 듯한 목소리였다.
“아뇨, 제겐 적어도 오십 년의 시간이 필요해요.”
“뭐?”
간절히 찾아 헤매다가 어느새 포기한 누군가의 반응이었다. 회중시계를 잡은 손만 바라보고 있던 시그노는 생각도 못 한 상황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느새 주름이 꽤 자글자글해진 마리에의 눈가가 천천히 휘어졌다. 탁하기만 했던 목소리가 기묘한 희열을 담고 점차 맑아지고 있었다.
“어릴 적에 지하실에서 기록을 읽은 적이 있어요. 당신이 바로 ‘베룸’이군요! 그렇죠?”
“너, 너……. 도대체 뭐야.”
경악한 시그노는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마리에의 강한 악력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회중시계가 그녀의 마력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기 시작해서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평생, 제 평생을 걸고 찾았답니다.”
이제는 완전히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시그노의 말에 대답하기는커녕 들뜬 얼굴로 제 할 말만 하는 마리에의 태도가 섬찟하기까지 했다.
“하, 왜 이렇게 마력이…….”
마력을 흘려보내기 전, 계산해 두었던 양을 이미 훌쩍 뛰어넘었다. 그 바람에 오랜 기간 심장에 쌓아둔 마력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
점점 가빠지는 제 숨소리를 느끼며 시그노의 시야가 그대로 까맣게 물들었다.
* * *
“지금이 언제지? 적어도 삼십 년은 되돌아온 건가.”
익숙한 경계 내부의 숲에서 시그노가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아니, 아마도 그 미친 영애가 말했던 대로 오십 년은 되돌아갔을 테다. 억지로 마력을 흡수당하고 동면했을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뻐근한 심장께를 감싸고 일어서며 시그노는 이를 갈았다.
“고대어로 기록을 읽을 수 있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는 위험하다고 그렇게 말을 했었는데…….”
그래서 오래된 가문인데도 남작 이상의 지위는 주지 않았건만. 자신이 방심했다. 이미 늦었을지 몰라도 서둘러 찾아야 한다.
“윽.”
그러나 여전히 시그노는 경계의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리테루온의 발현자인 라니엘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설마 그 마리에라는 아이가 다른 흐름을 바꾸어놓지는 않았겠지?”
시그노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금제에 걸린 이상 바깥의 상황은 여전히 제 후손들의 눈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었기에.
“뭐야. 지난번이랑 완전히 똑같잖아.”
남장을 하다 정체가 밝혀져 위기에 몰린 라니엘.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한 베룸 공작가의 나딘 공자.
“무언가를 바꾸려다가 실패한 건가.”
다행히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회복기에 들어간 이십 년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불안해하던 것이 무색하게 말이다.
그러나 라니엘의 이야기가 끝나 금제가 풀리는 순간, 시그노는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또 누가 시간을 되돌리고 있어.”
그렇게 정확히 두 번, 총 세 번째 같은 세계를 직면하고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느껴지는 익숙한 마력의 향기. 그건 자신과 더불어 세상에 단 넷뿐이었던 그들의 것이었다.
넷이었던 존재가 셋, 셋에서 둘, 이제 단 하나만 남았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한 가지 더 알 수 있었다.
마리에가 아닌 자신이 발버둥 쳤다고 해도 흐름을 바꿀 순 없었을 거란 사실을.
그건 한낱 인간과 지고한 존재인 드래곤이라는 차이와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저…….
‘애초에 우리가 여기에 묶인 존재라서야.’
그리고 라니엘의 이야기가 끝나 한 번 더 되돌아가기 전에 가까스로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흐름에 묶이지 않을 변수를 확보할 것.
시그노가 아는 한 아무런 제약이 없을 거라 여겨지는 존재 역시 하나였다.
[하, 이제 와서 연작을 어떻게 쓰라는 거야. 벌써 외전 구상까지 다 해놨는데…….]
[연작 설정은 그럼 뭘로 하지……. 아! 본편이 남장 여주였으니까 이것도 비슷한 패턴으로 해볼까. 그대로 하기는 좀 그렇고, 약간만 비틀어서 이렇게…….]
언젠가 들은 적 있는 앳되고 낭랑한 목소리. 그녀의 과거와 기억을 멋대로 심었을 거라 추정되는 바로 그 존재.
분명히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존재일 테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한 번쯤은 시도해볼 만했다.
‘아슬아슬해도 한 번이라면 내 심장이 버틸 수 있어.’
회중시계 때처럼 단순히 회복 가능한 마력만 소진되는 정도가 아닐 테다.
마력을 전부 가져다 쓰고도 모자라 심장에 모아둔 생명력까지 일부 써야만 하겠지. 그 때문에 영원히 회복하지 못한다고 해도…….
‘회색빛 세계를 혼자서 다시 겪는 것보다는 나아.’
그리고 시그노는 그 한 번뿐일 기회를 운에만 맡길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이제는 멈춘 세계 속에 홀로 영영 갇혀야 할 테니까.
