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0 (41/125)

                                                                      * * *                                                                       

드디어 합방 날이었다.

그토록 오지 않기를 바랬던.

합방일이 정해진 후, 매일같이 피부 관리니 마사지를 받았지만, 오늘은 합방일이라 그런지 유난히 더 심했다.

그 전에 그래도 오전에 관리를 받고 오후에는 일할 수가 있었는데,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특히나 오늘 같은 날에는 일하기보다는 쉬라는 시녀의 권유에 리아는 일도 하지 않고서 방에 박혀 뒹굴거려야 했다.

이곳에 와서 이렇게 일도 하지 않고 쉬기는 오랜만이라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 이유가 합방 때문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합방하는 척하는 거라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이기도 했고.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잤을 때 말고는 다른 이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청한 적이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이나, 대학교에 들어가 MT를 간 적이 았다고는 하지만, 불편함에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누군가와 같이 자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리아에겐 큰 압박감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저녁이 되자 리아는 또 한 번 목욕을 해야 했다.

뭐 하러 목욕을 두 번이나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래야 한다니 따르는 수밖에.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하고 나오니, 카르티안이 보였다.

합방일이라는 사실에 긴장한 듯, 카르티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누가 보면 화가 난 게 아닌가 의시할 정도였다.

초조한 기색으로 리아를 기다리던 카르티안은 문을 열고 들어온 리아의 모습에 잠시 말을 잃었다.

아직 완전히 말리지 못한 머리에서 물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리고 있었고, 얼굴 역시 뽀얗게 붉어져 있었다.

합방을 위해 평소보다 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 탓에 리아의 몸 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카르티안은 차마 더 이상 리아를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언뜻언뜻 살결이 드러나고 있었다.

원래도 뽀얗고 고왔던 리아의 피부는 그동안의 노력으로 인해 유난히 더 빛나고 있었다. 그 살결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이 너무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백옥도 저리 곱지는 않으리라.

다른 이들은 그녀와 자신이 정말 합방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사자인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저 다른 이를 속이기 위한 연극이었다.

그러나 얇은 천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살결을 마주하니 흥분이 됐다.

그 흥분을 참기 위해 카르티안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자신의 허벅지를 가차 없이 꼬집어야 했다. 그런데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 흥분에 카르티안은 꼭 죄를 짓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저건 너무 예쁘잖아.'

애써 시선을 돌렸음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리아의 모습이 뱅글뱅글 맴돌았다.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늘 그렇듯 아름다울 그녀였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다. 누구라도 저 모습을 본다면 반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정말 사람이긴 한 걸까?'

미의 여신이 현신한다 해도, 저리 예쁘지는 못 하리라. 여신 따위와 비견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그런 카르티안의 속내는 모른 채로, 리아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옷차림에 인상을 찌푸리며 의자에 앉았다.

행동 하나하나도 어찌나 신경이 쓰이는지, 자리에 앉기도 힘들었다.

덕분에 리아는 의도치 않은 조신함을 내보여야 했다. 두 다리는 얌전히 모은 채로 의자에 앉은 리아는 앞에 앉은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이제 뭐 해요?"

"……어, 음."

리아의 물음에 카르티안이 당황하며 어색한 소리만을 흘렸다.

"그냥 자요?"

자기엔 이른 시간이라는 의미를 담아 리아가 물었다.

그러나 그 말에 카르티안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저 잔다는 말이 정말 단순히 잠을 뜻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분위기 탓인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카르티안이 두 손을 가지런히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진정하라는 듯 조심조심 자신의 가슴을 도닥였다.

그럼에도 진정하지 못하는 심장에 카르티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눈을 얌전히 내리깐 채로, 눈알만 도르륵 굴렸다.

"티안?"

자신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서, 자꾸만 딴짓을 해대는 카르티안의 행동에 리아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나, 죽으면 어떡하지?"

무심코 흘려진 카르티안의 말에 리아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카르티안에게는 리아의 의문을 해소해 줄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머리를 비우기도 벅찼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몸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귀에 울리는 이 심장 소리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누가 옆에서 북이라도 치고 있는 것 갚았다.

합방하는 척도 이렇게 떨리는데, 정말 합방을 하게 된다면 자신은 어떡하지?

복상사라는 것이 있던데, 어쩌면 자신이 그것을 경험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 복상사로 죽기 전에 리아를 보고 심장이 멈춰 죽을지도.

