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황제와의 대화를 마친 리아는 편안해진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리아가 쉴 틈도 없이 기사 한명이 그녀를 찾아왔다. 뛰어난 미남이긴 했지만, 융통성 없어 보이는 그 무뚝뚝한 모습이 결코 좋은 의도로 자신을 찾아온 것 같지 않았다.
"운이 좋아 이번만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분명 기억하고 있습니다."
"뭘요?"
어쩐지 그가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 단순히 자신이 황제를 때린 것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아 리아가 물었다.
"그동안 황후마마께서 벌이신 일들을요. 폐하께서도 기억을 찾으신다면, 결코 황후마마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황후를 대하는 것치곤 무례한 행동이지만, 기사에게 중요한 것은 황제였지, 황후가 아니었다.
그것도 틈만 나면 패악을 부리는 황후라면 더더욱.
기사의 으름장에도 리아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에게 황제가 쓴 각서가 있었으므로.
그가 기억을 찾아도, 적어도 이번일로 인한 벌은 없을 터였다.
황제가 정신을 차린 후 리아는 본격적으로 황성 내의 자신의 위치와 상황에 대해 알아내기 시작했다.
무릇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이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해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 노력으로 리아는 자신을 찾아와 엄포를 했던 기사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름이 바론이던가.
황실 친위대 대장인 그는 황제밖에 모르는 황제바라기였다.
우연한 기회로 뒷골목의 고아였던 남자는 황제에게 주워졌고, 검술을 배우며 기사가 되었다. 기사가 된 그는 현재 황제의 직속 호위로서, 황제가 가장 믿고 있는 이였다.
그 누구보다 황제를 많이 따랐으며, 황제 외에는 그 누구에도 굽히지 않았다. 융통성이 없는 성격이기도 했고,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로인해 다른 기사들에게 무시도 받았지만, 그 뛰어난 실력으로 그러한 불만을 일축한 실력 있는 기사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그가 어째서 자신을 싫어하는지 알것도 같았다. 자신의 귀한 주군을 때린것뿐 아니라,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했으니. 그전에도 그가 싫어할만한짓을 골라서 했고.
특히나 황제에게 가장 큰 걸림돌인 귀족파 수장의 딸이기도 했으니, 그의 기준에서 자신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
어차피 그가 자신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별 관심없는 리아로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황제의 존재였다.
첫날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던 황제의 태도는 다음날에도 변함이 없었다. 변함이 없다뿐 아니라, 자꾸만 자신에게 엉겨붙어 귀찮을 정도였다.
원래도 황제에게 관심이 없는 리아였다.
처음에야 저지른 짓이 있어 그가 자신을 죽일까 걱정을 하긴 했지만, 그런 걱정도 이제는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 일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한 각서도 있겠다. 더 이상 겁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중에 기억을 찾아서 뭐라고 하려고 하면, 깔끔하게 황후자리 포기하고, 황성을 떠나면 그만이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그 황후자리 필요 없다고 폐위시켜 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황제의 상태로 보아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리아."
생각에 잠겨 있던 리아는 오늘도 자신을 보러 온 황제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황제란 자리가 저렇게 한가로운 것인지, 기억을 잃은 이후로 황제는 매일같이 자신을 보러 왔다.
자신은 딱히 그가 보고 싶지 않은데.
"자주 오시네요."
불만을 담아 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그 행동에 황제를 따라온 기사, 바론이 단번에 사나운 기세를 흘렸지만, 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리아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아?"
리아의 말에 잔뜩 풀 죽은 기색으로 황제, 카르티안이 물었다.
첫날의 그래도 황제답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어느새 카르티안은 주인의 사랑을 받지 못해 칭얼거리는 대형견이 되어 있었다.
정말 극명한 변화였다.
"네."
그 풀죽은 기색에 움찔하며 아리라고 부정할 만도 하건만, 리아는 솔직한 심경을 그대로 말했다.
"……어째서?"
리아의 단호한 대답에 카르티안이 침울한 기색으로 물었다.
"보고 싶어 할 이유라도 있던가요?"
그 혼자 오는 것도 달갑지 않았지만, 그 뒤를 쫓아오는 저 기사도 달갑지 않았다.
상대의 호의나 악의에 개의치 않는 리아였지만, 어쨌든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빤히 보이는 기사의 모습은 거슬렸다.
이왕이면 둘 다 자신을 보러 오지 않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대는 나의 황후잖아?"
황후인 것이 뭐.
