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새로운 무대, 새로운 역할
쇠사슬로 칭칭 묶인 돌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러면서 테고의 입에서는 다시 한번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여간 나와 공녀가 단둘이 있는 꼴을 보질 못하는군.’
더글라스나 칼릭의 탓이 아닌 타이밍 문제라는 건 안다. 하지만 매번 방해받는 듯한 기분이 썩 좋을 리 없었다.
테고는 지하실 돌문이 확실히 잠겼는지 두세 번 더 단속하고는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애매하게 흘러내린 가발을 끝내 끌어내렸다. 곧이어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아…….”
“…….”
그러다 뒤늦게 아이네의 시선이 제게 향하고 있었단 걸 알아챘다.
잠시 멈칫하며 굳어있던 테고가 이내 허리를 숙여 다시 가발을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던진 게 아니라 손에서 떨어진 겁니다.”
“아, 네.”
아이네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녀가 테고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던 건 고작 가발 때문이 아니었다.
‘상관없다더니, 그냥 한 말이 아니었던 걸까.’
눈앞에 있는 사람이 책빙의자란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이렇게까지 평온한 반응이 또 있었던가. 그것도 그냥 일반적인 책빙의도 아니었는데…….
보통은 가장 큰 위기로 작용하는 게 맞았다. 그래서 아이네도 란델이 그 사실을 들어 협박했을 때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던 거고.
아이네의 말간 눈이 계속해서 자신을 응시하자 테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칼릭 말이 맞는 날도 다 있군.’
역시 공녀 같은 영애들 앞에서는 단원들 앞에서와 다르게 행동했어야 했나 보다. 별것 아닌 행동이라도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가만히 서서 손에 쥔 가발만 만지작거리던 테고가 그걸 제 품 안에 넣었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며 걸음을 옮겼다.
“후,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기사단에서나 전장에선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야 하다 보니. 그럼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어요?”
아이네의 말에 테고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어느새 약간 울 듯이 일그러진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럴 리가.
여태껏 제 의지대로 살아왔다고 믿었던 세계가 실은 만들어진 세계라니. 게다가 자신은 여자 주인공이라는 라니엘을 위해 철저하게 지워져야 하는 소모품 같은 역할이었다는 사실까지.
그건 아이네가 발현자라는 걸 알았을 때보다도, 그녀가 자신을 여자로 착각했단 걸 알았을 때보다도 더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았을 리가 있습니까.”
테고의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지하실 안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럼 왜 더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가 아이네에게 물은 건 딱 하나였다. 그녀가 원래 있던 곳으로 귀환하게 되는지.
고대어로 된 기록을 읽고 대부분의 정황을 다 알아챈 란델도 이 정도로 담백한 반응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내 테고가 허리를 숙여 아이네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다만, 이라고 덧붙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하고 궁금한 문제는 이미 충분한 답을 얻었으니까요.”
여전히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테고의 반응에 아이네가 톡 쏘아붙였다.
“몇 번이나 일찍 죽어야 했다는데, 억울하지도 않아요? 이번엔 아니더라도 결국 부모님이랑 여동생이 그렇게…… 됐잖아요.”
그 말에 테고의 눈이 잠시 크게 뜨이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요, 내겐 기억이 없으니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공녀는 여전히 자신에게 라니엘을 겹쳐 보고 있는 모양이다. 제가 라니엘이 아니라는 걸 안 이후로도.
테고는 그제야 자신이 그녀에게 먼저 뻗었던 손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걸 깨달았다. 행동이 아닌 말로 보여야 하는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테다.
“아마도 라니엘 그 아이는 내게 제법 애틋한 마음이 있었나 보군요.”
가만히 제 턱을 쓸던 테고의 눈에 조금은 쓸쓸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여전히 목소리만은 담담했다.
“테고 경은, 아니었어요?”
“너무 어릴 때 헤어지기도 했고, 발현자와 발현자가 아닌 직계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달라서일 겁니다.”
하지만 잠시나마 떠오른 기억에 쓴웃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아래턱을 스치는 손바닥의 굳은살이 오늘따라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건…….”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테고와 라니엘이 각자 다른 처지에서 서로를 생각했을 거라고는.
“같은 과거라고 해도 모두에게 똑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라니엘을 싫어한 건 아니었다. 다만 제게는 주어지지 않는 관심과 애정에 외로워하다가 대신 검에 마음을 주었다.
그래서 단지 알지 못했을 뿐이다.
“외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갈구하던 관심은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과 라니엘이 죽은 다음에야 제게 주어졌다. 홀로 남은 직계라는 이유로.
“왜 더 묻지 않았냐고 했습니까? 물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곧 죽어 없어질 역할이라 모두가 그에게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공녀의 몸에 들어오고, 부모님과 라니엘이 죽고 나서야 갑작스레 모든 상황이 변했으니까.
“공녀는 공녀의 존재로 모든 게 틀어졌다고 했지만…….”
테고의 손가락이 아이네의 눈앞을 지나 천천히 제 가슴을 가리키며 짚었다.
“나는 그 덕분에 살아있는 게 아닙니까. 그리고 그건 공작가에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네?”
뜻밖의 말에 아이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공녀의 말대로 아이네이스 공녀 역시 8년 전에 죽었어야 했다면.”
테고의 가슴에 닿아있던 손가락이 이번에는 아이네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턱 끝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베룸 공작가도 8년 전에 새로운 가족을 얻은 셈이 아닙니까.”
“아……!”
아이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진 못했을까.
란델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알리겠다고 했을 땐 그저 자신이 원래 아이네이스의 몸을 빼앗았다고만 여겼다. 그래서 불안했다.
“그럼, 한 가지 묻겠습니다. 당신이 만들었다는 그 세계에서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다릅니까? 나는 어떤 사람이었어야 했던 겁니까.”
“그건……. 어?”
이번에는 아이네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었다. 자아의 일부만 끌어왔다는 기록처럼 여전히 모든 게 다 기억나진 않았다.
하지만 기억이 없다고 해도 원래의 테고는 딱히 어떠한 사람이라고 정해져 있지 않았을 테다. 그저 라니엘과 나이가 같고, 외모가 비슷한 쌍둥이 오빠에 불과했다.
그 외엔 구체적으로 정해진 설정이랄 것도 없었다.
원작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었으니 등장했을 리도 없다. 기껏해야 한두 번 라니엘의 회상 속에 잠깐 나온 게 다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과거는 테고의 말대로 그가 기억하던 것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라니엘의 관점에서 재구성되었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
‘그럼 내가 이름까지 지은 존재 중에 등장하지도 않고, 아무런 설정값도 없는 사람이……?’
공교롭게도 그건 지금 그녀의 몸인 아이네이스 공녀와 테고 둘뿐이었다.
“몰라요, 하나도…….”
아이네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여태껏 테고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아니었나 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넘겨짚었던 테고의 성격과 반응도 전부 라니엘이라고 생각해서 끼워 맞춘 것이었고.
외모와 다르게 단것과 귀여운 걸 좋아하는 취향도 어쩌다가 맞았을 뿐이다.
“역시……. 그렇습니까?”
내심 기대했던 대답에 테고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다행히 생각했던 대로였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이미 마음 한 자락을 내주고 말았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반짝이는 눈을 보았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홀렸을 리 없다.
‘거기다 잠깐이나마 요정이라고 생각했으니.’
혹시나 제 감정의 방향이 정해진 것이었을까 봐 적잖이 걱정했었는데…….
하지만 온전히 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다시금 심장이 작게 두근거렸다. 그리고 테고는 지금이 흔치 않은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언젠가처럼 아이네의 얼굴 옆으로 팔을 뻗어 벽을 짚었다.
당장이라도 지상으로 올라가면 둘을 방해할 단원들이 있을 테니까.
“나에게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선하기만 한 사람은 아닙니다.”
“네? 하지만 제게 처음부터 못되게 굴진 않았잖아요.”
퍽 가까워진 거리인데도 아이네가 겁도 없이 바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테고의 입에선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다고 공녀에게 함부로 할 만큼 무뢰배는 아닙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다소 눈치 없이 구는 모습조차 귀엽게 느껴지다니.
테고가 조금 더 거리를 좁히자 그제서야 아이네는 미묘해진 공기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순간 붉어진 뺨을 가리려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그걸 본 테고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라니엘을 별로 그리워하지 않아서 실망했습니까?”
“아뇨, 이젠……. 이해했어요.”
아이네는 조그만 입술을 삐죽여 대답하면서도 시선을 맞추질 못했다. 테고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잘됐군요. 이젠 진짜로 나를 알아갈 수 있게 될 테니까.”
아까는 아이네의 턱 끝에서 멈추었던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고는 이번엔 과감하게 그녀의 턱 아래서 살짝 들어올렸다.
“……?”
