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외전1-생일선물(1)
“와, 진짜 계속 산이랑 숲만 있네.”
마차 창문 밖으로 밝은 올리브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휘날렸다.
이제 막 겨울 초입에 들어선 탓에 새어나오는 입김도 뿌옇게 뒤섞였다.
“아가씨, 그렇게 고개를 많이 내미시면 위험합니다.”
아이네의 목소리에 근접 호위를 맡은 아론이 마차 옆으로 바짝 붙어 말을 몰았다. 그러고는 칼릭을 향해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흠흠, 공녀님. 성 가까이로 갈수록 점점 공기가 차가워질 텐데 감기라도 걸리시면 저희는 ‘더글라스’ 꼴이 됩니다.”
칼릭의 입에서 나온 ‘더글라스’ 꼴이라는 말에 제2기사단 출신 기사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반면, 아론을 비롯한 베룸 공작가의 기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마침 마차 안으로 슬그머니 얼굴을 넣으려던 아이네에게도 그 모습이 눈에 띄었다.
“더글라스 꼴이요? 저번에도 언뜻 들은 적 있는 거 같은데 그게 도대체 뭐예요?”
더글라스 경이라면 지난번에 테고와 대련을 했던 그 기사를 말하는 거지?
다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아이네가 갸우뚱했다.
“하, 하핫. 참, 더글라스 경은 이번 수행에 따라오지 않았죠? 제가 착각했지 뭡니까.”
그게 더글라스 꼴이라는 뜻이랑 무슨 상관이야?
아이네의 입이 다시 열리려는 차에 칼릭이 먼저 손가락으로 저 멀리 보이는 첨탑을 가리켰다.
“아! 이제 드디어 성이 보이네요.”
그 말에 아이네의 시선이 칼릭의 손가락을 따라 저 멀리 보이는 광경으로 옮겨갔다.
“와아…….”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언덕을 넘어 가까워질수록 공작성은 물론이고 그 아래 마을의 모습이 천천히 펼쳐졌다.
‘곧 만날 수 있어.’
장거리 마차 여행으로 조금씩 지쳐가던 참이었다.
성이 눈앞에 보이자 그 피로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슴이 도곤도곤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네의 관심이 성공적으로 옮겨간 걸 확인한 칼릭은 손으로 제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어후, 이놈의 입방정.’
더글라스가 누구인가. 여기 있는 공녀님과 단장님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죄를 짓고 주기적으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자였다.
남들이 보기엔 하늘 같은 단장인 테고의 주기적인 대련 상대라니 특혜가 아닌가 싶겠지만.
칼릭을 비롯한 제2기사단 차출 기사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저마다 아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군가는 단장님의 상대를 맡아야 하니까. 앞으로도 힘내라, 더글라스!’
타고난 맷집의 소유자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저주처럼 느껴질지도.
“자, 공녀님. 이제 외성으로 진입합니다. 안전을 위해 도착할 때까지 창문을 가릴 테니 조금만 더 참으시면 됩니다.”
마차 가까이 붙은 칼릭이 창문을 닫으며 새카만 차단막을 덧씌웠다.
지금쯤 앞마당을 초조하게 서성이며 기다리고 계시겠지.
* * *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아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막 손잡이를 잡으려고 일어섰던 아이네는 깜짝 놀랐다.
다행히 문은 활짝 열린 게 아니라 조그만 틈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불쑥 내밀어진 손이 보였다.
그녀가 익히 잘 아는 바로 그 손이었다.
여자만큼 하얗지만 누가 봐도 남자인 티가 나는 커다란 손. 저 단단한 손과 마주 잡았을 때 얼마나 따뜻한지 잘 알았다.
그리고 서로의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낄 때면…….
“아이네.”
나직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아이네의 상념이 뚝 끊겼다. 음성에 실린 미약한 조급함을 알아채서일까.
그녀는 뻗어진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며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뛰듯이 손의 주인에게 안겼다.
“……아이네.”
이런 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이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그녀를 훌륭하게 받쳐 안은 남자의 입에서 다시 한숨 섞인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질책하려던 그의 말문은 또다시 막히고 말았다. 연한 새싹 같은 정수리가 들리고 곧이어 나타난 반짝거리는 눈동자 때문에.
“보고 싶었어요, 테고.”
“…….”
이런 그녀에게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이번에도 허탈한 미소만 지은 테고가 아이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앗, 헤헤.”
그렇게 아이네가 테고의 목 뒤로 팔을 뻗어 넓고 탄탄한 가슴에 머리를 기댄 순간.
“크흠, 흠!”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
“……다들 먼 길 오느라 수고했군.”
이 자리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단 사실을 깜박했다.
아이네의 리테루온 영지행에 따라나선 베룸 공작가 기사들과 제2기사단 몇 명.
거기에 그녀를 마중하러 나온 리테루온 성의 사용인들까지.
‘어떡해.’
아이네는 테고의 품에 묻은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옷깃을 꼬옥 붙잡은 채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등 위를 커다란 손이 토닥였다.
“피곤할 테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도록.”
그렇게 아이네를 안은 테고는 빠른 걸음으로 본관으로 향했다. 방금까지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애정행각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이 침착한 목소리였다.
순식간에 로비를 지나 중앙의 계단을 오르며 테고가 그녀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심지어 어느 단어를 말할 때는 좀 뿌듯해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약혼’ 관계인 건 다들 알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윽,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제야 아이네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테고의 어깨 너머로 뒤따라오는 집사와 눈이 마주쳤다.
저 사람은 황도 저택에 있던 그 공포의 외알 안경 집사 아냐?
심지어 그는 아이네를 향해 빙긋 웃어주기까지 했다.
“허엉…….”
“아이네? 어디가 아픕니까?”
결국 그녀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다시 테고의 품에 얼굴을 박았다. 거기에 아이네가 왜 고개를 들지 못하는지 모르고 엉뚱한 소리나 하는 테고까지.
그 모습에 집사가 헛기침까지 하며 웃음을 참았다는 건 아무도 몰랐다.
‘책빙의도 해봤으니까 이제 회귀, 제발 회귀 좀 시켜줘.’
많이는 안 바란다. 딱 10분 전으로만 돌려주면 되니까.
계단을 오르는 와중에도 흔들림 없는 테고의 가슴팍에 기댄 채, 아이네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리테루온 공작성의 모두와는 첫 만남이라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심지어 우아하게 마차에서 내려 어떻게 인사를 할지 연습까지 했는데!
