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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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리아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정 일을 넘겨받은 후, 리아에게도 집무실이 생겼다.

단순히 내정이라고 하지만 일은 많았고, 그냥 방에서 하기엔 공간이 좋지 않았다. 쉬기 위한 공간에서 서류를 보고 싶지 않았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황성 내 시녀들에 대한 것이었다. 황성 내에 몇 명의 시녀가 있고, 그 시녀들이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이 적혀 있었다.

당장 무언가를 처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막 그런 일을 건네받았다 보니까 확인해야 할 것이 많을 뿐이었다.

더불어 매일같이 시녀들에 대해 보고가 들어오니, 그 보고를 또 확인하느라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자연스레 리아도 일에 치이느라, 제대로 카르티안을 만나지 못했다. 항상 바빠보이는 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안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하는 리아를 방해하지 않았다.

한 번 방해했다가 된통 혼이 난적이 었었기 때문이다.

리아는 무언가를 할 때 방해받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동안에애 할일이 없어 카르티안의 방문에 항상 그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는 리아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확연히 줄어들자 카르티안은 불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리아의 말을 따랐다. 리아에 한해서 카르티안은 언제나 약자였다.

리아가 한창 쌓여 있는 서류를 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자신을 방문할 이가 있던가. 리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방문을 허락했다.

"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본 리아가 표정을 굳혔다.

"제국의 꽃,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또 무슨 일로?"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재상, 유시안이었다. 유시안은 그 존재만으로도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 그의 방문이 아주 많이 달갑지는 않았다.

"너무 싫어하시는 거 아닙니까?"

유시안이 짐짓 상처라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나 그 가식 섞인 행동에 반응할 만큼 리아는 한가하지 않았다.

"용건만 말하고 나가세요."

개인적인 친분으로 사적인 대화를 나룰 일도 없을 테니.

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무도회에서 많을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그래서요?"

특유의 화법인지, 유시안은 항상 떠보는 듯한 말을 건넸다. 본인이 직접 말을 꺼내기보다 상대 쪽에서 반응하게 했다.

그런 식의 화법은 정말로 리아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뇨. 그냥 신기해서 말입니다."

특히나 그 상황에서 리아가 보인 태도들이.

원래의 리아르나였다면, 그 상황속에서 차분히 대응하기보다 화를 먼저 내며, 상황을 더 악화시켰을터다.

무도회에서 귀족 영애들이 실수인척 시녀의 쟁반을 건드려 잔을 엎질렀을 때도, 프레야의 시녀가 누명을 씌웠을 때도.

그러나 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큰 변화였다.

지난번 그녀와의 만남에서도 느꼈던 사실이지만, 어쩐지 사람이 달라진 것만 같았다.

사실 머리에 무언가를 맞은 것은 황제만이 아닌 건지. 아니면 그전까지는 묻혀 있던 것이 이제 와 빛을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굳이 나를 찾아와 시비를 걸고 있는 당신이 더 신기해요."

"하하, 시비라니요."

"상대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그냥 시비에요."

원래 모든 것은 하는 사람의 의지보다는 받아들이는 상대의 마음에 따라 달라디는 것이니까.

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유시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는 전해 들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내정 일을 일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황성 내의 자금운용 및 황성 내의 상황에 대한 서류입니다."

유시안의 손에 가득 들린 서류에 리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 책상 위에 있는 서류들도 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일 위에 또 일이 쌓였다.

"그리고 여긴 맨 앞에는 내탕금에 대한 내용입니다."

"내탕금이요?"

"네. 가장 관심 있으실 것 같아서."

유시안이 웃으며 말했다.

"딱히 관심 없는데."

리아가 심드렁히 말하며, 유시안이 굳이 맨 앞에 놓은 그 서류를 살펴보았다.

'황후인 리아르나의 상황이 안 좋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너무하긴 하네.'

어째서 황후에게 주는 내탕금보다 후궁에게 주는 내탕금이 많으며, 그 금액이 왜 이리도 차이가 나는지.