그녀의 입술이 세로로 굳게 닫혔다. 설정, 분명히 설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만약 라니엘의 이야기 흐름을 틀지 못해 그대로 진행이 된다고 해도 세상이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 애초에 법칙이 어긋나게 된 것도 내 발현자가 죽어서 명맥이 끊겨버려서잖아!’
그렇게 시그노는 태초부터 지녀온 마력과 생명력의 절반을 사용해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냈다. 하지만 다른 세계로부터 온전히 그 존재를 데려오는 건 그녀의 능력 밖이었다.
그래서 시그노가 원래는 죽었어야 할 아이네이스 베룸 공녀의 몸에 집어넣은 건…….
* * *
“그러니까, 여기에 적힌 대로라면…….”
전작의 설정 따위는 무시하고 엉망진창인 연작인지 뭔지를 만든 게,
“나라고?”
아이네는 갑자기 깨질 듯 아파지기 시작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공녀?”
기울어지는 아이네의 몸을 테고가 가볍게 받쳐 들었다. 잠깐 사이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비틀거리는 모습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괜찮습니까? 갑자기 왜…….”
아이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테고가 보기엔 자신의 이런 모습이 갑작스러울 만했다.
늘 실제로 지나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을 테니까.
이번에도 처음은 분명 기록을 읽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고대어들이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곧이어 구체적인 영상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치 직접 겪은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기억’을 읽어낼 때와 똑같았다.
그건 테고를 만난 이후로 익숙하다면 익숙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시그노의 과거를 엿보고 온 지금에 와선 감상이 좀 달라졌다.
‘뭐야, 그럼 이게 시그노가 겪은 거랑 뭐가 달라.’
여태까지는 자신이 읽었던 책의 내용이 떠오르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과거의 기억이 심어지는 과정이었을 줄이야.
어쩐지 이상했더랬다. 시간을 뒤로 돌린 것처럼 휙휙 지나가다가 멈춰 서는 기억이라니.
그리고 아이네는 뒤늦게나마 허리춤 부근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는 걸 깨달았다.
“아, 이건…….”
문득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을 단검에 생각이 미쳤다. 거기에 더해 베룸 일족의 이능은 ‘진실의 눈’이 아니라 ‘베룸의 눈’이었다는 말도 함께.
이제야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던 수수께끼가 하나씩 풀리는 느낌이다.
‘전부 지나간 일이었던 거야. 등장인물들을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기억들도…….’
지금까지 착각했던 대로 라니엘이 주인공인 소설 내용이 떠오른 게 아니었다. 최소한 한 번 이상은 반복된 시그노의 과거를 엿본 것에 불과할 뿐인 거지.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있었다.
“공녀,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기사단이 머무는 숙소가 있을 테니 일단 그곳으로…….”
“자, 잠깐만요.”
기대다 못해 테고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한 아이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럼 지금껏 테고가 라니엘이라고 철석같이 믿게 한 그 기억은 어떻게 된 걸까.
지금이 네 번째라면 지난 세 번의 과거에서 테고는 매번 열네 살을 넘기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라니엘의 이야기가 나한테 보인 거지?’
그런 그녀의 눈에 여전히 녹색빛으로 존재감을 뽐내는 귀걸이가 보였다.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리로 손을 뻗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테고가 라니엘이 아니라는 걸 알았던 밤에 한 번, 단검을 써서 시그노를 만나고 깨어났던 날 한 번.
“공녀……?”
테고의 새파란 눈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아랫입술이 새빨개지도록 꾹 다문 그녀였다.
지난 몇 달간의 경험으로 테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럴 때의 아이네에겐 이유를 묻기보단 말없이 맞춰주는 게 낫다는 걸.
그녀의 손이 닿기 쉽도록 테고는 한껏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그의 귓불로 작고 서늘한 손이 닿는 게 느껴졌다.
“…….”
그리고 이번엔 지난번과 달리 간지럽고도 미묘한 감각을 간신히 참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아, 역시…….”
한편, 떨리는 손으로 테고의 아티팩트를 만져 본 아이네는 반쯤 확신했다.
만약 제 짐작이 맞는다면,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 돌아가도 아티팩트에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과거가 저장되는 거야.’
그래서 진짜 원작이었던 연작에 등장할 리 없는 인물인 테고에게서도 기억을 읽을 수 있었던 거다. 거기다 아이네는 마도구를 만든 고대 일족이자 드래곤이 남긴 ‘베룸의 눈’의 소유자니까.
‘그게 전부 일종의 업데이트 과정이었던 거지?’
다른 인물들이나 아티팩트를 처음 마주했을 때 순식간에 기억이 스쳐 지나갔던 것 모두.
그 생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녀가 만지작거리자 아티팩트가 반응하며 반짝 빛을 냈다.
그러고는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테고와 눈이 마주쳤다. 이내 아이네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러니까, 테고 경은…….”
자신이 만든 인물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를 만들었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제대로 된 등장인물도 아니었다. 원작이 시작되기도 전에 단 한 줄 언급된 채 그대로 죽어버렸으니.