아, 망했어요.
* * *
저녁 만찬을 준비하는 리테루온 공작성 사용인들의 얼굴엔 기쁜 기색이 한가득이었다.
“얘, 아까 봤니? 우리 공녀님 말야.”
“아니지, 한나! 공녀님이라니. 곧 마님이라고 불러야 될걸?”
“어머, 그렇네. 세상에나.”
한나와 제리는 아이네의 옷가지를 옮기다 말고 각자 가슴 위로 손을 모아 올렸다. 그리고 그녀들은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소문보다 더 귀여우셔!’
감히 지체 높으신 공녀님의 외모에 대해 어떻다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귀여움에 작위가 어디 있고, 신분고하가 어디 따로 있담.
다들 무어라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있어도 표정만 보면 알 수 있었다.
차기 공작부인에 대한 기대감과 호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그도 그럴 게 성의 주인이자 유일한 직계인 테고는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다. 최근에는 몇 년간 황명을 따르느라 성에 거의 머무르지도 않았고.
그런 주인님이 황도에서 약혼을 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진 게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어떤 가문의 어떤 분이시래?”
“베룸 공작가의 공녀님이시라던데?”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베룸? 누구 그 영지에 대해 아는 사람 있어?”
“거기 출신 영지민들은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그래도 공녀님이라니, 정말 어마어마하게 높으신 분이구나.”
베일에 싸여 있다는 베룸 공작가의 공녀님이라기에 다들 잔뜩 긴장했다. 그래도 여태 조용하고 적막하기만 했던 공작성의 첫 변화니까.
그러나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황도에서 먼저 돌아와 오랜만에 뵙는 주인님은 변한 면이 없으셨다.
“한 달 뒤에 아이네, 아니, 베룸 공녀가 방문할 테니 머물 방을 준비하도록 해.”
반란군 진압작전을 떠날 때보다 키도 더 크고 이제는 소년티를 거의 벗은 모습이시긴 했다.
하지만 그 특유의 무표정이나 과묵함만은 여전하셔서 공녀와 사랑에 빠지셨다는 소문은 과장인 줄 알았다.
그랬는데…….
들뜬 기색의 사용인들을 단속하던 외알 안경 집사의 입매가 잠시 느슨하게 풀렸다.
황도의 저택에 공녀가 찾아왔을 때는 두 분 다 경황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라 잘 몰랐다.
“공녀님께서 탄 마차가 외성 입구를 통과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소식을 전하며 알았다. 새벽부터 집무실에 앉아 있었는데도 주인님의 서류는 겨우 두 장밖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나마도 집중을 못 했는지 읽었던 부분을 다시 또 읽고 또 읽느라 서류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럼 슬슬 나가봐야겠군.”
탕-
테고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이날을 위해 새로 맞춘 실크 셔츠에 최상급 가죽으로 만든 조끼.
주름이나 흠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거울 앞에서 몇 번을 점검하던 테고의 모습을 보고서는 확신했다.
제 생각보다 공녀님, 아니지, 곧 공작부인이 되실 예비 마님에게 더 빠져 계시다는 걸.
“어서 나가지.”
긴장한 티를 숨기지 못한 스물두 살의 테고를 보니 전대 공작 각하가 떠올랐다.
그리고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었다는 소식에 빗속에서 가만히 주먹만 움켜쥐고 있던 열네 살 소년도 떠올랐다.
‘저도 한때는 많이 걱정했는데 말입니다.’
이제 중년에 접어든 집사는 뒤를 따르며 머릿속으로 마지막 점검을 마쳤다.
애초에 지시사항은 단 하나였다. 약혼자인 공녀의 방을 본관에 마련하라는 것.
하지만 집사 헤일러와 공작성의 모두는 지난 한 달간 성 내부를 거의 바꾸다시피 했다.
로비를 나와 본관 앞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테고의 머리카락 위로 늦은 오후의 태양이 부서졌다.
분명 지금은 겨울로 접어들기 시작한 시기다. 거기다 리테루온 영지는 다른 곳보다 더 이르게 겨울이 찾아오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집사는 계절을 착각할 것만 같았다.
“아이네.”
마차 문이 열리고 일전에 본 적 있는 공녀님이 테고에게 와락 안겨 들었다.
그렇게 그녀를 받아 든 작은 주인님의 얼굴은…….
희미하지만 웃고 계셨다.
아무리 밤낮으로 관리를 한다고 해도 주인이 없는 성은 음울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다. 몇 년이나 지속됐던 그 부재의 흔적이 단 한 달 만에 사라질 리도 없고.
그런데 지금 저 자그마한 공녀님이 오신 지 몇 분이 되었지? 아니, 단 몇 초도 되지 않을 시간이었다.
아이네에게는 일명 ‘공포의 외알 안경 집사’로 불리는 헤일러의 안경이 반짝 빛났다.
‘각하, 마님. 봄을 닮으신 분이더군요.’
지금쯤 제게 배정된 방 침대의 베개를 쥐어뜯고 있을 아이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어떠세요? 은은한 향기가 훨씬 나으시죠?”
“으응.”
떠밀리듯 목욕시중을 받는 아이네의 얼굴에는 떨떠름한 표정이 떠올랐다.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서 낯익은 사라가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내일은 입욕제를 이걸로 바꿔보시겠어요? 저희가 미리 향유랑 조합을 맞춰보았는데 말이에요…….”
“제리, 말이 많구나.”
하녀장의 말에 조잘거리던 하녀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무언가 더 말을 하고 싶은 듯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이번엔 아이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누가 묵언수행이라도 시켰어?”
“그건…… 아니지만.”
공녀님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서슬 퍼런 하녀장의 눈빛에 제리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것도 잠시, 목욕을 마친 아이네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말려주던 제리의 눈이 다시 반짝거렸다.
마침 하녀장이 공녀님의 옷과 장신구를 고르러 자리를 비운 참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거울로 고스란히 지켜본 아이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상하네.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익숙하게 느껴지지?’
처음에는 사라처럼 호들갑스러운 아가씨 바라기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좀 더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리, 라고 했나.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보다 못한 아이네가 먼저 말을 걸어주자 제리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아, 아가씨. 아니, 공녀님. 제 꿈이 아가씨를 가까이서 모셔보는 거였거든요. 너무…… 너무 좋아서.”
참았던 말을 와다다 쏟아내는 제리에게 또다시 서릿발 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제리!”
“어, 엄마.”
둘이 모녀지간이었어?
