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동안 노력한 보람이 있는지, 리아는 해독하고 있는 서신에서 몇 가지 단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냈다.
그래 봤자 단어의 나열이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리아는 대략적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처음 나온 단어는 '거래'였다. 그 이후에는 '계획', '약속', '도움'이 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것을 통해 리아가 유추한 것은 후작과 프레야가 어떤 거래를 했고, 어떤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프레야가 언급한 그 도움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프레야와 후작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다는 사실을 말하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심문해서 알아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마지막 단어. 그것은 '약'이었다. 프레야는 후작을 통해 약이 필요하다고 했다.
과연 그 약은 무슨 약일까.
'그녀 본인이 먹을 약? 아니면 내게 먹일 약? 그도 아니면, 최악으로 황제에게 먹이려고 한 약일까.'
그 약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약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프레야의 방이나, 후작가를 뒤져 약을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할 명분이 없었다.
특히나 이전에는 전적으로 자신의 편이던 황제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제가 기억을 찾았고, 기억을 잃은 동안 자신과 있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때 한 약속은 아직 유효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하면 이후 프레야가 후작과 주고받을 서신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에는 프레야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던 상황이라, 다시금 후작에게 서신을 보낼 기회가 없었다고 해도, 이제는 아니었다.
그러니 황제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며, 그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다시금 그 거래를 이어가려고 할 터였다.
자신이 그들이 보낸 서신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 주고받을 서신도 같이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을 테니까. 아니, 앞으로도 자신이 확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황제가 기억을 찾았다고, 안심하고 있을 테니.
기억을 찾은 황제가 더 이상 리아의 편이 되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시간이 걸리겠네."
이왕이면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서,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는데.
확실한 증거를 잡을 때까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리아는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문밖으로 인기척이 들렸고, 리아는 황급히 서신을 서랍 속에 숨겨 놓았다. 다행히도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카르티안이었지만, 이제는 그 역시도 믿을 수 없었다.
때때로 카르티안이 알 수 없는 행동을 보이긴 했지만, 기억을 찾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보다는 프레야일 터였다.
자신이 그녀의 서신을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프레야를 의심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압박할수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가 이렇게 기억을 차리기 전, 자신의 위치를 단단하게 잡아 놓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전의 리아르나처럼 그리 순순히 그들의 수작에 당해주지 않으리라.
"제국의 빛, 고귀하신 광명,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그 행동에 카르티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 예를 차릴…… 필요는 없다고 했을 텐데."
서늘한 음성으로 카르티안이 말했다.
"필요가 없다고 해서 하지 말라는 법도 없죠."
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그에 카르티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카르티안이 집무실로 온 것은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리아를 보고 싶었다.
기억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아끼던 프레야였음에도, 프레야를 만난 이후, 카르티안은 자신의 심장 한편에 자리 잡은 그 찝찝함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예전의 그 감정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카르티안이 생각한 것은 리아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만나 봤자 불쾌하기만 하고, 화가 나기만 한 리아였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변한 것인지. 왜 자신이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인지.
게다가 유난히 자신에게 거리감을 두려는 듯한 리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부러 그런 인사를 하는 것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전에는 자신의 말에 그저 분한 듯 입술을 깨물기만 했던 리아가 이리도 당당히 자신의 말을 솔직히 말하는 것도, 낯설지만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식…… 사는 했나?"
예를 차린 그녀의 행동에 뭐라 할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뭐라 해봤자, 싸늘한 반응만 돌아올것 같았다. 그랬기에 카르티안이 화제를 돌리듯 말했다.
"……."
카르티안의 말에 리아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식사는 했냐니. 우스운 질문이었다.
기억을 잃었을 때는 종종 들었던 물음이었지만,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안 했다면요?"
"……같이하지 않겠나?"
조심스레 리아의 눈치를 살피듯 카르티안이 말했다. 그런 카르티안의 행동은 서로에게 모두 낯선 것이었다.
카르티안은 자신이 어째서 식사를 같이하자는 말에 그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고, 리아는 기억을 찾고서 자신에게 차갑게 굴던 그가 그런 말을 하며 눈치를 살피니 이상하게 느껴졌다.
