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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축복, 그리고 선물 (123/125)

 외전 1 축복, 그리고 선물

최근 며칠 리아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원래도 식욕이 강하지 않은 편이라곤 하지만, 최근엔 더 그랬다. 배고픔을 잘 느끼지 못했고, 식사 때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하게 될 때도, 리아는 먹기 싫어하는 표정으로 꾸역꾸역 음식을 먹었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 예민해 잠이 들어도 쉽게 깨고, 오래 자지 못하는 것과 달리 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잠을 잤다.

잠을 많이 자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어쩐지 리아의 기분도 좋지 않아 보이고, 얼굴도 야윈 느낌이었다.

그 탓에 카르티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리아, 졸려?"

연신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하품을 하는 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안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게요. 유독 졸리네요."

막 식사를 해서 그렇다고 보기엔, 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식곤증을 느낄 만큼 음식을 많이 먹지도 않았고, 평소에는 식곤증 따위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리 잠이 쏟아지는지.

어째 하루의 반 이상을 잠으로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고 일어나면 개운한 것은 아니었다. 꼭 속에 뭐가 얹힌 것 처럼 불편했다.

카르티안에겐 내색하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리아가 음식을 잘 먹지못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음식 냄새만 맡으면 괜히 속이 안좋고,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을 걱정하는 카르티안을 알기에 일부러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럼 좀 자."

리아가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정한 후, 카르티안과 리아는 황제 일, 황후 일 따로 구분하지 않고서 서로의 보좌관이 되어 서로의 일을 도와주었다.

그러니 리아의 일이 남아 있다 해도 카르티안, 자신이 해주면 될 터였다.

"그럴까요……?"

평소였다면 괜찮다며 거절했을 리아였지만, 지금만은 그러지 않았다. 딱히 무리한 것도 아닌데, 요즘 몸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빈말이 아니라 숨을 쉬고 앉아 있는 것만도 벅찬 기분이었다.

"이곳은 불편할 테니, 침실에 가서자."

소파에 누워 자려고 하는 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안이 말했다.

"그래도 그건 좀……."

"괜찮아. 오늘은 일도 많지 않으니까."

설사 일이 많다고 해도 리아가 저렇게 피곤해하는데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일을 도와주느라 안 그래도 바쁜 리아인데.

유시안을 비롯한 황성의 귀족들에게서 황후 잘 만났다는 소리가 매일 같이 들려왔다.

확실히 리아가 이곳에 남아 있기로 한 후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자, 황성의 일이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줄어들었고, 일 처리도 수월해졌다.

특히나 이전에는 카르티안이 리아를 보겠다고 종종 일을 미루고 리아를 찾아간 적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일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리아가 칼같이 카르티안을 혼내며, 절대 일을 미루지 못하게 했다.

"알았어요. 오늘만 부탁할게요."

비단 오늘만의 일이 아니었지만, 리아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도 어떻게든 버티고 싶었지만, 무리였다. 이대로 일을 했다간 평소엔 하지도 않는 실수를 할 것만 같았다.

리아는 카르티안의 걱정을 뒤로하고, 침실로 향했다.

리아가 침실로 간 후, 카르티안은 리아가 걱정되어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리아의 일까지 대신해 주겠다고 해놓고, 일 처리를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리아에게 혼날 것이 분명하기에 카르티안은 애써 일을 시작했다.

카르티안이 잠시의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된 건, 유시안의 방문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소문을 듣자 하니, 요즘 들어 리아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던데.

역시 그것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 카르티안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리아가 요즘 밥도 잘 안 먹고, 잠만 자."

"혹시 몸이 아프신 건……."

확실히 그동안 무리를 했었다.

카르티안의 말에 유시안도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의원을 불러 진찰을 해봐야겠어."

이유가 무엇이든, 내내 골골거리는 리아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편치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보고서입니다."

한 달 동안 황성 내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었다. 리아가 만든 기준에 따라 작성한 보고서는 처음보는 이도 한눈에 보고서의 내용을 알 수 있을 만큼 간략하고 쉽게 작성되어 있었다.

"……그래."

"그런데 폐하."

유시안의 부름에 카르티안이 고개를 들어 유시안을 바라보았다.

"혹시…… 회임하신 건 아닐까요?"

"회임?"

"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회임하게 되면 유독 잠이 많아진다고 했었다. 새 생명을 잉태했기 때문인지 쉽게 피로함을 느낀다고 하고.

아직 입덧은 없는 것 같지만, 혹시나 싶어 유시안이 말했다.

"그럴 리가……."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아직 아기를 갖기는 이르다는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은 꼬박꼬박 피임하고 있었다.

그러니 회임을 했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약간의 기대를 담아 유시안이 말했다.

카르티안에게는 제대로 된 후계가 없었다.

오랫동안 카르티안과 리아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때문에 말이 많았지만, 카르티안과 라이의 사이가 좋아졌다는 사실을 알고 좀 뜸해졌다.

그럼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꼬박꼬박 합방도 하는 것 같은데 어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인지 대놓고 티를 내지만 않았을 뿐, 그 사실에 대해 귀족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우선 알아두지."

여기서 절대 아니라고 부정해 봤자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 추궁을 받을 것이 뻔했기에 카르티안이 가볍게 유시안의 말을 넘겼다.

                                                                      * * *                                                                       

카르티안과 리아는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사를 하는 리아의 표정은 못 먹을 것이라도 먹고있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만…… 먹을까?"

요즘 들어 잘 먹지 못하는 리아의 모습에 마음 같아선 더 많이 먹게하고 싶었지만, 저 표정을 보니 차마 더 먹으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게요. 아무래도 더는 못 먹을것 같아요."

자신 때문에 걱정을 하는 카르티안을 알고 있지만, 먹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음식을 한 입 집을 때마다 스미는 구역질을 참는 것도 힘들었다.

그냥 최근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러나 싶었지만, 그냥 잠깐 그러다말 것 같은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쯤 되니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의 상태를 말해도 걱정을 할 거고, 말하지 않아도 걱정을 할 거라면, 말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 쉬고 싶었다. 맡는 것만으로 고역인 음식을 앞에 두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피곤한 느낌이었다.

그 탓에 리아는 침실에 돌아가서 쉬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이었다.

현기증을 느낀 리아가 비틀거리다 그래도 쓰러졌다.

카르티안이 황급히 손을 뻗어 리아가 바닥에 넘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쓰러진 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안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설마…….'

자신의 음식에 꾸준히 약을 탔던 후작 일당을 비롯해, 리아를 독살하려고 했던 프레야의 행동으로 인해 카르티안은 음식이나 차를 내오기전 철저하게 검사하게 했다.

그래서 안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물론 음식에 독이 들었고, 그래서 쓰러진 거라고 생각하기엔 이르기는했다.

하지만 지난번의 경험이 카르티안으로 하여금 극심한 불안함을 느끼게 했다.

리아를 그대로 안아 침대로 향한 카르티안은 다급하게 의원을 불렀다.

카르티안의 다급한 호출에 의원이 헐레벌떡 달려와 리아를 진찰했다.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리아를 진찰하던 의원의 표정이 묘했다.

어쩐지 기뻐 보이는 것도 같았다.

"어, 어찌 된 거지?"

카르티안이 의원을 닦달하며 물었다.

"회임하셨습니다."

"회임……?"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카르티안이 되물었다.

"네. 회임하셨습니다. 다만 지금 쓰러지신 것은 그동안 충분한 기력을 보충하지 못하셨기에, 피로가 몰려 과로로 쓰러지신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리아의 몸은 그동안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기에 잔뜩 기력이 상해 있었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해 피로가 잔뜩 쌓여 있었다.

"하아. 알았네. 그럼 앞으로는 내가 어찌 해야 하지?"

설마 리아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처음 겪는 일이기에 카르티안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기쁨과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리아의 반응이 걱정되기도 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아이를 가지기로 했는데.

카르티안의 물음에 의원이 차분한 어조로 임산부에 대한 조언을 들려 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임산부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은 입덧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며 의원은 리아가 원하는 음식은 뭐든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모든 말을 경청하며, 카르티안이 복잡한 표정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리아의 배 속에 자신의 아이가 생긴 것은 정말로 기뻤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으니, 나중에라도 그녀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떠나고 싶어 해도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러나 동시에 회임으로 인해, 고생했을 리아를 생각하니 안쓰럽기도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시간이 흐르면 더 심해질 거라는 의원의 말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면, 아이의 태동으로 인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통을 호소할 거라고 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얌전한 아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리아, 아프지 마. 내가, 내가 진짜 잘해 줄게."

먹고 싶은 음식을 모두 가져다주는 것은 물론이요,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갑작스러운 회임으로인해 놀랄 리아를 다독일 수 있다면.