뭐, 뭐야. 갑자기 여기서? 입술부터 알아가겠단 소리였어?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았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테고의 온기가 닿은 건 그녀의 붉어진 귀 끝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흘러나온 머리카락을 살뜰하게 모아 가발 안쪽으로 정리해주었다.
“흣, 공녀는 베르길리우스 영지를 떠날 때까진 가발을 쓰고 있는 게 좋겠습니다.”
약간의 웃음기가 배어든 목소리였다. 아이네는 새초롬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눈을 떴다.
“아. 흐, 흠! 나, 나도 알아요!”
민망함에 얼굴이 더 붉어진 그때, 따뜻한 무언가가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처음을 이런 곳에서 할 만큼 무뢰배는 아닙니다.”
“엥?”
아이네의 커다랗게 뜨인 눈으로 보이는 건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는 테고의 모습이었다.
* * *
아이네와 테고가 밖으로 나온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별관 앞에서 그런 그들을 보는 시선은 당연히 어딘가 묘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눈길이 며칠 만에 보는 테고보다는 아이네에게로 쏠렸다.
‘무슨 생각이시지?’
짧은 머리카락에 로브를 입은 소년 느낌도 의외로 잘 어울리긴 하지만.
심지어 테고의 뒤에 숨어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슬쩍 옆으로 비켜 선 아이네의 볼이 제법 발그레했다.
일반인보다 시력이 월등하게 좋은 기사 집단이 이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응? 못 본 사이에 공녀님 머리가 왜 짧아지신 거야?”
“바보냐? 누가 봐도 변장이잖아. 그거보단 얼굴이 왜 빨개지신……. 윽! 뭐야.”
물론 시력이 좋다고 해서 눈치마저 있으리란 법은 없다. 소곤거리는 두 사람의 옆구리를 곁에 서 있던 다른 이가 퍽, 하고 쳤다.
“야, 야! 더글라스 꼴 되기 싫으면 눈알 굴러가는 소리도 내지 말고, 숨도 크게 쉬지 마.”
그리고 그들은 싸늘하게 식은 테고의 눈길을 받으며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테고는 단원들의 지나친 관심으로부터 아이네를 가리며 앞으로 나섰다.
처음부터 그녀를 아는 사람까지 속이기 위한 변장은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일이 확실해질 때까지 귀족파의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니까.
“칼릭,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넵!”
웃는 듯 마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로 테고를 바라보고 있던 칼릭이 선뜻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손까지 번쩍 드는 꼴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굳이 이 자리에서 티 내지 않았다.
“테르미누스 산맥 중턱에서 거대한 동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보고 드린 후 탐색에 나서려고 우선 경비 인원만 남기고 철수한 상태입니다.”
“황궁에 연락은?”
“직전에 보고를 올렸습니다.”
“보고는 가면서 듣기로 하고. 그럼, 진짜 베르길리우스 소남작의 실종 건은?”
“그쪽은 대공 전하께서 직접 지휘하고 계시는데도 아직인 모양입니다.”
사실 양자로 들였다던 베르길리우스 가문 소남작의 행방은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란델과 남부 귀족파를 엮을 때 필요한 보험일 뿐이니까.
란델의 황족 참칭 건은 이미 황도로 떠난 제1기사단의 보고만으로 충분할 테다. 그리고 거기에 그와 남부가 결탁한 증거인 곡물 수레만 확보한다면…….
“우리는 그저 폐하께서 지시하신 일만 하면 된다. 그러니…….”
테고가 아이네를 힐끔 돌아보았다.
‘공녀를 험한 산까지 타게 할 수는 없고.’
곡물 수레를 감춰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아 보고까지 마쳤다. 최대한 빨리 수색에 나서는 게 좋았다.
원래는 이동 중에 공녀의 동선이 노출되어 귀족파에게 빌미를 줄까봐 했던 남장이었다. 검문소를 무사히 넘긴 터라 이젠 가발을 벗어도 되겠지만.
굳이 여기서 공녀 신분을 드러낼 필요가 있나?
“저어, 말씀 중 죄송합니다.”
별관 앞 공터에 모여 있는 그들에게로 남작 가문의 집사가 다가왔다. 중앙에서 잊힌 가문이 된 지 오래라 할 일이 많지 않은 집사는 꽤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래서일까. 가발을 벗는 바람에 테고의 머리카락 색이 아까와 미묘하게 달라진 걸 눈이 침침해 알아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아이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집사를 살폈다. 꽤 오래전부터 베르길리우스 남작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들었다.
‘이러니 란델이 가짜 소남작 행세를 해도 못 알아보고 넘어갔나 보네.’
거기다가 어딘지 허술한 지하실 관리까지.
차라리 잘되었다.
아까는 칼릭과 단원들이 들이닥쳐 당황하는 바람에 그냥 나와 버린 참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지금까지의 일이 어떻게 된 건지만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여전히 시그노가 겪었던 멈춰버린 세계의 오류를 바꿀 방법은 알지 못한다. 한 번 더 기록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다면 무언가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호, 혼자 가기는 좀 무서운데.’
어둡고 축축했던 분위기의 지하실을 떠올린 아이네가 테고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때, 잔기침을 콜록거리며 늙은 집사가 입을 열었다.
“쿨럭, 새로 오신 기사님도 별관에 거처를 마련해드리면 될는지요?”
간신히 허리를 편 그가 테고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이미 황제의 칙령이 내려진 터라 제2기사단이 머무는 건 공식적인 사안이었다. 게다가 아까 지하실을 수색하겠다며 테고가 내민 황실 기사의 인장도 보았다.
그렇기에 새로 들이닥친 남자 중 한쪽이 기사라는 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노집사의 뿌연 시야로도 건장한 기사 곁의 소년은 정체가 모호해 보였다.
“아이구, 그럼 이분은…….”
모로 보아도 기사는 아닌 듯한 아이네를 보며 집사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집사와 아이네를 번갈아 내려다보며 테고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곡물 수레가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보고서만 작성하면 떠날 저택이다. 사용인도 별로 없는 데다 눈도 어두운 집사가 관리하는 저택의 본관에 아이네를 홀로 두느니, 제 곁에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손님용 방 중 가장 큰 곳을 배정받을 테니.’
하늘에 맹세코 테고에게는 다른 의도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툭 말을 내뱉었다.
“이번 조사에서 내 시종이 될 아이다. 내 방을 함께 쓸 테니 그렇게 준비해두게.”
그런 테고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아이네였다.
“오!”
확실히 시종이라고 해둔다면 모두가 잠든 시각에 함께 빠져나가기 쉬울 듯하다. 역시 테고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던 걸까.
“맞아요. 시종!”
아이네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안 그래도 아이네의 남장에 의문을 가지고 있던 단원들에게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네?”
“저기, 단장님?”
모여 있던 칼릭과 단원들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들은 이 작고 오래된 별관에 며칠째 묵고 있어 구조를 훤히 알았다.
“아이구! 고, 공작 전하셨습니까. 제가 나이를 먹어 눈이 어두워지는 바람에…….”
칼릭이 단장님이라고 부르는 말을 들은 집사의 눈이 뒤늦게 커다래졌다. 화들짝 놀란 그는 어찌할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부득이한 일이 있어 뒤늦게 합류하게 되었다.”
“가, 가장 좋은 손님방으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테고는 집사에게 대답하며 들썩이는 단원들을 향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쓸데없는 말은 말라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입은 다물었으나 그들 사이로 분주하게 시선이 오고 갔다.
‘여, 역시…….’
‘하긴 대놓고 같이 있기엔 좀 그러셨겠지?’
‘아무리 폐하의 인가를 받았다곤 해도 아직은 결혼 전이시니까.’
지나치게 반색하는 아이네의 태도가 좀 걸리긴 했으나 테고는 해야할 일을 먼저 마치기로 했다.
“그럼, 지체할 것 없이 산맥으로 바로 출발하지.”
“다녀오세요!”
싱글벙글 웃으며 반발하지 않는 아이네 때문에 모두의 오해는 더욱 깊어졌다.
* * *
그리고 몇 시간 후, 아이네는 조금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간단한 청소를 마치고 들어선 가장 좋은 손님방이 생각과는 너무도 달라서.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이게 제일 좋은 방이라고요?”
“건국 초기에는 귀족 저택도 다 이런 방식으로 지어졌단다. 고대 마도 왕국의 흔적이지.”
아이네를 시종이라고 믿고 있는 집사가 인자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현재의 부유하고 안정된 상태의 제국 건축 양식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보통 웬만한 귀족 가문의 손님용 공간은 방이 여러 개였다. 본관과 똑같이 응접실과 침실, 시중인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정말 응접실하고 침실뿐이에요?”
