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그녀가 질투하는 법 (124/125)

 외전 2 그녀가 질투하는 법

시간은 흘러 어느새 카른과 르나도 열 살이 넘었다.

카른은 본격적으로 황태자를 위한 수업을 들었고, 르나 역시도 황녀 수업을 들었다.

르나와 카른의 수업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카르티안은 보다 오래 리아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리아가 자신의 곁에 남아 있기로 했음에도 때때로 불안해했던 카르티안은 점차 안정되어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았다.

카르티안과 아이들 사이도 많이 좋아져, 더 이상 서로를 질투하거나 심술을 부리지 않았다.

덕분에 그 가운데 낀 리아도 편안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카르티안이나,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이는 여전히 리아인지라, 리아는 여전히 사랑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그래도 가끔 셋이 힘을 합쳐 리아를 위한 파티를 연다던가, 선물을 준비해 줄 때가 있어 리아는 더없이 행복했다.

그동안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더이상 떠나 버린 한국에 대한 그리움도 많이 옅어졌다.

이곳이 자신이 머물 곳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과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는 이곳이.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옆 나라 왕국에서 사신단을 보냈고, 그 사신단 일행 중에 왕국의 공주가 있었다.

사실 리아는 딱히 공주를 신경 쓰지 않았다. 카르티안은 엄연히 자신의 남편이었고, 설마 유부남인 것을 알고서도 카르티안을 노릴까 생각했었다.

어쨌든 명분은 친교를 위한 사신단이니, 그냥 잘 대접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그런 리아의 눈에 카르티안이 공주와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공주는 카르티안을 향한 호의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카르티안의 표정은 무심했지만,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제국은 항상 날씨가 좋네요."

카르티안과 산책하듯 황성 구경을 하던 공주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가 지내고 있는 왕국은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 탓에 날씨가 항상 추웠고, 맑은 날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제국은 흐린 날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대부분 날이 맑았다.

그녀가 지내던 왕국에 비하면 날씨도 많이 따뜻했다.

그보다 공주의 마음에 더 들어찬 건, 곁에 있는 이 황제라는 사람이었다.

황제의 외모가 뛰어나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생각 이상이었다.

30대라고 하던 황제는 과연 서른살이 넘은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젊어 보였고, 황제로서 풍기는 그 위압감은 공주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비록 자신과 그의 나이 차가 제법 많이 나긴 했지만, 이 정도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종종 자신의 자식보다 어린 여인을 비로 맞이하거나, 후로 맞이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황제에게는 이미 황후가 있다고 하지만, 황제들은 대부분 여러 명의 비나 첩을 들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황후가 될 수는 없어도, 그의 비가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묘한 기대감에 공주의 얼굴은 밝았다.

"……그렇지."

카르티안이 무심히 말했다.

카르티안이 공주를 정원에서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날이 맑은 것을 보니 산책을 하고 싶었고, 같이 산책하고 싶었던 리아는 피곤하다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탓에 어쩔 수 없이 카르티안은 혼자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우연히 공주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공주를 만났다고 해서 딱히 그녀와 함께 있거나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는데, 공주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리아가 아닌 다른 여인에게는 조금의 흥미도 없는 카르티안인지라 공주의 존재는 그저 귀찮기만 했다.

자신의 싫은 기색을 알아채고 알아서 비켜주면 참 감사할 텐데.

공주의 일행으로 보이는 기사들은 딱히 공주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런데 폐하."

귀찮아하는 카르티안의 시선이 공주를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공주가 빙긋 웃었다.

비록 황후의 외모가 뛰어나다고 하지만, 자신 역시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황후의 외모에 잠시 기가 죽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나이도 자신이 더 어렸고, 황후라는 지위 외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황후에 비해 자신에게는 공주라는 지위가 있었다.

겉모습만은 황후 역시 30살이 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 젊어 보이긴 했지만.

"황후마마 외에는 따로 비를 두시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 혹시 이유가 있으신가요?"

"황후만 있으면 되니까."

리아가 자신의 곁을 떠난다고 했을 때도, 그녀 외에 다른 여인은 싫다며 다시 황후로 누군가를 들일 생각이 없었던 카르티안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리아가 곁에 있는데, 다른 여인을 비로 들일 수야 없지 않겠는가.

"마마를 많이 아끼시나 봐요."

다소 몽롱한 표정으로 공주가 말했다.

황후만 있으면 된다는 단호한 말에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그 모습도 좋았다.

