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카르티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리아의 방 앞에서 멈춰 섰다.
무려 3일 만의 방문이었다.
그 탓에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그러나 전처럼 아무 이유 없이 그녀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온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 역시도 그가 굳이 그녀를 방문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적당히 시녀를 시켜 알려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녀를 찾아갈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겁이 나기도 했다. 무심한 그녀의 얼굴이 보는 것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그 차가운 말을 듣는 것이.
그러나 이렇게 그녀의 방문 앞에 서 있으니, 그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을 가릴 수 없었다.
지금 이렇게 방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더할 수 없이 심장이 떨리고 있는 것을.
지금까지 참은 것도 대단했다.
카르티안은 망설여지는 마음을 뒤로하며, 힘겹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니, 리아가 의자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그녀를 비추자 그녀의 은발이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고, 푸른 눈은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는지, 곱게 다물어진 입술이 그 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방 안에만 있었던 건지 리아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옷이 외모를 입은 듯 화사했다.
그 어떤 금은보화도 그녀의 예쁨을 죽일 수 없으리라.
카르티안은 그렇게 감탄하듯 리아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굳이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카르티안은 그녀에게 자신의 등장을 알리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롯이 책을 향해 있었지만, 이렇게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겨우 사막속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처럼 설렘과 기쁨이 흘러넘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나의 책을 끝낸 리아가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리아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을 향했다.
리아의 시선은 앞에 있던 카르티안을 향했고, 그제야 리아는 카르티안을 아라챘다.
"인사는 필요 없어. 리아는 그저, 가만히 있어도 돼."
불필요한 인사따위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면 충분했다.
"필요 없다고 하니, 따로 인사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인사하러 일어나기 불편하기도했다.
그보다 의외였다.
어쩌면 이대로 그의 얼굴을 아예 안보게 될질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하기야, 또 생각해 보면 그의 성격에 그 말 한마디로 자신을 아예 안보는 것도 웃긴 일이긴 했다.
"독서를 정말 좋아하나 보군."
"따로 할 일도 없어서요."
황후의 일과라는 것이 그랬다.
때때로 남편을 위한 선물을 주기위해 수를 놓거나, 내정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리아에겐 해당하지 않았다.
카르티안을 위한 선물을 준비할 일도 없을뿐더러, 내정 일 역시 다른이가 하고 있었다. 그런고로 리아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아."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할 일이 없다는 그녀의 말에, 원래라면 그녀가 해야 할 내정 일을 다른 이가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안."
"미안하단 말은 됐어요."
"하지만 그래도……. 원래라면 그대가 해야 할 일을 내가, 그러니까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하지 못하게 했으니까."
그것은 리아에게 조금의 권력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 와서는 미처 생각할 틈이 없었다.
"뭐, 상관없어요. 좀 심심하단 것 말고는 불만도 없으니."
역시나 무심한 리아의 태도에 카르티안은 살짝 상처를 받았다.
그녀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거나,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지 않을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또 이렇게 상처를 받으려 하는지.
"오랜만이야."
"그러네요."
3일이란 시간은 리아에게 있어 딱히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대충 그렇다는 듯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내 생각 따위 조금……도 하지 않았겠지."
카르티안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리아가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대로 말하면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조금 정도가 아니라 꽤 많이 했다.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그러나 그 사실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식의 희망은 주지 않는 것이 나았다. 그랬기에 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 그대는 그 역시 귀찮을 뿐이겠지만."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카르티안의 표정이 침울했다.
"뭔가요?"
그 전할 말이 자신의 폐위 소식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그러나 기억을 잃은 카르티안이 그런 말을 할 리는 없었다.
"곧 무도회가 열릴 거야."
"아."
작은 소리와 함께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도회라니.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거 귀찮은데. 짜증도 나고.'
특히나 자신을 향한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어떤지 뻔히 알고 있었기에, 그 무도회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겪을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또 시비나 걸며, 어떻게든 자신을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이겠지.
그러나 이번에 또 그런 식으로 시비를 걸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한번 봐줬으면 됐지, 두번까지 봐줄 생각은 없었다.
"싫다면, 그대는 참석하지 않아도돼."
찌푸려진 리아의 표정을 살핀 카르티안이 말했다.
"그래도 되는 거예요?"
어떤 이유로 무도회를 여는 건지는 몰라도, 황제가 참석하는 이상 황후인 자신이 빠지면 안 될 터였다.
"……상관, 없잖아."
입술을 꾹 깨물던 카르티안이 말했다. 말하고 나서 다시 카르티안이 말했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말이 좀 날카롭게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상관없다고 말한 것은 리아가 참석하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뜻이아니라, 그녀가 참석하지 않는다고 귀족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리아가 싫어하는 것을 강제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거, 어떤 뜻이에요?"
펼치려던 책을 무릎위에 놓아둔채 리아가 물었다.
말만 들으면,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들렸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으니,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아도돼."
'아아. 역시 그런 의미던가.'
리아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참석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또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되리라.
안 그래도 자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인데.
같이 참석하면 참석하는 대로 달라진 카르티안의 태도에 말이 나오긴 하겠지만.
