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활자, 그 이상의 것
“음?”
뭐지?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아니, 아니. 이건 아니고.
황궁에 입성한 아이네는 양손으로 제 팔뚝을 감싸며 부르르 떨었다.
겨우 며칠 만에 돌아온 황궁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명히 계절상으로는 완연한 여름이 다 되었는데도 말이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테고와 그녀를 알현실로 안내하는 시종장 로버트의 뒤통수로 아이네의 시선이 옮겨갔다.
‘와, 이젠 반백이라고도 못 하겠네.’
그래도 듬성듬성 나 있던 시종장의 흰머리가 어느새 머리카락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많아져 있었다.
거기다 피곤함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까지.
도대체 며칠 사이에 혼자서 몇 년을 늙으신 거야.
여전히 허전한 느낌이 드는 팔뚝을 어루만지며 아이네는 나란히 걷고 있는 테고를 쿡쿡 찔렀다.
그러자 평소처럼 대외적으로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던 테고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여기서 나만 분위기 바뀌었다고 느끼는 거 아니죠?”
그 말에 테고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이젠 그런 것도 알아차리는 겁니까?”
“씨이, 누굴 진짜 눈새로 알아요?”
“눈새……?”
그런 표정 지어도 이번엔 설명 안 해줄 거야! 여태 눈치 없이 굴었던 건 당신이 여자인 줄 알고 그랬던 거라니까?
아이네는 입을 다문 채 새침하게 고개를 팩 돌렸다.
“허허, 두 분께서 그사이에 정말 많이 가까워지셨군요.”
두 사람이 뒤따라오지 않자 혼자서 한참이나 앞서나갔던 로버트가 머쓱한 얼굴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녀를 처음 안내할 때와 비슷한 상황처럼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대체 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
“…….”
아이네의 질문에 시종장과 테고가 서로를 말없이 마주 보았다. 황궁에 몸담은 시간이 오래된 만큼 로버트가 먼저 주위를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그건, 이제 알현실에 들어가시면 폐하께서 말씀해주실 겁니다.”
역시 설명하기 곤란할 때는 상급자에게 미루는 게 최선이라는 걸 로버트는 아주 잘 알았다.
* * *
“오! 어서 오거라.”
알현실에서도 서류를 쌓아 놓고 보고 있던 황제가 그들을 맞이했다. 마지막 장까지 대강 넘겨보다 바로 도장을 쾅 찍은 황제는 그제야 느른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로버트, 여기 있는 것들은 검토가 끝났으니 부서별로 각각 전달하고. 이제 나머지 새로운 지원자는 사후에 보고서만 제출하라고 해.”
“……예, 폐하.”
숨길 수 없는 한숨이 로버트의 대답에 섞여 들어갔다. 한가득 쌓여있는 서류의 양을 본 그의 낯빛이 더욱 파리하게 질렸다.
이제 보니 눈 아래도 갑자기 더 거뭇해진 것 같고.
처음 보았을 때부터 동갑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폐하와 시종장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 간극이 더 벌어진 듯했다.
‘역시 로버트라는 이름에 문제가 있는 게 맞았어. 미안해요, 시종장님.’
그저 우연일 수도 있으나 자신이 썼다는 소설인 만큼 의도를 갖고 붙인 이름일 가능성이 컸다.
로봇처럼 밤낮없이 일하는 인물이라는 뜻으로 지었겠지.
그렇다면, 잠시 잊고 살았던 우리 집 로버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잠시 아련해진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그녀를 뒤로한 채 테고와 황제의 대화가 이어졌다.
“압수한 곡물 수레는 제1기사단이 인계받아 가져오는 중이라고 하더군.”
“예, 그렇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도 테고의 신경은 곁에 선 공녀에게 모조리 쏠린 티가 났다.
그런 그에게 의례적으로 진행 상황을 묻던 황제의 얼굴에 짓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 그러면, 네 녀석과 공녀의 결혼식만이 남은 건가?”
“엥?”
“아, 아직은 아닙니다.”
손사래를 치는 테고와 아이네를 보며 황제가 턱을 괴었다.
“짐이 딱 보니 황도를 떠난 사이에 뭔가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틀렸나?”
“벼,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누구 때문에.”
“…….”
