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2 (93/125)

                                                                      * * *                                                                       

리아는 무심히 세른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른의 이야기 대부분은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리아르나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처음 만났을 땐 어땠고, 그 이후에는 또 어땠고.

중간중간 흐릿하게 떠오른 기억들이 있는 것을 보니,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선뜻 정이 안 가는 것이 이곳에 와서 좋지 않은 일들을 연달아 겪은 탓일까.

"흐음, 리아는 제 이야기 듣는 것이 재미없나 봅니다."

간간이 대꾸를 해주긴 하지만, 내내 무심한 기색인 리아의 모습에 세른이 다소 침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런 세른의 말 역시 가볍게 넘기던 리아르나는 세른의 입에서 나온 리아, 라는 호칭에 인상을 지푸렸다.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하긴 했지만, 그런 애칭은 허락한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리아에겐 리아, 라는 호칭이 애칭보다는 이름에 가까웠지만, 카르티안이 아닌 다른 이에게서 그런 호칭을 듣자니,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아, 죄송합니다. 그저 리아르나라는 이름은 너무 긴 것 같아서."

"그래 봤자 두 글자 차이니, 그냥 이름으로 부르세요."

거리를 두기 위함이었다.

리아르나라는 호칭을 들으면, 자신이 아닌 타인을 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니까.

어쨌든 결론적으로 세른이란 자에게서 '리아'라는 호칭은 듣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제가 불편하십니까?"

세른의 물음에 리아가 빤히 세른을 바라보았다.

불편하냐고 물으면 불편한 것은 맞았다. 세른에게 리아르나라는 존재는 친구일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었다.

낯선 자와 이렇게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색하기도 했고, 아주 많이 불편했다.

솔직히 귀찮기도 했다.

자신이 말을 많은 편이 아니라, 상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카르티안과 함께할 때도, 대부분 카르티안 쪽에서 먼저 말을 걸며 대화를 이어갔었다.

그때는 그래도 이렇게 귀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어쩐지 세른의 존재는 그렇게 느껴졌다.

세른과의 대화에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을까 싶어 대화를 이어간 것이 었는데, 계속 추억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

"그냥 좀 쉬고 싶어서요."

애초에 쉬려고 나온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으로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혼자의 시간도 방해받았다.

기사들을 대동하고 있으니, 혼자의 시간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지 몰라도, 기사들은 조용히 있으니 적당히 혼자 있다 생각할 수 있었지만, 저 세른이란 자는 아니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반가움에 그만."

세른이 죄송하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뭐. 친구를 만나면 그럴 수도 있죠. 다만 저는 피곤해서 이만 일어나고 싶네요."

세른의 친구라 함은 리아를 뜻하는 것일 텐데도, 마치 타인인 것처럼 무심히 말을 한 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리아르나. 괜찮다면, 다음에도 또 만나러 와도 되겠습니까?"

세른이 리아의 팔을 잡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렇게 헤어지기 아쉽다는 듯,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리아는 조용히 세른을 바라보았다.

이내 리아가 뭐라 대답하려는 찰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카르티안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세른과 리아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카르티안의 시선은 리아의 팔을 잡고 있는 세른의 손에 꽂혀 있었다.

"아, 제국의 빛, 고귀하신 광명,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카르티안의 존재를 알아챈 세른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고, 그로 인해 자연스레 리아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이 떼어졌다.

그제서야 카르티안은 한결 풀린 표정을 지었다.

"그대는 리아가 나의 황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야."

카르티안의 서늘한 말에 세른이 당황 어린 표정을 지었다.

"감히 황후의 몸에 손을 댄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고 있는 건가?"

"죄송…… 합니다. 친구를 만난 반가움에 그만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당황한 기색을 지운 세른이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거야. 오늘 같은 자비는 더 이상 없을 테니."

카르티안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에 세른이 더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세른을 무시하며, 카르티안이 리아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서늘한 기색이 무색하게, 카르티안이 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살살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세른의 손이 닿은 리아의 팔에 손을 뻗었다.

