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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특별 외전 (29/29)

28. 특별 외전

저녁노을이 어스름하게 깔리기 시작하는 시각.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잘 닦인 황도 거리를 따라 달렸다.

마차에는 이제 황도의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진 베룸 가문의 인장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괜히 우리 때문에 달리아 영애의 퇴근 시간까지 너무 늦어졌네요. 미안해서 어쩌죠.”

아이네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달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아, ‘우리’……. 아니에요.”

달리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미약하게 새어 나온 한숨만은 숨길 수가 없었다.

더불어 부러운 듯 아이네와 테고 사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길까지.

‘그래. 리테루온 공작과는 진짜 연인이기도 하시니까.’

이미 황도, 아니 제국 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일이었다.

세상 무심해 보이던 테고 리테루온 공작이 약혼자인 아이네이스 베룸 공녀에게 푹 빠졌다더라. 두 공작가의 혼사이니만큼 황실 못지않은 성대한 결혼식이 열릴 거라더라 등등.

“…….”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가 자신처럼 짝사랑 신세이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달리아는 테고가 무척 부러웠다. 안 그래도 조금 전까지 그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듣고 온 참이었으니까.

그리고 요즘 영애들 사이에서 한창 화제가 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딘 님도…….’

달리아의 손 아래 치맛자락이 조금 구깃구깃하게 잡혔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용기를 내서 온 거니까.

애써 초조한 기색을 지운 채 입을 열었다.

“저도 그 덕에 새로 채용된 영애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니까요. 모처럼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무,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설마 아직도…….”

아이네가 다급하게 되물으며 말끝을 흐렸다. 동시에 그녀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작지만 확실한 온기가 내려앉자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런 다정함은 어쩜 이리 남매가 똑 닮은 것인지…….

“무슨 일은요. 다들 똑똑하고 좋은 분들이었어요.”

“그렇……죠?”

빙긋 웃는 그녀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핀 아이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그 말은 사실인 듯했다.

‘그럼 이제 진짜로 원작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진 거겠지?’

사람들이 이유 없이 달리아를 적대시하게 했던 그 ‘영향력’ 말이다.

요즘 아이네에겐 가장 중요하게 챙기는 일과가 있었다. 매일 아침 오징어 캔디를 황궁 안에 뿌리는 것.

혹시 아직도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따돌리려 할까 봐 걱정이 되어서다.

하지만 오늘은 테고가 출장을 갔다가 며칠 만에 복귀한 참이었다. 처리해야 할 기사단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럴 짬이 생기지 않았다.

심지어 기사단이 위치한 외성과 본궁의 거리는 너무 멀기도 했고.

그 바람에 오늘 하루 종일 아이네는 초조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그때, 그녀의 다른 한쪽 손을 누군가가 조심스레 감쌌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테고였다.

“그러고 보니 손이 찬데, 마차 내부 온도를 좀 올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에요! 이건 그것 때문이 아니라…….”

화들짝 놀란 아이네가 민망한 얼굴로 달리아를 곁눈질했다. 잡힌 손을 빼려 연신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테고는 쉽사리 그녀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힘을 주기까지 했다.

아, 정말! 내내 달리아 영애를 걱정하느라 그런 거지, 마차의 냉방 마법 때문이 아닌 걸 뻔히 알면서!

물론 테고가 이렇게 토라진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오늘 퇴궁 후에 둘만의 시간을 보내자고 먼저 약속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잠깐만! 이제 괜찮아요. 아무리 그래도 달리아 영애가 보고 있는데……!”

끝내 아이네는 새된 목소리로 그를 타박했다. 그러자 테고가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성년까지 겨우 한 달 남은 미성년자 앞에서 못할 행동은 한 적 없습니다.”

어찌 보면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말끝에 이르러서는 단어 하나하나에 이를 악문 음성이 섞여 있었다.

“그, 그건 그렇지만. 테고 경…….”

아이네는 어찌할 줄 몰라 하며 테고와 달리아를 연신 번갈아 보기만 했다. 결국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달리아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달리아 영애?”

“아, 갑자기 웃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제국에서 절 이렇게까지 어린아이 취급하시는 건 공녀님과 나딘 님뿐일 거예요.”

그러고는 눈물이 맺힌 눈가를 매만지며 더없이 환한 얼굴로 아이네를 마주했다.

“두 분께서 저를 많이 아껴주시는 것 알아요. 솔직히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 감사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달리아는 잠시 망설였다. 뒤이어 머릿속으로 단어를 고르다가 마저 말을 이었다.

혹시 아이네가 서운해할까 그녀의 목소리엔 조심스러운 기색이 듬뿍 묻어났다.

“어리다는 게 완전히 무지하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제가 황녀 전하와 같은 대접을 받기엔……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만큼 자라버려서요.”

달리아가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그러자 아이네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자그맣게 입을 벌렸다.

“……달리아 영애의 말이 맞아요. 제일 중요한 건 영애를 믿어주는 일이었을 텐데. 미안해요…….”

아이네가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연둣빛의 정수리가 움찔거리는 게 꼭 새싹 같아서 달리아는 다시금 빙그레 웃음 지었다.

“아니에요. 저는 늘 공녀님을 만난 일이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인가요?”

그 말에 아이네가 바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맑은 아침 하늘 같은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모습에 달리아는 그녀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럼요!”

그건 사실이니까.

희미한 빛 한 점 보이지 않던 자신의 앞날에 나타난 믿기지 않는 구원이었다. 아이네라는 구원 없이 맞았을 제 성년을 상상하면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무슨 짓이든 저질렀을 거야.’

설령 그게 자신이 함께 파멸하는 결말이라고 해도.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건 일종의 확신과도 같았다. 실제로 비슷한 충동에 시달리기도 했다.

달리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잠시 맺혔다가 바로 사라졌다.

“…….”

그리고 그제서야 시종일관 아이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테고가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그는 마차 안의 훈훈한 분위기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오직 아이네만이 제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아까 리테루온 공작이 무슨 말을 했더라. 미성년자 앞에서 못할 행동은 한 적 없다고 했었나.

그를 보는 달리아의 눈빛에 애잔함이 어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리테루온 공작과 자신은 같은 부류인 게 틀림없다.

비록 이제는 그가 짝사랑 신세에서 벗어났다곤 하지만.

