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외전1-생일선물(2)
“헤일러. 오늘도 정말 맛있었어요.”
“별말씀을요. 아가씨께서 이리 애써주시는데도 제가 할 일은 고작 이것뿐이라 송구스럽습니다.”
“…….”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의 마무리 순간에 끼지 못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테고의 미간이 잔뜩 굳어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도대체 그 짧은 기간 동안 어떻게 친해졌길래 다들 아이네에게 ‘아가씨’라고 부르는지…….
심지어 누가 아가씨라고 많이 부르나 경쟁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아이네는 그걸 다 듣고도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가 서류처리에만 몰두한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길래.
“아참, 아까 말했던 버터구이 오징어 말인데요.”
“큼, 큼!”
곁에서 듣다 못한 테고가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제야 집사 헤일러는 주인님의 불편한 기색을 알아챘다.
“……피곤하실 테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헤일러는 누가 보아도 어색할 만큼 빠르게 식당을 벗어났다. 그런 그를 보며 아이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전이랑 분위기가 너무 갑자기 달라진 거 아냐?’
그러다 금방 납득했다.
하긴 이 시간까지 이런 이야기는 초과 업무겠지? 헤일러는 이제 나이도 있으니까.
그런 아이네를 바라보는 테고는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눈빛만 보아도 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해서.
성 밖 나들이를 다녀온 지 벌써 이틀째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테고는 아이네와 좀처럼 단둘만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손이 닿는 거리에 있는데도 닿질 못하니 이번에 안달이 난 건 테고 쪽이었다.
기껏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모든 일을 마쳐놓았는데 말이다.
“손님으로 모시라 했는데 다들 아이네를 너무 귀찮게 한 게 아닌가 싶군요. 주의 주겠습니다.”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냐는 말은 꾹 눌러 참아냈다. 치졸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지켜내고 싶었다.
그러나 테고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아이네는 방긋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성이 생각보다 넓고 재밌어요!”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습니까?”
테고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 성에서 나고 자란 그도 모르는 곳이 있었던가.
“어렸을 때부터 힘이 셌다면서요? 아까 테고가 어릴 때 썼다던 개인 연무장도 구경했는데 바닥이 엉망진창이던데요?”
“아…….”
테고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볼을 슬쩍 긁었다.
지금에야 적당히 조절하는 법을 안다. 하지만 그때는 거기까지 신경 쓸 만큼 다듬어지지 않은 시절이었으니까.
“헤일러랑 로라가 테고 이야기를 이것저것 많이 해줬어요. 성 여기저기에 테고 흔적이 많이 남아 있더라고요.”
아이네는 조금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원래대로라면 테고는 흔적을 남기기는커녕 열네 살에 존재 자체가 사라졌을 인물이다.
그런 그가 살아 숨 쉬었다는 증거들을 제 눈으로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러고 나니 새삼 이 세계는 자신이 알고 있던 곳과 다르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성격이 정해진 인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욕심이 없을 수 있나?
‘이러니까 남자인 줄 몰랐지.’
정말 결혼할 때까지 어린애 같은 키스로 만족한다고?
“아직도 생일 선물로 뭐 받고 싶은지 못 정했어요? 이제 오늘이 지나면 하루밖에 안 남았는데!”
“…….”
아이네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투덜거렸다. 그동안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녀가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다.
그것도 사라까지 떼어놓고.
아이네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테고가 이내 입을 열었다.
“생일 무렵엔 항상 사냥을 나갔습니다.”
“네?”
“……그날만은 성에 남아있기가 조금 괴로웠습니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테고의 눈동자 위로 쓸쓸한 기색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결심한 듯 그의 눈빛이 단단하게 아이네에게로 와 닿았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서 오고 가는 데에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내일 같이 돌아보는 것, 그걸로 하지요.”
그저 의미 없이 흘려보내기만 했던 제 삶에 처음 만난 순간부터 색을 입혀준 그녀다.
아이네와 함께라면 지금까지 지독하게 외롭기만 했던 생일도 이제 다르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의 테고에게는 그녀와 더 가까워질 시간이 필요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에서.
* * *
“…….”
테고는 번민했다.
그렇게 아이네를 방까지 데려다주고 모처럼 일찍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아이네가 마지막에 조르듯 했던 말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음음, 그런데 뭐 잊은 거 없어요? 세 번 하기로 했던 거, 그런 거 있잖아요.”
“……생일 선물은 내일 받을 겁니다.”
“치이.”
늘 담담한 척 받아쳤지만 마음까지 정말 고요한 건 아니었다.
그녀를 여자로 의식한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늘 조심스럽게 대했던 건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정말이지 먹이는 보람이 있는 분이시더군요.”
“헤일러.”
“아, 저도 모르게 주제넘었습니다. 하지만 많이 드셔서 더 자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베룸 공작과 나딘은 그렇다 쳐도 헤일러마저 결국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에게 손이라도 댔다가는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한 놈이 될 거라는 무언의 압박.
이건 전부 성년이 지난 나이에도 비교적 앳되어 보이는 아이네의 외모 탓이다.
거기다 자신과 유난히 차이가 두드러지는 몸집 때문일 테다.
멍하니 천장을 보고 누웠던 테고는 문득 억울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이네는 성년을 넘겼었는데, 왜…….’
그나마 종종 하던 입맞춤조차도 늘 아이네가 먼저 그를 덮치는 쪽에 가까웠다.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심한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지금처럼 몸을 사릴 필요가 있나?
따지고 보면 막 성년이 된 달리아 에펜베르크 영애와 결혼한 나딘 공자도 있지 않은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테고가 몸을 일으켰다.
* * *
“응?”
똑똑, 딱 떨어지는 박자로 노크 소리가 두 번 이어졌다. 막 침대로 향하려던 아이네가 문 앞으로 다가갔다.
“제리? 로라?”
“……접니다.”
여전히 망설임이 묻어 나오는 낮은 목소리에 아이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테고?”
그러고는 그대로 문을 활짝 열었다.
“와, 무슨 일이에요?”
“……아이네.”
잠옷 위로 두툼한 가운만 걸친 모습에 테고가 이마를 짚었다.
또 이렇게 무방비한 차림일 줄이야.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면 그냥 돌아가야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게 패착이었다.