황후인 리아르나가 받고 있는 내탕금은 말단 귀족이 받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에 비해 프레야는…….

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는 황후마마께서 내정 일을 맡게 되셨으니, 내탕금에 대한 부분도 조정하고 싶으시면 조종하셔도 됩니다. 최종 결재는 폐하께 받아야 하겠지만."

"살짝 조정은 필요할 것 같긴 한데, 당장 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 같지는 않네요."

리아는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과 벌개로 재상의 태도는 기분이 나빴다. 어째서 재상이 이 서류를 맨 앞에 놓은 것인지, 그리고 또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원래의 권력을 가지게 되면 가장 먼저 내탕금을 조정하려할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는 것 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유시안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돈에 큰 욕심도 없었다. 적당히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벌고, 그만큼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황성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할 생각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많은 돈까지는 필요 없을 터였다.

조정이 필요하다고 해도, 지나치게 많은 프레야의 내탕금을 조정하는 정도로만 끝낼 생각이었다.

리아는 지금 자신이 받은 내탕금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급한 것은 아니었기에, 리아는 맨 앞에 있던 서류를 뒤로 넘겼다.

그 행동에 유시안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귀족 영애들의 습성을 생각하면, 사치를 위해서도 가장 먼저 그 부분을 신경 쓸 줄 알았는데, 예상외였다. 아니면 자신이 앞에 있어서 일부러 그런 척하는 것인지도 몰라도.

"그런데 이 서류, 아니, 이 장부 누가 작성한 거죠?"

내탕금에 대한 서류를 뒤로 넘기니, 그다음에는 황성 내에서 돈을 어떻게 썼는지 적혀 있는 장부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런데 어찌나 엉성하게 적혀 있는지, 어린애들이 쓰는 용돈 기입장을 보고 있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도 대차대조표 같은 것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형식은 아니었다.

이래서야 돈 썼다는 것만 알 수 있지, 재정 상태나 재산 상태에 대해서는 알기가 힘들었다.

"각 부서의 담당자가 작성합니다."

어째서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유시안이 물었다.

"작성 규칙부터 바꿔야겠네요."

보다 알기 쉽고, 보기 쉽게.

그 생각에 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벼운 규칙 하나라도 바꾸게 되면 그만큼 손이 많이 갔다. 특히나 상대가 알고 있는 방법이 아니라면 자신이 일일이 다 설명해 줘야하기 때문에 일이 아주 많이 늘어날터였다.

"어떻게 말입니까?"

유시안의 말에 리아는 그녀가 알고 있는 대차대조표 작성법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가장 기초적으로 자산과 부채, 자본의 분류 및 그것을 어떻게 기입하는 지에 대해.

상대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성격과 달리, 재상으로서의 능력은 있는지 처음 듣는 것임에도 유시안은 금방 이해했다.

"흐음."

"뭐죠?"

"아니, 그저 궁금해서 말입니다. 황후마마께서 어찌 이런 것들을 알고 계시는지."

리아가 말한 것들은 장부를 작성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단순히 돈의 흐름을 알기 쉽게 해줄 뿐 아니라, 추가된 재산 목록에 대해서도 알게 해주었다.

그녀가 말한 방법들은 유시안으로서는 생각지 못한 것들이라 대단하다 느껴지면서도,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원래의 황후가 이런 능력 있고 똑똑한 사람이었나 싶었다.

"그냥 할 일 없어서 책을 읽었더니, 알게 된 것이 많네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읽은 책에서 얻은 정보가 아니라, 한국에 있었을 때 책을 통해 얻은 정보라는 사실이 다를 뿐. 그것도 리아는 관련 교육을 받았으며, 실제 그런 일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단위는 무조건 통일하도록해요. 한 달에 한 번 보고를 올리고, 이 장부에 적혀 있는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네, 알겠습니다."

의외인 리아의 모습에 유시안이 감탄하면서도 그 속내를 숨긴 채 대답했다.

"아, 그리고 영수증이란 거, 있나요?"