금방 돌아온 하녀장과의 관계를 알게 된 아이네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원작에서 라니엘을 시중들던 하녀였구나.’
여주의 하녀라면 비중이 작지 않다. 그래서 익숙했던 거다.
하지만 이번엔 애초에 아가씨인 ‘라니엘’이 없었으니 등장조차 하지 못했던 거겠지.
아이네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모습을 본 하녀장 로라는 새하얗게 질려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제 딸이라서 모시게 한 건 절대 아닙니다. 높으신 분 시중 교육을 제대로 받은 아이는 이 녀석뿐이라서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딴생각을 하느라 멍하니 듣고만 있던 아이네가 뒤늦게 손사래를 쳤다. 로라는 정말로 화가 난 듯 보였다.
그건 버릇없는 딸을 보는 어머니로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휘하의 사용인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에 더 가까웠다.
“바로 다른 아이로 바꾸겠습니다.”
“아니야! 난 제리가 좋아.”
“네, 그럼 바로……. 어, 네?”
아이네의 말에 로라는 물론이고, 벌게진 얼굴로 숙이고 있던 제리마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정말이신가요. 아가씨? 아니, 공녀님?”
“제리! 또 공녀님께 아가씨라고!”
또 로라가 애꿎은 제리를 혼내기 전에 아이네가 확실히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잠깐만.”
로라가 입을 다물자 아이네의 시선은 어느새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제리에게로 향했다.
아마 원래대로라면 저 눈빛은 라니엘에게로 갔을 테다. 왜 제리가 ‘아가씨’라는 단어에 유난히 집착하는지도 아이네는 알 것 같았다.
‘그게 제리의 역할이었을 테니까.’
남장까지 해야 하는 라니엘이 안타까워 늘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제리였다.
“제리, 원래는 가문에 속한 영애에게만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허락되는 거 알고 있지?”
“네에…….”
제리의 어깨가 단박에 움츠러들었다.
알다마다. 이런 호칭 문제는 귀족가의 사용인이라면 가장 먼저 숙지하도록 교육받았다.
제리도 예외는 아니었고.
‘하지만……. 하지만!’
그녀에게 아가씨라고 불릴 만한 분은 어린 시절 공작성을 떠나 일족의 땅으로 가셨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셨다.
그래도 누군가는 귀족 가문의 영애를 모실 줄 알아야 한다며 어머니인 로라에게 열심히 배웠다.
‘와, 와아…….’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앞에 늘 이상적으로 그리던 아가씨가 나타났다. 난생처음 보는 주인님의 미소는 안중에도 없었다.
제리가 참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원래대로라면 안 되는 거지만. 으음…….”
아이네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로라의 표정을 살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제리는 원래의 역할에 충실한 것뿐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허락해줘도 되겠지?
“우리끼리 있을 땐 내게 아가씨라고 불러도 좋아.”
“우와! 감사해요, 아가씨!”
코끝까지 찡긋거리며 감격하는 제리의 모습에 아이네가 피식 웃었다.
곁에서 긴장한 낯으로 바라보던 로라마저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띠었다.
“어휴, 이렇게 어리광을 다 받아주시면 버릇이 나빠져요. 아가씨.”
으응? 지금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아가씨라고 부른 게 로라인가.
방금까지의 엄격한 하녀장 껍질을 벗고, 어느새 애정이 담긴 시선을 숨기지 않는 그녀였다.
“우리 아가씨는 머릿결이 워낙 좋으셔서 빗질도 필요 없을 거 같아요!”
“제리, 우리 아가씨께서 입으실 드레스를 들고 오렴.”
이제는 거리낌 없이 아가씨라 부르며 그들 모녀는 아이네의 머리를 마저 말렸다.
아니, 언제 봤다고 ‘우리 아가씨’야.
곧이어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옷을 가져온 제리가 몸을 배배 꼬았다.
“정말 너무, 너무 감사해요. 아가씨! 곧 ‘마님’이 되시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제리, 아가씨께서 마님이 되시면 그땐 정말 호칭을 똑바로 해야 한다?”
로라의 단호한 말에 제리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저는 ‘마님’이라고 부를 날이 더 기대돼요!”
“그렇지?”
마, 마님? 아가씨보다도 진심은 그쪽이었어?
“…….”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네의 얼굴이 어느새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 * *
저녁 식사를 위해 가벼운 단장을 마친 아이네는 집사의 안내를 받았다.
“어? 리테루온 성은 다이닝 홀이 중앙 로비 근처에 있지 않나요?”
귀족 가문의 저택이나 성은 대체로 구조가 비슷했다. 그런데 집사는 중앙현관으로 통하는 로비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네의 물음에 외알 안경 집사 헤일러의 손이 문고리를 잡았다가 미끄러졌다.
“아……. 제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그게 말입니다.”
그때 문고리가 안쪽에서부터 달칵 돌아가며 문이 활짝 열렸다.
테고였다. 커다란 손이 아이네 앞으로 내밀어졌다.
“이 다음은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요. 아이네, 이리로.”
“곧 식사를 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테고의 손을 잡고 들어간 곳은.
“우와…….”
제국 최북단에 위치한 공작령답게 아늑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따뜻해 보이는 태피스트리며 보드라운 질감의 소파, 뒤에 위치한 테이블까지.
그다지 크지 않은 내부였으나 포근해 보였다.
확실히 베룸 공작령과는 다른 장식이라 아이네의 눈이 분주하게 주위를 훑었다.
“여기서 식사하는 거예요?”
하지만 테고는 어쩐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음, 아이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네?”
아이네가 자리에 앉게끔 도운 테고가 맞은편에 마련된 제 자리에 착석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테이블이 좀 작네.’
그제야 방 안의 분위기와 겨우 두세 사람만이 식사할 정도의 식탁 크기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여기…….”
안절부절못하던 테고의 고개가 결국 아래로 떨어졌다.
“가족 식당이에요?”
“…….”
그러고 보니 유난히 큰 소파 위에 여러 겹으로 쌓인 담요라거나…….
태피스트리와 커튼도 어쩐지 붉고 화려한 느낌이다.
아니, 이 정도면 가족 식당이라기보다 어디로 보나 신혼부부를 위한 식당 아냐?
특히 소파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눈치채지 못하는 게 어려울 지경이었다.
아이네가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지자 테고의 뒷목이 붉게 달아올랐다.
“맹세코 몰랐습니다. 그동안은 집무실에서 혼자 식사를 해서…….”