“후, 아닙니다. 그저 내일 점심나절 이후에 출발하겠다는 말을 하려고. 그럼…….”
테고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아이네가 그런 그의 팔을 잽싸게 붙잡았다.
“진짜로 그냥 가게요? 잊은 게 생각나서 온 건 아니고요?”
그렇게 말하며 올려다보는 아이네의 청명한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희미한 조명만 켜진 어두컴컴한 복도에서도 그의 시선이 온전히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
거기에 막 씻고 나온 듯 은은한 향기까지 훅 풍겨오자 테고의 눈빛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결국 이를 악문 그는 자신을 붙든 아이네를 돌려세웠다.
“앗?”
아이네는 멍하니 두 눈을 깜박였다.
아니, 언제 방 안으로 들어왔지? 그리고 얼굴 옆에 뻗어진 이 팔은 뭐고.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지만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이거…… 전에 겪어본 상황 아니야?’
그러니까 예전에 테고가 여자인 줄로만 알고 있을 때 말이다.
별관으로 들어간 그를 살금살금 따라갔을 때랑 비슷한 상황인 거 같은데.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를 느끼고 고개를 드는 찰나,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기껏 참고 있는 나를 도발하려는 의도였다면, 꽤 ……성공적입니다.”
아이네의 턱 끝이 잡혀 들어 올려졌다. 와중에도 와 닿는 손길이 부드러워 무섭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건 나 좋을 대로 해석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그러나 어둠 속에서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빛만은 제법 흉흉해 보였다.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이거야. 이거!
‘와, 그동안에는 뭘 해도 철벽만 치더니.’
도대체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그의 버튼을 눌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이런 상황을 만들어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 이번엔 한 번으로 끝내기 없기예요.”
아이네의 당돌한 말에 테고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잔뜩 긴장한 낯을 한 채로도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아이네가 검지를 들어 제 입술 위로 톡톡 두드렸다.
“하루에 세 번씩인데 내가 여기 온 지 오늘로 4일째니까 총 열두 번은 밀린 거 맞죠?”
“하…….”
그의 생각보다 더 대담한 모습에 테고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잠시 팽팽하게 당겨졌던 이성의 끈이 다시금 느슨해졌다.
하지만 이번엔 아이네가 또 평소처럼 물러나게 두지 않았다.
“시험해본다면서요.”
“열두 번을 어떻게 버티겠다는 겁니까.”
누가 들으면 충분히 오해하고도 남을 법한 대화였다. 스스로 말하고도 흠칫 놀란 테고가 잠시 주위를 살폈다.
“도대체 왜 다들 날 어린애 취급하는 거예요. 그럼 내기할까요?”
아이네가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제게로 기울어진 뺨 위로 자그마한 손을 올렸다.
테고의 한쪽 눈썹이 슬쩍 들렸지만 못 본 척 무시했다.
매번 뭘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신이 실제로 어리기라도 하면 모를까, 테고와 겨우 세 살 차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더 닿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인데!
“좋습니다. 이번에는 나도 안 봐줄 겁……. 읍.”
아이네가 테고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한껏 발뒤꿈치를 들어 겨우 키를 맞췄다. 곧이어 부드럽고 말캉한 살갗이 입술에 닿는 느낌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우와…….’
원래도 이렇게 입맞춤이 달았었나?
도착한 첫날 안겼던 걸 제외하면 정말이지 오랜만의 접촉이었다. 생각보다 더 좋아서 아이네의 감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평소처럼 그녀가 먼저 접촉한 건 똑같은데……. 테고도 자신과 같은 기분일까?
아이네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를 발견했다.
마치 처음부터 아이네를 보고 있었다는 듯 망설임이라곤 없는 시선.
“앗!”
그 바람에 놀라 내내 맞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치려다 등 뒤는 문으로 막혀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한 번.”
그때, 테고가 엄지로 아이네의 아랫입술을 살며시 눌렀다.
가볍게 입술을 맞댄 것만으로 벌써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연약한 살갗이다.
“아…….”
아이네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 입술이 그의 손가락에 눌리는 느낌이 새삼스러웠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늦은 시간, 밀폐된 공간에 단둘뿐이 아닌가.
머뭇거리는 아이네의 기색을 테고도 눈치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역시 아이네를 도발하는 법을 잘 알았다.
“이대로 그만둘 겁니까?”
“해, 해요! 두 번째.”
아이네가 질 수 없다는 듯 새침하게 대답했다. 두 손으로 테고의 양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 모습에 테고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고는 이내 사랑스러운 감각이 다시 내려앉는 걸 마음껏 음미했다.
다만 이번에는 아래로 향한 테고의 팔이 아이네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쳤다.
부풀어 오른 만큼 더 매끈하고 말랑해진 입술이 틈 없이 맞닿았다.
한층 가까워진 둘 사이처럼 아까보다 더 강하게 입술이 눌렸다.
“……읏.”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목소리에 아이네는 당황했다.
‘평소랑 다른 거 같은데?’
방금까지는 그저 그녀가 어떻게 나오나 봐줬던 게 분명했다.
테고가 아주 약간 더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으니까.
그녀가 하곤 했던 아기 새가 가장자리를 쪼는 듯한 키스는 감질났던 모양이었다.
테고는 고개를 살짝 더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최적의 각도를 찾아냈다.
아이네의 것보다 크고 따뜻한 입술이 물기를 머금은 채 천천히 움직였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살갗이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테고의 다른 손은 동그랗고 예쁜 뒷머리를 받쳤다.
손바닥 안에 꽉 차는 감각을 느끼며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읍……!”
아이네가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팡팡 내리쳤다.
“아.”
애써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터져 나오기 시작해 약간 격해졌나 보다.
테고는 아쉬움을 참고 진득하게 맞붙어 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흐아, 흐으…….”
그러자 아까보다도 더 부푼 입술이며 약간 발개진 눈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입은 떨어졌어도 뒷목과 허리를 붙잡은 손은 떼어내지 않아 여전히 그들의 사이는 가까웠다.
“이, 이건 내가 못 해서가 아니라 숨이 안 쉬어져서 그런 거예요!”
“……그렇습니까.”
