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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티안이 일을 하러 가고 나서야 리아는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리아는 어제 미처 다보지 못한 책을 펼쳤다.
참 재미없는 책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리아는 금방 책에 집중했다. 그런 리아의 집중이 깨진 것은 문득 떠오른 하나의 기억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런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불현듯 찾아왔을 뿐이었다.
기억 속에서 리아르나는 독에 중독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아팠던것 뿐인지 아픈 기색을 하고 있었다. 리아르나는 초췌한 기색으로 방을 나섰다.
리아르나가 정신을 잃고 있던 그 며칠 동안 그녀의 방을 찾아온 이는 시녀들뿐이었다.
황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모르고 있던 것인지, 알고서도 일부러 찾아오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리아는 그저 리아르나의 기억을 훔쳐보고 있는것 뿐이었으니까.
몸의 기억이 흘러들어오는 것일까.
리아는 조용히 리아르나의 기억을 엿보았다.
방을 나선 리아르나는 복도를 걸었다.
기대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리아르나는 황제를 보고싶어했다.
그래도 자신이 아픈 모습을 보면, 그도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그래도 한 자락의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말의 기대를 접지 못하고 리아르나는 복도를 걸었다.
다행히 리아르나는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좋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어진 상황은 리아르나에게 더 큰 상처를 가져다주었으니까.
"제국의 광명, 고귀하신 빛,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리아르나가 아픈 몸을 이끌고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그 인사를 받지 않았다. 황제의 곁에는 프레야가 있었다.
'프레야, 프레야, 빌어먹을 프레야.'
리아르나가 속으로 욕을 참아 넘겼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존재를, 그녀를 향한 황제의 애정을, 감정을.
황제는 리아르나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확연히 드러난 병색에 뭐라 걱정 한마디 건넬 법도 하건만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의 시선에는 그저 리아르나를 향한 경멸만이 가득했다.
몸을 일으킨 리아르나는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원래는 좀 더 쉬었어야 했다. 하지만 황제의 얼굴을 잠시라도 보고파 방을 나선 참이었다.
찌르르 울린 현기증에 리아르나가 비틀거렸다. 딱 황제가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던 순간이었다.
비틀거리는 리아르나를 보고서도 황제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리아르나는 허무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에 황제가 리아르나를 바라보았다.
"쯧. 얌전히 방에만 있었으면 될 것을."
일말의 연민도 없이 황제가 싸늘하게 말했다.
"마마, 괜찮으세요?"
황제의 곁에 있던 프레야가 리아르나에게 다가갔다.
"됐다. 치워라."
리아르나가 차갑게 프레야의 손을 뿌리쳤다.
"그 손이 잘리고 싶으냐? 지금 감히 누구 손을 친 것이지?"
아픈 리아르나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가 싸늘하게 말했다.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지만, 리아르나는 참았다. 약한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항상 약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내뱉었던 독설도 할수가 없었다.
프레야는 황제의 손에 이끌려 멀어져 갔고, 황제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리아르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리아르나는 황망하게 복도에 주저앉아 눈물을 참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