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얼마나 서신을 해독하는 데 시간을 보낸 것일까.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거르고 집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몸이 피곤한 탓에 입맛은 없었지만, 배는 아닌 듯 밥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티안."
"응, 리아."
리아와 함께 서신을 해독하고 있던 카르티안이 고개를 들어 리아를 바라보았다.
"나머지는 밥 먹고 할까요?"
우선 지금까지 서신을 해독한 결과 별다른 건 없었다. 게다가 단어들만 나열되어 있어, 그 단어들을 조합해 다시 또 뜻을 알아내야 했다.
산 너머 산이라 짜증이 일긴 했지만, 성과는 분명 있었다. 몇몇 걸리는 단어들이 있었으니까.
"그래."
카르티안은 식사가 그리 급하지 않았지만 몸을 생각하면 식사를 해야 했다. 특히나 리아를 위해서도.
얼마나 서신을 해독하는 데만 신경을 쓴 건지, 리아는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무언가를 하는 것도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았다.
리아만큼이나 카르티안도 답답한 상황에 피곤했지만, 그래도 리아와 한 공간에서 일하고 있다는 생각에 힘을 낼 수 있었다.
특히나 이를 통해 리아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을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면야, 며칠 밤을 세우는 한이 있어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그럼 가죠."
조금 전까지 열심히 보고 있던 서류를 꼼꼼하게 정리해,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곳에 넣은 리아가 말했다.
특별히 이번 일을 위해 책상 서랍도 개조했다. 자신의 집무실에 몰래 들어와 서신을 가져가려고 했던 이니,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카르티안 역시도 자신이 보고 있던 서류를 정리해 리아의 책상 서랍 속 넣어두며 몸을 일으켰다.
이내 둘은 집무실을 나서 식당으로 향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걷던 리아의 눈에 시녀 한 명이 보였다.
정확히는 기사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시녀가.
그 시녀는 지난번 라일라를 대신해서 자신의 시중을 들었던 시녀였다. 기사들에게 끌려나가던 시녀의 시선이 리아를 향했다.
시녀는 다급한 표정으로 리아에게 다가왔다. 기사들이 황급히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어느새 시녀는 리아의 앞에 멈춰서 있었다.
"마마!"
"무슨 일이지?"
"이건 부당해요!"
억울한 듯 소리치는 시녀의 말에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리아의 옆에 있던 카르티안 역시 서늘한 시선으로 시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감히 누구에게 말을 꺼내는 것이지?"
"하, 하지만……!"
황제의 싸늘한 말에 시녀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불만 어린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건 정말 부당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갑자기 황성에서 쫓겨나야 한단 말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물론 리아의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보고 다른 이에게 말을 전해 주긴 했지만, 이럴 정도로 큰 잘못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녀들에게 있어 일하던 곳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낙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쫓겨난 곳이 황성이라고 하면. 그 어디서도 자신을 쓰러고 하는 곳이 없을 터였다.
그런 시녀의 표정을 무시한 채 카르티안과 리아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카르티안과 리아가 막 계단 앞에서, 계단을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기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았던 시녀가 돌진하듯 거칠게 리아에게 달려들었다. 기사들이 황급히 시녀를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시녀가 리아를 계단에서 밀어버린 후였다.
리아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야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른 이가 있었다.
"리아!"
리아가 균형을 잃고 계단을 구르려고 한 순간, 카르티안이 빠르게 리아를 감싸 안았다.
계단을 구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만, 리아는 무사할 수 있었다. 카르티안이 그녀를 안고 계단을 굴렀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아는 자신을 단단하게 안고 있는 카르티안의 품을 느꼈다.
"티안?"
예상치 못한 상황에 리아가 황급히 카르티안의 품에서 벗어나며 카르티안의 상태를 살폈다.
리아를 안고 있던 탓에 그대로 계단을 굴러야 했던 카르티안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자신을 구하다 다친 카르티안의 모습에 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드시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대신해서 다칠 필요는 없었잖아.
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잠시 리아의 시선이 자신을 계단에서 민 시녀를 향했다.