‘베룸 공작가 남매에게 사로잡힌 자의 숙명인 걸까.’

누가 뭐래도 두 사람은 꼭 닮은 남매니까.

제게 잡힌 아이네의 손등을 토닥이며 달리아가 조금 짓궂게 말했다.

“리테루온 공작님도 말씀하셨듯이 제가 그렇게 어리진 않아요. 그리고 솔직히 겉모습만 봐선 저보다는…… 후훗.”

“앗? 달리아 영애! 진짜 이러기예요?”

“아하하하.”

아이네가 양 볼을 부풀렸다. 그러자 달리아는 이번에도 소리를 내어 활짝 웃었다.

* * *

“……이건 또 무슨 조합이냐.”

마중 나와 있던 나딘이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차에서 내린 아이네의 양손은 각각 두 사람에게 붙잡힌 채였다.

“오늘 일이 많아서 야근했는데 달리아 영애가 늦게까지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리고 테고 경도 보름 만에 황도로 돌아왔으니까.”

“아니, 야근은 그렇다 쳐도. 경은 리테루온가 저택을 비워두고 이렇게 매번 여기부터 와도 되는 겁니까.”

나딘이 핀잔하자 테고는 제 손에 잡힌 아이네의 곁으로 더 가까이 붙었다. 그러고는 조금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아무도 없는 제 저택으로 아이네를 데리고 가도 된다는 말입니까?”

“뭐요?”

“네에?”

테고의 말에 나딘과 아이네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또?

“공자가 이렇게 매번 기겁을 하니 차라리 제가 오랜만에 만나는 약혼자 곁으로 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

나딘은 할 말을 잃었고, 아이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누가 테고 리테루온 공작이 과묵하다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휴, 이제 오빠는 테고 경한테 안 되겠네.’

저렇게 말을 해도 테고는 막상 둘이 있으면 절대 선을 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이네를 보낼 수 없다며 잔뜩 경계하는 아버지와 오빠 때문에 그 역시 바짝 약이 오른 상태였다.

아무래도 스스로 자제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방해받는 것은 완전히 다를 테니까.

“오빠. 나 배고픈데 이제 그만 들어가면 안 될까…….”

포기해, 포기하면 편하다. 나딘이여.

어차피 테고와는 당분간 전 연령가에서 허락하는 연애만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아이네는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어이없어하는 표정마저 판박이인 베룸 남매를 보고 달리아가 쿡쿡대며 웃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던 아이네는 달리아의 등을 슬며시 앞으로 밀었다.

“읏차, 달리아 영애.”

“네?”

“영애도 오빠랑 오랜만에 만나는 거죠?”

“아…….”

아직 웃음기가 남아있던 달리아의 뺨이 조금 굳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아이네는 그녀에게 잡혀있던 손을 들어 나딘에게 넘겨주려 했다.

그러나 달리아가 나딘과 닿기 직전, 손을 빼냈다. 언뜻 보면 아주 자연스러워 보일 만큼 정중한 인사도 함께였다.

“잘 지내셨나요. ……나딘 공자님.”

“아, 어. 달리아…… 영애도 그동안 자, 잘 지냈……습니까.”

얼씨구? 이 두 사람 분위기는 또 왜 이렇게 됐대. 서로 이름만 부를 땐 언제고.

이건 분명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틀림없다.

아이네의 두 눈이 가늘게 접혔다.

나딘과 달리아의 뒤를 조용히 따르며 아이네가 목소리를 낮추어 테고에게 속삭였다.

“저기 두 사람, 무슨 일 있었던 것 같죠?”

“음?”

테고의 한쪽 눈썹이 슬쩍 들려 올라갔다. 그 모습에 아이네가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어요.”

굳이 더 묻지 않아도 될 듯했다. 침음성까지 흘리며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하기야 테고는 이런 쪽으로는 둔한 편이 아니던가.

테고처럼 달리아도 거의 보름 만에 베룸가 저택에 방문한 참이었다. 건국 기념일 준비 기간 이후로 그녀는 내내 베룸 공작가에 머물러 왔다.

그도 그럴 게 달리아에겐 개차반인 아버지와 오라버니 말고도 그에 못지않은 방계 일족이 몇 더 있었다.

‘달리아 영애가 괜히 에펜베르크의 보물이 아니었던 거지.’

미성년자인 달리아를 어떻게든 휘둘러 보려던 가까운 친척들은 나딘이 나서서 전부 정리했다. 폐하의 묵인 아래 세무조사라는 이름의 먼지털이를 시전했으니까.

행정관 모드의 나딘은 웃는 얼굴로 에펜베르크 방계들을 굴비 묶듯 줄줄이 묶어 감옥으로 보냈다. 그때를 떠올린 아이네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그건…… 진짜 광기였어. 찐이었다고.

그렇게 나딘은 약혼자 자격으로 달리아의 주위를 깨끗하게 청소했다.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이후 달리아가 에펜베르크 저택으로 복귀하는 데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던 건.

‘나머지는 달리아 영애가 정리하느라 바빠서 그러려니 했었는데 말이야.’

황도에 있는 에펜베르크 저택은 최근 대대적인 정리를 마친 참이었다. 영지민의 고혈을 짜내어 모은 사치품들은 전부 팔아 영지 재건에 보탰다.

그래봤자 그것들은 그저 천박하기만 했던 졸부 컬렉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전처럼 화려하고 값비싼 물품들은 이제 없다. 하지만 저택은 달리아의 성정처럼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고 단정한 분위기로 재탄생했다.

그러니까 나딘과 달리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면 딱 그때쯤이었을 테다.

“내가 너무 무심했나 봐요. 저 두 사람의 일은 둘한테 맡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이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방심했다. 무려 원작의 ‘영향력’이 밀어붙일 만큼 공인된 커플이 아닌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맺어질 줄 알았다.

“…….”

바로 곁에서 속도를 맞추어 걷던 테고의 걸음이 멈췄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제게로 돌려세웠다.

“솔직히 말해서 말입니다.”

“……테고 경?”

“평소와 크게 다른 점은 못 느꼈습니다. 늘 저런 식이었으니까요.”

“네? 하지만 아까 분명히 달리아 영애가 손도 피하고, 서로 부르는 호칭까지…….”

“저 둘 사이엔 호칭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마치 예전의 우리처럼 말입니다.”