카르티안은 마치 리아의 팔에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는 듯 손으로 탁탁 털었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에 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세요?"

왠지 알 것도 같았지만, 리아가 모른 척 물었다.

"나도 쉬려고 나왔다가 리아가 보이길래."

쉬러 나온 것이 아니라 리아가 보이길래 집무실로 가다 말고 온 것이 었지만, 카르티안은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뭐, 그렇다면야."

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리아, 이자는……?"

"예전에 알고 지냈던 친구라고 하네요."

원래대로 말하면 알고 지냈던 친구예요, 라고 말하는 것이 맞았지만, 그렇게 말하기가 어색했다.

아직 자신은 그를 정말로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고, 특히나 세른은 리아르나의 친구이지, 자신의 친구가 아니었다.

카르티안 역시도, 자신이 리아르나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으나, 상관없을 것 같았고.

"친구라도 해도 리아는 황후이니,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일부러 무시하고 있던 세른을 향해 카르티안이 차갑게 말했다. 동시에 어서 가라는 듯, 카르티안이 은근하게 세른을 재촉했다.

그에 세른은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려 자리를 떠야 했다.

"저도 이만 방으로 돌아갈 생각인데."

"데려다줄게."

조금이라도 리아와 함께 있고 싶어 카르티안이 말했다.

"쉬러 나온 것이라면서요? 더 있다 가지시 그래요."

카르티안의 태도를 통해 카르티안이 사실은 쉬러 나왔다 자신을 보고온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고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리아가 모른 척 말했다.

"리아를 보는 게 쉬는 거야."

카르티안의 대답에 리아가 이젠 익숙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죠."

리아의 허락에 카르티안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리아를 따랐다.

"그런데 리아……."

리아의 겉에서 걸음을 옮기며, 카르티안이 연신 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네, 말씀하세요."

아까부터 왜 자꾸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친구인가?"

"너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친구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친구였다고 하네요."

사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아니라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뒤에 다른 기사들도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혹시, 리아……"

리아의 대답에 카르티안이 또 한번 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

"그를……."

그를, 뭐?

이어지지 않는 말에 리아가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니야."

혹시 그를 좋아하냐고, 그에게 관심이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묻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그런 것을 물을 권한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고 별 감흥도 없다고 하는데, 그런 질문을 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카르티안은 그저 리아와 저 세른이란 자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것뿐이고, 그런 것만으로 그를 좋아하냐고, 관심 있냐고 물어보기엔 지나친 감이 있었다.

리아를 보고 한눈에 반했던 자신을 생각하면, 고작 대화 잠깐 나눈 것뿐이라고 해도 관심을 보일 만한 충분한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게다가 리아가 누구던가.

리아는 낯선 이에 대한 경계가 강한 편이고, 쉽게 다른 이에게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아무리 리아르나와 친구 사이였던 사람이라고 해도, 그리 오래 대화를 나눈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리아는 리아르나가 아니고, 그러니까 세른은 리아의 친구가 될 수 없었다.

"뭐가 아닌데요?"

말을 꺼내다 말고 아니라고 하니, 뭘 물으려고 그랬나 싶어 리아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말을 꺼내려다 마는 건 뭐예요. 물어본다고 잡아먹지 않으니,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

아니면 아예 티를 내질 말던가.

괜히 사람 신경 쓰이게 말을 꺼내려다 마는 카르티안의 모습을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잡아…… 먹어도 돼."

상황에 맞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카르티안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런 대답을 하고 말았다.

카르티안의 대답에 리아가 빤히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종종 느낀 것이지만, 카르티안은 가끔 예상치 못한 말을 던질 때가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쉽게 그 흐름을 따라잡기 힘든.

그래서일까.

리아는 이번에는 자신이 그를 당황스럽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티안으로서는 리아를 당황하게 만들려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손 줘 봐요."