일반적으로 정략혼으로 결혼을 올리는 것이 대부분이라 자신의 아내를 좋아하는 황제도 드물었다.

보통 형식적인 관계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정략혼으로 결혼하게 된 황후를 저리 아끼는 모습이라니.

자신이 비가 되어도, 저리 아껴줄것만 같아 공주의 얼굴에 기대가 서렸다.

"내 심장을 바쳐도 아끼지 않을 만큼."

무심했던 그 표정은 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다정하게 풀어졌다.

그 모습만으로도 카르티안이 얼마나 리아를 좋아하고 있는지 알게 했다. 동시에 공주에게는 카르티안을 향한 욕심을 더욱 불태우게 했다.

"하지만 한 명의 아내만 두는 것은 아쉽지 않나요?"

황제로서 더 많은 여인을 곁에 둘 수 있을 텐데.

이왕이면 그 여인 중에 자신이 속하기를 바라며 공주가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뭐지?"

공주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부터 그녀의 속내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낼 줄을 몰랐을 뿐이지.

"아뇨, 저는 그저…… 다른 여인을 만나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

날카로워진 카르티안의 기색에 공주가 움찔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대가 간섭할 바는 아니지. 또한 황후 외에 다른 여인 따윈 만나고 싶지 않군."

지금 이렇게 다른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매우 달갑지 않았고.

안 그래도 공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런 말까지 꺼내니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이만 들어가 보지."

좋은 시간 보내라는 형식적인 말도 하지 않은 채 카르티안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우연인지 고의인지, 앞에 있던 작은 돌을 보지 못한 공주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비틀거렸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공주인지라 카르티안은 최소한의 예의로 공주의 팔을 붙잡아 넘어지지 않게 했다. 하지만 공주는 그대로 비틀거리는 척 카르티안의 품에 안겼다.

마음 같아선 바로 공주를 밀쳐 내고 싶었지만, 제국에 비해 작은 나라라고 해도 엄연히 한 나라의 공주였다.

친교를 위해 방문한 공주에게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어 카르티안이 애써 화를 억누르며, 공주를 밀어냈다.

카르티안은 싸늘한 표정으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명백한 거절과 분노에 공주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런 지조 있는 모습도 모두 탐이 났다.

                                                                      * * *                                                                       

공주와 헤어져 집무실로 돌아온 카르티안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집무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실제로 보고를 위해 집무실에 방문해 카르티안 대신 리아에게 보개를 올렸던 유시안은 잔뜩 황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카르티안이 오자마자 유시안은 황급히 인사를 올리며 집무실을 벗어났다.

"리아?"

평소와 같은 무심한 모습이었지만, 평소보다 더 서늘해 보이는 모습에 카르티안이 조심스레 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일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리아는 얌전히 유시안이 올린 보고를 읽으며 일을 했다.

평소와 같은 듯 다른 모습에 카르티안은 리아를 향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혹시 화났나?"

하난 것치고는 별다른 동요 없는 무심한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그녀의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뭐지? 그녀에게 잘못한 것이 있나.'

"리아……."

카르티안이 일부러 안쓰러운 척을 하며 리아를 불렀다.

"바쁘니까 일이나 하세요."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일이나 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평소보다 더 싸늘한 것이 확실히 리아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카르티안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날 밤 자기 위해 침대에 누운 카르티안은 멀찍히 떨어져 있는 리아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오지 마요. 안지도 말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카르티안의 행동을 알아챈 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리아, 화났어?"

카르티안이 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왜 제가 화났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그럴 만한 행동이라도 했나 보죠?"

"아니, 난 그냥 리아의 기분이 안좋아 보여서……."

카르티안이 작게 말했다.

'하.'

그 말을 들은 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은 딱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것뿐이다?

물론 카르티안이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리아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그 순간, 카르티안을 향해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리아는 참았다. 지금 입을 열면 정말 날카로운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솔직히 이 감정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카르티안은 모르겠지만, 리아는 창문 너머로 카르티안이 공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공주의 팔을 잡고, 그녀를 품에 안는 것까지.

물론 알고 있었다.

공주가 넘어지려 하기에, 그저 부축해 주려는 것뿐이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공주의 팔을 잡은 그 손이, 공주가 안긴 그 품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감정은 분명 질투이리라.

그동안 질투를 느낄 만한 일이 없어 그런 감정을 겪은 적은 처음이지만, 처음 느낀 그 질투라는 감정은 생각보다 깊었다.