“엥?”

이번에는 아이네의 얼굴 위로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끝내 고개를 갸웃거리는 자그마한 머리를 내려다보던 테고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남매가 무섭도록 똑같군요.”

그러고는 다시 아이네의 양쪽 어깨에 손을 올려 앞을 향하게 했다. 천천히 다이닝룸을 향해 밀면서 이번에는 테고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아까 마차에서 에펜베르크 영애가 했던 말을 잘 떠올려 보십시오.”

* * *

다이닝룸에서의 늦은 저녁식사는 오늘따라 적막만이 맴돌았다. 보통 대화를 주도하던 아이네와 나딘이 나란히 입을 다문 탓이다.

“…….”

아이네는 거의 기계적으로 잘게 썰린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대신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니까 아까 마차 안에서 달리아가 했던 말의 요지는 이랬다.

-어리다고 해서 무조건 보호해줘야 할 만큼 세상 물정에 어둡지 않다. 대신 조금 더 자신의 선택을 믿어줬으면 좋겠다.

‘나딘이 오지랖이 좀 넓긴 해도 달리아 영애를 막 무시하고 그러는 타입은 아닌데…….’

지금 상황만 봐도 그랬다.

나딘은 포크와 나이프를 연신 쥐었다 놓기만 반복했다. 평소처럼 달리아의 스테이크를 썰어주겠다는 걸 거절당해서인지 잔뜩 당황한 기색으로.

물론 설마하니 이걸 두고 말한 건 아닐 테다.

아이네가 바로 곁에 앉은 테고를 힐끔거렸다. 그러다가 이미 그녀를 주시하던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했다.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윽…….’

찔끔한 아이네가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테고는 칼로 잰 듯 완벽한 예법으로 벌써 상당량의 오징어 스테이크를 해치운 후다.

결국 어색한 침묵을 참지 못한 아이네가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하, 하핫. 이제 달리아 영애의 생일이 한 달도 안 남았네요. 혹시 생일 선물로 뭔가 갖고 싶은 게 있나요?”

“……괜찮아요. 그동안 공녀님과 공자님께 받은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걸요.”

달리아의 입가에 금방이라도 아스라이 사라질 것처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수확제 기간 마지막 날과 겹치거든요. 올해는 특히 규모가 클 예정이라 다들 정신없으실 거예요. 저도 그렇고요.”

“그래도 달리아 영애의 성년이잖아요. 인생에 한 번뿐인 날인데…….”

아이네가 말끝을 흐리며 나딘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뭐 하는 거야! 약혼자의 성년은 오빠가 먼저 챙겨야지. 심지어 벌써 한참 전에 달리아의 생일선물을 디도 상단에 주문해놓은 거 다 알고 있다고!

그러나 나딘은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보였다. 오늘만 벌써 두 번이나 달리아에게 거절당한 참이니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하지만 굳이 챙기지 않아도 날짜만 넘기면 저절로 성년이 되는 되니까요. 정 그러시면 수확제를 무사히 마친 후에 저택에 한번 놀러 오시겠어요?”

“그, 그럴까요. 그럼.”

아이네는 분위기 전환에 실패했다. 거기다 누가 보아도 티가 날 정도로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테고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리고…… 돌아가기 전에 오랜만에 아이네와 함께 정원이라도 좀 둘러보려 합니다.”

“잉?”

이렇게 갑자기? 꽁꽁 얼어붙다 못해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두 사람은 내버려 두고?

“자, 잠깐. 테고 경. 이렇게 늦은 시간에…….”

“미래를 약속한 사이에 약혼자의 응접실이 아니라 정원 산책 정도면 충분히 건전하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나딘이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테고가 아이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뒤이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어서 잡으라는 듯 턱짓을 했다.

“어차피 우리가 여기서 더 할 일은 없습니다. 그럴 바에는 둘만 있도록 두는 편이 더 나을 텐데요.”

“테고!”

아이네가 화들짝 놀라 따라 일어섰다. 그러고는 서둘러 그를 다이닝룸 바깥을 향해 밀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으응?”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말해버리면 어떡해! 그새 지옥의 주둥아리 케이어드 대공한테 옮기라도 한 거야?

하지만 테고의 말대로였다. 그들이 자리를 비켜주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인 듯했다.

“아, 아무튼 우리는 나가볼 테니 오빠랑 달리아는 잘 이야기해봐!”

“아이네!”

가까스로 다이닝룸을 빠져나오자마자 아이네가 테고의 팔을 콩콩 두들겼다. 그래봤자 그에게는 지극히 미약한 수준이었지만.

“어휴! 내가 못 살아, 진짜. 요즘 들어 나딘한테 너무 심술부리는 거 아니에요? 아까부터 이상한 도발이나 하고.”

묵묵히 듣고 있던 테고가 미간을 조금 좁혔다. 그러다 아이네의 머리 위 다이닝룸의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도발 같은 거 한 적 없습니다.”

“네?”

“전부 진심인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이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깜박이기만 했다. 제 얼굴 위로 천천히 드리우는 테고의 그림자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

“무려 보름입니다. 우리가 못 만난 게.”

“아…….”

그제야 테고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뺨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떨어져 있는 동안 계속 아이네 생각만 했습니다.”

“어, 어어. 아으. 그, 그러니까…….”

아이네가 막 ‘나도요’라는 말을 내뱉으려던 참이었다. 그때, 미처 닫지 못한 문틈으로 달리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좋아해요, 나딘 님.”

다이닝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아이네와 테고의 몸이 흠칫, 하고 굳었다. 뒤이어 잔뜩 당황한 나딘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니, 잠깐. 달리아.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당신이 좀 더 나이를 먹고, 후작위도 승계한 후에 하기로…….”

달리아가 내쉬는 깊은 한숨 소리가 바깥까지 새어 나올 정도였다.

“후, 매번 그 소리시네요.”

이제는 포기했다는 듯 차갑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에 나딘이 움찔했다.

“저와의 약혼을 받아들이신 건 분명히 제 일가친척들 때문이라고 하셨죠?”

“……달리아.”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감지한 나딘이 그녀에게로 다가서려던 때였다. 마치 그 접근을 막기라도 하는 것처럼 달리아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약혼을 유지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거군요.”