그러니까 약혼자인 아이네를 위한 준비를 하라고 했더니, 새 안주인을 맞으라는 말로 들렸다는 거다. 리테루온 공작성의 모든 이들에게는.
“그럼 원래의 손님용 식당은요?”
“거긴 준비가 미처 덜 끝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오늘만…….”
테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네가 고개를 저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이 오히려 안온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마주 앉은 테고와의 자리도 가까운걸.
“음, 전 그냥 여기서 식사하는 것도 좋은 거 같은데!”
“…….”
오늘도 순진한 얼굴로 마냥 헤헤 웃는 아이네의 모습에 테고는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이곳은 명백하게 테고의 영역이다. 베룸 공작가 기사들도 몇 명 따라오긴 했으나 별관에 묵을 뿐.
늘 가까이서 시중들던 사라도 없는 마당에 제가 작정하고 그녀를 삼키려 들면 어쩌려고.
하지만 어쩌겠나. 이번에도 그가 참아야지.
“……대신 저 소파와 담요들만은 치우라고 하겠습니다.”
거의 침대나 다름없는 물건들은 확실히…… 위험하니까.
* * *
“테고, 내일 일정은 어떻게 돼요?”
테고에게 물으며 수프를 한 입 떠먹은 아이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먹기 직전만 해도 미약하게 서려있던 의심의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이거야. 이거!
오징어라고는 단 1%도 함유되지 않은 진짜 수프!
한편, 곁에서 말없이 식사 시중을 들던 집사의 손이 빨라졌다.
그는 지금 예비 공작부인의 식성을 파악하는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나온 음식은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드시는군. 대신 양이 좀 적은 편이시니 가짓수와 코스를 간략히 줄이고. 뜨거운 음식은 잘 못 드시니……. 메모.’
그리고 그런 집사의 뜨거운 직업정신은 테고의 뒤통수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다들 아이네를 환영하는 분위기라 좋긴 하지만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베룸 공작가의 사용인들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일단 급한 서류 작업이 좀 남았습니다. 그래도 점심 식사 전까지는 다 마칠 수 있겠군요.”
“그치만 원래 여기 온 건 황명 때문인데 무리는 하지 말아요. 어차피 하루만 잠깐 시간 내서 축하하면 되니까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둘의 대화를 듣던 집사 헤일러의 손이 잠시 멎었다.
곧이어 식성 파악으로 시작했으나 어느새 예비 마님 관찰일지로 변모한 그의 수첩이 앞쪽으로 팔랑팔랑 넘어갔다.
‘오늘 처리하셔야 할 서류가……. 어디 보자.’
에펜베르크 영지와 연합왕국 국경으로 보낼 병력 차출 문제에 남부의 치안 공백 지원 문제까지.
급한 것만 처리해도 한나절은 꼬박 검토해야 할 양이었다.
거기에 오늘 공녀님을 기다리며 통 집중하지 못한 탓에 밤을 새우다시피 하셔야 할 텐데.
어떻게든 연인과의 시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이 눈물겨웠다.
하지만 헤일러는 이런 테고가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저 또래의 보통 청년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음, 그럼 오전에는 성 구경을 좀 하고. 오후에 우리 같이 요 앞 마을에 나가볼래요?”
아까는 외성을 거쳐 내성으로 진입하는 순간이라 창문을 가렸다.
하지만 모두가 무사히 성 안에 들어왔으니 내성의 마을 구경쯤은 마음 놓고 해도 될 테다.
들뜬 아이네의 목소리에 테고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베룸에서도 유난히 마을이나 시장 구경을 즐기던 그녀가 아닌가.
“그것도 좋겠습니다.”
마주 웃어주며 제 몫으로 나온 크루아상을 요모조모 살피던 아이네는 작은 조각부터 떼어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입 안에 넣었다.
오징어 영지의 공녀로 빙의한 지 8년 차, 모름지기 안전제일이다.
오징어 먹물을 넣어 굽고 오징어 잼을 바른 크루아상의 트라우마는 그리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맛있어!”
오징어의 ‘오’도 함유되지 않은 맛이었다.
아까의 크림수프도 그렇고, 어째 리테루온 공작성의 모든 음식이 아이네의 취향에 꼭 맞았다.
행복한 표정을 한 아이네의 양 볼이 쉴 새 없이 올록볼록했다.
그걸 지켜보는 테고와 집사의 얼굴엔 자연스레 미소가 매달렸다.
다만, 그녀를 보느라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은 테고와 달리 집사의 손은 다시 바쁘게 수첩 위로 움직였다.
“와, 그런데 이거 무슨 재료를 쓴 거예요? 말도 안 돼.”
그 순간 헤일러가 외알 안경을 추켜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했으나 그는 지금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집안 대대로 집사로 일해와서 그렇지 헤일러는 원래 음식 조리 분야에 관심이 더 많았다.
‘드디어 몇십 년 만에 이 맛을 알아봐주는 분이 생겼군.’
입맛이 까다롭지 않았던 전대 공작 내외분과 원래 타고난 성정이 다소 무감한 테고에게선 기대할 수 없었던 반응이었다.
거기다 그들은 이미 오랜 세월 길들여져 있었을 테니까.
리테루온 영지의 우유와 버터 맛에!
“리테루온산 최상급 버터를 사용했습니다. 풍미가 남다르지요?”
“어쩐지……. 오는 길에 보니까 목초지가 엄청 많더라고요.”
그리고 헤일러는 예비 마님의 남다른 눈썰미에 두 번 감격했다.
1등급 재료 조달을 위해 특별히 노력한 전용 목장을 알아주시다니!
“이 다음에 올릴 메인 메뉴도 꼭 눈여겨봐 주십시오. 리테루온의 것은 고기도 아주 훌륭하거든요.”
어딘지 모르게 비장한 목소리였다.
그에 아이네의 턱이 신중하게 아래로 끄덕거렸다. 뭐든 오징어만 아니면 된 것이다.
“가져오도록 해요. 고기는 항상 옳으니까요.”
“아아, 역시……!”
“…….”
갑작스러운 아이네와 집사의 의기투합에 테고는 미간을 좁혔다.
어쩐지 지금 이 상황…….
일찍이 겪어본 듯한 기분이 드는데.
“아, 맞다. 저번에 집무실에서 마셔본 적이 있는데 말이에요. 그 새콤달콤한 과일주스! 그것도 진짜 맛있었는데!”
“칼루를 말하는 겁니까.”
