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2 (33/125)

                                                                      * * *                                                                       

리아는 나른함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놈의 합방이 뭐라고 자신이 이리 고생해야 하는지.

매일 아침 피부 관리를 한다고 꾸준히 마사지를 받아야 했고, 밤마다 한 시간이 넘는 목욕을 해야 했다. 자신을 꾸미는 일에 관심이 없는 리아에게 그 모든 것은 고역이었다.

이 몸을 보면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잠을 설쳐도 빛나는 피부를 보면, 그런 것 따윈 안 해도 될 것 같았지만 시녀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몸매 관리니 뭐니 하면서 간식을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디저트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거 몇 개 먹는다고 얼마나 살이 찐다고 그러는 건지.

그런 주제에 가슴살은 빠지면 안 된다고, 가슴 마사지를 받고 있는데, 아무리 같은 여자라고 해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을 주무르는 것은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냥 합방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잠수라도 타야 하는 건가. 아니면 그날 때맞춰 아픈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카르티안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었지만, 무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시녀가 재상의 방문을 알렸다.

안 그래도 짜증이 가득한데, 달갑지 않은 재상의 방문에 리아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제국의 꽃,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그래요."

명백히 나 네 방문 싫어, 라는 표정으로 리아가 인사를 받았다.

"기분이 안 좋으신 모양입니다?"

"원래도 안 좋지만, 재상의 얼굴을 보니 더 그러네요."

"하하."

리아의 솔직한 말에 재상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반응을 보며 리아는 재상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했음을 느꼈다. 전에는 자신을 향해 경계와 적의가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것이 한 꺼풀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재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죠?"

"바로 본론이군요. 사실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리아가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반응을 무시하며, 유시안이 들고 온 서류 한 뭉텅이를 리아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또 일?"

이젠 줄어들 때도 되지 않았던가.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와서도 내내 일만 해야 하는 건지.

"그냥 검토해 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검토?"

자신은 내정 담당일 뿐인데.

리아가 짜증스레 앞에 놓인 서류를 확인했다.

"어째서인지 자꾸만 장부의 금액이 맞지 않습니다."

'잘못 입력했으니 안 맞는 거겠지.'

리아가 속으로 뚱하니 생각했다.

"계산은 분명 맞는데, 이상한 일이죠.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이런 거, 이렇게 나한테 덥석 가져와도 되는 건가요? 보아하니, 재상인 그대의 일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것은 그녀의 권한 밖이었다.

"믿을 수 있는 분이 황후마마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호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리아가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보인 무례에 대해선 사과 드리겠습니다."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해서, 그때 느낀 감정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네요."

그 말에 유시안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가 달라진 후, 가장 자주 보이는 모습은 바로 저 태도였다.

황후는 정말로 솔직했다.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았다.

황성이란 곳은 그럴 수 없는 곳인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가면을 쓰는 것이 당연한 곳이었다.

그런데 황후는 그런 것 따윈 모른다는 듯,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것은 신선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자꾸 황후를 보다 보니, 의도치 않은 호의가 생기는 것 같았다.

지난번 보인 그 유능함으로 인해, 이미 한차례 황후에 대한 인식이 변하긴 했지만.

"그래서 이것을 확인해 달라?"

"네, 그렇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굳이 내가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요?"

지난번 일이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 그렇다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리아가 다소 도발적으로 유시안을 바라보았다.

황후의 말에 유시안은 드물게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가 순순히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런 반응이라니.

그도 잠시, 아주 잠깐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을 뜻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절대 들어주지 않으리라.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속에 든 가시를 숨긴 채, 유시안이 웃으며 물었다.

"그전에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 것 같으니까, 집어치우시죠."

"하하하. 그러십니까?"

"재상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는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닌데, 도움을 바라고 온 주제에 그런 태도, 매우 거슬리거든요. 내 입장에서는 안 하면 그만, 하면 그저 내 고생일 뿐인 일이라. 안 그래요?"

리아가 서늘한 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믿지 못할 거면 오지 말았어야죠. 내가 도와주겟다고 나선 것도 아니고, 본인이 제 발로 찾아온 주제에 그런 태도는 심히 무례하지 않나요?"

"……죄송합니다."

리아의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리아가 꾸민 것이 아닌 상황에야, 자신의 태도는 무례했다.

지난번 일로 인해 리아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과거의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잡고 있었다.

"게다가 뭐든 확실히 해야 한다고, 도움을 바랄 때는 당연히 그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대가없이 도와주기엔 재상과 나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닌데."

유시안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일, 고생하며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원하시는 것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솔직히 가장 바라는 건 다시는 재상의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건데."

아주 솔직한 마음을 담아 리아가 말했다.

그 말에 유시안이 움찔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저것을 조건으로 내세우려고 할 만큼 자신의 이미지가 바닥이던가.

동시에 그 말에 유시안은 자신의 의심을 완전히 접을 수 있었다.

"아예 안 볼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빚을 달아두죠."

진짜 솔직한 마음으로, 저 재상 놈을 아예 안 보든가, 아니면 몇 대 때리든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것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첫 만남 때문에도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지만, 단지 그뿐만은 아니었다. 유시안의 성격 자체가 리아와 맞지 않기도 했고, 그의 행동 저변에 깔린 의심과 그 불손함을 알기에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을 시험하려 들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딱히 바라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중의 일은 모르는 것이라고, 혹시나 자신 역시 그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는 재상이었으니까.

하다못해 황제에게 자신의 폐위를 요청할 때라던가, 아니면 나가서 살때 필요할 어떤 도움이라던가.

"그거면 되겠습니까?"

"그 빚이 단순한 빚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다시 고민해 보면, 정말 필요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에 굳이 자신이 귀찮게 그의 일을 도와줘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랬기에 생각 이상으로 귀찮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면 빠질 생각으로 리아가 말했다.

"우선 보죠. 도와줄지 말지는 그거 보고 판단하기로 하고."

"……알겠습니다."

유시안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녀가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그녀에게 무조건적인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다.

리아는 조용히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어째서 장부의 금액이 맞지 않는 건지 문제를 찾을 수 있었다.

'하여간, 이쪽 세계에 제대로 된 체계가 없다는 건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기본적인 것들도 몰라서야.'

장부의 금액이 맞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물건을 살 때의 금액과 팔 때의 금액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 금액이 다른 이유는 흔히 말하면 그 감가상각비라는 것 때문이고.

어떤 것이든, 물건의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떨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샀을 때의 금액으로 물건의 가치를 정해서 기입하면, 실제로 받은 돈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야 어려운 것이 아니기에, 리아는 친절히 그 사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고작 이런 사실 하나를 알려주는 정도로 빚을 달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이득인 일이었다.

"우선 문제는 이거예요."

리아가 한곳을 가리키 말했다.

"어째서 말입니까?"

유시안의 의문이 가득 담긴 물음에 리아는 무심한 어조로,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리아의 설명이 끝나자 그제야 유시안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리아에 대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도대체 공작가에서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러한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재상인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문득 드는 호기심에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어본다고 해서 그녀가 제대로 된 답을 들려줄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유시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방을 나섰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볼일을 끝낸 후 최대한 빨리 나가기를 바라고 있을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