테고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길은 계속해서 아이네의 입술 위에 못 박히듯 머물렀다.
지금까지 중 가장 짙은 입맞춤이었다. 아무래도 떨어져있던 시간 동안 그 역시 아이네가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태 빗장을 걸어 잘 방비해 두었다고 믿었던 욕망이 금방이라도 넘칠 듯 넘실대는 걸 보면.
그녀의 방에 단 둘뿐이라는 자각이 그를 자극한 탓도 있고.
“그러니까 다시 해요.”
“…….”
아이네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마주했다.
‘뭐야. 내가 처음 아니었어? 왜 이렇게 잘해.’
늘 그녀가 리드하다가 주도권을 빼앗겨서 여간 분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껏 테고가 봐주고 있었던 줄은 모르고.
불만이 있을 때면 그러듯이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도 평소와 다르게 보였다.
저 작은 입술로 방금까지 저와 빠듯하게 입을 맞췄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움트기 시작한 욕심을 갈무리하며 테고가 낮게 웃었다.
“입 말고 코로 숨 쉬면 되지 않습니까.”
“……나도 알아요!”
아이네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 남은 건 열 번.
그로서는 아쉬울 게 없지만 과연 그때까지 이성이 버텨줄까.
망설이는 테고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이네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있죠. 한 번에 열 번짜리 키스는 안 돼요?”
그 말에 안 그래도 아슬아슬했던 테고의 이성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겨우 바닥으로 가라앉혀 두었던 욕망을 타고 그의 눈이 일순 위험한 빛을 품었다.
“그건 정말로 못 버틸 텐데요.”
하지만 아이네는 물러서지 않았다.
방금 당한 굴욕을 설욕이라도 하듯 그녀가 먼저 테고의 옷깃을 붙잡았다.
“해요!”
그래도 학습능력은 있는지 이번엔 제법 세게 입술을 맞부딪쳐 왔다.
갈급하게 오물거리며 파고드는 움직임에 결국 테고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의 옷을 잡고 매달린 아이네에게서 잠시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어둑한 방 안에, 자신보다 한참이나 덩치가 큰 테고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고개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럼…….”
테고에게서 처음 듣는 거칠고, 약간은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조금만 더.”
테고가 아까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네의 입술을 한 번 더 쓸었다.
아이네가 달라붙을 때마다 난처한 기색뿐이던 그였는데…….
지금은 테고의 시선과 손짓만으로도 마법에 걸린 듯 손끝이 저릿해졌다.
“아…….”
그래서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입술을 조금 벌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목 뒤를 받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까지의 가볍고 얕은 키스는 이제 없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바로 미끈한 점막 사이가 맞붙었다.
그동안 도대체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였다.
곧이어 테고는 자신으로 인해 도톰하게 부푼 입술을 집요하게 물었다.
아이네는 이제 인정해야 했다.
여태껏 테고가 정말로 저를 많이 아껴주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더 그녀를 원하고 있을 보통의 남자였다는 것도.
코로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비록 숨이 가빴지만 저릿했던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간지러움이 쌓이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것도 좋아.’
긴장으로 조금 굳은 와중에도 테고를 받아들이려 애를 썼다.
그걸 알아챈 그가 고개를 더욱 틀었다. 그러고는 대담하게 자신을 그녀에게로 더 깊숙하게 묻었다.
“……음.”
뒷목을 어루만지던 테고의 손이 움직여 아이네의 볼을 감쌌다.
어느새 달아오른 말랑한 뺨의 감각이 그를 자극했다.
정말이지 손끝에 닿는 모든 곳이 부드럽기 그지없어서…….
거기에 조르듯 앓는 목소리조차 사랑스러워 테고의 자제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더, 더 강하고 깊게 닿고 싶은데.
지금의 아이네를 잘 달래면 제가 원하는 대로 할 수도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낯설고 서툴러서 조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도 착실하게 그를 따라오고 있으니까.
아마 지금 이대로 이 가벼운 몸을 훌쩍 안아 침실로 옮길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아직 그래서는 안 되겠지.
정신없이 파고들던 움직임을 일부러 느릿하고 진득하게 바꾸었다.
서서히 한계에 다다른 게 느껴져서.
대신 아이네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어 그와 더욱 맞붙게 했다.
‘하…….’
단단한 제 몸에 묻히듯 와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순간 그답지 않게 음습한 생각이 들긴 했으나 다행히 테고의 인내심은 그리 얕지 않았다.
대신 아이네의 입술을 괴롭히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찰나.
“앗, 테고!”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테고는 기다렸다는 듯 한쪽 다리를 아이네의 다리 사이로 뻗었다.
덕분에 바닥으로 넘어지려던 걸 면한 아이네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계속해서 몰려드는 쾌감과 산소 부족으로 힘이 빠졌던 모양이다.
모자란 숨을 겨우 보충하며 아이네는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좋긴 했는데, 뭔가 부끄러워.’
지금까지 선을 넘네 마네 했던 발언과 호기롭게도 레이의 아버지가 되어달라고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히잉.”
어떡해.
그리 자신만만하게 굴었는데 이런 기본적인 접촉조차 어설펐던 걸 알아챘겠지?
그런 아이네를 바라보던 테고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표정 변화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알기 쉬운 그녀가 아닌가.
“내기는 내가 이겼군요. 이 정도도 못 버티면 아직입니다.”
“으…….”
아이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젠 얼굴뿐 아니라 온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여전히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그의 눈빛과 달리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못내 다정해서.
그때 테고가 쿡쿡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내 위에 앉아 있을 셈입니까.”
“앗.”
그제야 아이네가 허둥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경황이 없었던 데다 워낙 단단해서 사람 다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정말 곱상한 얼굴만 빼고는 모든 게 남자였구나.’
그것도 그녀의 생각보다 더 확실한 어른 남자.
“이, 이제 자러 갈래요.”
문득 테고가 손을 뻗어 하얗고 동그란 귓바퀴를 감싸듯 어루만졌다. 순간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찌릿한 느낌에 아이네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보며 테고는 다시금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금방 자신을 제대로 의식해줄 줄 알았다면 진작 참지 않았을 텐데.