“……!”
헤일러는 이번엔 입까지 틀어막고 완전히 감격했다.
그동안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건 집사가 리테루온 공작가문을 위해 특별히 제조해낸 최초의 음료 레시피였다.
* * *
그리고 이어진 광경에 헤일러는 아까의 생각을 빠르게 정정했다.
‘또래의 보통 청년이 아니라 이건…….’
처음에는 믿기지 않아 제 외알 안경을 신속하게 문질러 닦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 제 주인님은 방금까지 공녀님의 스테이크를 한 입 크기로 썰어주고 계셨다.
제국에서 무력으로 이름난 리테루온 공작가문 직계의 나이프가 스테이크 위에서 유려하게 움직였다.
거기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공녀님까지.
‘혼인하기도 전에 이미 애처가는 예약이시군.’
흡사 아기 새를 다루듯 애지중지하는 모습에 헤일러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와, 이게 진짜 고기지!”
아이네는 육즙이 가득 밴 고기와 특제 소스의 조화로움에 전율했다.
오징어 같은 불순물이 없으니 이다지도 완벽한 것을!
“리테루온에서 나는 소고기는 유난히 맛이 좋은 편입니다.”
아니, 이건 그냥 맛이 좋다고 표현할 수준이 아닌데?
테고의 담백한 말에 익숙하게 체념의 표정을 짓는 헤일러가 눈에 들어왔다.
왜 집사가 아까 그리 아이네에게 감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참, 혹시 갖고 싶은 생일 선물은 없어요?”
테고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미 주지 않았습니까.”
“네?”
아이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정말 빈손으로 왔는데 무슨 선물?
“아이네의 시간, 말입니다. 바쁜 와중에 여기까지 와주지 않았습니까. 내게 이보다 값진 선물이 있을 리가요.”
그렇게 말하며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는 테고의 모습에 아이네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어, 언제 이렇게 멘트가 늘었대?
그리고 방 한편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헤일러가 눈가를 가느스름하게 접었다.
‘왼쪽 귓불에 아트팩트가 있는 걸 보면 분명 우리 도련님이 맞으신데…….’
앞으로는 주인님의 이런 모습에도 적응해야 하려나.
* * *
“아이네. 졸립니까?”
“으음, 아뇨. 아뇨. 네에.”
아이네는 소파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우유로 만든 푸딩까지 꼭 선보이고 싶다며 헤일러가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집사와 수석 주방장이 혼신의 힘을 다한 식사를 전부 먹고 나니 급격한 식곤증이 몰려온 듯했다.
‘마차 여행도 그렇고, 일정이 다소 무리해서 그런가. 지쳤나 보군.’
무사히 도착한 데다 조금 전의 목욕과 마사지가 그녀의 신경을 완전히 느슨하게 만든 모양이다.
오늘 이후로는 치워질 운명인 소파에 앉아 보고 싶다고 하더니 단 몇 분 만에 눈이 반쯤 감겨들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느릿하게 내려앉는 걸 보며 테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한숨을 내뱉었다.
“하…….”
이렇게 노골적으로 꾸며둔 방 안에서 졸음이 올 수가 있다니.
그것도 서로 여러 번 입을 맞춘 약혼자와 단둘인데 말이다.
결국 툭 하고 작은 머리가 그의 어깨에 닿았다. 무방비하고 무심한 태도가 서운해 테고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가볍게 건드렸다.
“으응.”
“…….”
잘못된 선택이었다.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칭얼대는 듯한 모습에 그의 심장만 내려앉았다.
하긴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이때, 테고는 벌써 몇 년이나 제 생일을 그냥 넘겼다.
원래도 부모님은 이즈음 라니엘을 보러 상투아리움으로 가셨었고.
마차 사고 이후엔 더더욱 없는 날 취급을 하며 챙기지 않는 게 암묵적인 분위기였다.
‘나와 그 아이는 생일이 같으니까.’
그래서 올해도 반란군과 남부 귀족 무리, 연합왕국까지 얽힌 뒤처리 업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시가 급한 사안인 건 사실이기도 했으니.
그랬는데…….
“네? 다음 달에 생일이라고요?”
뒤늦게 제 생일과 그날의 일정까지 알게 된 아이네가 펄쩍 뛰었다.
“이젠 나도 있는데, 혼자 생일 파티 할 생각이었어요?”
“딱히…… 생일을 챙기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치만 테고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는……. 아!”
그제야 깨달은 듯한 그녀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어렸다.
괜찮다며 곧바로 리테루온 영지로 출발하려는 그에게 아이네가 깡충 달려들어 안겼다.
“기다려요. 내가 금방 갈 테니까.”
분홍빛 입술을 앙다문 그녀가 그렇게 선언했다.
“이번 생일은 절대 혼자 보내게 두지 않을 거예요. 선물로 뭐 받고 싶은지나 생각해둬요!”
“…….”
그렇게 베룸 공작과 나딘 공자의 반대를 뒤집어엎고 그녀는 정말로 그의 곁에 왔다.
그것만으로도 기대한 적도 없는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흘 앞으로 다가온 제 생일이 처음으로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아이네는 집사와 하녀장을 대동한 채 성 내부를 구경했다.
“이걸…… 한 달만에 했다고?”
“이렇게 전체적으로 바뀐 건 거의 10년 만이라서요. 의미가 있는 것들을 빼고는 전부 새로 구입했습니다.”
어제는 테고의 품에 안겨 제대로 보지 못했던 본관 앞마당부터 중앙현관으로 이어지는 로비까지.
성 자체가 워낙 크고 웅장한 데다 유달리 층고가 높아 아이네의 고개가 뒤로 완전히 젖혀졌다.
그런데…….
“먼저 손님용 응접실부터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랜드홀부터…….”
“음.”
아이네가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이제 막 구경하기 시작한 참이라 단언할 수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럼 커튼이랑 장식 깔개랑 카펫까지 전부요?”
이제 더는 공포가 아닌 그냥 외알 안경 집사가 된 헤일러가 대답했다.
“예! 그것들도 대부분 교체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견 뿌듯함마저 엿보였다.
으으음.
아이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사람이 전부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인가 보다. 어제와 오늘 아침 식사는 정말 완벽했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집사의 인테리어 감각은 조금…….
하지만 아이네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집사의 눈치를 보느라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황도에서 겪었다시피 연작의 배경인 베룸과 다른 지역의 유행은 종종 어긋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이런 게 정상인데 괜히 또 앞서나간 트렌드면 어떡해.’
