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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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티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리아의 방을 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나 집무실에 도착하기 전, 카르티안은 프레야와 마주쳐야 했다.

프레야가 카르티안을 향해 인사를 건넸지만, 카르티안은 그 인사를 받지 않았다.

명백한 무시에 프레야가 입술을 깨물었다. 리아를 향한 태도가 변했지만, 이렇듯 자신에게 싸늘해질 줄은 몰랐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건지.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그가 이렇듯 매정하게.

"폐하."

항상 입에 붙었던 이름 대신 폐하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프레야가 애절하게 카르티안을 불렀다.

프레야의 부름에도 카르티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프레야를 바라보는 바론의 시선에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신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후궁에 머무르던 그녀였지만, 바론은 그녀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총애를 무기로 삼아 타인을 무시하지도, 황제를 휘두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카르티안의 무시에 프레야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나 이렇게 카르티안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무례를 무릅쓰고, 프레야가 서둘로 카르티안의 뒤를 쫓으며 그의 옷깃을 잡았다. 옷깃 한 조각을 잡은 프레야의 손이 떨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북풍한설과도 같은 냉기를 흘리며 카르티안이 차갑게 말했다. 리아를 향해 보냈던 애정어린 다정한 시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잠, 잠깐이라도 폐하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떨리는 음성으로 프레야가 힘겹게 말했다.

"황제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이 얼마나 큰 중죄인지 알고서 이런짓을 한 건가?"

거칠게 프레야의 손을 뿌리치며 카르티안이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네."

약간의 기대를 담아 프레야가 답했다.

"해봐."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끝내고 리아와 함께 식사하기 위해선 조금의 시간도 허비할 생각이 없지만, 옛정을 생각해 이야기 한토막 정도는 들어 주겠다는 듯이 카르티안이 말했다.

"정말…… 하나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아니,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이렇게 변할 수나 있는 일인가.

프레야는 믿을 수가 없었다.

"기억할 필요가 있나?"

나는 지금이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기억이 없다고 해서 자신이 황제가 아닌 것도 아니고, 황제로서의 의무에 소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전, 저는……."

미처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프에야가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향해 매달릴 수도없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자신을 향해 조금의 감정 한 자락도 내비치지 않는 그가 미웠다.

그를 미워하면 안 되지만, 그를 미워할 권한 따위 없었지만, 너무도 달라진 그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당장에라도 그대를 내칠 수 있음에도, 그대를 후궁으로 지낼 수 있게 한것 자체가 큰 자비라는 것을 모르나?"

더없이 싸늘한 음성이었다.

그 음성에 프레야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어찌 이리 변하시나요.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으면서, 저밖에 없다고 하셨으면서. 내 비록 너를 황후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황후보다 더한 선물을 주신다고 하셨으면서.'

후궁이라는 자리는 황제의 총애만 없다면 언제 꺼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위태로운 자리였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건 황제가 자신을 좋아해 주었기 때문이다. 황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작은 자리라도 유지하고 싶다면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마."

황성에 지내고 있으니, 아예 눈에 띄지 말라고는 하지 못해도, 카르티안은 더이상 프레야외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저,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어요. 그런에 폐하께서 저를 거부하시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황제의 사랑 말고는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모든 이가 자신을 미워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아무도 남아있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가 자비라고 말하는 그 후궁의 자리도.

"그게 싫으면 떠나면 그만이야. 그대가 원하면 지금이라도 그 후궁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지."

그 말과 함께 카르티안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프레야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째서 저리 차가워지셨을까. 정말로 황후가 카르티안에게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 것일까.

기억을 잃은 것도, 그가 황후를 좋아하게 된 것도, 사실은 다 황후의 계략이 아닐까.

소리 없는 눈물이 프레야의 볼을 타고 흘렀다.

"마마."

프레야의 곁을 지키던 시녀 한명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 거지?"

카르티안의 애정이 언제나 자신을 향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카르티안을 오롯이 자신 혼자서만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금방 시들 줄은 몰랐다. 시들었다고 해서 바로 이렇게 차가워질 줄은 몰랐다.

"이것이 다 그 간악한 년 때문입니다."

함부로 황후를 욕해서는 아니 되었지만, 프레야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니 황후에 대한 감정을 잠을 수가 없었다.

"리나. 누가 들을지 모르니 그런 말은 조심하는 것이 좋겠어."

물론 리나가 어째서 그런 말을 한것인지는 알겠지만.

가슴이 조여들 듯 극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리나가 걱정된다는 듯 프레야가 아프게 말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프레야의 아픔에 동조하듯 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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