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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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적당히 볼 만큼 봤다는 생각에 리아는 잠시 쉬기 위해 비어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 오래 돌아다닌 것 같지는 않은데, 그동안 자리에 앉아서 일만하다 보니 체력이 좀 준 것 같았다.

아니면 이 몸이 자신의 몸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밴치에 앉은 리아의 눈에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먹고 싶어?"

리아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빠르게 알아챈 카르티안이 물었다.

리아의 시선을 따라가니 과일 사탕을 팔고 있는 노점상이 보였다. 달달한 것을 좋아하는 리아이니, 저것 역시 좋아할 터였다.

"먹어보고 싶긴 하네요."

특히 그 과일 사탕의 모습이 자신이 한국에서 익히 보던 그것과 꼭 닮아 있어 반가운 기분도 들었다.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은 근처를 따르던 기사를 시켜 과일 사탕 몇 개를 사 오게 했다.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엔 리아를 혼자 두기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내 기사가 과일 사탕을 사 왔고, 리아의 손에는 과일 사탕이 한 아름 들려 있었다.

"이렇게 많이 사올 필요는 없는데."

"……아."

리아가 단것을 좋아하기에 일부러 많이 사 오게 한 카르티안이었다. 그 말에 카르티안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요. 남으면 돌아가서 먹으면 되니까."

과일 사탕은 며칠까지는 괜찮을 터였다.

리아는 과일 사탕 하나를 들어 입에 넣었다.

가장 처음 느껴지는 맛은 달디단 설탕의 맛이었다. 한 입 와작 깨무니, 겉을 감싸고 있던 설탕막이 부서지며, 속에 든 과일의 맛이 느껴졌다. 설탕의 달달함은 과일과 어우러져 제법 입맛에 맞았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 맛이었다.

과일 사탕의 종류는 하나가 아니었다. 딸기, 키위, 멜론 등등 다양했다.

생각 이상으로 입맛에 맞아 열심히 과일 사탕을 먹던 리아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카르티안의 모습에 슬쩍 과일 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드시고 싶으면 드세요."

과일 사탕이 이렇게 많은데, 하나 정도를 못 줄까.

생각하면 애초에 이것을 사준 이가 카르티안인데, 먹어보라는 한 마디말 없이 자신만 홀딱 먹은 건 다소 미안한 일이기도 했다.

"……괜찮아."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르티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리아는 기억 속 저편에 있는 하나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카르티안은 단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전에 권해졌을 때도 어찌나 먹기 싫다는 표정으로 거절하지도 못 한 채 힘들어했었다. 그러다가도 자신이 준 것은 맛있다며 더 달라고 했었지만.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자, 새삼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이곳의 기억 따윈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니 그러지도 않을것 같았다.

"그래도 먹어 봐요."

그때의 상황을 재현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냥 또 심술이 솟았다.

그를 괴롭히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저 그의 반응이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리아는 일부러 최대한 설탕이 많이 묻어 있는 것을 골라 카르티안에게 건넸다.

입 앞까지 다가온 과일 사탕에 카르티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단호한 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안은 눈을 질끈 감고 과일 사탕을 입에 담아야 했다.

역시나, 입에 넣자마자 느껴지는 달달함에 카르티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얘는 사탕이라 녹여서 먹어야 해요. 깨물면 안 돼요."

사탕이라고 해도 녹여서 먹든 깨물어서 먹든 자신의 선택이지만, 리아는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단것을 싫어하는 카르티안이니 녹여서 설탕의 맛을 다 느끼기보다는 깨물어서 과일의 맛이라도 느끼는 것이 낫겠지만, 이것은 엄연히 심술이었다.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은 깨물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그녀의 말대로 과일 사탕을 입에 넣고 녹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해지는 설탕의 단맛에 미각이 마비될 것 같았지만 뱉을 수 없었다.

아주 작은 것이라고 해도 그녀가 준 것이었다.