아방가르드니, 새로운 시도니 하는 소곤거림은 이제 딱 질색이었다.
처음에야 좀 우쭐해지지만 결국엔 부담감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아마 이런 고민은 연작이 시작되는 시점까지는 계속될 테지.
그렇게 아이네가 망설이던 순간이었다. 내내 어딘지 못마땅한 기색이던 하녀장 로라가 끝내 툭, 말을 내뱉었다.
“구려요, 솔직히.”
“로라! 공녀님 앞에서 무슨 그런…….”
속 시원한 지적에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그렇지? 로라 눈에도 좀 별로지? 유행이고 나발이고 아닌 건 아닌 거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외부인 앞에서 이런 내부의 치부를 언급하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이제 로라의 마음속에서 아이네는 확고하게 아가씨로, 예비 마님으로 자리 잡은 참이니까.
기왕 입을 연 김에 로라는 내내 품고 있던 불만을 빠르게 토로했다.
“아니, 눈이 있으면 좀 보시라고요. 여기 이렇게 진한 빨간색이 많은데 그 위로 복잡한 문양을 잔뜩 넣으면 어떡해요. 번잡스럽게!”
“분명 내가 물었을 때 저 문양 두 개 다 괜찮다고 한 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건 따로따로 봤을 때 이야기였지요. 어휴, 전대 집사장님께서 은퇴하는 그날까지도 인테리어는 절대 맡기지 말라고 하셨었는데!”
다른 물품들을 준비하느라 바빠 감시에 소홀했었다며 로라가 가슴을 쳤다.
그 말에 얼굴이 새빨개진 헤일러가 도움을 요청하듯 아이네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게 쳐다봐도 로라의 말이 전부 맞는걸요.
‘이 사람도 어쩐지 원작에서의 이미지랑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데…….’
그렇게 아이네를 사이에 두고 서있는 로라와 헤일러 간에 불꽃 튀는 시선이 오고 갔다.
결국 아이네는 흡사 대법관이라도 된 듯 엄숙한 목소리로 중재에 나섰다.
“흠흠. 확실히 좀 과한 감이 있네요.”
“그렇죠? 역시 아가씨께선 알아주실 줄 알았어요! 당장 다 뜯어낼까요?”
로라가 뻐기듯 가슴을 내밀었다. 그러자 헤일러의 어깨는 풀이 죽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아이네는 확신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황제 폐하가 맡겼던 건국 기념연회 준비위원장의 관록이 빛날 때라고.
“아니야, 로라. 그래도 전반적으로 질이 좋고 따뜻한 색감이라서 전부 바꾸기보다는…….”
중앙 계단으로 이어지는 로비를 한 바퀴 쭉 훑어본 아이네가 비장하게 손을 뻗었다.
“일단 여기 가운데에는 리테루온 가문 문장이 새겨진 태피스트리만 남기고 다 떼도록 해요.”
그래도 예쁜 것들만 모인 투머치라면 좀 덜어내면 되니까.
“그리고 현관 옆에 걸린 커튼을 떼어서 배경으로 거는 게 좋겠어요. 이렇게 하면 태피스트리랑 톤만 다른 정도라 오히려 문장이 더 부각될 거예요.”
들어는 봤나, 톤온톤 인테리어!
절망에 빠져있던 헤일러도 어느새 수첩을 꺼내 지시사항을 받아 적고 있었다.
로라 역시 장식이 과해서 눈살을 찌푸렸을 뿐, 색이 마음에 안 든 건 아니었는지 탄성을 내질렀다.
“로비에 태피스트리 말고 다른 걸 건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는데! 다림질만 잘하면 원래는 커튼인 줄 모를 거예요!”
윽…….
아이네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역시 또 그놈의 트렌드라는 걸 앞서나간 모양이다.
얇디얇은 레이스 커튼이 아니라 두꺼운 직물로 짠 겨울용 커튼이라 다행이었다.
“아가씨! 여기도 문제지만 그랜드홀도 좀 봐주셔요.”
로라가 기다렸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좋아, 오전엔 1층만 먼저 돌아보자.”
그렇게 아이네는 성 안내를 받는 손님에서 순식간에 실내장식 재배치 지휘권자로 변신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걸어 나간 그들 뒤로 헤일러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문득 드는 위화감에 잠시 걸음을 멈춘 탓이었다.
‘방금, 로라가 너무 자연스럽게 아가씨라고 하지 않았나?’
어째서, 왜? 로라에게만……?
* * *
“그래서 내일은 오늘 못 돌아본 곳이랑 2층까지 보려고요.”
“……그렇게 엉망이었습니까.”
쉼 없이 조잘거리는 아이네의 말을 들으며 마차 맞은편에 앉은 테고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네를 위한 준비를 하라고 한 뒤로 성 안이 분주하긴 했다.
며칠 후엔 당장 본관 로비부터 바뀌었고.
“…….”
잘 모르겠다. 낡았던 장식들이 새것으로 교체되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뭐야, 시력은 나보다도 좋으면서.’
뭐가 문제인지 몰라 생각에 잠긴 테고를 본 아이네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설마 예쁘고 아니고를 구분 못 하는 타입이었나?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제 외모에 별 반응이 없긴 했다.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게 놀라워서 빤히 본 것뿐이었지.
‘심지어 본인이 얼마나 잘생겼는지도 잘 모르는 눈치였어!’
그럼 정말 성격만 보고 나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거라고?
아이네는 이게 기뻐해야 할 일인지 슬퍼해야 할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도착했습니다, 주인님. 공녀님.”
뒤늦게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에 아이네가 입을 다문 사이, 마부로 위장한 호위가 도착을 알렸다.
그리고 어느새 마차 문을 열고 내린 테고가 손을 내밀며 서 있었다.
“라비, 내리지 않을 겁니까.”
큰 키 때문에 마차 안을 바라보는 테고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리고 흰 얼굴 위로 음영이 드리웠다.
일부러 수수한 무채색의 옷을 골라 입고 나왔는데도 빛이 나는 외모였다.
“아…….”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저런 얼굴을 당연하다는 듯이 갖고 태어나서 매일 아침 볼 텐데 말이다.
자신도 이 얼굴에 적응하는 데에 얼마 걸리지 않았던 것처럼.
아이네는 이번에도 그 손을 잡으며 활짝 웃었다.
“좋아요. 라비의 소꿉친구 기사님.”
