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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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황제가 기억을 찾은 후에도 리아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카르티안과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변했다고 하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한 참이었다.

처음에는 좀 동요하며 흔들린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니 그 역시도 사라졌다.

이젠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동시에 신의 제안에 대한 결정 역시 내릴 수 있었다.

처음에야 황제의 태도로 인한 반발심으로 인해, 더 이상 황성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망설이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자신이 혼자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본다고 해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고, 그럴 바엔 확실하게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았다.

신의 약속이니만큼 어기지는 않겠지.

결정을 내리니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정말 프레야와 황제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해결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이 좀 나아졌다.

어차피 더 이상 정을 준 이도 없었다. 이곳에서 지낸 그 시간이 한국에서 지낸 시간보다 중요할 이유도 없었다.

원래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었고, 안타깝게도 리아는 이곳에 그리 정을 주지 않았다.

"윽."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리아가 복도에 놓여 있던 양동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양동이를 발로 차야 했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넘어진 양동이에서 튄 물이 리아의 드레스를 적셨다.

"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것을 정리하느라 양동이를 미처 치우지 못했던 시녀가 황급히 엎드리며 사과했다.

리아에게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시녀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설마 나 넘어지라고 일부러 여기 놔둔 건가?"

"네? 그,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차마 리아의 얼굴을 마주 보지도 못 한 채, 시녀가 몸을 떨었다.

"그럼 됐어."

애초에 그걸 확인하려고 조금 전의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물에 젖은 드레스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많이 젖은 것도 아니고 애초에 자신의 잘못이었다.

리아의 덤덤한 말에 시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쉽게 리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괜찮으니까, 그만 일어나서 할 일 해. 그래도 양동이는 조심해서 두는게 좋을 것 같네."

급하게 양동이를 치우러 오다 자신의 행동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던 시녀를 보며, 계속 양동이를 이곳에 놓아두려고 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 감사합니다!"

설마 이렇게 쉽게 넘어갈 줄 몰랐다는 듯, 시녀가 놀란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울지는 말고."

리아가 무심하지만 나름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겨우 살았다는 안도감에 시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리아와 마찬가지로 집무실로 향하던 카르티안이 보았다.

얼핏 보면 리아가 시녀를 핍박하고, 그 때문에 시녀가 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난날 리아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카르티안은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에 카르티안은 조용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적당히 시녀를 달랜 후, 집무실로 마저 걸음을 옮기려던 리아는 카르티안의 목소리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동시에 어쩌면 기억을 찾은 그가, 당연히 자신이 그 시녀를 괴롭혔다 생각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찾은 그의 머릿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은 빙의한 자신이 아니라 리아르나, 그녀일 테니까.

"그것이……."

가까스로 황후에게 혼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지만, 황제에게 이 사실을 고하면, 황제에게 불호령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아끼는 황후가 넘어지게 하고, 그녀의 드레스를 적셨다고 황성에서 내쫓으면 어떡하지?

그 불안함에 시녀는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보이는 그대로요."

시녀가 어째서 사실을 고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다소 도발적인 리아의 시선이 카르티안을 향하고 있었다.

"보이는 그대로라고 말한다면, 시녀가 그대로 인해 울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건가?"

"그렇게 보이면 그런 거겠죠."

일부러 떠보듯 건네는 카르티안의 말에도 리아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덤덤히 말했다.

그에 카르티안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녀가 뭐라 변명이라도 하길 바랐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설명 정도는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리아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카르티안이 시녀를 향했다.

"황후가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그대가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카르티안의 서늘한 시선에 시녀는 더욱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이 대답을 머뭇거린다면, 기껏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황후가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시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 실수로 복도에 놓…… 아둔 양동이에 걸려 마…… 마께서 넘어지실 뻔했습니다."

말과 함께 처벌을 기다린다는 듯, 시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시녀의 실수가 아니라, 제 실수에요."

시녀의 편을 들어주듯 덧붙인 리아의 행동에 카르티안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가 보아온 리아를 생각하면, 이런 상황 속에서 리아가 시녀를 책하지 않고, 편을 들 듯 두둔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시녀를 추궁하며 괴롭히지 않았던가.