“그래요. 이만 자는 게 좋겠습니다. 다행히 내일은 좀 포근한 편이라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짙은 아쉬움을 담아 평소보다 진하게 이마 위로 입술을 꾹 눌렀다.
“…….”
테고가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마자 아이네는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뒤늦게 열이 오른 눈가로 찔끔 눈물이 새어 나왔다.
폭발하기라도 할 듯 요란하게 쿵쾅대는 심장 박동이 위로 올라와서일지도 모르겠다.
양손을 모아 심장 위 가슴 부근을 감싼 아이네가 울상을 지었다.
이런 키스를 해놓고 어떻게 잘 자라는 거야!
* * *
“그럼 두 분, 부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사냥터 산장은 가까우니까 저녁 식사 때까지는 돌아올 거예요!”
테고의 앞에 태워진 채로 아이네는 괜히 한 번 더 강조했다.
“……예? 예.”
마중을 나온 집사 헤일러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 주인에게 눈빛으로 답을 구했지만 테고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천천히 말을 몰아 공작성 후문을 통과한 테고가 속삭였다.
“거리가 꽤 되니 예전처럼 내게 기대도 됩니다.”
여전히 승마에 익숙지 않은 아이네에게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래서인지 지나치게 꼿꼿하던 아이네의 허리가 조금 흔들렸다.
‘아, 아냐. 그건 테고가 남자인지 모를 때고.’
다시 마음을 다잡은 아이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빨리 달리는 게 아니면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는걸요. 하하.”
“…….”
그런 그녀의 반응에 테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쩐지 어젯밤 이후로 묘하게 뻣뻣해진 이 태도는 기분 탓이 아니었다.
“나랑 있는 게 불편하면 성으로 되돌아가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그런 거.”
화들짝 놀란 아이네가 뒤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균형이 무너져 그녀의 몸이 조금 흔들렸다.
이에 테고가 미간을 찌푸리며 재빨리 당겨 안았다.
“이런, 위험합니다.”
“앗! 아니…….”
다시 등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의 팔이 아이네의 몸을 단단히 조였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느낀 테고가 아이네의 정수리 위로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해서입니까? 아니면 어제 내가 좀 과했습니까?”
이럴 것 같아서 그동안은 정말 최소한으로 자제해왔던 건데.
“그건 아니고요.”
한편 테고에게 기대게 된 아이네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염치없게도 그에게 안기는 게 습관이 되었나 보다.
이렇게 편하고 익숙할 수가.
게다가 테고가 제게 잘못한 게 있을 리 없다.
그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여태껏 그에게 저질러 왔던 자신의 만행이 새삼스레 부끄러워졌다는 걸.
그때 본격적으로 산길에 들어서자 몸이 조금 들썩거렸다.
“어어.”
하지만 아이네의 몸은 이미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젯밤의 일을 언급한 것치고 그녀를 감싼 테고의 팔에선 전혀 힘이 풀리지 않았다.
“난 후회하지도 않고, 사과도 안 할 겁니다. 서로의 동의하에 있었던 일이니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로.”
“그럼 뭡니까. 오늘 아침부터 나랑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지 않았습니까.”
평소와 비슷한 음성이었으나 아이네는 거기서 조금 울적한 기색을 읽어냈다.
하긴 헤일러나 로라를 비롯한 공작성의 사용인들도 어쩐지 눈치를 봤으니까. 테고가 모를 리 없겠지.
“그동안 내가 너무 막 덤빈 거죠?”
“흠?”
아이네는 제 허리 위로 얹힌 팔뚝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뜻밖의 말에 테고의 한쪽 눈썹이 약간 들렸다.
“생각해봤는데요. 여태 너무 경솔하게 굴었던 것 같아요.”
“하.”
테고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지금껏 아무리 그가 남자란 걸 어필하고 또 어필해도 통하지 않았었는데.
“그런데요. 테고를 남자로 안 봐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뭐……. 그건 이제 익숙합니다.”
테고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남자로 안 보는 걸 넘어서 아예 동성 친구 대하듯 하던 시절도 있었으니.
“윽. 그래도 이젠 알았으니까 조심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아이네는 잡고 있던 테고의 팔을 양손으로 꾹꾹 움켜쥐었다.
마치 작은 동물이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듯한 모양새라 속으로 한숨만 삼켰다.
아니, 여전히 모르는 거 같은데. 제 팔을 이렇게 주무르는 시점에서 이미 조심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하지만 지나치게 경계해서 닿지도 못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이제라도 알아주니 고맙군요.”
감싸 안은 아이네의 정수리 위로 테고가 가볍게 제 턱 끝을 콕 찍었다. 곧이어 조심스레 그 자리에 애정을 담아 입을 맞췄다.
먼저 입을 댄 건 자신인데도 마음 언저리에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접촉뿐이라면 3년 정도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지도.
또 하나 달라진 건 한 번의 키스로 그들 사이가 확 가까워졌다는 기꺼운 사실.
“그런데요.”
아이네가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팔뚝에 슬며시 볼을 비비며 깊숙이 기댔다.
무언가 부끄러워서 하는 행동이란 건 안다. 하지만 평정을 찾으려는 테고에겐 썩 좋지 않은 방향이었다.
제법 두껍게 입은 옷 위로도 선연한 감각이라 미간이 좁혀졌다. 서서히 긴장돼 온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이러는 것도 다 내가 처음인 거잖아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테고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나름대로 힘 조절에는 신경을 썼는데……. 아팠나?
그리고 아이네는 기왕 솔직해진 김에 한 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어제 한 키스 있잖아요. 진짜 좋았는데……. 앞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
테고는 이제 아이네가 제 고충을 알아줄 거란 기대를 완전히 버렸다.
* * *
포기하면 편하다고 했던가.
아이네는 테고의 외투를 같이 덮은 채로 고개만 빼꼼 내민 상태였다.
산 중턱의 오두막으로 향할수록 기온이 낮아지자 그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든 결과였다.
아까의 어색함이 무색해졌다. 이제는 테고의 말수가 줄어들고, 아이네가 들떠서 종알거렸다.
“그럼 열네 살 때부터 매년 이렇게 사냥을 나왔다고요?”
“그렇습니다. 음, 아이네. 조금만 가만히…….”