이왕이면 그녀의 모든 고통은 자신이 가져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가 겪을 입덧도, 시간이 흐르면 겪게 될 통증도. 그녀가 겪을 모든 불편함을.

                                                                      * * *                                                                       

침대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던 리아가 지독한 갈증과 배고픔을 느끼며 눈을 떴다.

자신은 분명 식당에서 식사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침실에 있는 건지.

언제 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몸을 뒤척이며 일으키는 리아의 행동에 리아의 손을 잡고 침대에 엎드려 있던 카르티안이 부스스 눈을 떴따.

"리아, 괜찮아?"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카르티안이 물었다.

"나,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게…… 식당에서 갑자기 쓰러졌어."

"아."

딱히 그동안 무리를 했다는 자각은 없었는데, 왜 갑자기 쓰러진 것인지.

리아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리아 한 가지 소식이 있어."

"소식이요?"

어쩐지 조심스런 카르티안의 기색에 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사실……."

영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카르티안이 머뭇거렸다.

리아의 회임 소식은 기쁜 일이지만, 리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싫어하면 어떡하지? 만약 그녀가 화를 내면 어떡하지?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 정도야 상관없지만, 임신한 몸으로 화를 내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숨길 수도 없었고, 숨겨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몇 번 망설이며 호흡을 내쉬던 카르티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와 리아의 아이가 생겼어."

"아이요? 그러니까…… 내가 임신을 했다고요?"

떨리는 리아의 음성을 느끼며 카르티안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히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카르티안의 모습을 보며 리아가 잠시 호흡을 골랐다.

임신이 싫은 건 아니었다.

리아가 이곳에 남아 있기로 한 것은 카르티안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지고 싶은 것은 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갑작스러운 건 있었다.

그동안 피임도 꼬박꼬박 한 것 같은데.

그러나 딱 한 번 피임을 한 적 없었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이 술에 취해 카르티안과 관계를 가졌을 때였다.

'그때 임신을 한 것인 건가.'

어쩐지 유시안이 축하 파티라며 술을 마시자고 했을 때, 술을 마시고 싶지 않더라니, 사실 그때부터 느끼고 있었던 건가.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카르티안의 모습을 보니,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이 화를 낼 일도 아니었다.

그저 갑작스러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과 그가 만들어낸 사랑의 결실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쩐지 최근 들어 내가 왜 그러나 했더니, 다 그래서였나 보네요."

덤덤한 리아의 반응에 카르티안이 힐끔힐끔 리아를 바라보았다.

화가 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 좋은 일에 화 안 내니까, 그리 내 눈치 볼 필요 없어요."

"좋은…… 일일까?"

"그럼 나쁜 일이에요? 설마 우리 아이인데, 왜 아이 생겼냐고 뭐라 하려는 건 아니죠?"

"아니, 절대 아니야! 난 좋아. 우리 아이잖아."

카르티안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그래요. 앞으로는 정말 조심해야겠네요."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몰랐을 땐 왜 그렇게 자신이 피곤해햐나 싶어, 은근히 자신의 일을 카르티안에게 미루는 것 같아 미안했는데, 이젠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원래 임산부는 쉬어야 했다.

아이를 배 속에 품고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안 그래도 티안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할 말?"

카르티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는데, 요즘 음식 냄새만 맡으면 구역질이 일었어요."

차마 카르티안이 걱정할까 말하지 못했던 사실을 말했다.

"미안. 난 그것도 모르고……."

그저 리아가 입맛이 없다고만 생각했을 뿐, 그랬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던 카르티안이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티안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죠. 내가 일부러 숨긴 거니까. 어쨌든 왜그런 건가 했더니, 그것도 입덧이었나 보네요."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자신이 임신이라니.

설마 자신이 아이를 가지게 될 것 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기쁘기도 했다.

신기하기도 했다. 평생 누군가와 결혼할 일도,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지게 될 일도 없지 않을까 했었는데.

이렇게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가졌으니.

물론 아쉬운 건 있었다.

자신은 카르티안과 결혼한 리아르나의 몸에 빙의한 것뿐이지, 실제로 자신이 결혼한 것은 아니었다.

"있잖아요, 티안."

그동안 자각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막상 생각하니 웨딩드레스를 입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좀 섭섭하기도 했다.

이것도 임신의 여파일까.

"여기는 리마인드 웨딩이랄까, 그런 건 없을까요?"

아주 쌩뚱 맞은 소리긴 했지만, 아이를 낳기 전에 드레스를 입어보고 싶었다.

제대로 된 결혼식을 경험하고 싶었다.

"리마인드 웨딩?"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카르티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결혼한 부부가 다시 식을 올리는 거예요."

"하고 싶어?"

"네."

리아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날을 잡아볼게."

대충 리마인드 웨딩이란 것이 뭔지 짐작한 카르티안이 말했다.

"……그래요. 그리고 티안."

"……응?"

"나 지금 갑자기 엄청 먹고 싶은 것이 있는데."

조금 전 깬 것이 무색하게 다시금 잠이 쏟아졌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지금, 리아는 딸기가 무척이나 먹고 싶었다.

그 달면서도 상큼한 과즙을 맛보고 싶었다.

한 번 딸기를 떠올리니, 딸기를 먹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생길 것 같았다.

"바로 딸기를 준비하라 이를게."

카르티안이 곧바로 시녀를 불러 딸기를 가져오라 명했다.

곧이어 시녀가 딸기를 잔뜩 들고 왔고, 딸기를 보는 리아의 눈에 빛이 났다.

지금까지 입맛이 없었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군침이 돌았다.

리아는 카르티안에게 먹어보라는 권유하는 것도 잊은 채, 다급하게 딸기를 먹었다.

리아는 순식간에 딸기를 비웠다.

"더 가져오라고 할까?"

"……음, 네."

잠시 고민하던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잔뜩 먹은 것 같지만 부족했다.

그러나 다시 시녀가 딸기를 가져왔을 때, 리아는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 * *                                                                       

리아의 회임 소식에 황성에 축하분위기가 흐르는 것과 별개로, 카르티안과 리아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지난 밤, 딸기가 먹고 싶다며 순식간에 딸기를 동낸 것이 무색하게 리아는 다시금 입맛을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입덧이 심해져, 리아는 더 이상 아무런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하다 못해 물에서 비린내가 난다며 물도 마시지 못했다.

문제는 그 입덧이 리아뿐만 아니라 카르티안에게도 찾아왔다는 사실이었다.

며칠 내내 굶을 수는 없었기에 죽이라도 먹으라며, 카르티안은 요리사에게 명해 죽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나 죽을 보자마자 리아는 헛구역지질을 했다. 동시에 카르티안 역시 구역질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저 때문에 티안도 고생이네요."

한바탕 속을 게워낸 리아가 카르티안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먹은 것이 없어 나오는 건 그저 투명한 액뿐이었다.

"난 괜찮아. 오히려 좋은걸."

리아의 고통을 함께할 수 있어.

식탐이 강하지 않은 건 카르티안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음식을 못 먹게 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건, 자신이 리아의 입덧을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가져간 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었다.

"후아, 아이를 생각하면 뭐라도 먹긴 해야 할 텐데 말이죠."

이렇게 음식을 먹지 않는 것도 아이에게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리아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전처럼 먹고 싶은 건 없을까?"

"그냥 지금은 쉬고 싶어요."

한 것이라곤 침대에 누워 있다가 식사 때가 되어 음식을 먹으려고 했을 뿐인데, 리아는 급격하게 피로해진 것을 느꼈다.

"그래, 쉬어."

편히 쉬라는 듯 카르티안은 리아를 침실로 데려다준 후, 일하기 위해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다.

그러나 리아가 자리를 떠나려는 카르티안의 옷자락을 잡았다.

"리아?"

카르티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옆에 있어주면 안 돼요?"

"……아."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같이 있어주길 바라는 리아의 모습이라니.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옷자락을 잡은 가냘픈 리아의 손가락도, 간절한 리아의 표정도 모든 것이 좋았다.

놀란 것도 잠시, 카르티안은 얌전히 리아가 누운 침대 옆에 앉았다.

그런 카르티안의 행동에 리아가 불만인 듯 인상을 찌푸렸다.

"리아……?"

혹시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싶어 카르티안이 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거기 말고요."

어째서인지, 리아는 카르티안의 품에 안겨 자고 싶었다.

그러면 정말 편안하게 잘 잘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기에 침대 옆에 앉은 카르티안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혹시 하는 마음으로 카르티안이 물었다.

"여기로 와요."

리아가 자신의 옆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카르티안은 흔쾌히 리아의 옆에 앉았다.