어차피 그 황후라는 자리도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은 황후도 아니었다. 그저 황후의 몸에 깃든 기생충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그것도 모르고서 그저 자신의 황후라며 졸졸 쫓아디는 모습이 우스울 뿐이었다.
"부부라고 해서 다 서로를 좋아하란 법은 없지요. 듣자 하니, 원해서한 결혼도 아니고, 정치적 이유로 한 거라고 하던데."
정략혼이 당연시되고 있는 자리였다. 그러니 부부라고 해서 사이가 좋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리아의 단호한 말에 상처를 받은 것인지, 카르티안은 풀죽은 표정을 지었다. 어깨를 잔뜩 늘어뜨리며, 애절하게 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귀와 꼬리가 있었다면, 그귀는 축 늘어져 있을 터였고, 꼬리 역시 그 기분을 드러내듯 바닥에 축 달라붙어 있을 터였다.
"게다가 원래도 사이가 안 좋았다던데, 이제 와서 사이좋게 지내는것도 좀 웃기지 않나요?"
딱히 카르티안을 탓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리아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어색하고 믿기지 않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미안, 리아.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어째서 그대에게 그렇게 굴었는지 모르겠어."
카르티안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그 역시 기억을 잃기 전 자신과 리아의 사이가 어땠는지에 대해서 기사들과 시녀들의 말을 통해 들은 참이었다.
그 말을 들은 후,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이리 어여쁜이를 무시하다 못해 냉대했다니. 게다가 다른 좋아하는 여인이 있다고 후궁으로 들이기까지하고.
그러니 리아가 자신에게 차갑게 굴어도 할 말이 없었다.
다 자업자득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카르티안은 눈을 뜬 이후, 리아를 처음 본 순간, 한눈에 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심장이 떨리고 두근거린 적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분명 그에게는 처음이 맞았다.
"사과를 듣고 싶어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만?"
어차피 그가 그런 행동을 한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자신은 그 여자의 몸에 깃든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 사과는 자신이 아니라, 원래의 몸 주인에게 해야 마땅했다.
"리아는 너무 차가워."
황제이니, 황후라고 해도 그에게 존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카르티안에게 그 존대는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져 달갑지 않았다.
그녀가 편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친근하게 굴어도 되는데, 오히려 그랬으면 좋겠는데.
"원래도 다정한 성격은 아니라서요."
리아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전 몸의 주인도 그렇지만, 리아 역시 그랬다. 이전 몸 주인처럼 남을 괴롭히거나 패악을 부리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리아는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차갑다는 말은 이전 한국에 있을때도 자주 들었던 말이었다.
그 분위기 때문에 다가가기 어렵다는 말도 많이 들었었다. 그런것 치고는 어째 주변에 사람이 많기 했지만.
그러나 좋다고 엉겨붙는 이들은 차마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어 적당히 친구로 지내고 있던 리아였다.
좋다고 엉겨 붙으며 귀찮게 누는 것은 눈앞의 이 황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유가 달랐다. 황제는 그저 기억을 잃었을 뿐이고,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기억을 찾으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것 이었다.
"……."
리아의 말에 상처를 받았는지, 황제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리아가 난감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소설 속의 그는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황제가 뭐 저리 마음이 여려서 자신의 말에 저리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것인지.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이건 너무 달라지 거 아니야?
"리아는…… 내가 싫어?"
물기 젖은 목소리로 카르티안이 리아를 바라보았다. 유난히 축 쳐진 어깨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 모습에 리아는 짜증이 났다.
아니, 자신이 뭘 어쨌다고 저런 표정과 저런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지.
"……싫지는 않아요."
상처받은 듯 풀 죽어 있는 카르티안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진심이었다.
리아에레 카르티안은 남이자, 처음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동시어 좋아할 이유도 없었지만.
그가 지난 시간, 그녀에게 어찌 굴었는지는 리아에게 알 바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겪지 못한 것들이었고, 그저 소설 속의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아의 무심한 대답에 카르티안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풀 죽어서 상처받은 표정을 짓던 것이 무색하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해야 싫지 않다고 말한것뿐인데, 저리 좋을까.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환한 미소였다. 한가득 기쁨을 담고있었다.
"그거면 돼. 리아가 나를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희망을 주기 위해 한 말이 아님에도, 카르티안은 그 말에 희망을 느꼈는지, 연신 기쁜듯 미소를 지었다.
어찌나 좋아죽겠다고 웃고 있는지, 괜스레 못되게 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자신이 딱히 S라든가, 그런 기질이 있다고는 생각한 적 없는데 저 모습을 보니 울려보고 싶다는 충동이 조금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좋아질 것 같지도 않는데요."