목소리만큼이나 쓸쓸한 표정에 나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공자님도 결혼은 정말로 좋아하는 분과 하고 싶으실 테고요.”

“…….”

이상했다. 나딘은 입이 딱 달라붙기라도 한 듯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동정심이라면…… 이제는 됐어요.”

달리아가 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녀의 목소리엔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한 물기가 어려있었다. 동시에 단호한 어조도 함께.

“우리, 계약 약혼 같은 건 이제 그만 끝내요.”

‘뭐? 약혼을 끝내?’

아이네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러고는 곧장 테고를 바라보았다.

내,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그래, 오랜만에 본 테고가 너무 저돌적으로 나오니까 당황해서 그런 거…….

“…….”

아니었나 보다. 팔짱을 낀 테고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굽혔던 허리도 어느새 꼿꼿하게 세워진 지 오래.

아이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테고를 흔들었다. 당장이라도 다이닝룸 안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방금 들었어요? 말려야 돼요. 이러다가 혹시 미래 이야기가 또 틀어지기라도 하면……. 앗!”

그러나 다음 순간, 이미 아이네의 몸은 테고에게 달랑 들린 채였다. 그들은 벌써 2층 층계를 오르는 중이었다.

도대체 언제? 아니, 왜 벌써 내 방 앞인 건데!

“테고?”

“쉿.”

뒤이어 아이네를 한 손으로 가뿐하게 고쳐 안은 테고가 문고리를 잡았다. 물론 막 문을 열기 직전 그는 단정한 목소리로 허락을 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대로 아이네의 응접실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바깥에서 계속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으니까요.”

“아……. 네에.”

이번에도 아이네는 바짝 다가온 잘생긴 얼굴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잠깐! 잠깐만!

“왜 이쪽으로 온 거예요.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파혼하지 않게 잘 이야기를 해야죠!”

아이네에게서 응접실 문을 등지고 선 테고가 입을 열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말입니다. 누가 도와주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일은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애초에 공자가 에펜베르크 영애를 여자로 보질 않는데,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묘하게 자조적인 음성이었다. 그러자 아이네가 테고에게 바짝 붙으며 올려다보았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맑고 청명한 하늘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렸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를 사로잡았던 그 눈이었다.

“나, 난 알아요. 솔직히 나딘이 성가시고, 오지랖도 넓고, 가끔은 짜증 나는 데다가 꽉 막히긴 했지만요…….”

평소처럼 익숙하게 나딘의 흉을 보던 아이네가 잠시 멈칫했다. 이윽고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달리아 영애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고요! 베룸에 있을 때 다른 영애들한테는 절대 안 저랬어요.”

아주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어쩐지 그녀의 마음에 닿기 위해 한창 애쓰던 자신에게 말해주는 것처럼.

테고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달리아의 파혼 선언 이후, 시종일관 굳어있던 입매도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후,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매번 나에게 공자 욕만 할 때는 언제고.”

허탈함까지 묻어나는 그의 태도에 아이네가 다시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어쩐지 그녀가 귀엽다고 했던 최상급 마물인 다람쥐라는 것과 꽤 닮아 보였다.

이번에는 테고의 깊고 푸른 바다 같은 눈동자가 아이네에게로 향했다.

“이래도 공자와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한 겁니까?”

“네?”

“아이네가 이전에 걱정하던 것 말입니다.”

새파란 눈동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테고만 바라보던 아이네가 두 눈을 깜박였다.

‘테고 경. 나, 나 어떡하죠? 만약에요. 만약에 가족들이 다 알게 되면…….’

“아!”

“아마 나는 예전부터 부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테고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제 턱을 가만히 쓸었다.

“보통의 허물없는 남매 사이란 저런 모습이겠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미안해요. 테고, 나는…….”

아이네의 눈가가 금세 발긋하게 물들었다. 그러고 보니 예쁜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조차 제게 특별했는데.

피식 웃으며 테고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가만히 넘겨주었다. 이제는 목소리와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레 라니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었으니까.

“왜 나한테 미안해하는 겁니까. 사실 보통 귀족 남매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뒤이어 테고의 애정 어린 시선이 그녀에게로 가닿았다.

“아마 공자도 아이네가 동생이라 가능했던 걸지도 모르지요. 그보다는…….”

어느새 발그레해진 뺨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제대로 의식하고 반응하는 아이네를 볼 때면 가슴속 깊숙이 충족감이 차올랐다.

“그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압니까?”

결국 테고는 참지 못하고 하얀 볼을 살짝 꼬집었다. 손에 잡히는 말랑한 감각이 더없이 기꺼웠다.

“흡. 으음?”

“나도 당신의 가족이 되고 싶다고요.”

“…….”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아이네는 한껏 숨을 참았다. 새어 나오려던 눈물은 어느새 쏙 기어들어간 지 오래였다. 지금처럼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한 미성이 언제나 그녀를 설레게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그래서 폐하가 제안하셨을 때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걸지도 모릅니다. 당신과 결혼하면 진짜로 가족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아…….”

그 말에 기껏 멎었던 물기가 아이네의 눈가에 다시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테고의 어깨에 두 팔로 매달렸다.

“내가…… 내가 테고의 가족이 되어줄게요! 나딘도, 우리 부모님도 전부!”

“네.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아이네는 끝내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자신을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테고에게 훌쩍이며 덧붙였다.

“흡. 사실 나딘이랑 달리아 영애가 잘 되면 우리한테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솔직히 오빠가 연애라도 하면 우릴 덜 방해할 테니까요.”

“그건…… 확실히 중요한 일이군요.”

그 말에 테고의 얼굴엔 삽시간에 진중한 빛이 어렸다.

‘……썩 내키진 않지만, 그럼 조금 도와줘 볼까.’

* * *

다음 날, 테고가 불러낸 장소로 나딘이 도착했다.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 두리번거리던 나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나저나 어제 아이네 눈이 빨갛던데…….”

따지려는 듯한 그의 말을 테고가 자르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파혼할 겁니까?”

“그, 아니. 저기……!”

나딘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테고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공자도 귀가 있으니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에펜베르크 후작가의 영지와 작위를 계승받을 유일한 직계. 거기다가 이젠 참견할 방계 어른도 없으니…….”

“잠깐! 잠깐, 잠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도 이번에 큰 공을 세워 황실과 고위 귀족가와 인연도 돈독한 영애이니 원래대로라면 온갖 혼담이 빗발치듯 쏟아졌을 겁니다.”