리아의 분위기가 뭔가 달라졌고, 자신이 아는 그 황후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처음 본 순간부터 느꼈었다.

그러나 이렇게 이런 상황을 마주하니, 정말로 그녀가 변한 것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황후가 아닌 듯 했다. 자신이 그동안 그녀를 잘못 본 것일까?

카르티안은 혼란 속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도 잠시, 카르티안은 덤덤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카르티안이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대도 집무실에 가는 길, 아닌가?"

"아아. 네."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자신의 대답에도 걸음을 옮기지 않고 멈춰 있는 카르티안의 모습에 리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같이 가자고 기다리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저기서 멀뚱히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꼭 그런 것만 같았다.

자신이 걸음을 옮기니 그제야 걸음을 옮기는 것을 봐도 그랬다.

그래도 변화가 있기는 했다.

전이라면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을 카르티안이지만, 지금은 자신과 카르티안 사이에 거리가 존재했다.

카르티안이 가장 먼저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고, 뒤를 이어 리아도 안으로 들어갔다.

카르티안과 리아는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리아는 카르티안을 향해 조금의 시선도 던지지 않고,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카르티안 역시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하려 했지만, 자꾸만 리아에게 시선이 갔다.

특히나 조금 전의 상황이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기억을 찾아 정신을 차린 이후, 그 앞에 있는 모든 상황은 그의 생각과 달라져 있었다.

프레야의 모습도, 리아의 태도도, 그리고 자신의 감정도.

리아를 둘러싼 환경 역시 변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제라도 자신의 잘못을 안 후, 카르티안은 자신이 먼저 나서서 상황을 변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이 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아서 되찾아 왔다.

그 사실이 살짝 쓰리기도 했다.

자신의 도움 없이, 그렇게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음에.

자신의 도움은 그녀에게 필요하지 않는 것 같아서.

조용히 일하던 리아는 아까부터 자신에게 꽂혀 있는 카르티안의 시선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

리아의 물음에 카르티안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카르티안의 머릿속엔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억을 잃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면, 그래도 이 혼란이 해소될 것 같은데, 아무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유시안은 알아서 찾아보라는 듯, 그저 간단한 일만 이야기해 주었고, 리아는 정말 그 어떤 것도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땐 왜 그랬지?"

카르티안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말이죠?"

단지 왜 그랬냐는 말로는 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탓에 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기억…… 속의 그대는 항상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괴롭히고 핍박했었다."

워낙 한 일이 많아 무엇을 말하는 건가 싶었던 리아는 그 말로 인해 알 수 있었다.

동시에 하아, 하며 한숨이 나왔다.

'이 질문, 전에 바론에게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이런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정말로 예전과는 다르다는 뜻일까?

그 당시, 바론이 자신에게 저런 질문을 던졌을 때는 자신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그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카르티안 역시 그런 것일까? 하지만 이제야?

'그 질문, 내가 이 몸에 들어와서가 아니라 리아르나가 이 몸의 주인이었을 때 던졌다면 좋았을 텐데.'

리아르나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런 질문을 받았다고 솔직히 말했을까 싶었지만.

"고슴도치의 등에는 가시가 가득하죠. 하지만 아무 때나 그 가시를 세우지 않아요."

그 말을 끝으로 리아는 다시금 책상 위 놓인 서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리아의 말을 들으며 카르티안은 고민에 잠겼다. 직접적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고슴도치가 위협 앞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세운 것처럼, 그녀 역시 그랬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과거를 떠올려 보면, 그녀의 상황은 정말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미안."

카르티안의 입에서 작게 흘러나온 그 사과에 리아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기억을 찾은 그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렇기에 아주 잠깐, 기억을 잃은 후, 자신을 졸졸 쫓아다니던 카르티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이죠."

기억을 찾았기에 달라진 카르티안이니, 그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 역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그동안 기억을 잃은 카르티안에게 보인 그래도 따뜻함 한자락 섞인 모습과 달리, 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도 지금은 너무 늦을까, 다시 되돌리기엔.