이 대답에 어떤 반응을 돌려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리아가 말했다.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이 머뭇거리다 수줍게 손을 내밀었다.

리아가 그 손을 잡고 얼굴 가까이로 들어 올렸다.

잡으려고 한 건 아닌 것 같고, 뭐 때문에 그러나 싶어 카르티안이 의아한 얼굴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을 무시하며, 리아가 그대로 카르티안의 손을 앙, 하고 깨물었다.

앙치고는 꽤 세게 깨물어 아플 법도 하건만, 카르티안은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그저 리아가 자신의 손을 깨물었다는 사실에 감격한 것인지, 카르티안이 흔들리는 눈으로 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벌어진 입이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잡아먹을 수는 없고, 대신으로 물었으니 이제 말해 봐요."

"어? 어, 아……."

쉽게 리아의 깨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카르티안이 멍하니 소리를 내었다. 카르티안의 시선이 연신 자신의 손을 향했다, 리아를 향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듯, 리아에게 물린 자신의 손을 다른 손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카르티안의 손등에는 리아가 깨문 흔적이 여실히 새겨져 있었다.

그 모습에 리아가 피식 웃었다.

이래서일까.

그가 지난날 어떤 행동을 했든, 자신 앞에서 보여주는 이 멍하고 순수한 모습에 자꾸만 끌리게 된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정을 주게 된 것일까.

카르티안이 기억을 찾고, 또 자신이 독에 당했다 정신을 차린 이후, 떠나기로 마음먹었기에 더 이상 그에게 정을 주지 않겠다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음에도.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자꾸만 의도치 않게 흔들리게 되었다.

어쩌면 정말 진심을 담아 사과하며, 무릎을 꿇은 그 순간, 애써 쌓으려고 했던 벽에 균열이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황제인 것을 떠나, 그것은 한국의 일반적인 사람들도 쉽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나 자신의 잘못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미안하다 사과를 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 더 물어달라고 말 안 하고 있는 거예요?"

이쯤 되니, 굳이 자신이 그 물음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무엇을 물어보려고 한 것인지 몰라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고, 자신이 반드시 들어야 할 만큼 중요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응!"

리아의 말에 멍 때리듯 있던 카르티안이 황급히 손을 리아의 입 가까이로 내밀었다.

입 바로 앞에 놓인 그 손에 리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또 물어달라고요?"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리아가 말했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전에도 한 대 때리고 나니, 더 때려도 된다며 더 때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더 물어달라는 것인가.

설마 알고 보니 황제가 M이라던가.

"또 물어도 돼."

또 문다면, 귀한 손이니 씻지도 않고 고이 보관하리라.

"……아니요. 됐어요."

역시, 카르티안은 자신의 예상 범주를 벗어나는 존재였다.

애초에 장난식으로 한번 깨물었던 것뿐이라 또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런 리아의 대답에 카르티안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깨물지 않겠다고 하면 보통 좋아해야 할 텐데, 왜 저리 아쉬워하는 건지. 리아는 정말로 카르티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교식으로 가볍게 깨문 것도 아니고, 나름 꽤 세게 깨물었었는데.

"그런데 끝까지 말 안 할 거예요?"

이번에도 말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그냥 못 들은 척 넘어가기로 한 리아가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리아의 입장에서야 듣던 말던 상관은 없었지만,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풀 죽은 기색을 보이니 궁금하기도했다.

"그 남자를…… 좋아해?"

여전히 리아가 문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보며 카르티안이 조심스레 하려다 만 질문을 던졌다.

"그 남자라면 세른 경이요?"

단지 이름을 부르기엔 어색한 부분이 있어, 리아는 뒤에 경을 붙이며 물었다.

그에 카르티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잔뜩 붉어져 있었다.

저 모습을 하도 보다 보니, 원래 얼굴 색이 빨간색인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지 좋아하냐, 마냐의 물음이라면 안 좋아해요. 좋아할 일도 없고."

