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리아는 카르티안과 함께 황성 내 정원에서 가벼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쌉싸름한 차와 함께 달콤한 티저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달콤한 디저트를 한 입 맛본 리아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원래도 달달한 음식을 좋아하던 리아였다.
이곳에 와서는 따로 디저트를 먹은 적이 없어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이렇게 먹으니 살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이곳에 와서 스트레스만 잔뜩 얻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그 무엇도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나마 호의를 보이는 이는 눈앞의 카르티안이 유일했다.
한편 리아의 얼굴에 살포시 자리잡은 미소에 카르티안이 멍하니 리아를 바라보았다.
한번도 본적 없는 미소였다.
카르티안은 항상 리아의 무심한 표정만 봤었다. 어느때도 미소가 저리 진하게 서렸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고작 디저트를 한 입 먹었다고, 저리 미소를 짓다니.
그조차도 아주 작은, 입 끝에 간신히 걸려 있는 것 같은 미소였지만, 카르티안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뭐예요?"
달콤한 디저트에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낀 것도 잠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카르티안의 시선에 리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리아가 웃는건 처음봐."
카르티안이 감탄하듯 말했다.
원래도 경국지색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외모를 지닌 리아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한자락 걸리니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특히나 날카로운 눈꼬리 때문에 싸늘하게 느껴졌던 그녀의 얼굴이 잠시나마 따뜻해졌다.
"뭐, 그런가요."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고작 해야 작은 미소 지은 것뿐인데, 뭘 저런 반응을 보이나 싶었다.
"이걸 좋아해?"
리아가 한입 물고서 웃었던 것을 떠올리며, 카르티안이 앞에 놓인 디저트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단 것을 좋아하는것 뿐이에요."
겉보기에는 달달한 음식보다는 담백한 음식을 선호할 것처럼 보이지만, 리아는 정말로 단 음식을 좋아했다.
커피도 무조건 달달한 것들을 선호했다. 거의 항상 초콜렛이나 사탕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그런 리아의 모습에 친구들은 모두 신기해했다.
"그럼 더 준비하라 이를까?"
"됐어요."
테이블에 준비된 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리아는 거절했다.
"싫어? 내가 준비하라고 한 거라서?"
카르티안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에요."
"부족하지 않아?"
이런 거로는 배로 채울 수 없을 것 같아 카르티안이 물었다.
"충분해요."
리아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뭔가를 더 해주지 못해 안달인 것은 이해하지만, 너무 많이 먹는 것도 좋지 않았다. 특히나 단 음식들은.
"……응."
단호한 그 대답에 카르티안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리아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무슨 말만 하면 침울해져선 귀를 축 늘어뜨리는 것이, 원래 저리 섬세한 성격인건지.
하지만 원작을 생각하면 그건 아닌것 같았다.
"일은 잘하셨어요?"
"응?"
리아의 물음에 카르티안이 반색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다니. 항상 자신이 먼저 말을 걸어야 마지못해 대답을 주었었는데.
절대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에겐 별일 아닐지 몰라도 카르티안에겐 아니었다. 특히나 그에겐 리아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그 모든 것을 기록해도 모자를 정도였다.
금세 카르티안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런 카르티안의 반응에 리아는 잠시 움찔했다.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인데 저런 반응이라니.
"응. 잘하고 왔어."
흡사 자랑이라도 하듯, 카르티안이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리아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리아의 반응에 카르티안은 다시 또 침울해졌다. 마치 칭찬을 바라고 자랑했다 칭찬받지 못해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말 때문에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끝내고 온 참이었다.
"뭐예요?"
자기 혼자 좋아하다가 대답하더니 금세 또 침울해진 카르티안의 모습에 리아가 인상을 살풋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그냥."
카르티안은 괜스레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녀가 잘했다고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정말 기쁠것 같은데.
황제의 머리를 함부로 만지는 것은 크나큰 무례이자 잘못이었지만, 리아라면 그런 행동을 해도 상관없었다.
상관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기쁠 터였다.
"아니, 그냥이 아닌 것 같은데요?"
카르티안의 모습을 보니 짐작 가는 것이 있지만, 리아가 모른 척하며 물었다.