대답할 생각이 없는 카르티안의 모습에 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위에 놓여 있는 와인을 들었다.

딱히 할 것도 없고, 긴장이나 풀겸 술이라도 마시자는 생각이었다. 와인을 잔에 따라 마시니, 달콤한것이 딱 자신의 취향이었다.

꿀꺽하며 넘겨지는 소리에 카르티안의 시선이 리아를 향했다.

선명하게 드러난 목선을 따라 와인이 넘겨지는 움직임이 그대로 보였다. 딱히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닐 텐데도, 카르티안에게는 그것이 유혹처럼 느껴졌다.

시선만은 평소처럼 무심했지만, 그래서 더 유혹적이었다.

"티안도 마실래요?"

아까부터 자신이 와인을 마시는 모습만 빤히 보는 카르티안의 모습에 자기도 먹고 싶어서 그러나 싶어 리아가 와인 병을 들어 보였다.

멍하니 리아를 바라보던 카르티안이 홀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티안의 끄덕임에 리아는 무심히 그의 잔에도 술을 따라주었다. 쪼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르티안의 앞에 놓여 있는 잔에 와인이 가득 찼다.

"뭐 해요, 안 마시고?"

카르티안의 머릿속을 휘몰아치는 그의 감정은 하나도 모르는 채로, 리아가 여상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에 카르티안이 다급하게 잔을 들었다.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초조해지는 것이 뭐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아까부터 알 수 없는 갈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리아를 향해 고정된 탓에, 잔에 든 와인은 카르티안의 입이 아니라 옷을 적셨다.

"티안?"

저건 또 뭐 하는 거지?

리아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오늘따라 유난히 카르티안이 이상했다.

안 그래도 자신도 이런 상황이 어색해 죽겠는데, 카르티안마저 저런 반응을 보이니 더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어? 아."

리아의 부름에 와인에 적셔진 자신의 옷을 알아챈 카르티안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오늘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아니고서야 저리 이상해질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리아가 물었다.

"아…… 니, 아니."

무슨 일 따위 없었다. 굳이 집자면, 지금의 상황 자체가 무슨 일이었다.

정말로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 그냥 합방이 아니라 합방하는 척만 하면 된다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 순간을 참는 것도 엄청난 인내가 필요했고, 리아의 저런 모습을 보는 것만 해도 심쿵사 해서 죽을것 같은 것을 참아야 했다.

옷을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멍한 카르티안의 상태에 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을 건넸다.

"아."

리아가 내민 손수건을 바라보는 카르티안의 눈이 반짝였다.

"리아가 내게……."

손수건을 줬어.

신줏단지를 모시듯, 카르티안이 두손으로 공손히 리아가 내민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겨우 잡기는 했지만, 카르티안은 섣불리 손수건으로 자신의 옷을 닦을 수가 없었다.

"뭐 해요, 안 닦고?"

"아니야!"

리아의 물음에 카르티안이 큰 목소리로 부정의 말을 던졌다.

"뭐가 아니에요?"

저건 또 뭐 하자는 것인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카르티안은 계속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카르티안의 옷은 점점 더 와인에 물들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 흰색이라 와인 얼룩이 유난히 선명했다.

거의 잔에 든 와인을 그댈 옷에 쏟아 부은 탓에 젖은 부위가 적지도 않고, 꽤나 찝찝할 텐데.

리아는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걸로 어떻게 내 옷을 닦아."

카르티안의 표정은 꼭 아끼는 보물을 빼앗긴 아이의 모습 같았다.

"닦지 않을 거면 줘요."

"그…… 건 싫어."

절대 줄 수 없다는 듯 카르티안의 표정이 단호했다.

그 모습에 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뭐 때문인지 닦는 것을 주저하고 있으니, 자신이라도 대신 닦아줄 수 밖에.

카르티안에게 다가간 리아가 카르티안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잡았다.

카르티안이 떨리는 눈으로 리아를 응시했지만, 리아는 망설임 없이 손수건을 빼앗아 카르티안의 옷을 닦아주었다.

그 순간, 카르티안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세심함은 조금도 없는 귀찮음이 덕지덕지 묻은 손길이었지만, 카르티안은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손수건 너머로 그녀의 손길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카르티안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붉은 색이 되어버렸다.

차마 리아의 행동을 말리지 못한채, 카르티안은 급격한 충격에 빠져 눈만 도르륵 굴렸다.

"나머지는 본인이 닦아요."