“…….”

나딘이 슬며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둘만 있을 때의 일을 어떻게 벌써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테고의 말대로였다.

결국 어제는 변변한 대답이나 반응도 하지 못하고 달리아를 보내고 말았다.

“하지만 그게 영애의 선택이라면…….”

“내가 보기에 기껏 용기를 낸 영애의 선택을 번번이 무시하는 건 공자 쪽인 것 같던데요.”

“무시라니요…….”

나딘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차라리 영애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 편이 마음 정리하기엔 수월할 테고요. 그래야 에펜베르크 영애도 미련 없이 다른 남자와 새로운 시작을 할 것 아닙니까.”

순간, 나딘은 충격받은 눈을 했다. 테고의 시선이 흘깃 그를 훑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동공을 보니 지금껏 이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제길,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비슷한 머리 색에, 물기로 반짝이는 눈동자까지.

흡사 아이네를 생각나게 하는 나딘의 얼굴에 테고는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누그러진 음성이 나왔다.

“공자가 뭘 걱정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늘 물러서기만 하는 상대를 알면서도 고백할 용기를 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

나딘은 그의 말에 침묵했다. 그러다 곧 단단해진 눈빛을 내보였다. 다행히도 오빠 쪽은 고민이 길진 않았나 보다.

“어쩌면……. 어리다는 이유로 달리아를 제대로 보아주지 않던 건 나였는지도 모르겠네요.”

나딘의 입에서 커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고는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테고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테고 경도 우리 아이네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었을 테니까요.”

“…….”

뜻밖의 역공이었다. 이번에는 테고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래도 결혼할 때까지 통금 시간은 꼭 지켜서 보내주셔야 합니다. 아,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밀폐된 공간에 너무 오랜 시간 둘만 있는 건 자제해주시고요.”

그럼 그렇지.

……이 동생 바보 오빠에게는 효과가 미미했던 모양이다. 테고는 나지막이 한숨을 삼켰다.

‘굳이 이렇게 단속하지 않아도 어차피 때가 될 때까지는…….’

사실 그렇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별다른 장애물이 없는 나딘 쪽이 오히려 속 편해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어쩐지 후련해진 얼굴로 나딘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테고는 떨떠름하게 맞잡았다. 나딘이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난 언제나 아이네의 편이고, 그건 변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이네가 택한 남자가 당신이라서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뒤이어 테고는 자신을 잡은 나딘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우리 아이네를 잘, 잘 부탁……. 윽, 역시 아직은 안 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나딘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더니 결국 인사도 없이 먼저 자리를 뜨고 말았다.

“하…….”

왜 항상 일이 이렇게 되는 걸까.

테고는 그 뒷모습을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내동댕이쳐진 제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게 왜 하필 아이네와 꼭 닮은 얼굴에 비슷한 표정이어서는…….

테고의 얼굴 위로 마뜩잖다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그는 맞잡았던 손을 바지 위로 아무렇게나 슥슥 문질러 닦았다.

“그러니까 왜 결론이 공자와 영애의 뒤나 따라다니는 쪽으로 난 겁니까.”

“쉬잇!”

불만 어린 목소리로 테고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이네는 돌아보며 그의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

테고의 입가가 애매하게 굳었다. 기둥 뒤로 한껏 몸을 굽혀 숨기고 있던 자세 때문에 서로의 몸이 너무 가까이 닿은 탓이다.

“달리아 영애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세상에, 그 사이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길래.”

작은 손에 입이 막힌 채로 테고의 시선이 앞쪽으로 향했다.

에펜베르크 영애의 얼굴이라……. 며칠 전에 봤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 무언가가 달라졌어도 알아채지 못했을 테다. 애초에 다른 여자들의 얼굴 따위 그다지 자세히 본 적이 없으니까.

그보다는,

“어때요? 테고가 보기에도 그렇죠? 어쩐지 오늘따라 더 심하게 수군대는 거 같기도 하고. 설마 아직 다 사라진 게 아니었나?”

걱정으로 잔뜩 물든 아이네의 얼굴이 더 신경 쓰인다고 대답하면…….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며 펄펄 뛰겠지.’

하지만 그러면서 양 볼을 발그레 물들인 모습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

제정신이 아니군.

테고가 깊은 한숨을 삼키며 가까스로 생각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나름대로 신경 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그래, 어차피 이대로라면 단둘만의 데이트는 물 건너갈 게 뻔하다. 차라리 이번엔 과감하게 포기하고, 나딘과 달리아를 도와주는 편이 낫다.

그가 제 얼굴에 닿아있던 손을 깍지 끼듯 잡아 내리며 아이네를 불렀다.

“아이네.”

마주한 눈동자 속 새파란 불길이 넘실대듯 일렁였다. 그리고 영지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며 함께하길 기대했던 머릿속 수확제 행사에 검은 줄이 죽- 그어졌다.

“그럼 저 둘을 좀 더 도와주길 원하는 겁니까?”

“네? 아니. ……네에.”

그제서야 테고를 의식한 그녀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단단하게 얽힌 손가락은 힘을 주어도 빠지지가 않았다. 화……났으려나.

‘참, 장미 온실 꾸미는 것만 마치고 나면 남은 시간은 둘이 보내기로 했었는데.’

그렇지만 여기저기서 들리는 속닥거림은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이네는 이미 겪어본 적 있지 않던가. 물론 그때는 나딘과 이어주기 위함이었으니 지금은 그놈의 영향력 탓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아는데도.

달리아가 홀로 고통받던 것만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찌할 줄 몰라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렸다.

“좋습니다.”

테고가 그녀에게 맞춰 굽혔던 허리를 폈다. 아이네의 시선도 자연스레 위를 향해 따라갔다.

“어찌 됐든 오늘 일은 내 제안으로 시작했으니 어떤 형태로든 끝을 봐야겠지요. 대신…….”

“앗!”

아까부터 꽉 맞잡고 있던 손을 이번엔 테고가 제 입 가까이 붙였다. 손등 위를 간지럽히는 숨결 때문에 아이네는 어깨를 움츠렸다.

대, 대신 뭘…….

‘진정해, 아이네. 이제 기대 안 하기로 했잖아. 어차피 테고는 입술 아래로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할 게 뻔한데!’

