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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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침실로 돌아온 리아는 바로 잠을 청하지 않았다.

오늘은 잠이 오지 않았고, 자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리아가 선택한 것은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폐위 요청서를 쓰는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렸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아주 잠깐, 집무실에서 카르티안이 예전의 모습을 보인 것 같았지만, 자신의 착각일 터였다.

기억을 찾은 그가 자신을 좋아할일은 없을 터였다. 아니, 자신을 다시 좋아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자신에겐 그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폐위 요청서를 쓴 리아는 이내 잠을 청했다. 그리고 리아는 다시금 꿈을 꿨다.

이번의 꿈은 전과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리아 혼자만 놓여 있었다.

그때였다.

흐릿한 형체 하나가 생겨났다.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네요."

익숙한 그 목소리가 리아의 귀에 흘러들어왔다. 모습은 본 적이 없지만, 그 목소리만으로 리아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그렇게도 이를 갈았던 존재니, 못 알아보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리아는 흐릿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언제 나타나나 이를 갈고 있던 참이었다. 자신 앞에 드러나면 가차 없이 때려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리아는 차갑게 상대의 멱살을 잡았다. 그런 리아의 행동에 상대는 당황했다.

그도 잠시, 리아의 주먹이 상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리아의 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상대의 멱살을 잡은 채로 연이어 공격을 시도했다. 상대가 뒤늦게 리아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지만, 리아의 공격은 가차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상대는 리아에게 잔뜩 얻어터진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럼 이제 꺼지세요."

때릴 만큼 때렸겠다, 미련 없다는 듯 리아가 말했다.

"아니, 그전에 제에게 할 말이 있지 않으실까요?"

어느새 잔뜩 공손해진 목소리로 상대가 말했다.

"아, 그러네."

상대의 말에 리아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당장 내가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요."

생각하니, 아직 덜 때린 것 같았다.

싸늘한 리아의 말에 상대가 움찔했다.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나올 줄은 몰랐었다.

리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어찌나 흉포한지, 이대로 맞아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이곳은 리아의 꿈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리아의 꿈인 이상, 그녀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고, 그녀에게 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아직 그녀는 다른 차원에 속한 존재였으므로.

"그건…… 곤란해요."

"역시 덜 때렸네."

상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아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에 상대가 움찔했다. 이번에 맞으면 정말 제대로 타격을 입을 것 같았다.

"자, 잠시만요!"

어느새 주먹을 쥔 리아의 모습에 상대가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이 차원의 신이에요."

"아, 그래요? 그것참 아쉽군요. 저는 무신론자라서."

신에 대한 존경은 개뿔, 믿음도 없었다.

"자, 잠깐 내 말 좀 들어주면 안될까요?"

"그래서 내가 얻을 것이 뭐가 있는 데요? 그쪽 때문에 피해를 본 것은 있어도, 득 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대를 도와줄 수 있어요!"

리아는 정말 그동안 만난 그 어떤 인간과도 달랐다. 신에 대한 존경은 조금도 없었고, 신이고 뭐고 상관없이 정말로 자신을 팰 것 같았다. 이미 몇 대 맞았지만.

"어떻게 도와줄 건데요? 지금 내가 바라는 도움은 그저 나를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주는 것뿐인데요?"

한 치의 틈도 없는 단호한 말에 신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도, 돌려보내 줄게요."

그런 대답을 하지 않으면 말도 못 꺼낼 것 같은 리아의 분위기에 신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럼 말해봐요."

그제야 리아가 흉흉한 분위기를 풀고 말했다.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도전적이었다.

겨우 진정된 리아의 분위기에 신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안심하기는 이른 것이, 자신의 말에 그녀가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현재 이 세계는 뒤틀려 있어요. 원래라면 황제는 황후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해야 했어요."

"그런데요?"

"알고 계시다시피 완전히 뒤틀려 버렸죠. 완벽한 배드 엔딩으로."

"그래서요?"

여전히 삐딱한 그 반응에 신은 연신 움찔거렸다.

"그래서 다시 원래의 결말로 이끌기 위해 당신을 데려오게 된 것이에요."

"왜 하필 나죠?"

그래, 이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었다.

왜 하필 자신인가.

뒤틀려 버린 것을 제자리로 찾아가게 하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상대가 신이라서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그렇게 하려고 할 테니.

"당신밖에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왜요?"

당신밖에 없다는 대답은 전에도 들었었다. 다만 왜 자신밖에 없다는 것인지, 리아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다른 영혼을 다른 사람의 몸에 데리고 들어오는 것은 위험하고 쉽지 않은 일이에요."