아이네가 뒤에 덧붙인 말에서 약간의 불만을 읽어낸 황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리는 테고 녀석을 다 보게 되다니.
예상대로 공녀 쪽이 더 적극적인 모양이지? 저 녀석은 공녀에게 끌려 다니기만 하는 듯하고.
공녀를 데리러 가겠다면서 혼인 서약서에 승인을 요구하던 그때 그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노릇이다.
‘베룸의 발현자를 황실에 들이지 못해 아쉽게 됐군. 그래도 저 둘이 맺어지기만 한다면야.’
황제라고 해서 고대 일족의 이능이 탐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이젠 천 년도 더 지난 일에 불과했다.
발현자가 나오지 않은 지 벌써 몇백 년이다. 그래도 각 가문은 건재했다. 그리고 제국은 인간의 힘만으로도 여기까지 왔다.
게다가 이번 기회에 건국 시기의 제국법을 뜯어고치게 된 만큼, 황제는 고대 일족이라는 과거에 더는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흉흉한 분위기를 쇄신하기에 두 사람의 결혼보다 좋은 수단은 없을 것 같은데.”
뼛속까지 정치가인 황제의 머릿속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예식이 그려졌다.
여론 환기용으로 제국 최고위 가문의 혼사보다 좋은 게 있을 리가 있나.
“흉흉한 분위기요?”
그러나 이번에도 다른 단어에 꽂힌 아이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 맞다! 남부 귀족파는 전부 처리하신 거예요? 전부 감옥에 갔나요?”
아이네의 순진한 물음에 황제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저런, 테고 녀석이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나 보군.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시간도 없을 만큼 둘만의 시간에 빠져있었거나.
“처리, 라면 벌써 끝이 났지. 감옥에 있는 자들도 있고.”
애매하게 흘리는 황제의 말에 아이네는 이때다 싶어 강조하듯 외쳤다.
“곡물 수레를 찾아낸 것도 그렇지만, 이번 일은 달리아 영애가 아니었다면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거예요.”
아이네의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 기회에 달리아 영애도 그 지긋지긋한 집안에서 반드시 탈출시켜야 했다.
최소한 그 아버지와 오라비라는 작자가 달리아 영애를 팔아넘기듯 시집보내는 것만은 막아야……!
“에펜베르크 영애의 공이 가장 컸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지. 아, 참! 바로 내게 오느라 그 아이를 아직 만나지 못했나 보군.”
그러나 이어지는 황제의 말에 아이네는 꽉 쥐었던 주먹에서 스르르 힘을 뺐다.
달리아 영애가 지금 황궁에 있어?
* * *
“달리아 영애!”
“아, 베룸, 아니, 아이네이스 공녀님.”
바람처럼 달려가 손을 맞잡은 아이네에게 달리아가 반가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황궁에 오셨다는 말은 전해 들었어요. 폐하를 알현하고 오시는 길인가요?”
“맞아요! 와,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일이래요?”
아이네는 들뜬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마주 잡은 손을 흔들었다. 예전만큼 보드랍지는 않지만 펜을 쥐고 일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아예 부서를 옮긴 거예요?”
“아뇨, 지금은 채용이 끝날 때까지 임시로 맡은 거고요. 일이 전부 마무리되면 다시 재무부로 돌아가야지요.”
자세히 보니 그 곱던 피부도 조금 상해있었다. 늘 곁에서 나딘과 로버트를 봐왔던 아이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야근과 추가 근무에 시달리는 사람의 피부야. 틀림없어!
하지만 달리아의 얼굴엔 그 어느 때보다도 구김살 없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곧 영애들의 면접이 있어서요. 혹시 퇴궁 시간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요! 다녀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서둘러 지원서들을 챙긴 달리아가 아이네와 멀뚱하게 서있는 테고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달리아가 자리를 뜨자 여전히 신이 난 기색인 아이네의 곁으로 테고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숨기려고 한 게 아니라…….”
“알아요, 그동안 내가 하도 치근대서 정신이 없었죠?”
잠시 망설이던 테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둘이 남기만 하면 ‘조금만 더!’를 외치며 엉겨 붙는 아이네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스스로의 이성을 단속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은 과부하가 걸리고도 남았으니까.
“달리아 영애가 새로 들어올 여성 행정관 인사 담당이라니요! 와, 진짜 제국법이 바뀐 거예요?”