카르티안의 마음속에 자라난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듯 리아가 말했다.
그어 카르티안의 표정이 단번에 시무룩해졌다.
"왜, 어째서?"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역시 자신이 기억을 잃기 전에 그녀에게 나쁘게 굴어서일까.
카르티안은 금세 우울해졌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들을 없던일로 만들 수도 없었다.
도대체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길래, 저리 어여쁜 이를 그리도 냉대할 수 있었는지.
"그러고 싶지 않아서요."
상황이 달랐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 이렇게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것은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기억을 찾으면 그는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고,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것도 그때까지만 일어날 시한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를 좋아하는것 만큼 멍청한 짓도 없었다.
"……왜?"
어느새 촉촉해진 목소리로 카르티안이 물었다.
그냥 그렇다고 하면 그런줄 알것이지, 뭘 저리 자꾸 묻는 건지.
순간 리아가 짜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일일이 대답하기도 귀찮았지만, 대답하지 않는다고 순순히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기억을 찾으면 다시 그때처럼 굴것 아니에요?"
그러니 기억을 잃은 후, 자신에게 잘해 준다고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마음을 담아 리아가 말했다.
"아니야."
"그걸 어찌 안답니까?"
리아가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수있어."
고집을 부리듯 카르티안이 말했다.
"모르시나본데, 분명 기억을 잃기전의 폐하는 기억을 잃었다고 이렇게 될줄은 몰랐을걸요. 이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러니 기억을 찾은후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쓸데없는 확신은 하지 말라는 듯 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지 않을 거야."
"그건 모르는 일이죠. 그리 우긴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황제가 무슨 저리 아이같이 구는지.
그래도 어울리기는 했다. 황제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어색해서 그렇지, 외모가 워낙 잘나서 무슨 짓을 하든 잘 어울렸다. 살짝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귀여운 것에 약한 리아라 살짝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원하면 그때처럼 각서를 쓸 수도 있어."
지난번 리아가 기억을 찾은 후에도, 그의 머리를 때린것에 대해 아무런 죄를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한 것을 떠올리며 카르티안이 말했다.
그런것이라도 하면 리아가 자신의 말을 믿어줄까 싶어서.
한편 그 말을 들은 기사, 바론의 서늘한 시선이 리아를 향했다.
감히 너 따위가 황제에게 그런것을 쓰게 했냐는듯.
그 시선을 리아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는 이전의 몸 주인이었다면 하지못햇을 행동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바론을 괴롭히며, 그를 짓밟으려고했다. 그 탓에 더더욱 둘의 사이는 안 좋아졌다.
그러나 리안은 그녀가 아니었기에, 그의 그런 시선에 기분 나빠하며 복수하려 하기보다는 무시를 선택했다.
"리아."
카르티안이 졸졸 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손을 들어 자신의 볼에 닿게했다.
그녀의 손에 얼굴을 부비며, 카르티안이 애절하게 리아를 불렀다.
제발 자신을 봐달라는 듯, 자신에게 애정을 달라는 듯.
간절함을 담은 간구함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기억상실증 걸렸다고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 건.
그러니 이해는 갔다.
저 바론이라는 기사가 자신이 황제에게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
리아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만지작 거리며 어떻게든 다가오지 못해 안달인 황제를 바라보았다.
"왜 제가 좋으세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기억을 잃은 그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만 기억할 뿐, 어떻게 생활했는지, 주변인들과의 어땠는지 등등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니 기억을 잃은 그에게 자신은 처음 보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다 다짜고짜 좋아한다면 엉겨붙은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과 그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는 자신을 보자마자 애정이 가득담긴 시선을 보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것부터 원작을 파괴한 일이긴 하지만, 이야기 전개가 이렇게 변해버릴 줄은 몰랐다.
신이란 존재가 원작 망가뜨리고 싶어서 그러나.
"……나는."
설마 리아가 그런 질문을 던질 줄 몰랐다는 듯 잠시 눈을 크게 뜬 카르티안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 한 마디 하기가 너무도 떨린다는 듯, 그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냥…… 그냥 좋았어."
막 심장이 떨려서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보는 순간, 자신의 여인이라는걸 깨달았다. 그런데 이미 자신의 여인이라고 해서 너무 좋았다.
그때의 그 감정은, 정말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를 본 순간, 그녀만이 자신의 눈 안에, 가슴 안에 가득 들어찼다. 그녀외에는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도, 조금 전까지 느꼈던 혼란스러움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신의 모든 신경이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보통 그런 대답을 많이 하긴 하지만, 영 믿을 수가 없는 말이네요."
