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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산책에서 세른을 만난 후, 그 이후로 리아는 세른을 만나지 못했다. 산책을 나간 적이 없기도 하고, 그가 자신을 찾아오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를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굳이 리아 쪽에서도 그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리아."
집무실에서 나른하게 일을 하고 있던 리아가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피곤해?"
"피곤하다기보다는 모처럼 편안하게 지내고 있으려니, 좀 나른한 것 같긴 하네요."
이렇게 조용한 날을 보내기는 얼마만인지.
세로니안 공작에 대한 일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에 대해선 좀처럼 알아낼 수가 없었다.
지난번 나들이에서 사내들의 공격을 받은 이후, 세로니안 공작이 무슨 수작을 부리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
모처럼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그말에, 리아가 이곳에 와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기억하고 있는 카르티안이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요."
카르티안의 표정만으로도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챈 리아가 말했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효과가 있는지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미안해하는 표정도 보고 싶지 않았다.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기도하고, 더 이상은 그가 미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리아르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기도 했고, 자신을 힘들게 하던 사건들도 대부분 해결된 상황이었다.
더 이상은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겐 이미 충분한 사과를 들었다.
"나는 언제나 그대에게 미안한걸."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자신이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기에.
"됐어요. 그보다 저에게 뭐 가지고 싶은 거라던가, 받고 싶은 것이 없냐고 전에 물었었죠?"
"응."
생각해 본다고 하고 넘어갔었지만,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결정을 내린 건가 싶어 카르티안이 기대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았다.
그녀에게 자신의 흔적 하나 정도는 주고 싶었다.
그것을 보면서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에게 무엇 하나라도 주고 싶었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목걸이 하나만 주시겠어요?"
액세서리에 딱히 욕심이 없는 리아였지만, 그 외에 마땅히 요구할 것도 없었다.
목걸이라면 하고 다녀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응응!"
카르티안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티안을 보면 신기해요."
환한 카르티안의 표정을 보며 리아가 감탄하듯 말했다.
"……내가?"
어째서 신기하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카르티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까지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걸까요?"
처음 카르티안을 볼 때부터 느낀 것이었다.
카르티안의 모든 것은 리아,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향해 올곧이 감정을 내보였고, 자신의 사소한 행동에도 무한한 기쁨을 표출했다.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서도 고백의 말을 듣고, 그들의 사랑을 받았었지만, 저토록 짙은 감정은 처음이었다.
정말 그의 마음에는 자신만 가득 들어찬 것 같았다.
"리아니까."
부족할 수도 있는 대답이었지만, 카르티안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리아이므로 그렇게 좋아한 것이었다.
첫눈에 반한 것 외에도, 그녀와 함께 한 시간 모두가 카르티안으로서는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런가요."
무심히 답한 리아였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혼란스러웠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로 한 선택이 과연 맞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젠 처음 같은 단호함은 생기지 않았다.
그에게 거리를 둬야 한다고 그래야 떠날 때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게 이정도의 행동은 괜찮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전처럼 밀어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밀어내려는 리아의 노력만큼이나 강하게 카르티안은 그녀에게 다가왔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그의 마음이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특히나 지금도 그랬다. 카르티안의 입장에서도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밀어내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카르티안은 상관없다는 듯 자신을 향한 애정을 멈추지 않았다.
떠나 버릴, 결국엔 이뤄지지 않을 상대를 계속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리아로서는 쉽상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아니, 자신도 지금 이렇게 혼란스럽고 힘이 든데, 카르티안은 오죽할까.
이제는 이곳에 와서 겪었던 일들도 그냥 흐르듯 흩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카르티안으로 인해 겪지 않아도 될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것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로 인해 누군가가 이렇게 자신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만약이란 말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와 자신이 이런 상황이 아니라, 이곳이 아니라 다른 상황,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자신은 그의 마음을 받아줬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의 애정의 깊이를 자신이 쉽사리 가늠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랑을 주는 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믿을 수 있으리라.
"차나 한잔하실래요?"