“아무래도 고대 왕국 시기엔 사람을 쓰기보다는 마도구로 해결하는 일이 많아서 시중인들의 공간을 따로 만들지 않았지. 나 때만 해도 그런 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꽤 남아있었는데 말이야. 홀홀.”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마 테고도 몰랐을 게 분명하다. 어느 순간부터 조금 능글맞아지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테고는 바른 청년이니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이네가 다급히 물었다.
“다른 방은 없어요? 시종들 전용이라든가.”
“아이구, 이번처럼 손님들이 많이 방문한 건 처음이라 남는 방이 없는데. 이를 어쩌누. 아!”
무언가가 생각난 듯 집사의 주름진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그러자 아이네는 간절한 얼굴로 뒷말을 기다렸다.
“원래 손님의 시종들은 마구간에서 자는 게 전통 방식이니, 원한다면…….”
“그냥 여기 있을게요.”
아이네는 차라리 테고를 믿기로 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테고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 * *
몇 시간 뒤, 테고와 단원들이 귀가했다. 다행히 커다란 인공 동굴 안에 숨겨져 있던 곡물 수레들을 찾아내 이미 황궁으로 보고까지 마쳤다고 했다.
그리고 방 안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아이네를 본 테고도 아까의 그녀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몰랐습니다.”
“어쩐지 칼릭 경이랑 다른 단원들 표정이 이상하더라고요.”
“남는 다른 방을 달라고 하겠습니다.”
테고가 급히 문을 나서려 하자 아이네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이미 물어봤는데, 방이 모자라서 두 명이 한 방을 배정받았대요.”
“칼릭은 혼자 쓰고 있을 테니 제가 그쪽으로…….”
테고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잡힌 옷자락을 빼내려 했다. 차라리 칼릭의 건방진 수다를 밤새 듣는 게 더 나을 테니까.
“앗,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테고 경을 못 믿겠어요? 그리고 부탁할 것도 있고요.”
아이네의 말에 테고가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자신을 보고 얼굴을 붉히기에 확실하게 남자로 각인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 이야기입니까.”
순간 확 가라앉은 테고의 목소리에 아이네는 괜스레 시선을 피해 눈을 굴렸다. 그리고 어쩐지 아까 그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로 향하려는 손을 가까스로 자제했다.
“아니, 남자가 아니라서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우, 우리 이제 천천히 알아가기로 했잖아요.”
그리고 그런 아이네의 반응에 테고는 팔짱을 낀 채 문에 등을 기대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문이 거의 다 가려질 만큼 커다란 체구의 남자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정말로 알고 싶습니까? 내가 어떤 남자인지.”
“앗! 아니, 그게…….”
이제는 그가 자신에게 이성적 호감이 있는 남자란 걸 알면서도 무심코 또 예전처럼 대했다. 실수다.
하지만 아까 이마에 와닿았던 입술의 촉감이 떠오르자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여기에서요? 바른 청년 씨?
“뭘…… 어떻게 알려줄 거예요?”
이마 위로 올라가려는 손을 필사적으로 막으며 아이네는 연신 마른침만 삼켰다.
참으로 이상하기도 하지.
아까까지만 해도 약간 화끈거리는 정도에 불과했던 이마는 이제 불에 덴 듯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 생각했던 거보다도 훨씬 큰 사람이었구나.’
어느 순간부터인지 몰라도 그가 한 번씩 작정하고 몸을 쭉 펼 때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제 몸보다 훨씬 자그마한 아이네를 배려하느라 늘 자세를 낮춰주곤 했으니까.
테고가 스스로 들먹이듯 ‘남자’라는 게 어떤 건지도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는 단순하게도 여자가 아니면 남자겠지, 라고만 여겼는데…….
그렇게 아이네는 여태 안이하기 그지없었던 제 인식을 마음 깊이 반성했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바로 앞에 놓인 테고의 팔짱 낀 팔로 가 닿았다.
팔짱을 끼었는데도 한참 눈을 굴려야 할 만큼 쭉쭉 뻗은 길이부터가 눈에 띄었다.
‘으응. 나한테 팔이 왜 여기까지밖에 없냐고 했던 말, 인정.’
아이네의 시선이 힐끔 제 팔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저렇게 긴 팔을 갖고 살았으니 한참이나 짧은 팔이 신기했을 수밖에.
“…….”
그리고 어쩐지 집중하지 못하는 그녀의 정수리 위로 테고의 눈빛이 짙어졌다.
이러니 공녀가 자신에게 품은 마음과 제 것이 다르다는 걸 어찌 모를 수 있을까. 하지만 여전히 맑고 순진무구하기까지 한 얼굴을 보니 심술이 비죽 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겁을 주려는 건 아니었으나 아이네의 생각과 제 마음이 얼마나 다른지 정도는 알려주고 싶었다. 그것도 그녀가 예전에 제게 했던 방법으로.
맹세코 그뿐이었다, 지금은.
“그러고 보니, 일전에 공녀가 내게 알려준 방법이 있었습니다.”
약간의 장난기가 담긴 가늘어진 눈매에, 살짝 들려 올라간 입꼬리.
웬만한 일로는 눈썹만 까딱일 정도로 표정 변화가 없는 테고다. 평소 같으면 아이네 역시 알아채고도 남았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까 이마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던 건 지극히 가벼운 접촉일 뿐이었다. 그러나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한 아이네의 심장이 요란하게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당연히 테고의 표정이 어떤지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테고에게 그런 것도 알려준 적이 있다고? 내가 언제!
“뭐, 뭐였죠? 으음, 기억이 안 나는데…….”
그녀는 이제 몇 번째인지 모를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직도 친구인지 아닌지 헷갈립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친구랑 이성에 대한 호감 정도는 구분한다고요.”
발끈해서 높아졌던 아이네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사그라들듯 조금씩 작아졌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친구 아닌 이성과 한방에서 밤을 보내겠다는 각오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시종일관 처음부터 낮고 잔잔한 음성이었으나 묘하게 억눌린 듯한 열기가 스며들어있었다. 단원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각오 같은 게 아니라……! 그리고 한방은 아니잖아요오.”
말끝을 늘이는 것과 동시에 아이네의 시선이 슬며시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문득 드는 기시감에 그녀는 번뜩 위로 고개를 쳐들었다.
“엉? 설마……?”
그리고 자신의 흑역사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사이에 워낙 많은 일들이 있어서 그렇지, 기간으로 따지면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이성을 향한 호감일 수도 있는 거죠.’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제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렇습니까? 그럼 이성에 대한 호감과 친구로서의 감정은 뭐가 그렇게 다릅니까.’
누가 봐도 명백하게 남자인 테고에게 뭐라고 지껄였더라.
‘자, 이제 내가 어떤 행동을 할 건데. 그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잘 기억해둬요.’
아, 안 돼! 그만둬, 이 멍청한 과거의 아이네야!
갑작스레 시작된 회상이 테고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던 장면까지 이르자 아이네의 얼굴은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
하지만 한번 떠오르기 시작한 흑역사는 브레이크가 없는 법이다.
‘어땠어요?’
‘그래도 아까는 입 맞추는 것 같지 않았어요? 기분이 어땠어요?’
심지어 제 만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성으로 좋아하면 입을 맞춘다고 생각해도 거부감이 안 들거든요. 그런데 만약 친구로서의 호감이라면! 으…….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죠?’
“악!”
결국 아이네는 양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뭐야, 뭐냐고! 그때의 의기양양한 표정과 그 태도는!’
기왕 책빙의도 했는데, 회귀 찬스 없나요? 지금이 적기인 거 같은데……. 흑흑.
홀로 착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절을 괴로워하던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하얗게 질렸다가 급기야 새빨개진 아이네를 본 테고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나마 공녀의 기억력이 좋아서 다행입니다.”
“그건, 그때는…….”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참느라 짓씹었던 아이네의 아랫입술이 붉었다. 테고의 시선이 그곳을 슬쩍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스친 그의 눈길은 여전히 기다란 속눈썹만 깜박이는 아이네의 눈에 머물렀다.
조금만 힘을 주면 턱을 들어 올린 손을 쉽게 벗어날 수 있는데도 가만히 있는 건 무슨 뜻일까.
“알고 싶다는 말을 쉽게 하는 건 별로 좋지 않습니다.”
“…….”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약간은 쉰 듯한 음성이 테고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지독하게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여태까지 나지막한 중저음으로도 충분히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완전히 달랐다.
머뭇거리던 아이네의 눈길이 홀린 듯 테고에게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요?”
하지만 아이네는 여전히 아이네라서 궁금한 것은 참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도 눈치 없이 되묻는 그녀가 귀여워 테고의 입가가 조금 더 벌어졌다.
“이제는 공녀가 아니라, 아이네라고 부르고 싶다고.”
서로 이름을 부르자던 아이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걸 뼈저리게 후회한 지 오래되었다.