먹을 것이라서 이미 입안에 담아서 보관하기는 힘들다고 해도, 최대한 오래 이것을 머금고 있고 싶었다.

모처럼 그녀가 준 것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이내 과일의 겉을 감싸고 있는 설탕막이 녹아 사라지고 남은 것은 과일이었다.

오랫동안 입에 머금고 있어 과일의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카르티안에게 중요한 것은 맛이 아니라 리아가 준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웬 남자 한 명이 카르티안과 리아에게 다가왔다. 등에 메고 있는 화통으로 보아 화가인 듯했다.

화가가 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건가 싶어 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카르티안은 혹시 몰라 화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저, 죄송하지만…… 혹시 그림 한장 그릴 수 있을까요?"

"그림이요?"

"네. 두 분이 워낙 잘 어울려서……. 돋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림 역시 두 분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창작욕을 자극하는 이들도 처음이라 화가가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화가의 말에 카르티안은 다소 안심했다.

"아니요, 됐어요."

'그림이라니.'

리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화가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지 리아에게 매달렸다.

"싫다고 하지 않나?"

카르티안이 화가를 막아서며 차갑게 말했다.

사실 카르티안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리아 혼자만 있는 그림이든, 자신과 함께하는 그림이든, 그림으로라도 그녀의 모습을 남기면 그녀가 떠나고 나서도, 그 그림을 보며 그리움을 달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리아가 원하지 않는 것을 자신이 하고 싶다고 조를 수는 없었다.

비록 그 그림 하나가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자 구원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사정이지, 그녀가 고려할 것이 아니었다.

화가를 말리고는 있지만, 어쩐지 그리고 싶어 하는 카르티안의 모습에 리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림, 그리고 싶어요?"

리아가 무심히 카르티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아니야."

자신의 속내를 들켰다는 생각에 카르티안이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리고 싶어졌는데, 그럼 마시든가요."

리아가 일부러 카르티안을 놀리듯 말했다.

"아니, 아니야!"

카르티안이 황급히 말했다. 그러고선 아차, 했다.

모든 것의 선택은 그녀에게 있는데, 자신이 뭐라고 말을 꺼낸 것인지.

"그림 그리고 싶냐는 말에도 아니라고 하고, 그럼 말라는 말에도 아니라고 하고. 그럼 뭐가 맞는데요?"

물론 리아는 카르티안의 말을 알아 들었다. 그런데도 그리 말하는 것은 역시나 심술이었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가 신경 쓰였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당당하게 구는 모습은 그것대로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렇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어째서 그가 그러는 것인지,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리아는 그가 앞으로도 계속 그러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그냥……."

카르티안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이을 수가 없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카르티안은 그저 리아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었고, 리아에게 모든 선택의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러니 자신이 그녀의 말에 답할 것은 없었다.

"그냥 리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카르티안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힘없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림, 그려 주세요. 대신 후드는 벗지 않겠어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쓰고 있는 후드를 벗는 것이 좋겠으나, 후드를 벗는 순간 자신에게 꽂힐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대신 얼굴이 잘 보일 수 있도록 이마까지 내려온 후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네, 괜찮습니다!"

리아의 허락에 화가가 반색하며 말했다.

카르티안의 얼굴에도 놀람이 퍼져 나갔다. 이대로 그녀가 싫다고 거절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녀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니, 기분이 좋았다.

이제 드디어 그녀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을 하나라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카르티안은 설레는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화가는 좀 더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보다 가깝게 앉아 친근한 자세를 취할 것을 요청했지만, 리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화가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은 리아와 카르티안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 카르티안은 불편함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이내 그림이 완성되고, 카르티안은 그림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화가는 후드를 쓰고 있는 리아를 보고서도 완벽하게 그녀를 그려내었다.

그림 속에 리아는 후드를 쓰고 있지 않았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어깨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실물에 비하면 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 어떤 뛰어난 화가라도 리아의 모든 것을 그림에 담을 수는 없을 터였다.

이 정도면 되었다. 이 정도여도 상관없었다.

카르티안은 만족했다.