카르티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제 와 이 모든 것을 깨달아버린 것도, 그것을 깨달은 이후, 자신이 왜 이렇게 죄책감을 느끼는지.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상황이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그런 카르티안의 기색은 모르는 척 하며, 리아는 할 일을 계속했다.

드디어 대충의 끝이 보였다.

완벽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황성 인력에 대한 정리가 끝났다.

이 이후로도, 후작이나 프레야의 수작인 것 같은 이들이 있으면 추가적으로 조정을 요청하겠지만, 우선은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시간을 끌수록 좋지 않았고, 최대한 빨리 황성에 숨어든 그들의 세력을 정리해야 했다. 그래야 자신도 움직이기가 수월했다.

누군가에게 감시당해, 자신의 움직임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리아는 가지런히 정리된 서류의 내용을 다시금 확인하며, 카르티안에게 다가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자신도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먼저 다가옴에 카르티안이 묘하게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가 단지 서류 하나를 건네주기 위해 그랬다는 것을 알고 실망했지만.

그도 잠시, 카르티안은 자신의 이런 감정이 매우 익숙함을 느꼈다.

"이건…… 뭐지?"

"보면 아실 텐데요."

리아의 대답에 카르티안은 자신도 모르게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입을 꾹 닫은 그 모습이 예전과 같았다.

"……그래."

힘없이 대답하며, 카르티안이 황제의 인장을 꺼내 서류에 찍었다.

그 행동에 리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순순히 인장을 찍어도 되는 거야?'

"왜 그러지?"

리아의 표정을 예민하게 알아챈 카르티안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니요. 원래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해도 되는 건가요?"

기억을 잃었을 때와도, 원작 속의 모습과도 다른 행동을 보이던 카르티안이지만, 자신의 결정에 어떠한 의문도 없이 바로 승인하는 것이 어색했다.

"아."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도 조금 전 자신이 한 행동을 인지했다. 미처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당연하다는 듯 인장을 찍었다. 그녀가 행한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믿을 수 있다는 생각에.

리아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런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대를 믿어."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어색한 말이었다. 자신이 황후보고 믿는다는 말을 하게 될 줄이야.

그러나 동시에 익숙한 느낌이 드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요청이 아니라도, 카르티안은 황성 사람들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머리를 다쳐 기억을 찾게만든 그 시녀도, 그 시녀를 제대로 잡지 못한 기사들도, 그 외에도 많은 것이 거슬리던 참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음식에 무언가를 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도.

아직 확실하진 않았다.

정말 자신이 프레야에게 휘둘려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 약 때문이 맞는지, 프레야가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황성 내 사람들을 정리할 필요는 있었다.

다만 추가적으로 살짝 수정할 생각은 있었다. 그 수정이라고 해봤자 리아의 서류에 적힌 사람들 외에 다른 이들을 추가하는 정도겠지만.

한편 리아는 카르티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믿을 수 없었다.

"저를 믿는다고요?"

"그래."

"어째서요?"

기억을 찾은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 리아가 되물었다.

"그냥 그래도 될 것 같으니까."

두루뭉술한 대답이지만 얼핏 단호함을 담아 카르티안이 말했다.

말하면서도 카르티안은 자신의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녀를 잘못 생각하고, 편견 속에 가두었던 만큼 오늘 본 리아의 모습을 믿고 싶었다. 정신을 차린 후, 리아에게 느꼈던 그 감정을 믿고 싶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네요."

리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째 자신이 이곳에 빙의한 이후부터, 모든 것이 다 달라진 기분이었다. 카르티안이 기억을 잃은 것도, 그래서 자신에게 그리 대한 것도.

심지어 이제는 기억을 찾았음에도, 카르티안이 원작의 내용과 달라져 버렸다.

지금의 카르티안의 모습을 설명하면, 기억을 잃었을 때의 모습과 책속에 묘사되었든 모습의 그 사이 어디에 있는 것 같았다.

과연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신이 말한 그 수작으로 인해 그리된 것인지.

리아는 애써 고민을 뒤로한 채,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였다.