"거기 가만히 있어요."

카르티안이 자리를 잡자 리아가 카르티안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는 카르티안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러고 있으니, 정말로 편안했다. 잠이 솔솔 왔다.

평소 잠이 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 무색하게 리아는 순시간에 잠이 들었다.

고롱고롱하는 소리를 내며 잠든 리아의 얼굴을 카르티안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며칠 사이에 잔뜩 야윈 느낌이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카르티안이 조심스레 리아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다 뒤척이는 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안이 조심조심 리아의 가슴을 다독였다.

편히 자라는 듯.

                                                                      * * *                                                                       

리아의 상태는 어떻고, 카르티안은 어쩌고 있는 확인하기 위해 둘의 방을 방문한 유시안은 경악했다.

두 마리의 짐승이 있는 것 같았다.

누가 임산부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카르티안과 리아가 허겁지겁 과일을 먹고 있었다.

둘 가운데에는 온갖 과일이 늘어져 있었다.

이미 그동안 많은 과일을 먹었는지, 빈 접시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폐하……? 그리고 마마?"

유시안이 조심스레 둘을 불렀다.

그러나 둘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듯이 과일을 먹었다.

방해하는 순간 역적이 될 것 같아 유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둘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했다.

"……."

한참 열심히 과일을 먹어치우던 리아가 텅 비어버린 접시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나 살벌하게 접시를 바라보고 있는지, 접시가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왜 보고만 있지?"

어느새 고개를 들어 유시안을 바라보고 있던 카르티안이 닦달했다.

"네?"

"더 가져와."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는 카르티안의 모습은 리아만큼이나 초췌해져 있었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리아처럼, 카르티안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 탓에 임산부에게 먹을 것을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리아의 권유에 자신도 모르게 미친 듯이 먹어버렸던 카르티안이었다.

"아, 네."

여기서 미적거리다간 한차례 히스테리를 겪을 것 같아 유시안은 황급히 과일을 가져왔다.

유시안이 과일을 가져오자마자 리아와 카르티안은 또 한 번 먹방쇼를 보였다.

"후아."

정말 원 없이 먹은 것 같은 기분에 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괜찮아?"

카르티안이 다정한 시선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네."

한결 개운해진 기분으로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티안의 표정 역시 밝아져 있었다.

"괜히 저 때문에 티안도 고생이네요."

자신이 극심한 입덧을 앓고 있는 만큼, 카르티안도 고생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항상 자신을 배려하지 못해 안달인 카르티안이 자신과 함께 과일을 먹어치웠을까.

처음엔 그 모습도 얄미워서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도 사라졌다.

본인이 유시안 앞에서 보인 행동이 민망했는지, 얼굴이 붉어진 리아를 바라보며 카르티안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얼마나 먹는 데 집중을 한 것인지, 리아의 입가에는 과일에서 흐른 듯한 과즙이 묻어 있었다.

이런 모습도 처음이라 카르티안이 웃으며 리아의 입가에 묻은 것을 닦아주었다.

그 손가락을 조용히 바라보던 리아가 그대로 카르티안의 손을 잡고 입으로 물었다.

카르티안의 손가락에 묻은 과즙을 보니,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좀 아쉬운 것도 같고.

손가락을 감싸는 혀의 느낌에 카르티안이 놀라 어버버거렸다.

그 사소한 행동에도 묘한 흥분을 느낀 카르티안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티안, 역시 부족한 것 같아요."

이젠 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리아의 중얼거림에 유시안은 알아서 과일을 다시 가져왔다.

요 며칠 황성의 분위기가 떠들썩했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좋아진 후에도 좀처럼 회임 소식이 없어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2년여 만에 황후가 회임한 것은 물론이요, 황제가 다시 또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한 말 때문이었다.

설마 후궁을 들인다고 하는 건가 했던 귀족들은 황후의 배가 불러오기 전, 그녀와 다시금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결혼식은 한 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같은 사람과 두 번이나 결혼식을 하겠다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에 귀족들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황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만큼, 이번엔 정말 제대로 그녀와 사랑이 충만한 결혼식을 하고 싶다고 엄포했고, 결국 귀족들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홍제의 말에 따르면 리마인드 웨딩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귀족들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좋은 것은 그들로서도 좋은 소식이었기에, 얼떨떨해하면서도 황제의 말을 따라 결혼식 준비로 바빴다.

"리아!"

리아의 임신 후, 리아의 생활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 이상 집무실에와서 일하지 않고 대부분 침실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카르티안에게 맡길 수는 없어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리아도 일을 돕기는 했지만, 일하는 시간보다는 자거나 쉬는 시간이 많았다.

그 덕에 카르티안이 리아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전에는 잘 때도 같이 자고, 같은 집무실을 쓰기에 일 할 때도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못했다.

혹시나 카르티안이 일을 게을리하고 자신을 찾아올 때면 리아는 일하냐고 뭐 하냐고 카르티안을 내쫓았다.

리아는 자신으로 인해 카르티안이 일을 게을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리아 쪽에서 먼저 카르티안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 탓에 카르티안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숨길 수 없는 기쁨에 카르티안의 광대가 연신 승천하고 있었다.

"바빠요?"

어느새 리아의 배는 살짝 부어올라 있었다.

무심한 듯하지만, 그 속에 담긴 다정함에 카르티안은 언제나 그렇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하나도 안 바빠."

사실 일이 많기는 했지만,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리아의 방문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도 안 바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냥 일개 귀족도 아니고, 황제인데.

리아가 카르티안과 같이 일을 하면서 제대로 깨달을 수 있던 건, 황제의 일은 해도 해도 많다는 사실이었다.

"……아."

거짓말이 들통 날 위기에 카르티안이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뭐, 잠깐은 쉬어도 괜찮겠죠."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응응."

다행히도 혼나지 않고 넘어갔다는 사실에 카르티안은 또 한 번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리아, 무슨 일이야?"

아무 이유 없이 리아가 자신을 보러 왔다고 해도 환영이겠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카르티안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냥, 뭐……."

리아가 시선을 돌리며 애써 무심하게 말했다.

딱히 카르티안을 찾아온 이유는 없었다.

그냥 좀 보고 싶기도 했고, 아이도 아빠를 그리워하는 듯했다.

사실 그보다는 전자의 이유가 더 컸지만.

게다가 곧 카르티안과 자신이 제대로 결혼식을 올린다는 사실에 설레기도 했다.

이미 한 번 그와 결혼을 한 몸이라지만, 그건 리아르나와 카르티안의 결혼식이었지, 자신이 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을 떠나 타지에서 사는 것도 좀 섭섭하고 그런데, 여자들의 로망일 수 있는 결혼식도 하지 못하고, 웨딩드레스도 입지 못한다는 사실에 알게 모르게 섭섭하고 서운했다.

그렇다고 다른 남자 만나서 그 남자랑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카르티안 쪽에서도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겠지만, 리아 역시 그럴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리아가 익숙하게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대며 말했다.

임신한 지 한 달이 훌쩍 넘어, 이제는 사 개월 차였다.

티 나지 않았던 배도 나오고, 슬슬 허리와 등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동안 리아와 카르티안을 힘들게 했던 입덧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원래부터 입맛이 까다롭고 입이 짧았던 리아인지라, 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더 잘 먹고 있었다.

아이를 위해서도 음식을 잘 섭취하는 것이 좋다는 의원의 말 때문이라도 리아는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식사를 꼬박꼬박 챙겼다.

뭐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카르티안의 입장에서도, 그도 너무 적게 먹는 거 아니냐며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지만.

"그럼 다행이지만……."

역시 리아의 반문이 의아해 카르티안이 연신 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어째서 카르티안이 그러는지 알고 있었지만, 리아의 입장에서는 솔직하게 말하기가 좀 민망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고, 아무 이유도 없는데.

그러나 자신이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서는 저 걱정스러운 표정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별일 없어요. 그냥 좀…… 티안이 보고 싶어서……."

앞의 무심한 말과는 달리 뒤에서는 리아가 어색한 듯 말꼬리를 늘렸다.

"아."

잠시 리아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던 카르티안이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리아에게 달려들었다.

"티, 티안! 조심!"

'지금 얘가 내가 임산부라는 사실을 잊은 건가.'

달려드는 카르티안의 행동에 리아가 황급히 자신의 배를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미, 미안. 너무 기뻐서."

작게 중얼거린 카르티안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리아가 피식 웃으며, 달려오다 만 카르티안의 몸을 끌어안아주었다.

"애가 어지간히 티안을 좋아하나 보네요."

"지, 진짜?"

"네. 그냥 내 감이지만, 그런 것 같아요."