“그렇습니다. 이제 영애들도 시험만 거치면 관직에 진출할 수도 있고, 정당하게 가문도 이을 수 있습니다.”
천 년하고도 몇백 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던 제국법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물론 작은 반발이야 존재했지만.
“아까는 못 물어봤는데, 으음. 폐하께서 말씀하신 ‘처리’라면, 역시?”
테고의 조심스러운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갔다. 그런 그의 태도를 본 아이네가 짐짓 화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도 그렇고, 테고 경도 내가 겨우 그런 일로 충격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죠!”
여기에 빙의하고 나서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게 맞다. 하지만 원래 세계에선 각종 형벌의 역사 정도는 다 본 적 있는 몸이라고!
“다른 것도 아니고 황족을 참칭한 무리였으니 즉결처분되었습니다.”
“당연한 결과네요.”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목소리를 높이던 게롤드 후작을 기억한 아이네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그렇지만 여태 남부의 귀족파를 진작 처리하지 못한 건,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다.
거기다가 아까 황제 폐하의 말대로라면 남부 귀족파를 전부 처단한 건 아닌 모양인데.
“게롤드 후작 같은 경우엔 가문 전체가 연루된 거 아니에요? 그럼 그 공백은…….”
그녀의 말에 테고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역시 곧바로 이런 지점을 짚어내는 걸 보면 제국법은 지금이라도 수정되는 게 맞았다.
반발하던 무리들의 말대로 영애라고 해서 날 때부터 정치에 무감각한 게 아니었다. 다만, 그런 시각을 기를 교육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였으니까.
“게롤드 후작가와 남부 귀족파를 엮을 비밀 장부를 작성하고 제출한 게 장녀인 게롤드 후작 영애라고 하더군요. 아, 이제 곧 후작이 될 겁니다.”
시대가 어찌 되었든, 환경이 어찌 되었든 그저 숨죽이고 있었을 뿐인 날카로운 송곳은 적절한 때가 되면 주머니를 뚫고 나오기 마련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테고의 이야기에 아이네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다.
“달리아! 이야기 들었습니까? 우리 아이네가 도착했……. 아니,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러는 오빠는 왜 남의 사무실에 마음대로 들어와?”
아니, 그것보다…….
‘달리아’라고?
아이네의 시선이 금세 뾰족하게 변했다.
설마, 이 자식이?
* * *
“아냐, 잠깐! 아이네, 내 말 좀 들어 봐.”
나딘이 기겁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제 동생의 터키석 같은 눈동자를 순식간에 잠식해나가는 감정이 무엇인지 오빠인 그는 단박에 알아보았으니까.
그리고 나딘의 추측은 정확했다. 아이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어느 늦은 밤의 기억이었다.
‘아냐, 잠깐! 아이네, 오해야.’
나딘의 재킷을 걸친 채 소매로 몸이 꽁꽁 묶여 있었던 달리아. 그리고 그의 품에 힘없이 껴안긴 듯했던 모습까지.
편견이라는 필터를 거쳐 그날의 기억은 한층 더 왜곡된 모습으로 떠올랐다.
‘서로 오해라고 하기에 묻어두고 넘어갔었는데…….’
한 번은 오해일 수 있어도, 두 번째까지 그럴 리가.
“이, 개…… 쓰레기 같은! 죽어! 그때 죽였어야 했어!”
“아냐! 아니라고!”
단숨에 아이네에게 멱살을 잡힌 나딘이 목이 졸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하잘것없이 작은 손이라고 해서 순간의 기습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차마 제 여동생을 강하게 밀치지 못하는 나딘의 눈이 다급하게 주위를 훑었다.
그리고 금세 테고를 발견해냈다.
“테, 테고 경! 아이네 좀 말려주…….”
그 말에 테고가 성큼성큼 걸어 그들 남매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반가운 기색인 나딘을 그대로 스쳐지나갔다.
“응?”
나딘의 등 뒤로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테고는 팔짱을 낀 채로 말없이 베룸 남매를 응시했다.
늘 보던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단 하나만이 달랐다. 바로 눈빛이었다.
사람이 아닌 사물, 아니, 마치 구제하지 못할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경멸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나한테는 아이네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잘라버릴 것처럼 굴었으면서.’