이성을 중요시하는 리아도 그 질투라는 감정에, 쉽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할 정도로.

공주가 넘어질 뻔한 것이 어찌 카르티안의 잘못일까.

공주의 부축한 것이 어찌 카르티안의 잘못일까.

당연하다고, 그의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화가 났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런 감정을 그대로 카르티안에게 보이기도 민망했다.

특히나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 * *                                                                       

며칠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안과 함께 카른과 르나가 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괜히 자신 때문에 자식들마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아 리아는 애써 평소처럼 대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가 감정들을 수월하게 통제했던 과거와 다르게, 이번만은 그것이 힘들었다.

결국 카른과 르나는 조심스레 카르티안을 찾았다.

"아바마마."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리아인가 싶었던 카르티안은 카른과 르나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어째서인지 일을 방에서 하겠다며, 일거리를 들고 방으로 향했던 리아였다.

"무슨 일이지?"

리아가 아니라 실망하긴 했지만, 카른과 르나의 방문이 싫은 것은 아니었기에, 카르티안이 애써 다정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과하세요."

르나가 리아와 똑 닮은 모습으로 무심히 말했다.

"……그러니까 뭘?"

카르티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마마마가 화나셨잖아요. 분명 아바마마께서 무슨 잘못을 하신 거겠죠."

애초에 아버지가 아니면, 리아가 저렇게까지 기분 나빠할 일도 없었기에, 르나가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 말에 카르티안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리아가 절대 이유 없이 화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화가 났다면, 그건 자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하지만 카르티안도 그녀가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른다고. 어째서 리아가 화가 났는지."

"하지만 아바마마가 잘못하셨겠죠."

그것이 무엇이든.

르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카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자신이 죄인이 된 기분에 카르티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카른과 르나의 방문 이후, 카르티안이 이유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리아를 찾았다.

"무슨 일이에요?"

리아가 카르티안을 향해 무심히 물었다.

무심한 척하는 그 속에는 카르티안을 향한 미미한 화가 담겨 있었다.

"리아, 내가 리아한테 잘못한 것이 있어?"

"티안이 생각할 땐 어떤 것 같은데요?"

따지고 보면 티안이 자신한테 잘못한 것은 없었다. 잘못은 아내도 있는 남자한테 들이대고 있는 공주에게 있겠지.

그러나 리아의 화는 카르티안에게 향했다.

리아도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감정을 조절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내가 미안해."

"딱히 티안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이유도 모르는 사과는 필요 없었고, 그에게 사과를 들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사과를 하니, 더 화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리아……."

"난 괜찮으니까 가서 일이나 하세요."

요즘 들어 리아에게 일하라는 말만 계속 들는 것 같아 카르티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왜 화난 것인지 이유라도 알려주면 나을 것 같은데, 리아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히지만 리아, 화났잖아. 나 때문에 기분이 안 좋잖아."

카르티안이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화난 것도 아니고 기분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보죠."

리아가 카르티안을 향했던 시선을 돌리며 서늘하게 말했다.

그 말에 망설이던 카르티안이 힘없이 방을 나갔다.

그 모습에 리아는 울컥했다.

아무리 자신이 일이나 하라고 나가라고 했다고 해서, 또 저렇게 바로 나갈 필요는 없잖아.

카르티안 딴에는 잣니이 화가 난것 같아 왔다가, 자신의 반응이 날카로우니 배려하겠다고 그런 것이겠지만, 그런 것들도 하나같이 마음에들지 않았다.

쓸데없는 화풀이라는 사실도,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세른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질투했던 카르티안을 생각하면, 공주와의 일에 자신이 질투하는 것이 과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런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 이후로도 리아는 종종 카르티안이 공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다.

카르티안이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날 리 없으니, 공주 쪽에서 일방적으로 카르티안을 쫓아다니는 것뿐이겠지만,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스레 서류를 들고 있는 리아의 손에 힘이 들어가 서류가 구겨졌다.

이렇게까지 격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얼마 만인지.

리아는 애써 화를 다스렸다.

그러면서 유시안에게 몰래 부탁한 공주에 대한 보고를 읽었다.

예상한 그대로였다.

공주는 카르티안을 쫓아다니고, 카르티안은 관심 없다는 듯 무시하고.

단호한 카르티안의 거절에 화가 좀 풀리는 것 같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공주의 행동에 화가 났다.

카르티안은 착실하게 공주의 대시를 거절하고 있으니, 더 이상 카르티안을 탓해서도 안 되는데.