어쩌면 애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카르티안을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했다고 하지만, 역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색해 리아는 자신의 감정을 아이의 감정으로 돌려 표현했다.

"우리 아기, 진짜 예쁘겠지? 리아를 닮았으면 정말, 정말 예쁠 거야."

잔뜩 기대 어린 표정으로 카르티안이 중얼거렸다.

정말, 요즘 들어 너무 행복했다.

어느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시간이 없을 정도로.

귀찮은 귀족 회의도, 짜증나는 황제로서의 일도 리아만 보면 다 풀어졌다.

리아가 이렇게 자신의 곁에 있는데, 아무려면 어떤가 싶기도 했다.

특히나 오늘은 그중에서도 제일 행복했다.

리아의 입에서 보고 싶다는 말을 들은 것뿐 아니라, 아이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니.

그 어떤 것도 지금 이 순간만큼 행복할 수는 없을 터였다.

"티안을 닮아도 예쁠걸요?"

자신이 그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카르티안의 외모 자체도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미남 미녀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들이니, 누구를 닮든 예쁘리라.

그러나 이왕이면 자신보다는 카르티안을 닮기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만약 자신을 닮으면, 아이의 애교를 보기란 요원할 테니까.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시절의 자신을 지켜본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이답지 않은 조숙함이 있다고 했었다.

애교도 없고 무뚝뚝한 편이었는데, 아이의 시크함은 오히려 어른들에게 귀엽게 느껴질 뿐이라, 그럼에도 예쁨받기는 했지만.

"하지만 나는 리아를 닮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리아가 둘이잖아!"

'세상에, 리아가 둘이라니.'

자신이 말을 내뱉고서도 좋아서 미치겠는지, 카르티안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딱히 그게 좋은 일인지는……."

"아니야. 그건 엄청 좋은 일이야!"

카르티안이 드물게도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모습에 리아는 카르티안을 생각하면 그래, 뭐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 근데 쌍둥이일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쌍둥이?"

카르티안이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럼 리아가 셋인가?'

리아 한 명과 리아 닮은 아이 둘.

어쩐지 상상만으로도 기쁨이 몽글몽글 솟는 것 같아 카르티안이 멍하니 미소를 지었다.

"쌍둥이 낳으면 엄청 고생한다던데."

자신이 황후의 신분이라, 자신이 일일이 아이들을 돌보지 않아도 유모라는 여인이 아이를 돌봐주긴 할테지만, 전적으로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 그건 싫은데."

리아의 고생은 절대로 싫었다.

안 그래도 자신 때문에 많이 고생했던 그녀인데.

"그래도 뭐, 우리 아이니까."

상관없지 않겠냐는 듯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응."

리아의 말에 또 금세 기분이 풀린 카르티안이 리아의 품에서 부비적거렸다.

"몸은 괜찮아?"

"뭐, 괜찮아요."

사실 좀 아프긴 했다.

누워 있으면 누워 있는 대로,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대로 등과 허리에서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이 통증을 아이를 낳을 때까지 계속 겪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살짝 암담하긴 했지만.

애 낳을 때는 또 엄청 아프다던데.

'뭐, 그래도 저기 든든한 백이 있으니까.'

"그보다 결혼식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삼 일 후면 완전히 끝나."

카르티안이 볼을 수줍게 붉히며 말했다.

"그럼 우리의 결혼식은 삼 일 후가 되겠네요."

예정보다 좀 빠르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이를 가진 것을 생각하면, 최대한 빨리하는 것이 좋았다.

사실 리마인드 웨딩이라는 단어를 꺼낼 때만 해도 결혼식 준비가 이렇게까지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입덧으로 고생하고, 또 황제와 황후의 결혼식이기에 대충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의견으로 인해 둘의 결혼식은 저점 커져 준비하는 시간만 한 달이 넘어갔다.

"응."

정말 제대로, 리아와 결혼을 한다는 사실에 카르티안은 심장이 터질듯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냥 행복했다. 누가 옆에서 욕을 하고, 자신을 때려도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해도, 이 행복함에 평생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그럼 수고해요. 봤으니 난 이만 갈게요."

일해야 하는 카르티안의 시간을 너무 오래 잡고 싶지도 않았고, 하는 일이 없는데도 또 잠이 오는 것 같아 리아가 말했다.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리아를 보내주었다.

                                                                      * * *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리아와 카르티안의 결혼식이었다.

보통은 웨딩 드레스를 입기 전에 허리를 바짝 조이고, 예쁜 몸매를 보일 수 있도록 하지만, 임산부인 리아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랬기에 전체적으로 여유로운 느낌의 드레스를 입었다.

새하얀 드레스가 리아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카르티안이 리아를 위해 손수 주문 제작한 목걸이가 리아의 쇄골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리아의 머리는 단정하게 틀어 올려져, 그 머리 위에는 티아라가 걸쳐져 있었다.

티아라에는 베일이 매달려 있었고, 하늘하늘한 베일이 리아의 뒷머리와 목덜미를 가리고 있었다.

몸의 선을 그대로 선보이는 다른 드레스와 달리, A라인으로 가슴 밑에서부터는 넓게 퍼져 하늘거리고 있었다.

청순하면서도 도발적인 느낌을 풍기며 리아는 조용히 신부 화장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곁을 바론이 지키고 있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정말로 첫 결혼식을 하는 기분이네요."

리아의 입장에서는 그게 맞았지만, 어쨌든 그런 기분이 들어 리아가 드물게도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바론은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원래도 경국지색이라 불린 만큼 뛰어난 미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 화장을 하고 있으니, 자신이 모시는 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심장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았다.

"어쨌든 진짜 결혼식이네요."

리아가 설레는 마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 작은 중얼거림에도 담겨 있는 리아의 기쁨, 설렘에 바론 역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편, 카르티안의 사정은 리아와 미묘하게 달랐다.

전체적으로 절제된 느낌의 설렘이 흐르는 것에 비해 카르티안은 어쩔줄 몰라 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정말 기쁜데, 너무 좋아 죽겠는데.'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 그녀와의 결혼식을 기다리다 심장이 터져 죽어버릴 것 같았다.

설렘과 함께 자리 잡은 긴장감은 카르티안을 연신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신부보다는 준비 시간이 덜 걸리는지라, 카르티안은 진작 준비를 마쳤는데, 그 후부터 카르티안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내내 방 안을 맴돌았다.

어찌나 정신을 팔고 있는지는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못 보고 걸어 다녀서 부딪힌 것만 다섯 번이 넘어가고 있었다.

"유, 유시안."

카르티안이 힘겹게 유신안을 부르며 심장을 움켜잡았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유시안이 걱정스럽게 카르티안에게 다가갔다.

"나, 나 죽을 것 같아."

정말 죽어버릴지도.

카르티안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유시안은 어디가 안 좋은 건가 싶어 걱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거야?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는 거야? 나, 진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아니, 나 심장은 제대로 있는 걸까?"

카르티안이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그 말에 유시안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정말 저렇게 좋을까.'

그래도 걱정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사실에 유시안은 안도했다.

이내 시녀가 신부의 준비가 끝남을 알렸다.

카르티안은 애써 근엄한 표정으로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리아가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아를 본 순간, 카르티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늘 예뻤던 그녀임에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다행히도 곁에 있던 유시안이 그를 부축해 준 탓에 그러지는 않았다.

"리, 리아."

"네. 티안."

카르티안과 달리 리아가 덤덤히 그를 바라보았다.

"나, 나 아무 소리도 안 들려."

귀에서는 연신 북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만 귀와 머릿속에 맴돌아 아무 소리가 안 들렸다.

눈에는 리아만 보였다.

이 시간, 이 공간, 오롯이 자신과 리아만 있는 것 같았다.

"어서 가죠."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고 하지만, 딱히 몸에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응."

자신의 손을 선뜻 잡은 리아의 손을 바라보며 카르티안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리 긴장이 되고, 믿기지가 않는지, 제대로 걷지도 못 하고, 자신에게 끌려오다시피 하는 카르티안을 바라보며 리아가 피식 웃었다.

카르티안이 이러니까 자신도 괜히 긴장되는 것 같잖아.

그래도 좋았다. 그냥 행복했다.

영원히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그 모든 과거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리아와 카르티안은 신부와 신랑의 입장이 바뀐 모습으로 결혼식에 입장했다.

중간에는 발이 꼬여 카르티안이 넘어질 뻔했지만, 이번에는 리아가 그를 부축해 준 탓에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일 뻔한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 덕에 카르티안의 얼굴은 터질듯 붉어졌다.

하필이면 이런 날 또.

카르티안이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다.