나딘은 정말로 억울했다. 아이네의 손에 속절없이 흔들리며 그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듣긴 뭘 들어. 아버지도 오빠가 이러고 다니는 거 아셔?”
“……문을 잠갔으니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못 들어올 겁니다. 마침 잘됐군요. 이젠 영애도 작위를 계승할 수 있게 제국법이 바뀌었으니.”
그거……, 살인 예고인 거지?
못 본 사이에 죽이 척척 맞는 연인이 된 두 사람을 보며 나딘은 절망했다.
* * *
“그러니까, 오빠도 폐하한테 당했다는 거네.”
“아냐! 이 계약은 달리아가 성년을 맞을 때까지만이니까.”
과연 그럴까?
아이네가 흐린 눈을 한 채로 테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테고도 기꺼이 동의를 표했다.
“처음엔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번 곡물 유출 건에서 검문소 감시 소홀 문제로 에펜베르크 후작 가문은 대대적인 감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후작과 소후작이 횡령과 뇌물 혐의로 구금되는 건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이 모두가 달리아가 미리 정리해둔 장부 덕택이었다.
거기에 제국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는 약물 복용과 상습 도박, 달리아조차 미처 몰랐던 그동안의 각종 범죄 행위까지.
마치 양파 껍질 벗겨지듯 속속히 드러나는 중이었다.
“후작과 소후작의 작위가 박탈됐으니 방계 인척이 달리아 영애의 법적 보호자가 되는 거였구나.”
“그렇지. 문제는 달리아가 성년이 되기 전에 그 새로운 보호자가 다른 집안과 혼약을 맺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아하, 그러면 다음 후작위는 방계인 보호자에게 넘어갈 거고.”
나딘의 설명에 아이네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우리 폐하께서 갈수록 약을 파는 실력이 일취월장하시네. 이번 건은 굉장히 그럴듯했어.
“그래서 오빠가 그때까지 달리아 영애의 약혼자가 되기로 했다고?”
“기한부 계약 약혼이라니까.”
“그래, 그래. 기한부 계약 약혼.”
성의 없이 대꾸하던 그녀가 다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근데 왜 ‘달리아’라고 이름으로만 불러?”
“아, 아니. 기왕이면 남들한테 진짜인 것처럼 보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달리아가 먼저 물어보기에…….”
“달리아 영애가?”
그렇게까지 연극에 진심인 편이었나.
그때, 아이네의 머릿속으로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어라, 그러고 보니 나딘이랑 결혼하고 레이를 낳는 차기 공작부인은 누구였더라?’
그에 답이라도 하듯 기록에서 스쳐 지나간 서술 역시 뒤이어 기억이 났다.
공작부인이자 레이의 어머니인 라디아는 타는 듯 붉은 머리카락과 연한 다갈색 눈동자를 지닌 굉장한 미인이었다.
똑같은 외모에 이름만 다른 라디아와 달리아라…….
너무 대놓고 같은 사람이잖아?
아이네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뭘까,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분명히 달리아 영애를 겨우 그저 그런 악녀 조연으로 써먹었다고 욕을 먹은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뜬금없이 연작에서 재등장했을 리가 없다.
어쩐지 달리아 영애에게선 란델에게 시해당했던 황제 폐하와 달리 ‘기억’이 보이더라니…….
그녀는 국외로 추방된 후에도 살아남은 데다가 나딘과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 새 신분을 얻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더해 ‘시그노’가 했던 말도 겹쳐졌다.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라고 했었지, 참.”
“그게 우리 베룸 일족의 가훈이지.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용케 알아들은 나딘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아이네는 어딘지 모르게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이 모든 게 진짜 원작이라던 연작을 위한 큰 그림이라면…….
이상하게 뭐에 홀린 듯 달리아 영애를 적대시하던 다른 귀족들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원래의 국외 추방 엔딩이 어그러졌으니 달리아 영애를 고립시켜서 나딘한테 의지하게 만든 걸지도.’
그 말은 기한부 계약 약혼이 진짜 결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모자란 혈육을 부담해야 하는 누군가가 달리아 영애라는 건 매우 유감이지만.
“오빠. 나는 오빠가 테고 경한테 했던 말, 꼭 지킬 거라고 믿어. 알았지?”