“어……. 그건.”
예전에 본인이 아직 이르다며 거절해놓고.
그러나 차마 나오지 않는 말에 아이네는 입술만 달싹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랑 한방에 있고 싶어 한 건, 내가 기대하는 이유와는 다를 텐데……. 틀립니까?”
“아, 그게…….”
기대라니! 무, 무슨 기대를 하는 거람.
꽤 직설적인 말에 아이네는 이제 귀 끝까지 발갛게 물들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테고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턱에서 천천히 손가락을 떼어냈다.
‘다행히 아주 모르진 않는군.’
그렇다면 이제 조금쯤은 조심해주겠지.
“방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 테니, 공녀는…….”
테고는 어쩔 수 없는 내면의 충동쯤은 훌륭하게 참아낼 수 있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조심스레 턱을 받치고 있던 온기가 떨어져 나가는 걸 느낀 아이네는 무언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스쳐 지나갔던 그 부드럽고 뜨거운 촉감만이라도 한 번만 더……!
그래서 불쑥 내뱉어버렸다.
“아, 알려주면 안 되나요?”
“뭐?”
“이성에 대한 호감도 그렇고, 알아간다는 게 어떻게 나랑 다르다는 건지……요.”
여태까지는 목소리로만 은밀하게 전해지던 갈망이 순식간에 테고의 눈동자로 옮겨붙어 새파란 빛을 냈다.
하, 그래. 이대로 넘어갈 공녀가 아니지.
테고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는 남은 손을 뻗어 문고리를 더듬어 잠금장치를 채우는 걸 잊지 않았다.
더 이상 방해받는 건 물론이거니와, 이런 장면을 들키는 것도 이제는 사절이니까.
“저번에도 말했듯이 나는 기회가 왔을 때 놓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숫제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와 마주하고서야 아이네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무뢰배도 아니라면서요.”
“무뢰배가 아닌 건 맞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렇게 참지 않았을 테니.”
“…….”
그렇게 말하며 테고가 다시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막 떨어져 나갔던 그의 손이 아이네의 뒷목을 단단히 받쳤다.
“어, 어어?”
이마겠지? 아니면 볼? 설마 다 건너뛰고 바로 입술은 아니지?
격렬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테고는 나머지 손 하나로 아이네의 한 쪽 뺨 전부를 감싸 쥐었다.
“그러나, 공녀와 내 기준이 다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아이네의 가슴은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기대로 들뜨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무언가를 상상하지 않을 여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생각해보면 꼭 순서를 지켜야 된다는 법은 없지 않나?’
싫다는 생각이 아니라 이 순서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부터 이미 테고에게 마음이 기울어도 한참은 기운 셈이었다.
테고의 굵고 조금은 거친 엄지가 아이네의 입꼬리 부근을 살짝 눌렀다. 분명 똑같은 체온을 가진 사람일 텐데도 델 것처럼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치, 침착하자. 아이네.’
아이네는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대신 온몸에 힘이 들어가 뻣뻣해졌다.
거기다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터질 듯한 뺨과 두 귀는 제 주인의 의지를 철저히 배반하는 중이었다.
붙잡은 손과 가까이 다가선 몸으로 그 반응을 여실히 느낀 테고는 그만 속으로 조금 웃고 말았다.
의도치 않게 테고를 자각시켰던 그때와 다르게 이번엔 둘 중 하나는 눈치를 채버리고 말았으니.
‘윽. 차라리 빨리!’
결국 아이네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런 것도 인과응보라면 인과응보일지 모르겠다. 테고도 그때 이런 감정을 느꼈던 걸까.
누군가 제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귀에다 처박아둔 것 같았다. 테고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아이네는 숨 쉬는 법조차 잊었다.
평소 기감이란 걸 느낄 리 없는 그녀의 둔한 감각이 속삭였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그리고 숨결이 제 얼굴을 간지럽히는 감각이 너무…….
‘와……. 와아.’
아이네는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탄성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도 그럴 게 두 눈을 다 감고도 시시각각 좁혀드는 거리감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코끝이 닿을 것처럼 다가왔다가 잠시 멈칫하는 기색. 그리고 뒤이어 코끝이 비껴나도록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내뱉는 옅은 숨까지.
이제 곧……!
아이네가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한 방 안이었다.
마침내 조금 강하다 싶을 만큼 그녀의 입술이 꾸욱 눌렸다. 그러고는 금세 떨어져 나갔다.
“엥?”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가볍고 담백한 접촉이었다. 그것도 너무 짧았다.
반짝 눈을 뜬 아이네의 시야엔 벌써 서서히 멀어져 가는 테고의 얼굴이 잡혔다.
두 눈만 끔뻑이는 그녀에게 테고가 조금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제 엄지를 세워 보여주었다.
아이네의 뺨을 감싼 채 입술 부근을 누르던 바로 그 손가락이었다.
“어땠습니까? 공녀가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읍!”
그때, 별다른 예고도 없이 이번엔 아이네가 테고의 뒷목을 잡고 매달렸다. 그녀에게 조금 더 쉽게 닿기 위해 숙였던 허리가 곧게 펴지기도 전이었다.
순간 부릅뜬 테고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뭐지, 이게 갑자기 무슨.’
전장에서는 여태껏 팽팽 잘만 돌아가던 머리가 굳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최근 수면 부족으로 약간 버석해진 입술에 와 닿는 부드러운 살갗의 느낌이 생경했다.
그건 이제는 꽤 오래전처럼 여겨지는 사냥대회에서의 접촉과 달랐다. 물론 아까 그녀의 이마에 스치듯 지나간 가벼운 감촉과도 차원이 달랐다.
아니, 그저 살갗이라기엔 어딘지 모르게 촉촉하고 쉽게 뭉그러지는 게…….
제 입술에 닿은 게 무엇인지는 굳이 촉감이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바로 눈앞에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온 아이네의 얼굴이 있었으니까.
‘아.’
테고의 파란 눈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대신 조용하고 단단한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할 즈음, 그의 뒷목을 감싸고 있던 아이네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작게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얼굴이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있는 대로 들어 올렸던 아이네의 까치발도 슬그머니 내려갔다.
“…….”
그렇게 아이네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미처 숨기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 테고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의 눈과 입술의 움직임을 따라잡았다.
“……네. 이젠, 확실히 알 거 같아요. 우린 친구는 아닌가 봐요.”
그러고는 부끄럽다는 듯 배시시 미소를 띠었다.
방금 그와 닿았던 저 조그만 입술 위로.
그에 테고의 눈이 돌아버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나는…… 정말 최대한 노력, 했습니다.”
으르렁거리듯 짓씹는 것 같은 음성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네?”
노력? 무슨 노력?
갑작스레 진지해진 그의 태도에 아이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약속을 지키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약속?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테고가 아이네를 한쪽 팔로 안으며 휙 돌아섰다. 방금까지 테고가 기대고 있던 방문에 그녀의 등이 바짝 닿았다.
“테고 경……?”
“왜 그렇게 매번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겁니까.”
아이네의 얼굴 옆으로 팔을 뻗어 지탱한 그가 물었다.
큰일이다. 조금 전의 가벼운 입맞춤이 기어이 테고의 버튼을 누른 모양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팔을 가슴 앞으로 모아 점점 더 줄어드는 둘의 간격 사이로 비집어 넣었다.
그리고 거기에 잠시 신경을 쓴 사이, 더욱 뜨겁고 화끈거리는 열기가 가까이서 훅 끼쳐왔다. 마치 아까는 정말로 장난에 불과했다는 듯이.
“그러니까 먼저 날 부추긴 건 공녀인 겁니다.”
아, 아니. 잠깐만요.
누가 봐도 먼저 시작한 건 테고 경인데요?
당혹스러움에 젖은 아이네가 뭐라고 반박할 새도 없었다. 무어라 더 말하고 싶어 달싹거리던 테고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번엔 진짜였다.
아까처럼 손가락을 사이에 둔 간접적인 입맞춤 따위는 아닐 테다.
그렇게 그대로 입술이 삼켜지려던 찰나.
“단장님? 주군? 계십니까?”
뒤이어 작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렸다.
“하, 제길.”
테고의 커다란 손이 아이네의 목덜미를 막 감싸 쥐려던 참이었다.
테고는 목 뒤에 난 솜털만 스치듯 훑고 지나간 손을 들어 몇 번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완전히 손을 떼어냈다.
하지만 차마 아쉬운 얼굴만은 감추지 못한 채 주르륵 미끄러지듯 아이네의 어깨에 잠시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녀가 아직도 빳빳하게 굳어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멈췄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칼릭, 이 자식을 그냥.’
하지만 번번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방해받는 건 늘 그의 기분을 저조하게 만들었다.
“……왜.”
그리고 그 저조한 기분이 단 한 마디에도 여실히 묻어났다.