그도 잠시, 카르티안은 신관의 말에 당당히 답했다.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심장이 스러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제 평생을 걸쳐 리아를 지켜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어쩌면 그다음 생에서까지도.

카르티안의 말에 화답하며, 리아역시 입을 열었다.

"내가 숨을 다하는 순간까지, 카르티안의 곁을 지키며 그를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카르티안의 맹세에 비하면 간결한 말이었지만, 둘이 가지고 있는 그 마음만은 같았다.

이내 주례가 둘이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공표하며, 그렇게 둘은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출산일이 다가왔다.

통상 임신 후 40주가 되면 아이를 낳는다고 하지만, 딱 출산일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기에 카르티안은 리아의 곁을 비울 수 없었다.

그래도 일은 해야만 하기에, 집무실이 아니라 침실에서 리아의 곁을 지키며 일을 했다.

언제든 리아가 진통을 호소하면, 그녀의 출산을 지키고 돌봐줄 수 있도록.

그사이, 둘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의원의 말을 통해 아이가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리아는 많이 힘들어했다.

적당히 참을 수 있을 정도의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고, 리아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런 리아를 신경 쓰느라, 카르티안 역시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가끔 아이의 태동을 느낄 때면, 정말 이 안에 내 아이가 있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리아가 힘들어할 때면 아이가 살짝 미워지기도 했다.

도대체 누굴 닮아 이렇게 엄마를 고생시키는지.

나오면 엄마 그만 고생시키고 말 좀 잘 들으라고 한 소리 해야 할 것 같았다.

특히나 아이를 낳고 난 후에도, 산모가 고생한다는 말을 들으니 더 걱정이 되었다.

자신과 리아의 아이인 만큼 많이 아껴주고 싶지만, 리아를 힘들게 하면 아무리 아이라도 미울 것 같았다.

"티, 티안."

배가 불러올수록 더 커지는 통증에 침대에서 내내 시간을 보내던 리아가 고통 어린 목소리로 카르티안을 불렀다.

그동안의 통증은 장난이었다는 듯, 이번에 그녀를 찾아온 통증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꺽꺽거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리아가 힘겹게 손을 뻗어 카르티안의 옷자락을 잡았다.

옷을 잡은 손에 얼마나 힘을 준 것인지, 힘줄이 도도도 솟아 있을 정도였다.

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안이 다급히 시녀를 불렀다.

시녀는 심상치 않은 리아의 모습에 다급히 의원과 출산 도우미를 불렀다.

리아를 진찰하던 의원은 리아의 진통이 시작됐음을 알리며 출산 준비를 했다.

보통 출산 시 남편은 자리를 비우지만, 카르티안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꿋꿋하게 자리를 남아 지켰다.

리아가 홀로 아파하게 둘 수 없었다. 자신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옆자리만은 지켜주고 싶었다.

리아는 카르티안의 옷자락을 잡은 채로 힘겨워했다.

"아악!"

웬만해선 신음 하나 잘 내지 않던 리아였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너무 아팠다.

온몸이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온몸이 당기고,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고통이 그녀의 몸을 잠식했다.

리아의 고통 어린 모습에 카르티안이 안절부절못하며 리아의 곁을 지켰다.

리아의 손에는 카르티안의 옷자락 대신 그의 손이 잡혀 있었다.

리아의 손톱이 카르티안의 손을 파고들며 생채기를 만들었지만, 카르티안은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아픔은 리아가 느끼고 있는 고통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그렇게 얼마나 낑낑거렸을까.

드디어 출산의 시작을 알렸다.

닫혀 있던 자궁의 문이 열리며, 서서히 아기가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출산 시 고통을 위해 준비된 천대신 리아는 카르티안을 잡았다.

어느새 리아는 카르티안의 머리카락을 한 웅큼 쥐고 있었다.

리아의 고통과 함께, 카르티안은 자신의 머리가 뜯어지는 고통을 느꼈지만, 리아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물론 정말 아프긴 했지만.

이내, 으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쌍둥이였기에, 아직 한 명의 아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두 번째는 비교적 수월하게 낳을 수 있었다.

아기를 받아 든 유모는 아기를 품에 안고 얼굴에 가득 묻어 있는 양수를 닦았다.

겨우 쌍둥이를 모두 낳은 리아는 헉헉거리며, 자신에게 내밀어진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기는 남녀 쌍둥이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남자 아기는 카르티안을 닮은 것 같았고, 여자 아기는 자신을 닮은 것 같았다.

아직 아기라 더 커봐야 알겠지만.

"예쁘네."

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딱 좋았다.

카르티안을 닮은 아들과 자신을 닮은 딸.

겨우 한차례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에 리아가 한숨을 돌리며 눈을 감았다.

좀 쉬고 싶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잠이 든 리아를 바라보며, 카르티안이 조심스레 리아의 얼굴을 쓸었다.

"정말 고생했어."

아이를 낳는 게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그냥 아이 따위 바라지 않는 건데.

아이보다는 리아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커 카르티안이 샐쭉하게 아기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음에 카르티안은 안도했다.

리아가 어찌나 힘들어하던지,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마음이 아팠다.

리아에게 쥐어뜯긴 머리카락이 한웅큼 뽑혀 바닥을 구르고, 그의 손을 비롯해, 팔 곳곳에 리아에게 할퀸 자국이 가득했지만, 카르티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리아 만큼이나 흐트러진 모양새인 자신의 차림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리아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카르티안은 리아를 품에 끌어안고 다독여 주었다.

                                                                      * * *                                                                       

아기 때부터 엄마와 아빠를 쏙 빼닮은 것 같은 쌍둥이는 딱 그대로 컸다.

비단 쌍둥이가 닮은 것은 부모의 외모만이 아니었다.

남자아이는 카르티안과 똑 닮은 외모에, 똑 닮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마찬가지로 리아와 똑 닮은 외모에, 똑 닮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쌍둥이치고는 서로를 닮지 않은 모양새지만, 둘 사이에는 아주 큰 공통점이 있었다.

엄마인 리아를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남자아이야 카르티안을 닮았기에 리아를 졸졸 따르는 모습이 납득이 갔지만, 여자아이는 다소 의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입장에서 리아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성격이 잘 맞기도 했고, 아버지인 카르티안은 지나치게 자신을 과보호하며 귀찮게 했기 때문이었다.

"어- 마!"

"어마마마!"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어린 나이부터 쌍둥이는 수업을 듣고 예절 교육을 받았다.

그랬기에 오후에서야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수업이 끝나자마자 쌍둥이는 늘 그렇듯이 리아를 찾아왔다.

"카른, 르나."

비교적 다정하게 쌍둥이의 이름을 부르며 리아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둘의 이름은 카르티안과 리아르나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카르티안의 앞 두 글자를 따서 카른, 리아르나의 뒤 두 글자를 따서 르나.

"에헤헤."

리아에게 달려가 품에 안긴 카른이 그저 좋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생각해 보면, 카르티안의 성격이 원래 이렇게 애교가 많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 카른은 유난히 애교가 많았다.

딱 리아 앞에서의 카르티안처럼.

그에 비해 르나는 다소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리아에게 딱 달라 붙어 있는 모습이 리아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를 알게 했다.

품에 안기지 않고 그저 옆에 얌전히 서 있는 르나를 리아가 품에 안았다.

어느새 3살이 된 아이들이라, 둘모두를 품에 안기가 힘들긴 했지만, 어느 한 아이만 품에 안고 있기는 미안했다.

르나가 어른스럽다고는 해도, 아직은 아이였으므로.

"수업은 잘 들었어?"

"응응! 카른, 칭찬 받아떠!"

카른이 자랑스레 웃으며 말했다.

"한 번만 받았으면서."

옆에서 르나가 새침하게 말했다.

"그럼 우리 르나는 얼마나 칭찬을 받았을까?"

"나는, 나는…… 매일 받았어."

카른보다는 좀 더 선명한 발음으로 르나가 무심한 척 말했다.

말투만은 담담했지만, 은근히 그 시선은 칭찬을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런 둘의 모습에 리아가 피식 웃으며, 둘의 머리를 같이 쓰다듬어주었다.

"리아."

어느새 리아의 품을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카르티안이 성큼성큼 리아에게 다가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분명 이 공간에 있는 것은 리아만이 아니라 자신도 같이 있는데, 어째서 자신은 본 척도 안 하고, 리아한테만 쪼르르 달려가는 것인지.

게다가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이들을 향한 리아의 다정한 시선이었다.

자신에게도 종종 저런 다정한 시선을 보내기는 하지만, 저 아이들을 향할 때만큼은 아니었다.

그 사실에 카르티안은 최근 들어 아이들에게 극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갑갑해요."

앞뒤로 안고, 안겨 있는 상황에 리아가 불편함을 호소했다.