옷에 묻는 것이야 자신이 대충 닦아주었다지만, 그 속의 몸까지 닦아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나설 생각도 없었지만, 카르티안의 모습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응."

리아는 천천히 와인을 음미하며, 앞에 앉아 있는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카르티안은 목이 타는 건지, 아니면 그 역시 지금의 상황이 어색해서 그런지 연거푸 와인을 들이마셨다.

처음에는 '그래, 마실 만큼 마셔라.'하고 얌전히 보고 있던 리아는 고민에 잠겼다.

'저건 좀 많이 마시는 거 같은데, 말려야 하나?'

그때였다.

카르티안이 와인을 한입에 털어놓은 후, 빈 잔을 테이블 위에 쾅 올려놓았다.

술에 취한 것치곤 또렷한 눈으로 카르티안이 리아를 빤히 응시했다.

묘한 일렁임을 담은 시선에 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해."

"아?"

느닷없이 사랑한다니. 취한 건가 싶었지만, 그런 것치곤 시선이 또렷했다. 말투 역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리아, 나의 황후, 사랑해."

"……그래요."

갑작스런 고백에 당황한 리아가 한템포 늦게 대답했다.

사실 사랑한다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싶었다.

사랑을 고백하는 카르티안의 모습은 전과 달랐다. 짙은 그 시선 때문인지 몰라도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게다가 사랑한다, 라.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좋아한다는 말도 직접적이진 않아도, 그런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러지, 평상시처럼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대는 나의 소중한 황후니까, 그래서 그대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너무 좋아. 심장이 벅차게 떨려."

평소의 수줍은 기색 하나 없이, 카르티안이 무심하지만 큰 일렁임을 담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내 카르티안은 리아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 행동에 리아가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런데도 물러나지 않는 카르티안의 행동에 리아가 그를 말리듯 그의 손을 잡았다.

그에 카르티안의 짙은 시선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리아의 손을 향했다.

"리아, 나의 리아."

자신의 손을 잡은 리아의 손을,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잡아채 그대로 자신의 앞으로 끌고 왔다.

이건 무슨 상황인가, 리아가 당황하는 사이, 카르티안은 그대로 그녀의 손에 입을 맞첬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과감한 행동이었다.

술을 마셔 번들거리면서도 붉은 카르티안의 입술이 리아의 손가락에 일일이 닿았다 떨어졌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가라앉은 눈으로 조용히 리아의 손과 리아를 바라보던 카르티안이 조용히 읊조렸다.

"뭘요?"

아무래도 카르티안이 취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리아가 조용히 물었다.

취한 것치고는 평소와 달라진 분위기 말고는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었다. 말투 역시 어눌함 없이 또렷했고, 그 눈 역시 몽롱함 없이 짙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확연하게 달라진 분위기가 그를 어색하게 느껴지게 했다.

남들 앞에서야 황제다운 제법 위엄넘치는 모습을 보였지만, 자신 앞에서는 아니었다.

강아지 귀와 꼬리만 없을 뿐, 영락없이 주인의 애정을 바라는 대형견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언제나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 카르티안이었지만, 이번만은 무심하면서도 큰 일렁임을 담고 있었다.

저 눈 속에 흔들리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다 알지는 못 하겠지만.

"내가 어떻게 해야 그대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해야 그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대답 없이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는 리아를 향해 카르티안은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많은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리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수없이 고민했지. 이제 와 그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그동안 그녀에게 행한 모든 것이 너무 지독하고 끔찍해서 차마 바라보기도 힘든 그것들을, 그 지난날을.

자신의 눈을 뽑으면 될까, 자신의 혀를 자르면 될까, 그녀를 모질게 대한 자신의 손을 자르고, 그 심장마저 그녀에게 바치면, 그러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녀가 원한다면 기꺼이 그럴 수 있었다.

다시는 그녀를 눈에 담지 못한다고 해도, 다시는 그녀를 향해 말을 걸지 못한다고 해도.

리아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기억을 잃은 후, 카르티안은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있을까 보, 그녀가 허상이 되어 자신의 곁을 떠나 버릴까 겁이 났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대의 손길을 바라며, 애정을 갈구하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나도 슬퍼. 가끔은 그대가 조금은 약해도 좋지 않았을까 싶어. 그러면 내가 그대를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의 자신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녀에게 자신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

리아는 혼자서도 빛이 났고, 혼자서도 그녀 앞에 놓인 난관들을 해결했다. 그 강한 모습에 이끌리면서도, 아쉬웠다. 그녀를 보호할 그 기회마저도 사라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지. 그게 내가 감수해야 할 것이라면."