하지만 그런 건전함의 정석 같은 멘트와 다르게 종종 테고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 분위기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마치 한 방울이라도 더 떨어뜨리면 넘쳐버릴 듯 아슬아슬하게 가득 찬 물잔?

확실한 건 자신이 그에게 스스럼없이 달라붙을 때와 다른 느낌이라는 거다.

‘그래! 이 정도쯤 됐으면 우리가 수위 좀 높여도 되지. 이제 날 그만 아끼라고!’

아이네가 결연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테고는 결국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짧은 시간 동안 무얼 생각하고 결심까지 했는지 빤히 보였다. 굳이 귀로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작고 보드라운 손등을 제 볼 위로 꾹 누르듯 비비며 치솟는 격정을 억눌렀다. 매번 이런 반응을 보여주니 어설픈 도발을 해서라도 제게 시선을 매어두고 싶어진다.

‘가끔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날 그저 친한 친구쯤으로 여길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마음에 전혀 없는 말도 아니고.

“수확제의 마지막 춤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 안 할 겁니다. 그 이후의 시간도 마찬가지고요.”

“엥?”

아이네의 입에서 김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떠올렸던 갖가지 상상에 턱없이 모자란 요구였다.

“에이, 당연히 내 춤은 테고한테 우선권이 있죠! 약속할게요!”

약속한다는 말을 또 저리 쉽게…….

테고는 무어라 잔소리를 하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낮게 읊조리며 볼에 가져다 대었던 손을 더욱 끌어당겼다.

“춤이 아니라 ‘이후의 시간’을 궁금해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마지막 춤까지 추고 나면 오빠가 또 통금 시간이라고 난리칠 거고…….”

“그러니 아이네가 책임져야지요.”

테고가 보드라운 손등 위로 깊게 입술을 내리눌렀다. 동시에 아이네를 향해 눈을 치켜뜨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 얼굴에 한없이 약한 그녀가 가장 어찌할 바 몰라 하는 각도였으니까.

“오늘 우리가 준비해둔 일이 성공하게 된다면 말입니다. 아무리 공자라 해도 아이네의 통금 시간까지 챙기진 못할 텐데요.”

“……!”

아이네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진짜 오늘이야? 아니지, 또 속냐. 아이네!

하지만 책임이라잖아. 그리고 원래 수확제는 마지막 춤을 춘 커플들이 함께 사라지는 엔딩이 정석인데…….

설마?

“그동안 온실을 꾸미느라 같이 보내지 못한 시간만큼 돌려받을 겁니다.”

“그, 그럼 오늘은 리테루온 공작저에서 머물고 간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넣을까요?”

“…….”

아이네가 두 볼을 붉게 물들인 채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반짝거리는 커다란 눈동자엔 테고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끝내 테고는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운한 마음에 도발해본 제 잘못이다.

“어떻게 바로 외박하겠다는 말로 이어지는 겁니까.”

“뭐야. 이번에도 그냥 데이트인 거예요? 난 또.”

아이네가 입술을 쭉 내밀며 어깨를 으쓱였다. 테고는 기가 막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랬다간 공자고 에펜베르크 영애고 날 죽이려 들 겁니다.”

“하긴, 그렇죠? 그런데 오빠는 그렇다 쳐도…… 달리아 영애가요?”

“…….”

이제는 좀 알 때도 되지 않았나. 주위의 모든 이들이 그녀를 얼마나 감싸고도는지 말이다.

테고는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세계라는 곳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는 자신이 아닐까.

* * *

“달리아. 잠시 실례할게요.”

광장에서 열렸던 연극무대의 막이 내렸다. 자리를 떠나려는 인파 때문에 나딘이 그녀의 손을 제 팔 위로 얹었다.

그러고는 옆에 선 달리아를 연신 힐끔거렸다. 오랜만에 만났다는 반가움도 잠시, 눈에 띄게 핼쑥해진 그녀의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이런 식으로 소문이 도는 줄 알았으면 진작…….’

테고와의 대화로 마음을 정한 후, 나딘은 달리아에게 서신을 보냈다. 수확제의 마지막 날 축제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제국의 수확제는 기본적으로 귀족들을 위한 행사가 아니었다. 한 해 동안 식량 생산에 전념한 제국민들을 위로하고 치하하기 위한 지역 축제에 가까웠다.

황실과 각 영지에서는 축제 비용을 지원하고, 치안에 힘쓸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따로 정해진 무도회나 행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황도 중심가의 축제엔 단출하게 입은 귀족들이 참가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을 알아본 자들의 수군거림이 그대로 들려왔다.

“저기 좀 보세요. 베룸 공자님과 에펜베르크 영애는 곧 파혼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게. 내가 듣기로는 영애가 성년이 될 때까지만 유지하기로 한 약혼이라던데?”

“그렇죠? 제 친척이 궁에서 근무하는데, 둘이 따로 만나는 건 본 적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나딘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 사실에 근거한 소문이라는 점이 더 뼈아팠다.

‘내 나름대로는 달리아를 존중하려는 의도였는데.’

황도의 사교계를 너무 우습게 본 거다. 자신이 제국에 셋밖에 없는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것까지.

무언가를 해도, 하지 않아도 그 의도가 주목받는 위치였다. 여러모로 베룸 영지에서와 사정이 달랐다.

이래서야 달리아에게 나이를 이유로 미숙한 선택을 운운하기도 민망했다.

그때, 자책감에 아랫입술만 깨무는 나딘에게 달리아가 말을 건넸다. 먼저 파혼하자고 해놓고 그의 서신을 거절하지 않은 건 이유가 있었다.

딱 한 번만. 오늘 한 번만 더 확인해보고 싶었으니까.

“사실…… 저한테 만남을 청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날 제가 그렇게 말해서…….”

“오늘은 달리아의 생일이니까요. 저번에 약속했잖습니까. 꼭 축하해주겠다고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제법 단호했다. 거기다 달리아를 에스코트하는 팔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그녀는 잔뜩 눌러두었던 기대가 다시 고개를 드는 걸 느꼈다.

오랜만에 봐서일까. 아니면 지난번 파혼하자는 말에 혹시……. 하지만 이제 이런 희망고문은 진작 끝내기로 했는데.

요 며칠간 그랬듯 또 마음이 지독하게 술렁였다. 뭐라도 다른 화제로 돌려야 했다.

