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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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리아는 오늘도 카르티안과 함께 검술 훈련을 했다. 그래도 실력이 조금씩 늘어 항상 공격에 실패했던 것과 달리 오늘은 공격 한 번은 성공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손에 힘을 세게 준 탓인지, 리아의 목검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카르티안은 억, 하는 신음을 흘려야 했다.

"괘, 괜찮아요?"

"……괜찮아. 오히려 기쁜걸. 리아의 실력이 많이 는 것 같아서."

"또 멍이 드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

어째 유난히 자신 때문에 카르티안이 다치는 일이 많은 것 같아 리아는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리아가 만든 거면, 멍이라도 좋아."

이왕이면 그 멍이 아예 사라지지 않게 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카르티안이 말했다.

목검으로 맞은 탓에 아직도 옆구리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그도 다 리아에게 맞은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럼 좀 쉬다 할까?"

"그래요."

자신은 좀 더 훈련할 수 있지만, 카르티안을 생각해 리아는 조금 쉬기로 했다.

적당한 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니, 어쩐지 나른해져 리아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 버렸다.

"리, 리아!"

바닥에 털썩 누워 버린 리아의 행동에 카르티안이 당황하며 그녀를 불렀다.

"이거 은근 괜찮네요."

그늘 아래에는 잔디가 깔려 있어, 생각만큼 딱딱하지도 않고 푹신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불편할 텐데."

"나름 편안해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리아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머리에 풀이 묻을지도 몰라."

"아, 그건 그러네."

검술 훈련을 위해 머리를 묶근 했지만, 워낙 길다 보니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풀이 묻기는 할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무슨 산관이랴. 감으면 되겠지.

건술 훈련을 하고 나면 땀 때문이라도, 항상 샤워했으니 괜찮을 터였다.

그러나 괜찮지 않은 카르티안은 조심스레 리아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다리를 베게 했다.

"응?"

"이, 이럼 풀이 안 묻을 테니까."

단지 그뿐이라는 듯 카르티안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모습을 리아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이 표정이었다. 다 큰 성인 남자라고 보기엔 어색할 정도로, 시시때때로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객관적으로 봐도 참 귀여웠다.

지금까지는 그 부분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럴 만큼 자신이 감정에 여유롭지 않았고, 그에 대해 일말의 호의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감정이 변하고 있는 만큼, 그의 모든 것이 그대로 자신에게 전해졌다.

그리 생각하니 다시금 울적해졌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때때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마 그를 두고 떠날 자신이 없었다. 보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힘들어할지 선명히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도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 잔뜩 익숙해졌는데, 과연 그 없이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낼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대답은 아니, 였다.

하지만 이곳에 남아 있겠다고 하기엔 걸리는 것이 많았다. 이제 와 그런 것들이 중요할까 싶다가도, 낯선 곳에 평생 머물러야 한다는 건 대담한 그녀에게도 두려움이 일게 했다.

그의 감정이 변할까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이제 리아는 그의 감정은 완전히 받아들이고 믿고 있었다. 그저……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일었다.

차마 한국에서의 모든 기억을 머릿속 한편에 묻어두고서,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특히나 남아 있겠다고 하면 다시는 그곳에 발을 들이지 못할 터였다. 자신의 추억이 남아 있을 그곳을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 어느 것의 무게도 가볍지 않았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부터가 자신의 마음이 그만큼 그에게 많이 기울었음을 뜻했다.

처음 신과 대화를 나눴을 때만 해도 아무 미련 없이 떠나겠다고 말했었는데. 지금 와서 다시 신이 물어본다면 과연 자신이 어떠 대답을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한국을 떠나 이곳에 머물 자신도, 그렇다고 이곳을 떠나 한국에서 머물 자신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지금만큼 깊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는데.

리아가 묘한 시선으로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정말로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자신을 좋아해 주는 카르티안에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누구라도 자신 같은 상황이라면 고민하고 흔들릴 터였다.

