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리아는 어쩐지 몽롱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리아, 아니, 그러니까 정확히는 리아르나가 보였다.
잔뜩 치장하고 꾸민 리아르라는 입술을 깨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에는 황제와 후궁, 프레야가 다정한 모습으로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황제는 그녀에게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던 미소를 프레야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프레야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황제를 향해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황후의 손이 꽉 쥐어졌다.
자신도 저걸 원했다. 자신도 황제의 애정을 원했다. 그러나 황제의 애정이 향한 곳은 자신이 아니라, 별볼일 없는 프레야라는 계집이었다.
황후는 알고 있었다.
이 황성에서 자신의 위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황후라며 인사를 건네며, 겉으로는 정중한척 굴어도 속내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황성 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무시했다.
황성에 들어온 좋은 물건들은 언제나 프레야 차지였고, 황후인 자신에게는 예의상 몇 가지의 선물이 들어올 뿐이었다.
심지어 황후는 내정 일에도 간섭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말뿐인 황후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황성에서는 황제의 총애가 권력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치고도 황후의 자리는 너무나 위태로웠다.
황제는 의도적으로 모든 일에 황후를 배제했고, 황후에게 아무것도 맡기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항의하려고 황제를 찾아가려고 해도, 황제는 온갖 이유를 들며 자신을 만나려 들지 않았다.
어쩌다 우연히 마주쳐도, 마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시했다. 시선 한 줌 주지 않았다. 어쩌다 시선을 마주할 때는 숨길 수 없는 경멸이 가득했다.
처음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아도 그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좋다고.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힘들어졌다. 욕심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자신에게도 시선을 던져 주었으면, 잠시라도 그와 함께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사랑이 아니라도 좋았다. 하지만 경멸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은 싫었다.
알고 있었다. 그가 어째서 그러는지.
사실 이 황후의 자리도 원래는 후궁인 프레야에게 주려고 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귀족들의 강한 반대와 귀족파의 수장인 아버지의 의견으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황후로 맞이한것을.
그러니 더더욱 애정이 생길 수 없는 관계였다. 그 관계에 상처받지 않으려고 황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지만, 너무도 괴로웠다.
그저 이렇게 황성에 갇힌 꽃처럼 숨만 쉬며 살아야 한다는게.
꽃도 사람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산다는데, 자신은 그조차도 없었다.
황후는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의 수작인지도 모를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사경을 해맸을때, 황제는 자신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
시녀들은 몰랐겠지만, 황후는 눈만뜨지 못했을 뿐, 주변의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시녀들은 독을 먹고 쓰러진 자신을 향해, 이렇게 살바엔 그냥 죽는게 낫지 않냐며 악담을 퍼부었다.
어째서 황제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지 알겠다며, 자신 같으면 수치스러워서라도 자결했을 거라고.
본인을 위해서도, 다른 이를 위해서도 이대로 죽는 것이 나을 거라고.
그 말들이 사정없이 심장을 후벼팠다.
울고 싶었다. 울음이 나올것 같았다. 그동안 공작 영애로서 자라오며, 남들 앞에서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했던 아버지지만, 그 순간만큼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차라리 다행일까. 독에 중독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그 덕에 울음 역시 감출 수가 있으니.
그런 모든 생각과 상황들을 리아가 지켜보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고,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선명한 감정과 감각에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불쌍한 캐릭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그랫다.
아무래도 이 소설의 주인공이 따로있는 만큼 책에서 황후에 대한 내용은 많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황후가 황제와 프레야의 사이를 보고 질투했다. 그래서 패악을 부렸다, 정도로만 언급이 되었다. 그랬기에 황후가 정확히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어떤 말들을 들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황후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도.
단순히 흘러들어오는 기억들임에도, 리아는 심장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의도치 않게 동화되어버린 감정이었다.
잠에서 깬 리아는 꿈의 여파에 인상을 찌푸렸다. 잠에 깨고 나서도 여전히 선명했다. 마치 자신의 감정인 양 황후가 느낀 감정들이 흘러들어왔다. 그 때문에 안 그래도 좋지않았던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책으로 읽었던 것보다도 황후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단지 한 일면을 본 것뿐인데도 이런 감정이라니.
