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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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카르티안의 안내로 리아는 무사히 도서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아직도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편했다. 그 불편함을 호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손을 꼼지락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알고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인지,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인지.

"손은 그만 놓죠?"

리아가 어서 놓으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리아는 나의 황후잖아."

그러니까 손 정도는 잡을 수 있는거 아니냐는 듯, 카리티안이 웅얼거렸다. 조금 전 보인 위압감 넘치던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책 보고 고르고 읽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불편할 것 같은데요?"

그보다는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불편한 것뿐이었지만, 리아가 애써 황제를 설득하듯 말했다.

아니, 진짜 그가 원래의 성격대로 강하게 나갔으면 불편하고 짜증 나니까 놓으라고 자신도 강하게 나갔을 텐데.

자꾸만 자신의 눈치를 보며 약한척 구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것치고는 제법 단호한 리아의 태도였다.

"내가 꺼내줄게. 내가 넘겨주고."

"그냥 손만 놓으면 될 것 같은데요?"

리아의 말에도 카르티안은 싫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 큰 성인이 저래서야 뭐가 귀엽다고. 그러나 진짜 귀엽기는 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이런게 외모발이던가.

리아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옆에있는 카르티안의 존재는 의도적으로 모르는 척하며.

"그런데 왜 혼자세요?"

항상 뒤에 바론이라는 떨거지를 덤으로 달고 다니더니.

"자꾸만 그대를 향해 불손한 시선을 던지길래. 그래도 불편해하는 것 같고."

카르티안의 말은 맞았다.

리아 입장에서 바론이 불편하긴 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어찌나 서늘한 시선을 던지는지. 그런 의미에서 불편하다기보다는 거슬리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 것을 알아채는 것을 보면,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데.

왜 자신이 가장 크게 불편해하는이가 본인이라는 것을 모르는지.

알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건 왜 묻지?"

"보이던 이가 안보여서 그냥 물었는데요?"

"설마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언제나 그녀 앞에서는 한없이 약자의 모습을 보이던 카르티안이 드물게도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관심 없습니다."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다른 이에게 관심을 줄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다른 남자를 좋아해서는 안돼. 관심 한 조각 주는 것도 용납할 수 없어."

리아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카르티안이 차갑게 말했다.

절대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그런 일이 생기면 자신도 어찌나올지 알 수 없다는 듯.

"그럴 일 없어요. 물론 전자나 후자나 마찬가지로."

리아, 자신이 카르티안을 좋아하는일도, 다른 남자에게 관심 줄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어찌 그리 단정하지? 나를 좋아할수도 있잖아."

금세 상처받은 표정으로 황제가 말했다.

"아까는 좋아하지 않다도 된다면서요?"

"……."

할 말이 없어 카르티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한 것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될 바엔, 차라리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지, 정말 자신을 좋아하지 않다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 카르티안의 마음을 알고서도 리아는 모른 척했다.

좋아하고 싶지도 않았고, 좋아할 일도 없었다. 자신에겐 돌아갈 곳이 있었고,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황제를 상대하고 있지만, 그뿐이었다.

설사 그게 아니라도, 언제 그가 정신을 차려 자신을 내칠지 모르는데 그를 마음에 담은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카르티안은 자신의 말을 지키듯 착실하게 리아가 관심을 보인 책들을 알아서 꺼냈다. 리아가 꺼내달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책도 고를 만큼 고른 것 같아 리아는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리아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카르티안은 알아서 책을 펼쳐 주었다.

한 손은 자유로웠기에 이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뭐라 하기도 귀찮아 리아는 얌전히 책을 읽었다.

리아가 고른책들은 황실 예법과 귀족들의 예법에 대해 나와 있는 책이었다. 그 외에도 제국의 역사서도 있었다.

리아가 고른 책에 카르티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었다.

그녀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 것인지, 카르티안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리아를 구경했다.