테고가 자신을 설레게 하는 요소는 외모만 있는 게 아니었다. 종종 이런 면이 그녀의 심장을 간질거리게 했다.
지난번에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고 해놓고서 이렇게 다 기억하고 있는 점.
마음 같아서는 이번에도 모른 척 품으로 뛰어들고 싶은데 사람들 앞에서는 안 되겠지?
“…….”
한편, 그런 아이네를 바라보는 테고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또 저런 웃는 얼굴을 아무 때나 내보이고.
* * *
“올리브 값이 이렇게 차이 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돌아가면 작년 장부부터 봐야겠네요.”
“리테루온 영지 기준으로라면 작년보다 저렴해진 게 맞습니다. 역시 근본적으로는 유통 쪽을 손봐야 할 겁니다.”
그녀의 말에 테고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곧장 아이네가 의외라는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이런 세부 품목까지 다 검토한 거예요?”
세상에, 우리 테고가 달라졌어요!
몇 달 전 베룸 영지의 시장에서는 이런 화제엔 다소 어리둥절한 기색이더니.
그런데 영지 업무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냐?
“이제는 대리인이 아니라 내가 직접 책임져야 할 일들이 늘어갈 테니까요.”
그러면서 테고 역시 묘한 눈빛으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네는 여전히 말간 눈동자를 내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겨우 한두 달 만에……. 너무 무리하진 말아요.”
“……마음이 급해서 말입니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요!”
말해도 모를 것 같은데…….
대담한 것 같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순진하기 그지없다.
그런 면까지 사랑스럽게 느끼게 된 스스로가 신기해 테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아이네의 그런 점을 답답해하곤 했는데.
그러면서 턱짓으로 앞의 가게를 가리켰다.
“우리 영지에도 작은 장식품을 파는 곳이 있더군요.”
“와!”
그 말에 반짝이던 눈망울이 너무도 쉽게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것만 보아도 아직까지는 자신과 그녀의 감정의 무게가 얼마나 다른지 확연히 드러났다.
느긋하게 아이네의 뒤를 따르며 문득 테고는 뺨에 와 닿는 바람을 느꼈다.
얼마나 더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려나.
레이라는 아이의 탄생이 4년 정도 남았다고 했었다. 그럼 아이를 품고 있을 시간을 제외해도 길어야 3년인가.
“…….”
하지만 자신이 3년이나 기다릴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모르는 건 아니라는 것.
한번 그 문을 열면 절대로 뒤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굳이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았다. 아주 잘.
* * *
“이건 뭘로 만든 거예요?”
아이네가 손가락만 한 조각품을 집어 올려 살폈다. 보석이라기엔 내부에 불규칙한 불순물이 눈에 띄었다.
햇빛이 투과되자 반짝이는 게 꼭 광물이나 유리 같기도 하고.
베룸 영지나 황도에서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연성에 실패한 마정석 조각과 그 잔여물로 만든 것 같군요.”
“아이고, 나리께서 제대로 보셨습니다.”
“네? 마, 마정석이요? 으앗.”
깜짝 놀란 아이네의 손에서 힘이 풀린 틈을 타 조각품이 미끄러졌다.
곁에서 가볍게 받아 든 테고가 이리저리 돌려가며 바라보곤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연성에 실패한 마정석은 그저 돌멩이나 다름없습니다. 리테루온 영지에선 그리 귀한 편도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만! 아가씨께서 보시기에도 꽤 예쁘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설픈 유리 세공품보다는 값이 꽤 나갑니다요.”
그, 그럼 여기 있는 게 전부……?
아이네의 고개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착각할 만큼 느리게 돌아갔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가게 주인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제가 정말, 정말 아껴두었던 예쁜 놈으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마정석? 지금 누가 마정석 소리를 내었어! 테고 영지의 특산품이 마정석이란 말이야?
‘우리 영지에는 이상한 오징어 특산물이나 심어놓고!’
과연 원작의 여주인 라니엘의 영지다운 설정이다. 순도 높은 마정석은 같은 무게의 다이아몬드보다 값비쌌다.
“테고! 이걸로 아티팩트를…….”
“그건 나중에 집에 가서.”
급하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려던 아이네의 입술 위로 테고의 검지가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제야 가게 주인이 곧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든 아이네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테고는 가게 주인이 들어간 창고 입구를 살폈다.
‘우와, 우와…….’
그렇게 그의 시선이 잠시 떨어진 사이 아이네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생각해보면 어제 그녀는 저 손을 잡고 품에도 안겼었다.
그뿐일까. 저녁 식사 후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어서 테고가 안아서 방까지 데려다주었다고 들었다.
집에 가서라니…….
별거 아닌 말인데,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거대한 성에 사용인들도 여럿이라 생각지 못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약혼자의 집에 며칠 묵고 가는 셈이다.
심지어 여기엔 테고나 아이네에게 잔소리하거나 눈치를 줄 만한 어른도 없다.
맙소사, 어떻게 그걸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었을까. 제일 중요한 사실인데.
이건 단둘이 있어도 테고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지 않아서였을 테다.
‘그, 그럼 이번에는 뭔가 더 할 수 있으려나.’
아이네의 눈길이 테고의 허리 부근에서부터 천천히 등을 타고 올라갔다.
웬만한 영애들은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얼굴이 수려해 그쪽으로 죄다 시선이 집중돼서 그렇지. 테고는 기사들 중에서도 키와 골격이 제법 큰 편이었다.
등이랑 어깨가 저렇게 넓었었나?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그녀 정도는 우습게 가려질 덩치가 아닌가.
그런데 늘 테고의 입맞춤은 꼭 그의 얼굴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워서 종종 잊곤 했다.
“…….”
테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이네의 귓불 끝이 발갛게 물들었다. 저도 모르게 테고의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옷자락을 붙잡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네?”
아직 잡아당기지 않았는데도 용케 미약한 움직임을 눈치챈 테고가 몸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가 무어라 말을 걸려는 찰나, 가게 주인이 창고 문을 박차고 걸어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게 제가 만든 건 아니고 저희 아버지께서 가공하신 건데…….”
주인이 야심차게 내놓은 조각품에 아이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람쥐야?”
베룸 영지 경계의 숲에서 보았던 다람쥐와 똑같은 자그마한 조각이었다.
겨우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인데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놀라운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아가씨께서도 한 번에 알아보시는군요! 이 색깔이며 무늬까지 흔치 않은 녀석입죠.”
“……도대체 누가 최상급 마물을 조각으로 만든단 말인가.”