"그럼 쟤들 보고 내려가라고 하면 되잖아."

카르티안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카른이랑 르나는 아기고, 티안은 성인이잖아요."

그러니 카르티안이 양보하라는 듯 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왜 나만!"

카르티안이 불만인 듯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그랬다.

자신도 리아를 안고 싶고, 리아와 함께 있고 싶은데 리아는 항상 아이들을 우선했다.

아기 때부터 리아와 떨어지면 질리도록 울어 같이 자지도 못 하게 하더니, 이제는 크고 나서도…….

"티안."

나직한 리아의 음성에 카르티안이 순순히 리아에게 떨어졌다.

그러나 불만이 얼굴 가득 묻어 있었다.

그 모습에 리아가 가볍게 혀를 차며, 손을 뻗어 카르티안을 잡아당겼다.

이내, 리아의 입술에 가볍게 카르티안의 볼에 닿았다 떨어졌다.

"리아. 더 해줘. 부족해."

카르티안이 칭얼거리듯 말했다.

그에 리아가 한 번 더 가볍게 입을 맞추려는 찰나, 끼어든 이가 있었다.

비교적 얌전하게 있던 르나가 얼굴을 들이밀며 리아의 입맞춤을 가져갔다.

"이게 뭐야!"

카르티안이 억울하다는 듯 빽 하니 소리쳤다.

"어, 어마."

카르티안의 목소리에 놀란 카른이 리아의 품에 파고들며 울먹였다.

"카른, 놀랐어?"

"응응."

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도 무서웠어."

뒤이어 르나 역시 리아의 품에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그런 아이들의 말에 리아가 카르티안을 흘겨 보았다.

애들을 상대로 설마 질투라도 하는 것인지.

빽 하니 소리를 지른 카르티안을 책했다.

그 시선에 카르티안은 한없이 억울했다.

리아도 알아야 하는데, 쟤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자신이 리아와 같이 못 있게 하려고 얼마나 어리광을 부리며 방해하는지.

그러나 말한다고 해서, 리아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저 분했다.

'왜, 쟤들만 예뻐하고.'

결국 카르티안이 잔뜩 토라진 모습으로 집무실을 팩하니 나섰다.

그러나 셋 중 누구도 카르티안을 신경 쓰지 않았다.

리아가 잠깐 카르티안을 바라보긴 했지만, 그저 이 상황이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금방 풀릴 거라 생각했던 리아의 예상과 달리, 카르티안의 삐침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우선 카르티안이 삐친 날 밤, 리아는 처음으로 카르티안과 떨어져서 잤다. 말이 떨어져서 잤다지, 정확히는 전처럼 안겨 자지 않은 것이었다.

분명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데, 평소처럼 자신을 안는 것이 아니라 등을 돌린 채로 누워 있는 카르티안을 보니 많이 삐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쌍둥이로 인해, 리아도 지친 탓에 그냥 잠에 들었다.

다음 날.

리아는 평소처럼 일을 하기 위해 집무실로 향했고, 카르티안 역시 집무실로 향했다.

둘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익숙하면서도, 불편한 침묵에 리아가 인상을 살포시 찌푸렸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그러나 카르티안이 어째서 삐친 것인지 알기에 차마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직 쌍둥이는 어렸다. 그랬기에 다 큰 카르티안보다 쌍둥이에게 더 시선이 가고 관심이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그 모든 이유가, 그 쌍둥이가 자신과 카르티안의 아이이기에 이리 애정을 쏟는 건데.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카르티안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그토록 기대하던 아이인데, 반응이 왜 저리 밍밍하나 싶었지만, 그 아이들을 낳느라 고생한 자신 때문에 아이들이 살짝 미워졌다는 말에 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카르티안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자신이었다.

오전 시간은 오롯이 둘만의 시간이었다.

오전만 지나면 수업을 끝낸 아이들이 리아를 보러 오지만, 오전만큼은 아이들의 방해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탓에 리아의 스케줄 역시 그것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급한 일들은 대부분 오전에 처리하고, 오후에는 아이들과 놀아주며, 다소 느긋하게 일을 했다.

묵묵히 일을 하던 리아의 시선이 잠깐 카르티안을 향했다.

항상 일하다 말고 자신을 힐끗 바라보던 카르티안이 오늘만은 자신을 보지 않고 조용히 일하고 있었다.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이 일은 하는 것 같은데.

"흐음."

자꾸만 신경이 쓰여 리아가 일을 하면서도 카르티안을 살폈다.

이쯤 되면 한 번이라도 시선을 마주칠 법도 한데, 카르티안은 단호하게도 서류를 향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평소라면 아무런 방해 없이 조용히 일을 할 수 있다고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특히나 카르티안이 저러는 이유가 토라짐 때문이라면.

그러나 리아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기도 했다.

아직은 부모의 품이 더 좋을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매정하게 떼어 낼 수는 없었다.

일부러 카르티안 보라는 듯, 자신에게 더 살갑게 굴며, 자신과 카르티안 사이를 방해하는 것을 알지만 뭐라 할 수 없었다.

리아가 보기엔 귀여운 아이들의 앙탈 정도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카르티안이 저리 삐친 모습을 보니, 난감하면서도 곤란했다.

어째 정말로 애 셋을 키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리아가 입을 열었다.

"티안."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그러나 카르티안은 리아를 바라보지 않았다. 못 들은 척 일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리아는 카르티안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주 잠깐ㅇ지만, 자신의 부름에 손이 멈칫했으니까.

"티안."

다시금 리아가 카르티안을 불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카르티안은 리아를 보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의 부름을 무시한 적은 없었는데.

리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살풋 찌푸렸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티안, 나 봐요."

정말 더 이상은 카르티안을 부르지 않겠다는 듯, 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끝끝내 카르티안은 리아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의 부름을 무시했다.

이쯤 되니 리아도 좀 섭섭해졌다.

카르티안이 토라진 것을 알고 달래기 위해 불렀는데, 대꾸는커녕 보지도 않으니.

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역시 일을 계속했다.

'저러다 시간이 지나면 풀리겠지. 이젠 나모 모르겠다. 이따 오후가되면 그땐 또 아이들 때문에 카르티안을 신경 써줄 수 없을 텐데.'

리아의 한숨 소리에 카르티안이 아주 조심히, 힐끗 리아를 바라보았다.

몇 번의 부름 끝에 포기한 것인지 리아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섭섭함으로 일부러 그녀의 부름을 무시했지만, 또 저렇게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니 안그래도 쌓여 있는 서러움이 더 커지는 것 같았다.

'한 번 정도는 더 불러줄 수 있잖아.'

물론 아까의 부름에서 마지막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 그 이후로 자신을 신경 쓰지 않을 줄이야.

그런 리아의 단호함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냥 섭섭했고 서운했다.

아이들이 리아만 좋아하는 것도, 리아가 아이들만 신경 쓰는 것도, 모두 다 서러웠다.

아이가 생기면, 더 이상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카르티안은 일할 때 말고는 리아와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은 항상 리아를 찾아왔고, 자기 전까지도 리아에게 붙어 있었다.

그런 셋의 모습은 다정해 보여 보기 좋은 광경이기도 했지만, 항상 그 속에 제외된 자신의 모습에 섭섭함이 몰려왔다.

일부러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돌아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도 리아를 안고, 리아에게 다정한 말을 듣고 싶었다.

아이 같은 투정일 수도 있겠지만, 너무 서러웠다.

지금도 그랬다.

만약 토라진 것이 자신이 아니라, 아이들이었으면 좀 더 다정하게 좀더 끈질기게 부르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하니, 왈칵 눈물이 손는 것 같았다.

'어째서 리아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아이를 낳지 말걸. 이렇게 겨우 가진 리아를 뺏길 바에는. 자신은 아직도 리아가 부족한데.

카르티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거렸다.

"티안?"

일하다 잠시, 카르티안을 바라보았던 리아가 그 눈속에 비치는 물방울에 놀라 카르티안을 불렀다.

카르티안은 아까보다 더 큰 섭섭함과 서러움에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아."

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카르티안에게 다가왔다.

"티안, 나 봐요."

카르티안의 책상 앞에 멈춰선 리아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잡았다. 그의 얼굴을 단단하게 잡은 리아가 그대로 카르티안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울 것만 같은 이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카르티안이 버티려고 했지만, 결국 순순히 리아의 손을 따랐다.

"울지 마요."

조심스레 카르티안의 눈가에 그렁거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리아가 다정하게 말했다.

"안…… 울어."

카르티안이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그래요. 안 울어요."

순순히 카르티안의 말에 수긍하며, 리아가 카르티안의 옆으로 가 그를 끌어안았다.