"주세요."

"……응?"

리아와 자신이 그려진 그림을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품에 끌어안고 있던 카르티안이 그 말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림 달라고요."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의 시선이 흔들렸다. 주라고 하니까 줘야 하는데, 선뜻 그림을 내밀 수가 없었다.

카르티안이 화가가 그리고 싶다는 말에 혹한 건 그녀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역시 자신에겐 그조차도 과분한 것일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카르티안이 떨리는 손으로 리아에게 그림을 건네주었다.

한편 그저 자신도 그림이 어떻게 완성되었나 궁금해 달라고 했던 리아는 카르티안의 반응에 살포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카르티안을 무시한 채 그림을 구경하던 리아는 왠지 카르티안이 신경 쓰여 그를 바라보았다.

카르티안은 너무도 애절하게 그림을 보고 있었다. 헤어진 연인이라도 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심술의 연장선으로 주지 않고 자신이 가지겠다고 말해볼까 하는 충동을 느꼈었는데, 저 반응을 보니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자요."

리아는 얌전히 구경을 끝낸 그림을 카르티안에게 돌려주었다.

애초에 그에게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다. 주지 않겠다고 심술을 부릴 생각이 있다고는 해도 심술일 뿐, 결국엔 그에게 줄 생각이었다.

리아 역시 카르티안이 어째서 화가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허락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추억의 한 자락을 가지고 싶었던 거겠지.

떠날 자신이 그를 위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 그것을 알고 화가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었다.

"……아."

카르티안이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받았다. 카르티안은 부모님의 유품이라도 받은 것처럼 감격 어린 표정을 그림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절대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는 듯, 그림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카르티안의 모습에 리아는 가슴이 쓰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좋을까. 그렇게 소중할까. 저 그림이 뭐라고. 자신이 뭐라고. 자신은 리아르나도 아니고, 다른 존재인데.

저리 맹목적인 모습을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기억을 잃었을 때, 카르티안은 그런 모습을 보였으므로.

그때도 리아는 어색함을 느꼈다.

저렇게 간절하게 자신을 좋아하는 이를 본 적이 없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하다가도, 금세 질려 떠나가기 일쑤였다.

이런 맹목적인 애정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다시 달라질 거라고 가볍게 넘겼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리아는 이제 저 간절함이 계속 지속될 것을 알았다. 비록 자신이 떠남으로써 끝날 것이라고 해도.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떠난 후, 카르티안은 어떻게 될까. 많이 힘들어하지 않을까.

소중한 이의 떠나감이 얼마나 아픈것인지 리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런 경험이 있었다.

가장 처음은 부모님이었고, 그 이후로는 친구와의 이별이었다.

몇 번의 경험 끝에 더 이상 이별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아픔 역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리아는 믿었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자신이 그렇듯, 처음엔 아프고 힘들겠지만, 이내 괜찮아질 거라고.

그를 아끼는 신이 있으니, 카르티안이 무너지지 않게 잘 돌봐 주리라.

리아는 애써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 잡았다. 그것은 쉽지 않았다.

"내…… 것인가."

"다시 가져갈 수도 없게 품에 꼭 끌어안고 있으면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뭐예요?"

"……아."

'그 말은 역시 다시 돌려달라는 것인가.'

쉽게 떨어뜨릴 수 없는 그림을 여전히 품에 안고서 카르티안이 망설였다.

"달라는 거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요."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일일이 일희일비하는 그를 알기에 리아가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생각보다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그림을 그리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래."

카르티안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다음에…… 다음에도 또 기회가 있을까? 그러니까…… 그대가 떠나기 전에."

카르티안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같이 있는 시간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언제고 끝날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 그전까지 최대한 그녀와 같이 있고 싶었고, 무엇 하나라도 그녀와의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글쎄요."