약간이라도 험한 길이 나오면 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몰았다. 아이네는 물론이거니와 테고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딱히 속도를 내지 않으니 마차에 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편안한 승마감에 아이네는 더욱더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참, 어릴 때 썼다던 개인 연무장 기둥 말이에요. 거기에 매년 그어둔 선이 있던데. 테고 키 맞죠?”
“그게 아직 있습니까?”
워낙 오래된 흔적이라 이미 없어졌을 줄로만 알았다. 그나마도 십 대 후반이 되면서 연무장에는 출입도 잘 하지 않았으니까.
수련하느라 팬 바닥도 그렇고 아마 헤일러가 일부러 보존해둔 듯했다.
“와, 열네 살 때면 키도 요만했을 텐데…….”
아이네가 한쪽 손을 빼내어 제 턱 아래쯤을 가리켰다.
그 모습을 위에서 고스란히 바라보고 있던 테고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평지라 느슨하게 쥐고 있던 고삐에서 손을 뗐다.
“……이미 그때도 아이네보다는 키가 컸습니다.”
그러고는 아이네의 손을 잡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렸다.
“치이.”
아이네는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만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 * *
리테루온의 기후는 확실히 베룸과 달랐다. 겨우 두어 시간 남짓 천천히 올랐는데도 산 위와 산 아래의 공기는 극과 극이었다.
이래서 해가 한창 떠 있는 시간에 가자고 한 모양이다.
“이런 계절에 혼자 산을 올라갔던 거예요?”
로라와 제리가 제법 두툼하게 옷을 입혀주었는데도 이런 추위라니.
등에 닿는 테고의 몸이 따뜻해서 계속 안쪽으로 옹송그리게 되었다.
“평년에 비하면 오늘은 포근한 편이긴 한데. 많이 추우면 이만 돌아가는 게 낫겠습니다.”
자꾸 꼼지락거리며 완전히 딱 붙은 아이네 때문에 테고는 심히 곤란했다.
어제 그런 키스를 해놓고 잠을 설친 건 아이네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아니에요. 테고랑 있으니까 따뜻해서…….”
고개를 젓던 아이네가 잠시 멈칫했다.
방금 깨달았는데 언제 이렇게까지 깊게 안겨있었지?
처음에는 그저 등만 기대려 했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틈이 전혀 없을 정도로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계절은 다르지만 이 상황 자체는 이미 겪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베룸 영지의 경계의 숲으로 테고를 데려가던 그때.
이제야 심히 난감해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그때는 여자인 줄 알아서 나한테 들킬까 봐 곤란해하는 줄 알았지.’
생각해보면 흑역사가 한두 개가 아니다.
자고 있는 테고를 발견하고 수염이 있나 없나 몰래 훔쳐보질 않나.
그의 가슴이 절벽인 게 아티팩트 때문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막 더듬기도 했다.
‘악!’
아이네는 딱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건 테고도 좀 문제가 있던 게 아닐까. 생판 모르는 낯선 여자가 그렇게 들이댔는데 말이지.
그리고 다음 순간, 아이네의 얼굴은 방금까지의 부끄러움은 아무것도 아닌 양 새파랗게 질렸다.
그때 그녀가 테고의 가슴 말고도 은밀하게 스쳤던 곳이 한 곳 더 있었다.
키도 그렇고 남장하는 데에 왜 이렇게 디테일한 욕심을 부렸냐고 생각했었는데.
그럼 그게 전부 본인 거였단 말이지?
“…….”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테고를 바라보았다. 살짝 찌푸린 얼굴로 하늘을 응시하던 그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기울였다.
“구름이 몰려오는 걸 보니 춥지 않더라도 이대로 돌아가는 게……. 어디 불편한 곳 있습니까?”
아뇨, 정말 어느 한군데 빠지는 곳 없이 너무나 남자다운 사람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아서요.
아이네는 그와 맞닿아 있던 하체를 슬금슬금 떼어냈다.
큰 키와 그에 못지않은 커다란 체격, 기사단의 모두가 학을 뗄 만한 힘을 비롯한 운동신경.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그녀가 처음이었을 텐데도 여유 있고 능숙했던 어제의 키스까지.
아이네는 이래 봬도 로판을 꽤 많이 본 편이었다.
킁킁, 어디서 절륜 냄새 안 나요?
그때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테고가 고삐를 잡은 손과 아이네를 껴안은 팔 모두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기껏 아이네가 벌려둔 틈이 다시 사라졌다.
“이런. 거의 다 왔는데…….”
갑작스레 내린 것치고는 빗줄기가 제법 거셌다. 금세 시야가 뿌옇게 흐려질 정도였다.
“앗.”
“…….”
아이네를 머리까지 완전히 끌어안으며 테고는 몸을 조금 숙였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성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라면 그 혼자서는 어떻게든 반시간 안으로도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여, 여기 비는 왜 이렇게 아파요?”
최대한 비를 맞지 않도록 감쌌는데도 아이네의 머리카락은 벌써 꽤 젖어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비가 내릴 줄이야. 어쩐지 평소보다 좀 포근하더라니.
아직 한겨울이 아닌 만큼 테고에게 이 정도 비는 그다지 큰일도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두르고 있던 외투는 벌써 물을 머금고 묵직해졌다. 거기에 덜덜 떨기 시작하는 아이네를 본 테고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말을 몰 테니 입을 열면 안 됩니다.”
“으……. 네에.”
테고는 다시 한번 말고삐를 단단하게 말아 쥐었다. 안이했다.
아마 지금 상황으로 보아서는 내일까지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데.
* * *
“으, 으엑. 에취!”
아이네는 산장 안에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주저앉았다. 로라가 입혀준 솜옷은 따뜻했지만 비에 젖으니 모래주머니가 따로 없었다.
‘벽난로에 불을 지펴야 하는데…….’
바깥보다는 나았지만 불을 피우지 않은 산장 내부의 공기가 서늘했다.
그래서인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새삼 자신이 그동안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빙의한 후로 아이네는 지금처럼 흠뻑 젖기는커녕 가랑비를 맞아본 적도 없다.
애초에 멀리 나가질 않았던 데다 몸 약한 아이네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다들 호들갑을 떨었으니까.