카르티안은 얌전히 리아의 품에 안겼다.

이렇게 그녀의 품에 안기는 것이 얼마 만인지.

여전히 따뜻하고 포근한 품에 애써 참은 눈물이 다시 흐를 것 같았다.

'어째서 이 품은 나만의 것이 아닐까.'

질투를 느끼는 대상이 자신의 아이라니.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정말 유치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가 그리 마음이 상했어요?"

삐쳤다거나, 토라졌다고 말하면 기분 나빠할까, 리아가 표현을 다르게 하며 물었다.

"나는 그냥……."

'리아를 나만 가지고 싶어. 나도 리아를 안고 싶어. 나도 리아의 다정한 말을 듣고 싶어. 나도 리아의 관심을 받고 싶어. 리아의 과심이 나만 향했으면 좋겠어.'

속에서 맴도는 수많은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카르티안이 우물거렸다.

"이제 싫어."

카르티안이 리아의 품에 부비적거리며 말했다.

"그거 설마 내가 싫다는 말은 아니겠죠?"

'그러면 이번엔 내가 상처받을 것 같은데.'

리아가 살포시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리아를 제일 사랑해!"

카르티안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나도 티안을 제일 사랑해요."

"진짜? 카른이나 르나보다?"

아이들 때문에 토라졌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 말들 들으니 확실했다.

지금 카르티안은 애들을 상대로 질투하고 있었다.

"네. 아이들에겐 비밀이지만."

애초에 카른과 르나를 좋아한 건, 그 아이들이 자신과 카르티안의 아기였기 때문이다.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애정을 보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리아에게도 당연히 카르티안이 더 소중했다.

누구와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소중하지 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이들 역시도, 카르티안 못지않게 아끼고 있었다.

"그런데 리아는 왜……. 애들만 좋아하고, 애들만 신경 써? 왜 나는 안지도 못 하게 하고, 나한테는 말도 안 걸어?"

카르티안이 그렁거리는 모습으로 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품에 안겨 올려다보는 모습이 정말로 아이처럼 보여 리아가 피식 웃었다.

카르티안 딴에는 심각하겠지만, 리아의 눈에는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이만큼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하기도 했다.

"아직 어리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미안해요. 너무 아이들만 신경 써서. 티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리아가 조심스레 카르티안의 머리를 도닥였다.

그 도닥임에 카르티안은 속을 가득 채웠던 서러움과 섭섭함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내가 제일 좋아? 내가 제일 소중해?"

"네. 만약 내가 카른과 르나를 더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내가 돌봐줘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뿐이에요."

애들은 크면 알아서 자신의 품을 떠나가게 될 터였다.

그때는 정말로 카르티안이 원하는 대로 그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되겠지.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줄래요? 아직은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애들이라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네요."

리아가 미안하다는 듯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도 리아가 필요해."

리아의 품에 안겨 카르티안이 칭얼거렸다.

"나한테도 티안이 필요한걸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지만, 리아는 카르티안을 위해 속에있는 말들을 솔직하게 내뱉었다.

확실히 효과는 있는 건지, 카르티안의 기분도 많이 풀어진 것 같았다.

이내 리아는 카르티안을 데리고 소파에 앉았다.

리아의 손에 끌려간 카르티안은 의도치 않게 리아의 무릎 위에 앉아버렸다.

"리아?"

"부러워하는 것 같길래?"

자신보다 덩치가 큰 이를 무릎 위에 앉히려니 불편한 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아이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을 무릎위에 앉히고 있는 모습이라니.

리아는 그대로 카르티안을 품에 안고 등을 도닥였다.

기분 풀라는 듯, 조심스러운 그 행동에 카르티안은 겨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티안."

"……응."

"아이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죠? 아이들이 미워요?"

조금 전의 말을 신경 쓰는 것인지, 리아가 물었다.

"아…… 니야. 우리 아이들이니까. 하지만 조금은 미워. 리아와 내 사이를 맨날 방해하고."

카르티안이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작게 말했다.

"그것만은 아닐 텐데?"

가장 큰 섭섭함은 그것이겠지만, 그것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음을 리아는 알았다.

"나는 싫을까? 리아만 좋은 걸까? 역시 내가 좋은 아빠가 아니라서?"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섭섭함을 토로하며 카르티안이 웅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리아가 카르티안의 머리를 쓸며 말했다.

역시 아무래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서로의 감정을 서로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할 것 같았다.

어쩌면 아이들이 유난히 자신을 따르고, 카르티안에게 거리를 느끼는 이유는, 지금 카르티안과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자신들은 안 좋아하고 엄마인 자신만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참 서로를 닮았다 싶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부분까지도 이렇게 서로를 닮았는지.

리아의 눈에는 그런 셋의 모습이 그저 사랑스럽고 귀엽게만 보였다.

아주 조금은 귀찮을 수 있겠지만.

리아는 잠시의 시간을 내 아이들을 따로 만났다. 카른과 르나는 리아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어마."

카른은 그저 좋다는 듯 리아의 품에 안겨 배시시 웃었다.

옆에서 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잡고 있는 르나의 얼굴에도 작지만 미소가 서려 있었다.

정말 보기만 해도 어여쁜 아이들이었다.

카른은 카르티안을 닮은 흑발에 리아를 닮은 청안을 가지고 있었고, 르나는 리아를 닮은 은발에 카르티안을 닮은 흑안을 가지고 있었다.

외모 역시도 카르티안과 리아를 잠아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하기야 이러니 카르티안도 아이들이 밉다 하면서도, 좋아하는 것이겠지.

"카른이랑 르나, 여기 앉아 봐요."

리아의 품에서 떨어지기 싫은지, 카른이 칭얼거렸지만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르나는 이미 소파에 앉아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있었다. 앉는 자세만 봐도 둘의 성격이 드러났다.

카른은 소파에 앉아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고, 르나는 차분했다.

카른을 볼 때마다 카르티안도 어렸을 때 저랬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감회가 새로웠다.

"카른이랑 르나는 아빠가 싫어?"

리아의 입에서 나온 아빠라는 호칭에 르나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카른 역시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러나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엄마가 더 좋아!"

옆에서 르나는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우리 카른이랑 르나가 정말 좋아."

"응응!"

"……응."

발랄한 어조의 카른의 대답과 함께 르나 역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서 아빠는 싫은 거야?"

"……."

이번의 물음에서는 둘 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둘의 대답을 리아가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아이들이 카르티안을 싫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분명 자신과 카르티안의 자식이었으니까.

"싫…… 지는 않아요."

르나가 아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또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리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좋…… 아해. 비록 엄마인 리아만 큼은 아니더라도."

수줍게 꺼낸 말에 리아가 작게 웃었다.

"그런데 왜 우리 카른이랑 르나가 아빠한테는 못되게 굴까."

카르티안은 자신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리아 역시도 카른과 르나의 심술을 알고 있었다.

카르티안 앞에서 유난히 자신에게 매달린다던가, 일부러 둘 사이를 방해하듯 끼어드는 것도.

"못되게 안 굴었어요!"

혹시나 못되게 굴었다고 하면 리아가 화낼까 싶어 카른이 억울한 듯 소리쳤다.

"응, 알아. 우리 카른이랑 르나 못되지 않은 거. 하지만 자꾸 티안 괴롭히고 있잖아."

일부러 카르티안을 보고서도 못 본척한다던가, 카르티안 앞에서 유난히 더 리아에게 매달리며 카르티안은 리아에게 못 매달리게 한다던가.

"그런…… 적 없어."

르나 역시도 뾰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티안이, 아빠가 많이 섭섭하대. 카른이랑 르나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아바마마도 우릴 싫어하잖아! 안 좋아하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아직 어린아이들이었다. 아이들에게 성인을 대하듯, 무심하고 차갑게 굴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리아는 그저 다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아바마마는 항상 어마마마한테만 미소를 지어. 우리를 보면 인상을 찌푸려. 안아주지도 않아. 어마마마만 좋아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카른과 르나를 볼 때마다 카르티안의 표정이 묘했다.

하지만 리아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카르티안으로서도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리아를 힘들게 했다는 사실에 불만스러운 마음을 가졌고 그 이후로는 그저 조심스러웠던 것뿐이었다.

너무 작아서, 이 아이들이 정말 자신과 리아의 아이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카른과 르나가 말했지. 엄마를 제일 좋아하지만, 아빠도 좋아한다고."

리아의 말에 카른과 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도 그래. 아내이기에, 엄마를 가장 좋아하지만, 우리 카른과 르나를 좋아해. 그냥 좀 티안은 어색한거야. 아빠도 아이들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기에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카른과 르나도 아빠를 좋아하듯이, 아빠도 카른과 르나를 좋아해."