“…….”
잠깐의 침묵에서 문밖에 서 있을 칼릭이 흠칫 떨었으리란 건 아이네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바로 문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게다가 오랫동안 함께해온 테고의 반응을 칼릭이 모를 수 있을까.
“아니, 그게……. 단원 둘을 황도로 보냈으니 방이 남는다는 말을 드리려고……. 죄송합니다, 조금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됐다.”
안타깝게도 이미 테고는 다시 바른 청년의 마음가짐으로 돌아온 후였다.
“하아.”
하지만 바른 청년도 저도 모르게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올려진 한숨만은 어쩌지 못했다.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아이네에게 테고가 가볍게 턱짓으로 인사를 했다.
“…….”
그녀의 눈길이 물끄러미 테고에게 향했다.
‘으응, 역시 알아서 일이 풀리긴 했네.’
칼릭의 말로 미루어 보아 역시 테고는 다른 방으로 옮기게 될 듯싶었다. 확실히 남녀 둘이 각자 묵기엔 애매한 구조니까.
그러니 아이네도 이대로 그를 보내주는 게 맞다. 그런데,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뭐야, 왜 이렇게 아쉽지.’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자신도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여태 테고가 그런 쪽으로는 별로 시도하려는 기색이 없기에 순 맹탕인 줄 알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확실하게 그녀를 감쌌던 손길과 살짝이나마 맞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감질났다.
‘딱, 한 번만 더 해보면 좋겠다.’
그러나 아이네의 인사를 기다리는 테고를 마냥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노릇. 거기다가 바로 문 밖에는 칼릭이 와서 대기하고 있다.
결국 우물쭈물하는 표정을 떨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런 아이네의 다채로운 표정 변화를 전부 지켜본 테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찮다, 확실하게 친구가 아니라는 말까지 듣지 않았나.
그리고 찰나에 그치긴 했어도 이번엔 제대로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다행히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니,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관계를 쌓아나가면…….
아까 걸어두었던 문의 잠금장치에 막 손을 가져다 대려는 그때였다.
“저기, 있잖아요.”
아이네의 손이 테고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끌었다.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더니 무언가를 떠올린 기색이었다.
그러자 그는 애써 겉으로만 발라두었던 바른 청년의 자아가 얼마나 빠르게 자취를 감출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다시금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내면의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렇게 얼핏 스쳐 지나간 남자로서의 얼굴은 아이네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에 다시 종적을 감췄다.
짧지만 확실했던 입맞춤 이후에 그의 인내심이 어느 정도로 줄어들었는지 아이네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딱 한 번과 테고의 한 번은 완전히 다를 거란 사실까지도.
“지금은 말고요. 좀 이따가 새벽에 잠시 만날 수 있어요?”
또다시 테고는 내면의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도 큰 기대는 말아야 한다. 경험상 분명히 아까 같은 방을 써야 한다던 이유와 관련이 있을 게 뻔하다.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진실의 미간은 이미 눈에 띄게 좁아져 있었다. 테고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황도로 보낸 기사단원들의 방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어떻게 되더라?
아이네가 목소리를 낮춰 기어들어 가듯 작게 속삭였다. 테고의 고개도 그에 맞춰 아래로 기울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지하실에서 말이에요. 확인 못 한 게 있어서요.”
“…….”
역시나 그 이야기인가.
저도 모르게 맥이 탁 풀린 테고의 옷자락이 순간 확 당겨졌다. 그러고는 볼에 보들보들한 감촉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
엉거주춤하게 굳은 자세로 그의 시선이 아이네에게 향했다. 아까처럼 집요하진 않아도 대답을 바라는 듯한 눈빛에 그녀의 눈이 다른 곳으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기다릴게요.”
“아.”
그제야 테고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손을 들어 아이네의 볼을 감싸려다가 그대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앗! 잠깐만요. 아이참, 다 벗겨졌네.”
지금 다시 제대로 닿았다가는 칼릭이 문밖에 대기하고 있는 걸 잊고 저질러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이제는 완전히 흘러내린 가발을 움켜쥔 아이네를 뒤로하고, 테고는 문에 걸린 잠금장치를 풀어냈다.
곧이어 숨길 수 없이 설레고 벅찬 마음을 끌어안은 채 문고리를 잡아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테고는 완전히 질색하는 표정의 칼릭과 마주했다.
“주군……. 방으로 들어가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곁눈질로 방문이 완전히 닫혔는지 확인한 테고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 유난히 빠른 발걸음이었다.
그 뒤를 급하게 따라가며 칼릭이 채근하듯 다그쳤다.
“문은 도대체 왜 잠그신 겁니까.”
“…….”
“베룸 공작 전하와 나딘 공자님과 약속하신 거, 잊지 않으셨죠?”
“당연하지.”
테고는 더 빠른 속도로 걸었다. 이번에도 잽싸게 따라붙은 칼릭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잊으신 거 아니죠? 예? 저한테 다 들리진 않았지만, 마지막에 공녀님께서 하신 말씀은…….”
거침없이 걷던 테고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아이네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뭐였더라.
‘앗! 잠깐만요. 아이참, 다 벗겨졌네.’
“…….”
테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 * *
틱-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아이네의 눈이 잠시 뜨였다가 감겼다.
팅-
그녀의 반응이 없자 다시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뜻 들으면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다시 무시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려던 아이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거, 그거 아냐? 로판 클리셰 중의 클리셰!
작은 돌멩이로 창문 두드리기!
규칙적으로 들리는 걸 보면 틀림없다.
준비되어 있던 담요를 어깨에 걸친 아이네는 응접실 발코니 쪽으로 난 유리문 가까이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러고는 커튼을 걷어 힐끔 밖을 내다보았다.
발코니는 자그마해서 별관 뒤 공터가 바로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그 자리엔 이제 그녀에게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아이네는 유리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테고 경?”
자그마한 얼굴을 쏙 내밀어 아래를 보며 입을 달싹였다.
거의 속삭이듯이 내뱉은 말을 용케 들었는지 새카맣게 보이는 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희미하나마 사위를 밝히고 있던 달 위의 구름이 걷혔다.
“아.”
그 순간을 목도하고 있던 아이네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둠에 묻혀 까만 형체로만 보일 때도 훤칠했는데…….
확실히 잘난 남자였다. 그것도 꽤 과할 정도로.
생각해보면 남자란 걸 몰랐던 처음부터 외모만큼은 아이네의 눈길을 끌었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이라든가, 웬만한 여자보다 하얗고 고운 피부라든가.
아까는 제 얼굴 한쪽을 전부 감싸 쥐고도 남았던 커다란 손이라든가. 지금은 저렇게 대충 흔들고 있지만 말이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손짓하는 테고의 모습에 그녀의 심장이 새삼스레 뛰었다.
순간 아이네는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방 안으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반쯤 열려있던 유리문도 함께 닫히고 말았다.
‘미쳤어, 미쳤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진짜! 여태 알아 온 게 몇 달째인데.’
한 번 좋아한다는 감정을 자각하고 나니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테고에게 끌리는 마음이 실감났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들어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살갗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까지 다른 감정이 들 수도 있구나.’
같은 사람인데도 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아이네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다.
사냥대회에서 테고가 입술이 닿았다고 우길 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저 곤란하다는 느낌 정도만 들었을 뿐.
아마 그 순간이 오롯이 기억났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았을 거다.
‘이런 게 바로 연애 감정이라는 거였어!’
제 몸을 푹 감싼 담요를 꼭 끌어안은 채로 아이네는 몸을 배배 꼬았다.
그때, 달빛만 비치던 유리문 너머에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드리웠다. 테고였다.
“으앗!”
검지를 들어 유리창을 톡톡 건드리는 시늉에 그녀는 서둘러 발코니로 향하는 유리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올라왔지? 설마 이 높이를 벽을 타고 올라온 건 아니겠지.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거 아냐?
그러나 테고는 아이네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옷을 탈탈 털어 내고 있었다.
“…….”
새삼 느끼지만 여기 사람들의 신체 능력은 어디까지인 걸까.
“나라는 걸 확인했을 텐데, 왜 안 내려오는 겁니까.”
“앗? 헤헤. 그게…….”
왜긴 왜겠어. 달빛을 받고 있는 당신 미모 때문에 가슴이 뛰어서 그랬지.
멋쩍은 얼굴로 그저 배실배실 웃기만 하는 아이네를 보며 테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하긴, 여기 별관은 너무 오래된 건물이라 마루 걷는 소리가 요란하더군요.”
“그랬어요?”
그러고 보니 계단을 올라올 때 나무로 된 바닥이 삐걱대는 소리가 났던 듯도 했다.
“나야 소리 없이 내려갈 수 있지만…….”