그사이 마구간에 말을 묶으러 갔던 테고가 문을 열자마자 그녀를 발견했다.
“아이네? 왜 여기에…….”
“추, 추워서, 몸이.”
아이네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제는 이가 달달 떨릴 정도로 한기가 느껴졌다.
‘여기만 이렇게까지 자연환경이 다를 일인가?’
과연 검술 천재 원작 여주를 키워낸 영지답게 초겨울 비조차 혹독했다.
이래서 리테루온 출신 기사들이 유난히 강했던 건가 싶을 정도로.
“이런.”
그녀를 달랑 들어 올려 벽난로 근처에 내려놓은 테고가 서둘러 장작에 불을 붙였다.
“불만 피우면 금방 내부가 따뜻해질 겁니다. 우선 젖은 옷부터 벗는 게 좋겠습니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아이네가 겉옷을 벗으려 손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단추를 풀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손가락이, 어, 얼었어요.”
서둘러 장작을 마저 넣은 테고가 아이네 앞으로 다가왔다. 목 끝까지 채운 단추부터 푸느라 테고의 손가락이 그녀의 턱밑에 살짝 닿았다.
그 바람에 아이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와, 손이 따뜻해.’
그녀가 아무리 용을 써도 꿈쩍하지 않던 단추가 풀리고 외투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리고 아이를 다루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옷을 벗겨냈다. 아무리 입을 맞대는 사이가 되었다고 해도 평소의 아이네라면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을 테다.
“아이네, 팔을 쭉 펴세요.”
“……네.”
하지만 그녀는 제 앞에 바짝 다가와 앉은 테고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비에 젖어 한층 색이 짙어진 고동색 머리카락이 거칠게 뒤로 넘어가 잘생긴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미처 쓸어 넘기지 못한 머리카락 몇 가닥 끝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새하얀 얼굴과 턱선을 타고 흘렀다.
외투 안에 껴입은 옷을 보고 조각 같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 위치한 눈동자는 조명이라곤 벽난로의 불빛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새파랗게 빛을 발했다.
비바람을 제 몸으로 막아주느라 홀딱 젖은 모습인데도 정말 치명적인 미모였다.
“다 젖었군요. 일일이 벗는 것보단 차라리 뜯어내는 게 빠르겠습니다.”
“……네에.”
그에게 홀린 아이네가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거기에 창백하게 질린 채 떠는 그녀의 체온을 빨리 올려야 한다는 생각뿐인 테고까지.
둘 모두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힘을 주어 억지로 뜯어낸 단추들이 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때늦은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아…….”
제 손으로 뜯은 승마복 안쪽 얇은 슈미즈 차림을 보고서야 테고는 정신을 차린 듯했다.
그때까지 새하얗던 얼굴이 확 붉어지며 그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황급히 그녀의 옷깃을 여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급해서 그만. 나머지는 저쪽 방에서 갈아입으면 됩니다. 그동안 걸칠 만한 걸 찾아보겠습니다.”
“어어, 아. 네.”
아이네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테고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안긴 채 올려다본 시야로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턱이 보였다. 입매가 끝까지 팽팽해진 걸로 보아 이를 악물고 있는 모양새였다.
참고로 아이네가 입은 슈미즈는 현대에서라면 속옷은커녕 그저 얇은 원피스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게 그녀를 작은 창고 같은 방에 내려놓은 테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니, 어젯밤만 해도 천하에 둘도 없는 절륜남처럼 굴던 남자 맞아?
* * *
“으앗!”
비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승마 바지를 벗던 아이네가 옆으로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근처 선반에 있던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도르르 굴러나왔다.
“이게 뭐야?”
탁구공만 한 크기의 딱딱한 물체였다. 주워서 손에 쥔 아이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부싯돌인가?
그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테고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괜찮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지 벗다가 넘어진 거예요.”
“…….”
당장이라도 들어올 기세였던 바깥이 금세 잠잠해졌다.
아이네는 겨우 손가락을 움직여 젖은 옷을 전부 벗어냈다. 그러고는 테고가 주저하며 넣어준 옷가지를 펼쳤다.
“으음…….”
당연하겠지만 남자 옷이었다.
‘이거 또 겪어본 상황 같은데.’
속치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슈미즈에 테고의 얼굴이 붉어지질 않나.
여러모로 예전에 황도로 가다가 들렀던 마을 축제가 떠올랐다.
잠시 조용했던 문밖에서 무언가 결심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네. 정 갈아입기 힘들다면 내가 눈을 가리고서라도…….”
“아뇨! 아니에요. 다 갈아입었어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온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어느새 공기가 훈훈해졌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작은 오두막 전체가 딱 좋은 온도로 변해있었다.
보기엔 그리 크지 않은 벽난로 앞으로 아이네가 발을 옮겼다.
그리고 직감했다. 여기도 원작 무대가 아니라서 설정으로만 존재하던 공간이라는 걸.
“여기…… 도대체 뭐예요?”
“베룸의 숲처럼 대단한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여기도 고대의 존재들이 남긴 곳일 가능성이…….”
“아하.”
벽난로 앞에 앉아 있다가 아이네 쪽으로 고개를 돌린 테고는 잠시 말을 잃었다.
오두막 내부에 있던 작은 냄비를 찾아 불 위에 막 올린 참이었다.
왜 인간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비록 바지까지 갖춰 입었다지만 이번엔 거의 맨몸 위에 제 옷을 입은 셈인데…….
‘안 돼. 그만.’
하필 아까 슬쩍 보였던 슈미즈의 잔상이 사라지기도 전이라 테고는 애써 심호흡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같은 그런 키스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한창 고뇌에 빠진 테고의 옷자락을 아이네가 슬쩍 잡아당겼다.
“뭘 끓이는 거예요?”
벽난로 안 냄비엔 보랏빛 액체와 과일 조각이 함께 담겨있었다.
“아……. 와인과 과일을 넣어 끓이는 리테루온의 전통 음료입니다. 말린 과일뿐이라 좀 아쉽긴 해도 효과는 비슷할 겁니다.”
“어? 혹시 뱅쇼 말하는 거예요? 유럽의 쌍화탕?”