납득하기도 힘들었다.
그냥도 첫눈에 반하기 힘든데, 하물며 그 상대가 기억을 잃기 전 매우 싫어했던 상대라면 더욱 믿기 힘든 일이었다.
비록 직접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소설 속에서 그는 원래 이 몸의 주인을 향해 항상 경멸 어린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기억을 잃었다고 한순간에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뀌다니.
리아의 냉정한 말에 카르티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그녀가 원하는, 그녀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그에게 그녀를 만난건,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 운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정해진 운명을 따르듯,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진심이야."
이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카르티안이 애써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카르티안이 그러든 말든 리아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리아의 시선이 잠시 바론을 향했다.
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연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기야, 그렇겠지. 원래의 몸 주인은 이유가 무엇이든 상당히 성격이 좋지 않았으니까.
맨날 시비를 걸고, 때리고, 패악을 부리고.
소설을 읽는 자신도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아니다, 완전 악녀잖아, 이런 감정을 느꼈으니, 그걸 실제로 봤던 바론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리아."
리아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카르티안이 리아의 얼굴을 잡았다.
얼굴에 닿은 카르티안의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표정에 카르티안은 움찔거리면서도 손을 떼지 않았다.
"보지마. 나만 봐 줘."
간절함을 담아 카르티안이 말했다.
'허어. 기억을 잃은 주제에 눈치는 빨라선.'
잠깐 바론에게 시선을 던졌을 뿐인데도, 잘도 알아채고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이 리아는 신기했다.
"그냥 티안이 저 기사 데리고 나가면 아무도 볼 일 없습니다만?"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리아가 말했다.
"나는……."
리아를 봐도 자꾸 보고 싶고, 보이지 않으면 일이 손에 안잡히고, 매일 리아 생각뿐인데, 어째서 리아는.
카르티안이 애절하게 리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이 말을 해봤자 리아는 그저 짜증스러운 반응만 보일 것을 알았기에 카르티안은 뒤이은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리아가 내보이는 날카로운 가시에 가슴이 아팠다. 심장이 자꾸 콕콕거렸다.
"그냥 쉬고 싶어서 그래요. 피곤하기도 하고."
'진짜 이게 뭔 고생인지.'
카르티안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내 알바 아니라면 무시하려고 했지만, 연신 침울한 기색으로 웅얼거리는 모습을 보니 신경이 쓰였다.
그 탓에 답지 않은 배려를 하게된 리아였다.
말도 안되는 핑계는 아니었다. 황제를 만난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몸은 피곤했으니.
"알았어."
정말로 피곤해 보이는 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안은 아쉬움을 담아 몸을 일으켰다.
"아프지마. 그대가 아프면 나도 아파."
카르티안이 진심 가득 담긴 목소리로 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가면서도 카르티안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네, 티안도 아프지 말고요."
리아가 심드렁히 덧붙인 그 말에 카르티안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그 말에 기분이 좋았다. 카르티안의 볼이 수줍음에 붉어졌다.
그러나 카르티안의 생각과 달리 리아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카르티안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아팠다가 다시 기억을 찾으면 자신이 위험할 수 있으니,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과연 이대로 계속 기억을 잃은 상태로 머물러서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기억을 찾아서 그냥 전처럼 자신을 대하는 걸 보면서 폐위당해 이곳을 떠나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지만.
'아니야, 생각해 보니 후자가 나은것 같은데.'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냥 아프셔도 될 것 같아요, 라고 말할수 없어 리아는 그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강아지를 내쫓는 것 같은 그 행동에 황제로서 무례하다며 뭐라 한 소리 할 법도 하건만, 카르티안은 그저리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던 바론만이 무례하다는 듯 흉흉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황제가 나가고, 리아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정말 피곤했다.
하는 일도 없고, 잠도 실컷 자고 있지만,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된 것인지 자도자도 피곤한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상황을 토로할 수 없었다.
자신은 사실 황후가 아니라고, 황후의 몸에 빙의한 사람이라고 말해봤자 믿어줄 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나도 사실 기억상실증이야, 라고 할수도 없었다.
황제도 기억상실증인데 황후까지 기억상실증이라고 하면 뭔가 상당히 수상해 보이지 않은가.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곳의 문화도 생활 방식도.
책에서는 그런 세세한 내용까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니 우선 이곳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 전에 좀 자다 가야겠다.'
자꾸만 눈이 감겨져 옴에 리아는 그대로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