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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pilogue (26/29)

25. Epilogue

저에겐 늘 꿈이 있었지요.

오징어 캔디라는 천상의 맛을 영접한 다섯 살 이후로 제 꿈은 베룸 영지에 가보는 것이었어요.

이름하야, 성지순례!

저는 지금 순례자의 마음으로 베룸 영지에 막 도착했답니다.

“아하, 여기가 베룸 영지란 말이지? 폐쇄적인 곳이라고 하길래 시골인 줄 알았더니, 황도랑 비교해도 뒤지진 않겠는데?”

티아 고모님은 늘 말씀하셨어요.

누군가 오징어의 참맛을 논하거든 고개를 들어 베룸 공국을 보라.

그래서 왔습니다, 베룸 영지에.

허락받고 왔냐고 묻지는 말아주세요. 이래 봬도 성년은 넘었으니까요. 어디든 갈 수 있죠!

“딸기 오징어 바나나 주스? 본점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제 오징어 시럽이라……. 메모메모.”

에리스는 본점 이름이라는 ‘트로이의 망아지’까지 꼼꼼하게 받아 적었다.

그런 그녀의 중지에 끼워진 반지 아티팩트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을 냈다.

“엄마, 오징어 솜사탕 사주세요! 네?”

“안 돼! 저번 주에도 먹었잖니.”

시장 한가운데서 떼를 쓰는 아이와 엄마의 대화에 에리스의 귀가 쫑긋해졌다. 그러고는 결국 우아앙 울음을 터뜨린 아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오징어 솜사탕은 또 뭐지?”

충분히 사전답사를 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도 막상 현지에 와보니 이렇게 새로운 가르침이 넘쳐났다.

‘좋아, 내가 여기서 안 먹어본 메뉴 없게 다 도장 깨고 간다!’

결연한 표정을 한 에리스는 다시 한번 의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은 꽤나 출중한 외모의 금발 머리 미소년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었다.

그렇게 정신을 놓고 시장을 구경하던 에리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꺅!”

“……꺅?”

뒤로 밀려 넘어지지 않도록 어깨를 잡아주는 억센 손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뒤이어 들린 의문이 가득한 반응에 그녀는 뒤늦게 낮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아, 아니. 으앗!”

“…….”

누가 들어도 어색하기 그지없는 가짜 비명이었다.

그걸 들은 싱그러운 풀빛 머리의 훌쩍 키가 큰 청년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제 가슴팍쯤 올까 말까 한 작은 키의 금발 소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툭, 말을 내뱉었다.

“억양을 들어보니 이방인이군. 제국에서 왔나? 여기까지 여자 혼자서?”

“여, 여자라니요! 이래 봬도 성년은 넘긴 남자거든요!”

에리스는 그 말에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말을 걸었던 청년이 한쪽 눈썹을 조금 더 추켜올렸다.

그때, 까만 머리카락에 진녹색 눈동자를 지닌 또 다른 청년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제 친우의 어깨 위로 팔을 올렸다.

“하, 레이. 그렇게 먼저 가버리면 어떡하냐. 난 또 혼잣말이나 하는 이상한 사람이 됐잖……. 누구야, 아는 사람?”

“놔, 너는 이제 그만 너희 영지로 좀 가라. 언제까지 눌러앉아 있을 셈이야.”

레이라고 불린 올리브색 머리 청년의 핀잔에 검은 머리 청년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는 너야말로 이 시기엔 리테루온 영지에 있어야 할 놈이……. 아버지께 들키면 또 혼나는 거 아냐?”

“걱정 마라, 진. 이번엔 어머니도 같이 오셨으니까.”

레이는 제 어깨에 걸쳐진 진의 팔을 귀찮다는 듯 밀어 떨어뜨렸다.

공작부인께서 친정 나들이를 오신 거라면, 뭐. 소문난 애처가이신 리테루온 공작께서도 곧 이리로 오시겠군.

쳇, 하는 소리와 함께 진의 관심이 자그마한 금발 소년에게로 옮겨갔다. 좀 곱상하게 생기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웬일로 네가 관심을 보인다 했더니……. 남자잖아?”

“……네 눈엔 이게 남자로 보여?”

“그러면? 이봐, 친구. 키가 좀 작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가 되진 않아.”

“누가 네 친구야.”

에리스는 연신 마른침만 삼켜댔다. 감히 제게 ‘이게’라는 무례한 언사를 퍼붓는데도 반박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손가락에 레이의 시선이 길게 가 닿았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말해왔던 중요한 때. 그 순간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바로 지금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레이, 관심 없다고 그냥 쌩하니 지나치지 말고 주위를 적당히 살피는 것도 필요해. 알겠니? 특히, 금발! 금발을 기억해.”

“아브브?”

“아이네, 이제 겨우 걸음마하는 아이에게 말을 한다고 알아듣겠습니까.”

“그치만 누가 봐도 테고랑 성격이 똑 닮게 자랄 거 같다고요.”

레이는 잠시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내었다.

무난한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는 반지. 말로만 들었던 황실의 아티팩트가 틀림없다.

금발에, 에스피오 가문의 아티팩트라…….

‘황녀로군. 그것도 후계자.’

아티팩트를 바라보는 레이의 눈이 총천연색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긴장한 낯으로 그를 응시하던 에리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 어어…….”

* * *

레이와 에리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던 그 시각.

온실 안에서 티타임을 즐기던 아이네는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려다 멈칫했다. 그러고는 이내 깨달았다.

아, 지금이 바로 염원해왔던 바로 그때로구나.