아주 잠깐 감성적이 된 리아가 카르티안에게 제안했다.
카르티안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카르티안은 항상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길 바라왔으므로.
리아는 어색하게 차를 우렸다.
시녀에게 시킬 수도 잇었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꿈속에서 신을 만났을 때, 신이 카르티안의 음식에 넣으라고 준 약을 타기 위해서였다.
카르티안을 아끼는 신이니만큼, 그에게 해가 될 것을 주지 않았을 터였다. 어쩌면 이것이 크나큰 변수가 되어 자신을 도와줄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지금 말고도, 리아는 간간이 그의 음식에 신이 준 약을 탔었다.
"……맛있어."
차 자체의 맛으로만 본다면, 결코 맛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맛이었지만, 리아가 직접 타준 것이었기에 카르티안에게는 맛있게만 느껴졌다.
"절대 맛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알았어요."
'뭐, 마시는 이가 맛있다고 하면 되는 거지.'
어깨를 으쓱이며, 리아는 자신이 직접 우려낸 차를 마셨다.
역시, 자신의 생각대로 썩 맛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기야, 그래 봐야 차일 뿐인데, 못 먹을 정도로 맛없게 타는 것도 능력일 터였다.
"티안은 생각해 봤어요?"
"……생각?"
무엇을 생각해 봤냐고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카르티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떠나고 나면 어떻게 할지."
사실 이런 물음을 꺼내기도 조심스러웠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이곳을 떠나 자신이 어떻게 지낼지는 대충 정해져 있었다.
다만 카르티안은 어떨까?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붙잡고 있지 않지만 과연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바라고 있지만, 리아 역시도 카르티안의 행복을 바랐다.
자신 만큼이나 힘든 일을 겪어야 했던 카르티안이었다.
신의 개입으로 인해, 그의 미래는 확연한 변화를 겪어야 했다.
"……."
카르티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어떻게 지낼 거냐라.
글쎄, 어떻게 지내야 할까.
그녀가 떠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카르티안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너무 힘겹고 버거워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 그녀가 떠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많이 힘들어 할 터였다.
얼마나 힘들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리는데.
"나는…… 티안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결국엔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나로서도 쉽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힘들었던 만큼 티안도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착잡한 표정으로 리아가 말했다. 그러나 행복을 바란다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누구보다 그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그리고 주게 될 자시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스웠지만, 리아는 자신이 떠나고 나서 카르티안이 힘들어 하길 바라지 않았다.
카르티안의 행복을 위해선 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 스스로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심을 담은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은 이번에도 입을 열지 못햇다.
뭐라 말할까. 자신이 불행해지지 않길 원한다면, 자신의 곁에 남아달라고?
그대가 없는데 내가 어찌 행복해질 수 있냐고?
리아는 자신의 행복이었다. 리아 없이는 행복할 자신이 없었다. 행복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아주 만약에 내가 떠나지 않느다고 하면 어떡할 거예요?"
카르티안의 표정만으로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리아가 다소 충동적으로 물었다.
이 말이 자칫하면 희망 고문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조심스러웠지만, 왠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대답을 들으면 좀 더 자신의 결정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그대의 선택일 뿐이야."
마치 자신이 뭐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 카르티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에 리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작은 말에도 그의 진심이 가득 묻어 나왔다. 자신을 향한 배려가 느껴졌다.
혹시나 그의 말에 자신의 발을 붙잡을까, 자신의 선택을 막을까, 고민하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인 것 같았다.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 카르티안이 리아의 기분을 환기시키기위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곧 사신단이 올 거야."
"사신단이요?"
화제를 돌리고 싶어 하는 카르티안의 의도를 이해한 듯, 리아가 순순히 그의 말에 반응했다.
"그래, 사신단을 환영하기 위한 무도회를 열 생각이야."
"그렇군요."
자신의 위치가 달라지고, 프레야를 처리한 이후, 처음으로 가지는 무도회였다.
과연 이번엔 어떨지.
그래도 별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제는 전과 다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