리아의 물음에 고민하던 신이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굳이 다른 영혼을 데리고 올 필요 없이, 그냥 원래의 리아르나에게 맡겨도 되는 거 아닌가요?"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너무 늦은 것이, 리아르나의 영혼이 너무 상해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거든요."

이미 상처받은 그녀라면, 아무리 상황을 되돌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을 것이었다.

리아르나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녀가 감당하기엔 그녀가 처한 상황이 많이 좋지 않았다. 리아였기에 상황을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었던거지, 리아르나라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리아르나는 정말로 여린 아이였으니까.

"그래서 나를 데려왔다?"

그 말만으로는 변명이 될 수 없다는 듯, 리아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의 영혼은 참으로 드물게도 리아르나가 가진 영혼의 색과 비슷했어요. 그 정도라면 무리 엇이 그 몸에 깃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설명 없이, 이렇게 데려오는 건 심히 무례라고 생각하는데요?"

단호한 리아의 말에 신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신이라고 해서 그럴 생각은 없었다. 다만 다른 차원의 영혼을 데려오게 된 만큼 신인 자신에게도 타격이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모습을 보이기에도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일련의 상황을 설명하며, 신이 사과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넘어가기엔 이곳에 와서 제가 겪은 고생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요."

"이해해요."

신이 풀죽은 기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그대로 놔뒀다간 결국 모두의 파멸을 이끌어 낼 뿐이니까."

"그래서 원하는게 뭔데요?"

"나는 당신이 부디 이 모든 뒤틀림을 해결하고 원래의 흐름대로 흘러갈 수 있게 해주길 바라요."

"신인 그쪽도 못 한 것을 인간인 내게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신인 내가 못 하는 거니까, 인간인 그대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신인 이상, 지나친 간섭은 할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아예 간섭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신인 자신은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카르티안에게 영혼을 볼 수 있는 시야를 싹틀 수 있게 했고, 프레야가 부린 수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실상 카르티안이 기억을 잃고 리아를 좋아하게 되고, 프레야를 향해 적의를 품게 된 것은 모두 다 신인 자신이 손을 썼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직접적으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 언급했듯이, 영혼의 색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로 인해 카르티안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리아에게 본능적으로 끌리게 된 것이고, 음습한 영혼을 가진 프레야에게는 적의를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도 한계가 있었다. 계속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카르티안이 다시 프레야의 수작에 당해 프레야에게 흔들리기 전, 리아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바로잡아야 했다.

자신의 힘은 점점 약해져 있었고, 도가 지나친 간섭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리아의 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미안하지 않은데, 못 해요. 그럴 능력도 없고. 나는 그저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아니요. 당신이라면 할 수 있어요. 이미 지금까지 해온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제가 바라던 것을 향해 주었으니까요."

"운이에요."

절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듯 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만, 저는 당신이, 리아, 그대가 이 모든 상황을 바꿔주었으면 해요. 물론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그대를 도와줄 거예요."

신이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리아는 그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모든 것은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신이야 자신의 차원에 속한 존재라 애정을 품고 있을지 몰라도, 리아는 아니었다.

카르티안에게 정이 든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그를 위해 이곳에 남아 도와주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기억을 찾은 후, 변해버리지 않았던가.

"부디 도와주세요. 그대가 나를 도와준다면, 나 역시 그대가 원하는대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어요."

"하아."

리아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과연 찾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신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것이 단순히 자신의 의견은 하나도 반영하지 않고 멋대로 데려온 신에 대한 거부감인지, 아니면 달라져 버린 카르티안의 태도에 대한 상처 때문인지 몰라도.

"카르티안이 다시 프레야의 수작에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게만 해주면, 당신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게요."

"……프레야만 처리해 주면 된다는 건가요?"

"……네."

사실 신이 원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프레야를 처리한 후, 카르티안의 곁에 리아가 남아 있는 것이지만, 리아의 단호한 태도를 보아 그 말은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쉽지만, 이 세계의 가장 큰 걸림돌인 프레야만이라도 해결해야 했다.

"고민…… 해보죠."

"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을 위한 선물이에요. 이것을 황제의 음식에 섞어서 먹게 한다면, 훗날 겪을 수 있는 큰 위험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신은 리아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우선 받기는 했지만, 리아는 찝찝함을 느꼈다.

훗날 겪을 수 있는 큰 위험이라니.

그 말만으로도 앞으로 자신이 겪게 될 상황이 결코 좋지 않을 것 같아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그리고…… 비록 그동안은 프레야가 카르티안에게 더 이상 수작을 부릴 수 없게 막아놓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일 거예요. 그러니 부디 부탁할게요. 그녀가 더 이상 카르티안을 휘두를 수 없게. 그래서 원하지 않는 최악의 결말로 흘러가지 않게."

신의 간절한 부탁에 리아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신 역시도, 리아에게 당장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닌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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