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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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리아는 잠에서 깼다. 리아의 손에는 신이 건넨 것이 쥐어져 있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이상, 그것을 위해서도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은 주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알 수는 없었다.

이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어떤 상황을 만들어낼지.

손에 쥐어진 것을 바라보던 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날은 밝아져 있었다.

몸은 여전히 피곤했지만, 더 이상 자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난 리아는 잠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간단하게 씻었다.

씻고 나온 리아는 협탁 위에 놓인 자신의 폐위 요청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선 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았다. 다만 그러려면, 원래 자신의 계획과 다르게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꼭 그래야 할까.

그냥 원래의 계획대로 이곳을 떠나서, 혼자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이 혼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보다 확실할 터였다.

하지만 더 이상 카르티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상처받지 않을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리아는 분명히 상처를 받았다.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다른 차원에,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하게 될 거라고는, 그래서 이런 일에 휘말릴 것이라곤.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복잡한 마음에 고민하고 있던 리아는 폐위 요청서를 들고서 집무실로 향했다.

신의 제안도 있고 하니, 하던 일은 계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서신의 숨겨진 내용을 완전히 해석하고 나면, 분명 프레야를 처리할 수 있게 될 테니까. 프레야뿐 아니라, 이 일에 아주 깊은 연관이 있는 사론티엔 후작까지도.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리아는 카르티안의 모습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그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의 차림을 보니 어제 그렇게 집무실에 온 후, 지금까지도 계속 집무실에 있었던 것 같았다.

"제국의 빛, 고귀하신 광명,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카르티안이 기억을 잃고 난 후에는 할 필요 없던 인사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몇 번 해보지 못한 인사였지만, 리아는 제법 능숙하게 인사를 했다.

리아의 인사에 지친 듯한 카르티안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 역시도, 이렇게 이른 시간에 리아가 집무실로 올 줄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인사를 생략해도 좋아."

피로한 음색으로 꺼낸진 말에 리아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폐하시잖아요."

그러니 어찌 그러겠냐는 듯 리아가 말했다.

그 말에 카르티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 폐하인 내가 하는 말이니, 응당 따라야 하지 않겠나?"

다소 강압적인 그 말에 리아가 피식 웃었다. 전에는 한번도 자신에게 그런적 없던 카르티안이었다.

그는 단 한번도 자신에게 황제로서의 권위를 내보인 적 없었다. 그저 그래 주면 안 되겠냐는 듯, 부탁했을 뿐이었다.

저런 사소한 행동에도 지난날을 떠올리는 것이 우스워 리아가 삐뚜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지요. 폐하가 그리 말씀하진다면."

"……."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민하던 카르티안이 입을 열어 물었다.

"원래도 그랬나?"

"뭘 말이죠?"

카르티안을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 앉은 리아가 되물었다.

"원래도 폐하라 불렀었나?"

"폐하를 폐하라 부르지, 뭐라고 부르나요?"

별 우스운 말이 다 있다는 듯, 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그 말에 카르티안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폐하라는 호칭이 어색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다른 호칭을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티안, 이라던가.

거기까지 생각한 카르티안은 아차, 했다.

'티안이라니. 그 무슨 애칭도 아니고.'

자신과 황후의 사이를 생각하면, 그런 애칭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폐하라는 호칭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꾸만 자신의 가슴이 말하고 있었다. 저건 아니라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정신을 차리고 난 후, 혼란스러운 마음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을 했던 카르티안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리아를 다시 보니, 그 혼란스러움이 더 진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손에 들린 그것은 뭐지?"

카르티안의 물음에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묻는 거라면, 그것은 자신의 폐위 요청서였다.

지난밤의 꿈만 아니었다면, 이리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를 보자마자 건넸을.

그러나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랬기에 대답을 하기가 망설여졌다.

한편으로는 상관없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폐위 요청을 한다고 해서, 바로 폐위를 당할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사이에 모든 일을 정리할 수도 있었다.

리아의 망설임에 카르티안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안 그래도 그녀의 차가운 행동에 자꾸만 동요하게 되는 자신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길래 저러는 건지, 망설이고 있는 리아의 모습을 보니 저 서류가 평범한 것은 아닐것 같았다.

"왜 대답을 하지 않지?"

불안함을 애써 억누르며 카르티안이 물었다.

"꼭 대답해야만 하나요?"

"대답을 꼭 듣고 싶다면."

물러남 없이 전해진 그 말에 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저런 태도를 보자니, 괜히 기분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랬기에 리아가 직접 보라는 듯, 들고 있던 서류를 카르티안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카르티안의 손에 건네줄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카르티안이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 손을 뻗어 내용을 읽었다. 이내, 서류를 읽은 카르티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폐위 요청서?"

