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술에 취한 채로, 금방 잠이 든 카르티안은 꿈을 꿨다.
자신의 몸인데도 타인이 된 기분이었다. 카르티안은 허망하게 앞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리아가 잔뜩 초췌한 모습으로 있었다. 외관은 화려하지만, 그 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장소처럼 리아가 있는 공간은 싸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었다. 그저 침대와 작은 테이블, 의자가 전부였다. 시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리아는 혼자 남아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어찌나 아픈지, 보는 것만으로도 카르티안은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녀의 아픔을 달래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있는 그 몸은 그저 리아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원망 어린 리아의 시선이 카르티안을 향했다.
짙은 원망과 억울함. 그리고 간절함?
리아는 그 시선으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리아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시선만은 여전히 카르티안을 향한채로, 리아가 망설임 없이 잔에 든 액체를 마셨다. 이내 리아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리아의 입 모양이 작게 움직였다.
'당신이 미워.'
선명하게 눈에 박히는 그 말에 카르티안은 심장이 뜯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 순간, 좀처럼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던 몸이 움직였다. 카르티안은 황급히 손을 뻗으며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카르티안은 화들짝 잠에서 깼다. 그러고는 곧바로 리아를 살폈다.
리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그 모습이 꿈에서처럼 정말 죽어버린 것 같아 카르티안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리아를 향해 뻗는 그의 손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리아."
'안 돼, 안 돼, 죽으면…….'
카르티안의 눈에 맺힌 눈물이 이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카르티안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인식도 하지 못했다.
자꾸 머릿속에 꿈에서 보았던 리아의 모습이 맴돌았다.
피를 흘리며 무너지는 리아의 모습과,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자신의 모습이.
어째서 자신은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던 건가. 어째서 자신은 리아를 그렇게 만든 것인가.
자신이 그녀를 죽게 한 건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수작인지 알 수 없어도 그 고통만은 선명했다.
심장을 산 채로 뜯어내도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을 터였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심장 따위 주저 없이 뜯어내 그녀에게 줄 수 있었다.
그녀가 살기 위해서 자신이 죽어야 한다면 그럴 수 있었다.
그러니 죽지만 말아줘.
차마 리아가 살아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가 두려워 카르티안은 쉽사리 리아의 상태를 확인하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리아의 볼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손에 닿은 리아의 볼이 서늘한 것만 같아 더 무서웠다.
사실은 자신의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라고 알고 있던 것이 꿈인 것 같아 너무도 무서웠다.
자신은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그녀를 보낼 준비를.
아니, 그런 것 따위 준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준비한다고 해서 사라질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주는 상처도, 그녀가 주는 것이었기에 기꺼이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거부해도 괜찮았다.
그녀가 살아만 있어 준다면, 자신의 곁에만 있어준다면.
그거면 되었다.
자신의 자나친 욕심이 그녀의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그 마음 따위 기꺼이 숨기며 참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눈물에 젖은 얼굴이 달빛에 비춰 안쓰럽게 빛났다.
몸을 잠식하는 그 큰 두려움과 불안함에 카르티안은 숨죽인 신음을 흘렸다.
"제…… 발."
그 모든 것이 꿈이길. 그녀가 자신을 떠난 것이 아니길.
카르티안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간절히 빌고 싶었다.
그때였다.
카르티안의 숨죽인 소리 때문인지, 리아가 작게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거렸다.
그 순간, 카르티안이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살아… 있어? 꾸, 꿈이야?"
카르티안이 다급한 표정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리아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뭐…… 예요?"
잠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리아의 목소리가 진득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 순간, 카르티안은 깊은 안도를 느꼈다.
그녀가 살아 있어. 그녀가 죽은 것은 꿈이었어. 그녀와 함께한 날은 현실이 맞았어.
카르티안이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지었다.
한편, 카르티안의 흐느낌에 잠에서 깬 리아는 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카르티안의 모습에 당황했다.
'아니, 얘 왜 이래?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서 이상한 짓을 하더니.'
불편함 때문에 조금 전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었다. 그랬는데, 다시 깨버린 것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서럽게도 울고 있는 카르티안의 모습이었다.
"티안?"
"응응. 난 리아의 티안이야."
카르티안이 리아의 손을 잡아 그 손에 얼굴을 부볐다.
손은 서늘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카르티안은 안도할 수 있었다.
꿈에서 깨고 난 후 자고 있는 리아를 보며, 꿈에서처럼 정말 그녀가 죽었을까 봐 확인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을 흘리며 그저 멀뚱히 그녀를 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살아 있다니. 그것이 꿈이었다니.
몸을 잠식하는 고통은 여전했지만, 그 두려움 역시 아직 남아 있었지만, 이제야 카르티안은 겨우 미소지을 수 있었다.
"리아, 죽지 마."