그들의 집무실을 방문한 이가 있었다. 시녀의 안내와 함께 들어온 이는 프레야였다.

"제국의 빛, 고귀하신 광명,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프레야가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정중하게 인사를 고했다. 그러면서 프레야는 은근히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의 황제라면, 자신의 이런 인사에 그런 예는 필요 없다며 그리 말을 할 터였다.

"여기엔 웬일이지?"

카르티안이 무심히 말했다.

그 말에 프레야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생각한 반응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인사에도,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넘겼다. 더불어 그의 반응 역시 전과 달리 무심했다.

이전이였다면 자신의 방문을 반가워했을 그가 지금은 마치 자신의 방문이 달갑지 않다는 듯 굴고 있었다.

"그저 폐하께서 오시지 않기에……."

떨리는 목소리로 프레야가 답했다.

"바빴네."

카르티안이 차갑게 말했다. 그 말에 프레야가 뭐라 반응하기 전, 카르티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대의 눈에는 황후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야."

"……네?"

황제의 말에 당황스러워하는 프레야의 눈에 그제야 황제와 같은 집무실에 있는 리아가 보였다.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거지?'

프레야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황제가 문제 삼은 이상, 황후에 대한 인사 역시 올려야 했다.

전의 황제라면 자신의 이런 행동에도 아무 말 않고 넘어갔을 텐데, 어째서.

"제국의 꽃,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프레야가 힘겹게 리아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래요. 오랜만에 뵙네요."

딱히 프레야의 인사를 바라지 않았지만, 인사를 했으니 받아야 할 터였다.

황제만큼이나 무심한 리아의 말을 들으며, 프레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마께서 이곳에……."

그동안 페이드궁에 갇혀 있었던 터라, 리아가 황제와 집무실을 같이 사용하고 있던 사실을 모르고 있던 프레야였다.

"있으면 안 되나?"

리아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 카르티안이 차갑게 말했다. 그 말이 어찌나 차가운지, 프레야는 또 한 번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아…… 니요, 저는 그냥 궁금하여……."

황제와 같이 있는 리아의 모습이 분했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프레야는 애써 속마음을 숨긴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궁금한 것도 많군. 내가 황후와 같은 집무실을 사용하든 말든 그대가 상관할 일은 아닐 텐데."

카르티안의 말에 프레야는 분함을 느꼈지만, 애써 미소를 지어야 했다.

"폐하, 제가 폐하와 함께 차를 마시고 싶어, 차를 준비했어요."

애써 카르티안의 반응을 무시하며, 프레야가 살갑게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그에 프레야가 드레스 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 카르티안이 한숨을 쉬며, 손님을 위한 소파로 몸을 옮겼다.

카르티안의 뒤를 따라 프레야 역시도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이내 시녀가 차를 들고 왔다.

프레야를 바라보는 카르티안의 표정에는 혼란이 가득 했다. 그도 이렇게까지 차갑게 굴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꾸만 그렇게 되었다. 그 역시 살가운 어조로, 그렇게 친근하게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그것이 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후, 그녀를 만났을 때 느낀 그 거부감은 여전했고, 오히려 더 심해진 기분이었다. 특히나 리아와 있는 이곳에 그녀가 방문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를 한 잔 더 가져오게."

황제의 명에 시녀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차를 더 가져오기 위해 집무실을 나갔다.

"리아. 그대도 같이 차를 마시지 않겠나?"

무심한 듯 건네진 그 말에 프레야와 리아 둘 모두 반응을 보였다.

프레야는 황제가 황후를 내쫓지 않고 같이 차를 권유했다는 사실에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고, 리아는 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애칭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작 리아, 라고 부른 당사자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예 자리까지 비켜줄 요량으로 리아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같이, 마시고 싶어."

어쩐지 애절함까지 머금은 그 말에 리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앉은 소파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그에게 휘둘리게 된 자신이.

소파에 앉으며 리아는 프레야의 반응을 살폈다.

프레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하기야 그렇겠지.'

황제가 기억만 찾으면 자신을 다시 봐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후인 자신이 다시 냉대를 받으며 원래대로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를 않으니.

