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2부 9화 협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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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시현이가 적당히 말 좀 들어주자 지은이는 녹음했던 파일을 삭제해줬다.
원래는 절대 삭제 안해주려 했었는데 시현이가 너무 귀엽게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다나 뭐라나…
그리고 그 둘은 다시 침대에 엎어졌다.
그리고 할 일 없는 채로 꽤나 시간이 흘러갔다.
지은이는 그동안 가만히 있었지만 시현이는 유독 지루하다는 듯이 침대를 굴러다녔다.
물론 지은이는 시현이 굴러다니는 모습이 귀여워서 구경하느라 지루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러던 와중, 시현이가 구르는 것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지은아…내가 느낀건데, 지금 이러고 있는 것보단 차라리 방금 협박 당할 때가 더 재밌었던 것 같아."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다시 협박해달라고?"
"정 할게 없는 상황이면 그러기라도 해야겠지."
"그럼 협박 할 거리 만들게 웃긴 모습 or 귀여운 모습 해봐."
"아니..'정 할게 없는 상황'이라고 했잖아."
"근데 지금 '정 할게 없는 상황'이잖아."
"그..그런가?"
시현이는 현재 과도한 지루함으로 인해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아니 근데 어차피 곧 잘 시간인데 그냥 좀 참으면 안돼?"
"안돼! 오히려 곧 잘 시간이니까 지금을 재밌게 보내야지!"
"음..그런가?"
"아오 진짜! 넌 내일 쉬니까 오늘의 소중함을 모르는거야!"
굳이 따져보면 지은이가 한 짓은 '태평한 것' 뿐이었지만… 그 '태평한 것'이 시현이의 신경을 크게 거슬리게 했다.
그리고 지은이도 그걸 알았기에 일방적으로 시현이 쪽에서 화를 낸 것임에도 별 말 없이 받아줬다.
"그래 미안해. 그래서 나보고 뭘 어떡하라는 거야?"
"날 재밌게 만들어봐."
..
저것만큼 힘든 요구가 없는데…재밌게 만들라는게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를 모르겠다.
당장 떠오르는 방법은 개드립 치는 거랑 몸개그 하는 것 정도..
하지만..
개드립 > 시현: 재미 없어. 나가 죽어 > 나가 죽음
몸개그 > 쪽팔림 > 나가 죽음
어떻게 되든 내가 살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아까 말했던 대로 협박이라도 하자.
물론 아까 음성파일은 삭제하긴 했지만 내 핸드폰엔 아직 협박거리로 쓸만한 사진 or 동영상이 넘쳐 흐른다.
물론 이럴 때 쓰려고 모아둔게 아니라 나 혼자 심심할 때 보려고 모아둔 거지만..
난 일단 그 중에서 적당한 짤을 찾은 다음 시현이에게 보여줬다.
"자. 시현아 이거봐."
"응? 뭔…뭐…뭐야! 이거 언제 찍었어!"
보여준 사진은 시현이가 동물잠옷 입은 채 침흘리며 자는 사진.
보기만 해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사진이다.
본인한텐 아닌가 보지만..
"빠..빨리 지워!"
"아니 시현아. 좀 잘 생각해봐.그런다고 내가 지워주겠어?"
"큭…뭘 원하는데?"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져있는게 보였다.
본인은 숨기려는 듯 하지만…너무 뻔하다.
뭐..어쨌든 내가 한 게 틀린 선택은 아니었나 보다. 저렇게 웃는걸 보니.
하지만…이 때 내가 든 생각은 시현이를 만족시켰다는 기쁨보다는 약간의 짜증이었다.
'아니…지금 자기 주제 파악이 안되나? 아무리 자기가 원하는 상황이었다고는 해도…협박 당하는 상황인데 웃어?' 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건방짐(?) 때문에.
좋아. 절대 웃을 수 없게 해주지.
"음…시현아 그런데 좀 출출하지 않아?"
"응? 갑자기? 이제 곧 잘 시간인데?"
"이 세상에는 야식이라는 게 있잖아?"
"뭐…그렇긴 한데…그래서 진짜 야식 먹게? 살 찔 텐데…아니다. 넌 살 찌는게 맞긴 하겠다."