"그냥, 리아가 일 열심히 하라고 해서, 정말 그랬는데……."
굳이 자신이 왜 일을 열심히 했는지에 대해 어필하는 카르티안의 모습에 리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 뭐하러 칭찬까지 해요? 그럼 황제가 되어서 일도 안하고 놀 생각이었어요?"
리아가 무심하게 말했다.
"……."
뭐하나 틀린 말이 없기에 맞는 말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카르티안은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실망이 잔뜩 서려 있는 얼굴이었다.
'허어.'
사실 나 황제의 아내가 아니라, 황제의 엄마였던가.
어째 애를 하나 키우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연신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히 칭찬을 바라는 모습에 리아가 어쩔수 없다는 듯 카르티안의 머리에 손을 턱 올렸다.
쓰다듬는 것도, 토닥이는 것도 아니고 잠깐 닿았다 떨어진 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 카르티안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잘도 웃으시네요."
정말로 감정 변화가 다양하고 극명했다.
침울해졌다 싶으면, 또 금방 웃고, 그러다가 다시 또 침울해지고.
감정 변화가 그리 극적이지 않은 리아로서는 참으로 신선하고 신기했다.
"웃지 말까?"
혹시나 자신이 웃는 모습이 마음에 안드는 건가 싶어 카르티안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웃지 말라고 하면 안 웃으시게요?"
"응. 리아가 웃지 말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에 리아는 또 한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럴 수 있는 걸까? 이렇게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휘둘릴 수 있는 걸까?
그의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나마 자신이라 다행이지, 다른 여인 앞에서 이랬다면 그 흔한 역사속에서 보던 여자에 눈이 멀어 나라를 망치는 왕이 되었을 터였다.
"됐어요. 웃는 거야 본인 마음이지."
'딱히 보기 안 좋은 것도 아니고.'
타고난 외모라는 것이 있어서 웃으면 잘 어울리고 멋있으면 멋있지, 보기 안 좋을 정도는 아니었다.
"리아도 자주 웃으면 좋을 텐데."
카르티안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리아는 못들은 척했다. 바보처럼 아무때나 헤실거릴 생각은 없었다. 굳이 자주 웃어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그러다 리아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아까부터 묘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더니, 저 여인이던가.
거리가 멀어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창문 너머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여인은 자신과 카르티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까지는 알 수 없어도, 여인이 누구인지는 보나마나 뻔했다.
'프레야일 테지.'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사람만 뒤바뀌어서 있었던 것 같은데.
비록 자신이 직접 겪은 것은 아니지만, 프레야와 황제가 다정하게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것을, 리아르나의 기억을 통해 본 적이 있었다.
리아르나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허망하게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의도치 않게 리아는 그때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었다.
황제와 간단한 티타임을 즐기고, 카르티안은 마저 일하기 위해 집무실로 향했고, 리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방에 도착하기 전, 리아는 프레야와 마주쳐야 했다.
"제국의 꽃,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프레야는 리아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또 뵙네요. 일어나도 돼요."
지난번 프레야와 귀족 영애들을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리아가 말했다.
리아의 말에 프레야가 굽히고 있던 무릎을 폈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리아는 프레야와 할 이야기도 없었기에 몸을 돌려 걸어가려고 했다.
프레야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면.
"많이 좋아 보이시네요."
"그런가요."
딱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좋다는 생각은 한 적 없었기에, 리아는 무심히 말했다.
"네, 정말 부러울 정도로요. 저에게도 저런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셨는데."
프레야가 짐짓 부럽다는 듯,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만 그 말에 리아는 무언가가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말이 꼭 그거 같지 않은가.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은 모습을 너에게 보이다니, 이상한 일이다.
그 말 속에 내포된 의미는 자신이 한때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던 위치라는 것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내세우며, 리아를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얼핏 들으면 단순한 부러움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리아는 알 수 있었다.
"그러게요. 저도 그래서 당황스럽네요."
일부러 프레야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무시하며 리아가 말했다.
"좋으시겠어요."
"뭐가요?"