자꾸만 그런 모습에서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래요."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리아는 그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로서도 왜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리아와 카르티안은 그가 기억을 찾은 후, 처음으로 같은 식사를 하게 되었다.
둘이 같이 식당으로 가는 모습에 뒤를 따르던 바론은 은근한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둘의 식사는 생각보다 더 어색하고 불펴한 기류가 흘렀다.
원래도 말이 적은 리아였다.
그런 리아였음에도, 카르티안과 같이 식사를 했을 때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카르티안이 계속해서 리아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을 가장 먼저 불편하게 느낀 건 카르티안이었다.
리아는 그런 분위기 따위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조용히 식사하고 있었지만, 카르티안은 그 분위기가 견디기 어려웠다.
애초에 리아에게 식사를 건넨 것 자체가 그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자신과 황후의 사이를 생각하면,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을 잃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지?"
카르티안의 물음에 리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재상에게 듣지 않았나요?"
리아의 서늘한 반응에 카르티안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뭘 바라고 그런 물음을 던졌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늘한 그 반응에 자꾸만 가슴이 욱신거렸다.
정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달라져 버린 카르티안, 자신의 감정도, 달라져 버린 그녀와 자신의 분위기도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대의 입에서 듣고 싶어."
"폐하께서는 기억을 잃고 나서도 황제로서의 의무를 다하셨고,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대의 의무?"
카르티안이 의아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응당 가졌어야 할, 그러나 빼앗겨 버린 그것을 다시 돌려받았으니까요."
이제 와 다시 또 가져가기라도 할 셈이냐는 듯 리아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내가 왜, 그랬지?"
혼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카르티안이 물었다.
"기억을 잃고 나니 사라진 판단력이라도 생긴 모양이죠. 아무리 황후를 싫어해도 그리 대해서는 안 된다고."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은 지난날의 자신의 행동을 떠올렸다.
무례한 말이었지만, 그 말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말을 통해 지난날을 생각하니 이상한 것들이 있었다.
리아의 말대로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좋아하는 여인을 두고, 정치적인 이유로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그 대상이 귀족파 수장인 공작의 여식이라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데려온 그녀의 행동들이 하나같이 황후로서는 부족한 부분이라 그녀에 대한 감정은 점점 안 좋아졌다.
그러나 잘 생각하면 자신으니 리아가 처음 황후가 되었을 때부터 그랬다. 그녀가 처음 황후가 되었을 때부터,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단순히 싫어한다는 이유로 행했다고 보기엔 너무도 부당한 행동을 했다.
그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고,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상대를 싫어해도, 최소한의 대우는 해주었어야 했다.
원래는 자신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래야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상하게도 그녀가 황후가 된 순간부터 그녀를 황후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최소한의 대우도 해주지 않았다.
'어째서……?'
카르티안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자신의 말에 급격한 혼란을 느끼는 카르티안의 모습을 리아가 무심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 어디서 저런 혼란을 느낀 것인지 몰라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내가 왜 그대에게……."
카르티안이 허망하게 질문을 던졌다.
"방금 말씀드렸을 텐데요."
기억을 잃었더니 잃어버린 판단력이라도 생긴 모양이라고.
리아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나 카르티안이 물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기억을 잃기전, 리아에게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리아에게 묻는다고 해서 리아가 그 해답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카르티안은 자신의 말을 정정하며 되묻지 않았다.
"식사는 이만, 하지."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카르티안이 말했다.
리아를 생각하면, 그녀가 식사가 끝날 때까지 같이 있어줘야 할 것 같았지만,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황급히 자리를 뜨는 카르티안을 향해 잠시 시선을 더녔던 리아는 무심히 식사를 이어갔다.
자신은 그저 식사하기 위해 카르티안과 온 것뿐이고, 그러니 카르티안이 자리를 떴다고 해서 식사를 중단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황제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바론이었다.
자신을 황후의 호위로 보낸 후, 복귀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기에 바론은 황제를 따라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