테고의 시선이 물끄러미 아이네의 발로 향했다. 그녀도 그 시선의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으응, 어두운 복도에서 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그래도 다들 자고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가끔 바보 같은 짓을 하긴 해도 명색이 기사라 잠귀는 다들 밝습니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테고가 자신이 서 있는 발코니 바깥을 내다보았다.
‘어, 설마……. 아니지? 여긴 3층이라고요.’
올라오는 건 몰라도, 내려가는 건 더 말이 안 되지 않나?
테고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부터 아이네는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안 된다고! 불가능해.
2층이라도 장담할 수 없는데, 3층에서 뛰어내리면 자신은 분명히 어딘가 부러질 게 뻔하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내가 공녀를 안고 뛰어내리는 게 빠르겠군요.”
“아……. 각자 내려가는 게 아니라, 날 안고 뛰어내린다고요?”
그녀의 말에 테고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마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도대체 여태 나를 어떻게 생각한 건지. 내가 여자에게 이 높이에서 뛰어내리라고 할 사람처럼 보였습니까?”
그러고는 고개를 슬쩍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것도 좋아하는 여자를…….”
그렇다고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중얼거린 건 아니라, 아이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뭐, 뭐야.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여전히 그녀가 약간은 뻣뻣하게 서 있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테고가 아이네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내 목 뒤로 팔을 감으면 됩니다.”
“아까처럼요?”
“…….”
뺨을 붉히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그녀의 모습에 테고는 다시 한번 깊게 심호흡을 했다.
자신은 아까의 일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대답이 없는 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그러자 테고는 담요에 싸인 채로 가볍게 아이네의 등을 받쳐 안아 들었다. 갑자기 훅, 높아진 시야에 아이네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이것도 분명히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사냥대회에 참가하겠다는 마음으로 연무장을 돌다가 지쳐서 포기했던 바로 그때였다.
지금처럼 자신을 안아 들었던 테고가 뭐라고 했더라?
‘무거울 테니 이제 내려줘도 돼요.’
‘아니, 가볍, 아니, 네.’
“……테고 경.”
“혹시 자세가 불편합니까?”
테고의 턱 바로 밑에서 고개를 치켜든 아이네의 눈빛이 뾰족해졌다.
“경이 먼저 안아주겠다고 했으니까 이번엔 그때처럼 무겁다고 하면 안 돼요, 알았죠?”
“아, 그건…….”
그녀가 말하는 시기가 언제인지 테고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러고는 이번에도 슬쩍 웃음을 흘렸다.
“내가 공녀를 대할 때 힘을 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는 모르는 게 좋겠군요.”
그러면서 아이네를 가슴팍에 꽉 끌어안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금방 내려가니까 잠시만 눈을 감고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소리가 나올 것 같거든 차라리 입을 막으십시오.”
“이, 입을요? 뭘로요?”
그녀의 말에 뛰어내릴 거리를 가늠하고 있던 테고의 눈이 잠시 아래로 향했다. 희미하게 옅은 달빛에도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형형하게 타오르는 게 잘 보였다.
“아이네.”
아이네라고 부르고 싶다면서도 여태 꼬박꼬박 공녀라고 지칭하던 테고였다.
“네, 네?”
가라앉은 눈빛과 목소리가 무섭다기보다는 이번에도 그녀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늦지 않게 지하실로 가고 싶다면 더 이상 날 도발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래 봬도 상당히 참고 있으니까요.
흘러가는 바람처럼 속삭이며 아이네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테고가 훌쩍 뛰어내렸다.
* * *
지하실이 있는 본관으로 향하는 테고의 품 안에는 여전히 아이네가 담요에 둘둘 말린 채 안겨 있었다.
혹시 마지막에 이마에 입 맞춘 건 소리 지르지 말라는 뜻으로 일부러 그런 걸까.
“…….”
부끄러움과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아이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뒤늦게 자신의 충동 어린 행동을 자책하던 테고가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놀랐습니까?”
겁을 주려던 의도는 없었는데도 이렇게 번번이…….
감정을 자각한 건 아이네보다 먼저였지만 연애에 관해서는 훨씬 서투른 그였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여자 자체에 관심조차 없었으니 그건 당연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테고의 가슴에 무작정 얼굴을 파묻고 있던 아이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놀랐냐고? 놀라긴 했지.
얼마나 놀랐으면 3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걸 체감하지도 못했을까.
거기다 이제는 고작 이마 키스 정도로 부끄러워한 게 아니다.
“저한테 방금 ‘아이네’라고 한 거죠?”
“…….”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목울대를 울렁거리면서도 테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가까이 안긴 아이네는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바로 옆에 귀만 대면 다시금 열렬하게 반응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아이네’라고 불렸을 때, 설레긴 해도 그렇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뒷말을 이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테고의 심장은…….
‘진짜 곧 터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잖아.’
그럼 평소에는 세상 무심한 얼굴을 하고 이런 요란한 심장박동을 숨겨왔던 거야?
아이네가 부끄러워했던 건 바로 그 지점이었다.
테고가 제게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열렬한지 고스란히 느껴져서.
어느 순간부터 삐걱삐걱 소리가 날 만큼 어색하게 걸음을 옮기던 그가 괜스레 말을 돌렸다.
“그……,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실은 황도에서 베룸으로 향했을 때 나딘 공자와도 그렇고, 이번에 아버지이신 베룸 공작 각하를 만났을 때 약조한 바가 있으니까요.”
“뭔데요?”
아이네의 시선이 그의 턱 끝에 매달렸다. 하지만 여전히 테고는 굳은 자세로 앞만 바라보고 걸으며 말을 이어갔다.
목울대가 한 번 더 울렁였다.
“무조건 아이네의 의사를 존중하고 따를 것, 그리고…….”
아이네는 집중했다.
그 시선을 고스란히 느낀 테고는 큼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절대 선은 넘지 말 것.”
앞의 말보다 현저히 작아진 목소리였으나 아이네에게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린 둘 다 성인인데……!
“그러니, 비록 내가 아까처럼 행동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는…….”
“설마 알았다고 했어요?”
그제야 테고가 고개를 내려 품 안의 아이네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그리고 천천히 끄덕였다.
“도대체 왜 그런 아까운 짓을! 아니, 나는 인정 못 해요!”
“…….”
테고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이 풀썩 꺾이려는 걸 초인적인 힘으로 참아냈다.
아이네는 깜짝 놀라 비틀거리는 테고의 목을 더 세게 껴안았다.
“으앗? 괜찮아요? 무거우면 차라리 말을 하라니까요.”
그리고 그런 그녀를 다시 고쳐 안은 테고가 고개를 저었다. 흡사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건 공녀 무게 때문이 아니라…….”
늘 느끼지만 몸의 무게는 이렇게 새털처럼 가볍기 그지없는데, 종종 제게 말로 가하는 타격만큼은…….
가까스로 내상을 극복한 테고가 아이네에게 물었다.
“그럼 내가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겁니까?”
“당연하죠!”
그런 걸 굳이 왜 묻느냐는 그녀의 얼굴에 테고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이제 그는 멋대로 오해하고 착각하기보다는 의심스러울 땐 제대로 확인하는 게 낫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말입니다. 그 선이란 건 단순한 입맞춤 정도가 아닙니다.”
“네에?”
이번에는 아이네가 진지하기 그지없는 테고의 표정을 살피려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테고 경이야말로 그동안 나를 어떻게 봐왔길래!
이전부터 묘하게 어린애 대하듯 한다 싶긴 했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이가 없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본 테고는 더욱더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런 행위는 책임감을 갖고…….”
보자보자 하니까 이 사람이 정말!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아이네가 가차 없이 그의 말을 잘랐다. 나딘이나 아버지의 과보호만으로도 가끔 숨이 막히는데 테고까지 이런 식이라니.
귀하게 아껴주는 게 나쁘단 말은 아니다. 하지만 보호하고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애 취급하는 건 이제 사절이다.
아직까진 짐작에 불과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는 더더욱 그랬다.
“나랑 테고 경, 고작 세 살 차이인 거 알아요?”
“…….”
테고는 담담한 얼굴로 침묵했다.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것과 이렇게 그녀의 입으로 확인받는 건 또 달랐으니까.
“그리고 달리아 영애가 나보다 한 살 어린 미성년자라는 건 알죠?”
“…….”
그는 이번에도 여전히 침묵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적잖이 놀란 기색만은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붉은 머리의 후작 영애가 그렇게 어렸던가?
전혀 몰랐다. 에펜베르크 후작가의 영애라는 사실과 아이네가 그녀에게 꽤 마음을 쓴다는 것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까.
“테고 경은 지금 내 나이 때 반란군 토벌 작전에 자원했었다면서요.”
“그건…….”
“그리고 나한테 오빠나 아버지가 아니라 남자로 대접받고 싶은 거 아닌가요?”