"영수증 말입니까?"

"그래요. 내가 언제 어디서 그 돈을 사용했으며, 무엇을 사고 얼마를 지불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서류같은 거요."

"……기본적으로 영수증 같은 것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유시안의 말에 리아가 또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 영수증 비스무리한 것이 있긴 하지만, 적혀 있는 내용이 한정적이었다. 물품 리스트 같은 느낌이었다. 이래서야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기 힘들었다.

특히나 물품별 금액이나 총액이 적여 있지 않았기에 정말 이 돈이 든것이 맞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만약 한국의 기업들이 이렇게 장부를 작성했다면, 당장 횡령과 비리가 판을 쳤을 터였다. 물품 구매에 대한 금액을 마음대로 작성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앞으로는 무엇을 구매하든 제가 말한 정보들이 모두 들어 있는 서류를 일일이 받으라고 하세요. 동시에 사용처에서 서명도 꼭 받으시고."

구매처의 서명은 아주 중요했다.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사실 서명을 받는 것도 언제든 위조할 수 있는 것이라 딱히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한국에서처럼 그런 영수증을 받을 수는 없을 터였다.

"좋은 방법이군요."

유시안이 감탄하듯 말했다.

구매처의 서명을 받으라는 것이 특히 아주 좋은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허위로 영수증을 작성하는 일이 거의 없어질 터였다.

"그리고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계산 좀 제대로 하라고 하죠."

굳이 몇 장 넘겨볼 필요도 없이 첫 장에서부터 잘못된 계산이 보여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4,785골드에서 198골드를 사용했으면 4,587골드가 남아야지, 어째서 4,697골드가 남는 건데요? 이러는데 장부의 금액과 남아 있는 금액이 정말 맞기는 해요?"

아니면 검토 자체를 안 해서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는 건가. 가장 기초적인 산수임에도 첫 장에서부터 틀려버리니 한숨이 나왔다.

게다가 뭐 하나를 샀으면 그 밑에 바로바로 잔액을 써넣을 것이지, 굳이 며칠 치를 한꺼번에 묶어서 계산하는 이유는 뭐고.

'그러니 계산이 다 이리 틀리지.'

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바로 계산이 되는 겁니까?"

그냥 단순히 훑어보기만 한 것 같은데, 순식간에 틀린 계산을 찾은 리아의 행동에 유시안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보통 귀족 영애들은 산수에 약하기 마련인데.

장부 작성은 생각보다 어려워 꽤나 어려운 전문직에 속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없는 황후가 이리 쉽게 틀린 부분을 찾을 수 있는 것인가?

특히나 그런 오류를 찾아냈다는 것은 리아가 단순히 서류를 훑어본 것이 아니라 제법 꼼꼼히 확인했다는 것을 뜻했다.

이런 것 따위 귀찮아하며, 대충 넘겨 버릴 줄 알았는데.

어쩐지 오늘 보인 리아의 모습은 하나같이 예상을 뛰어넘었다. 적어도 유시안이 알고 있는 황후와 달랐다.

정말로 많은 것이.

처음의 그 놀람은 지금만 못했다.

"뭐죠, 그 표정은?"

유시안의 물음에 답하기 앞서, 유시안의 표정이 찝찝하게 느껴져 리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그냥……. 뭐랄까. 그동안 제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아서요."

리아의 물음에 유시안이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격과 능력은 별개라고 하긴 하지만, 설마 그 무능할 줄 알았던 황후가 이리 유능할 줄이야. 이제 와서는 전과 같은 패악도 없었다.

사람이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

황제만 믿을 수 없게 달라진 줄 알았는데, 변화는 황후에게도 있었다.

그렇다고 황후에 대한 모든 인싱이 바뀐것은 아니었지만, 기존에 가지고 있는 인식에 대한 변화는 생겼다.

다만 걸리는 것은 황후의 위치였다. 정확히는 그녀가 귀족파 수장의 여식이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황후가 두각을 드러내면 득세할 수 있을 귀족파 귀족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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