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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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티안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동안에도, 리아는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곧 떠나게 될 곳이라고 해도, 어쨌든 그동안에는 열심히 해야 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가 재상의 방문을 알렸다.

"제국의 꽃,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이젠 그만 좀 봐도 될 것 같은데."

잊을 만하면 자꾸만 얼굴을 내미는 재상의 모습에 리아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너무 볼 때마다 싫어하시는 것 아닙니까?"

너무하다는 듯, 유시안이 짐짓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반응이야 너무 익숙한 것이었고, 말과 달리 유시안이 상처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죠?"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리아가 유시안을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머리를 다치셨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죠."

리아가 무심히 답했다.

"아무렇지 않으십니까?"

"뭐가요?"

"보통 기억을 잃고 난 후, 그때와 같은 충격을 받게 되면, 다시 기억을 찾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묻고 싶은 게, 황제가 기억을 찾을지도 모르는데, 어떠냐, 뭐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건가요?"

정곡으로 찌르는 그 말에 유시안은 긍정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리아가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으나, 유시안이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그녀를 향한 약간의 걱정이었다.

기억을 찾게 될지도 알 수 없고, 기억을 찾으면 카르티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기에 쉽사리 뭐라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과는 다르게 흘러갈 터였다.

이왕이면 기억을 찾고 나서도, 그녀를 향한 그의 태도가 크게 변하지 않기를 유시안은 바랬다.

프레야도 후궁으로서 나쁘지는 않지만, 황후의 유능함을 알게 된 이상, 유시안은 리아가 지금처럼 황후의 자리를 공고히 유지하기를 바랐다. 리아와 귀족파 수장인 세로니안 공작의 관계가 걸리긴 하지만.

하지만 그동안 본 리아의 성격을 생각하면, 세로니안 공작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을 것 같았다. 황제를 향한 호의를 보이지는 않지만, 황제를 향한 적의 역시 없었다.

특히나 리아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리아가 황후로서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의아하게도 세로니안 공작의 세력은 미묘하게 축소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로니안 공작이 황성의 출입을 금지 당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면, 공적인 일을 통한 황성의 출입은 가능하게 되겠지만, 황후를 사적으로 만날 수는 없을 터였다.

"제 생각이란 것이 중요한가요. 그저 상황에 맞게 움직일 뿐이죠."

"폐하께서 기억을 찾으신다면, 전과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우습네요. 설마 그거 걱정인 건 아니죠?"

설마 재상인 유시안이 자신을 걱정하다니. 처음을 생각하면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때는 그렇게도 적의를 숨기지 않더니.

물론 변한 사람이 그뿐인 것은 아니지만, 유난히 유시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리아였다.

"걱정입니다?"

억울하다는 듯 건네는 유시안의 말에도 리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의외네요."

솔직한 감상을 담아 리아가 말했다.

"뭐, 예전 마마께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진심을 담아 유시안이 말했다.

그 말에 리아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딱히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기준에서는 그런 태도를 보일 만도 했다.

다만 리아가 마음에 안 들어 했던 것은 유시안의 적의 어린 태도가 아니라, 그 짜증나는 성격이었다.

직설적으로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것을 선호하지, 그런 식으로 사람 좋은 척 돌려 말하는 것은 정말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리아르나가 처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그 이전에 유시안이 보인 태도가 좀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결국 모든 것은 상호 작용이었다.

어느 한쪽의 실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리아르나의 상황 역시 이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유시안의 입장 역시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폐하께서 기억을 찾으셔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신다고 해도, 마마의 편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그건 왜죠?"

리아의 물음에 유시안은 대답을 망설였다. 왜냐고 물으면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자신은 리아를 황후로서 인정하고 있었고, 현재 와서 그녀만큼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는 이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솔직하게 말하기엔 리아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결국 자신의 말은 그녀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땐 무시하며 모른 척하다가 이제 와서 능력 있고 필요 있다는 생각이 드니, 그녀의 편을 들어주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필요에 의해 그녀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안 들어도 알 것 같네요."

유시안의 망설임 속에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한 리아가 말했다. 그러나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자신과 유시안이 어떤 유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정치적인 이유로 엮어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호감이 있다며, 당신이 마음에 든다며 살갑게구는 것이 더 이상할 터였다. 더 믿기 힘들었다.

차라리 명백한 이유가 있으니, 그것이 더 신뢰감이 있었다. 이것저것 잴 필요 없이.

다만 그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황제가 기억을 찾으면, 자신은 더 이상 황성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편이 되어 주고 말고를 떠나.

황제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진작했을 행동이었다. 그것이 기억을 잃은 후 달라진 황제의 태도로 인해 미뤄진 것뿐이었다. 그러니 유시안의 그런 도움은 필요 없었다.

황제가 다시 자신을 냉대하든 무시하든, 전혀 상관없었고 어쩌면 오히려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야 황성을 떠나기 수월해질테니까.

"그러니까 그런 도움은 됐어요. 다만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지난번, 나에게 진 빚이 있다는 걸."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듯, 리아가 말했다.

그에 유시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저런 반응을 보니 정말 황제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둘이 종종 같이 사긴을 보내고 그러기에, 황후 역시도 황제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유시안은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시녀가 다급한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폐,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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