"하지만……."

카른이 웅얼거렸다.

"엄마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아니."

"아니요."

"엄마는 우리 아가들이게 거짓말은 하지 않아."

그러니까 카르티안이 카른과 르나를 좋아하는 것이 사실이라는 듯, 리아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카른이랑 르나, 아빠한테도 좋아한다고 말해볼까?"

"……."

리아의 조곤조곤한 말에 카른과 르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리아가 카르티안도 너희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선뜻 믿기 힘든 탓이었다.

"그럼 한번 확인해 볼까? 정말로 아빠도 우리 카른이랑 르나를 좋아하는지? 대신 아빠가 좋아한다고 말하면, 카른이랑 르나도 아빠한테 꼭 말해줘야 해?"

"……응."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카른을 대신해 르나가 말했다.

그 대답에 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그럼 카른이랑 르나는 여기 숨어 있어. 엄마가 아빠 데리고 와서 물어볼 테니까."

카른과 르나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두 아이와의 대화를 끝낸 리아는 일을 하고 있는 카르티안을 찾았다. 그러고는 그와 함께, 조금 전까지 아이들과 함께 있던 방으로 돌아왔다.

과연 아이들이 잘 숨어 있나 확인하던 리아는 침대 위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숨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카르티안 역시도 침대 위에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런 카르티안을 향해 리아가 검지를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모른 척하라는 리아의 눈짓에 카르티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티안, 물어볼 말이 있어요."

"……뭔데?"

왠지 그 물음이 저기 숨어 있는 아이들과 관련된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카르티안이 물었다.

"티안은 카른과 르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리아의 물음에 카르티안의 시선이 리아를 향했다 잠시 침대 위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불을 덮고 몸을 숨기고 있는 아이들은 그런 카르티안의 시선을 모르겠지만.

"귀엽고 예뻐."

리아의 아이들인데 어찌 안 그러겠는가.

카르티안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 말에 잠시 침대 위에 있던 아이들이 몸을 들썩였다.

리아는 애써 모른 척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티안은 카른과 르나를 좋아해요, 싫어해요?"

"……좋아해."

"거짓말하면 혼낼 거예요. 정말로 카른과 르나를 좋아해요?"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다시 확인하기 위해 리아가 물었다.

"응. 좋아해. 싫어할 리가 없잖아. 우리들의 아이인걸."

"그러니까 아이들이 티안을 싫어한다고 하면 엄청 상처받겠다. 그쵸?"

"……응."

"티안도 카른과 르나가 티안을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응."

사실 리아의 물음에 카르티안이 답하는, 어찌 보면 수동적인 상황이었지만, 그 대답만은 진심이었다.

단지 먼저 꺼낼 기회가 없었을 뿐.

"고마워요. 우리 아이들을 좋아해줘서."

이쯤이면 충분히 아이들도 제대로 들었을 거라 생각하며 리아가 말했다.

"당연하잖아. 우리 아이들인걸."

"그래요."

카르티안의 말에 리아가 피식 웃으며 카르티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내 대화를 끝낸 카르티안은 먼저 방을 나섰고, 리아가 침대 위 이불을 들어 올리며 카른과 르나를 끌어 안았다.

굳이 들었지, 라는 물음은 건네지 않았다.

홍조를 띤 아이들의 얼굴이 이미 그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그 말에 이리 기뻐할 것을.

                                                                      * * *                                                                       

아이들과 카르티안의 진심을 확인한 후, 리아는 다소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이들과 함께 카르티안의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리아는 아이들과 카르티안이 서로의 진심을 표현하며, 잘 화해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고, 그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아직 글을 쓰는 것이 어색한 카른과 르나였지만, 리아의 도움 아래 카르티안에게 편지를 썼다.

긴 글을 쓰지 못해 '아바마마 사랑해요'라는 글이 전부인 편지였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만은 간단하지 않았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애써 예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리아와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은 카르티안의 입맛에 맞춘 쿠키와 케이크였다.

보다 정성이 담긴 선물을 준비하려하다 보니까, 그것으로 결정이 난 것이었다.

리아의 입맛에 맞추려면 달달해야 했지만, 이것은 카르티안을 위한 것이었기에, 달달함을 줄이고 최대한 담백하게 만들었다.

요리해 본 적 있다곤 하지만, 집에서 직접 쿠키나 케이크를 만든 적은 없는 리아였기에, 쿠키와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몇 번의 실패를 겪어야 했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서 시간도 오래 걸렸고, 카른과 르나도 다소 힘겨워했다.

그러나 자신들을 좋아해 주는 아버지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카른과 르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쉴까라는 리아의 말에도 카른과 르나는 괜찮다며 열심히 쿠키와 케이크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셋의 정성이 그대로 담긴 선물이었다.

물론 그러는 동안, 카르티안의 불만은 커져 갔다.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 셋이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카르티안은 알지 못했다.

그저 이제는 리아와 좀 더 오래 가까이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자 그 사실이 불만이었다.

물어봐도 대답을 해주지도 않고, 맨날 셋이서만 몰래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니, 카르티안의 입장에서는 애써 사라진 섭섭함과 서러움이 다시금 찾아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리아와 아이들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날 저녁.

리아는 아이들과 함께 방을 꾸몄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날이 될 터였다.

모처럼 넷이서 다정하게 시간을 보낼.

작은 테이블 위에는 리아와 아이들이 만든 쿠키와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카른과 르나의 손에는 카르티안을 위해 쓴 편지가 들려 있었다.

이내 문밖으로 인기척이 들렸다.

리아와 아이들이 숨을 죽이며 카르티안이 문을 열고 들어오길 기다렸다.

"아빠!"

"아바마마!"

문이 열리고 카르티안이 들어오자마자 카른과 르나가 도도도 카르티안에게 달려갔다.

잔뜩 풀죽은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던 카르티안은 자신과 리아의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셋의 모습에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미소를 지었다.

카르티안에게 안기며 카른과 르나는 정성 들여 쓴 편지를 건넸다.

"자, 이건 나와 아이들이 직접 만든 티안을 위한 간식이에요. 달지 않을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선물이라는 말에 기뻐한 것도 잠시, 쿠키와 케이크의 모습에 잠시 표정을 굳혔던 카르티안이 그 말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카른과 르나를 품에 안아본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항상 리아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에 카르티안은 더없이 풍족감을 느꼈다.

아이들을 질투한 것이 무색하게, 품에 안긴 아이들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카르티안은 아이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며 편지를 읽었다.

삐뚤삐뚤하지만 정성 들여 쓴 그 편지에 카르티안이 잠시 눈물을 글썽였다.

편지에 적혀 있는 것은 단 한 줄의 문구였다.

「아빠 사랑해요.」

그러나 아이들에게 아빠라는 호칭도, 사랑한다는 말도 들은 적 없던 카르티안은 그 간단한 문장에도 환희를 느꼈다.

게다가 자신을 위해 만든 저 간식들까지.

카르티안의 시선에 아이들의 손에 자리잡은 반창고가 보였다.

얼마나 고생했을까. 자신을 위해 저 간식들을 만드느냐고.

"뚝 하고, 먹어봐요."

리아가 손수 케이크를 떠서 카르티안의 입가에 가져갔다.

카르티안이 망설이며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정말 그 어떤 것보다 맛있었다.

그의 인생에 이렇게 맛있는 케이크는 처음이었다.

리아의 말대로 달지 않고 담백한 케이크는 자신의 입맛에 맞았고, 이것을 만드느라 고생했을 리아와 아이들을 생각하니 감격에 겨웠다.

마음에 뿌듯하게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카르티안이 단단하게 아이들을 안았다.

"아빠, 좋아해요!"

"저…… 도 좋아해요."

발랄한 카른의 음성과 함께 덤덤지만, 수줍은 르나의 말이 이어졌다.

아이들을 품에 안고서 카르티안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자신들의 아이였다. 질투하고 섭섭해하는 것이 아까울.

리아를 사랑하는 만큼, 또 그만큼 아끼는 아이들이었다.

"나도 우리 카른과 르나를 좋아해. 그리고 리아도 많이 사랑해."

서러워하고, 섭섭해하는 자신을 위해 이렇게 아이들과 선물을 준비해준 리아가 너무도 고마웠다.

이런 아내를 만날 수 있어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서 카르티안은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날 밤.

카르티안은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잠들었다.

가운데에는 카르티안과 리아가 있었고, 그 양옆에 카른과 르나가 위치했다.

네 명은 서로를 끌어안고서 달디단 잠을 청했다.

비록 그렇게 자리를 잡기까지 또 한 번의 소란이 있었지만,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

 <외전 1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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