리아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자신이 언제 떠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세로니안 공작만 처리하면 돌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를 언제 처리할 수 있을니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나마 단서라도 있었던 프레야나 후작과 달리, 세로니안 공작에 대해선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랬기에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아니라도, 리아는 그에게 약속해 줄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보다 오래 이곳에 남아 있게 된다고 해도, 그에게 곁을 주고 기회를 주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오늘이야 자신도 밖에 나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었다. 이전의 약속도 있었고.

리아의 대답에 카르티안은 실망감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그녀와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 이상 바라는 것은 과욕일 수 있었다.

"그래. 돌아가자."

카르티안이 애써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 표정을 바라보는 리아의 얼굴이 다소 씁쓸했다.

역시, 사람 사이의 관계는 참 힘든것이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은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그에게 마음이 갈 터였다. 지금도 이렇게 자꾸만 흔들리려고 하는데.

그에게 흔들린다고 해서, 결정을 무를 생각은 아니라고 해도 헤어짐의 시간이 되면 자신 역시 그리 기분이 좋지 않으리라.

시간이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로에게 감정을 만들게 하므로.

그때였다.

리아와 카르티안에게 다가오는 한무리의 사내가 있었다.

사내들의 등장에 리아와 카르티안에게서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이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런, 귀한 집 도련님께서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계시는 모양이야."

건들거리는 음성으로 사내가 말했다.

"그래서?"

카르티안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의 몸에서는 강한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저 우리가 워낙 가난해서, 돈 한 푼이라도 얻을까 싶어서 그러지 않겠어?"

"돈이 필요하다면 구걸을 할 일이지, 이런 식의 태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저건 아무리 봐도 동냥보다는 협박에 가까운 모습이라 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허. 귀한 집 아가씨께서 말이 영 상냥하지가 못 하네."

사내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카르티안은 그림을 고이 접어 품속에 넣었다.

보아하니 좋은 말로는 꺼질 것 같지 않으니, 무력행사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다 그림이 피가 묻으면 곤란하니까.

카르티안은 조용히 검을 꺼내 들었다.

동시에 기사들에게 눈짓하며 리아를 보호할 것을 명했다.

무리라고 하지만, 그저 저잣거리 잡배에 불과한 이들이었다. 그러니 자신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다만 단순한 이들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수수하게 꾸몄다고 해도 황족처럼 안 보일 뿐이지, 귀족 자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이리 다가와 시비를 거는 것은 목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목적이 뭐든, 리아와의 시간을 방해한 이들이니 얌전히 보내줄 수는 없었다.

가차 없이 검을 꺼낸 카르티안은 망설임 없이 가장 앞에 있던 사내를 베어 넘겼다. 사내가 황급히 막으려고 했지만, 카르티안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생각 이상의 실력을 지닌 카르티안의 모습에 사내들은 당황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카르티안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검을 다 잡았다. 고작 해야 저잣거리의 건달들을 상대로 질 만큼 약하지 않았다. 황제가 되어 굳이 자신이 직접 검을 들 일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이 실력의 부족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리아가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조용히 바라보았다.

검을 들고 싸우는 카르티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잘 어울렸다. 비록 검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리아의 눈에도 카르티안의 실력은 뛰어나 보였다.

한 치의 군더더기 없이 카르티안은 사내들을 베어 넘겼다. 죽이지는 않을 생각인지, 카르티안은 치명상을 피해 사내들의 팔다리를 베었다.

피가 넘치는 상황에 살짝 겁이 나기는 했지만, 카르티안의 검이 자신을 향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기사들이 자신을 지키고 있으니, 저 사내들로 인해 자신이 다칠 일도 없을 것이었다.

이런 경허은 처음이라 동요가 일긴 했지만, 어쩌면 그동안이 너무 평안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조용히 카르티안이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던 리아는 주변을 살폈다.

카르티안의 모습을 보니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리아의 한눈에 한 여인이 보였다.

수도 거리에서 펼쳐진 싸움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카르티안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중에 저 여인은 유독 튀는 것이 있었다.

다소 거리가 멀기는 했지만, 여인의 표정은 확인할 수 있었다. 여인은 초조한 듯 걱정 어린 표정으로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여인의 얼굴이 낯익었다.