귀여운 외양과 달리 흉포한 본성을 잘 아는 테고가 질린 표정으로 탄식했다.
보통 기사나 용병이 아니고서야 최상급 마물을 마주칠 일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래서일까. 가게 주인의 얼굴에는 두려움은커녕 자랑스러움만 가득했다.
“바로 저희 아버지입니다!”
가게 주인이 뿌듯하게 가슴을 폈다. 그리고 이 자리엔 최상급 마물을 직접 마주하고도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귀여워! 이건 꼭 사야 해!”
“과연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아가씨!”
“…….”
* * *
마차를 타고 성으로 향하는 아이네의 입에서는 흥얼거림이 새어나왔다.
이것저것 샀지만 아까 그 다람쥐 조각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살폈다.
“그렇게 좋습니까.”
“이건 어떻게 만든 걸까요. 조각은 깎으면 된다지만 바탕색도 그렇고 무늬는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닐 텐데.”
투명한 호박 같은 광석 안에 여러 색이 들어있었다.
절묘하게도 까만색이 다람쥐의 눈과 코 위치에 콕콕 찍혔고, 얼룩처럼 섞여들어간 짙은 갈색은 마치 털의 무늬처럼 자연스러웠다.
“연성에 실패한 불순물이 내부에서 굳은 것 같은데 독특하긴 하군요.”
“이런 조각은 여기서 처음 봐요.”
사실 이것 말고도 탐이 나는 작은 조각들이 많았지만 아이네는 꾹 참았다. 여긴 그녀의 집이 아니니까.
“귀족들이 사 모으기엔 보석만큼의 가치가 없고, 평민들에게는 좀 비싼 감이 있어서 그럴 겁니다.”
테고의 설명에 아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원래대로라면 그냥 버렸을 실패작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좋으면 더 사두지 그랬습니까.”
아이네의 작은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지는 다람쥐 조각을 보며 테고가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는데, 너무 많이 사면 다시 갖고 갈 때 짐이 늘어나니까요.”
아쉬운 듯한 목소리에 테고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네?”
아이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
“음……. 나름 잘 보이는 곳에 둔다고 뒀는데.”
테고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커다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말하는 통에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흘러나왔다.
“응접실의 장식장……. 보지 못했습니까.”
“네? 그 비어있던 장식장이요?”
에엥? 그러고 보니 응접실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한 장식장이 있었던 거 같기도…….
커다랗고 화려한데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성 정비가 덜 끝난 탓이라 여기고 넘겼는데.
“앞으로 모으는 것들은 거기에 정리하면 됩니다. 어차피 이후엔 아이네의 방이 될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테고는 결국 손으로 얼굴을 전부 덮었다.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단 건 굳이 더 지켜보지 않아도 알았다.
미처 가려지지 못한 귓불과 뒷덜미가 달아올라 있어서.
“어, 어어.”
그러니까 테고는 벌써 그녀와의 결혼생활까지 생각하고 준비를 해놨다는 거다.
“…….”
마차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제 완전히 고개를 돌린 테고를 바라보던 아이네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황도로 돌아온 후로 결혼 이야기는 까맣게 잊은 것처럼 굴더니.’
그러고는 조심스레 자리를 맞은편에서 그의 바로 옆으로 옮겼다.
“아이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예요?”
“……?”
테고가 의아한 얼굴을 한 채로 그녀와의 거리를 약간 벌려 물러났다.
“기껏 꾸며둔 리테루온 성을 내가 건드리게 내버려 두고 있잖아요. 그거…… 무슨 뜻이에요?”
그러고 보니 아이네가 나서서 실내장식을 바꾸는데도 가만히 두고 보기만 했다.
아직 그녀는 손님에 불과한데도.
‘그리고 이런 건 확실하게 해두라고 했었으니까.’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으로 나딘을 낚아챈 달리아 선생님의 말씀이셨다.
“그건 아이네의 안목이 더 나으니까…….”
아이네가 슬금슬금 손을 움직여 테고의 손등 위를 덮었다. 그의 손이 움찔 떨리자 재빨리 손가락 사이를 얽어 단단히 깍지까지 꼈다.
이번엔 테고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테고도,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아니고요?”
아이네가 눈을 반짝거리며 테고에게 바짝 다가갔다.
“…….”
평범한 외양의 마차를 탄 탓에 테고에게는 더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입 안쪽 살을 슬며시 깨물었다. 겁도 없이 제 턱 밑에서 고개를 들이미는 아이네 때문에.
‘정말 남자 무서운 줄 모르는군.’
테고라고 지금처럼 어린애 장난 같은 가벼운 입맞춤이나 포옹 정도에 만족하겠는가.
베룸 공작이나 나딘 공자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결혼 전에는 선을 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제일 큰 걱정은 레이라는 아이가 생길 시점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혹여나 무르겠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놓아줄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우리 이제 슬슬 진도를 더 나가도 되는 거 아닐까 싶어서요.”
당돌한 아이네의 말에 테고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기어코 제 손마디 사이에 끼워 넣으려 애쓰는 움직임이 간지러웠다.
“아마 아이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건 다를 텐데요.”
그래서 여전히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손가락을 꽉 붙들었다. 그건 아주 약간의 힘으로도 가능해서 테고에게 묘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네를 내려다보며 내뱉는 목소리에도 열기가 섞여들었다.
순식간에 바뀐 테고의 분위기에 아이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를 게 뭐가 있어요오.”
그러나 호기로운 말과는 달리 그를 향해 빳빳하게 치켜세웠던 목과 어깨는 어느새 수그러들어 있었다.
그걸 본 테고가 빙긋 웃었다.
“그럼 시험해봐도 되겠습니까.”
“언제든지요!”
발끈한 아이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
그때 테고가 반대편 손을 뻗어 아이네가 앉은 좌석 옆을 짚었다. 그 모양새가 꼭 그녀를 품에 가둔 것처럼 보였다.
“앗!”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았다. 테고가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온 게 느껴졌다.
있는 줄도 몰랐던 볼의 솜털 전부가 오소소 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한다고? 여기서?’
하지만 매번 하던 키스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키스는커녕 가벼운 입맞춤조차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조용해진 마차 안에 쾅쾅 울릴까 걱정이 되어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아이네의 귀에 스치듯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지금은 내릴 때군요. 우리에겐 시간이 충분히 있으니까요.”
“어……. 엥?”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테고는 이미 마차에서 내려 손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아이네는 있는 힘껏 흘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