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리아는 늦은 시간까지 집무실에 남아 일을 했다. 그럴 정도로 일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방에 들어가서 쉬어봤자 생각만 더 많아질 것 같았다.
그랬기에 리아는 일부러 지금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한꺼번에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면서도 회의감이 들긴 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중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황성의 인력 조정이었는데, 어차피 떠날 거, 해야 하나 싶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황제가 들어왔다. 리아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카르티안의 시선 역시 리아를 향했다.
"황후가 어째서 이곳에 있지?"
"폐하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답니다."
리아의 무심한 답에 카르티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후와 같은 집무실을 사용한다는 사실보다, 그래, 그녀의 태도가.
정말 자신을 향한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오지 않는 그녀의 말투가 거슬렸다.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전에는 무심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신을 향해 냉정하게 굴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카르티안은 자신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이 떠올린 전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예전이 아니었다. 지금은 기억에 없는 그때를 떠올리며 황후의 태도를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었다.
"안전상의 이유라고?"
애써 혼란스러운 마음을 지운 채로, 카르티안이 서늘하게 물었다.
"네."
리아가 황제를 향한 시선을 거두며 무심히 말했다.
"그대에게 그럴 일이 있나?"
카르티안이 차갑게 말했다.
"제게 그럴 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동안의 기억이 없는 폐하보다 제가 더 잘 알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것은 제가 요청한 것이 아니라 폐하가 결정한 것이랍니다."
리아가 미미하게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황제의 태도를 다시 보고 있자니, 정말 조소만 나왔다.
이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라니.
혹시, 그가 기억을 잃고 보인 행동이 그동안 묻혀 있던 진심이 아닐까 싶었다.
기억을 잃은 후, 자신이 기억을 찾고 나서도 변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 말을, 그래도 약간 믿어보려 했는데.
"……."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그냥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서늘한 빛이, 자신이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그런 자신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심장이 욱신거림은 분명 그녀의 태도에 자신이 상처받았음을 알게 했다.
"믿지 않을까 봐 굳이 말씀드리면, 얼마 전에 암살자의 공격을 받았고, 제 집무실에도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증인은 바론이라고 하면, 믿으시려나요."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그런 서늘한 리아의 반응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기억을 잃기 전 카르티안이 아는 리아는 자신을 향해 가시돋친 말을 하긴 했어도, 저렇게 차갑지는 않았었다.
전이라면 그런 행동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을 자신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믿어."
자신이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카르티안은 그리 말했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서늘한 반응에서 벗어나고자.
"그럼 다행이고요. 지금이라도 불편하시다면, 다시 집무실을 옮기도록 하지요."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건네는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은 차마 그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카르티안,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지만, 그의 심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를 멀리하지 말라고, 그녀를 떠나 보내지 말라고.
심장의 소리 따윈 무시하고 싶은 카르티안이었지만, 자신의 입이 자신의 입이 아닌 듯, 그런 말을 할수가 없었다.
"그래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차피 급한 일도 없었고, 해야 할 일은 다 끝낸 상태였다. 자신을 불편해하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 이곳에 굳이 더 남아 있고 싶지도 않았다.
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리아는 집무실을 나갈 수가 없었다.
카르티안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리아는 말없이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나갈 필요는 없어."
어쩐지 침울한 기색으로 카르티안이 말했다.
"뭔가 큰 착각을 하고 계시네요. 폐하 때문에 나가는게 아니에요."
물론 아예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불편해하는 만큼이나, 자신 역시 지금의 카르티안이 불편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리아의 차가운 말에 카르티안은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에 리아가 단호하게 카르티안의 손을 뿌리쳤다.
아프지 않은 정도로 떨어진 손이었지만, 카르티안은 어쩐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리아가 카르티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으시나요?"
"……."
카르티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와 자신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러나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하고 나면, 그녀가 정말로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침묵을 통해 리아는 그의 대답을 알았다.
"다행이에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셔서."
리아는 미련 없이 문을 열고 집무실을 나갔다.
무의식적으로 리아를 향해 뻗어지려는 손을 카르티안은 애써 참아 눌렀다.
'잡으면? 잡아서 뭐라고 말할 건데?'
카르티안은 그저 조용히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혼란을 느꼈다.
"……리아."
카르티안의 입을 타고 조용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낯설면서도 어쩐지 익숙한 호칭이었다.
그걸 자각할 새도 없이 카르티안은 조금 전 리아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다행이라고 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해서.
그 말이 왜 이렇게 아프게 다가오는지. 이상하게 가슴이 시큰거렸다.
집무실을 나온 리아를 반기는 이는 바론이었다. 바론은 집무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리아를 본 바론이 화들짝 놀라며 당황했다.
"할 말이라도 있어요?"
조금 전 카르티안의 대화 덕분인지, 자연스레 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날카로웠다.
그것을 느낀 바론이 움찔했다.
"아…… 니, 저는 그냥……."
연신 자신의 눈치를 살피듯 움찔거리는 바론의 모습에 리아가 피식 웃었다. 우습게도 그 모습에 카르티안의 모습이 겹쳐졌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미 예상했던 일이니까. 물론 걱정한 것이 아니라면 미안하고요."
"아니, 아니요. 걱정한 것이 맞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왜 이리도 간사한지."
바론의 말에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리아가 말했다.
정말로 간사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그가 기억을 찾기를 바랬으면서, 막상 그가 기억을 찾으니 알 수 없는 씁쓸함을 느끼는 자신도, 기억을 잃었을 때는 그리도 자신이 좋다며 매달려 오더니, 기억을 찾았다고 그리 태도를 달리하는 황제도. 또 주변의 사람들도.
무시하고 적대할 때는 언제고, 자신이 조금 달라졌다고 이제 와 살갑게 구는 모습들이라니.
사람이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기분이 그랬다.
"폐, 하께서는 다시 마마를 좋아하게 되실 겁니다."
리아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느끼며 바론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그리고 바라지도 않아요."
'차라리 잘된 것이니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리아의 말에 바론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차가운 말이지만, 어쩐지 그것이 리아가 황제의 태도에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와 자신도, 그리고 황제도 제대로 그녀를 마주하게 된 것 같았는데. 왜 갑자기 이제 와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