"바론."

리아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사 중 유일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기사, 바론을 불렀다.

"네."

리아의 가장 곁에 있던 바론이 답했다.

"저 여인을 잡아 와요."

"저 여인 말입니까?"

"네."

리아의 말에 바론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순순히 리아의 말을 따랐다.

그녀가 저 여인을 잡아 오라고 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처음의 그 불편함이 어색하게, 이제 바론은 완전히 황후를 받아들인 참이었다.

바론은 다른 기사들에게 황후를 지킬 것을 부탁하며, 여인을 잡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여인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도망치려 했지만, 일개 여인인 그녀가 바론을 따돌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바론이 여인을 잡아 옴과 동시에 카르티안 역시도 사내를 모두 처리하고 리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직 완전히 정신을 잃지 않은 사내가 카르티안에게 달려들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카르티안은 그것을 볼 수 없었지만, 리아는 볼 수 있었다.

"티안, 뒤!"

다급함에 리아가 자연스레 카르티안의 애칭을 불렀다.

그에 감격할 틈도 없이 카르티안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빠르게 뒤를 돌아 사내를 제압했다.

"리아, 괜찮아?"

카르티안이 걱정스런 기색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애초에 그 질문은 자신이 카르티안에게 물어야 할 것이지, 카르티안이 할 만한 물음은 아니었다.

"그래도…… 놀라거나."

"놀라긴 했는데 괜찮아요. 아무 일 없을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카르티안의 실력과 함께 기사들을 믿었으니까.

"미안. 내가 괜히 나오자고 해서."

카르티안이 침울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금방 해결됐잖아요. 나들이는 좋았으니까."

이런 일은 예상 밖이었지만.

"잡아 왔습니다."

뒤를 이어 바론이 여인을 잡아 왔다. 카르티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수상해서요."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 여인뿐 아니라 저 사내들 역시 수상했다.

일개 평민도 아니고, 귀족가의 자제로 보이는 자신에게 다가와 굳이 시비를 걸었다. 그것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대로변에서.

"게다가 낯도 익고."

리아가 잡혀 온 여인을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나 알지?"

여인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리아는 존대를 거두고서 물었다.

리아의 물음에 여인의 눈이 흔들렸지만, 여인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는 그쪽을 알 것 같은데."

리아의 말에 여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는 사이야? 어떻게 이 여인을?"

카르티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라. 아마도 내게 무례하게 굴다가 쫓겨난 시녀이던가."

눈앞의 여인은 리아가 이곳에 왔을때 맨 처음 리아를 무시하던 시녀였다. 결국 황제의 손에 의해 쫓겨난 여인이었다.

그 이후로는 잊고 있던 시녀였다.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억울해하는 그 표정이 선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볼 줄이야.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네년! 별 볼 일 없는 녀석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냥 돈만 많은 귀족가 자제인 척하는 이라고!"

카르티안의 실력도 그렇고, 리아를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에서 카르티안이나 리아가 단순한 이들이 아님을 알게 된 사내 한 명이 시녀를 향해 소리쳤다. 비록 몸에는 피가가득했지만, 입만은 멀쩡한 사내였다.

그런 사내의 말에 리아는 역시나, 했다. 뭔가 수상해서 저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사내의 말을 들으니 확실했다.

저 시녀가 사내들에게 사주를 한 것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자신과 카르티안의 정체를 숨기고서 일부러 공격하게 한 것이었다.

"나, 난 아니에요."

여인이 당황하며 부정했다.

그러나 여인의 말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원래도 수상했고, 사내도 저리 말하는데,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저들을 모두 잡아 황성으로 끌고 간다. 감히 황제를 시해하려 한 자니."

카르티안의 말에 바닥을 구르고 있던 사내들이 몸을 떨었다.

'황제라니, 그게 무슨!'