빤한 카르티안의 시선이 신경 쓰일법도 하건만, 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사실 아예 신경이 안 쓰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한다고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대체적으로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그였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책을 읽으니 황제에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는지, 귀족 영애들의 인사법이 어떤건지 상세히 나와 있었다.

동시에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귀족 영애의 말대로, 황후인 자신이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황실 예법이었다. 보통 귀족들 간에는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그녀가 황후였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인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그 외에도 많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어쩐지 독서보다는 공부에 가까운 기분이라 그다지 재밌지는 않았다.

'내가 이 나이에 다시 또 공부를 해야 하다니. 대한민국에서 이미 충분히 공부할 만큼 했는데.'

그래도 새로운 내용이라 신선하긴 했다. 하지만 재미는 없었다.

그도 잠시,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카르티안의 시선 정도야 무시할 수 있었지만, 자꾸만 옆에서 꼼지락 거리며 자신의 손을 조물거리는 카르티안의 행동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말, 매우 귀찮았다.

자신의 손이 찰흙도 아닐 텐데.

"얌전히 좀 계시죠?"

"얌전히 있었어."

카르티안이 항의하듯 불퉁하게 말했다. 책을 읽는 그녀를 방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옆에 있는데 자신은 신경쓰지 않고 책에만 집중하는 그녀가 얄미웠다.

"그럼 얌전히 말고 가만히 계세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니면 이 손 빼버릴 테니.

리아가 엄하니 말했다.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볼 때마다 개가 떠올랐다.

주인의 관심을 받지 못해 안달인 개가.

강아지 귀가 있었다면 지금쯤 그귀는 축 늘어져 있을 터였다.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사람이 변할 수는 있어도 솔직히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사람이 그래도 근본적인 것은 안 변한다고 하던데, 황제는 너무 심하게 변했다.

이전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그게 재밌어?"

카르티안의 말에 리아가 힐끗 책을 바라보았다.

"재밌지는 않아요."

"그런데 왜 읽는 거지? 재미도 없다면서."

카르티안이 불만을 담고 중얼거렸다.

"꼭 책이 재미있어야지만 읽나요?"

필요해서도 읽을 수 있는 거지.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나?"

"독서 자체는 좋아해요."

책은 장르 구분 없이 대체적으로 다 즐기는 편이었다. 원체 혼자 지내는 것은 좋아하는 리아였기에, 그녀에게 독서만큼 좋은 취미는 없었다.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엔 독서는 딱이었으니까.

"원래 좋아했었나?"

기억을 잃기 전의 리아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었기에, 카르티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원래 좋아하긴 했는데 모르죠."

원래 이 몸의 주인은 어땠을지.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그런 리아의 대답에 카르티안의 표정에 불만이 가득찼다.

자신이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그녀는 절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말을 걸어도 간단한 대답만을 들려 줄 뿐이었다. 그조차도 자신이 말을 잇지 않으면 대화가 계속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일까.

한 번쯤은 물어봐 줄 법도 하건만.

자신도 독서를 좋아햐냐고, 어떤 책을 좋아하냐고, 그런 식의 질문정도는.

"아까는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던거지?"

애써 화제를 찾기 위해 어떤 말을 꺼낼까 고민하던 카르티안이 물었다.

"들었잖아요."

뭘 또 묻느냐는 듯 리아가 말했다.

"……."

대답을 듣기는 했지만, 정확한 설명을 듣지는 못했다.

귀족 영애가 답한 것 외에 분명 다른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들이 그대를 무시했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죠."

사실은 사실이니, 부정하지 않고 리아가 답했다.

"어째서 그렇지?"

감히 황후를 무시하는 것이 어째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지 카르티안은 알 수 없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한 황후야, 이름뿐인 존재일 뿐이죠."

물론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닐 터였다. 분명 황제가 그렇게 만들었겠지. 어쨌든 하다 못해 시녀들도 무시하는데, 귀족 영애들이라고 다르겠는가.

다만 시녀들의 무시는 황후의 패악으로 인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제는…… 이제는 아니야. 나는 그대를 정말로 좋아해."