아이네의 말에 테고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것도 그녀가 다른 세계에서 왔기에 아는 음식일 테다. 뱅쇼니 유럽이니 쌍화탕이니 하는 말은 처음 듣는 단어이긴 해도.
“역시 베룸보다는 여기가 내 취향이야.”
아이네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테고는 불 위로 냄비 하나를 더 올렸다.
“비도 문제지만 날이 점점 어두워져서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전 좋아요! 캠핑하는 기분도 들고.”
싱글벙글 웃던 아이네의 시선이 테고가 입은 얇은 셔츠에 닿았다. 소매 끝이 아직 덜 말라 젖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여태 옷을 갈아입지 않은 모양이다. 아마 오두막에 있는 여분의 옷은 아이네에게 양보했겠지.
그런데 테고는 지극히 멀쩡해 보였다. 분명 겨울비가 아니라 여름 소나기를 맞아도 추울 법하게 홀딱 젖었었는데 말이다.
이젠 같은 사람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저기, 그런데. 테고는 안 추워요?”
“나는 리테루온 사람이니까요. 이 정도는…….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면 훨씬 더 춥습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한 손으로 으스러뜨리면서 냄비에 넣었다.
아니, 저거 아까 창고에서 부싯돌인 줄 알았던 그거 같은데?
직접 만져보지 않았으면 빵 부스러기인 줄 착각했을 법한 자연스러움이었다.
평온한 얼굴로 계속해서 손을 움직이는 테고를 보며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먼치킨이네. 여기 바로 옆에 먼치킨이 있었어.
“많이 배고픕니까? 있는 게 건량과 육포뿐이라 좀 아쉽군요.”
“…….”
건조시켜 단단하게 뭉쳐둔 건량을 가루로 만든 테고 덕분에 어느덧 스튜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유년기에만 사용했다던 연무장 바닥이 왜 그렇게 엉망으로 패어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특출한 외모에 불행한 가족사, 비정상적일 정도로 뛰어난 신체 능력까지.
‘머리 색만 빼면 이거 완전히 전형적인 북부 대공의 특징 아냐?’
어쩐지 아이네는 뒷걸음질 치다 클리셰를 밟은 기분이 들었다.
* * *
그리고 테고가 만든 스튜는 아주 맛있었다. 빙의한 뒤 처음 맛보는 그리운 얼큰한 맛이라니. 아까 그 부싯돌, 아니, 건량이랑 육포엔 뭐가 들어있었던 거람.
뭐가 됐든 좋았다. 이제는 영영 맛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이 영지에 빙의했어야 했다.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합니까?”
테고가 가진 생각 외의 재능에 아이네는 두 눈이 반짝반짝 빛냈다.
테고, 당신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심지어 전에 없이 조금은 자신감을 잃은 표정으로 그녀의 눈치를 보는 모양새를 보면 겸손하기까지!
“말린 육포가 전부 리테루온 방식으로 만들어진 거라 타지인들은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빙의자의 향수를 자극하는 맛인데요.
“……나한테 빨리 장가와요.”
아이네의 말에 테고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 역시 이젠 확실하게 말해두기로 했다.
“결혼은 약혼 기간을 충분히 가진 뒤에 할 겁니다.”
“아니, 왜요!”
“…….”
억울하단 표정으로 외치는 아이네의 앞에서 테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깨달았다. 제 자제력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는 걸.
당장 결혼을 한다고 해도 3년간은 손도 대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도저히 그것까지는 못 참겠다는 말을 어떻게 꺼낸단 말인가.
지금 이렇게 작은 오두막 안에 단 둘만 있는 사실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데 말이다.
“자, 일단은 감기 걸리기 전에 이것부터 마시면 되겠군요.”
아이네가 뱅쇼라고 부르던 것을 잔에 따라 건네며 테고는 한숨을 삼켜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오늘 밤, 분명히 자신은 시험에 들게 되리라는 걸.
* * *
테고의 예상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적중했다. 와인을 끓이면 상당량의 알코올이 날아가는 건 맞았다.
하지만 아이네가 이 정도의 소량에도 이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으니까.
“헤헤, 이거 되게 맛있네요.”
“이제 그만 마시고 빨리 물을…….”
“좀 더워서 그렇지 나 취한 거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해도 얼핏 보이는 뺨이 붉었다.
벽난로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외에는 조명이 없어서 너무 늦게 눈치챈 탓이다.
“으음, 더워.”
“제발. 가만히…….”
목 부근을 잡아당겨 펄럭이려는 아이네의 손을 테고가 붙잡았다.
제가 입던 옷이라 그런지 목둘레가 넓어서 안쪽 살결이 언뜻언뜻 비쳤다.
그래도 옷을 벗으려 들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잠시만 이대로 있어야 합니다. 불을 좀 줄이고 올 테니.”
“네, 네에.”
그가 손을 떼자 흔들거리는 몸이 약간 불안했다. 하지만 테고는 서둘러 장작을 덜어내는 데에 집중했다.
그래서 쪼그려 앉은 제 등에 아이네가 매달리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다 알면서, 할 수 있으면서 왜 자꾸 모른 척해요? 다른 남자들이랑은 다르다 이거예요?”
“읏, 아이네.”
“뭘 고민하는 거야, 진짜. 생일 선물……. 그냥 나로 하면 되잖아요.”
아이네의 열 오른 이마가 그의 뒷덜미에 닿았다. 이번엔 테고의 몸이 불에 덴 듯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또, 이런 식으로 자극하면…….
“이만 자는 게 좋겠습니다.”
간신히 그녀를 떼어내 앞으로 안아든 테고가 약간 물러나 앉았다.
“싫어요. 어제 가만 보니까 테고도 영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러나 이미 그의 목에 단단하게 건 아이네의 팔은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완전히 취한 건 아니었는지 올려다보는 불만 어린 눈동자가 또렷했다. 테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자신이 없어서 그럽니다.”
“무슨 자신요?”
아이네가 편하도록 고쳐 안으며 그가 그녀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원하는 시기에 아이를 가지게 도와주는 아티팩트가 있긴 하지만. 당신은 발현자가 아닙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아이네가 두 눈을 깜박였다.
“고대인들이 남긴 아티팩트도 전부 파훼하는 당신인데, 아마 안 통할 겁니다.”