“그런데 공녀님은…….”

“아이네는 테고와 함께 있을 겁니다. 그보다 달리아.”

“네?”

나딘이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그녀와 마주 보았다. 달리아의 다갈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미안했습니다, 지금껏.”

아……. 역시 그런 거였나. 확실하게 거절하려고? 그렇다면 굳이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늘 성년이 되었으니 이제 자신도 스스로 파혼을 결정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내 생일이잖아.’

달리아는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으려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바람에 긴장한 낯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나딘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제 거의 시간이……. 딱 1분만 여기서 기다려요.”

그러면서 나딘은 달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문관답지 않게 꽤 탄탄했던 팔과 온기가 떨어져 나가자 달리아는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가슴이 아프게 죄어들고 귀가 먹먹해졌다.

“나 참, 준비가 다 됐는지 말해주기로 했는데.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당연하게도 그 뒤에 이어진 나딘의 중얼거림은 그녀의 귀에 닿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쥔 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그때였다.

“달리아 에펜베르크. 후, 겨우 찾았네. 이 쥐새끼 같은 계집애가…….”

누군가 우악스레 달리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달리아가 고개를 들어 눈앞에 나타난 남자를 확인했다. 충격으로 홉뜬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게 아버지와 오라비가 잡혀 들어간 후, 한동안 들을 일 없었던 폭언이었다.

“너, 이 배은망덕한 년. 집안을 말아먹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제 아비랑 오라비까지 감옥에 보내?”

“세, 세드릭?”

그녀의 먼 방계 일족인 남자였다. 한때 오라비와 유흥을 즐기며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곤 했었다.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기에 크게 문제를 일으키고 잠적했겠거니 했다.

“내가 네 오라비 때문에 영지 밖에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흰자위가 온통 벌겋게 물든 남자의 얼굴엔 광기가 번들거렸다. 누가 보아도 제정신이 아닌 험악한 꼴이었다.

“하씨,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 새끼가 후작이 되면 좋은 자리 준다고 해서 내가 죄다 뒤집어쓴 건데.”

달리아는 기가 막혔다. 그가 제 오라비를 믿고 얼마나 악독하게 영지민들을 괴롭혔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 뒤집어쓴 건 아니잖아요! 같이 해놓고.”

“이게 어릴 때는 고분고분하더니, 어디서 말대꾸야? 뭐, 잘됐네. 어차피 너랑 결혼하면 내가 후작이 될 테니까. 네 오라비가 널 주겠다고 각서까지 썼어.”

“돌았어요? 그땐 그랬다고 해도 난 이제 약혼자도 있어요.”

……이럴 줄 알았다.

달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제 오라비가 사고를 칠 때마다 자신을 넘기겠다고 각서를 써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마 나딘과 약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세드릭 같은 남자에게 진작 끌려가고도 남았을 테다. 가문의 후계자가 공증한 각서는 그 정도의 효력이 있으니까.

그때,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비열하게 웃었다.

“뭐라는 거야, 이게. 듣자 하니 곧 파혼할 거라면서?”

달리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알고는 있었다. 그녀가 후작위를 승계하게 될 거란 사실에 불만을 품은 방계 일족들이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는 걸.

가족인 후작과 소후작이 달리아를 팔아넘길 도구 정도로 여기니 방계 친척들도 그녀를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그리고……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사실이 하나 있었다. 달리아가 오늘로 성년을 맞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 각서를 가지고 탄원하기 전에 어떻게든 새로운 약혼자를 찾으면 된다. 그것도 이번에는 나딘처럼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라…….

“읏.”

순간 가슴이 지끈거리는 느낌에 달리아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황도에서 소문이 자자한 미인이라더니 그 말이 맞긴 맞네. 제법 쓸 만하게 자랐어.”

세드릭이 눈을 희번덕이며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러고는 꾸깃꾸깃해진 종이를 눈앞으로 내밀었다.

“잘 봐. 내가 그 각서 찾아오느라 이렇게…… 악!”

그때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달리아를 잡고 있던 남자의 팔이 등 뒤로 비틀려 올라갔다. 뒤이어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세드릭 허드슨. 에펜베르크 가문의 방계이자 지명수배자군요. 3년 전 영지민 살인미수 1건, 위조화폐 제조와 제국에서 금지한 노예 거래를 위한 인신매매에 그 외에도 셀 수 없는 혐의가 있던데……. 꼴을 보니 지금도 약에 절어 있는 것 같고.”

나딘이었다. 대략적인 특징만으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듯 남자에 대해 줄줄 읊어댔다.

“으윽, 악! 이거 놔! 안 놔?”

테고만큼은 아니어도 나딘 역시 신체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러니 술과 약물에 찌든 남자 정도는 간단하게 제압하고도 남았다.

“쫓기는 처지면서 어딜 겁도 없이 황도까지. 괜찮습니까? ……달리아?”

한심하다는 기색을 지우지 못한 나딘이 그제야 달리아를 살폈다. 그리고 발견했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와 여전히 눈꼬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을.

“…….”

거기까지 확인한 나딘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저 쥐고 있을 뿐이었던 세드릭의 팔을 으스러지듯 비틀었다.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뒤이어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컥, 캑!”

어찌나 세게 잡혔는지 남자가 목이 졸린 소리를 냈다. 하지만 분노로 눈앞이 새빨갛게 변한 나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드릭이란 남자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이제는 숫제 숨이 넘어갈 듯했다. 하지만 완전히 이성을 잃은 나딘을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 잠깐만요. 나딘 공자님!”

달리아가 다급하게 그의 팔에 매달릴 때까지는.

* * *

“아론, 당장 이놈을 경비대에 넘기세요. 그리고 경호 소홀의 문제는…….”

나딘이 싸늘한 얼굴로 누군가를 응시했다. 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던 도련님의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돌아가서 철저하게 물을 겁니다.”

“네, 네넵. 끅.”

아론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 *

두 사람의 인영이 작은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딘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내내 잡고 있던 달리아의 손을 놓아주며 반대쪽 손목으로 시선을 내렸다.

가느다란 손목에 빨갛게 자국이 남아있다. 그러자 다시 한번 화가 치솟았다.