자신이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화이기에, 리아는 더더욱 카르티안에게 그런 감정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티가 나는지 카르티안도, 카른이나 르나도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겠지만.

보고를 읽은 리아는 방 밖을 지키고 있는 바론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미리 언질을 줄 게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카르티안의 끝없는 거절과 거부에도 굴하지 않고 들이대고 있는 공주니,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날 밤, 리아는 카르티안과 따로 잤다.

리아는 그대로 카르티안과 함께하는 방에서 잤지만, 카르티안은 쫓겨나 다른 방에서 자야 했다.

그리고 리아는 넌지시 다른 시녀들에게 오늘 밤, 카르티안과 자신이 따로 잔다는 사실을 알렸다.

과연 이 말을 듣고 공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만 잡으면 곱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조용한 밤.

리아가 자고 있는 침실의 문이 열렸다.

조심스러운 인기척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고, 잠시 머뭇거리던 그 인영에게서 묘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사르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그 인영이 리아가 누워 있는 침대에 다가왔다.

"폐…… 하."

열기를 담은 유혹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그 소리를 들은 리아가 조소를 지었다.

혹시나 했는데, 이런 행동이라니.

어두워서 방에 들어온 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폐하라는 부름만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카르티안이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리아가 스탠드의 불을 켜며, 이불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리아의 눈앞에는 공주가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이가 당연히 카르티안인 줄 알았던 공주는 카르티안이 아니라 리아의 모습이 보이자 당황했다.

"하, 요즘 공주께서는 참으로 당돌하시네요."

입고 있는 드레스를 벗어버리고서 속옷 차림을 하고 있는 공주를 보며 리아가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이상하지도 않았을까.

아무리 공주라고 해도 황제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어째서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은지, 어째서 아무도 말리지 않은 것인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은 것일까.

혹시나 싶어 일부러 바론에게 자리를 비키고, 누가 침실에 들어오든 말리지 않고 놔두라고 했던 리아는 공주를 향해 아주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 어째서 마마께서 폐하의 방에……."

"틀려요. 폐하의 방이 아니라, 나와 티안의 방이에요. 그러니 내가 있는 것이 문제가 되진 않겠죠."

물론 이해는 했다.

황제와 황후가 오늘 밤 따로 잔다는 말을 듣고, 당연히 이 방에 황제가 잘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덫인 줄 모르고.

"그러나 그대가 이 방에, 이 시각에 방문한 것은 문제가 되겠죠."

"황…… 후마마라고 해도 황제 폐하께서 어떤 여인을 만나든 간섭할 수는 없어요."

황후의 서늘한 시선에 겁을 먹었던 것도 잠시, 공주가 당당하게 말했다.

"아뇨. 간섭할 자격 돼요. 말 그대로 나는 황후니까요."

뭐, 더 할 말 있냐는 듯 리아가 차갑게 공주를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티안이 자신에게 약조한 것이라도 보여줄 생각이었다. 따로 서류도 작성한 약조는 앞으로 리아외에는 어떤 여자와도 가까이 지내지 않을 것이며, 혹시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황제의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아주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동시에 그 모든 일에 대한 권한을 리아에게 일임하겠다는.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허락도 없이 이 시간에 황제의 방에 방문한 것은 큰 무례라는 것을 모르나요?"

공주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게다가 그런 천박한 행동이라니."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리아는 공주의 행동에 정말로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폐하는 마마의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간섭할 생각 마세요!"

"아뇨, 내 거예요."

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 , 폐, 폐하께서 지금은 마마를 좋아한다고 하시지만, 그게 계속될 것 같은가요? 폐하께서는 결국 저를 좋아하게 되실 거예요!"

"아뇨, 그럴 리 없어요. 그럴 기회도 안 줄 거고."

말과 함께 리아가 소리를 질렀다.

리아의 소리에 바론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도 잠시, 속옷 차림의 공주를 보고 당황했다.

공주 역시, 자신의 속옷 차림을 황제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보였다는 사실에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바론, 저 여자가 나를 겁탈하려고 했어요."

'응? 여자가 여자를?'

리아의 말에 바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순순히 기사를 불러 공주를 끌고 가게 했다.

공주가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으려 방황하며,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기사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마마,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리아의 말로는 공주가 황후를 겁탈하려고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공주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황제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니, 황후를 건드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리아가 그런 말을 한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바론이 물었다.