혼자 답을 내린 카르티안이 비어 있는 잔에 다시금 와인을 채우며, 입에 담았다.

"리아. 내 심장을 걸고 약속해. 다시는 그대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있는 동안에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그대를 지킬 거야. 다시는 그대가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그대가 원한다면, 난 언제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

리아는 그저 조용히 카르티안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 마지막 말에서는 잠시 동요하기도 했다.

그동안 무수히 표현했단 감정이지만, 혼란스러워하던 전과 달리, 비장함이 깃든 단호한 말투 때문인지 지금만큼 이렇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리아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카르티안에겐 너무 슬픈 일이겠지만, 이 모든 상황은 리아에게는 끝이 정해진 일시적인 상황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이렇게 자신을 향해 애절하게 매달리지만, 기억을 찾으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리아."

여전히 리아의 손을 잡은 채로, 카르티안이 리아를 불렀다.

카르티안의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감정이 그 눈 속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리아를 향한 미안함, 죄책감. 그리고 리아를 향한 다정함과 짙은 온기. 리아의 감정을 바라는 애절함과 간절함.

자신이 한 말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지키고 싶다는 결연함.

거짓은 하나도 없이, 속이고 숨기는 것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그 감정들의 연속에 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술을 괜히 마셨어.'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을 없애고자 술이라도 마시자 싶었는데, 술을 마시니 더 어색하고 불편해진 것 같았다.

그것이 단순히 그가 토해내는 감정에 대한 거부감인지, 아니면 흔들리려고 하는 감정에 대한 반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리아는 정말로 혼란스러웠다.

"이제, 자자."

리아의 복잡한 속내를 모르는 채 카르티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리아를 안아 들었다.

"티안?"

자러 가자고 하는 건 알겠는데, 이게 무슨? 순식간에 공주님 안기로 안긴 리아가 당황했다.

"우린 잘 거니까."

리아의 당황을 모른 척 카르티안이 말했다.

잘 거라는 그 말이 어쩐지, 묘하게 느껴져 리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꼭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취했다고, 합방한 척하기로한 걸 잊고 진짜로 하려고 한다는가?

취하긴 했는데, 도무지 종잡을 수 없기에 리아가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자세에서 벗어나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리아가 내려달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행동에도 카르티안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그녀를 받쳐 안았다.

"얌전히 있어."

단호한 어조로 카르티안이 말했다.

"내려 주시죠?"

"얌전히 안 있으면……."

카르티안이 조용히 리아를 바라보았다. 리아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유난히 짙고 강렬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빨려들어 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에 리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잠시 얌전해진 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안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작게 갸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도 잠시.

척척 침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간 카르티안은 리아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잘 자."

애정을 담뿍 담은 목소리로 카르티안이 나직하게 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귓가를 간질이는 그 목소리에 리아가 잠시 움찔했다.

그런 리아를 카르티안이 짙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카르티안의 입이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만들어냈다.

순간, 누구라도 반할 만큼 황홀한 미소였다.

카르티안의 손이 뻗어졌다.

그 손이 어쩐지 자신의 몸을 향하는 것 같아 리아가 움찔했다.

'설마, 아니겠지?'

괜스레 드는 불안감에 리아가 잠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자신과 카르티안은 분명 합방하는 척할 거라고 했지, 절대 합방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만약 카르티안이 술 취해서 그 사실을 잊고 자신을 건드리려고 한다면, 절대 얌전히 순순히 당해 주지 않으리라.

지난번처럼 무기를 이용하지는 못해도, 잠깐 무력화시킬 수는 있었다.

상대는 남자고, 남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약점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리아가 미처 카르티안의 중요 부위를 때리기 전, 카르티안은 손을 뻗어 리아를 안은 후,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어이없게도 고로롱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잠이 든 듯했다. 자신을 압박하듯이 누르고서.

자신을 건드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척이나 다행이지만, 이 자세는 매우 불편했다.

그에 리아는 미련 없이 카르티안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나 잠이 든 주제에 힘은 어찌나 센지, 밀려나지 않았다.

몇 번 더 카르티안을 밀어내려 애썼던 리아는 자신의 힘만 빠지는 것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잠을 청해야 했다.

과연 이대로, 잠을 잘 수는 있을까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어나라고 툭툭 건드리며 깨워보았지만, 소용없었으므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