아이네는 지금쯤 면접을 보느라 바쁠 달리아를 안타까워하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나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일어섰다.
“우린 이만 가요, 테고 경. 달리아 영애가 돌아오기 전에 황녀 궁에도 들러야 하니까요.”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뭐야.”
아까부터 손발이 착착 맞는 둘에게로 나딘이 황당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테고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아이네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며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졌군요.”
“아, 그래요? 아까 오빠 때문에 너무 흥분했더니…….”
아이네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슥슥 빗어 대강 정리했다.
“이제 됐죠?”
“잠시만.”
정작 엉킨 부분은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모습에 테고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제 손을 들어 아이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다 됐습니다.”
마지막에는 앞으로 흘러내린 몇 가닥을 깔끔하게 귀 뒤로 넘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 듬뿍 묻어나오는 손길에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직 한 번도 입을 안 맞췄던 거 같은데…….
“얼씨구?”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있느라 잠시 잊고 있던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팔짱을 낀 채 다가온 나딘이 삐딱한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테고 경이야말로 저와 한 약속을 잊은 거 아닙니까?”
방금은 그저 쿵짝이 잘 맞는 것과는 달랐다.
아이네에게로 스스럼없이 뻗는 손이며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그녀까지.
어느새 서로의 신체 접촉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이번엔 나딘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렇게 등장했을 때와는 반대로 상황 역전의 꿈을 꾸며 잔소리를 퍼부으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그에게로 홱 고개를 돌린 아이네가 현저히 낮아진 목소리로 먼저 쏘아붙였다. 씨근덕거리는 모양새가 잔뜩 약이 오른 듯했다.
“조용히 해. 안 그래도 오빠 때문에 심의 기준을 너무, 지나치게, 잘 지키게 생겼으니까.”
“심의 기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딘의 의문 섞인 눈빛에 테고는 말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여전히 종종 아이네가 내뱉는 엉뚱한 단어 중 하나일 테다.
이제는 그게 그녀가 다른 세계에서 쓰던 말이란 걸 안다. 그걸 모를 때는 베룸의 ‘발현자’라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었지만.
“그쪽이랑 다르게 우린 둘 다 성인이니까 알아서 할 거야! 오빠는 신경 꺼.”
“뭐, 뭘 알아서 해?”
나딘의 목소리가 덩달아 높아졌다. 비록 표면상으로는 아이네를 향한 말이었지만 책망하는 듯한 시선만큼은 테고에게 그대로 가 꽂혔다.
그리고 그걸 본 아이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투덜거렸다.
“어휴, 내가 여태 뭘 걱정한 건지 모르겠네. 부질없다, 부질없어.”
단순한 책빙의자라는 사실을 넘어 자신이 만들어 놓았던 세계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가 가장 걱정한 것 중 하나는 가족에 관한 일이었다.
애초에 베룸 일족 자체가 후반부 라니엘의 위기를 쉽게 해결하기 위해 급조한 설정이었다.
그리고 원래의 아이네이스 공녀가 열한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했다. 그들이 일찍이 가문의 문을 닫고 중앙 정치에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로 쓰기 위해서.
그래서 황도로 돌아오는 길에도 종종 아이네의 마음 한구석에 고민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가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원래의 아이네이스 공녀를 죽게 만든 건 나고, 거기다가 내가 그 아이 몸까지 차지했는데…….’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이 세계에 아이네로 깨어난 후, 가족으로 함께한 시간이 벌써 8년이다. 그녀의 우려와는 다르게 그들은 이미 진짜 가족이었다.
그렇게 기념비적인 400회차 남매 전쟁은 아주 자연스럽게, 평소와 같은 방식으로 발발했다.
그때, 방 안의 소란을 뚫고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흠, 흠! 본녀가 듣기로는 공녀가 입궁을 하였다던데에.”
그리고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위엄을 세우려 노력하는 앳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 황녀님이시다.”
안에서 들려오는 아이네의 목소리를 듣고 신난 티아는 서둘러 문고리를 잡아끌었다.
덜컥, 덜컥.
“으응?”
그러나 아무리 힘을 주어 잡아당겨도 열리질 않았다.
“아.”
