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9 (70/125)

                                                                      * * *                                                                       

카르티안의 진심 어린 사과 이후, 리아와 카르티안의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저 카르티안을 대하는 리아의 태도가 전보다 아주 살짝 부드러워졌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말속에 서려 있던 날이 아주 조금 무뎌졌다.

그런 상황 속, 리아는 한 시녀의 방문을 받았다. 리아는 자신을 찾아온 시녀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것은 기분이 좋아서 웃는 미소가 아니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대한 조소였다.

"그러지. 내가 친히 페이드궁으로 찾아가겠다고 전해."

언제나 그녀가 손을 뻗을까 했는데, 오늘인 모양이었다. 오늘 이렇게 자신에게 티타임을 가지고 싶다고 시녀를 통해 말을 전한 것을 보니.

그러나 프레야를 만나기 전, 리아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완벽한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 완벽한 프레야의 몰락을 위해서.

그랬기에 리아는 간단하게 준비를 한 후, 집무실에 들러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던 서신을 들고 유시안을 찾아갔다.

유시안에게 향하기 전 집무실 앞에서 카르티안을 마주치긴 했지만, 리아는 간단한 인사만을 올린 채 그를 무시했다. 정확히는 카르티안에게 신경을 쓸 영유가 없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카르티안이 상처받을 것을 알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런 리아의 행동에 카르티안은 상처를 받은 듯했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음, 마마?"

오늘로 두 번째 방문이었다.

리아의 방문은 예상외였지만,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유시안이 다소 긴장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때 리아가 자신에게 약초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말했을 때, 자세한 이야기는 그 약초에 대해 알아내면 알려준다고 했었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방문한 것은 그 때문일 터였다. 프레야, 그 후궁과 관련된 그 비밀스런 이야기를 알려주기 위해.

달라진 리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유시안이었지만, 그녀가 절대 확신 없이 섣부르게 말을 꺼낼 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 말을 꺼내려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뜻이었다.

유시안은 리아에게 자리를 권했고, 리아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잡았다.

유시안은 조용히 시녀에게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 것을 명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전해 줄 것이 있어요."

말과 함께 리아는 가지고 온 서신을 그에게 건넸다.

유시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리아가 건넨 서신을 받아 들었다.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던 것이지만, 이젠 끝이 왔으니까. 이것은 사론티엔 후작과 프레야가 서로 주고 받은 서신이에요."

"후작과 후궁 마마가 말입니까?"

예상치 못한 조합에 유시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둘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어요. 그것은 재상이 따로 알아보길 바라요. 그 목적이 무엇이든, 그들이 저지른 일들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니까."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음을 암시하는 리아의 말에 유시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리아는 말을 이었다.

"프레야와 후작이 주고받은 서신에는 숨겨진 내용이 있었어요. 철저하게 암호로 숨겨져 있었지만, 그것을 알아낼 수 있었죠. 제가 알아낸 단어는 거래, 계획, 도움, 약 등이 있었죠. 그거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보다 확실한 것이 있죠."

리아는 지난번 재상에게 알아보라고 했던 그 약초들에 대해 말을 했다.

그 약을 누가 보낸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추측하고 있는지.

그 모든 내용을 들은 유시안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심각하게 굳어 졌다. 그만큼 리아에게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결국 그녀의 말을 따르면, 프레야와 후작이 손을 잡고 의도적으로 황제에게 접근해 약을 탔으며, 황후인 리아마저도 흔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둘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그 목적은 모른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어요. 그래서 미끼를 던져 보려고해요. 재상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얼마나 극적으로 잘 이끌고 가 원하는 결말에 도달할 수 있게 할지예요. 증인이 재상이라고 하면, 증인에 대한 신뢰도 얻을 수 있겠죠."

라아가 굳이 약초를 혼자 알아보지 않고, 재상에게 부탁한 것은 이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재상을 증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러나 리아의 말에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느낀 유시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미끼가 무엇입니까?"

"지금 상황에서 그들이 제일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 자."

"설마, 황후마마 본인을 미끼로 내세우려고 하는 겁니까?"

그건 말도 안 된다는 듯 유시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만큼 가장 효과적인 덫도 없죠."

"하지만 마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리아의 말은 맞았다. 단순한 서신만으로도 완벽하게 그들을 옭아맬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 상황에서 리아가 스스로 미끼가 되어 그들을 덫에 빠뜨린다면 보다 확실하게 그들을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자칫하다간 리아가 정말로 위험해질 수 있었다. 리아의 위험도 위험이지만,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그 이후에 카르티안이 보일 반응이었다.

카르티안은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었지만, 유시안은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이 결국은 리아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감정은 생각 이상으로 깊다는 것도.

"폐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곧 알게 되겠죠."

결국 황제에게는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폐하께 언질이라도 하시는 게……."

"말하면 분명 반대하겠죠."

"하지만 마마……."

유시안은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기에 걱정이 되었다. 혹시라도 황제가 극심한 상처를 받고 방황할까 봐. 모든 것을 놓게 될까 봐.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도박은 나도 즐기지 않아요. 그러니 걱정은 마세요. 싫다면 빠져도 상관 없어요. 마무리도 내가 하면 그만이니까."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유시안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몰이요."