애써 동요를 숨기며, 카르티안이 서늘하게 말했다. 한음절 한음절 끊어 말하는 것이, 그의 심기가 얼마나 상했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아니, 그보다는 상처를 받은 것에 가까웠다.

카르티안은 믿을 수가 없었다.

황후가 폐위 요청서를 내밀었다는 사실을.

"네."

보면 알지 않냐는 듯, 리아가 덤덤히 말했다.

그 행동에 카르티안의 기분은 더욱 좋지 않았다. 폐위 요청서라니, 이건 생각지도 못 한 것이었다.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그토록 바랐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아니었다.

이 폐위 요청서를 본 순간, 카르티안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머리를 가득 채우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녀가 어째서 왜.'

이렇게 그녀를 놓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그녀를 떠나 보낼 수 없었다. 그러니, 이건 아니었다. 이것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혼란에 일그러진 눈으로 카르티안이 애써 차갑게 말했다. 자신의 동요를 숨기기 위한 방법이었다.

"한 나라의 황후를 폐위하는 것이 그리 쉬울 것 같나?"

"쉽지 않겠지만, 폐하가 원한다면 어려울 것도 없겠지요."

황제의 대답 따윈, 관심 없다는 듯 구는 그 행동에 카르티안은 다시금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거절한다면?"

"이해가 안 되네요. 원래 저를 싫어하지 않으셨나요? 어쩔 수 없이 황후로 맞이한 것뿐이고, 원래 이 자리에 두고 싶어 했던 사람도 있으니."

물론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프레야가 황후의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어째서인지, 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게 아니라도, 프레야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은 정곡을 찔렸다는 듯,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냐는 리아의 말에 반발감을 느낀 동시에, 정신을 차린 후, 프레야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누구보다 좋아하고 아끼던 이였는데, 어째서 자신은 정신을 차린 후, 프레야에 대한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째서 리아의 입에서 프레야의 이름이 나오자, 기분이 나쁜 거일까.

그것은 이전처럼 리아가 감히 프레야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거부감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뭐라 설명하긴 힘들었지만, 프레야의 이름 차제가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끼게 했다. 그런 이름을 리아가 언급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정신을 차린 후에도, 이상한 일투성이였지만, 지금 느낀 감정은 그때보다 더욱 묘했다.

"……그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내 몫이야. 그대가 할 것이 아니라."

힘겹게 입을 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말을 하고나서 카르티안은 아차 했다.

어쩐지 생각 이상으로 말이 차갑게 나왔다는 생각에 혹시 그녀가 상처받았을까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리아는 덤덤했다. 그 행동에 되레 상처를 받은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은 기억을 찾은 후,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리아는 아니었다.

리아는 무슨 일이 있냐는 듯 덤덤했다. 자신이 기억을 찾든, 찾지 않았든 아무런 관심 없다는 듯. 그것이 자꾸만 그를 삐딱하게 만들었다.

"그대는 정말 관심 없다는 표정이군. 내가 기억을 찾았든, 말든."

카르티안이 묘하게 상처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기억을 잃었던 그 순간부터 예상하던 일이에요."

그랬기에 일부러 더욱 그에게 차갑게 굴며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런 자신의 행동은 옳았다.

약간 아쉬운 것은 그때 한 자락이라도 그에게 정이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째서……."

숨기지 못한 속내가 입 밖으로 그대로 꺼내졌다. 카르티안은 미처 자각하지도 못 했다.

한편 그 말을 들은 리아는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자신이 놓친 것이 있는 건가. 그의 태도는 전과 다른 듯, 묘했다. 특히나 지금만 봐도 그랬다. 자신의 폐위 요청서에 당연히 좋다구나 하고 받아들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리아는 분명히 보았다. 그가 자신의 폐위 요청서를 받았을 때 카르티안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것은 상처받았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기억을 찾은 그가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의 말 역시, 카르티안은 자신을 탓하듯 말을 꺼냈다. 기억을 찾은 그에게 자신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어째서냐는 말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 기억을 잃었기에 미뤄졌던 것들을 이제와 요구하는 것뿐이고, 그 사실에 폐하가 신경 쓰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네요."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은 동의하면서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자신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황후가 아니게 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싫어."

정말로 싫어.

힘없는 목소리로 카르티안이 말했다.

그 반응에 리아는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저 모습은 꼭 예전의 그를 떠올리게 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 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리아 역시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웠지만, 그 정도 혼란은 기꺼이 무시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대화를 단절하듯, 리아는 카르티안을 향해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고 해야 할 일을 꺼냈다.

명백한 거부에 카르티안은 격렬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원래 자신이 이렇게도 감정적인 사람이던가. 원래도 자신이 이렇게 여린 사람이던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카르티안은 수많은 감정을 느꼈다.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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