시녀는 설마 황제가 리아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대신 다칠 줄 몰랐다는 듯 흔들리는 시선으로 리아와 카르티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아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부상이 크지 않았지만, 머리를 다친 건지, 카르티안은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 카르티안을 바라보는 리아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어쩌면 이대로 기억을 찾게 될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머리를 맞아 쓰러진 후, 기억을 잃었던 그니까, 이번엔 반대로 기억을 찾게 될지도.
그것을 생각하니 살짝 씁쓸하기도 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대형견 같은 그의 모습에 정이 든 듯 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었다. 그에게 더 큰 정을 주기 전에, 그가 기억을 찾게 되는 건.
그동안 그리도 바랐던 것이니, 만약 그가 기억을 찾게 된다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필요 없이 폐위를 요청한 후, 황성을 떠나갈 터였다. 그전부터 계속 생각해 왔던 것이니만큼 생각을 무를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리될 줄은 몰랐다.
물론 그가 정신을 차려야지만, 확실한 것을 알게 될 터였다.
그도 잠시, 리아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을 계단에서 밀었던 시녀와 은근히 시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던 기사.
기사는 몰랐겠지. 자신이 그것을 보았을 거라곤.
"정말 위험하네."
황성에서 정리할 이는 단순히 시녀만이 아니었다. 기사들 역시 그 대상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녀의 몸을 잡고 있다 힘을 푼 기사로서는 황제까지 다칠 줄은 몰랐을 터였다.
그저 자신을 노린 것이겠지.
그렇다고 해도 기사의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황후를 노린 것 역시, 엄연히 큰 죄였다.
이렇게 카르티안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아, 카르티안을 보고 있는 리아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특히나 그가 이렇게 다친 것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자기가 한 말은 지키겠다는건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자신을 낚아채는 카르티안의 행동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자신을 안고 있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로 다치지 않았을 텐데.
리아의 얼굴에 잠시 걱정이 서렸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바론이 들어왔다.
"어떻게 됐죠?"
"우선 시녀를 잡아 지하 감옥에 가둬 놓았습니다."
바론 역시 카르티안을 향해 걱정 어린 표정을 짓다 순순히 물음에 답했다.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황제이기에, 황제가 정신을 차리고 그가 처분을 결정할 때까지는 지하 감옥에 가둬둘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은요?"
"기사들 말입니까?"
바론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상하지 않던가요. 기사들이 고작 해봐야 시녀인 그녀를 제대로 말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리아의 말에 바론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대로 잡고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일부러 시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었죠. 그러니 시녀와 함께 그들 역시 벌을 내리는 게 맞지 않겠어요?"
"알겠습니다."
황후인 리아가 그렇다고 하니, 분명 그럴 터였다. 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이상하기도 했다.
시녀를 잡았던 기사들 역시, 황후의 명으로 감옥으로 가두러 가기 전, 바론이 잠시 멈춰서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리아가 무슨 할 말 있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는 금방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아."
바론의 말에 리아가 픽 웃었다.
리아도 알고 있었다.
가벼운 부상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리 심각한 부상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금방 정신을 차리긴 할 터였다.
다만 리아가 신경 쓰는 부분은 하필이면 그가 자신을 구하려다 다쳤다는 사실이고, 그가 기억을 찾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그런 고민이었다.
물론 고민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미 전부터 그가 기억을 찾으면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갑작스러웠다. 그와의 이별이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다. 그때문에 리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고마워요."
복잡한 속내를 숨긴 채,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그 말에 바론은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방을 나갔다.
"하던 일을 어떻게 되는 걸까."
바론이 나간 후, 조용히 카르티안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리아가 중얼거렸다.
아직 서신에 쓰인 내용을 완전히 해독하기 전이었다. 그러나 고민이 되었다. 그걸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접어야 하는 것인가.
애초에 그것을 알아내려 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였다.
자신이 언제까지 이곳 황성에 머무르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위협이 될지 모르기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하지만 이제 자신이 황성을 떠나가게 될 것이라면 상관없지 않을까.
황성을 떠날 자신이 더 이상 그들과 엮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선뜻 바로 접고 떠나야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알아낸 그것이 자신뿐 아니라 황제에게도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이야 떠나면 그만이라지만, 황제는 아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황제에게 최소한 작은 언질 정도는 주고 떠나는 것이 좋을 터였다.
"그가 정신을 차리면 어떻게 될 까."
어떤 태도를 보이든, 리아는 상처 받지 않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