"정확히는 티안을 노리고 온 것이겠지만, 티안은 내 것이니 나를 겁탈하려고한 거나 마찬가지죠."

비논리적인 말에도 리아는 당당했다.

바론 역시 순순히 수긍했다.

                                                                      * * *                                                                       

어젯밤 있었던 일로 공주는 그대로 쫓겨나다시피 황성을 벗어나 왕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대로 보내기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감옥에 가두거나 하기엔 마음이 불편했다.

공주가 이 황성의 어디든 머무르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황후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쓴 채 쫓겨나게 되었으니, 왕궁에서 알아서 공주에게 벌을 내릴 터였다.

그러는 조건으로 그녀를 무사히 돌려보낸 것이었다.

더불어 그녀를 무사히 돌려보낸 것에 대한 대가로, 많은 공물을 요구했으니 결론적으로는 이득이었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으로 제국에서 있었던 일로 공주는 한 달간의 근신처분을 받았고, 강제적으로 왕국의 다른 귀족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좀 과한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감히 남의 남자를 탐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후, 리아는 카르티안을 만났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응."

지난 밤 있었던 일을 들은 카르티안이 조신히 답했다.

"질투했어요."

애써 무심한 척 말했지만, 리아의 얼굴이 작게 붉어져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카르티안이 잠시 고민했다.

지금 자신이 질투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리아가 질투를 했다고?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보아온 리아를 생각하면, 그런 건 절대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설사 그런 일이 생겨도, 평소처럼 무심히 넘어가거나 단호한 모스븡로 뭐라 하는 모습만 생각했지, 이렇듯 질투했다고 솔직히 말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도 잠시, 정말로 리아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리아를 달래기 위해 카르티안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공주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어. 나에게는 리아뿐인걸."

리아가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들었던 질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마음까지 모두 터놓기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카르티안의 입장에서는 많이 억울했을 테니까.

"티안이 다른 여자와 같이 있는 것도, 대화를 나누는 것도 싫어요. 다른 여자가 티안을 보는 것도, 좋아 하는 것도 싫고. 게다가 며칠 전에는 안기까지 했잖아요."

"그건!"

마지막 말에 카르티안이 놀라 입을 열어 변명하려 했다.

"알아요. 왜 그런 건지. 그래도 싫어요. 티안은 내 것이잖아요?"

리아의 말에 카르티안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르나의 말대로 자신의 잘못이었다.

"티안이 잘못이 아닌 것도 알고, 공주 쪽에서 멋대로 그런 것이라는걸 알지만 그래도 화가 났어요. 정확히는 질투겠지만."

자신의 말에 되려 본인이 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카르티안을 향해 리아가 말했다.

"응응.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꼭 그래야 해요."

그때는 지금처럼 가볍게 넘어가지 못할 것 같으니까.

이미 한 번 질투라는 감정을 겪으니, 이제는 잘 알 것 같았다.

카르티안을 상대로 이성적이 될 수 없으며, 또 한 번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정말로 엄청 많이 화를 낼 것 같다는 사실을.

"그런데…… 정말, 질투했어?"

"묻지 마요. 대답 안 할 거니까."

다시 또 질투했다는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아 리아가 다소 뾰루퉁하게 말했다.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었지만, 결국 질투를 했다고 인정하는 그 말에 카르티안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질투를 하다니.

그녀는 절대 그런 것 안 할 줄 알았는데. 그만큼 그녀 역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 같아 카르티안은 기분이 좋았다.

"웃지 마요. 나, 아직 안 풀렸으니까."

지금 내가 질투하고 화내는 게 좋아요?

리아가 샐쭉하니 카르티안을 흘겨 보았다.

"하지만 기분 좋은걸. 리아가 나를 많이 좋아해 주는 것 같아서."

"말했잖아요. 좋아한다고."

무심한 척 말하는 리아의 목소리에는 부끄러움이 담겨 있었다.

"응응, 나도 많이 좋아해.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야. 같이 있지도 않을 거고, 말도 안 할 것이고, 보지도 않을게."

그 정도야 얼마든 할 수 있었다.

카르티안이 리아를 끌어안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그 말, 꼭 지켜요."

다음은 없으니까.

날카로운 리아의 말에도 카르티안은 그저 좋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또 잘못해서, 미안한 일을 해서 그녀가 화내는 줄 알았는데. 아니면 이제는 자신이 싫어진 것이라던가.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카르티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정말, 정말로 너무나 많이 행복했다.

 <외전 2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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