그런 상황에 놓인 황후가 안쓰럽기는 했다. 동시에 답답했다. 자신이었다면 그런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지내기보다는 그냥 다 때려치우고 황성을 나올 것 같은데.
그만큼 황제를 좋아한 것인가.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이곳에서 지낼 만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을 좋아해도, 리아는 너무 깊게 빠지지는 않았다. 상대에게 휘둘리기보다는, 상대를 휘두르는 쪽이었다.
그런 리아의 입장에서 황후는 정말 자신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아니라 원래의 황후였다면 달라진 황제의 태도에 기뻐하며 좋아했을 것을.
"쯧."
리아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잔 것인지 몰라도, 영 개운하지 않았다. 자도 자도 피곤한 느낌이었다.
"도서관이나 가볼까."
언제까지 이곳 세상에 머무를지 몰라도, 이곳에 대해서는 알아두는 것이 좋을 터였다.
마침 할 것도 없겠다 귀찮기만 한 드레스 자락을 부여잡고 리아는 방을 벗어났다.
"그런데……."
도서관이 어디지.
막상 방을 나오기는 했지만, 황성의 지리를 모르니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도서관이 있기는 할 것 같은데.
그런 리아의 눈에 한 시녀가 눈에 보였다. 시녀에게 도서관의 위치를 물어보기 위해 리아가 다가갔다.
리아의 등장에 시녀가 눈에 띄게 몸을 떨며 당황했다. 시녀는 리아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이전의 몸 주인이 한 짓 때문인것이 뻔했기에 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도서관이 어디 있죠?"
"도…… 도서관 말인가요?"
"네."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리아가 말했다. 그 탓에 날카로운 눈매가 더 날카로워 보였다.
"도, 도서관은……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시녀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한 채 말을 더듬거렸다.
자신이 어려운 질문을 한 것도 아니건만 버벅거리는 시녀의 행동이 리아에게는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가면 안 되나요?"
딱히 시녀를 추궁하기 위해 물은것은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물어보니, 마찬가지로 그걸 왜 물어보냐는 듯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에 시녀는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만큼 몸을 떨었다. 진짜 누가 보면 자신이 시녀를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 정도였다.
"죄, 죄송합니다."
시녀가 울먹이며 바닥에 엎드렸다.
그런 시녀의 모습에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이넉 또 무슨 상황인데. 꼭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원인은 이전 몸 주인에게 있는데, 어째서 피해는 자신이 봐야 하는 건지.
"됐고,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었어요."
일으켜 준다고 다가가 봤자, 시녀가 안심하기는커녕 더 무서워할 것 을 알기에 리아는 시녀의 태도를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시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도서관으로 가는 길을 설명했다.
대답을 들은 리아는 시녀를 모른척하며 몸을 돌렸다. 뒤에서 시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 역시 모른 척했다.
"하아, 진짜."
시녀가 알려준 대로 걷던 리아는 아무리 걸어도 도서관을 찾을 수 없었다.
역시 길치는 몸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던가.
분명 시녀가 알라준 길은 복잡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신은 엉뚱한 곳으로만 가고 있는지.
이놈의 망할 길치.
스마트폰의 길찾기 앱을 보고서도 길을 찾지 못했던 자신이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설마 이 몸을 하고서도 영락없는 길치로서의 면모를 보일 줄 몰라 짜증이 났다.
안 그래도 이곳의 드레스가 불편해서 마음에 안 드는데.
이번엔 아예 도서관까지 안내해 달라고 해야 하는 건가.
자신을 불편해하는 시녀들을 알기에,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어디선가 하루종일 황성안을 해맬 것 같았다.
근처에 누구 물어볼 사람 없나 주변을 훑던 리아의 눈에 익숙한 이의 모습이 보였다. 후궁인 프레야와 다른 귀족 영애들이었다.