그제야 테고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여태껏 그에게는 관심이 가는 여성이 있기는커녕 여동생조차 제대로 겪어볼 일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나딘 공자가 아이네를 대하는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기만 한 탓이다.
그녀의 작은 키와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도 한몫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놓인 연인이 아니라 자신이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오만했군.’
저도 아직 제대로 모르는 스킨십의 단계까지 운운해가면서…….
한번 깨닫고 나니 아이네가 다르게 느껴졌다. 품 안에 넣고 지켜주기 급급한 요정이 아니라 한 명의 어엿한 여자로 보였다.
“그러니까 선을 넘을지 말지는 오롯이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거라고요, 아시겠어요?”
아이네의 선언과도 같은 일침에 테고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기색이 어렸다.
후, 눈높이 교육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여러분!
아마 테고는 영영 알 수 없겠지만 원래 세계에서 각종 간접 경험으로 단련된 아이네가 아닌가.
그러나 호기로운 모습도 잠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여전히 테고의 팔 아래 안긴 그녀의 어깨가 갑자기 움츠러들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쭈뼛대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은, 아니에요.”
그의 눈치를 보며 점점 작아지는 음성에 이번에도 테고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알고 있습니다.”
아, 역시 귀엽게 느껴지는 건 변하지 않는다.
* * *
“이제 다 왔습니다, 잠시만.”
본관 바로 옆 지하실로 통하는 입구 앞에서 테고가 자세를 바꿨다.
무겁기는커녕 그녀를 대할 땐 힘 조절을 하는 게 오히려 어려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나 보다.
정말로 어린애를 다루듯 아무렇지 않게 아이네를 한쪽 손과 팔만으로도 안정감 있게 받쳐 안았다.
다른 한 손으로 열쇠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도 힘든 내색 하나 없는 모습에 그녀는 조금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날 어린애 취급할 만했네.’
어마어마한 체력이며 검술 실력에, 인간 같지 않은 신체 능력과 힘까지.
여태 보통 사람보다도 허약한 아이네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하실 입구 열쇠는 아까 집사에게 돌려준 거 아니었어요?”
“그랬습니다만, 내일 황도로 가기 전에 한 번 더 살펴볼 게 있다고 했더니 순순히 내어주더군요.”
아까 낮에 아무런 저항 없이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던 건 베르길리우스 영지 전체에 내려진 수색 명령 때문이었다. 목적이었던 곡물 수레를 찾았으니 그 명령은 효력을 다한 셈이었다.
미처 열쇠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아이네가 새삼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흐음, 그럼 집사는 이번 일도 수색의 하나라고 생각해서 내주었나 보네요.”
“……그자가 멋대로 착각했을 뿐, 거짓말은 안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엔 고지식하고 융통성이라곤 없던 테고도 참 많이 변했다.
아이네와 처음 만나고, 가까워지게 된 계기였던 호위 역할만 봐도 그랬다. 그저 베룸에 오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던 폐하의 명을 악착같이 수행하던 사람이었는데…….
지하실로 향하는 문이 열리자 그녀가 테고를 멈춰 세웠다. 지금부터 다시 한번 확인할 내용이 가장 중요한 일일 테니까.
“내려줘요, 여기서부터는 내 발로 걸을게요.”
“하지만……. 알겠습니다.”
방에서부터 신고 온 실내화에 다시금 제대로 발을 욱여넣었다. 그리고 아이네는 결연한 얼굴로 계단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 * *
“하, 역시……. 이게 끝이 아니었어.”
아니, 정확히 말해서 시작도 안 된 거다.
아이네는 손을 들어 잠시 이마를 짚었다.
아까는 자신이 쓴 기억도 없는 책에 빙의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그냥 지나쳤던 부분이 문제였다.
고대 일족으로 알려진 나머지 드래곤 셋의 힘을 흡수해서 시간을 돌리던 건 끝이 났다. 이젠 마리에 영애도, 란델조차도 없으니까.
거기다 시간을 돌릴 마도구인 회중시계는 그녀와 테고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니 아이네가 우려하던 대로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그놈의 설정 오류라는 것 때문에 세상이 멈추는 건 똑같잖아.’
오직 시그노와 마리에 영애만이 회색빛으로 멈춘 세상을 자각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정해진 역할 이상의 자아를 가져서일 거야.’
그렇다면 이번에 또 똑같이 설정 충돌로 세상이 멈춰버렸을 땐, 적어도 시그노와 아이네, 그리고 한 명이 더 남겨질 테다.
아이네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테고에게로 옮겨갔다.
“나한테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이 세계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고 했죠?”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그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문제, 아주 큰 문제가 생겼지.
이대로 가면 적어도 25년 후엔 나와 당신과 시그노가 셋이서 손가락만 빨게 생겼으니까.
심지어 아이네는 여전히 자신이 빙의했다는 연작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빙의시킬 거면 전부 온전한 나를 데리고 왔어야지!’
내일이라도 테고를 따라 황도로 가는 게 아니라 혼자서라도 베룸 영지의 경계로 돌아가야 하나?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손 위로 테고가 제 손을 겹쳐 올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말해줄 수 없는 일입니까?”
“음, 으음. 그러니까요.”
아이네는 울상이 된 채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테고는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금세 이해하곤 요약했다.
“그 설정 오류 때문에 이야기가 진행될 수 없어서 멈추었다는 말이군요.”
“아마 테고 경과 나, 시그노인지 하는 그 드래곤만 남게 될 거예요. 만약 시그노가 스스로를 희생해서 또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결론은 마찬가지일 테고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네에게 테고는 너무도 쉽게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럼 그 설정 오류라는 걸 오류가 아니게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요?”
“‘진실의 눈’을 계승한 베룸의 직계 남자아이가 등장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그러면서 그가 아이네를 향해 눈짓을 했다.
“어? 아……!”
테고가 말하는 바를 깨달은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래, 이거였구나! 그래서 시그노가 자신을 아이네이스 공녀의 몸에 빙의시켜 살린 거니까.
“원래대로 오빠의 아이가 아니라 내가 낳은 아이가 ‘레이’가 되면 되는 거였군요!”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짝, 맞부딪쳤다.
그러고는 신이 난 얼굴로 가까이 서 있던 테고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지 뭐예요!”
“……그렇습니까.”
홀로 방방 뛰던 아이네의 시선이 곧이어 위로 올라갔다.
그럼, ‘레이’의 아버지는 누가 되어야 하는 거지?
테고와 눈을 마주한 아이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이 모든 게 잘 짜인 각본이나 운명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고는 내가 직접 쓴 캐릭터가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은 분량이 적을지언정 모두 그녀의 손이 닿은 인물이었다. 그건 라니엘이 주인공인 소설의 끝자락에 간신히 등장한 나딘마저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러니까, 오직 테고만이 달랐다.
“있잖아요.”
“……?”
아이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랑 그 선이라는 거 넘을 준비…… 얼마나 됐어요?”
“컥! 지, 지금 말입니까?”
테고의 입에서 목에 졸린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쿨럭거리면서 지하실을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아이참, 지금은 말고요.”
그런 그의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는 아이네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속사포처럼 여러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혹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가족계획은 있어요?”
“가족계획……이라면.”
생소한 단어에 테고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 역시 이곳에서는 좀 낯선 개념인가 보다.
“그러니까 아이는 몇 낳겠다, 이런 거 있잖아요.”
“…….”
테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결혼조차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쪽으로 계획이 있었다면 진작 폐하가 시키는 대로 약혼이라도 했을 겁니다.”
하긴, 그건 그렇지.
처음 황도에 갔을 때 폐하께서 필사적으로 자신과의 약혼을 몰아붙인 것만 봐도 그랬다.
다른 형제, 혹은 부모님이 살아계신 아르비드나 케이어드와는 다르게 테고는 혼자였으니까. 리테루온 공작가의 직계가 끊길까 봐 급했던 거지.
“그랬구나, 그럼 지금은 좀 달라졌나요?”
아이네의 순진한 물음에 테고는 씩 웃었다. 달라졌다마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 공녀는 제 마음과 방향만 같았지,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아직까지 반의반조차 모르고 있는 거다.
“달라졌다고 생각합니까?”
그의 손이 아이네의 어깨 부근으로 향했다. 갑자기 커다란 손이 다가오자 아이네는 퍼뜩 굳어 테고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베룸으로 오기 전, 폐하께 혼인 서약서를 내어달라 먼저 요청한 게 누구일 것 같습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담한 발언들을 터뜨려대는 건 자신을 라니엘로 알고 있던 시절과 같았다.
하지만…….
“네?”
그녀의 반응만은 예전과 조금씩, 아니, 꽤 많이 달라졌다.
테고의 두 손이 직접 닿지는 않은 채로 아이네의 어깨선을 거꾸로 타고 올랐다.