순수한 부러움을 담은 말이었지만, 이 역시 그렇게만 느껴지지 않아 리아가 다소 날카롭게 물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폐하께서 이제는 황후마마를 좋아하시잖아요."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원래의 리아르나가 황제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프레야가 알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황후에게 친근한척 다가가려 했다는 사실도.
자신의 성격이 꼬여서 그런건지 몰라도, 리아의 눈에는 그 역시 의도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저 드디어 황후마마의 염원이 이루어졌구나 싶어서요."
프레야가 단지 그뿐이라는 듯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저는 그런 염원한 적 없어서요."
"하지만 폐하를 좋아하시잖아요?"
"지금은 아니죠."
리아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런 염원을 가진 이도, 폐하를 좋아한 이도 리아르나였지, 자신이 아니었다.
"너무하시네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프레야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이해할수 있었어요. 황후마마가 어째서 그동안 그런 행동을 하셨는지. 그런데 이제 와 황제폐하께서 황후마마를 좋아하게 되니, 좋아하지 않는다니요? 마마께는 폐하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 건가요?"
프레야가 비교적 당당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해를 바란 적도 없고, 제 행동에 대해서도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 이미 폐하께서도 알고 있는 부분이에요. 그러니 프레야가 나서서 뭐라 할 것은 되지 못하죠."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닌가.
리아르나가 황제를 좋아할 때는 황제의 태도에 대해서, 그로 인해 리아르나가 느꼈을 상처에 대해서 신경도 쓰지 않더니.
애초에 자신이 황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뭐라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이었다. 사람의 감정은 누군가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을 하는 이는 프레야라면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나 프레야가 그런 말을 하는 의도 자체가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말까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때때로 그대는 정도를 넘어서는 것 같아요. 당사자들의 일에 제삼자가 끼어드는 것은 좀, 주제넘는 행동인 것 같은데."
지난번 황제가 쓰러졌을 때도 그렇고.
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마마께서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갑작스럽게 폐하의 태도가 달라지셔서 당황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꺼내게 되었어요."
자신이 잃어버린 그것을 황후가 가지게 되었는데, 정작 그것을 받은 마마께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듯 그리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프레야가 정말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 기분이 상했기 때문에 죄송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한 말 자체가 무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시는게 좋을 것 같네요.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인지 모르지만, 어떤 말이 어떻게 전해질지 모르는 만큼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요?"
프레야의 태도에 자연스럽게 리아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가볍게 건네는 그 말 속에 담긴 의도가 하나같이 가시가 가득해서 좋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 애정을 바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애정에 같은 애정을 화답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애정을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걸로 따지면, 고백을 거절하면 다 그 사랑을 무시하는 건가?
그건 아니었다.
사실 리아도 이렇게 차갑게 프레야를 대할 생각은 없었다. 프레야의 사정을 생각하면 그녀가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 자체는 이해되었다. 그것과 별개로 과연 이전에도 그녀가 좋은 의도로 황후를 대했을까 싶어 그녀의 모든 것에 의구심이 들었다.
리아의 차가운 말에 프레야가 입술을 깨물었다. 꽉 쥐어진 프레야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죄, 송합니다."
거듭 사죄하는 프레야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그 모습에 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리아르나는 이것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뭐라 한마디 했다고 저리 눈물을 보이다니. 자신이 그렇게 심한말을 한것도 같지 않은데.
자신은 그저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것 뿐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며 리아가 프레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딱히 할 말도, 하고 싶은 행동도 없었다.
꼭 상황만 보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그녀와 더 이상의 대화도 나누고 싶지 않아 리아는 냉정하게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녀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아주 조그만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더니 기고만장해졌다고, 프레야가 그녀에게 베푼 호의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프레야에게 함부로 군다고.
그 역시 참으로 우스운 말이었다. 그러는 시녀들은 자신이 뭐라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황제의 총애에 기대어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면, 그녀들 역시 자신의 상황에 기대어 화풀이를 하듯 자신을 무시하고 있지 않은가.
리아는 세심하게 수근거리던 시녀들의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 리아르나처럼 패악을 부리지는 않아도 받은 것에 대한 대가는 돌려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