리아의 시선과 한 귀족 여앵의 시선이 마주쳤다. 귀족 영애는 못 본 척하며 리아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리아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니, 굳이 인사를 받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저들 외에는 도서관 가는 길을 물어볼 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저들에게 물어보기는 좀 그런데.
어떻게든 걷다 보면 도서관이 나오든, 물어볼 다른 사람이 나오든 할 것이라는 생각에 리아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를 프레야가 발견했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프레야가 드레스 자락을 한 손으로 잡으며 무릎을 굽혔다.
'흐응.'
리아가 멀거니 프레야를 바라보았다. 꿈 때문인지 유독 프레야가 달갑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잘못은 없었다. 황제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어찌 그녀의 잘못일까. 프레야가 황제의 총애를 업고서 황후를 무시하거나 그런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이의 무시를 받고 있던 황후에게는 그조차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느껴졌었다.
자신은 황후지만, 정확히는 황후의 몸에 빙의한 다른 사람이니, 프레야에 대한 나쁜 감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멀거니 프레야를 바라보던 리아의 시선이 옆에 있던 다른 귀족 영애들을 향했다. 그들은 자신을 마주하고서도 미동이 없었다.
'그래, 저게 무시하는 시선이지. 저건 좀 기분이 나쁜데.'
아까야 적당히 못 본 거라고 그리 넘어간다지만, 그래도 사람을 앞에두고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꿈때문에 기분이 싱숭생숭하고 안좋은데.
"아무리 황후마마라도 너무하시네요. 프레야 님이 기껏 인사를 드렸는데."
'지는 인사도 안해놓고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리아가 고개를 돌려 프레야를 바라보니, 프레야는 아직도 무릎을 구부린 채로 있었다.
'일어날 때 되지 않았나?'
왜 안 일어나고 저러나, 리아가 생각하는 사이, 프레야가 일부러인듯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귀족영애가 황급히 프레야를 부축했다.
"고마워요."
프레야가 웃으며 귀족 영애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이내 리아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씁쓸한 표정이었다.
"황후마마께서는 제가 많이 미우신가 봐요."
굳이 따지자면 원래의 몸 주인이 프레야를 미워한 것인지, 자신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미움 받아서 정말 슬프다는 듯한 저런 표정으로.
만약 몸 주인 앞에서도 저런 반응을 보였다면, 황후가 저 여자를 싫어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본인이야 별생각 없이 저런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것이겠지만, 자신이 받지 못한 황제의 애정을 받는 이가 저런 식으로 착한척 구는 꼴은 확실히 좀 얄미웠다.
착한척인지, 착한건지는 몰라도.
원래 하는 것 없어도 미운 이는 잘하면 잘할수록 더 미운 법이었다. 차라리 같이 맞대응하며 미움을 드러냈으면 원래의 몸 주인이 그토록 프레야를 미워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프레야의 태도는 황후를 완벽한 가해자로 만들었다. 프레야, 자신은 철저히 피해자가 되게 했고.
"미워하는 건 아닌데요."
"정말로요?"
황후의 말에 프레야가 표정을 풀며 확인하듯 되물었다. 정작 옆에 있는 귀족 영애는 그럴 리 있겠냐는 듯 조소를 짓고 있었다.
"미워할 이유라도 있던가요."
리아가 심드렁히 물었다. 그 말에 귀족 영애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꼭 비웃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웃죠?"
"아니요. 그냥 재밌어서요."
미워할 이유가 있냐니.
빈정거리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귀족 영애가 말했다.
그런 귀족 영애의 행동에 프레야가 당황하며 귀족 영애를 말렸다.
"레인 영애. 황후마마께 그게 무슨 무례죠?"
리아의 표정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귀족 영애가 프레야의 말에는 금방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는 리아의 표정이 삐딱했다.
거참, 정말 저 영애 말대로 재밌는 일이었다.
하지만 뭐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들과 싸워봤자 자신의 손해였다. 그래서 모른척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황후마마께 무례하게 군 것, 죄송합니다. 하지만 황후마마께서도 사과하셔야지요?"
"나보고 사과를 하라?"