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자신은 이곳을 떠날 사람이었다.

정말로 세른이 마음에 든다고 해도, 그를 좋아할 일은 절대 없었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으므로.

그 말에 카르티안의 얼굴에 무의식적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동시에 안도하듯, 카르티안이 긴장했던 몸을 풀었다.

"게다가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도대체 뭘 보고 좋아하냐고 묻는 거예요?"

그런 물음을 받을 만한 행동은 한것 같지 않은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정해 보였으니까."

카르티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대답에 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세른과 자신의 무엇을 보고 다정해 보인다고 하는 건지.

세른과 자신은 대화한 것뿐이고, 그것도 세른의 일방적인 대화였다. 자신은 그저 고개만 대충 끄덕이며 간간히 대꾸만 들려줬을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세른 쪽에서 자신이 반갑지 않냐고 불편하냐는 말을 꺼냈을까. 그런 것을 다정해 보인다고 표현하다니.

그 어이없다는 리아의 표정에 카르티안이 움찔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눈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다소 무례한 말이긴 하지만, 전혀 다정해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을 다정해 보인다고 하니, 한 번쯤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콩깍지 여파일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리아가 그자의 말에 대답을 해주었잖아. 무시하지 않고 다 받아주었잖아."

리아의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에 카르티안이 항의하듯 말했다.

그러나 아차, 하며 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 이상으로 크게 나온 목소리에 카르티안은 당황했다.

"좋아하기 때문에 무시하지 않은게 아니라, 싫어하지 않기에 무시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도 친구라고 하니, 정말 그랬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특히나 리아르나의 친구라고 하면, 세로니안 공작과도 아는 사이일 수 있었다. 그랬기에 더 수상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른다고 해도, 지금은 황후예요."

황후가 아니라고 해도, 세른과 그럴 생각은 없지만.

"응, 나의 황후…… 지."

황후라는 단어를 읊조리며 카르티안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자신의 황후라는 사실에 더없는 만족감을 느꼈고, 그 어느 때 보다 행복했지만, 동시에 그것이 계속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저는 사람 말 무시하는 그런 무례한 사람 아니에요. 원래 그랬어요."

그러니 그 정도로는 다정하다고 볼 수 없다며 리아가 말했다.

애초에 자신은 카르티안의 말도 무시하지 않고 일일이 다 받아주었다. 굳이 다정한 쪽을 고르라면 그건 세른을 대할 때가 아니라 카르티안을 대할 때라고 봐야 했다.

세른과는 단지 그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적당히 받아주는 척한 것뿐이니까. 사실 카르티안에게도 그리 다정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카르티안과 세른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카르티안이 나았다.

그것은 이미 세른이 자신을 리아라고 부를 때 확실하게 느낀 것이었다.

세른에게선 알 수 없는 께름칙함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친구였다고 하지만, 믿음이 가지 않았고. 그가 이야기 한 과거의 기억을 생각하면 친구라는 말이 맞기는 했지만, 친구라도 해도 그자가 반드시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란 언제든 자신의 감정을 떠나 어떠한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친구인 척할 수가 있으니까.

"그럼 이제 도착했으니 이만 가 보세요."

어느새 방 앞에 도착한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리아……."

"왜요?"

"나는 리아가 다른 남자랑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아주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카르티안은 적어도 그녀가 자신의 곁을 떠나기 전까지는 아직은 자신만의 황후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 남자도 없어요."

'있어도 알아서 끊어내야 할 테고.'

어려울 일 없다는 듯 리아가 순순히 말했다.

"응."

리아의 대답에 카르티안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 남자가 없다고, 또 그를 좋아할 일도 없다고 했으니, 세른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되리라.

아직도 세른의 손이 리아의 팔에 닿은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나고, 세른과 대화를 하던 리아의 모습을 떠올리면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그정도면 되었다.

그 이상은 바랄 수 없었다.

지금 이런 요구를 한 것 자체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한 자신의 다짐을 어긴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