"맞진 않지만..야식이 먹고 싶은 건 부정할 수 없으니…가볍게 라면 하나 끓여서 먹을까?"
"뭐…그러시든가. 참고로 난 안먹을 거야."
"응. 상관 없어."
"..?"
시현이는 협박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라면을 먹겠다길래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지만…그런 의문을 가진다고 해봤자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채.
원래 요리담당은 시현이였지만 지금 하는 건 고작 라면이기도 했고시현이가 어차피 니가 먹을 건데 니가 만들라 해서 그냥 지은이가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지은이가 주방으로 들어가고 잠시 후.
라면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지은이는 완성되자 마자 시현이를 불렀다.
"시현아~ 완성됐어! 와봐!"
"아니..나 안먹는다니까?"
"알고 있어. 시킬 일이 있어서 그래."
"..?"
설마 이게 협박인가. 근데 요리를 끝낸 부엌에서 시킬 일이 뭐지?
대신 먹으라는 건 아닐 테고…그냥 얘기 상대가 되어주라는 것도 아닐텐데…
아! 설거지인가. 그거라면 납득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현이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뭐가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 채.
시현이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지은이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왜 부른 거야?"
"아…내가 이제 라면을 먹을려 하는데…"
"하는데 뭐."
"그…'맛있어지는 주문'을 부탁해."
지은이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근데 '맛있어지는 주문'이 뭐길래?
"'맛있어지는 주문'이 뭔데?"
"엥? 몰라?"
"그냥 맛있어지라고 하면 되는 거야?"
"아니…하…우리 시현이가 맛알못이었을 줄이야…이 언니는 실망이 크다…"
"아니 나보다 요리도 못하면서…그리고 누가 언니야!"
"화내지 말고 일단 이거나 봐봐."
지은이는 일단 시현이를 진정시킨 다음에 '맛있어지는 주문' 이라는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영상 속에선 귀여운 메이드가 나왔다.
이 시점에서 시현이는 뭔가 ㅈ됨을 직감했지만…그래도 일단 꾹 참고 영상을 봤다.
그리고 영상에는..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모에모에~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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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건 시현이.
"그래서…이걸 나보고 하라고?"
"응."
"미쳤어?"
"아니? 난 지금 매우 정상인데?"
"하…솔직히 너라면 하겠어? 그냥 차라리 그깟 사진 하나 가져."
"그래…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하고는 지은이는 핸드폰으로 뭔가를 조작하더니 시현이에게 보여줬다.
"이…이건!"
"그래…내가 지금까지 모았던 너의 컬렉션이야."
안에는 잠자는 사진부터 먹는 사진, 공부하는 사진, 걷는 사진 등등 수많은 시현이의 모습이 있었다.
"야 이 미친놈아!!"
"워워 화내지마. 내가 이걸 왜 보여줬겠어?"
"한번 해주면 이거 다 지우겠다고?"
"그래."
"음.."
이건 확실히 꽤나 끌리는 제안이었다.
고작 모에모에큥 한번으로저 사진들을 전부 없앨 수만 있다면..남는 장사 아닌가?
아니 근데 다른 것도 아니고 저걸 하라고?
쪽팔려 죽을 거 같을 텐데..
"아. 참고로 제대로 안하면 다시야."
저거 봐. 저렇게 말하는데 그냥 안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그렇다고 저 사진을 냅두긴 좀 그런데…
그 와중 시현이가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자 보다못한 지은이는 추가 조건을 걸었다.
"하…이러긴 싫었는데…이거 하면 내일 하루 공부 빼줄게."
"뭐?"
공부 빼준다는 소리에 바로 시현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진짜 빼준다고? 그냥?"
"그래. 난 한입으로 두 말 안해."
"좋아. 그까짓거 해주지."
그러곤 시현이가 연습하려는 듯 핸드폰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
나 이거 라면 불기 전에 먹어야 하는데…
그래도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현이가 왔다.
애초에 기껏해야 10초 정도의 영상이었으니 오히려 긴 시간이 걸리는게 이상하겠지.
어쨌든 그래서 시현이가 왔고, 시현이는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진정하려는 듯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마..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모에모에~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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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보자마자 난… 코피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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