애절하게 리아의 손을 잡고 매달린 카르티안이 애처롭게 말했다.
"안 죽어요."
무심한 말투였지만, 안 죽을 거라는 그 말에 카르티안은 그저 기쁘기만 했다.
"응, 죽으면 안 돼. 리아가 원하는건 다 들어줄 테니까, 절대 그것만은 안 돼."
리아의 손이 한 자락 구원의 손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카르티안이 강하게 리아의 손을 움켜잡았다.
서늘한 온기라도 좋았다.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가 살아 있음을.
"뭐, 악몽이라도 꿨어요?"
이 늦은 새벽에 울고 있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멀쩡히 살아 있는 자신에게 죽지 말라고 매달리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았다.
"너무 무서운 악몽을 꿨어."
그녀와 함께 잔다는 사실에 편안히 잠든 것이 무색하게, 너무도 지독한 악몽을 꿔버렸다.
"꿈일 뿐이에요."
물론 말을 하면서도 살짝 고민이되는 부분은 있었다. 이곳에 와서 리아가 꾼 꿈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리아르나의 과거였고, 미래였다.
그랬기에 카르티안이 꾼 꿈 역시,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모님을 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카르티안에게 차마 그것이 꿈이 아닐 수도 있어요,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응, 꿈이야. 꿈."
자신을 세뇌하듯, 카르티안이 꿈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만 울어요."
세심하지는 않지만, 그를 달래려는 의도인 듯 리아가 잡히지 않은 남은 손을 들어 카르티안의 볼을 적신 눈물을 닦았다.
"내 옆에 있어줄 거지? 나를 떠나지 않을 거지?"
불안함에 떨리는 시선으로 카르티안이 매달리듯 물었다.
그러나 그 말에 리아는 답할 수 없었다. 죽지는 않겠짐나, 카르티안의 옆에 계속 있어줄 거라는 약속은 할 수 없었다.
"응?"
대답하지 않는 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안이 극심한 불안함을 느끼며 애처롭게 물음을 던졌다.
사정없이 떨리는 그의 몸이, 새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그럼에도 리아는 차마 그가 원하는 대로 계속 옆에 있어줄 거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꿈이에요. 그러니까 그리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애써 리아가 화제를 돌리며 카르티안을 다독였다.
남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것이 어색해 그 손길은 투박했지만, 카르티안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위안을 느꼈다.
"자요. 걱정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고."
"하지만 무서워. 또 그 꿈을 꾸면 어떡해? 이번엔 눈을 떴을 때, 정말 그것이 사실이 되어버리면 어떡해?"
카르티안이 애처롭게 고개를 저었다.
잠을 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또 그 꿈을 꾼다면, 자신은 정말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죽는 꿈은 단순한 꿈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벗어날 수 없는 늪처럼 그의 몸을 옥죄었다.
"괜찮아요. 지금 내가 옆에 있잖아요."
아무리 무심한 리아라도, 저리 안쓰럽게 우는 카르티안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리아가 그대로 카르티안을 잡아당겨 눕히며, 그의 가슴을 토닥였다.
엄마가 아이를 재우려는 손길처럼, 리아가 어색하지만 애써 부드럽게 그의 가슴을 쓸었다.
리아의 옆에 누워 카르티안이 슬픔이 가득 담긴 눈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카르티안은 손을 뻗어 리아를 꽉 끌어안았다.
절대 그녀를 놓지 않겠다는 듯, 절대 그녀를 잃지 않겠다는 듯.
그 꿈이 어떤 의미로 자신을 찾아 온 것이든, 자신은 절대 그녀를 그렇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절대 그녀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목숨과 바꾸는 한이 있어도.
애처롭게 몸을 떨며 자신을 안아오는 카르티안의 손길을 느끼며 리아는 얌전히 있었다. 평소라면 귀찮다는 듯 그를 떨어뜨리겠지만, 지금만은 그럴 수 없었다.
그저 괜찮다는 듯, 그를 다독일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카르티안은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잠이 들기가 무섭다는 듯,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런데도 리아는 귀찮아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심장 박동에 맞춰 토닥였다. 나중에는 팔도 조금 아파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카르티안은 겨우 잠들었다.
잠드는 그 순간에도, 카르티안은 리아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진 느낌이었다.
그 품에 안겨 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죽은 꿈을 꿨다, 라.'
어쩌면 정말 미래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바뀌기 이전의 미래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원작 속에서는 자신이 죽었으니까. 알 수 없는 존재가 개입하고, 자신이 이 몸에 빙의한 이후에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 테지만.
묘한 확신이었다. 멋대로 자신을 데려온 존재가 결코 자신을 죽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 존재가 원하는 것이 해피엔딩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자신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을 거라고.
설사 카르티안이 기억을 찾아 예전처럼 돌아간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