여태껏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던 게 놀라울 지경이다. 책빙의물 중 가장 흔한 게 작가 빙의라는 걸 알면서도.
‘난 그것도 모르고 도대체 작가가 누구냐고, 왜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었냐고 엄청 욕만 했는데!’
물론 왜 하필 자신일까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애초에 그녀에겐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희박했으니까.
아마 그건 빙의한 지 8년이 넘었다고 해도 거의 남은 게 없이 희미하기만 한 원래 생의 기억 탓이었던 거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그러니까…….”
도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알고 보니 테고 경은 라니엘의 등장을 위해 죽었어야 할 인물이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만든 건 바로 나예요, 라고?
확실한 건 단순히 책빙의자인 것과는 다른 사안이라는 사실이었다.
“…….”
그때, 바로 위에서 아이네를 지켜보던 테고의 얼굴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금 그녀가 숨겨왔던 그 진실을 털어놓으려 한다는 걸.
심지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는 것까지.
그래서 테고는 여태 아이네가 제게 그래왔듯 이번엔 먼저 손을 내밀어 잡았다. 무언가 확인하듯 아티팩트를 만지작거리다 힘없이 떨어져 내린 작은 손을 제 손아귀에 전부 쥐었다.
“괜찮습니다.”
“네?”
“처음부터 이상했으니까요.”
손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가냘픈 움직임을 느끼며 테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나를 라니엘일 거라 여기던 당신의 믿음,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는 듯 확신하던 태도까지…….”
잠시 숨을 들이켜며 아이네와 똑바로 마주한 테고의 눈이 새파랗게 빛이 났다.
“공녀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놀라지도 않을 겁니다.”
“…….”
일견 무심하고 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이미 눈동자에서부터 불붙은 기묘한 열기가 목소리로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당신이 고대 일족, 아니, 설령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그, 그런 건 아니에요.”
급하게 고개를 내젓는 아이네를 보며 테고가 픽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지금은 나에게 이렇게…….”
그러고는 제 손아귀에 완전히 먹혀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잡혀있을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흡, 히끅!”
아이네는 직진남 캐릭터의 근원엔 상당한 독점욕도 도사리고 있단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 그러니까요…….”
그러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쓴 이야기 속으로 저도 모르게 빙의된 썰 풉니다. 질문도 받아요. 아마도…….
* * *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예요.”
“…….”
그렇게 대강의 이야기를 마친 아이네와 테고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놀라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테고는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곳이 공녀가, 아니, 당신이…… 만든 세계라는 겁니까?”
“……그런 셈이죠.”
이미 그 이야기와 같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틀어져 버렸지만.
미간을 모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신중하게 물었다.
“그럼, 그 목적이라는 걸 달성하고 나면 당신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갑니까?”
어쩐지 그녀가 걱정했던 것과는 다른 질문들이 이어졌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아이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은 왜 자신을 꼭 죽였어야 했는지, 이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 묻는 게 정석 아닌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면서도 아이네는 착실하게 대답했다.
“아뇨, 실은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 원래의 나는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니까요.”
기록에서 보았던 대로라면 시그노는 원래 아이네의 자아를 일부분만 끌어왔을 테다. 그리고 그녀가 지난 8년간 무리 없이 이곳에 적응해 살았듯 아마 원래 세계의 아이네도 아무 일 없이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못 돌아갈 거예요. 아마도…….”
“아.”
아이네가 작게 덧붙인 말에 테고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렇게 지하실 벽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듯 앉은 테고가 조심스레 제 허벅지 위에 아이네를 올렸다.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그렇게 한없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으며 테고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네?”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가발이 살짝 미끄러져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이네는 고개를 기울여 테고의 얼굴을 살피려 들었다.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정말로.”
“…….”
“나에게 중요한 건 단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테고의 눈동자가 다시금 형형한 빛을 냈다. 그리고 아이네는 어느새 제 허리에 감긴 단단한 팔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단 걸 느꼈다.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이 내 곁에 있기만 한다면, 다른 건 아무것도…….”
그때, 지하실의 돌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드르륵, 열렸다.
“단장님! 여기로 오셨다고 더글라스 경한테 연락이 와서……. 아, 실례합니다. 하던 거 마저 하십쇼.”
돌문은 금세 드르륵, 닫혔다.
“경들도 다시 올라가, 빨리!”
칼릭이었다. 뒤이어 어설프게 닫힌 돌문 사이로 이젠 제법 익숙해진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왜 그러십니까? 안에 단장님과 공녀님께서 계신 거 아닙……. 악! 밟지 마!”
“어어, 밀지 마!”
“…….”
“…….”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어느새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에 아이네가 먼저 제 눈가에 맺혀있던 물기를 슥슥 닦아냈다. 그러고는 머뭇거리며 테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다들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요.”
“……예.”
마지못해 대답하는 테고의 목소리에선 숨길 수 없는 아쉬움과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거기다 이를 가는 듯한 중얼거림 속에서 ‘더글라스’라는 이름이 언뜻 들린 것도 같은데…….
으음, 이번엔 기분 탓이 아닌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