'도대체 무엇을?'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건가 알 수 없어 리아가 되물었다.
"의도적으로 프레야님의 인사를 무시하며, 계속 인사를 하고 있게 하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쓰러질 뻔했고요.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으신 분인데."
프레야를 생각하는 척 귀족영애가 말했다.
리아는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리아가 황후인 이상 리아가 프레야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으면 프레야는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대부분 지키지 않는 것이었지만, 프레야만은 그것을 착실히 지킨 것이었다.
"기다린 건데요? 그대들은 언제 인사를 하나 싶어서. 아니면 요즘엔 인사를 한명이 대표로 하는 걸로 바뀌었나요?"
딱히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지만, 먼저 물고 늘어진 것은 저쪽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귀족 영애들의 태도가 거슬리기도 했다.
리아의 말에 귀족 영애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은 명백한 자신들의 잘못이었다.
"그보다 참 대단한 우정이네요. 프레야님, 프레야님 하고 따르더니, 정작 그 프레야님은 나에게 인사를 하는데 자신들은 멀뚱히 서있고. 그거야말로 무시
아닌가?"
인사 예법이야 하나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이 그리 예법에 맞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눈치로 알수 있었다.
"워낙 고고하신 분이라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을 것을 아니까요."
"변명이라는 것이 참."
뭐 저따위로 개 같은지.
리아가 조소를 지었다.
"나도 그랬어요. 그대들이 알아서 내가 무시할 줄 알고 인사 안 했듯이, 내가 받아주지 않아도 알아서 일어날 것 같길래 그랬어요."
귀족 영애가 한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리아가 조소를 머금었다.
진짜, 가만히 지나가려고 하니까 왜 먼저 시비를 건지 못해 안달인지.
지금의 상황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원래 황후였던 이가 황성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지냈는지.
황후를 떠나서도 공작 영애라는 높은 위치에 있는 그녀인데, 대놓고 무시하며 빈정거리는 모습이라니.
황후가 되지 않았으면 겪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리아르나가 황후가 되어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냉대를 받자 기다렸다는 듯이 귀족 영애들은 그녀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사소한 틈 하나 찾으면 순식간에 달려들어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러니 패악을 부릴 수밖에 없지.
황후로서의 권력이 없으니, 성격이라도 더러워서 저런 것이 못 건드리게 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주변인들에게 패악을 부린건 너무 하지 않았다 하는 생각은 그녀들의 행동으로 인해 사라졌다.
저런 것들은 그냥 물어 뜯겨 봐야 무서운 줄 알고 안 건드리는 법이었다.
"하."
귀족 영애가 어이없다는 실소를 내뱉었다. 그러나 이 상황이 더 어이없는 건, 리아, 자신이었다.
먼저 시비건 쪽이 누구인데.
그때였다.
그들 사이를 가르며 프레야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만해요. 황후마마, 정말 죄송해요. 모든 건 제 잘못이에요."
자신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이라며, 프레야가 정말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프레야의 행동에 리아는 더 배알이 꼴렸다.
진짜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착한척 하는것 같아 가식적으로 느껴진다고 해야 할지, 더 얄밉다고 해야 할지, 좋지 않게 느껴졌다.
"그게 어째서 프레야님의 잘못이에요. 먼저 항상 프레야님을 무시한 것은 황후마마 아닙니까?"
귀족 영애의 말에 리아가 짜증스런 표정으로 머리를 쓸었다.
하아, 진짜 내가 참고 싶어도 참을 수가 없네.
자신이 프레야를 무시한다고 해서 자기들이 나서서 자신을 무시할 수 있는건 아니었다. 특히나 프레야를 무시했던건 원래의 몸 주인이고, 이번의 일은 그저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저 귀족 영애가 나서지 않았다면 가볍게 사과하는 정도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귀족 영애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말하는 태도에 심히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귀족 영애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다.
자꾸만 자신의 스위치를 톡톡 건드리는 귀족 영애의 행동에 리아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어디 한번 진흙탕 싸움으로 가 봐?
리아가 이를 갈고 있는 찰나였다.
