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28화 샤워
* * *
"자. 이 정도는 들 수 있지?"
진짜 정말 내가 들 수 있는 한계치까지 든 다음 남은걸 시현이에게 맡겼다.
내가 거의 한 80%정도는 든 거 같은데.. 설마 고작 20%정도도 못 들지는 않겠지.
"들 수 있겠지...?"
"아니 그걸 의문형으로 답하면 어떡해.."
"알겠어. 들어볼게. 이거 못 들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좋은 마음가짐이야."
죽는다는 마음가짐은 좀 도를 넘은게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번에 다 못들면 집까지 두번이나 왔다갔다 해야 된다는 건데..이 날씨에 그러면 진짜로 죽을수도 있다.
일사병으로.
특히 시현이는 몸이 약하기 때문에..
근데 반정도 오고난 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각해보니 햇볓에 오래 노출되는 것 보단 무리해가면서 짐 옮기는게 더 위험하지 않나..?'
에이..근데..설마 저정도 짐을 옮기는데 무리를 해야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물어봐야겠다.
"시현아..들만하지..? 못 들거 같은데 억지로 들고 가는거 아니지..?"
근데 시현이 상태가 좀 이상해보이는데..
"허억..허억..뭐..뭐라고..? 허억.."
....
음..
좀 쉬었다 가야겠군.
다행히 근처에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주는 은행이 있어서 거기로 들어갔다.
"..미안."
"아니야..태생이 약한걸 어떡하겠어.."
"그..그래도.."
.
.
.
.
.
귀엽다!
자기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되서 어쩔줄 몰라하는 시현이 귀엽다..!
사실 원래라면 나도 불쾌지수가 높아서 '하..짜증나게..그래도 뭐?' 같은 반응이 나왔어야 정상일거 같은데..
너무 귀여워서 짜증이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아..근데 아까부터 공공장소여서 애정표현을 못하겠네..
빨리 집으로 가든가 해야지.
"시현아 이제 충분히 쉬었지? 가자."
"..응."
음..근데 이거 한번에 집 갈수 있나..?
대략 반정도 오긴 했는데..
보통은 한번에 반 왔으면 나머지 반도 한번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피로는 누적된다.
분명 충분히 쉬어서 풀 컨디션이 된거 같아도 몸을 움직여보면 처음이랑 큰 차이가 난다. (경험담)
그래서 원래라면 시현이 건강을 생각해서 그냥 안전하게 중간에 한번 더 쉬는게 맞긴 한데..
그러기 싫다.. 존나 그러기 싫다..
그냥 빨리 집 들어가서 찬 물에 씻고 싶어..
아니..근데 그러다 시현이 쓰러지면 어떡하지..?
아..어뜨케..
그렇게 내가 꽤나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있자 시현이가 물어봤다.
"저기..지은아..? 뭐해..?"
"응? 아..별거 아니야. 근데 그보다..시현아. 너 여기서 집까지 한번에 갈 수 있어?"
내 질문에 시현이는 꽤나 고민하는 듯 했다.
"..아마 갈 수 있지 않을까..?"
"믿어도 돼?"
"...."
시현이가 답을 주저한다.
자기도 갈 수 있을거란 확신은 못하는것 같군.
"음..한번에 가면 나 하루동안 고양이 머리띠 쓸.."
"가자."
"게..?"
엥..내가 고양이 머리띠 쓰는 걸 보고싶은 건가..?
왜?
그냥 거울보면 나따윈 오징어로 느껴질 텐데..?
어..근데 어찌됐든 시현이는 내가 고양이 머리띠 쓰길 바라는 거겠지?
그럼..
"시현아. 대신 못가면 너가 하루동안 써야해. 어때?"
"....좋아."
그렇게 의도치 않은 내기를 하고 우린 집으로 출발했다.
결과는..시현이의 승리.
"헉..허억...내가...이긴거..맞지..? 허억..."
"어..응..너가 이겼어..축하해.."
이야..진짜 드럽게 힘들어 보이네.
분명 시현이가 승자인데 별로 부러워 보이지가 않는다.
내가 저번에 시현이 업고 와서 매우 힘들어 했을 때 시현이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뭐..어쨌든 시현이도 힘들어할테니 빨리 올라가자.
"허억..허억..드..드디어.. 다 왔다..! 허억.."
집에 도착해서 짐을 모두 내려놓은 시현이가 기쁜듯이 말했다.
물론 전혀 기뻐보이지 않지만..
"나..나 그럼..일단 씻을게.."
"잠깐만."
"응?"
"같이 씻자."
참고로 이 제안에 개인적 욕망은 없다.
나도 시현이만큼은 아니더라도 꽤나 땀을 흘려서 최대한 빨리 샤워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다만 양심적으로 시현이보다 먼저 씻는건 내가 봐도 좀 아니기 때문에..차선책으로 같이 씻는 방법을 택한 것일 뿐.
"그래..알았어."
시현이도 내 땀의 양이 보였는지 별말없이 수락했다.
"그럼 들어가자.."
그렇게 우리 둘은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아..살거같다.."
"그러게.."
우린 들어오자마자 가장 찬 물+최대 세기로 물을 튼다음 땀을 씻었다.