“네?”
“그 ‘레이’라는 아이 말입니다. 아직 4년은 더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아이네도 전부 이해했다.
그, 그러니까. 진짜 원작의 남주인 ‘레이’의 탄생 시점을 못 맞출까 봐 자제하는 중이라는 거지?
‘원래 그런 게 조절이 되는 거였어?’
하지만 정말 그가 절륜 속성을 갖고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생각도 못 한 이유에 아이네는 그나마 남아있던 술기운까지 깨는 듯했다.
원작의 억제력을 아는 그녀였기에 고민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책빙의라는 개념을 처음 들었을 테고는 몰랐겠지만 말이다.
“어, 음……. 그런 시기는 우리가 걱정 안 해도 알아서 해결될 거예요.”
어쩐지 조금 민망해진 그녀가 시선을 피해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우리가 당장 내일 결혼한다고 해도요. 그리고 그게 아니면…….”
“아니면?”
“아마 두세 살 나이 차이 정도는…… 허용될 수도 있고요오.”
아이네의 목소리가 점차 기어들어갔다.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눈치챈 테고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 * *
물론 테고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그에게 아직 때와 장소를 가릴 자제심 정도는 남아있었으니까.
대신 테고는 아이네를 품에 안은 채 잔소리를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겁도 없이 왜 자꾸 자극하는 겁니까. 어젯밤도 못 버텼으면서.”
“당연하죠.”
아이네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불안했으니까요.”
“……?”
테고가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좋아하는 건 내가 더 늦었을지 몰라도 계속 나 혼자만 매달리는 것 같았단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테고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조금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좋아합니다. 그것도 많이. 아마 당신이 날 좋아하는 것보다 더.”
응? 갑자기 너무 솔직해진 거 아냐?
“그리고 당연히 당신을 바랍니다. 그동안은 이유가 있어서 참았지만.”
테고의 눈동자 안에서 계속 억눌려만 있던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 어어…….”
아이네는 직감했다. 이제부터는 굳이 때를 기다리느라 자제하지 않아도 된 테고의 태도가 바뀔 거라는 걸.
“그리고 누가 그럽니까. 내가 보통 남자들과 다르다고.”
테고가 피식 웃었다. 이어서 목소리가 속삭이듯 낮아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여자로 보지 않은 적 없습니다.”
“네? 네에?”
처음부터?
“당신에게는 불행하게도 나는 기억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기도 하고요.”
테고의 한쪽 손이 아이네의 뒷목을 받쳐 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
“때가 되면 여태 나를 부추긴 벌은 남김없이 받아야 할 겁니다.”
자, 잘못 건드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말이죠.
어쩌면 테고가 착각한 채로 놔뒀어야 하는 게 정답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생일 선물은 내가 알아서 받아가도 되겠습니까?”
“…….”
아이네가 가볍게 턱을 끄덕인 것과 동시에 테고가 고개를 숙였다.
딱 적당한 취기로 달아오른 입술이 뜨거웠다.
“음…….”
늘 처음엔 가볍게 쪼는 듯 입을 맞추던 여유는 이젠 정말 완전히 사라진 모양이었다.
아이네의 입술이 그녀 자체이기라도 한 것처럼 다급했다. 평소보다 이르게 안쪽 점막을 부비며 테고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손바닥을 통해 얇은 옷감이 바스러지는 느낌을 한껏 음미했다. 어제보다도 더 선명한 감각이 와 닿았다.
아마 이 너머에는 그가 그토록 원하던 보드라운 무언가가 있겠지.
어제처럼 제대로 된 침실이었다면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하다못해 식당에서 치워버렸던 그 소파라도 있었으면…….
오두막 안에 그 흔한 침상조차 놓지 않은 게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필사적인 인내심으로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누른 테고는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것처럼 더욱더 깊게 파고들었다.
아이네의 목 뒤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앞으로 넘어왔다. 뺨을 어루만지는 다정한 손길과 달리 테고의 입술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킬 듯이 굴었다.
“하아…….”
아이네의 반응에 테고의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좁혀졌다. 기억력이 좋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한 단계, 한 단계 접촉이 깊어질 때마다 그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머릿속에 입력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굳이 되짚어 볼 필요가 없을 테다. 애초에 이제 그에게 남은 여유도 거의 바닥이 났으니까.
아이네를 받치고 있던 허벅지에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후…….’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듯싶었다. 더 파고들었다가는 위험해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지금도 고작 이 정도로만 닿는 게 불만족스럽다는 생각이 서서히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째서 이다지도 간사하기 그지없는지.
그렇게 테고는 몇 번 더 그녀를 양껏 탐하다가 억지로 고개를 떼어냈다.
“아, 흐아. 하…….”
여전히 코로 숨 쉬는 데에 서툰 아이네가 얕게 할딱였다. 그녀의 입술이 어제처럼 반들반들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 입에 마지막으로 쪽쪽, 하고 아쉬움을 덜어낸 테고가 이를 악물고 낮게 읊조렸다.
“여기서 멈추는 내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으음.”
이 정도로 델 듯 뜨거운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그 열기를 고스란히 느낀 아이네의 눈가도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확실해. 절륜 확정이야, 땅땅.’
무섭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이어진 테고의 다음 말에 아이네의 몸이 살짝 굳었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잠깐만, 이거 보통은…….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않나?’
발언의 수위가 확 다른 거 같은데.
방금까지만 해도 ‘조금 더’라고 말하려던 아이네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러고는 그의 품 안에 얌전히 고개를 묻었다.
역시 오늘은 테고가 원하는 대로 일단 넘어가는 게…… 좋겠지?
한편, 제게 안긴 아이네의 뒷머리를 감싸며 테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돌아가면 결혼식 일정부터 바로 앞당겨야겠군.’
그렇다면 시기는 언제쯤이 좋을까.
이 서늘한 바람이 훈풍으로 바뀔 때쯤이면 될까.
아니, 그조차도 아득하게 느껴진다.
테고의 시야에 들어온 비죽 튀어나온 하얀 발이 벌써 그의 결심을 흔들리게 만들고 있었으니.
“…….”
아무래도 고통스럽고 긴 밤이 될 듯싶었다.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