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시간이 애매해서 다시 잘 수 없을 줄 알았던 것과 달리 리아는 숙면을 취했다.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피곤함을 없애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잠깐 자고 일어난 리아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도 좋은 것이 산책이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와서 운동도 제대로 못했으니, 산책이라도 꼬박꼬박해야지.
'그러고 보니, 산책은 항상 카르티안과 같이한 것 같은데.'
혼자 기사들을 대동하고서 황성 정원을 거닐고 있으니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리아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는 리아를 말리며, 바론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 바닥에 깔았다.
"아, 고마워요."
"……이 정도는 당연한 일입니다."
리아의 인사에 바론이 살짝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이내 리아는 고개를 돌리고 바닥에 앉아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앞에 등장한 이가 있었다. 낯선 이의 등장에 기사들이 잠시 경계했지만, 그가 입고 있는 기사 제복에 경계를 풀었다.
"제국의 꽃,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아, 그래요."
리아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아의 휴식을 방해하며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에 리아가 고민했다.
'나를 아나? 나와 아는 사이인가.'
그러나 알 수가 없었다.
리아의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존재였고, 책 속에서도 저 남자에 대한 언급은 본 적이 없었다.
"……누구죠?"
혼자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리아가 물었다.
그 물음에 남자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라 저를 잊으셨나 봅니다."
"그런가 보네요."
실상 오랜만이라기보다는 그냥 처음 보는 얼굴이라 누구인지 몰랐던 것뿐이지만.
"세른 카리안입니다."
'세른 카리안?'
역시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보다 이렇게 뵙게 되니, 기쁩니다."
"아, 그래요."
자신의 입장에서야 처음 보는 이였기에, 리아는 그 말에 같은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누구인지 알아야 기쁘든 말든 할 텐데.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얼마 전 근위 기사단에 배정받았습니다. 해서 황성의 지리도 파악할겸 잠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마마를 뵙게 되었으니, 이건 정말 큰 행운이군요."
"그런가요."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연이은 무심한 리아의 반응에 세른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마마는 제가 반갑지 않으신가 보군요."
세른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우리가 반가워해야 할 사이던가요."
순수한 질문이었다. 그와 자신의 사이를 알 수 없기에 건넨.
그 말에 세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저는…… 마마와 제가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친구?'
설마 여기서 그런 단어를 듣게 될 줄 몰랐기에 리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의 반응을 보니 거짓인 것 같지 않았지만, 리아는 남자에 대해 지금 들은 이름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제가 마마를 처음 만난 것은 수도 시내에서였습니다. 외출을 나온 것인지, 기사들과 함께 수도를 구경하고 계셨었죠. 사실 그때 첫눈에 반해 일부러 접근하긴 했었습니다만."
세른의 말에 그 말을 들은 기사들의 분위기가 딱딱해졌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친구이니까요. 게다가 황후마마이시지 않습니까."
세른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연스레 사람의 경계를 풀게 하는 미소였다.
"그래요? 그런데 그동안 서신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의 말대로 자신과 그가 친한 친구라면, 서신 한 번은 서로 주고받았을 법도 한데,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 마마께 서신을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마."
"네, 말씀하세요."
"친구 사이에 마마라는 호칭은 너무 딱딱하지 않습니까?"
세른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상대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이름을 부를 수 없기에 마마라는 호칭을 사용했지만, 그것은 너무 어색했다.
더 이상 공작가의 영애가 아니라 황후였기에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서요?"
"괜찮으시다면, 전처럼 이름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세른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말에 바론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황후의 친구인지 뭔지, 황후에게 친한 척 다가오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감히 이름을 부르겠다 말하는 것도 거슬렸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리아의 권한이지, 자신의 가타부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른의 물음에 리아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허락할 것인가 말 것인가.
딱히 호칭에 연연하고 있지도 않고, 친구 사이였다고 하면 이름을 부르게 해도 상관없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초면인 사람이기에 선뜻 허락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러세요."
이내 리아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 허락이 그를 믿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던 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친구라고 말하는 그를 선뜻 믿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런 이가 어째서 원작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허락한 것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 그가 어째서 자신에게 친한 척하며 다가온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의 말대로 그저 친구 사이라서, 말을 건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닐 가능성이도 분명히 있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리아가 날카롭게 세른을 바라보았다.
세른은 리아의 허락에 그저 기분 좋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