잘된 일이긴 했다.

황제가 프레야를 보호하고 나선다면, 프레야를 처리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에서도 곤란할 테니까.

다만 기억을 찾은 후에도, 황제가 프레야를 냉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도 당연히 그가 다시 프레야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그리 생각했는데.

"그런데 폐하."

프레야의 말에는 무심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 달리, 리아가 먼저 말을 걸어오자 카르티안이 화색을 띄웠다. 너무나 선명한 반응이었다.

"제가 목이 너무 말라서요."

"그러면 내 것을 먼저 마시고 있겠나. 나는 괜찮으니까."

"고마워요."

리아는 사양 않고 카르티안이 건넨 잔을 받아들었다. 이는 일부러였다. 후작과 프레야가 보낸 서신에 약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 약이 누굴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프레야가 차를 직접 준비했다는 말에 신경이 쓰였다. 혹시나 그녀가 준비한 차에 어떤 약이 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독은 아닐 터였다. 그냥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야의 목적이 황제를 죽이는 것은 아닐 것 같았기에. 그랬기에 자신이 대신 마시겠다고 말을 한 것이었다.

리아는 덤덤히 차를 마셨다. 그러면서도 프레야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했던 리아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는지, 리아가 황제의 차를 마시자 프레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것이 둘만의 시간을 방해한 자신의 행동 때문인지, 아니면 황제의 차에 정말 무언가를 타서 그 계획이 실패하여 그러는 것인지는 몰라도.

뒤이어 시녀가 차를 들고 왔고, 그 차는 자연스레 황제의 몫이 되었다.

의도치 않게 셋이 차를 마시게 된 그들 사이에선 침묵이 흘렀다.

카르티안은 프레야에게 말을 걸 생각이 없어 보였고, 리아도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당황스런 기색을 보이고 있는 건 프레야였다.

"모, 몸은 좀 어떠신가요?"

어떻게든 대화를 만들어보고자, 프레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멀쩡해."

"정말 다행이에요. 세상에 그런 일이라니."

프레야가 과장스런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리아, 그대는 알고 있나? 시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자신이 먼저 꺼낸 화제임에도, 카르티안의 관심이 리아에게로 향하자, 찻잔을 든 프레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황성에서 쫓겨나게 된 자신의 처우가 부당하다 생각해, 저를 노린 것이었어요."

리아의 말에 황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 시녀와 기사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나를 다치게 했으니, 그것을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는 깊은 죄다."

결국 그들을 죽였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연민이 느껴져서가 아니라, 그들을 심문하면 뭔가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황제가 아니라 황후인 자신을 노린것이라고 해도, 이는 큰 죄였다. 황후 시해죄도 황제 시해죄만큼이나 중범죄였고, 사형이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황성에서 쫓겨나는 것이 분해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기엔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다치게 해서 무엇을 얻게 되기에 그런 행동을 한 건가 싶었다.

"그대는…… 괜찮나?"

너무 늦은 질문이긴 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후, 카르티안은 혼란의 나날을 보냈다. 그 탓에 미처 리아도 다쳤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것이 답답하기도 했다.

"다행히도요."

카르티안 덕분에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할 수 있었다. 그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해야 하지만, 리아는 하지 않았다.

자신을 구해 준 것은 기억을 잃은 카르티안이지, 눈앞의 카르티안이 아니었다.

예전과 달라졌고, 그랬기에 둘은 구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그렇게 되었다.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기억을 찾았다고 달라진 그의 태도에 생각보다 많은 상처를 받은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정말 다행이야."

카르티안 역시도 감사 인사를 받기 위해 꺼낸 말은 아닌지, 리아의 대답에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카르티안이 기억을 찾고 정신을 차린 후, 처음으로 보는 미소였다. 그 미소만 봐도,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자신이 봤던 카르티안의 미소는 좀더 풋풋하고 귀여웠었다.

한편, 프레야, 자신이 먼저 꺼낸 대화임에도 자신은 배제된 채, 카르티안과 리아의 대화로만 흐르자 불안함을 느꼈다.