차라리 그가 매달렸으면 싶기도 했다. 그럼 어쩔 수 없다는 듯 남아있겠다는 선택에 좀 더 무게를 실을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매달리지 않기에,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며 붙잡지 않기에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는지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지금 이렇게 이별 따윈 생각하지 않고 평소처럼 지내고 있지만, 정말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자신도 이렇게 이별만 생각하면 힘든데, 그는 오죽할까.

리아는 애써 우울한 생각들을 지웠다. 그도 침울해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는데, 자신이 그런 기색을 보일 수는 없었다.

조용히 카르티안을 바라보던 리아는 문득 장난기가 이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렇게라도 지금의 기분을 지우고 싶었다.

"티안."

"응?"

조용히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누운 리아를 바라보던 카르티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

누운 채로 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카르티안은 망설임 없이 리아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짖어."

"멍?"

"물어."

"……앙."

리아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카르티안은 착실하게 리아의 말을 따랐다.

"진짜 개네."

어감이 좀 그렇긴 하지만, 욕이라기보다는 귀여운 대형견을 말하는것 같은 느낌으로 리아가 감탄하듯 말했다.

"개 좋아해?"

리아의 말에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 기색으로 카르티안이 물었다.

"별로 안 좋아해요."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이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그도 잠시, 카르티안은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라도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누운 리아를 보고 있으니, 이것이 천국인가 싶었다.

적당하 무게감과 동그란 머리통.

다리를 간질이는 리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모든 것이 좋았다.

"하지만 티안 같은 개라면, 기꺼이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말도 잘 듣고 순한 개라면.

리아가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지나치게 엉겨 붙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귀여운 것은 보는것으로 만족하지, 굳이 데려와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언가를 돌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니까.

하지만 카르티안이라면, 시키는 족족 잘 따를 것 같았다. 손도 좀 덜 갈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모든 이유를 다 떠나서 카르티안이니까, 그래서 괜찮았다.

"리아라면 뭐든 좋아."

키우는 거든, 방치를 하든.

카르티안이 그리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 말과 함께 카르티안이 일부러 더 개를 흉내 냈다. 자신을 바라보는 리아의 시선이 다정해 그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멍멍."

귀엽게 개소리를 하는 카르티안의 모습에 리아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작은 미소였지만, 입가에 자리 잡은 그 미소에 카르티안이 멍하니 리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요즘 리아는 전보다 잘 웃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리아의 시선도 전보다 더 많이 다정해진 것 같았다.

끝이 정해진 상황이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이 카르티안은 행복했다.

"……미안해요."

갑작스런 사과였지만, 리아는 밀려드는 감정을 꾹 담아두고 있을 수 없었다. 특히나 이렇게 해맑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리아가 그동안 겪은 일은 근본적으로 신 때문이었다.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나서지 않은채, 방관하며 자신을 끌어들인 것도 신이었고, 카르티안의 모든 행동은 결국 프레야의 수작으로 비롯된 것 이니까.

"리아가 그런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어. 나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이렇게 지금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

카르티안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처음부터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만약이라는 가정 따위 좋아하지 않는 리아였지만, 지금만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말대로, 처음부터 카르티안이 프레야의 수작에 당하지 않았다면, 카르티안도 자신도, 힘들어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만약 그랬다면 자신과 카르티안이 만날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았다.

과거의 시간이 힘들었고, 이별을 앞둔 지금도 힘들었지만 그를 만난 것이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일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그에게 넘치는 애정을 받았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맹목적인 애정을 받지 못했을 터였고, 자신은 지금까지 그랬듯 타인에게 깊은 감정을 허락하지 않으며 계속 거리를 두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부모님이 돌아기신 이후, 지금이 제일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 생각하니 조금은 우습기도 했다. 한 번도 자신이 그에게 이런 정도의 감정을 느끼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한 적 없었는데.

게다가 행복이라니. 그만큼 자신이 그를 마음에 담아두었던가 싶어 놀랍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다시금 어두워진 리아의 표정에 카르티안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곧 세로니안 공작은 반역죄로 체포당할 거야."