마치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하듯 카르티안이 우울하게 말했다.

"이제는 아니라도 언제까지 계속될것은 아니죠."

딱히 카르티안에게 뭐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사실을 말하는것 뿐이었다. 그의 총애를 계속 받을 생각도 없었다.

"어째서 그대는……."

왜 자꾸 부정적으로만 말하는지.

어째서 그대는 자꾸만 나의 애정을 부정하는 것인지.

카르티안의 표정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뭐라 하는 거 아니에요. 사실을 말한것 뿐이죠. 딱히 과거의 티안이 한 행동에 대해서도 불만 없어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황제와 황후의 관계를 떠올리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리아르나라는 원래의 황후와 달라, 그의 애정에 구애받지 않으니까.

"불만이라고 말해도 좋아. 원망해도 좋아."

그러니 제발 나에게 조금의 관심이라도 나눠줘. 그런 마음을 담아 카르티안이 매달리듯 애절하게 말했다.

리아의 시선이 카르티안을 향했다. 카르티안의 눈에는 자신의 모습이 가득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할까.

자신은 황후가 아니라고, 그래서 그의 애정을 신경 쓰지 않는 거라고 그리 말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애정을 순순히 받아주며, 그의 장단에 맞췆고 싶지도 않았다.

"이해가 안 가요."

고작 기억을 잃었다고 이렇게 태도가 변한 것이. 그리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이해가 필요하다면 계속 리아의 이해를 얻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요?"

자신이라면 그냥 바로 포기하고 다른 사람 찾을 것 같은데."

리아는 항상 그래왔다.

지금까지 짝사랑을 한번도 안해본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누군가를 짝사랑한 적이 있었고, 고백했다 차인 적이 있었다. 좋아해서 사귀었다가도, 상대의 변심에 헤어진 적도 있었다.

그때 리아가 한 행동은 간단했다.

마치 지금까지 자신이 상대를 좋아한 적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태도를 달리하며 상대를 무시했다.

감정은 깨끗하게 지워냈다.

때때로는 다른 상대를 찾기도 했고, 그냥 아무 일 없었던 듯 지내기도 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상대에게 매달리지는 않았다. 상대의 사랑을 받기위해 애걸한 적도 없었다.

"나에게 리아는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여인이야."

세상 모든 것을 합해도 부족한, 그런 큰 가치를 가진 여인이야.

카르티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요. 가치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니까."

자신에겐 가치가 없는 것이 다른이에겐 아닐 수 있었다. 그랬기에 카르티안이 말에 리아는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상대가 그렇다는데, 자신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이 나았다. 물론 인정하는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리아는 너무 차가워."

그래서 나도 얼어버릴 것 같아.

리아는 착했지만, 동시에 너무도 차가웠다. 상대도 얼릴 만큼 짙은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카르티안도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그녀에게 목을 매고 있는지. 이렇듯 자신에게 차가운 그녀인데, 자신에겐 조금의 관심도 나눠주지 않는 그녀인데.

그러나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놓는 순간, 자신의 심장까지 잃어버린 것 같았다.

어느새 자신의 마음에 가득 들어찬 그녀였다. 이유 따위 그도 알지 못했다. 그저 그의 심장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전부라고, 그녀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이성보다 강한 감정에 카르티안은 그저 본능을 따르는것 뿐이었다.

"손은 이렇게 따뜻한데."

카르티안이 아쉽다는 듯, 슬프다는 듯 그리 말했다.

"손이야 아까부터 티안이 계속 잡고 있어서 그렇고요."

이리 잡고 있어서야, 아무리 차가운 손이라도 금방 따뜻해질 터였다.

"그러니까 그대를 계속 잡고 있으면 그대도 따뜻해지지 않을까?"

그대의 마음도?

기대를 담아 카르티안이 리아를 바라보았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한 줌의 기대가 섞인 표정에, 그럴일 없다고 차갑게 부정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 말을 들으면 카르티안의 표정이 완전히 부서질 것 같아서.