뒤늦게 아까 자신이 문을 걸어 잠갔다는 걸 깨달은 테고가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잠금쇠를 풀자마자 열린 문틈으로 쏟아진 티아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앗!”
“조심하십시오.”
테고가 재빨리 손을 뻗어 넘어지려는 티아를 받쳤다. 그러고는 부축할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고 조심스럽게 붙잡았던 손을 떼어냈다.
“어엇, 네에. 고마워요, 리테루온 공작님.”
간신히 균형을 잡은 티아가 고개를 있는 대로 들어 올려 테고에게 감사를 표했다.
자신의 몸을 다 가릴 만큼 커다란 손과 목이 아플 정도의 키를 가진 요정님의 약혼자. 거기에 언뜻 보아도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
‘으음, 그래도 이쪽은 별로.’
이내 시선을 떼어낸 티아가 쪼르르 달려가 아이네의 곁을 차지했다.
“공녀가 베룸 영지에 다녀왔다는 말은 들었어요.”
“네, 확인할 일이 좀 있었거든요.”
그러고는 어딘지 모르게 옷매무새가 약간 흐트러진 요정님의 오라버니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닮은 색채에 역시 잘생겼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안녕하세요, 황녀님.”
“반가워요. 요정님의 오라버……, 아니, 베룸 공자.”
곤란하다는 얼굴로 씩 웃는 모습이 꽤 눈길을 사로잡을 만했다.
‘그치만 이쪽도 별로.’
아이네가 이끄는 대로 소파에 앉으며 티아는 원래 이 사무실의 주인인 영애를 떠올렸다.
“장미 영애와 곧 결혼한다지요? 축하해요.”
장미 영애가 누구를 말하는지 잠시 생각하던 나딘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달리아와는 기한부 계약 약혼인데, 소문이 왜 그렇게……!”
“포기해, 오빠. 오빠가 어떻게 생각하든 폐하의 뜻대로 될 테니까.”
무슨 뜻인지 잘은 몰랐지만 아이네의 말에 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게 아바마마께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만은 사실인걸.
두 남자와 다르게 굳이 목을 아프게 꺾지 않아도 지척에 보이는 아이네를 보며 티아는 연신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계속 황녀 궁에 계셨어요?”
“요 며칠간은 정말 이상했지 뭐예요. 베르너 부인도 그렇고, 다들 궁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말만 하고.”
아직 젖살이 통통한 볼을 가득 부풀리는 황녀의 말에 방 안의 셋은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그럴 만도 하지. 아직 어린 황녀에겐 충격적일 수 있는 숙청의 바람이 황도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으니.
“하지만 본녀도 알 건 다 알아요. 아바마마를 거역하는 나쁜 자들은 이제 전부 사라진 거겠죠?”
티아는 짤막한 손가락으로 찻잔을 든 채 제법 도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은 어느덧 황도의 새로운 예법으로 자리 잡은 아이네의 방식과 완전히 똑같았다.
“종종 달리아 영애가 궁에 들러 본녀의 말벗을 해주었답니다.”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은 티아가 아이네의 손을 먼저 맞잡았다.
“공녀가 베룸으로 돌아갔다는 말에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달리아 영애도 두 번째 친구로 삼긴 했는데…….”
아이네의 눈치를 보는 양 황녀의 말끝이 조금 늘어졌다.
“본녀에겐 요정님, 아니, 공녀가 제일 첫 번째니까.”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아이네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아무리 어른스러운 척을 하고 또래 아이들보다 영특하다고는 해도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첫 번째 친구를 두고 두 번째 친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니.
전형적인 어린애다운 사고방식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앞으로도 황녀님께서 세 번째, 네 번째 친구를 만드시면 제게도 친구가 늘어나는 것이니, 그건 기쁜 일이에요.”
“그, 그런가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티아에게 아이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티아가 여기에 와 있다고 들었는데.”
“아, 황태자 전하.”
이쪽도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등장하며 건네는 말이 똑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모두를 제지하며 아르비드와 케이어드도 한쪽 소파에 앉았다.
“다녀온 일이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군요, 공녀.”
“아, 네에.”
티아가 동석하는 바람에 두루뭉술하게 말을 건넨 아르비드의 시선이 아이네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테고의 표정이 다소 굳었다.
황태자의 눈빛 안에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한 미련이 조금쯤 엿보여서.