원래라면 차가워했겠지만.. 지금의 우리는 땀범벅인 상태였고..
그렇게 몇 분 정도, 우린 말 없이 찬 물을 만끽했다.
"시현아."
"응?"
"머리띠 하니까 생각난건데..우리..엄마한테 머리띠 씌우기로 하지 않았나..?"
"그..그렇네..?"
역시 시현이도 까먹고 있었군. 그만큼 그때 화난 엄마의 무서움이 엄청났다는 건가..
"근데..가능할까..?"
"음..현실적으로 어렵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한동안 엄마가 시현이나 나한테 너무 무른 모습만 보여주다 보니까..감을 잃었었던거 같다.
"뭐..어쨌든..시도하기 전에 알아채서 다행이지..엄마의 무서움을.."
"그렇지.."
그 뒤로 나랑 시현이는 별 의미없는 잠답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왠지 모르게 성욕이 피어올랐다.
아마 지금까진 더운걸 식히는데 중점을 뒀었는데..충분히 식혀지니까 다른것...에 눈이 가서 그런거겠지.
"시현아."
"응..?"
"키스할래?"
"ㅁ..뭐? ..멀쩡히 샤워하다말고 갑자기 뭔 소리야..!"
뭘 모르는군.
"하..시현아. 그건 아니지. '샤워하는 중에 뜬금없이'..가 아니라 '샤워하는 중이니 당연히'키스하는 거야."
"..아니 그게 왜 당연해?"
시현이가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표정중 하나.
표정 자체는 귀엽지도 예쁘지도 않긴 하지만.
저 표정이 나온다는건...
내가 개소리를 함 > 어이없음 > 시현이가 반박함 > 내가 재반박함(보통 개같은 논리 사용) > 반복 > 시현이가 포기
이 루트가 나올 거란 뜻이기 때문에.
그리고 보통 이 루트의 끝엔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지.
이번엔 그게 키스인거고.
어쨌든..그럼 이번엔 어떤 개소리로 시현이를 포기시켜볼까..
"시현아..자고로 키스는 무드라는게 중요하잖아?"
"그렇지..?"
"보통 키스하기 좋은 무드 하면..두 사람만 있어야 한다던가 하잖아?"
"그렇긴 한데...어둡거나 조용하기도 해야 되는거 아니야?"
음..확실히..여긴 오지게 밝고..샤워기 때문에 시끄럽기도 하지..
하지만..지금의 나는 개소리로 무장한 상태.
논리로 싸우면 지고싶어도 못 진다.
"아니..시현아. 백색소음이란거 들어봤지? 일정한 청각패턴 없이 전체적이고 일정한 스펙트럼을 가진 소음을 뜻하는데..그게 집중력을 향상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대. 그런데 샤워기 소리는 일정한 청각패턴이 없잖아? 사실상 백색소음이라는 소리지. 그렇다는건 샤워기 소리는 무언가를 하는데 집중력 향상을 시켜준다는 소리고 우리가 키스를 할때 방해는 커녕 오히려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밝은 형광등은 언뜻 생각해보면 키스를 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또 달라. 만약 너가 그림자도 안 비칠 정도로 어두운 곳에 갇혔다고 생각해봐. 그런 곳에서 너는 무언가를 할 수 있을거 같아?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으니 어쩔 수가 없겠지. 근데 거기에 빛 한줄기가 내린다면? 넌 정말 고마워 하겠지. 지금 이 빛도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확실히 지금 이 화장실 안은 너무 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뿐인 저 형광등을 꺼버리면 우린 아무것도 못하는 암흑 속에 갇히게 되겠지. 그런 상황에선 키스고 뭐고 하지도 못해. 그러니 지금 이 밝은 화장실은 그냥 우리의 키스를 기리기 위한 스포트라이트라고 생각해. 결혼식 같은거 할때 여러 조명이 신랑과 신부를 비추잖아? 그런 느낌인거지. 그리고 사실상 우리가 밝다고 해서 저 형광등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렇다면 그냥 차라리 저걸 길가의 태양이라고 생각하는건 어떨까? 길을 가다가 태양이 빛난다고 해서 태양을 끄려는 사람은 없잖아. 우리만 해도 오늘 엄청나게 더웠지만 그냥 꾹참고 집에 오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니까 사실상 저 형광등은 끌 수도 없고 끌 필요도 없는 우리의 키스에 도움을 주는 이로운 무드 작용제였던 거지. 알아들었어?"
내 말을 듣더니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시현이가 대답을 했다.
"어..응.."
음..시현이의 반응에 정말 엄청난 진심이 담긴거 같군.
근데 그럴만 하겠지..나도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거든..
"아..근데..열변을 토하는 사이에 성욕이 죽어버렸네.."
사실 나도 이 정도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한번 시작하니까..멈출수가 없네.
"시현아..그냥 나가자. 슬슬 다 씻었으니.."
"어..응.."
시현이는 뭔가 영혼이 나간 듯 해 보인다.
뭐야~
어차피 저런 상태면 내가 키스 하려고 해도 못했겠네~.
난 그렇게 자신의 평가가 몇단계나 내려간줄도 모른체 기뻐하며 목욕탕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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