이래서야 문제였다.

조금의 기대도 가질 수 없게,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데, 마지막의 마지막에선 겨우 틈을 주고야 만다. 그것이 저 알 수 없는 애정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저 외모 때문인지.

"리아, 리아."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온기, 리아의 손을 잡으며 카르티안이 애절하게 부름을 토해냈다.

"하."

진짜 이게 뭐라고. 자신이 뭐라고. 자신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 그러나 카르티안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세요?"

혹시나 싶어 리아가 물었다.

"미안."

그 사과는 결국 아무것도 기억 안난다는 뜻이었다.

"미안할 건 없어요. 그렇게 만든것은 저니까."

"리아……."

금세 침울해진 카르티안이 리아에게 엉겨 들어왔다. 정말 따뜻하긴 했다. 타인의 체온은. 유난히 카르티안의 체온이 뜨거운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기다릴 거야. 그대가 나를 좋아할 때까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카르티안이 말했다.

기다리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커다란 덩치와 달리, 작게만 보이는 그의 모습에 리아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진짜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자신이 사람의 진심에 약하다는 사실을. 이런 식의 무조건적인 애정에 정말 약하다는 사실을.

그래서인지, 원래의 세상에서도 리아는 그랬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이를 귀찮다는 듯 뿌리치면서도, 좋다고 계속 들이대는 이들을 결국 허락하고야 말았다. 그탓에 혼자가 편한것과 달리, 리아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답지 않게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리아의 눈에 때때로 카르티안이 귀엽게 보일 때가 있으니.

"이렇게 된 거 더 이상 책을 읽는 것은 무리일 것 같으니, 같이 차라도 마시겠어요?"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으니, 이 상태에서 더 이상 책을 읽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차를 딱히 즐기지는 않았지만, 식사 시간도 아니고 카르티안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좋아."

드물게도 먼저 무언가를 제안한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은 환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녀는 그렇게 차가운 여자가 아니야. 결국엔 이렇게 자신에게 흔들려 주잖아.'

기쁨에 찬 카르티안이 웃으며 더욱더 꽉 그녀의 손을 잡았다.

황제와의 티타임은 별거 없었다. 적당히 햇살을 맞으며 차를 마셨다.

황제는 그녀의 관심 한 조각을 받으려 끊임없이 말을 걸며 대화를 이어가려 했고, 리아는 마지못해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지치는 일이었었다.

원래는 혼자 조용히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려고 했었는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자꾸만 애정을 보이며 달라붙으니, 계속 거절할 수도 없었다. 단단한 철벽이 자꾸만 물러지는 기분이었다.

티타임을 끝내고 리아는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자기엔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자는 것 말고는 할것도 없었다.

시녀가 가져다준 책이 있었지만, 오늘 실컷 읽었으니 나머지는 내일 마저 읽을 생강이었다.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난 리아는 예상치 못한 이의 방문을 맞이해야앴다.

"누구신지?"

처음 보는 얼굴에 리아가 물었다. 그에 리아를 찾아왔던 중년의 사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찾아왔다고 답지 않게 투정이라도 부릴 셈이냐?"

중년의 사내가 차갑게 응수했다.

사내의 대답에 리아는 사내와 자신이 아는 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사내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리아는 찬찬히 사내를 살폈다. 그러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묘하게 사내가 이 몸과 닮았음을. 많은 부분이 닮지는 않았지만, 분명 닮은 부분이 있었다.

'아버지인가.'

그렇다면 이해가 되었다.

황후를 대하는 것치고도 무례한 사내의 태도도, 말도 없이 찾아온 사내의 방문도.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이 몸의 주인은 아버지와 그리 사이가 가깝지 않음을.

사내의 차가운 태도에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어째 이 여인의 주변에는 제대로 된 사람이 없는지.'

어느 것 하나 그녀를 향해 애정을 보이는 이가 없었다.