아이네의 빈 찻잔에 손수 차를 따라주며 테고는 조금 더 친밀해진 둘 사이를 과시하듯 입을 열었다.
“아이네의 곁에는 제가 있으니 당연한 결과이지요.”
“…….”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 아르비드의 얼굴이 일순 울적해졌다. 역시 이제 제게는 기회가 없는 거겠지.
겨우 여덟 살짜리 황녀를 앞에 두고서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케이어드가 쯧쯧 혀를 찼다.
“아주 잘들 노는군그래.”
그런 그에게 아이네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참, 그러고 보니 찾으러 가셨던 베르길리우스 소남작은 어떻게 됐나요?”
“놓쳤어. 이미 진작에 국경을 넘어 자취를 감추었더군. 흔적을 지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한껏 미간을 찌푸린 케이어드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목을 축였다.
이야기가 좀 틀어지긴 했지만 원래는 남자 주인공이었을 케이어드가 임무에 실패하다니…….
소남작이 예상외로 만만치 않은 자라고 생각하던 아이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이 실종된 소남작이란 남자가 다음 연작에 등장할 악역인가?’
그렇다면 지금이 그때를 위한 복선이 깔리는 순간인 셈이구나!
아이네의 얼굴에 다양하게 스쳐지나가는 표정의 향연에 테고가 불안한 눈빛을 했다.
또, 또 무슨 생각을 혼자서 그렇게 하기에.
그때, 오른쪽 자리에 앉은 케이어드에게 티아가 관심을 보였다.
“이 머리 색은 린데카이르 대공가문의 직계만 물려받을 수 있는 색인가요?”
황녀는 어린아이다운 충동으로 홀린 듯이 케이어드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그에 아르비드가 기겁하며 티아의 작은 손을 움켜쥐었다.
“안 된다, 티아. 이자와 너는 열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
아르비드의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챈 케이어드가 불쾌함을 표하기도 전에, 티아가 먼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셔요! 저는 이렇게 나이 많은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단 말이어요.”
졸지에 나이 많은 남자가 된 케이어드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소설 속 공식 지옥의 주둥아리로서 늘 독설만 내뱉다가 역으로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리고 허리춤에 조그마한 두 손을 올린 티아가 강하게 항변했다.
“제 취향은 연하남이란 말이어요!”
방 안에 모인 모두는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황망한 표정만 지었다.
‘여덟 살에게 연하라면…….’
‘걸음마는 제대로 하려나?’
‘말은 할 수 있나?’
일찍이 티아에게 닮고 싶은 사람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 아이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됐지만 황녀님이 세피아 황후처럼 열두 살 연하를 원하는 거라면 그 연하남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답니다.’
그러고는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에 다시금 티아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니, 이것도 설마, 아니겠지?
이십여 년 뒤에 이어질 진짜 원작인 연작에서는 베룸 가문의 발현자인 ‘레이’가 남자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 레이의 친구로 등장하는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이야, 지금의 취향이 그렇게나 오래 일관되게 이어진다고?
아이네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어떻게든 세계를 멈추지 않게 하기 위한 일에만 몰두하느라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뭐야. 이 다음 연작이라는 거, 궁금하잖아?’
이번에야말로 가까이에서 그 이야기를 지켜보고 싶었다.
그때, 조금은 지친 기색의 달리아가 문을 열고 등장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없던 제 사무실에 지나치게 많이 들어찬 인원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어떻게 다들…….”
그도 그럴 게 달리아 없는 달리아의 사무실에 그녀만 빼놓고 모두가 모여 있었던 셈이니까.
“달리아!”
“나딘 님.”
그리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환하게 밝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아이네는 질렸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보고 싶지 않은 게 혈육의 연애 장면이라더니, 그 말은 진리가 틀림없다.
비록 나딘 쪽은 아직 자각이 부족한 것 같긴 하지만.
“아니라면서, 도대체 뭐가 아니라는 거야.”
그리고 둘 사이의 핑크빛 기류를 눈치챈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역시 본녀의 추측대로군요.”
한참 어린 티아까지 알 정도이니 이만하면 황궁 안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 * *
유난히 이런저런 사건이 많았던 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다가왔다.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에 모인 귀족들 사이로 잔뜩 들뜬 공기가 느껴졌다.