둘 중 어느 것이 나으려나.
"고민, 해볼게요."
아무래도 당장 결정을 내리긴 어려울 것 같으니.
전자나 후자나 말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면 그중 나은 것을 선택해야했다.
"……그래."
카르티안이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
전할 말이 있어서 왔다고 했으니, 그 전할 말도 다 했겠다, 더 이상 카르티안과 대화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리아는 무릎위에 놓아둔 책을 펼쳤다.
그런 리아의 행동에 카르티안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리아가 그런 여자라는 사실은.
리아로서는 할 말 다했다는 생각에 책을 펼친 것이겠지만, 카르티안은 아니었다.
모처럼 그녀를 찾아온 것이니만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이렇듯 간단하게 모처럼의 그녀와의 만남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어도,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별다른 일은 없었는지 간단한 안부라도 듣고 싶었다.
"……리아는……."
주먹을 쥐며 부르르 떨던 카르티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자그만 목소리를 들은 리아가 고개를 들어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도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싫나? 내가 그렇게도 나가줬으면 싶나? 나와는 간단한 대화조차도 나누고 싶지가 않아?"
분한 듯, 슬픈 듯 카르티안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그 말에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딱히 그를 빨리 내쫓고 싶어서 책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할말이 있다고 왔고, 그 할 말 다한것 같으니 더 이상 나눌 대화가 있나 싶어 책을 펼친것 뿐이었다.
"나는 그대가 정말로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어."
속내를 토로하듯 카르티안이 힘겹게 말했다.
"그럼 오지 그러셨어요? 원래 항상 그러셨잖아요."
그럼 되는 것을 뭐 하러 그랬냐는 듯 리아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대는 언제나 그랬지. 내가 오면 귄찮다는 듯 그리 굴었어. 동시에 내가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다는 듯, 그런 반응을 보였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리아는 항상 그랬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저리 처연한 표정으로, 울듯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니 그가 신경 쓰였다.
안 그래도 그가 신경 쓰였던 참이었다.
그것이 어떤 이유로든.
그의 방문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 오지 그랬냐고? 어찌 그러겠어. 그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히 아는데. 특히나 그대에게 그런 말을 들었는데."
'내가 그 말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데. 아직 그 상처가 낫지 않아서, 다시 또 상처를 받을 자신이 없었는데.'
"알고 있었어. 그대는 나에게 어떤 관심도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괜찮은 것은 아니었어."
'하지만 내 쪽에서 매달리며 그대에게 다가가지 않으면, 우리의 관계가 변하지 않을 걸 아니까, 그래서…….'
거기까지 말한 카르티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녀의 말이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지독했는지, 그래서 자신이 이 방에 오기가 얼마나 힘들고 걱정되었는지.
자신의 모든 감정을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매달리는 것이든, 그녀의 동정이라도 받고 싶어 하는 그런 감정의 말로이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것은, 이 역시 리아에게 한 줌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할 걸 아니까.
어째서 리아가 자신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인지, 그것 역시도 알것 같으니까, 알고 있으니까.
"하아."
조용히 카르티안의 말을 듣던 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카르티안의 몸이 움찔했다.
그는 숨기려고 하고 있었지만, 리아의 눈에는 보였다.
잘게 떨리는 그의 주먹이, 그의 눈이.
어찌나 아프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지. 무시해야 하는데, 무시한다 했는데.
리아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건 아니었다. 저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가 기억을 잃기 전의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터였다. 그 모습 그대로 애정을 갈구했다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무시했으리라.
그러나 저렇듯 자신의 모든 감정을 보이며 약한 모습을 보이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리아는 약한 이에게 한없이 약했다. 진심을 보이는 상대에게도.
그러니 카르티안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카르티안의 그런 태도는 그녀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좋아요. 부정 안 할게요. 티안이 한 말, 다 맞아요."
'역시.'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은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그러나 리아의 말은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상처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상처받길 원했던 것도 아니고."
말과 함께 리아가 조용히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았지만, 앞으로의 상황에 절대 좋게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카르티안의 상처를 모른척 할 수 없었다.
"제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세요.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고, 갑자기 따듯해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티안을 밀어내진 않을게요."
그것이 최선이었다.
카르티안을 위해 리아가 베풀 수 있는.
적어도 밀어내지는 않겠다는 것. 지금처럼 단단히 서 있기는 해도, 뒤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
그것은 분명한 여지를 남기는 말이었다.
물론 리아는 또 계속 그에게 상처를 주게 될 테고, 카르티안은 그 상처로 인해 아파할 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리아의 몫이 아니었다. 밀어내지 않는 것만 해도, 가까워질 수 있다는 그런 틈을 주게 되는 것이니까.
동시에 리아는 노력해야 했다. 그를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그와 가까워지지 않게, 벽이 허물어지지 않기위해 리아는 단단하게 버티고 서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렇게 애달프게 매달려 오는데.
아프다고 투정 부리면서도, 차마 자신에 대한 감정을 놓을 수가 없다는데.
한번에 끊어내기보다 서서히 알게 해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자신은 그저 조용히 기다리면 되었다. 결국 그가 모든 것을 깨닫고 물러나기를. 어쨌든 자신은 밀어내지 않겠다고 했으니.