“손목이……. 이 자식을 그냥!”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뒤로 감추었다. 뒤늦게 펜촉에 긁히고 지워지지 않은 잉크 자국으로 얼룩덜룩한 손끝에 생각이 미쳤다.

“괘, 괜찮아요. 하룻밤 자고 나면 멀쩡해질 거예요.”

엉망일 게 분명했다. 요즘 심란해서 업무에만 몰두했더니…….

‘공자님은 다른 남자들처럼 그런 걸 신경 쓰시지 않는단 것도 잘 알지만.’

평생 예쁜 외모만이 제 존재 이유라고 주입당했던 기억은 쉽사리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때, 나딘이 나직한 목소리로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달리아가 숨긴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이 예쁜 손을 왜 숨깁니까.”

결국 달리아는 나딘에게 제 손을 내주고 말았다. 포근하고 다정한 온기가 손끝을 어루만지자 다시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싫어요.”

“예?”

“이런 식은…… 이제 싫어요.”

달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결국 그녀의 예쁜 아몬드형 눈에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말았다.

“자꾸 이러지 말아요. 기대하게 하지 마세요.”

“달리아?”

“이번에도 제 마음은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실 거잖아요. 차라리, 차라리……!”

울먹이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삼킨 달리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대로 거절해주세요. 그러면 나딘 님을 빨리 포기하고 잊을 수 있을 테니까요.”

나딘이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니, 여기로 그녀를 데려온 이유는 그래서가 아닌데……. 역시 지금껏 자신이 잘못 생각했던 거다.

당황했던 표정이 싹 지워진 얼굴은 진지했다. 여태껏 그녀에게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달리아는 가슴이 저릿했다.

어떤 상황이든 한구석에는 남아있던 다정함이 온데간데없는데도.

하지만 이어진 말에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어야만 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딘이 계속 쓰다듬고 있던 그녀의 손을 포개어 잡았다. 모진 말을 각오하고 있던 달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네?”

“잠깐, 잠깐! 일단 들어봐요. 달리아한테 사과할 게 있으니까.”

놀라서일까. 계속 맺혀 있기만 하던 눈물방울이 기어코 뺨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나딘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눈가를 닦아주었다.

“지난번에 내가 잘난 척하듯 했던 말, 그것부터 사과하고 싶어서요.”

“어떤…….”

나딘이 민망한 듯 눈을 굴리다가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 목소리를 냈다.

“당신에겐 내가 단순히 동정심만으로 약혼할 남자로 보였습니까.”

“당신은 아직 어려요. 겉모습이 어른과 비슷하다고 성인이 아닙니다. 충분히 많은 선택지를 알고 고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영애의 의지로 선택을 하세요.”

그제야 무슨 이야기인지 깨달은 달리아의 얼굴 위로 천천히 붉은 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 그럼…… 공녀님이 워낙 절 좋게 봐주시니까?”

“미안하지만 달리아가 아이네의 친구라서도 아닙니다.”

나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뒤이어 손가락을 맞부딪쳐 딱,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어둑어둑한 정원에 불이 하나둘씩 켜졌다.

“아? 이건…….”

“솔직하게 말해서 이건 아이네와 테고 경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작은 빛을 품은 장미꽃이 그들이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하나씩 피어났다.

이미 가을로 접어든 계절이었다. 늦여름에 피는 장미가 있을 리 없었다. 달리아가 가장 근처에 있는 장미를 보고 두 눈을 깜박였다.

“이게 뭐예요? 유리도, 보석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테고 경의 말로는 마정석 연성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라고 하더군요. 장미 모양처럼 조각해서 안에 작은 조명을 넣은 겁니다.”

“예뻐요.”

달리아는 홀린 듯 장미꽃 조각들을 응시했다. 그러다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왜 이걸 보여주시는 거죠?”

“달리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은 역시 장미니까요.”

나딘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어느새, 빛나는 장미로 작은 온실이 가득 찼다.

“성년이 된 걸 축하합니다.”

“아!”

달리아는 잠시 숨 쉬는 걸 잊었다. 그녀가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고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좋아해요, 달리아.”

지독하게 달콤한 목소리에 이번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달리아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입만 뻐끔거렸다.

이런 건 진작에 포기한 지 오래였는데…….

나딘의 하늘색 눈동자가 조금 짙어졌다.

“그때 했던 말과 모순된다는 것 압니다. 물론 당신이 정말 나와 결혼을 하고 싶은지 당장 답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난…… 기다릴 겁니다. 달리아가 충분히 생각해서 선택할 시간까지요.”

“공자님…….”

“하지만 지금처럼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나딘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췄다. 그리고 품 안에 소중하게 지니고 있던 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들어있던 목걸이와 팔찌가 영롱한 빛을 내뿜었다. 언뜻 보아도 섬세하게 세공된 커다랗고 새빨간 루비가 박힌 최고급품이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나딘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 다음은…… 지난 한 달간 여러 번 생각하고 연습했던 말이었다.

“언젠가, 언젠가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케이스를 쥔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헛웃음을 내뱉은 나딘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하, 생각보다 더 떨리네요. 달리아는 매번 이런 걸 이겨냈던 거군요.”

달리아의 눈가가 다시금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는 들뜬 목소리와 함께 나딘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절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좋아요! 전, 저는 좋아요. 내일이라도 결혼할 수 있어요!”

“아니! 지금 말고 말입니다.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세요.”

나딘이 가까스로 그들의 입술 사이를 손바닥으로 막아냈다. 종종 그녀가 저돌적으로 굴었다는 걸 알기에 망정이지, 꼼짝없이 응할 뻔했다.

“역시…… 아직 안 되나요?”

“이런 건 좀 더 시간이 지난 후가 좋겠네요.”

대신 나딘은 달리아의 양쪽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차마 그녀가 안겨오는 것까지 거부하진 못했다.

나딘의 손이 어색하게 달리아의 등을 다독거렸다. 그러나 달리아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이미 대강의 계산을 끝낸 뒤였다.

‘틀렸어요. 나딘 님.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이젠 폐하께서 기다리지 않으실 거예요.’

아까의 소동 때문에 아마 내일이면 삽시간에 역전된 소문이 황도에 퍼질 게 분명했다. 귀족들뿐 아니라 평민들도 모여 있는 광장에서 모두가 보았을 테니까.

달리아가 알기로 황제는 이런 기회를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알고 나딘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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