사냥감을 잡기 위한.

그것을 끝으로 리아는 더 이상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말로도 충분했다. 자신이 그에게 바라는 것은 말 그대로 뒤처리였다. 그러니 대략의 상황만 안다면, 그것을 수행하는 데 무리는 없으리라.

사실 리아도 고민이 되긴 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선 극적인 효과가 필요했다.

리아도 아무런 대책 없이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짐작하고 있는 바가 있었고, 믿는 이 역시 있었다.

리아는 전쟁에 나가는 기사와 같은 모습으로 프레야가 있는 페이드궁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카르티안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맴돌았지만, 리아는 애써 생각을 지웠다.

"제국의 꽃,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여전히 초췌하긴 하지만, 다소 밝은 기색으로 프레야가 리아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앉아요."

무심하지만, 전보다는 살가운 어조로 리아가 말했다.

테이블에는 티타임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나 보네요."

리아가 짐짓 걱정하는 척 말을 건넸다. 그 말에 프레야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쨌든 프레야도 폐하의 후궁이니까요."

속내는 그것이 아니었지만, 리아가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저의 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프레야의 그 말만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청을 받아주지 않았으면, 자신의 계획은 시도도 해보기 전에 실패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 말에 리아가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모르겠지, 자신이 어째서 그녀의 청을 받아준 것인지. 사실은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이 아니라, 프레야 본인의 마지막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이로 인해, 기나긴 장정이 드디어 끝나게 될 터였다. 그동안 이곳에서 겪어야 했던 그 고생도, 의도치 않은 상황들로 받아야 했던 스트레스도.

프레야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그보다 의외네요. 설마 폐하께서 아직까지도 그대를 페이드궁에 머무르게 할 줄이야."

페이드궁에 어떤 곳인지는 리아도 대충 알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놀고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얼마가 될지 몰라도, 이곳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책을 읽었으니까.

책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엔 한계가 있다고 하지만, 필요한 것들은 다 알 수 있었다.

"제가 부족해서 그러는 것인걸요."

프레야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미안하게 생각해요. 프레야는 제가 무시를 받았을 때도 그리도 나를 생각해 주었는데, 나는 그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네요."

말은 살갑게 전해졌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는 그것이 아니었다. 프레야가 사실은 자신을 생각해 주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프레야가 그 뒤에서 어떤 일들을 벌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그녀를 위한 선물을 준비한 상태였다.

살짝 아쉬운 것은 그 결말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재상의 성격은 마음에 안 들어도 그 능력은 인정하고 있었고, 그 뒤에 이어질 일들은 무사히 잘 처리해 주리라.

다만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카르티안이었다.

그동안 카르티안에게 차갑게 군 것이 무색하게, 이 순간이 되자 그가 걸렸다.

유시안이 걱정하던 것을 리아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를 집아 프레야를 처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사이에 자신은 또 다른 위험을 겪을 수 있었다. 그때는 카르키안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의 이 방법이 다소 위험하긴 하지만 그만큼 확실한 것도 없었다.

그날의 사과 이후, 카르티안을 향한 감정이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프레야를 처리하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카르티안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의 결정을 무를 수는 없었다. 그저 그가 금방 충격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완전한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인사를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마지막 인사를 건넨 순간, 카르티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과연 그 모습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그저 이런 방법이지만, 그의 가장 큰 위협인 프레야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리아는 충분한 보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이내 시녀가 차를 들고 왔다.

리아는 덤덤히 찻잔을 들었다. 차를 입에 대기 전, 리아는 조용히 프레야가 차를 마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원작 속에서는 리아을나가 프레야의 차에 독을 타고, 그 독을 마신 프레야가 위험해졌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차에 독은 탄 것은 프레야 본인이었다. 리아르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리아는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프레야는 자신이 그 계획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테니.

이를 위해 사전에 시녀도 매수했다. 이미 황성의 모든 인력을 자신의 손으로 바꾸어놓았기에, 시녀를 매수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황성에 일하는 대부분의 일은 프레야나 후작과 상관없는 이들이었다. 혹시 그녀가 의심할까, 지나치게 자신에게 호의를 느끼는 시녀들도 멀리 배치를 한 상태였다.

리아의 마음도 모른 채로 프레야는 차를 마셨다.

그도 잠시, 프레야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쯤이라면 효과가 보여야 할 텐데,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효과가 좀 늦게 나타나는 것일까.

프레야의 동요를 보며, 리아도 그제서야 차를 마셨다.

독이 든 차는 프레야의 잔이 아니라, 자신의 잔에 들어 있었다. 시녀에게 잔을 바꿔치기할 것을 부탁했으니까.

리아가 가볍게 차를 비운 순간, 리아의 입을 타고 피가 흘렀다.

리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천천히 무너지는 리아의 모습에 프레야가 경악했다.

눈을 완전히 감기 전, 리아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리아의 입아에는 아주 작은 미소가 서렸다.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간 것에 대한 만족스러움이 담긴 미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