희망 고문이 될 수 있다고 해도.
사실상 따지고 보면 따뜻한 말 하나 없었다.
나는 그대로 있을 건데, 네가 그래도 다가오겠다고 하면 밀어내지는 않겠다는, 단지 그런 정도의 말이었다.
결국 그에 상처받는 것도, 그것을 치유하는 것도 오롯이 카르티안, 그의 몫이었다.
실상 무엇 하나 달라지는것 없는 상황이었다.
밀어내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태도가 변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결국 이전처럼 리아에게 다가가는 것은 계속 카르티안일 테고, 리아는 그런 카르티안을 향해 또 차갑고 무심한 말을 내뱉을 터였다.
그러나 밀어내지 않겠다는 그 말이 가져다주는 감정의 동요는 컸다. 자신을 밀어내지만 않는다면, 그런다면 조금의 기회는 있을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르티안이 리아와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은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절대 리아를 놓칠 수 없다는, 그녀를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고 싶다는 영혼 깊숙이에 새겨진 각인이었다.
"리아……."
카르티안이 나직하게 리아의 이름을 담았다. 리아를 바라보는 카르티안의 시선은 따스함을 머금고 있었다.
아주 작은 관심이라도 좋았다. 처음의 시작이 연민이어도 좋았다. 자신에게 조금의 기회라도 주어진다면, 조금의 틈이라도 보여준다면 절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도 자신을 좋아할 수 있도록.
리아의 모습을 꼼꼼하게 눈에 담던 카르티안은 그대로 성큼성큼 리아에게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
"하아."
카르티안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품에 안긴 리아의 체취를 맡았다. 몸에 맞닿은 리아의 온기도, 그녀의 작은 몸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리아가 좋았다. 자신의 품에 리아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카르티안의 품에 안긴 리아는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리고 카르티안을 밀어내려 했지만, 카르티안의 말이 더 빨랐다.
"밀어내지 않는다고 했어."
카르티안의 말에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자신이 그렇게 말하긴 했다. 그 말을 할 때에 염두에 뒀던 상황도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속마음과 달리 리아는 카르티안을 더 이상 밀어내지 않았다.
자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라, 맞닿은 몸 너머로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 소리만으로도 그가 느꼈던 긴장과 그 기쁨을 알 것 같아서.
'나도 참, 바보 같지.'
더욱이 확실하게 거리를 두며 그와 가까위지지 않기로 했는데, 결국 그런 말을 해버렸다. 밀어내지 않겠다는 단순한 말이었지만, 리아는 그말이 가져올 결과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리아는 그랬다.
처음에는 좀 밀어내다가 상대의 끈질김에 결국 밀어내는 것을 포기했었다. 밀어내는 것을 포기하니, 사이가 가까워졌다. 애초에 둘 사이의 거리는 리아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렇게 리아는 그 사람과 친구가 되어버렸다. 리아의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항상 그런 식의 결말을 맞이했으니, 지금도 그렇게 되어버릴 수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한 말을 취소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건 서로에게 좋지 않을 텐데.
그러나 이렇게 전력을 다해 진심을 부딪쳐 오는 사람을 어느 누가 차갑게, 냉정히 뿌리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기억을 잃기 전에 그가 어떤 행동을 했든, 그것은 리아, 자신이 겪은 일도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완전히 곁을 내주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밀어내지 않는다고 했을 뿐이고, 자신의 결정과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황성을 떠나기로 한 것은.
"행…… 복해."
리아를 끌어안고서 카르티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기쁨과 환희가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카르티안의 중얼거림에 리아가 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서 해맑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걸렸다.
잠시 카르티안의 품에 안겨 주저하던 리아는 이내 입을 열어 무심하게 말했다.
"그보다 이제 그만 떨어지죠?"
"……응."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이 이쩔 수 없다는 듯 리아를 놓아주었다. 떨어지는 팔에도 아쉬움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는, 매일 와도 되는 거겠지?"
혹시나 이제 와서 말을 무르는 것은 아닐까 싶어 카르티안이 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맘대로 하세요. 그리고… 오는건 좋은데 일은 다하고 오고요."
어차피 자신은 밀어내지 않는다고만 말했다. 매일 오든, 일주일에 한번 오든, 그 모든 것은 카르티안의 결정이라는 뜻이었다.
그걸 생각하니 다시금 자신의 말이 후회되었지만, 이미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일다하고 오라고 했으니, 전보다는 뜸하지 않을까.
일부러 그것을 의도하고 그리 말한 것이었다. 딱히 카르티안이 일 잘 안 할까 봐 걱정돼서가 아니라.
"응. 그럴게."
전과 다를 것 없는 태도였지만, 카르티안은 상처받지 않았다. 그저 그런 그녀의 허락이 기분 좋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적어도 앞으로는 당당히 그녀를 보어 와도 된다는 생각에 카르티안은 들뜬표정을 지었다. 이전에도 자주 그녀를 보러 오긴 했지만, 알게 모르게 그녀의 눈치를 살폈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더 당당해져도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