그리고 목 언저리에 다다라서야 매무새가 약간 흐트러진 담요 끝을 잡아 꽉 여며주었다.
“이젠 알고 있겠지만, 여태까지 나는 검을 제외하곤 욕심내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잡은 두 손을 놓지 않은 채 테고가 천천히 상체를 굽혀 아이네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까지는 내 환경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당신이 내게 아무런 역할도 주지 않아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요.”
“윽…….”
지금 말로 때린 거지? 아무래도 내상 입은 거 같은데…….
정곡을 찔린 탓에 아이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바람에 아직 담요를 잡고 있는 테고의 손 위로 그녀의 얼굴이 살짝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에 그의 미간이 조금 더 좁아졌다. 그때, 잠시 망설이던 아이네가 제 손을 테고의 손등 위로 올렸다.
“그래서 말인데요. 테고 경만 괜찮으면 제가 책임지고…….”
“잠깐, 잠깐만!”
얼굴을 붉히며 또 거침없이 발언하려는 아이네를 그가 급하게 말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그녀와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그러자 아이네의 시야에 테고의 잘생긴 얼굴과 새파랗게 열이 오른 눈동자가 더 선명하게 잡혔다. 자신을 제지하는 말을 내뱉었던 저 입술도.
아까부터 왜 자꾸만 입술에 눈이 가는 걸까.
금세 붉게 물들어버린 제 뺨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그녀는 홀린 듯 말을 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결혼해달라는 말은 너무 진부하고.
“어, 그러니까. ‘레이’의 아버지가 되어주…….”
더 말을 이으려는 아이네의 입술 위로 말캉한 감촉이 와 닿았다. 제가 먼저 시도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힘 있게 눌리며 뭉그러지는 얇디얇은 살갗이 뜨거웠다.
‘아니, 계속 기회를 노린 건 맞는데. 지금 이렇게 갑자기?’
당황스러운 속마음과는 달리, 아이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제 심장의 두근거림을 마음껏 즐겼다.
이제 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더라? 역시 뽀뽀랑 실전은 다르구나!
꼬옥 맞붙은 입술 사이로 따뜻한 숨이 흘러들어왔다. 그러자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달싹거렸다.
조, 조금만 더……!
3층 높이에서 뛰어내릴 때도, 테고에게 안겨서 이곳에 올 때까지도 아이네의 어깨에 붙어있기라도 하듯 잘 매달려 있던 담요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금은 어둑하던 지하실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테고의 아티팩트와 아이네의 눈에 남겨진 힘에 마도구가 감응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살랑살랑 책장만 흔들어 대던 기록용 마도구가 정신없이 움직이며 무언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아니, 왜 안 된다는 건데요.”
“하루에 두 번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황도에 진입하기 전 마지막 휴식시간이었다. 아이네의 몸 상태를 살피려 마차 문을 연 테고는 그대로 팔이 끌어당겨졌다.
“자꾸 이러다가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마차 안 좌석에 털썩 주저앉은 그가 필사적으로 아이네와의 간격을 벌리려 애를 썼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스킨십에 더 보수적으로 구는 건 테고였다.
게다가 이제 와서 단원들의 반응을 신경 쓰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진짜 이러기예요? 그날 밤에도……!”
“잠깐, 아이네. 밖에 다 들립니다. 기사들은 귀가 밝단 말입니다.”
테고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잠시 덮었다. 그러다 손바닥에 닿는 살갗이 느껴지자 화들짝 놀라며 떨어져 나갔다.
“하, 정말.”
아이네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러고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 커다란 덩치를 하고도 그녀의 손길을 요리조리 잘만 피하는 테고의 뛰어난 신체 능력에 새삼 부아가 치밀었다.
“우리가 도대체 뭘 했다고요.”
“…….”
현대의 각종 자극적인 매체에 이미 익숙해진 그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제게 보여주던 그 진지한 얼굴과 뜨거운 눈빛은 다 뭐며, 매번 참기가 어렵다고 한숨 쉬듯 내뱉는 그 설레는 목소리는 다 뭐냐고!
기껏 방을 나와서 지하실까지 다녀온 그날 밤도 그랬다.
“누가 보면 우리가 밤이라도 보낸 줄 알겠어요.”
“방에 돌아갈 때쯤 동이 트고 있었으니 영 틀린 말은…….”
이젠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도록 마차 문에 바짝 붙은 테고가 중얼거렸다.
“아, 진짜! 키스도 제대로 안 할 거면 그때 입은 왜 먼저 맞춘 거예요.”
그랬다. 그날 아이네의 담요가 흘러내리기 무섭게 테고는 입술을 떼어냈다.
당연하게도 그 다음 단계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어안이 벙벙해질 만큼 급하게.
그때를 떠올리며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던 테고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약혼 결정도, 첫 키스도 당신이 먼저 하게 만들었는데 내가 프러포즈마저 가만히 듣고만 있을 거 같습니까.”
“네?”
“그것만은 양보 못 합니다.”
여전히 한 손으로 이마와 눈가 언저리를 덮은 채, 테고가 그녀가 앉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한 번 더 깊게 심호흡을 한 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완전히 떼어냈다.
그러자 드러난 얼굴은 요즘 아이네를 가장 설레게 하는 바로 그 표정이었다.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충동을 한껏 억누르면서도 어느 한편에선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않은, 남자의 얼굴.
“그날 당신과 정말로 밤을 보내고, 선을 넘었으면…….”
“…….”
“우리가 지금 어떻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단숨에 테고가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 당겨 앉았다.
아이네는 기분 좋게 도근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물끄러미 시선을 위로 옮겼다.
평소엔 라니엘로 착각했을 만큼 곱상하고 소년 같은 얼굴을 한 그다.
하지만 여기에 남자로서의 욕망이 한 꺼풀 덧씌워지니 그 아슬아슬하고 치명적인 모습이란……!
“하루에 겨우 두 번 당신과 입을 맞추는 게, 나라고 해서 모자라지 않을 것 같습니까?”
테고의 손가락이 아이네의 턱 끝을 잡아 올렸다. 그녀의 도발을 참기 어려울 때면 으레 나오곤 하던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그 목소리였다.
그렇게 한쪽은 쫓고, 한쪽은 궁지에 몰려 있던 상황이 반전됐다.
“나는 한 번 넘은 선을 되돌리는 법을 모릅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
“아니……. 넘어도 괜찮다니까요?”
소심하게 대꾸하는 아이네의 말에 테고는 후, 하고 웃었다. 미미한 부끄러움과 달뜬 기색이 엿보이지만 여전히 순진한 눈빛이었다.
“그때 그랬다면, 아마 지금쯤 당신은 내 침실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있었을 겁니다.”
“힉?”
그 말에 그녀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 이렇게 직접적인 말을 하는 건 처음인데…….
“황도에 남은 귀족파 처리가 어찌 되었건, 폐하의 명이 있었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 그러면 안 되죠. 확실히…….”
여태 참고, 참고 또 참다가 기어이 제 속마음을 조금 내보인 테고의 눈이 가늘어졌다.
얼굴 전체를 잔뜩 물들인 채로 입술을 달싹거리는 그녀를 바라만 보는 데도 한계가 온 지 오래다.
“흡?”
결국, 하루에 두 번만 가볍게 입술을 맞대겠다던 스스로의 결심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젠 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매번 더 달콤하게만 느껴졌다.
겨우 입술 겉만을 강하게 부딪치다가 감질나게 떼어내는데도 이러할진대, 그녀와 함께할 다음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아쉬운 마음에 테고는 한 번 더 꾹 눌렀다가 억지로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아이네를 품 안에 꼭 안고 어르듯 입을 열었다.
“나를 진짜 나로서 알게 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잖습니까.”
“네에.”
머뭇거리던 작은 두 손이 그의 등을 덮었다.
“그러니 적어도 서로를 제대로 알아간 뒤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다음을 알기 전에 지금만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걸 당신과 전부 다 겪어보고 싶은데.”
테고의 말이 잠시 멎은 사이, 아이네는 따뜻하고 커다란 품에 더 깊게 얼굴을 묻었다.
작지만 안온하기 그지없는 감각에 그는 침음성을 흘렸다. 평생 메마르기만 했던 제 가슴 한구석을 이렇게까지 뜨겁도록 타오르게 만드는 존재가 있을 줄은 몰랐다.
“너무 큰 욕심입니까?”
“아뇨.”
껴안긴 채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여태껏 성안에만 있을 때 꿈꾸던 이상적인 연애라는 게 바로 이런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어쩌다 보니, 하루에 두 번이라는 약속을 어겼군요.”
테고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아이네의 어깨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럼! 이제부터는 세 번으로 할까요, 우리?”
명랑한 목소리로 기다렸다는 듯 품 안에서 아이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테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