“베룸 공작 부부가 이렇게 공식 석상에 나타난 게 도대체 몇 년 만이래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 결혼식을 계기로 중앙 정치에 자주 모습을 비쳐주시면 좋을 텐데.”
하객들을 맞느라 분주한 베룸 공작 부부를 다들 모른 척 힐끔거렸다.
현 황제의 반정 이후, 20년이 넘도록 베룸 영지에만 머무르던 그들이었으니까.
“오빠, 왜 이렇게 긴장했어. 얼굴 좀 펴.”
“내, 내, 내가 무슨.”
깔끔하게 넘겨 고정한 머리와 오늘의 신랑임을 나타내는 연미복. 누가 보아도 결혼식의 주인공인 나딘의 입에 아이네가 재빠르게 오징어 캔디를 넣어주었다.
“이럴 줄 알고 챙겨 왔지.”
“아, 좀 낫네. 달리아는 괜찮으려나?”
아니라고 박박 우길 땐 언제고.
황제 폐하와 달리아가 합심하여 밀어붙인 결혼에 나딘은 결국 휩쓸리듯 끌려가고 말았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혼인이 앞당겨질 줄은 몰랐던 듯했지만.
“달리아 영애는 걱정 안 해도 돼. 오빠가 제일 문제야.”
“너……. 네 결혼식 때는 어쩌나 두고 보자.”
입 안에서 우물우물 오징어 캔디를 굴리는 나딘을 아이네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난 적어도 오빠처럼 말은 안 더듬어.”
“그런데, 아이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빠른 거 같지 않니? 도대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거야.”
그러게 처음부터 계약 약혼에 동의하질 말았어야지. 너는 황제의 미끼를 확 물어분 것이여.
아이네는 굳이 대답해주지 않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식이 시작되자 자리로 향하는 그녀의 손을 누군가가 다정하게 맞잡았다.
“아무리 바쁜 날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 언제 왔어요?”
자연스럽게 깍지를 껴오는 테고의 목소리에 아이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습니다.”
언제 왔냐는 말에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능청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아이네는 잠시 눈을 흘겼다.
“그럼 이쪽으로 와 있지 그랬어요.”
“……공작 각하께서 아직까지도 너무 노려보셔서 말입니다.”
테고의 대답을 들은 아이네는 끙, 하는 소리를 흘렸다. 아버지도 참.
고위 귀족인 나딘과 달리아의 결혼식이 열릴 이곳에는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꽤 흉흉했던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어 보였다.
혈육인 같은 황족의 피로 물들었던 반정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남부 귀족파의 숙청이 트라우마로 다가왔을 법했다.
그러나 뒤숭숭했던 여론은 얼마 가지 못했다.
오히려 남부 영지민들이 귀족파의 처치를 쌍수 들고 반겼다. 뒷주머니를 챙기느라 고혈을 빨아먹던 영주들이 사라진 셈이었으니까.
“오!”
“어머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탄성 소리에 아이네와 테고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엔 나딘의 목 뒤로 팔을 두른 채 저돌적으로 입을 맞추는 새신부 달리아가 있었다.
“으응, 이런 식일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
아마 국외 추방으로 끝이 났던 라니엘의 소설에서도 비슷한 전개이지 않았을까.
상처에 떨고 있는 달리아에게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가 나딘이 그대로 잡아먹히는 전개 말이다.
얼떨떨한 얼굴을 한 아이네의 귓가로 테고가 낮게 속삭였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역시 약혼식을 생략한 게 너무 아쉽군요.”
“윽.”
아이네는 테고가 과거 이야기를 꺼내면 늘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그녀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테고는 말을 이었다.
“조만간 리테루온 성으로 놀러 오지 않겠습니까?”
“어어, 네?”
유교걸이 아니라 유교보이의 몸가짐을 고수하던 테고의 놀라운 진전이었다. 몇 달 전, 그의 침실 운운 발언을 떠올린 아이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걸 읽어낸 테고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아, 네에.”
노골적으로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며 아이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아직 4년 정도는 남은 셈이니까 테고가 원하는 대로 천천히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아이네는 부러 새침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제 침실은 본관에 마련해줄 거죠?”
“원한다면…….”
마치 제 눈에는 그녀만 보인다는 듯 테고의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