"저, 저희는 몰랐습니다! 폐, 폐하이신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이 황성에 끌려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 눈에 선명하게 그려져 사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말에 순순히 저 여인의 말에 따른 것이건만. 단순한 귀족가 자제도 아니고, 황제라니.

사내가 다급하게 매달리며 애원했지만, 카르티안은 사내의 말을 무시했다.

사내들과 함께 시녀는 기사들의 손에 황성으로 끌려가야 했다. 사내들도 사내지만, 시녀의 죄는 컸다. 사내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모르고 그리 한 것이라지만, 시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히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그런데도 사내들을 사주해 자신을 노리게 했다. 다만 이상한 것은 그렇게 해서 시녀가 얻을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황제인 이상, 홀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사내들이 실패할 거라는 사실도.

황성에 도착한 사내들은 곧바로 지하 감옥에 갇혔고, 시녀만은 황제와 마주해야 했다.

그 자리에는 리아도 있었다.

카르티안은 괜히 리아가 나쁜 모습을 보게 될까, 그냥 쉬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했지만 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시녀의 행동은 단순히 시녀 혼자만의 계획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면 공작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가장 큰 흑막이던 프레야와 후작은 이미 죽은 이가 되었으니까.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해라."

바닥에 꿇어 앉힌 시녀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카르티안이 말했다.

"저, 전 모르는 일입니다."

계획의 실패는 그렇다 치고, 자신의 신분까지 노출된 상황에 시녀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황후가 자신을 알아챌 줄은 몰랐다.

시녀인 자신의 얼굴 따위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게다가 바로 자신이 수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챌 줄 이야.

자신의 기억 속의 황후와 달랐다. 그 전의 황후는 패악만 부릴 줄 알뿐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아무것도 모른다?"

카르티안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듯, 조소를 머금었다.

"그럼 다시 묻지. 왜 그런 짓을 했지?"

"제,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모든 것을 들킨 상황이지만, 시녀는 강하게 부정했다.

"리아, 눈 감아."

허리에 매고 있던 검을 꺼내기 전, 카르티안이 말했다.

리아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것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위해서도 눈을 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내 날카로운 검 소리가 들리며, 카르티안의 검이 시녀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시녀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러나 시녀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자신이 사실을 말하든, 말하지 않든 어떤 결말을 겪게 될지.

"누가 그대에게 그런 짓을 시킨 것인지 말하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물론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꼴을 겪게 되겠지만.

카르티안의 말에 시녀는 지푸라기를 잡든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그냥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시켰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앞으로 제가 무사히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습니다."

"그 남자가 누구지?"

"그, 그건 저도 몰라요. 얼굴을…… 가리고 있었어요."

카르티안의 말의 진위를 살피듯 조용하게 시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반응을 보아, 정말로 모르고 있는것 같았다.

그러나 저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저 누군가에게 시녀에게 그런 짓을 시켰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카르티안은 기사들에게 시녀를 끌고 갈 것을 명했다. 바닥에는 시녀가 흘린 피가 묻어 있었다. 기사들이 나가고 문밖을 지키고 있던 시녀들이 빠르게 피를 닦았다.

"이제, 눈 떠도 돼."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카르티안이 말했다.

"피곤할 테니 이만 쉬도록 해."

"……그래요."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리아가 나간 후, 카르티안은 털썩 소파에 앉았다. 단순한 감이지만, 카르티안은 시녀의 배후가 세로니안 공작일 것만 같았다.

자신과 리아가 오늘 밖에 나가기로 한 것은 비밀이었지만, 나들이를 하겠다 결정한 것은 이미 예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황성의 사람들을 정리하기 전,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그 말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오늘인 줄은 몰랐겠지만.

카르티안은 시녀를 시켜 재상을 불러오게 했다. 오늘 일 때문에도, 세로니안 공작을 처리하는 것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 같았다.

세로니안 공작이 멍청한 것이 아니라면,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 정도로 자신이나 황후를 처리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 정말로 자신이나 리아에게 해를 가하려고 한 것은 아닐 터였다. 다른 무언가를 노리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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