짤막하게 등장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래, 사이가 가깝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투정은 아니지만, 확실히 의외의 방문이라."

달갑지도 않고. 리아가 속으로 말을 덧붙었다.

다른 이에게 자신의 상태를 들켜봤자 좋을 것 없었으므로, 이전의 자신을 아는 이와 만나는 것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저렇듯, 차가운 태도를 보이는 이의 만남은 그 자체로도 좋지 않았다.

"나 역시 쓸데없이 너를 보러 올 생각은 없었다. 네가 저지른 일만 아니었다면."

사내가 차갑게 말했다.

"이유가 있어서 왔다는 건데, 뭔가요?"

리아의 말에 사내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러나 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굳이 이전의 몸 주인같은 행동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원래도 아버지에게 살가웠을 것 같지도 않았다.

"황제 폐하를 다치게 했다지?"

역시 그것이 문제이던가.

리아가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가 아무 말 없이 넘어가 좋게 해결이 되었지만, 다른 이에게는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일이었다. 사실 이렇게 넘어간 것 자체가 큰 행운이었다.

"실수였습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방에 웬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밤중에 찾아왔는데 누가 좋다며 환영을 하겠는가.

그 당시, 자신의 기준에서는 그냥 변태였다. 황제고 뭐고를 떠나서.

그때는 막 일어났을 때라 자신이 황후의 몸에 빙의했고, 상대가 황제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실수라는 말로 해명이 될 것 같더냐."

"제가 굳이 아버지에게 해명해야 합니까?"

당사자가 괜찮다고 넘어갔는데?

삐딱한 마음을 속으로 읊조리며 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못 본 새에 버릇이 더 없어졌구나. 그동안 이야기는 들었다. 그동안 황성 사람들에게 그리 패악을 부렸다지?"

말은 그리했지만, 사내는 그것을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로서도 이해할 수 있었다.

황후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채 사람들의 무시만 받았을 테니.

물론 그런 상황이 만들어진 데에는 사내가 한몫하기도 했다. 사내가 나서서 뭐라 한 마디만 했어요 시녀들이 함부로 그녀를 무시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사내는 의도적으로 방관했다. 황후의 패악 역시, 일부러 방관했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수록 사내의 계획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터였다. 적당히 황후 자리를 유지하기만 되는 것이었다.

"그랬다고 하네요."

남의 일을 대하듯 리아가 말했다. 그녀의 입장에는 남이 저지른 일이 맞았다.

"허어."

원래도 자신에게 가시를 세우던 아이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가시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이제라도 처신 똑바로 하거라. 겨우 얻게 된 황제 폐하의 총애인데, 그러다가 잃으면 어찌 되겠느냐?"

애써 분을 참은 사내가 차갑게 말했다.

"네 비록 감히 황제 폐하의 옥체를 다치게 한 것은 큰 죄이나, 덕분에 폐하의 태도가 달라졌으니 그건 감안해 줄 만하구나."

"그걸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사실만을 고하며, 리아 역시 싸늘하게 응수했다.

연신 날카롭게 찌르는 말에 사내의 심기는 더욱 뒤틀렸다. 모처럼 좋은 소식이 있어 축하해 줄 겸 왔건만.

볼 거라고는 제 어미를 빼닮은 저 외모밖에 없는 것이.

"어쨌든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너도 이제 네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제 의무요?"

황후니 의무야 있겠지만, 사내가 말하는 그 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후계자를 잉태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느냐. 원래라면 그날, 황제 폐하와 합방을 해서 후계를 가져야 했지만, 네년의 바보 같은 행동으로 허사가 되어버렸으니."

'허, 이젠 네년이라.'

그 호칭이 마음에 안들어 리아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게다가 후계를 잉태하라니.

그건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

지금 처한 상황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해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분명 후계자를 가지는 것은 황후의 의무가 맞았다.

황제가 엉겨 붙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그와 관계를 가져 아이까지 가져야 한다고?