다시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거라는 생가과 달리, 변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기껏 준비한 차 마저도 황후가 대신 마셔버렸으니.

"카르티안."

프레야가 폐하라는 호칭 대신, 예전에 부르던 그 이름을 부르며 황제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프레야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을 들은 카르티안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이전 자신이 허락한 것이 있으니, 당연한 부름이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니, 꼭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인지. 황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생각하면 전혀 이렇지 않은데.

카르티안은 자신의 감정임에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왜 부르지?"

카르티안이 애써 뒤틀린 속내를 숨기며 차갑게 말했다.

"날도 좋은데, 저와 같이 산책하시지 않겠어요? 오랜만이잖아요."

프레야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미안하게 되었군. 바빠서 말이야."

명백한 거절이었다.

"그러면 기다릴게요."

프레야의 말에 카르티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이랬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면, 프레야는 먼저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고, 설사 요구해도 자신이 거절하면 괜찮다는 듯 뒤로 물러났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가 보인 행동은 그때와 달랐다. 바쁘다는 자신의 말이 결국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텐데도.

"글쎄. 과연 언제 시간이 될지 모르겠군. 아마 꽤 오랫동안 바쁠 예정이라."

설마 이 정도로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는다면, 좀 짜증이 날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 말에 프레야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애초에 일을 하다 말고 차를 마시게 된 것이었다.

카르티안의 입술에 나온 축객령에 프레야가 입술을 깨물며 집무실을 나가야 했다.

"좋아하던 여인이 아닌가요."

딱히 간섭할 생각은 없었지만, 프레야를 대하는 황제의 태도가 이해가 안 되기에, 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말을 던졌다.

그 말을 들은 카르티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대가 상관할 바는 아닐 텐데."

이렇게 차갑게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이 프레야를 여전히 좋아한다고 리아가 생각하는 것이 싫었다. 어째서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싫은지, 알 것도 같았지만 카르티안은 애써 모른 척했다.

"……."

차가운 카르티안의 말에 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굳어진 그녀의 표정이, 지금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 모습에 카르티안은 크게 반응했다.

"그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어."

뒤늦게 카르티안이 어조를 누그러 뜨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에요. 맞는 말이죠. 제가 뭐라고."

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평소보다도 더 싸늘한 반응이었다.

"아니, 아니야. 해도 돼, 얼마든, 언제든지."

카르티안이 황급히 리아의 말을 부정하며 나섰다.

그 모습을 리아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자꾸만 과거의 그의 모습이 겹쳐져 참으로 난감했다.

"나는 이제 프…… 레야를 좋아하지 않아."

그토록 좋아하더니,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신의 모습이 좋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리아가 자신을 그녀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싫었다.

"감정이 그리도 쉽게 변하는 것이 던가요."

그래서 자신에 대한 감정 역시, 단지 기억을 잃고 찾았다는 이유로 그리 쉽게 변해버린 것이고?

물론 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에는 신의 수작이 있었음을.

신이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카르티안이 영혼의 색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고.

그러나 이제 생각하니, 그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었다는 뜻은 아닌데, 어째서 자신을 좋아하게 된 거지? 영혼의 색이 뭐 어떻기에.

설마 영혼에게도 외모라는 것이 있나 싶어 다소 신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쉽게 변한 것이 아니야……."

그도 자신의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그토록 싫어했던 리아이고, 그토록 좋아했던 프레야인데. 그 감정이 이리도 순식간에 변해버릴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결코 가벼운 것도 아니었다.

카르티안의 말에 리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속내는 달랐지만.

그의 그런 말에 리아는 아주 잠깐 흔들렸다. 어쩌면 그가 지금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그의 말대로 정말로 프레야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자신은 돌아가기 위해 이곳에 남아 있는 것뿐이고, 결국 떠날 이였다. 그가 지금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불쌍한 이는 카르티안일지도 몰랐다. 결국 프레야의 수작에 휘둘려 자신이 정말로 좋아했을지도 모르는 여자를 잃고, 끝에 가서는 아무도 곁에 남지 않게 될 테니까.

이제야 겨우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자신의 마음도 인지하게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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