또다시 끼어드는 이가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황제, 카르티안의 등장이었다.
황제의 등장에 잠시 분위기가 소강되고 프레야와 귀족 영애가 황제를 향해 황급히 인사를 했다.
리아도 눈치를 살피다 황제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이미 오전에 보긴 했지만, 어쨌든 보는 사람이 있으니 인사를 건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프레야와 귀족 영애들의 인사는 깡그리 무시한 채로 카르티안이 리아의 손을 잡으며 그녀에게 미소를 건넸다.
"리아, 피곤하다더니."
약간의 원망을 담은 목소리였다.
"자다 왔어요."
하루 종일 잘 수는 없으니.
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더 자지 않고."
카르티안이 다정하게 말했다.
"이미 실컷 잤습니다만?"
'뭘 또 재워.'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이 움찔하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이 말이 아닌가.
카르티안이 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카르티안의 행동에 귀족 영애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황제의 변화에 대해 듣기는 했다.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내용은 극비라 알지 못했지만, 황제가 쓰러지고 난 후 황후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많이 당황스러웠다.
저런 황제의 모습이라니.
게다가 프레야를 보고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리아, 무슨 일이지?"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리아와 귀족 영애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을 봤기에, 카르티안이 물었다.
"벌거 아니에요."
정말 별건 없었다.
그냥 저들이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정말인가?"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이 프레야를 향해 되물었다.
사실대로 말하라는 듯.
"그것이……."
프레야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프레야의 기색을 아랑곳하지 않고 카르티안이 서늘한 기색으로 프레야의 답을 재촉했다.
프레야를 대신해서 귀족영애가 나섰다.
"황후마마께서 프레야님의 인사를 무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랬다는 듯, 귀족 영애가 말했다. 자신들이 저지른 무례는 싹 무시하는 대답이었다. 마치 전적으로 황후만 잘못했다는.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카르티안의 서늘한 기색에 나섰던 귀족 영애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황후를 대하는 황제의 태도가 변한 것은 그렇다 치고, 프레야를 향해서 저런 서늘한 반응이라니.
"황후가 굳이 후궁의 인사까지 일일이 받아야 하나?"
고작 그것 때문에 마치 황후를 핍박하듯 그리 군 것인가?
카르티안에게서 미미한 살기가 흘렀다. 금방이라도 검을 빼 들 듯 살벌했다.
원작의 카르티안은 절대 폭군이 아니었다. 그러나 달라진 카르티안이니, 어찌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됐어요. 인사를 받지 않은 것은 제 잘못이니."
어쨌든 저들의 말에 따르면 그렇지 않은가.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고, 그 말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귀족 영애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 뿐.
"리아는 너무 착해."
카르티안은 귀족 영애가 말한 것 외에고 분명 다른 무언가가 더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리아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나서기가 애매했다.
"딱히 착한 건 아니에요. 어쨌든 나도 다음부터는 프레야의 인사를 받아줄 테니, 그대들도 지킬 것은 지켜야겠지요?"
"……네, 죄송합니다."
황제의 앞에 있는 만큼 조금 전처럼 황후를 대할 수 없어 귀족 영애가 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사죄했다.
"폐하, 몸은 괜찮으신가요?"
여전히 풀리지 않는 황제의 표정을 살피며, 프레야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런데 리아, 여긴 무슨 일이지?"
프레야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카르티안이 리아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냥 도서관에 좀 가고 싶어서요."
"도서관?"
"네."
"필요한 책이 있으면 시녀보고 가져오라 하면 될 것을. 어찌 피곤하다는 이가 직접 이곳까지 걸어왔어."
리아의 방에서 꽤 떨어진 곳이었기에, 이곳까지 걸어오다가 쓰러지는것은 아닐까 카르티안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직접 보고 고르고 싶어서요."
정확히 어떤 책이 있는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도 잘 모르고 있는 상태니 그러는 것이 나았다.
"내가 안내해 줄게."
카르티안의 말에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안내자가 필요하긴 했지만, 황제의 안내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리아가 뭐라 말할틈도 없이 카르티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