그건 절대 사절이었다.

"네 쪽에서 한번 말을 꺼내 보거라. 그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지 말고.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이 없을지도 모르니."

"싫습니다."

'내가 왜 해야 하는데? 좋아하는 상대와도 할까 말까 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상대와? 그것도 단지 아이를 갖기 위해서?'

리아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거절했다.

"뭐라고?"

이내 분을 참지 못한 사내가 몸을 일으켯다.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지금까지 참은 것도 용했다. 그녀가 황후였고,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기에 웬만한 무례는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건만.

몸을 일으킨 사내가 가차 없이 손을 들어 리아의 뺨을 내려쳤다.

그가 아는 그녀는 자존심이 강해 자신이 맞아도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현재 그 앞에 있는 그가 알고 있는 리아르나가 아니었다. 리아르나의 몸에 빙의한 리아였다.

순간 예상치 못하게 뺨을 맞은 리아는 고민했다.

'나도 똑같이 저 놈을 때려?'

같이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은 영 마음에 안드니, 주먹으로 저 면상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건, 우선 저 사내가 이 몸의 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

어른이라고 봐주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저 사내를 때리면 패륜이 아닌가.

"아…… 버지."

차마 나오지 않는 호칭을 부르며 리아가 차갑게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시선에 사내는 움찔했다. 단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시선이었다.

억울하다는 듯 원망에 찬 시선은 받은 적 있어도, 자신의 여식의 저런 시선이라니.

마치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기분이었다.

"다음에는 저도 같이 때려드리겠습니다."

이래 봬도 절대 맞고 다니지는 말자는 주의라.

한 번의 경고면 되었다. 이후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절대 그냥 당해 주지만은 않으리라.

진짜 자신의 아버지도 아니고.

"네년이 지금!"

사내가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순순히 맞지 않았다.

리아는 가볍게 사내의 손을 잡아챘다. 손목을 부수기라도 할 듯, 사내의 손목을 잡은 리아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네가 지금 황후라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느냐!"

"말 잘하셨네요. 황후의 뺨을 때리고도 그쪽은 무사할 줄 아나요?"

황후의 아버지든 뭐든, 어쨌든 계급을 따지면 자신이 위였다.

그동안에야 리아르나인지 뭐시기인지가 얌전히 당해 주고만 있었던 것 같은데 자신은 아니었다.

물론 그 당시 리아르나가 사내에게 대항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황제는 리아르나가 아버지에게 맞아 뺨이 부어올랐음에도 모른 척했다. 원래도 얼굴 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주제도 모르는 것 같으니."

사내가 애써 힘을 줘 리아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응수했다.

"네년이 합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고 하니, 이번만은 내가 나서마. 하지만 한 번만 더 내말을 어기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위태로운 그 자리를 그나마 유지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내 덕이니."

"필요 없어요."

리아가 칼같이 잘랐다.

"내가 네년의 말을 들어줄 필요가 있더냐."

마음 같아선 눈앞의 여인에게 손을 대는 한이 있어도 버릇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리아의 말대로 그녀에게 손을 대는 것은 위험했다.

이미 한 대 때리긴 했지만.

사내는 더이상 할 말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하."

리아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버지라는 것이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정말 짜증만 났다.

동시에 생각하고 있던 하나의 계획을 수정했다.

황제가 기억을 찾으면 얌전히 폐위를 요청해 사가로 돌아가 호의호식하며 지내려고 했는데 그런 무리일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공작에게 기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니 황제가 기억을 찾기 전에 차곡차곡 돈을 모아야 했다. 공작에게 기댈 필요 없이, 알아서 잘 지내기 위해.

진짜, 상황이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해서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는 변명 진짜 싫어하는데, 이번만은 이해가 되었다.

저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 제대로 자랄 수가 있겠는가.

기껏 들어온 황성이란 곳도, 가시밭길이라는 사실은 여전했고. 뭐 하나 그녀에게 좋은 일은 없었다.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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