꺼낸 주제가 그리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공작을 체포하기 전 그녀에게 반드시 해야 할 말이었다.

그녀와 관계된 일인 만큼, 그녀도 알아야 했다.

"반역이군요."

그렇지 않을까 하긴 했었는데.

리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서 물어볼 것이 있어."

카르티안의 말에 리아가 눈을 들어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보통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아무리 잘생긴 남자라도, 굴욕이 있고 한다던데, 카르티안은 그런 것이 없었다.

지금 상황과는 맞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혹시 공작과 주고받은 서신 중에 걸리는 것이 없었어?"

"걸리는 거요?"

"반역죄는 보통 3대를 멸하는 것이 원칙이야. 하지만…… 내가 리아를 처형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카르티안이 씁쓸하게 말했다.

"전에 공작에게서 약이 동봉된 서신을 받은 적이 있어요. 원래는 버리려고 하다가 혹시 몰라 다시 챙겨 놓았었어요."

"그걸 나에게 줄 수 있어? 나는 공작을 체포하면서 리아의 무죄를 주장할 생각이야. 리아는 반역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며, 오히려 그의 계획을 알고 나서 적극적으로 나를 보호하려고 했다고."

"그 정도로 순순히 넘어갈까요? 아무리 그래도 반역인데?"

자신의 일임에도 담담한 리아의 목소리에 카르티안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리아를 지키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하며 노력하고 있는데, 정작 리아는 자신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어. 나는 황제니까. 그러니 내가 주장하면 그들도 어쩔 수 없겠지."

그나마 귀족들을 위해 이 정도의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었다.

"……그래요."

덤덤히 말은 했지만, 리아는 카르티안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단순히 반역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태도에 그가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티안."

조용한 리아의 부름에 카르티안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내가 무언가 말실수를 했을까요?"

이전의 자신이라면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의 침울한 반응 하나하나가 그녀의 감정을 건드렸다.

"아니, 아니야."

"솔직히 말해줘요."

리아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카르티안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다.

그녀가 솔직히 말하라는데 그냥 말할까 싶다가도, 그래도 될까 싶었다. 그녀가 예전보다 많이 다정해지고, 좀 더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있었지만 아직은 역시 그녀가 조심스러웠다.

리아의 말에 몇 번이나 망설이던 카르티안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냥…… 리아는 자신의 일인 데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서……. 그게 꼭 죽…… 어도 상관없다고 하는……"

차마 카르티안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죽음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크나큰 고통이었다.

"……아."

카르티안의 말에 리아는 그제서야 자신의 반응이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 알아챘다.

"티안이 생가가는 이유로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버릇인가 봐요."

이제 와 예전보다 더 많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긴 하지만, 리아 자체가 원래 모든 일에 무심한 편이었다. 모든 감정을 꾹꾹 속에 담고 숨기는 것이 익숙했다.

"어째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저도 걱정이 되는걸요."

그저 그 걱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이었다. 그 말에 카르티안은 조금 안도했다.

"그리고 세른 경을 조심해."

"아, 역시 뭔가 있긴 있죠?"

"……응. 자세한 건 아직 알아보는 중이지만."

"그래요."

카르티안이 세른을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인 리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이내, 손을 들어 카르티안의 머리를 도닥였다. 팔이 닿지 않았지만, 카르티안이 고개를 숙인 탓에 성공할 수 있었다.

"수고했어요."

리아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공작을 처리하기로 신과 거래했었으니까. 그런데 그럴 필요 없이 카르티안이 알아서 공작을 처리할 준비를 했다.

공작이 처리됨과 동시에 자신이 떠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안다면, 과연 카르티안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그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이왕이면 카르티안이 상처를 덜 받길 바랐다.

이제 진짜 곧이었다.

막연했던 시기가 성큼 다가왔다는 사실에 리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반역에 대한 일을 해결했다는 기쁨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로 인해 카르티안이 안전해지는 것은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이별의 순간은 너무 빨랐다. 아직 자신은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는데. 어떠한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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