“내 아들이지만 테고를 닮아서 한 무뚝뚝 할 텐데. 어휴, 당분간 황녀만 불쌍하게 됐네.”

그때, 익숙한 걸음으로 온실 안에 들어온 키 큰 남자가 아이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정말로 날 닮았다면 평생 한 여자에게만 모든 걸 바칠 테니, 그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아내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테고가 씩 웃었다. 그러자 아이네가 슬며시 볼을 붉혔다.

“흠, 흠! 엘라는요?”

“그 아이는 당신을 똑 닮아 레이를 곯려줄 궁리를 하고 있더군요.”

딸인 엘라에게 아티팩트를 물려주어 이제는 허전해진 그의 왼쪽 귓불로 아이네의 손이 향했다.

“약간 아쉬우면서도 섭섭해요.”

“뭐가?”

“그냥, 이제 우리 이야기는 끝난 거 같잖아요.”

테고는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작은 손 위를 제 손으로 덮었다. 그러고는 이곳이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곳에 위치한 온실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냈다.

“글쎄? 난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꺅! 자, 잠깐만요. 여기는 밖이잖아요.”

너무나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려 바로 옆 카우치에 눕히는 테고의 행동에 아이네가 눈을 흘겼다.

“꼭 온실만 오면 여기에 눕힌다니까.”

“당신도 그때 관찰당하던 내 심정이 어땠는지 한번 느껴봤으면 해서.”

테고가 아이네의 손을 끌어 제 가슴에 가져다 댔다. 이제는 한참이나 지난 예전의 여느 때와 똑같았다. 여전히 심장 뛰는 소리가 요란했다.

연인에서 부부가 되고,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둘이나 보았는데도 변한 게 없었다. 아니, 서로의 마음은 더 깊어진 모양새였다.

그렇게 테고가 고개를 숙여 아이네의 입술을 삼키려던 참이었다.

[크흠! 흠흠!]

주위를 돌리려 일부러 목을 가다듬는 다른 이의 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

“윽, 아이네…….”

아이네는 깜짝 놀라 테고의 가슴을 퍽, 소리가 나도록 세게 밀었다. 불시의 일격을 당한 테고가 비틀거리는 사이, 온실 안을 떠돌던 빛 무리가 천천히 하나의 구체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형상으로 변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상대를 경계하느라 검을 뽑아 든 테고를 아이네가 만류했다.

“누구냐.”

“테고! 자, 잠깐만요.”

그녀는 베룸 일족의 머리 색과 같은 올리브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거 같아서 왔는데,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던 것 같군요.]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아이네는 전달되는 음성만으로도 그녀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챘다.

“시그노……. 맞죠?”

[그래요, 오랜만이네요.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경계의 숲 안에서만 잠들어 있었는데 통 만나러 오질 않더군요.]

아이네가 머쓱한 얼굴로 말을 아꼈다. 모든 일이 다 해결되고 나서는 테고와 연애하는 기분에 푹 빠져있느라, 그리고 결혼해서는…….

으응,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뭐, 굳이 물어볼 게 더 남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사히 이야기가 시작됐더군요. 역시 당신을 ‘변수’로 선택한 건 옳은 결정이었어요.]

“그럼 이제는 어떻게 되나요? 베르길리우스 저택 지하의 기록엔 이 다음은 안 쓰여 있던데.”

아이네의 질문에 시그노가 볼이 패도록 활짝 웃었다.

[시작만 제대로 열어두었으니 이젠 나도 모르죠! 내 역할은 여기까지니까요.]

“…….”

아이네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는데……. 참으로 대책 없는 드래곤이 아닐 수 없다.

[그때 경계 너머의 오두막 기억하죠? 거기 내 레어에 있는 물건들 전부 당신에게 줄게요. 다마스커스 검들도 있고, 마정석이랑 마도구도 많아요!]

“네? 어딘가로 가는 거예요?”

시그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이제 내게 걸려있던 모든 금제에서 해방됐으니 나머지 셋을 찾아봐야죠.]

‘경계’를 넘어볼 생각이라는 말에 아이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이제는 이별이라는 소리였다.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여전히 기억나진 않아요. 그래도 나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내가 원망스럽지 않았어요?”

[글쎄요, 그런 적이 있긴 했던 것도 같고. 하지만…….]

아이네를 바라보는 시그노의 눈에는 자신의 창조자를 향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이 만들어준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던 거니까.]

“…….”

아이네가 잠시 말을 잃은 사이, 시그노는 주먹을 말아 쥔 채 제 손바닥을 쳤다.

[아, 그리고 이제 내가 사라지면 오징어 어획량이 들쑥날쑥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내가 소환될 때마다 오징어가 그렇게 많이 사라졌는데, 눈치 못 챘어요?]

그러니까. 먹었단 소리다. 이건 앞구르기 하면서 들어도, 뒤구르기 하면서 들어도 먹었단 소리야.

설마, 설마 하는 표정으로 시그노를 보는 아이네의 눈빛이 조금씩 싸늘하게 식었다.

“베룸 영지에 자리를 잡은 게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곳이라서 그런 건 아니겠죠?”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네요! 잘 지내요!]

급하게 얼버무린 시그노의 몸이 등장했을 때처럼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잠깐만, 대답하고 가! 야!”

혼신의 힘을 다한 내적 주먹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그노는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아이네는 테고의 품에 기대어 조용히 분을 삭였다. 그녀의 어깨를 말없이 도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누가, 누가 보고 있다면 저 대신 말 좀 해주시겠어요? 이 소설, 정말 이런 식으로 끝나도 되는 거냐고요!

-남장여주라고 했잖아요!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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